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화평, 평화, 평강, 평안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는 단어는 모두 peace란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평화, 평강, 평안의 하나님이시란 말입니다. 우리말로는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모두 같은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서신서 시작이나 말미에다 항상 평강의 하나님에 대해서 한 줄씩 기록했습니다. [이제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두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롬15:33). 간단하게 서신서 몇 개를 살펴보고 평강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고전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고후1:2). 참조-고후13:11, 갈1:3, 6:16. 바울은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맺음말로 인사하고 마치는데, 이는 이 둘이 성도들의 삶에 필수적인 핵심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먼저 주님과 화평의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절대 화평이 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도다.](롬5:1).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면 하나님의 화평이 우리 안에 깃드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을 찾고자 아무리 애를 써도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먼저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大使)가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너희에게 간청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해하라.](고후5:20). 하나님과 화해하지 않으면 평강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화해하기 위해서 자신을 화해 헌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는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은즉 화해하게 된 자로서 더욱더 그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임이라.](롬5:10). [또 십자가로 그 원수 되게 하는 것을 멸하사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6).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화해한 성도들만이 하나님이 주시는 화평을 마음 속에 누릴 수 있게 되며, 놀라운 평안, 흔들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히7:2). 주님은 평강의 주시오,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히13:20, 살전5:23, 빌4:9). 주님은 화평의 창시자이십니다(고전14:33). 복음은 화평의 복음입니다(엡6:15). 진리는 화평의 길입니다(롬3:17). 성령은 화평의 띠로 묶으십니다(엡4:3). 하나님의 징계는 화평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히12:11). 주님의 언약은 화평의 언약입니다. [레위와 함께하는 내 언약은 생명과 화평의 언약이라. 내가 그것들을 그에게 준 것은 그가 두려움으로 나를 두려워하며 내 이름 앞에서 무서워하였음이라.](말2:5). 주님은 우리를 화평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어둠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주고 우리 발을 화평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눅1:79). 이런 이유로 우리는 화평의 복음을 맡은 화평의 대사로 임명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화평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킵니다. 잠언에 [열심을 다하여 네 마음을 지키라. 이는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니라.](잠4:23)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경험하듯이 스스로 마음을 지키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삶의 태풍이 몰아치고, 예고 없이 찾아드는 변수(變數)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열심을 다하여 마음을 지키는 간단한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명령에는 반드시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행할 길도 함께 마련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마음의 생각을 지키는 가장 성경적인 방법은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화평의 첫째 역할은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는 것이요, 우리를 평안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지만 주님께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아뢸 때 하나님의 평강이 놀랍도록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근심, 불안, 염려, 걱정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셔서 헛 생각, 딴 생각,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생각에서 지켜 주십니다. 하지만 사악한 자들에게는 결코 이런 화평이 없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사악한 자에게는 화평이 없다, 하셨느니라](사48:22). [그러나 사악한 자들은 요동하는 바다 같아서 안식하지 못하며 그들의 물은 진흙과 더러운 것을 내느니라.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악한 자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시느니라.] (사57:20~21). 평강의 하나님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지만 사악한 자들은 화평, 평강이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화평의 두 번째 역할은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화평이 너희 마음 속에서 /너희를/ 다스리게 하라. 너희도 이 화평에 이르도록 한 몸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니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우리는 주님의 화평이 우리 마음 속에서 우리를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왕국이 임해있는데, 하나님의 왕국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화평과 희락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왕국이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 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喜樂)이기 때문이라.](롬14:17). 그러므로 우리 속에 계신 주님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의로, 화평으로, 희락으로 다스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은 두려워하는 영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딤후1:7). 주님은 화평으로 다스리십니다. 여러분이 불안해하는 것은 화평의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요, 모독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극심한 환란과 핍박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것은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제 평강의 {주}께서 친히 모든 방법으로 항상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너희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3:16). 