말씀. 고후 4:7
오늘은 [성령과 권능]에 대해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온통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기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주님의 권능의 기사들이 거의 전부를 차지합니다. 사도행전에서부터는 사도들과 제자들이 이룬 성령의 권능이 거의 전부를 차지합니다.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어가면서 주의 권능으로 이루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저 놀랄 따름입니다. 시편 기자가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셨고 내가 두 번 들은 것이 이것이니 곧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는 것이라.](시62:11)는 말씀을 절감합니다. 권능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생명의 권능이든 사망의 권능이든 부활의 권능이든 어둠의 권능이든 간에 권능은 모두 주께 속한 것입니다. 주님은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고로 하나님의 권능이 곧 성령의 권능입니다.
권능이란 단지 육체적인 힘, 물리적인 힘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힘과 능력과 무엇을 할 수 있는 권리, 권한 등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능이 있습니다. 주님은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심을 수도 있고, 뽑을 수도 있습니다. 세울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할 수 있는 힘과 능력 뿐 아니라 무엇을 해도 상관없는 그런 합법적인 권한이 있습니다. 이것을 권능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연을 지배하고, 땅을 다스릴 합법적인 지위와 권능을 주셨습니다. 반대로 사탄은 죄의 권능, 사망의 권능, 어둠의 권능을 사람들에게 주어 하나님의 법을 파괴하고, 어기도록 합니다. 성령의 권능과 말씀의 권능 아래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법대로 삽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합니다. 그러나 마귀의 권능 아래 있으면 그는 죄의 소욕대로 삽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은 권능과 함께 임합니다. 복음은 복음의 권능, 부활은 부활의 권능으로 임하며, 성령은 성령의 권능으로 임합니다. 권능이 없는 단지 말뿐인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요 철학입니다. 종교와 철학은 가르침과 계명만 있을 뿐 권능이 없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라는 가르침은 있지만 거짓말을 싫어하는 마음,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주지 않습니다. 율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명령은 있지만 명령을 수행할 힘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복음의 내용을 이론이나 말이 아니라 실제 그대로 이루어 내는 능력을 줍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단지 역사적 사실로서 남의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닌 것은 십자가의 피와 죽음이 나의 죄사함, 나의 죽음으로 만드는 권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권능입니다. 말씀 역시 권능입니다. 권능이 없는 말은 그냥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능력이요 힘이요, 지혜요, 생명입니다. 권능으로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모든 종교와 차이를 나타내는 부분입니다.
현대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이것입니다. 주님을 믿지만 주님의 권능은 없고, 성령은 받았는데 성령의 권능은 없고, 말씀을 읽고 보긴 하지만 말씀의 권능이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고 믿는다고 하지만 복음의 권능을 모릅니다. 교회는 성령의 권능에 대해서 많이 설교하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 권능이 단지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는 식의 표적을 기대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이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권능도 알지 못한데서 오는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이란 무엇입니까?? 하늘을 날고 바다를 걷고 땅을 가르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이 하나님의 권능인 줄로 알면 빙산의 일각을 전부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서 알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하기를, [그분의 강력한 권능의 활동을 통하여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지극히 큰 권능이 어떤 것인지 너희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9)고 했습니다.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지극히 큰 권능”이란 어떤 것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권능은 이것입니다.
첫째,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믿는 자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이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에게로다.](롬1:16). 홍해를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반석이 갈라져 물이 터져 나오는 일 등은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이지만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권능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외적 변화가 아니라 믿는 자들 안에 일어나는 일대 변화요, 능력입니다.
둘째,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를 선포함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되기 때문이라.](고전1:18). 십자가는 지성을 자랑하던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전혀 새로운 철학도 가르침도 아니었고 신선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심오한 깊이의 학문이나 탐구해 볼만한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어리석기 그지없는 이야기에 불과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습니다. 다른 이야기는 몰라도 십자가는 입에 담기도 싫은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이란 것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가 권능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에게나 그리스인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시요, 하나님의 지혜이시니](고전1:24).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 하나님의 권능이시며, 하나님의 지혜이십니다. 우리가 성령과 권능을 받는다고 할 때 권능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권능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일하십니다. 내가 살지 않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도록 하는 것이 영적인 삶이며, 믿음의 삶입니다. 복음, 십자가, 그리스도는 성도들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권능이요, 이 권능이야 말로 사망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육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는 것들입니다.
