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오늘 우리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분명히 배우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솔로몬의 아가에 [나의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로다! 보라, 그분께서 산들 위로 뛰어 오시며 작은 산들을 뛰어넘어 오시는도다.](아2:8)라는 신부의 고백처럼 우리는 주의 목소리를 알아 들어야 합니다. [내가 잘지라도 내 마음은 깨어 있으니 이것은 나의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로다.](아5:2a)란 말은 우리 모두가 영적 민감함을 가질 때 들을 수 있는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이십니다. 말씀하시는 이가 없다면 우리는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시지 않고 말씀을 보내십니다. 주님은 말씀을 대언자들 위에 임하게 하셔서 선포하도록 하십니다.[자신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며 멸망들에서 그들을 건지셨도다.](시107:20).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자신의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들이 흐르는도다.](시147:18).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을 보내고 또 보내십니다.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매 이 말씀이 이스라엘 위에 임하였으므로](사9:8). 하나님은 말씀을 보내셨다고 하십니다. 역대기하 36:15에도 이르기를, [[주]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자신의 거하는 곳을 불쌍히 여기사 자신의 사자(使者)들을 통하여 백성에게 /말씀을/ 보내고 늦기 전에 일어나 보내셨으나](대하36:15)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호흡이 담긴, 호흡을 불어 넣으신 말씀이란 사실을 알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침묵 속에서 세상을 관조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하시고,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 [주]가 이것을 말하였으니 이 일이 이루어지겠고 내가 이 일을 행하리라.](겔24:14a)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주님은 보시고, 들으시고, 말씀하십니다. 흔히 기독교인들이 오해하는 진리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눈, 귀, 입이 없는 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靈)이신 하나님에 대해 성경적 개념이 아닌 무속적 개념, 철학적, 종교적 개념이 마음속에 있는 분들이 이외로 많습니다. 하나님은 연기 같거나 바람 같거나 강한 영향력이나 힘이나 우주적 보편적인 원리(logos)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영이시란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personal being)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성과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다 지니신 인격적 존재로서 말씀하시고, 들으시고, 생각하시고, 느끼시고, 분노하시고, 슬퍼하시며, 기뻐하시고, 살피시고 보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맹인처럼 아무 것도 보지 못하시고 듣지도,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비인격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비인격적 존재로 생각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상은 사람들의 경배를 받지만 보지도, 듣지도, 걷지도, 말하지도 못합니다. 인격적인 존재가 비인격적인 피조물을 섬기고 경배하는 것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우상의 특징은 지성과 이성, 감성과 의지가 전혀 없는 비인격적, 물질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나무와 돌 신들을 섬기리라.](신4:28). 하나님은 우리의 속 중심까지 다 보시는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분이시며, 우리가 하는 입술의 말은 물론이요 심중에서 나오는 말까지도 다 알아 들으시며, 놀라운 지성과 인격의 소유자이십니다. 주님께서 보지 않으신다, 듣지 않으신다고 주장한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를 심으신 분께서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빚으신 분께서 보지 아니하시랴?](시94:9), [듣는 귀와 보는 눈 이 둘도 다 [주]께서 지으신 것이니라.](잠20:12).
하나님은 말씀을 하시며, 그 말씀을 통해 우리와 교제하시며,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영적 양식을 공급하십니다.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주리게 하시고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주님의 말씀은 단지 말이 아니라 사람이 먹고 살아야 할 양식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귀로 듣기만 하면 되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마셔야 할 물입니다. 주님이 하는 말씀은 우리가 걸어야 할 법도이며, 보아야 할 빛입니다.
주님은 역사 이래로 침묵을 지키신 적이 거의 없습니다. 주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언제나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신 말씀을 이루심으로써 믿음의 증거를 주셨습니다.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히1:1). 주님이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주님의 계시 방법의 다양성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은 자연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하시고(시19), 양심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롬2:15). 이런 것을 일반 계시라고 합니다. 일반 계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에 대한 성품을 가르쳐 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이나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세상의 역사 속에 개입하시고 인간에게 말씀하셔서 자신을 계시하는 방법을 특별 계시라고 합니다(마11:25-27, 엡3:3,5, 벧전1:12). 요셉에게는 꿈을 통해서(창37:5-10) 말씀하셨고, 다니엘에게는 환상을 통해서(단2:19, 8:1,10:1) 말씀하셨고, 사무엘에게는 목소리(음성)를 통해서(삼상3:1-10,21) 말씀하셨고, 제사장들에게는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민27:21) 말씀하셨고, 이방인 대언자 발람에게는 동물(나귀)을 통해서(민22:28) 말씀하셨습니다. 때로 가브리엘과 같은 천사들을 통해서(눅1:26-37)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주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말씀의 하나님입니다.
