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내주하시는 성령
말씀. 요14:16-17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령의 내주하심에 대한 진리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제자들은 이 땅에 그냥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하늘로부터 오셔서 그들 속에 영원히 거하실 것이란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대언자도 제사장도 아니었던 그들 속에 들어와 함께 거하시며, 속에 계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니 곧 진리의 영이시라.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나니 이는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아나니 이는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실 것임이라.] (요14:16~17). “성령께서 너희와 함께 또 너희 속에 거하실 것이다.” 인간의 몸 안으로 주님이 들어 와 영원히 사신다는 이 진리는 놀랍기 그지없는 진리입니다. 성령께서 들어오시는 일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印)치시는 것이며,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계시하시고, 중보하시며,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 몸을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집중적으로 성령님의 오심과 역할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성령은 위로자이시며,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위로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께서 오실 때에 그분께서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거하리라.] (요15:26~27). 성령은 증거자로 오십니다. 성령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증거해 주십니다. 믿고 받아 들이면 그 속에 들어와 영원히 거하십니다. 성령은 위로자이십니다. 성령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주님은 자신이 떠나고 성령이 오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니라. 이는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위로자께서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임이라. 그러나 내가 떠나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리니](요16:7). 예수님께서 떠나시지 않으면 성령은 제자들에게 오시지 않습니다. 성령은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으셔서 이 땅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머리 위나 몸 곁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시므로 우리 몸은 성령의 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3:16)고 책망을 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의 거처이시기 때문에 몸 된 성전을 거룩히 구별하라는 것입니다. 음행에 연루되지 말고, 거룩히 구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이 진리를 마음에 깊이 영접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진리를 믿을 때 진리는 권능으로 드러나며, 실제적 체험이 됩니다. 열매로 맺혀집니다. 하나님의 권능, 성령의 열매는 믿음 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실제가 되지 못합니다.

성령의 부어 주심은 이미 구약 성경에서 수차례 예언된 말씀인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역사의 현장에서 실제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주께서 위로부터 영(靈)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열매를 많이 맺는 밭이 되며 열매를 많이 맺던 밭은 숲으로 여겨지리라.](사32:15). 주님은 자신의 영을 우리 속에다 부어 주셔서 열매를 맺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성령의 부어 주심 없이 성도의 삶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님은 성령을 부어 주셔서 그 사람을 열매 맺는 인생이 되게 하십니다. 신약 성도들은 구약 성도들과 달리 성령이 일시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임하십니다. 몸을 성전으로 삼아 버리십니다. 성령의 열매, 의의 열매, 빛의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 주님은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사람이 스스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온유, 절제, 부드러움, 선함, 믿음 등 그 어느 것도 스스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성령이 부어지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형제 사랑, 아내 사랑은 물론이요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지만 성령이 없이 하는 사랑은 오직 ‘자기 사랑’ 뿐입니다. 로마서 5:5에 이르기를,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졌음이니](롬5:5)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님에 의해서 우리 마음 속에 부어지고, 그 부어진 사랑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입술을 깨물고 ‘원수를 사랑해야지’ 해 보아야 곧 위선과 가식으로 드러나고 맙니다. 주님은 “사랑하라”는 명령만 주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넓게 부어 주셨습니다.