이 셋은 믿는 자들 안에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차별이 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외모의 구분이 없습니다.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이 시대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시대입니다(딤후3:5). 이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세상 복음, 거짓 복음을 마음에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제쳐두고 영광을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성령만을 외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권능이란 말이 매우 성경적인 어휘지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권능’이란 그리스도 중심에서 벗어날 때 그들이 말하는 성령은 성령이 아니라 마귀의 영이요, 악령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권능이 성도들에게 어떻게 드러납니까? 그리스도의 권능은 우리가 약하고 죽을 때 드러납니다. 자아를 부인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자신을 십자가에 넘겨줄 때 하나님의 권능이 그 사람을 통해 완전해 집니다. 주님은 사도 바울에게 이르기를,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나의 강한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해지기 때문이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고후12:9)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 위에 하나님의 권능, 즉 성령의 권능이 늘 머물러 있게 된 것이 자신의 연약함 때문이란 주님의 말씀에 크게 기뻐하며, 연약한 것들을 부끄러워한 것이 아니라 자랑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지극히 뛰어난 권능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에게서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졌나니 이것은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며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우리 안에는 전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전기를 일으키는 발전기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타오르는 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을 일으키는 기름이 있습니다. 불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권능이 없다면 성경의 말씀은 그냥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내가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권능으로 임하지 않을 때 약간의 감화도 주지 못하며, 삶을 바꾸어 주지도 못합니다. 성경을 읽든 설교를 듣든 그냥 읽고 듣는 것이 전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할 때 말의 지혜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권능으로 전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선포할 때 어떻게 전했는가 보십시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매 큰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임하니라.](행4:33). 권능으로 선포했습니다. 단지 말의 지혜나 웅변이나 논리력으로 전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사람의 지혜의 유혹하는 말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과 권능을 실증(實證)함으로 한 것이니 이것은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권능에 있게 하려 함이라.] (고전2:4~5). 우리는 말이 아니라 성령과 권능을 실증함으로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을 보십시오. [능력 있는 표적과 이적을 통해서나 하나님의 영의 권능으로 이루신 것이니 이로써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 근방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만히 선포하였노라.](롬15:19). 성령의 권능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졌을 때 들은 사람들은 2차적인 증거나 표적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 안에 들어온 복음의 권능이 얼마나 컸던지 이들은 믿기 위해 어떤 변증이나 설득이나 논리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권능이 없을 때 사람들의 믿음은 사상누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지혜의 말을 필요로 하고, 사람들의 말과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렇게 해도 확신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권능으로 임한 복음은 누구의 반박이나 반대나 박해를 받아도 기꺼이 이겨나갑니다.