서신서 말미마다 이런 평강을 기원하는 말씀으로 마쳤는데 주님은 우리에게 오늘도 동일하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시며, [두려워 말라, 평안하라. 평안히 지낼지어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사탄을 속히 발아래 부수실 것이요(롬16: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잘 있으라. 완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한 마음이 되며 평안히 지낼지어다. 그리하면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후13:11). 현대인들은 용감한 것 같지만 어느 시대에 사는 사람들보다 불안, 스트레스, 초조, 긴장, 두려움 속에서 극심하게 시달리고 있습니다. 저는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보았는데,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약은 위궤양 치료제인데 그중 한 종류는 1986년 시판하여 10년간 40조원이 팔렸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마음의 스트레스가 심하고 죄책과 평안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조국 대한민국이나 이곳 미국 역시 가장 많이 팔리는 약은 위궤양, 고혈압, 신경안정제, 항우울제 같은 약들인데 이 모든 것은 모두다 마음에 평안/화평과 연관된 것입니다. 우울증이 심하면 갑상선 호르몬에 문제가 생기고 나중에는 약의 강도를 높여도 듣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정신적인 병에 시달리는 것은 수치입니다. 산후 우울증이나 신경성 위장병이나 신경성 두통, 신경성에 관련된 병은 일거에 다 날려 버려야 합니다. [내가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노라. [주]가 말하노니, 평강이 있을지어다. 멀리 있는 자와 가까이 있는 자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쳐 주리라, 하시기 때문이니라.](사57:19). 저와 여러분의 입술은 독사의 독을 품지 말고, 해악을 품지 말고, 주님이 저희 입에 담아 주신 말씀을 해야 합니다. 입술의 열매란 찬양을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매우 기뻐하시는 희생물입니다. 우리 입술에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찬양하는 찬송을 매일 부를 때 마음은 평안이 찾아옵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입술, 성경을 읽는 입술이 주님이 창조하신 입술입니다. 입술이 부정한 자들은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아이고 죽겠다! 망했다!, 못살겠다!, 미치겠다!, 힘들다! 이런 말들이 입에 붙어 있는 사람들은 몸보다 먼저 마음이 지치고 병듭니다. 그리고 몸 역시 아프게 됩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고, 말씀이 없이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외치는 자들은 자기 확신과 영적 망상과 교만에 빠지지만 주님 안에서 말씀을 붙들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도전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는 것은 믿음의 확신이요, 승리의 비결인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주님께 칭찬을 받은 것은 그들의 입술에서 나온 선한 믿음의 보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믿음으로 우리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우리를 붙드시는 주님을 통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때 두려움은 물러나고 평안이 깃듭니다.
여러분이 주를 신뢰할 때 주님은 평강으로 지켜 주십니다. [주께서는 마음으로 주를 굳게 의지하는 자를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하기 때문이니이다.](사26:3). 주님은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자를 결코 흔들리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주님을 신뢰하면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십니다. 사자 굴에 던져지는 다니엘의 마음이 불안과 공포에 떨렸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용광로에 던져지는 다니엘의 세 친구-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단1:6)가 겁에 질린 얼굴로 용광로에 던져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완전한 평강으로 인해 사자 굴과 불에 집어 던지는 원수들을 압도했습니다. 돌에 맞은 스데반엘의 얼굴이 일그러지거나 공포에 질린 것이 아니라 천사같은 얼굴로 돌에 맞았으며 도리어 원수들을 용서해 주시도록 기도했다는 것은 그의 마음 속에 주님이 완전한 평강으로 지켜 주었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반면 주님을 신뢰하지 않았던 사울은 전쟁을 앞두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평안이나 확신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불안했던지 그는 엔돌의 부리는 영을 지닌 여자를 찾아가 죽은 사무엘을 불러 달라고 요청할 지경이었습니다. 사무엘이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요동시키느냐?]고 하니 사울은 [내가 심히 곤궁(困窮)하나이다](삼상28:15)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면 완전한 평강으로 지켜 주십니다.
[{주}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식하여야 구원을 받을 것이요, 조용히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이것을/ 원치 아니하고](사30:15).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일해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런 노력은 할 만큼 다 했다는 자기 만족을 줄 수 있고, 미련과 후회없이 망하는 방법일 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지혜, 방법을 의지하고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느니 돌이켜 안식하라고 하십니다. 조용히 신뢰하는 것이 힘을 얻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헛되이 이집트에 도움을 구하고, 그들을 의지하려고 매달리는 노력을 포기하고 가만히 안식하고, 조용히 신뢰했다면 주님의 평안을 누리며 승리했을 것입니다. 승리는 우리의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는데 있으며, 땀과 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에서 오는 평안에 있습니다. [이는 이집트 사람들의 도움은 헛되고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임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외치기를, 그들의 힘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라, 하였느니라.](사30:7).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힘입니다. 전쟁은 주님이 하시며, 승리는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또 있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조용히 있을지니라, 하니라.](출14:14)./The LORD shall fight for you, and ye shall hold your peace. (출14:14). 조용히 있을지니라./hold your peace. 불안해하지 말고 평안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싸우십니다. 평안을 유지하십니다. 주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다스리도록 하십시오. 승리는 선물로 주어집니다.