죄악 덩어리인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전혀 불가능한 명령을 주시는 것은 인간의 개조나 개선이나 발전을 기대해서가 아닙니다. 교육 혁명이나 인간성 개조를 바라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자신의 영을 부어 주심으로 이런 일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목마른 자에게 물을 부어 주며 마른 땅에 큰 물들을 내고 내 영을 네 씨에게 내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줄 것임이니](사44:3). 이 일은 역사적으로는 오순절에 성취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취되었습니다. [그 뒤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 위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아들딸들은 대언하며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들을 보리라.](욜2:28). “그 뒤에”란 것은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를 말합니다. 이는 오순절에 베드로가 행한 설교를 통해 정확히 해석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이미 성령의 내주하심에 대한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님 역시 공생애 사역동안 이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고, 또 유대 명절에 백성들을 향해 선포하셨습니다. [그 명절의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한 것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이것은 자기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니 이는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셨으므로 /주께서/ 아직 성령님을 주시지 아니하셨음이더라.)] (요7:37~39) 이는 모두 성령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 안에 거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 수 있도록 성령님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단순한 이론이나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영적 실제입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현재적 사실이며 매 순간 언제든지 체험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성령님은 현재 믿는 자들 안에 풍성히 부어져 있습니다. [또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그 성령님을 풍성히 부어 주셨으니](딛3:6). 믿는 자들 안에 성령이 부어진 것은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할 진리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이나 사흘 만에 부활한 사실이나 승천하신 사실과 똑 같이 성령님을 부어주신 일 역시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할 진리입니다. 성령을 받는 독특한 방법이나 종교적 의식이나 율법적 의무나 행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마음에 받습니다. 달리 어떤 기계적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차 여차하여 이러 저러하면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을 때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 주시고, 성령께서는 그 사람 안에 영원히 거하시는 것입니다. 금식 기도나 자선이나 선행이나 고행이나 수련과 같이 자신을 씻어내는 어떤 종교 의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고자 하노니 너희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느냐,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받았느냐?](갈3:2). 당연히 후자입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베드로 역시 말하기를,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신 것같이 그들에게도 주사 그들에게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사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아니하셨느니라.](행15:8-9)라고 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 유대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나 이방인들이 받는 방법이나 차별이 없고, 차이가 없습니다. 성령이 마음속에 부어짐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란 증거를 얻었고 확신을 가졌습니다.

성령은 어디에 계십니까? 사람이 만든 성전에 계시지 않습니다. 건물로 만들어 놓은 교회 안에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특정 장소에 계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요,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들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자신의 생명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신성한 성품과 권능을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사 영광과 덕에 이르게 하신 분을 아는 것을 통하여 그분의 신성한 권능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나니 곧 /주께서/ 이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사 너희로 하여금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느니라.] (벧후1:3~4). 이 점이 영적 생활의 핵심입니다. 영적 생활이란 영적 생명이 있어야만 시작될 수 있으며 실현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지 않고 경건(하나님처럼)한 삶을 사는 것은 공상이 아니라 영적 망상입니다. 신성한 권능이 부어짐이 없이 능력 있는 삶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삶이란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권능, 하나님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절대로 자신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명철은 물론이요 자신에게서 나온 무엇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영적인 삶에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네게 맡긴 그 선한 것을 지키라.](딤후1:14). 영적 생활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을 얼마나 의지하는가? 그것이 열매 맺는 비결이며, 승리의 비결이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결이며, 영화롭게 하는 비결입니다. 이것은 공개된 비밀이어서 더 이상 비밀이라 불리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성도들에게 성령의 내주하심은 여전히 이론이요, 그냥 설교에서 듣는 이야기일 뿐 자신의 삶 속에서 실제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을 믿음으로 결합하고,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한 채 여전히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말하기를, “이전에 나는 죄의 짐을 지고 사느라 힘들어 지쳤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거룩의 짐을 지고 사느라 더욱 힘들고 지치노라.”고 했는데 이는 성령의 능력없이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인 고백입니다. 저 역시 그리스도인이 된 후 그리스도인의 삶을 흉내는 내고, 눈가림은 하는데 제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여러 차례 깨닫고 절망한 적이 많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있지만 감사대신 불평이 나왔고, “항상 기뻐하라”고 하지만 짜증이 난 일이 더 많았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기는 고사하고 형제들 조차도 사랑하지 못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도 아니고 전도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기도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 이것은 아니다”란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는 자신의 힘으로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하는데서 오는 현상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처럼 살 수 없다. 나는 성경의 명령대로,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 수 없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입니다. 그럼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하시며, 성령께서만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특별한 무엇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나에게 기대하는 단 한 가지는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 주라는 것입니다. 옛 생명의 죽음 없이는 새 생명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를 살게 하라는 것이 바로 영적 생활의 전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갈2:20). 이것은 성도가 도달해야 할 높은 경지나 목표가 아니라 영적 삶의 출발선이요, 기본이며, 토대입니다. 흔히 기본을 목표로 삼아서 기도하고, 금식하며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몸부림을 쳐보아야 진리는 더 멀어 보입니다. 믿음으로 취해야 할 진리, 현재 굳게 뿌리 내리고 있어야 할 진리를 먼 미래에 장차 도달해야 할 푯대인 것처럼 믿기 때문에 그의 믿음은 허황된 믿음이요, 뿌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그리스도와 함께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육신과 함께 그 애착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일은 믿을 때 능력이요, 체험이요, 열매요, 실상이 됩니다. 믿지 않으면 내게는 무관한 진리가 되고 맙니다.