사람의 말이나 논리로 된 복음은 다른 사람의 말로 반박될 수 있고, 자기 확신은 자신의 상태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권능으로 임한 진리는 외적인 그 무엇으로도 흔들거나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권능에 대해서 간구하고, 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는 하나님의 왕국이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권능에 있기 때문이라.](고전4:20). 우리는 말로 임한 복음이 아니라 권능으로 임한 복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누구나 말로 복음을 전하는 일은 견해에 불과하지만 권능으로 전하는 복음은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복음 선포는 성령과 권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로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과 권능을 받는 것은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세 가지 하나님의 권능은 이미 믿는 신자들에게 있습니다. 믿음의 권능이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역시 모든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것들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권능을 주셨습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후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의 맨 끝 지역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주님은 성령이 임한 후에 권능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 역시 성령을 받으신 후에 권능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침례를 받을 위로부터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권능을 받은 것은 광야의 시험을 받고 난 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권능을 입고 갈릴리에 돌아오시매 그분의 명성이 주변 온 지역에 퍼지니](눅4:14). 이 구절에 대해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님께 성령님과 권능으로 기름을 부으시매 그분께서 두루 다니시며 선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억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하셨음이라.](행10:38). 성령님과 권능은 동격이 아니라 구분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라고 해서 모두 권능이 있는 성도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주신 권능을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성령을 주시는 것과 권능을 주시는 것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도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사역을 위해서 권능을 주신 예들이 있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주는 주의 거룩한 처소들 밖에서 무서운 이시니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능력과 권능을 주시는 이시니이다.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시68:35). 삼손, 기드온 등과 같은 사사들은 주의 영이 임했을 때 권능을 같이 받았습니다. 제자들은 전도 여행을 떠날 때 주님으로부터 권능을 받아서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사 부정한 영들을 대적하여 그들을 내쫓으며 온갖 질환과 온갖 질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10:1). 제자들이 받은 권능은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선교 헌금을 받아 떠난 것이 아니라 ‘권능’을 받아 떠났습니다. 이들이 받은 권능은 부정한 영들을 대적하여 내 쫓는 권능, 온갖 질환과 온갖 질병을 고치는 권능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압할 권능을 주노니 어떤 방법으로도 너희를 해칠 것이 전혀 없으리라.](눅10:19). 이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권능'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후에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다시 권능을 받습니다.
권능도 다양합니다. 믿을 때 누구나 받는 권능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받은 것입니다. [그분을 영접한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으니](요1:12). 이들은 후에 부활의 권능을 입고 부활하게 되며, 민족들을 다스릴 권능을 받아 왕과 제사장이 됩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이며, 전 성도들에게 예외 없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차별이 없습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 따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성령을 달라고 외치는 것은 참으로 황당한 기도입니다. 믿는 자 안에는 성령이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지혜, 성령의 권능, 성령의 충만을 달라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우리는 매 순간 성령의 지혜와 권능을 얻고 충만해질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주의 사역을 위해 따로 성령의 권능을 주시기를 구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구령자들이 모두 이것을 구했습니다. D.L 무디나 R.A 토레이는 구원받은 후에 복음 사역을 위해 ‘위로부터 오는 권능’을 구했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성령의 권능을 받기 전에도 시카고에서 제법 큰 교회를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저녁 기도 모임에 참석한 두 자매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목사님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 무디 목사는 “나를 위해 기도하지 말고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목사님이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고, 무디 목사님은 그 날부터 이 점에 대해 인식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을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을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몇 개월씩 구한 사람도 있고 심지어 몇 년씩 구한 사람도 있습니다. 잭 하일스 목사님은 텍사스의 작은 시골 교회에서 목회를 했는데 무능력한 목회였습니다. 단 한명의 회심자도 내지 못했습니다. 헌신하겠다고 결단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성도도 없었습니다. 그는 도저히 이런 목회를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성령의 권능’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간증에 따르면 하루에도 몇 시간씩 몇 개월을 기도했습니다. 1950년 5월 13일 그는 구원받지 못한 채 죽어 버린 아버지를 묻고 난 후 그 무덤에 엎드려 기도하다 ‘위로부터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설교를 통해 매년 만 명 이상 씩 구령하고 침례를 주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항상 “위로부터 능력을 구하라”고 가르쳤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미국은 물론이요 전 세계의 선교지로 떠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영국의 쟌 웨슬레는 1738년 10월 3일에 여러 형제들과 함께 기도하다 올더스게이트에서 성령의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전에 그는 실패한 선교사였으나 이후로는 수백만 명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위대한 영혼 구령자가 되었습니다. 