말씀을 배울 때 큰 평강이 임합니다. [네 자녀들이 다 [주]께 가르침을 받으리니 네 자녀들에게는 큰 평강이 있을 것이며](사54:13). 주님은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큰 평강을 주십니다. 말씀을 배우고, 마음에 받는 기쁨은 체험해 보지 못한 성도들이 좀처럼 알 수 없습니다. 성경 공부 시간은 가장 복된 시간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배울 때 주님은 가르침을 주시며 우리에게 큰 평강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약하고, 허약 체질인 사람은 말씀을 지속적으로 먹임으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평강을 줄 뿐 아니라 기쁨을 줍니다. 평강이 정적인 것이라면 기쁨은 살아서 역동하는 한 차원 높은 것입니다. [[주]의 법규들은 정당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는도다.](시19:8). 성도들이 불안하고 근심하고 걱정하는 이유는 그들이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끊임없이 읽고 공부하는 성도들에게는 근심, 걱정이 파고 들 틈이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으니 “믿음 약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뜻이요, 공부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자백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지 않음으로써 약해집니다. 말씀을 읽고 들으면 믿음이 강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 속에 큰 평강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두려움이 절로 사라집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나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하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주님 자신의 평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지만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으므로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패배한 적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도들은 무엇 때문에 주님이 주신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이는 믿음으로 누리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화) 백여년 전에 영국의 한 청년이 미국에 가면 잘 살수 있다고 소문을 듣고 그는 온갖 고생을 다하며 노력해서 영국에서 미국까지 가는 기선의 배표를 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국의 항구에서 그 배를 탈 때에 닷새 동안 굶을 각오를 했습니다. 배표 밖에는 돈이 없으니까 그는 삼등선실에 들어가서 다른 손님들과 함께 항해를 하는데 밥 먹을 때가 될 때 다른 손님들은 다 밥 먹으러 갑니다. 그러면서 자기보고 왜 식당에 안가냐고 했습니다. “나는 별로 먹을 생각이 없다”. 다 식사를 하고 와서 편안히 쉬는데 자기는 배가 고팠습니다. 이튿날에도 또 굶었습니다. 사흗날에도 굶었습니다. 나흘째도 굶었습니다. 닷세 째 배가 항구에 도착할 때쯤 되니까 이제는 미국 항구에 도착하기 전에 굶어죽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기 아니면 살기다.”하면서 식당에 가서 배가 터지도록 먹었습니다. 그리고 책임자에게 가서 “내가 밥은 실컷 먹었는데 돈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시키는 데로 해서 갚겠습니다.” 라고 말하자 식당 주인이 이상한 눈으로 보고 “뭐라고요?” “내가 돈이 없다고요.” “돈은 왜 필요해요?” “내가 밥을 먹지 않았습니까?” “여보시오. 당신 기선표에 식대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청년은 닷새 동안 기선표에 식대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식사를 못하고 쫄쫄 굶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이 이루신 승리, 주님이 주신 영적인 복에 대해 무지한 성도들이 이와 같은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한 가운데 서셔서 주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눅24:36) 선포하셨습니다. [같은 날 곧 주(週)의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님께서 오사 한가운데 서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 주님은 평강을 선포하셨습니다. 여드레가 지나서 주님은 다시 한번 선포하셨습니다. [여드레가 지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께서 오사 한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요20:26). 부활하신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두려움에 떨며 문을 닫고 숨어 있을 때 우리 한 가운데 서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평강의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기도할 때 마음에 평안이 임합니다.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으니 그런즉 그분을 찬송하리로다. [주]는 나의 힘이요,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그분을 신뢰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분을 찬양하리로다. [주]는 그들의 힘이시요, 자신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구원하는 힘이시로다.](시28:6~8). 아무리 강한 용사라도 주님께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무 힘도 쓸 수 없습니다. 삼손을 보십시오. 그는 얼마나 힘이 세었던지 군대없이 혼자 다녀도 아무도 그를 당해 낼 수 없었습니다. 블레셋은 군대를 동원해도 단신의 삼손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토록 기도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기도한 기록이라고는 목이 말라 죽게 되었을 때 한 번 나옵니다(삿15:18). 