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새 페이지 1 죄인에게 긍휼과 은혜라는 말보다 더 가슴 저리게 찾아오는 말은 없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세상에 들어온 죄와 저주와 심판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안에 흐르는 죄성은 결코 변하지 않으며 개혁되지 않으며, 개선되지 않습니다. 죄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세상에 들어온 죄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는 죄를 이깁니다. 죄가 넘치는 그곳에 더욱 풍성하게 넘치는 것이 바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가 넘치게 하려 함이거니와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더욱더 넘쳤나니](롬5:20). 구정물이 넘치는 하수구가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구정물이요, 오염된 더러운 물이란 것을 압니다. 거기에 하얀 천을 넣으면 구정물은 더욱 더러워 보이고, 흰 색의 천에는 더러움이 넘쳐 납니다. 우리는 본래 더러운 것을 알았지만 흰 색 천을 더럽히는 구정물이 더욱 더럽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두 눈으로 선명하게 보게 됩니다. 율법은 본래 죄인인 우리에게 죄의 더러움, 심각성, 위험성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 주는 것이요, 죄를 더욱 넘치게 하려고 들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넘쳐나는 그곳에 은혜가 더욱더 넘쳐나며 죄는 눈 녹듯이 분해되고 녹아 버립니다. 마치 더러운 물일수록 더욱 강력한 세제를 더 많이 쏟아 붓듯이 주님은 죄가 넘치는 그곳에 은혜가 더욱더 넘치도록 하십니다. 물 속에 있는 더러운 때를 모두 분해해서 녹여 버리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권세를 무력화시키고, 깨끗하게 합니다.

우리는 아담을 통해 죄성을 물려 받았습니다. 육신적 출생을 통해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아담과 동일한 죄성이 있고, 동일한 저주를 받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영적 출생(거듭남, 중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동일한 의가 있고,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죄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은혜입니다. 죄로 인해 파괴되고,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은혜로만 회복됩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은혜의 결과는 생명입니다. 죄는 저주를 불러 옵니다. 은혜는 의를 불러 옵니다. 죄는 심판의 근거입니다. 은혜는 유업과 상급의 근거입니다. 죄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은혜의 배후에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죄는 아담을 통해 세상에 들어왔고,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셨고, 은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왔습니다(요1:17). 죄를 범한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두려워하고 피합니다. 은혜 입은 사람은 하나님을 찾고 부릅니다. 죄인은 지옥으로 갑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늘의 왕국으로 갑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주]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시니](시103:8), [그분께서 자신의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게 하셨으니 [주]는 은혜로우시며 동정심이 많으시도다.](시111:4), [[주]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고 참으로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시116:5). [[주]는 은혜로우시며 동정심이 많으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긍휼이 크시도다.](시145:8). “주는 은혜로우시며...” 이것은 성경의 한결같은 진술이요, 증언입니다.

다 같이 베드로전서 5장, 사도행전 20장을 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전서 5:10에 [그러나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부르사 자신의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신 분께서 너희가 잠시 고난을 받은 뒤에 너희를 완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고 정착시키시리니](벧전5:10)라고 말합니다. 완전하게 하고 굳건하게 하시며 강건하게 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외모의 구별이 없습니다. 인종, 성별, 나이, 민족, 빈부, 귀천의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도행전 20:32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의 말씀인 성경은 은혜의 말씀입니다.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맡기노니 이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워 거룩히 구별된 모든 자들 가운데서 너희에게 상속을 주리라.](행20:32). 성경을 읽을 때 여러분은 은혜의 말씀을 눈으로 귀로 입으로 보고, 듣고, 맛보게 됨으로써 우리 혼은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바로 은혜의 말씀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맡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은혜의 말씀은 동등시 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하나님과 은혜의 말씀은 동일한 신성, 동일한 권능, 동일한 인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세우는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은혜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든든히 세웁니다. 