찰스 피니는 단 하룻만에 성령의 능력을 받았고 미국의 영적 각성과 부흥을 주도했습니다. 사보나롤라, 조지 휫필드, 죠지 뮬러, 빌리 선데이 등 위대한 구령자들은 그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 권능을 받기를 기도했고, 그 결과 권능으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인도 선교사로 떠나던 하이드는 친구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배에서 그 편지를 뜯어서 보았는데 "Are you filled with Holy Spirit?"이란 한 줄이 적혀 있었습니다. 하이드는 친구를 향해 분노했습니다. 선교지로 떠나는 자기를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 같은 모욕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곧 이어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한가? 냉철히 생각해 본 후에 즉시 무릎을 꿇고 성령 충만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해 질 필요가 있었고,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권능을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 주의 권능, 그리스도의 권능, 성령의 권능이란 말을 계속해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성경은 “권능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시다고 말합니다. 저는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와 같은 질문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한가? 성령의 권능을 소유하고 있는가? 라고 묻고 싶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이 진리를 가리고 있습니다. 무지로 인해 부정하는 경우도 있고,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믿는 순간 성령을 받은 것이 전부이고 그 다음은 없다고 철저히 믿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순절의 교회들, 은사주의자들의 폐해를 목격한 근본주의 교회들이 더욱 그러합니다. 믿은 후에 안수나 기도나 부가적인 무엇을 통해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리도 황당하지만 믿는 성도들이 권능을 받기를 구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도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지 벌써 만 20년이 넘었지만 성령의 권능이 부족하다 또는 없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이는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못하는 말도 아니고, 구령을 못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전까지 저는 이런 진리를 그다지 심도 있게 생각해 보지 않았고, 성령의 권능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몇 개월 전부터 저와 이 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의 권능이 강력하게 임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90일 부흥 기도회를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지금도 간절히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역을 위해 ‘능력’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목사로서 교사로서 이 능력이 필요합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이것은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권능에 있게 하려 함이라.](고전2:5)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남의 주석서나 신학 책자들을 통해 배운 사람의 지혜나 교리를 결코 가르치고 싶지 않습니다. 말의 지혜로 선포하고 싶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권능과 오른손과 왼손에 든 의의 병기로 그리하며](고후6:7). 우리는 진리의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의 권능이 있어야 합니다. 권능이 없을 때 아무도 듣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의 권능을 구해야 합니다. 저절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구해야 임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와 그분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항상 그분의 얼굴을 구할지어다.](시105:4). 성경은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주와 그분의 능력”을 구하십시오. 주님은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더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눅11:13)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믿는 자녀들에게 주는 것이며, 특히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해야만 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능력을 부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지혜를 부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들을 더욱 활활 타오르게 해 주시도록 구하시고 없는 것들은 새롭게 주시도록 구하십시오. 이것이 중요합니다. 신선한 기름부음을 구하십시오.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유니콘의 뿔같이 높이시리니 내가 신선한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으리이다.](시92:10).
우리가 마귀와 싸워 이기려면 마귀의 권능보다 더 큰 권능이 필요합니다. 세상을 이기려면 세상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합니다. 죄를 이기려면 죄의 권능보다 더 큰 권능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하고자 한다면 주님의 권능을 구하십시오. 우리 자신의 힘과 지혜는 보잘 것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승리를 위해서도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은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한 마디로 ‘전능’(almighty)이란 말로 표현됩니다. 이 [권능]에 대해 알지 못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제한하고 오해하게 됩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불신하고 부정한 것은 그들이 성경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권능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권능도 알지 못하므로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막12:24). 사람은 어느 학교를 나오고, 얼마나 공부를 했든지 간에 성경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권능을 알지 못할 때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할 때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잘못하게 되고, 주님을 격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알지 못할 때 주님의 말씀을 시험하게 되며, 의심하게 되고, 불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는 또 한 가지는 성령의 권능이 임하는 것이 나를 초인적으로 만들어 주거나 영예나 높임을 받게 해 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은 우리에게 박해를 받을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성도들은 고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우리 {주}의 증거와 그분의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권능에 따라 복음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딤후1:8). 