그가 20년 동안 재판관을 하면서 기도한 일이라고는 이 한번인데 주님은 물을 주셔서 그의 영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이곳을 삼손은 엔학고레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주님으로부터 물을 얻어먹고 살아난 곳입니다. 영적 기운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후로 다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기도 생활이 없던 그의 삶은 평안을 완전히 잃어 버렸습니다. 삼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 여자로 인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날마다 이 말들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혼이 괴롭게 되어 죽을 지경이 되었더라.](삿16:16). 혼이 괴롭게 되었다가 다음에는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 몸이 괴롭게 되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번의 기도를 더 드렸습니다. [삼손이 [주]께 부르짖어 이르되, 오 {주} [하나님]이여, 간구하옵나니 나를 기억하옵소서. 오 하나님이여 간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들이 내 두 눈을 뺀 것을 단번에 원수갚게 하옵소서, 하고 그 집을 지탱하여 버티고 있는 두 개의 중간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붙잡으며 이르되, 나를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게 하소서,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영주들과 온 백성을 덮으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 많았더라.] (삿16:28~30). 그는 고난의 풀무 속에서 하나님의 화평을 마음속에 회복했습니다. 그가 기도했을 때 그는 20년간 행한 일보다 마지막 한 번으로 더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가 전혀 없었습니다. 기도하는 삼손이 행한 이 일로 인해 그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 행한 믿음의 영웅들과 나란히 이름을 올려놓았습니다(히11:32). 우리는 기도할 때 평안이 임하고, 기도가 멀어질 때 평안이 사라진다는 평범한 영적인 진리를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영적인 생각을 할 때 평안이 임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거니와 /성/령을 따르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망이요,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생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해야 합니다(롬12:2).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지 않으면 우리는 육신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엡4:23).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된 사람들이며,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는 사람들입니다. [너희의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 사람을 입었도다.](엡4:23-24). 주님은 우리에게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셨습니다(딤후1:7). 그러므로 더 이상 육신적인 생각, 악한 생각, 어리석은 생각 등을 하는 것은 주님의 징계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불신의 생각, 부정적인 생각은 재앙을 불러 오며, 주님의 심판을 일으킵니다. [오 땅아, 들으라. 보라, 이 백성이 내 말들과 내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거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위에 재앙을 가져오리니 /이것은/ 곧 그들의 생각의 열매니라.](렘6:19). 모든 죄는 결국 생각의 열매입니다. 생각이 말로 나오고, 말이 행동이 되고, 가치관이 되고, 그 사람의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행한 많은 범죄는 모두 그들의 생각의 열매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다른 이방인들이 헛된 생각 속에서 걷는 것같이 걷지 말라.](엡4:17)고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망이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롬8:6-7). 마땅히 생각할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로 믿음의 분량대로 냉철하게 생각해야 합니다(롬12:3). 헛된 생각, 어리석은 생각은 죄입니다(잠24:9).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고전8:2). 서 있는 줄로 생각하면 넘어집니다(고전10:2). 악을 생각하면 사랑이 아닙니다(고전13:5). 어린 아이들은 어린 아이처럼 생각합니다(고전13:11). 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무엇이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갈6:3).
우리를 향한 주님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이는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알기 때문이라. 그것은 평안을 주려는 생각이요, 재앙을 주려는 생각이 아니니 곧 기대하던 결말을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라. [주]가 말하노라.](렘29:11).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생각을 통해 주님이 주신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화 한 토막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냉동차 안에 갇힌 청소부, 전원이 뽑혀 있었다. 산소는 충분했다. 하지만 얼어 죽었다. 그는 갇힌 순간 자신이 얼어 죽는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얼어 죽어 버렸다.