든든히 세운다(build up)는 말은 강건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 두 구절을 비교해 본다면 은혜의 하나님과 은혜의 말씀이 동일한 사역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성도들에게 동일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은혜의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오랫동안 머물며 {주} 안에서 담대하게 말하매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이적을 행하게 하사 은혜의 말씀에 증거를 주시니라.](행14:3). 그들이 전한 말씀은 은혜의 복음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은혜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그분을 증거하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더라.](눅4:22). 제자들이 전한 복음에는 심판과 저주의 말씀, 정죄의 말씀에서 끝나는 법이 결코 없었습니다. 죄에 대한 질책과 책망이 쏟아져도 반드시 그 끝은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끝이 났는데 이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이 결코 나를 움직이지 못하며 또한 내가 나의 생명조차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니 이것은 내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님께 받은 사역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기쁨으로 끝마치고자 함이라.](행20:24). 주님은 죄에 대해 분노하시고, 죄인을 미워하시지만 그것들은 모두 은혜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죄에 대한 분노와 미워함이 있으면 회개하게 되고, 은혜를 베풀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얻기 원하시면 죄를 미워하십시오. 불법을 가증히 여기고 혐오하십시오.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십시오. 마음이 상하고, 찢어질지라도 주님은 싸매시고 고치시며 은혜의 말씀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히브리서 10:29절을 펴십시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히 구별한 언약의 피를 거룩하지 아니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영께 무례히 행한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해 보라.](히10:29). 성령은 은혜의 영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은혜의 영께 무례히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거룩하지 아니한 것으로 여기는 자들 역시 은혜의 영께 무례히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공공연히 부정하는 신학이 만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업신 여기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령의 존재와 역사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아 성령을 모독하고, 성령을 제한하고, 업신 여기는 자들이 교회 내에 얼마나 많습니까?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것은 은혜의 영께 무례히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은혜의 영께 무례히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은 은혜의 영께 무례히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성령의 은사들을 드러내고,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거부하는 것은 은혜를 베푸는 자에 대한 가장 큰 무례입니다. 은혜는 겸손히 받아들이는 자의 것입니다. [참으로 그분께서는 비웃는 자들을 비웃으시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느니라.](잠3:34), [그러나 그분께서 더 많은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 하시느니라.](약4:6). 겸손은 은혜의 앞잡이입니다.

성령께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회개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은혜의 말씀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은혜의 영이십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은 은혜의 영이시므로 늘 은혜의 주님, 은혜의 말씀, 은혜의 보좌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은 은혜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완악한 것은 아직 은혜의 영을 믿고 받아들이고,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겸손과 함께 하며 패망은 교만과 함께 합니다. 사람이 교만하다는 것은 마음에 은혜가 없다는 뜻입니다. 회개할 때 은혜가 임하고, 겸손할 때 더 많은 은혜가 임합니다. 반면 마음에 쓴 뿌리가 있고, 미움이 있고, 다툼이 있고, 시기가 있고, 원망이 있고, 불평이 있으면 은혜는 사라지고 죄의 독소가 온 몸을 더럽히게 됩니다.

히브리서 4:16절을 펴 보십시오. 하나님의 보좌는 은혜의 보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은혜의 하나님께서 은혜의 보좌에 앉으신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죄인들을 만날 때 주님은 크고 흰 보좌(great white throne-백보좌)에 앉으시는데 성경은 이것을 심판의 왕좌라고 합니다. [이는 /주께서/ 심판의 왕좌들 곧 다윗 집의 왕좌들을 거기에 두셨음이라.](시122:5), [심판의 왕좌에 앉은 왕은 자기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하느니라.](잠20:8). 은혜의 복음을 무시하고, 은혜의 성령께 무례히 행한 자들이 주님을 만날 곳은 심판의 왕좌인 것입니다. 성도들은 모두 은혜의 왕좌에 나오도록 하시고, 거기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매 순간 나아갈 곳은 은혜의 왕좌입니다. [/성/령 안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기도하되 모든 성도를 위하여 모든 인내와 간구로 이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엡6:18).