만약 내 자아가 십자가에 처리되지 않았다면 나의 죄는 천만번을 용서해 받는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용서받는 그 순간에도 죄는 계속해서 생성되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비는 그 순간, 기도를 하는 그 순간, 회개를 하는 그 순간에도 죄는 쉼없이 나를 사로잡아 이끌 것이며, 죄의 열매를 맺어 냅니다. 주님은 죄를 생산해 내는 원천을 처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자아입니다. 옛 사람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해결됩니다. 죄는 용서받는 것으로 족하지 않고, 죽음으로만 해결됩니다. 죽은 자는 죄로부터 해방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다시는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로부터 해방되었음이라.] (롬6:6~7). 제가 이렇게 설교한다고 해서 “나는 죽어야지! 나를 죽여야지!” 이를 악물어봐야 이만 상합니다.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서 나를 처리하도록 자신을 양도하십시오. 주님께 위임하시면 주님은 즉시 우리를 처리해 주십니다. 주님은 나를 강탈하거나 강제로 억누르지 않으십니다. 인격적으로 자발적으로 의지적 결정으로 자신을 넘겨줄 때 즉각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의 자아를 처리해 주십니다.

나의 자아란 독립적 인격을 포기하고 주님께 의존하는 의존적 인격으로 자아의 주권 교체, 정권 교체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는 자아에 대한 경영권 포기를 의미합니다. 이제 내가 무엇을 해도 나의 영광이 없습니다. 나의 유익도 없습니다. 나의 자랑도 없습니다. 모두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자신을 양도할 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주님의 뜻대로 우리를 경영해 주시고, 다스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2). 이것이 영적 원리입니다. 조심할 것은 이 원리를 배웠다고 해서 즉각 승리와 해방이 오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승리의 비결, 십자가에서 함께 죽음 등에 대해서 책으로 읽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고, 설교를 듣기도 하면서 그 순간 깊은 은혜와 감동을 받습니다. 들을 때는 뭔가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 같다고 고백하기도 하지만 며칠이 못되어서 예전 생활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들은 다시 패배합니다. 다시 말씀을 듣고 이번에는 제대로 알고, 깨달았다고 말하고는 삶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이는 이들이 진리를 듣고 깨달은 후에 자신의 힘으로 영적인 삶을 살, 승리의 삶을 살아보려고 도전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진리를 마음으로 깨닫고 믿는 것입니다. 승리는 믿을 때 오는 것이지 알았다고 오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전쟁하는 군인이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고 오직 무기의 문제로 패배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군복에 문제가 있었다. 총에 문제가 있었다. 화약에 문제가 있었다...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면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좋은 무기를 가져도 마귀를 이길 수 없고,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는 영감과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 아무리 좋은 연장을 주고, 자본을 대어 주고, 환경을 조성해 주어도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이치입니다. 자신의 무엇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문제란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환경, 자신의 소유, 자신의 지식, 자신의 그 무엇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문제의 근원이란 사실을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죄인이란 사실을 인정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듯이 나의 자아가 문제란 사실을 인정해야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처럼 이제 주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살아 주시는 것이 영적 생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내 자신의 힘과 지혜와 능력을 발휘해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무엇으로 행하지 않으면 그는 실패자요, 패배자요, 무능력자입니다. 아무리 좋은 성경, 좋은 교리, 좋은 교회, 좋은 형제들, 좋은 환경 속에 있어도 결코 승리하지 못합니다. 내 자신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세상살이를 보십시오. [우리가 세상에서 행할 때에 단순함과 하나님께서 주신 진실함으로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였으며 또한 너희를 향하여는 더욱더 그리하였노니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또 우리 양심이 증거하는 바라.](고후1:12).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살았습니까?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무엇으로 살았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진실함,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무엇 무엇으로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사람은 교육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수행이나 고행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이 배워서, 수행을 해서, 금욕을 해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남’으로 변화된다고 말씀합니다.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접근 방법은 배우고, 노력해서 변화되고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죽음과 새롭게 태어남이 그 방법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바리새인 중에 하나인 니고데모가 나옵니다. 그는 율법에 정통하고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인정받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밤에 주님께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 무엇인가 “묻고 배울 생각”이었던지라 주님을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고,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요3:3)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무엇인가를 배워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주님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배워서, 익혀서, 행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야”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야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하고 그것을 보고, 들어가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는 율법 교육으로 되지 않고, 정치 제도의 변화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다시 태어남’으로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새로 태어나는 것이 중생(重生), 거듭남입니다. 내 안에 대대로 물려받은 아담의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마음은 황폐하고, 기쁨과 평강이 없다면 그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열심히 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야 합니다. 성경을 배우고 공부하는 것이나 기도 모임을 열심히 나오는 것이나 교회 행사에 부지런히 참여함으로서 하나님의 왕국이 임하지 않습니다. 의와 희락과 평강 속으로 들어가고 싶고 그것을 맛보고 싶다면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종교 생활이 아니라 다시 태어난 새 생명으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다시 태어남, 즉 새 생명의 탄생이 없이는 영적 생활이란 도무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영적 생활이란 영적 생활의 원리를 배워서 그대로 살아보려는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어떤 종류의 종교적 체험을 갈망함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받아들임으로 그 안에 영이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 [그분을 영접한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들이니라.] (요1:12~13). 모태로부터 내어난 것이 전부인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야’만 합니다. 종교적인 사람이든 철학적인 사람이든 단순 무식한 사람이든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방법은 예외가 없으며, 동일합니다. 세상의 권세자들이든 학자들이든 죄수들의 신분이든 육체적으로 출생하는 데는 다 똑같은 방법을 거치는 것처럼 아무리 지적인 사람이라도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데에는 가장 비천한 사람이 태어나는 방법과 동일한 방법을 거쳐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는 길은 없습니다. 신체적인 출생의 관문없이 신체적인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영적 출생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도무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해 내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영적 생활의 출발점은 ‘다시 태어남’입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시며](벧전1:3).