성령 안에서 살 때 평강이 넘칩니다. [이는 하나님의 왕국이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 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喜樂)이기 때문이라.](롬14:17). 하나님이 화평의 하나님이시오, 평강의 주이신 것처럼 성령 안에는 화평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는 화평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반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성령을 따라 살 때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않고, 육신의 일들을 행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령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며(요14:26), 아버지의 뜻대로 기도해 주시며(롬8:26),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며,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신앙 생활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이란 사실을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서 설교를 듣고, 이야기 하지만 정작 성령에 대해 거의 무지한 것을 너무나 자주 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갈5:25). [/성/령 안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기도하되 모든 성도를 위하여 모든 인내와 간구로 이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엡6:18). 성령을 모르는데 어떻게 성령 안에서 살고,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 안에서 항상 기도하며, 성령 안에서 화평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완전해 지고자 하는 성도들처럼 사람들은 너무나 힘든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는 성령을 의지해서 사는 삶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영적인 삶을 살아 보려는 헛된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완전해지고자 하느냐?](갈3:3). 우리는 누구도 자기 힘과 노력, 지혜와 의지력으로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없으며,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평안은 얻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입니다.
예화) 트럭을 끄는 황소, 황소를 끄는 트럭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때 영국의 귀족이 인도의 영주에게 트럭을 한대 선사했는데 트럭을 선물로 받은 영주는 몹시 기뻐했습니다. 얼마 후 귀족이 영주가 사는 곳을 방문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영주가 황소 4마리를 트럭에 걸어서 트럭위에 턱 타고 운전대를 잡고 황소가 뻘뻘 탐을 흘리면서 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영국 신사가 말했습니다. “영주님! 이 트럭은 황소가 끌고 다니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엔진을 걸면 황소 수십 마리를 끌고 다닐 수 있는 힘이 있으니 어디 좀 내려 오시오. 내가 보여 줄테니까.” 그리고 스위치를 넣어서 엔진을 거니까 부르릉 부르릉 하는데 황소 수십 마리를 묶어서 끌어도 끌려 옵니다. 영주가 기뻐하고 “세상에 이렇게 놀라운 수레는 처음 봤다.”
우스운 일 같지만 인도의 귀족과 같은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성령을 주셨는데, 우리는 황소처럼 자기 힘으로 수레 끌듯이 끌어가려 합니다. 나의 힘으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불평을 발하며 투덜댑니다. ‘예수 믿기 힘들다. 세상 살기 힘들다. 죽겠다, 미치겠다’ 하다가 나같은 사람이 어떻게 믿음으로 살랴? 포기하고 맙니다. 교회 출석도 힘들고, 기도 모임 나오기도 힘들고, 저녁 예배에 나오는 것도 힘듭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신앙의 수레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 성령은 안에다 모셔두고 도움을 구하지도, 의뢰하지도 않습니다. 이때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는 안식하라, 쉬어라, 너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라, 너는 그냥 트럭에 타고 있으라...너희 속에 있는 성령의 엔진을 걸어라. 성령의 엔진을 걸어라. 네가 수레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끌고 가는 것이다.”
여러분이 성령을 인도함으로 받고, 성령 충만함을 받을 때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게 무거운 짐은 없으며, 주님에게 힘들고 불가능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내게 닥치는 힘들고 많은 일을 주님께로 FORWARDING 하십시오. 주께 맡겨 버리십시오. 성령은 제한이 없습니다. 10톤이든 100톤이든 무조건 다 맡겨 버리시고 그 짐 위에 평안히 앉아 계십시오.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보다 더욱 안전하고 확실하며, 평안이 주어집니다. 주님은 우리의 무엇을 맡으시는가? 첫째, 우리의 모든 염려를 맡으십니다.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이는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기 때문이니라.](벧전5:7). 사람들은 아무도 이런 것을 맡으려 하지 않습니다. 애인이든, 친구든, 부모라 해도 맡으려 하지 않을 것들을 주님은 자신이 맡으시겠다고 하십니다. 둘째, 우리의 길을 맡으십니다. [네 길을 [주]께 맡기고 또 그분을 신뢰하라. 그분께서 그것을 이루시고](시37:5). 셋째, 우리 짐을 맡으십니다. [네 짐을 [주]께 던져서 맡기라. 그분께서 항상 너를 붙드시고 의로운 자의 흔들리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55:22). 넷째, 우리 일을 맡으십니다. [네 일들을 [주]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생각하는 것들이 굳게 세워지리라.](잠16:3). 우리는 다 맡겼습니다. 평안이 있습니까? 맡기지 못한 사람은 평안이 없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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