은혜의 왕좌 앞으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상한 영, 겸손한 마음, 죄로부터의 회개입니다. [/너희는/ 너희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으며 [주]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올지어다. 이는 그분께서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니](욜2:13). 주님은 이렇게 은혜의 왕좌 앞으로 나아온 사람들에게 큰 친절을 베푸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대표적인 예가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 백성들입니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느웨 백성들은 은혜의 왕좌로 나아가 모두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 베푸시는 큰 친절로 인해 재앙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이 때 주의 대언자 요나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왕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주]께 기도하며 이르되, 오 [주]여, 간구하오니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리라 말씀드리지 아니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먼저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이는 주께서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4:2). 요나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인해 이스라엘의 원수 앗시리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불평을 토했습니다. 그는 신념에 찬 신념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풍랑이 일어 배가 침몰할 위기에 몰렸을 때도 “살려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고 잘못을 빌거나 회개하지 않고 “나를 물속으로 던지라”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한 몸이 죽어서 앗시리아가 멸망당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리라고 마음 먹었고, 죽기를 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나가 은혜의 왕좌에 왔을 때 기꺼이 그의 기도에 대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왕좌에는 해답이 있습니다. 인격적인 감화를 통한 순복이 있습니다. 주님은 요나를 공포와 채찍으로 굴복시킨 것이 아니라 인격적 감화를 통해 순복시키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억울하고 답답하고 뭔가 해결되지 않는 모순이 있으면 은혜의 왕좌로 나아가십시오. 주님은 거기에서 응답해 주시고, 우리에게 인격적인 순복을 하도록 해 주십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돌아 선 자가 다시 돌아서면 은헤를 베푸십니다. [이는 너희가 만일 [주]께로 다시 돌아오면 너희 형제들과 너희 자녀들이 그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간 자들 앞에서 불쌍히 여김을 받아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임이라. [주] 너희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시므로 너희가 그분께 돌아오면 자신의 얼굴을 돌이켜 너희를 떠나게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였더라.](대하30:9). 죄인이 회개하면 주님 역시 회개(돌이키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예화) 어떤 죄인이 물었습니다. 내가 주님께로 돌아서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자 설교자는 말하기를 당신이 돌아서 태양을 등지면 태양은 어디를 비춥니까? 등이요. 그렇습니다. 당신이 주님께 돌아서면 주님은 당신의 등에 여전히 빛을 비추십니다. 당신이 언제든지 돌아서면 곧 바로 얼굴에 비출 수 있게 말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은혜의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죄의 회개와 더불어 은혜의 하나님에 대한 깊은 믿음과 고백이 있습니다. [순종하기를 거부하며 주께서 자기들 가운데 행하신 이적들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며 반역하여 대장 하나를 임명하고 자기들을 속박한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사오나 오직 주는 항상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느9:17). 우리가 반복적인 죄와 허물 속에서도 주님께 다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항상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오.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큰 친절을 베푸시는 분이시란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긍휼이 크시므로 그들을 진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이는 주께서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이다.](느9:31). 하나님은 죄로 인해 심판하시는 가운데서도 은혜를 거두지 않으시며 긍휼을 베푸시는데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가 만일 [주]께로 다시 돌아오면 너희 형제들과 너희 자녀들이 그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간 자들 앞에서 불쌍히 여김을 받아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임이라. [주] 너희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시므로 너희가 그분께 돌아오면 자신의 얼굴을 돌이켜 너희를 떠나게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였더라.](대하30:9).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첫째, 죄로부터의 구원을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오직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행15:11).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요, 소망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이듯이 은혜 역시 그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는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딛2:11).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자체입니다.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2:5).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 진리는 인간의 행위, 외모와 전혀 상관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입니다. [이는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니 이것이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둘째, 은혜는 우리를 다스립니다. [이것은 죄가 군림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것같이 은혜도 의를 통해 군림하여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5:21). 