모든 사람의 깊은 곳에는 거룩한 성소가 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을 모셔야만 그 사람은 비로소 완전한 사람이 됩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가르침이나 교리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의식이나 율법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란 한 사람, 한 인격이 전부입니다. 내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살아 계시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성/령은 의로 인하여 생명이 되시느니라. 만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분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을 통하여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8:9~11). 여기에는 하나님의 영, 성령, 그리스도의 영이 모두 나옵니다. 이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속에 거하십니다. 생명이 되십니다. 죽을 몸도 살리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으로 우리에게 그것들을 계시하셨으니 이는 /성/령께서 참으로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도 살피시기 때문이라.] (고전2:10). 성령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십니다. 때로는 잊어버린 것들도 기억나게 하십니다.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다 기억나게 하시리라.](요14:26). 성령께서 우리 속에 거하심으로 인해 성도들은 비로소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믿는 믿음은 인간의 신념이나 종교적 교리일 뿐 참된 진리가 아닙니다. 성경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통해 아는 지식이 아니면 삶의 실제적인 변화와 능력과 열매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통해 드리는 기도가 아니면 기도가 아니라 이교도들이 하는 주문과 별 차이가 없게 됩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곧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입니다.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처소로 삼으시고 거하시고, 거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신비의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가를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게 하려 하시나니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골1:27). 주님께서 내 생명이 되셔서 살아 주시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이 진리를 말씀해 주시는 것은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 것을 믿으면 믿는대로 됩니다. 아무 것이나 믿는 것이 아니라 계시된 말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입니다. 성령께서는 주님이 행하신 일, 완성된 사역을 기초로 우리가 믿을 때 그 믿음대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은 단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받을 수 있는 통로요, 그릇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법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중재적 사역을 통해 매순간 순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쉐퍼).

성령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죄와 죄의 권능의 속박에서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주십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설교를 듣고 말씀을 배울 때 이것은 기계적인 방법론이 아니라 인격적인 원리라는 것입니다. 기계적인 방법은 우리 편에서 체계를 세워서 무엇을 이루는 것이지만 인격적인 원리란 믿음과 순종이란 인격적 관계성 속에서만 그 원리가 능력과 열매와 실체로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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