문제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욥기에 말하기를, [또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참으로 거듭 말씀하시되 사람이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로다.](욥33:14)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그 말을 알아듣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예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내가 이미 영화롭게 하였고 또 다시 영화롭게 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곁에 서서 들은 사람들은 천둥이 쳤다고도 하며 다른 사람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음성이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요12:28~30). 하늘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사람들은 천둥이 쳤다고 하고, 주님은 너희를 위해 난 음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예는 또 있습니다. [내가 길을 가다가 다마스커스에 가까이 갔을 때에 정오쯤 되어 갑자기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와 나를 둘러 비추매 내가 땅에 쓰러져 들으니 한 음성이 있어 내게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하니 그분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참으로 그 빛을 보고 두려워하나 내게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은 듣지 못하더라.](행22:6~9). 바울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음성이 났다는 것은 들었지만 그 음성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예는 허다합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한 특별 계시의 하이라이트는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요1:14, 14:9). 주님은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한 특별 계시의 완성은 성경을 통해서입니다(롬16:25,26).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함에 따라 권능으로 너희를 굳게 세우실 분 곧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지금까지 은밀히 간직되어 왔으나 이제는 밝히 드러났으며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대언자들의 성경 기록들을 통하여 믿음에 순종하게 하려고 모든 민족들에게 알려지게 된 신비의 계시에 따라 권능으로 너희를 굳게 세우실 분 곧 홀로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이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롬16:25-27). 성경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밝히 드러났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 기록들을 통해 모든 민족들에게 알려졌습니다. 만약 특별 계시가 없이 일반 계시만있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일반 계시는 없이 특별 계시만 있다면 성경은 단지 종교 서적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우주의 기원, 사탄의 존재, 인간의 창조 등에 대해서 도무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셨고 내가 두 번 들은 것이 이것이니 곧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는 것이라.](시62:11). 그렇다면 현재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옛적에 대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듯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까? 결론은 “그렇다”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현재도 주님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주님의 음성은 매우 작고 고요합니다. [또 지진이 있은 뒤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주]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이 있은 뒤에 고요한 작은 소리가 있으므로](왕상19:12). 이미 살펴 보았듯이 주님의 큰 음성은 사람들이 천둥 소리로 알아듣습니다. 주님은 개개인에게 말씀하실 때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듯이 매우 작은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민하지 않으면 결코 들을 수 없습니다. 욥의 친구 중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자신의 체험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에 내 얼굴 앞으로 한 영(靈)이 지나가므로 내 몸의 털이 곤두섰느니라. 그 영이 가만히 서 있었으되 나는 그 형체를 알아보지 못하였거니와 한 형상이 내 눈앞에 있었느니라. 그때에 내가 조용한 가운데 한 음성을 들었으니 이르기를,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더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자기를 만드신 이보다 더 깨끗하겠느냐?](욥4:15~17). "조용한 가운데 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마음이 분주한 사람은 결코 주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부르실 때 얼마나 조용하게 부르셨는지 모릅니다. [[주]께서 오셔서 서시고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므로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나이다, 하더라.](삼상3:10). 사무엘은 3번째 부르심에 응답했는데 앞서 두 번은 듣기는 들었지만 주의 음성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히브리어로 사무엘을 불렀는데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가 자신을 부르는 줄 알고 엘리에게 달려갔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성경은 사무엘에 '어렸기 때문에'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의 말씀이 아직 그에게 계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음성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때에 사무엘은 아직 [주]를 알지 못하고 [주]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계시되지 아니하였더라.](삼상3:7). 우리는 주님이 부르는 음성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주를 알아야 하고, 성경을 알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주의 음성을 들어도 옆에서 누가 말한 줄로 알고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마틴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1:17)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님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쟌 웨슬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오직 성경 한권이면 족합니다. 