군림하다는 말은 reign-통치하다, 다스리다는 의미입니다. 이전에는 죄가 군림하여 사망에 이르렀고, 이제는 은혜가 군림하여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은혜는 의를 통해 우리를 다스립니다. 은혜가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배할 때 우리는 놀랍도록 영적인 생각, 영적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율법이 마음을 지배하면 정죄와 판단만이 있습니다. 무거운 짐과 의무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면 화해와 용서와 하나됨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무엇이 넘치는가? 주목해 보십시오. 은혜가 넘치면 위로부터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이웃을 향해, 형제를 향해 널리 널리 퍼져 나갑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넘치게 하시는 이유는 선한 일을 넘치게 하도록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항상 모든 일에서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선한 일에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은혜가 넘칠 때 서로 기도하게 되고, 사모하게 됩니다. [또 그들이 너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로 인하여 직접 너희를 위해 기도함으로 너희를 사모하느니라.](고후9:14). 진정한 영적 생활은 종교 의식이나 규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의무를 강요함으로써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특정한 훈련을 이수하거나 어떤 과정을 마쳐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속에 은혜가 넘치고,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면 저절로 해야 할 일이 생각나고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 생애 동안 은혜로 일하는 법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獨生)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주님이 행하신 모든 일은 은혜와 진리 가운데서 행해졌고 주님이 하신 모든 말씀은 은혜로운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선포하시는 말씀을 들을 때 은혜로운 말씀에 놀랐습니다. [모두가 그분을 증거하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더라.](눅4:22). 주님의 입술에는 은혜가 넘칩니다. [왕은 사람들의 자녀들보다 더욱 아름다우시니 왕의 입술에 은혜가 넘치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왕을 영원히 복되게 하셨나이다.](시45:2).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들을 때 마음 속에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로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혀와 입술을 다스리는 것 역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마음을 다스리면 그 입술 역시 은혜로운 말이 나옵니다. [마음의 순수함을 사랑하는 자는 그 입술의 은혜로 인하여 왕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잠22:11). 마음의 은혜는 입술의 은혜로 드러납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입의 말들은 은혜로우나 어리석은 자의 입술은 자기를 삼키려 하나니](전10:12). 입의 말이 은혜롭다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요, 마음의 순수함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가식과 위선이 없다는 뜻이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의를 통하여 우리 안에 다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은혜로운 언어 생활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적 명령입니다. [너희 말을 소금으로 간 맞추어 항상 은혜가 있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바를 알게 되리라.](골4:6).

셋째, 은혜는 우리를 가르칩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바른 삶의 방식을 가르치며, 가치관을 가르칩니다. [이는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저 복된 소망 즉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음이라.] (딛2:11~13).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우리를 가르칩니다. 무엇을 가르칩니까? No라고 말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경건치 아니한 것, 세상의 정욕들에 대해 거부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Say no to drug, Say no to smoke/Alcohol, lust, .... 세상에 대해 No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단호하게 No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 속에 있는 은혜는 아닌 것을 “아니다”라고 거부하도록 가르칩니다. 세상과 비동조, 비타협, 비일치를 가르쳐 줍니다. 반성경적 진리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불경한 것들, 세상에 속한 것들을 거부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가르칩니다. 맑은 정신이란 냉철하고 뭔가에 취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술이나 어떤 것에 영향을 받아 마음이 기울거나 편벽됨이 없는 정신을 맑은 정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건전한 정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살도록 합니다. 현 세상을 둘러보십시오.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 드뭅니다. 대부분 뭔가에 미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 차려라, 정신 차려!”하며 충고합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맑은 정신으로 돌아온 자신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전에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정신으로 살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맑은 정신으로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가르칩니다. 불의와 불경건을 은혜 운운하며 두둔하거나 감싸는 것은 미친 정신이요, 맑은 정신이 아닙니다. 은혜가 충만한 성도는 의롭고 경건하게 삽니다. 마음에 은혜가 있을 때 양심은 극도로 순수해지고 선해집니다. 마음에 은혜가 있을 때 복된 소망 즉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됩니다. 은혜는 재림 신앙으로 직결됩니다. 은혜는 마음 속에서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고 기다리도록 가르칩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란 마음은 은혜가 충만한 상태입니다. 은혜가 없는 사람들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은 도피 신앙입니다.