이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권능이 없습니다. 모욕과 수치를 받고, 죽을 힘이 어디서 생깁니까? 성령의 권능이 임할 때 생깁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복음의 고난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피하려 할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래서 어떤 고난이나 고통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험의 때에 박해를 받아보면 그 사람이 성령의 권능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실제적인 삶의 문제들로 나가 봅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이 크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능이 작게 보이고, 불가능해 보입니다. 주의 종들, 주의 백성들이 주의 크신 권능을 정확히 알고 믿기만 한다면 삶의 모든 문제들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삶을 사는 모든 성도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권능을 알게 하시며, 자신이 전능자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시고 믿게 하십니다. 성경에는 전능자란 말이 무려 59회나 나옵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같이 전능자 하나님을 계시 받고,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함으로써 의심과 불신을 떨쳐 버리고 믿음의 증거를 지닌 훌륭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99세의 아브람에게 나타나 자식을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이미 더 이상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몸 상태가 되어 버렸음은 아브람이나 사라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것과 방불한 그런 몸에서도 자녀를 낳을 수 있게 해 주실 능력이 있습니다. 25년 전에 아브람을 부르실 때 주신 약속의 말씀은 아브람의 몸, 나이, 환경, 건강 상태 등에 전혀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전능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였을 때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전능자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걸어 완전할지니라.](창17:1). 모든 약속의 말씀은 전능자 하나님이시기에 언제나 유효한 것이며, 확실한 것입니다. 전능자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어떤 말씀도 폐해지거나 무효화되거나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된 말씀이 없습니다. 말씀을 무효화하는 유일한 한 가지는 [불신]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제로로 만드는 것은 사람의 불신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이 현실에서 드러나게 하는 통로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처녀 마리아에게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느니라.](눅1:37)고 하셨습니다. 주님에게는 늙은 사라나 엘리사벳이나 처녀 마리아가 남자를 모른 채 아이를 낳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주님께서 어려운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주]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 있겠느냐?](창18:14a)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고백하기를, [{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주의 크신 권능과 펴신 팔로 하늘과 땅을 만드셨사오니 주께는 너무 어려워 /할 수 없는/ 일이 없나이다.](렘32:17b)라고 했습니다. 주님께는 어려운 일이 없고, 힘드신 일이 없고, 놀랄 일이 없으신 것입니다.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날들에 이 일이 이 백성 중의 남은 자들의 눈에는 놀랍게 보일지라도 내 눈에야 어찌 놀랍겠느냐?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슥8:6).
우리 주님의 증언을 들어 보십시오. 주님은 참되고 신실한 증인으로써 하나님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들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니라, 하시니라.](눅18:27). 사람들이 안 된다, 불가능하다, 길이 없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는 것들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다고 하시는 것들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불가능한 것들이 무엇입니까? 그런 것들이 나올 때마다 “하나님께는 가능한 것들”이라고 고백하고 시인하며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것이 믿음의 고백입니다. 불가능한 것들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날 때라는 생각을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신자의 삶이란 그런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일하실 때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는 항상 본래의 모습보다 훨씬 커 보이며, 점점 부풀어져서 나중에는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조차 눌러 버리며, 하나님의 권능을 초라하게 보일만큼 커 보이는 법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을 어떻게 믿고 체험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출애굽의 성도들처럼 눈에 보이는 불기둥이나 구름 기둥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이나 영광의 구름이 임하는 것도 볼 수 없습니다. 표적을 보여 주는 대언자들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하나님의 권능은 여전히 강력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믿는 자들 안에 들어오셔서 말씀을 성취하시고 기도를 응답하심으로 크신 권능을 보이십니다.
불신과 더불어 주님의 권능을 막는 것은 죄입니다. [보라, [주]의 손이 짧아져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그분의 귀가 둔하여서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사59:1). 성령의 권능을 구할 때 우리는 먼저 죄를 회개하고, 깨끗한 마음을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마음 속에 바른 동기를 가지고 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먼저 우리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시기 때문입니다. 바른 마음을 주시기를 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구할 때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늦더라도 기다리고, 더딜지라도 인내하며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 충만, 성령의 권능 등이 설교 시간에 외쳐지는 진리가 되지 않고 매 순간 경험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자, 다 같이 믿음으로 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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