미국 남부에서는 어느 평신도 부부가 시작한 성경 읽기 모임이 부흥하여 수십 명 이상의 성경 공부팀이 형성되었고, 거기서 헌신된 선교사들이 대거 배출되었습니다. 성경 읽기만으로도 우리는 삶이 완전히 변화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읽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읽기만으로도 우리는 삶이 변화되며, 영적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책이기에 그 자체만으로 완전한 책이며, 누구라도 쉽게 읽고 얼마든지 변화 받을 수 있습니다(벧후 1:21). [베레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탐구하므로](행17:11). 주님이 맨 먼저 하신 일도 성경을 읽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자라난 나사렛에 가사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눅4:16). 주님이 사람들에게 명령하신 것도 성경을 읽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탐구하라. 이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기 때문이니 성경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거하느니라.](요5:39).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 읽기를 가장 강조했습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면하는 것과 교리를 가르치는 것에 마음을 쏟으라.](딤전4:13). 읽어야 합니다. 주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가 자기 왕국의 왕좌에 앉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 있는 그것에서 이 율법을 책으로 한 권 필사(筆寫)하여 평생토록 자기 곁에 두고 읽어서 [주] 자기 하나님 두려워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법규를 지켜 행할 것이니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자기 형제들 위로 올라가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그러면 이스라엘 한가운데서 그와 그의 아들들이 자기 왕국에서 자기 날들을 길게 하리라.] (신17:18~20). 여기에는 성경 읽기의 유익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 두려워하기를 배웁니다. 성경을 읽을 때 겸손하게 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좌우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날들이 길어집니다. 주님은 평생토록 자기 곁에 성경을 두고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성경 읽기는 성공을 위한 형통함과 성공의 첫 단추입니다. [너는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밤낮으로 그 안에서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이는 그리하면 네가 네 길을 형통하게 하며 또한 크게 성공할 것임이라.](수1:8).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고 하셨는데 이는 성경 읽기를 말합니다. 묵상은 읽은 말씀을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며,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은 읽은 말씀을 몸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어야 할 책은 많아 보여도 오직 한 권 성경 읽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성경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내 아들아, 이것들이 네 눈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건전한 지혜와 분별을 지킬지어다.](잠3:21), [그것들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한가운데 간직하라.](잠4:21).
이스라엘이 타락했을 때 그들은 성경을 읽음으로써 영적 회복과 부흥을 맞았습니다. 출애굽의 여정 속에서 그들은 성경을 읽었습니다. [언약의 책을 가져다가 백성이 듣는 데서 읽으매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행하고 순종하리이다, 하니](출24:7). 그들은 낭독되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결단했습니다. 이것이 헌신이요, 예배요, 참된 섬김입니다. 여러분들은 말씀을 통해 이런 결단을 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은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회개와 부흥이 옵니다.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주]의 집에서 율법 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왕하22:8). 사반은 성경을 읽고 나서 왕 앞에서 그 책을 읽었습니다. [또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보여 주며 이르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었나이다, 하고 왕 앞에서 그 책을 읽으매 왕이 율법 책의 말씀들을 듣고는 자기 옷을 찢으니라.](왕하22:8~11). 사반이 성경을 읽었고, 왕이 사반이 읽는 성경의 말씀을 들었을 때 이스라엘은 타락의 긴 터널을 벗어나 영적 부흥을 맞았습니다. 히스기야는 민족이 왜 이토록 망해가는지 알았고, 주님이 왜 진노하셨는지 깨달았으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주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 가족의 문제, 교회의 문제, 조국의 문제를 깨닫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영적 각성과 부흥이 옵니다. 참된 경배는 성경을 펴들고 읽는데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온 백성이 한 사람처럼 물 문 앞 거리에 함께 모여 서기관 에스라에게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 책을 가져 오라 말하매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 책을 가져다가 남녀 회중과 지각(知覺)이 있어 들을 수 있는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물 문 앞 거리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와 여자와 깨달을 수 있는 사람들 앞에서 읽으매 온 백성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더라.] (느8:1~3). 제사장 에스라가 성경을 들었고, 백성들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에스라가 읽는 성경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30-40분 설교하는 것을 에어콘이 켜진 방에서 평안히 앉아서 듣는 것이 아니라 야외의 내리쬐는 햇볕에서 서서 들었습니다. [(서기관 에스라가 온 백성 위에 있으므로) 온 백성의 눈앞에서 책을 펴니 그가 책을 펼 때에 온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주] 곧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매 온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머리를 숙여 얼굴을 땅에 대고 [주]께 경배하였느니라.] (느8:5~6). 그들은 성경책을 펴서 주님을 찬송할 때 온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성경을 통해 주의 말씀을 들은 백성들의 반응이야말로 참된 경배입니다. 