넷째, 은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10).사울이 바울이 된 것은 율법 교육이나 엄격한 바리새파의 훈련을 통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종교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교육은 사람을 크게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모세는 40년간 파라오의 궁에서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행7:22) 있었지만 그가 한 행동은 사람을 쳐서 죽여서 숨기는 일이었습니다. 3년간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제자들은 가장 위대한 스승 아래에서 가장 위대한 가르침을 받았지만 결과는 예수님을 버려두고 다 도망가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 다와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듭남을 통해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주시고, 은혜를 통해 사람을 빚어나가십니다.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것처럼, 갈릴리의 어부들이 믿음의 사도들로 변화된 것처럼, 우리는 모두 그런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기 전에 결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란 말을 듣기 전에 그는 80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반면 사무엘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사람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디모데 역시 하나님의 사람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까? 수양과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다섯째, 은혜는 사명자가 되게 합니다. 사람은 지음 받을 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사명은 잃어버리고 먹고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음으로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사명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에 따라 그분의 권능이 효력 있게 활동함을 힘입어 내가 이 복음의 사역자가 되었노라.](엡3:7).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육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이 땅을 위해서 살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서 전 인생을 기꺼이 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예외 없이 모두 복음의 사역자가 되게 하십니다. 십자가의 전달자요,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복음을 전파하게 하십니다. 성령의 은사를 통해 서로 섬기게 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기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모든 성도를 위해서 항상 기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서로의 짐을 나누어져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믿음과 선행을 서로 격려할 의무가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섬겨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대한 의무와 이웃을 향한 의무가 있는데 이것을 성경은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을 주신 것은 첫째, 복음의 사역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요, 둘째,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것은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친히 우리를 받아 주시는 은혜 곧 자신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 하심이라.](엡1:6). 셋째, 주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보여 주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친절을 베푸사 자신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다가오는 여러 시대에 보여 주려 하심이라](엡2:7).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무직자가 없으며, 할 일없이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맡은 사명이 있을 때 강건해 지고, 삶의 의욕이 납니다. 할 일이 없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이 없습니다. 정신병자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의미있는 일을 발견하지 못할 때 사람은 허무해지고, 연약해 지고, 마침내 병이 찾아 들고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때 감사와 찬양이 넘치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눈에 확 들어오는데 이것을 사명이라고 하기도 하고, 소명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여섯째, 은혜는 강건하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내 아들아, 너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건한 자가 되고](딤후2:1). 죄는 사람을 약화시킵니다.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정신 무장은 사람의 겉모습만 강하게 할 뿐 속은 더욱 쇠약하게 되어 어느 한 순간에 무너지게 합니다. 율법이나 종교 의식이 사람을 강하게 하지 못합니다. 외식만 키울 뿐입니다. [여러 가지 이상한 교리에 끌려 다니지 말지니 이는 은혜로 마음을 굳게 함이 선한 일이요, 음식으로 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 음식에 전념하는 자들에게 음식이 유익을 끼치지 못하였느니라.](히13:9). 은혜로 마음을 강건하게, 은혜로 마음을 굳게 하는 일이 선한 일입니다. 죄에 빠지는 사람은 마음이 약한 사람들입니다. 에스겔16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네가 이 모든 일 곧 오만하고 음란한 여자의 일을 행함을 보건대 네 마음이 어찌 그리 약한고!](겔16:30). 주님은 음녀 짓, 창녀 짓 하는 유대 백성들을 향해 탄식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깊은 한 숨 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예루살렘이 오만하고 음란한 여자의 일을 행하지만 마음은 너무나 약하기 그지없습니다. 행동으로는 어떤 죄라도 다 지을 수 있는 흉악범이어서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피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마음은 “어찌 그리 약한고!”란 말이 딱 맞습니다. 죄인일수록 죄에 연약한 것입니다. 육신적일수록 육신에 약한 것입니다. 주님 앞에 3번이나 큰 소리를 치며 주님을 따르겠다고 맹세했던 베드로의 육신은 강해 보였지만 그의 마음은 어찌 그리 약했던지 세 번이나 주를 부인하고 저주하며 맹세로. 부인하기 까지 했습니다. 겉모습을 꾸미고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속은 약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일곱째, 은혜는 겸손하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기 어려워 보이는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를 교만하지 못하도록 은혜의 가시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탄의 가시가 은혜란 것입니다. 이는 매우 고통스런 일이지만 이 은혜를 통해 주님은 자신의 강력한 권능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나의 강한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해지기 때문이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우리는 문제가 있을 때 문제를 해결해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이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문제 해결을 해 주시는 대신 그 문제를 그대로 안고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이는 가족 중에 원수가 있고, 가시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큰 슬픔을 안고 기도하지만 주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말씀하십니다. 이런 경우에는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서 일하시고, 완전해 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만해지면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 수 없기 때문에 가시를 주셔서 더 많은 은혜를 주시고자 하십니다. 겸손한 자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주제별(글) > Know thy God'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  (0) 2005.04.21
은혜로우신 하나님(II)  (0) 2005.04.21
우리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  (0) 2005.04.19
평강의 하나님  (0) 2005.04.19
약속하시는 하나님  (0) 2005.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