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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Pastor. Yoon


온유란 무엇인가?

구약의 대언자 모세, 신약의 그리스도는 온유의 본이셨다.
온유는 우리가 보여 주어야 할 것이며,
성령의 열매이다. 



성도들이 세상에 가져야할 3비 원칙이 있다.
비타협,비일치, 비동조. 여기에 더하여 '분리'
성도들의 이런 자세는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적대감을 갖게도 한다.
세상 사람들 뿐 아니라 같은 크리스천들에게도 거부감을 일으키며, '지혜롭게' 하라는 권면과 충고를 받는다.
'지혜롭게, 온유하게, 부드럽게, 사랑으로'란 말은 참으로 위대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오용되는 진리이다. 지혜, 온유, 부드러움, 선함, 사랑 등은 모두 내적인 것이요, 영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투, 자세, 태도, 매너, 예절 등의 외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온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온유해야 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바로 잡아줄 때 온유해야 하고(갈6:2),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온유함으로 일깨워주어야 한다(딤후2:25).
형제들 관계에서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엡4:2,골3:12).
우리는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어야 하며(딛3:2),
온유함으로 선한 행실에서 나오는 행위로 나타내 보여야 한다(약3:13).

모세는 온유했고(민12:3), 주님은 온유하셨다(마11:28, 21:5). 
성도라면 누구나 온유의 영을 지녀야 한다.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특히 자매들은 '온유하고 조용한 영(靈)의 장식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벧전3:4).

온유란 무엇인가?

온유는 타고난 성격, 예절, 품성, 매너가 아니다.
온유는 교육의 부산물이 아니다. 가정 환경, 생활 환경의 산물도 아니다.
온유란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는 표면적 현상이 아니다.
온유란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고 비위나 기분을 맞추는 기술이 아니다.

바울은 온유의 영으로 진리를 선포했지만 세상을 뒤집어 엎는 자요, 소란케 하는 자요,
이 세상에 살만한 가치가 없는 자란 말을 들었고 실제로 그런 대접을 받았다.
온유는 사람들이나 세상에서 trouble을 일으키지 않고, 좋은 평판을 받기 위한 처세술이 아니다.

온유란 성령의 열매이다(갈5:23).
고로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그 마음 속에 맺을 수 있는 열매이다.

온유는 외적 자세, 어투, 행동 양식 등 외적으로 보여지는 현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매질을 해도 사랑으로 할 수 있고, 꾸짖고 책망할 떄도 사랑으로 행할 수 있듯이
거친 말, 바른 말, 심지어 비판과 욕설을 할 때도 온유함으로 할 수 있다.
핵심은 내 속, 내 마음 안에 온유가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이다.
부드럽게 말하지만 독설이 있고, 온유하게 말하지만 거친 것도 있다.
진리는 늘 단순하고, 쓰고, 거칠게 들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주의하자.
사랑없는 매질이 폭력이듯, 온유없는 거친 말은 욕설과 무례일 수 밖에 없다.
내 안에 '온유'가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핵심이다.
선함, 부드러움, 온유'는 내적인 것이요, 영적인 것이요,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이다.

문제는 이것들이 어떻게 보여지는가? 문제이다.
야고보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고 외쳤는데, 온유함 역시 "보일지니라"고 말한다. 바울 역시 그러하다.
성경은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말다툼하는 자가 되지 말며 오직 부드러우며 모든 사람에게 온전히 온유함을 보이게 하라.'(딛3:2)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믿음을 '행위'로 보여 주어야 하듯, '온유함' 역시 '보이게' 해야 한다. '너희 중에 지혜와 지식을 갖춘 자가 누구냐? 그는 지혜의 온유함으로 선한 생활에서 나오는 행위들을 보일지니라.'(약3:13). 온유함을 속에 가지고만 있는 것은 쉽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성경은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을 보여 주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서신이다. 고로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말씀을 읽을 수 있고,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을 보여 주는 것, 그것이 성도들의 책무이다.
선한 행위로, 일로, 빛으로, 열매로, 향기로...그 무엇인가로 볼 수 있도록 해 주라는 것이다.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을 보여 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분은 속에 온유함이 있는가?
부드러운 말과 유창한 언변은 거짓말쟁이나 위선자들도 잘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변별력이 없다.

온유함을 가진 자의 특징은...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세에 있다(약1:21).
온유한 자는 진리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는 자이다.
'....접붙여진 말씀 곧 능히 너희 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1:21). 사람들에게는 부드럽지만 말씀 앞에 완악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의 바르게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은 온유한 자들이 아니라 완악한 자들이다. 말씀에 대한 수용성이야 말로 온유함에 대한 척도이다. 점잖은 노신사는 복음을 거절하고, 천박한 무뢰한은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누가 온유한 자인가? 생각해 보라.

둘째, 누구에게 배우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온유한 자는 주님께 와서 주께 배우는 자이다(마11:29). 완악한 자들은 세상의 대가들을 찾아서 배우는데는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지만 주께 와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온유한 자는 무엇이든지 주님께 와서 주님께 배우려고 한다. 유유상종. 온유한 자는 온유하신 주님께 끌리는 법이다. 세상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예의바르고 겸손하지만 주님을 거부하는 자들은 전혀 온유한 자들이 아니다.

셋째, 자신이 해를 입을 때, 상처를 입을 때 누군가에게 당할 때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온유한 자는 자신의 기분, 자존심이 상하고 다치는 것에 개의치 않고 즉각 반응하지 않는다. 남에게 자아가 받는 비난, 모독, 오해, 수치, 욕설, 심지어 죽이려 하는 것까지도 기쁨으로 받아 들인다. 완악한 자는 이를 갈거나 복수를 다짐하는 일들에 대해서 온유한 자는 도리어 자신을 성찰하며 수용한다. 자신에 대해서는 무반응이다. 오해를 풀겠다고 설득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조급해 하거나 분해 하지 않는다. 대신 진리가 상하고, 하나님이 모독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질투의 불길이 치솟고 꺼지지 않는 분노를 발한다. 완악한 자들은 자신이 상하는 것, 자신이 당하는 것, 자신이 입은 손실에 대해서는 민감하지만 하나님, 교회, 진리 등이 입는 손실, 손해, 모독에 대해서는 무덤덤하다. 이보다 더 흔하고도 확실한 판단 방법은 없을 것이다! 자아가 받는 대접에 대해 보이는 반응이야 말로 그 사람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다 보여 준다.

온유함이 있으면 그것을 보이라!!

글.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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