이들은 성경 낭송을 통해 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울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에서 책을 명료하게 낭독하고 그 의미를 알려 주어 그들로 하여금 그 낭독하는 것을 깨닫게 하니라. /그때에/ 온 백성이 율법의 말씀들을 듣고 울므로 디르사다인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서기관인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온 백성에게 이르기를, 이 날은 [주] 너희 하나님께 거룩한 날이니 애곡하지 말며 슬피 울지 말라, 하고](느8:8~9). 말씀을 펼 때 경배하고, 말씀을 듣고 우는 백성들!! 이것이 바로 영적 부흥입니다. 이후에도 그들의 성경 읽기는 계속되었습니다. [또 그들이 낮 사분의 일 동안에는 자기 자리에 서서 [주] 자기들의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또 낮 사분의 일 동안에는 /죄를/ 고백하며 [주] 자기들의 하나님께 경배하니라.](느9:3). 영적 각성과 영적 부흥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말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생명입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4:4). 하나님의 말씀은 빵이요, 물이요, 꿀이며, 불이요, 칼이요, 망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요, 방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영적 자원을 공급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라면(약2:26) 영적 자원이 없이 사는 삶은 죽은 삶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6:63).
2.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습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라.](히11:3).
3.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십니다. [이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라. 그분께서 자신의 권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붙드시며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하게 하신 후에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
4.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보관하고 계십니다.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은 /주께서/ 같은 말씀으로 보관하사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기 위하여 예비해 두신 것이라.](벧후3:7).
5.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약1:18).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벧전1:23).
6.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을 줍니다. [그가 네게 말씀을 전하리니 그 말씀으로 너와 네 온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다, 하거늘](행11:14).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의 종류를 살펴보겠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복된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의 진리입니다. 성경은 결코 생명의 말씀, 복된 말씀이 전부가 아닙니다. 여호수아의 증언을 들어 보십시오. [그 뒤에 여호수아가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것에 따라 율법의 모든 말씀 곧 복과 저주의 말씀을 낭독하였으니](수8:34). 성경은 분명히 복의 말씀인 동시에 저주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복되도다!”라고 선포하지만 “화로다!”하고 저주를 선포합니다. 주님은 “화있을진저, 화가 있으리로다!”란 말씀을 얼마나 반복적으로 자주 선포하셨는지 보십시오.
우리는 주님이 우리 앞에 두 가지를 두셨음을 성경을 통해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말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보라, 내가 이 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이 날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들에 순종하면 복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이 날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에서 돌이켜 떠나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들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신11:26~28). 신명기 30:1에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앞에 둔 이 모든 것 즉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주] 네 하나님께서 쫓아내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이것들을 생각하고]라고 하셨고, 신명기 30:15에도 [보라, 내가 이 날 생명과 복과 또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계속 말합니다. [내가 이 날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로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또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나니 그러므로 너와 네 씨가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며](신30:19)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앞에 두신 선택의 문제에서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욥기에 참으로 지혜로운 한 사람이 욥과 세 친구들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이는 입이 음식을 맛보는 것같이 귀가 말들을 시험하기 때문이니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공의를 선택하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욥34:3~4). 이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시험해 보라고 하셨습니다(살전5:21). 아담은 이점에서 실패했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이 점에서 넘어져 인생을 허무하게 끝내고 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고, 바른 선택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은혜의 말씀, 생명의 말씀, 복의 말씀, 저주의 말씀, 심판의 말씀, 믿음의 말씀, 권능의 말씀, 진리의 말씀, 지식의 말씀 등 매우 다양하게 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화를 말씀하실 수 있고, 저주를 말씀하실 수 있고, 심판을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며,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또 하나의 방법은 설교를 통해서입니다.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 형식이 있는데 첫째가 성육신하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둘째가 영감으로 주어진 기록된 성경이 있고, 셋째가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있다고 했습니다. 설교는 결코 설교자 자신의 말이 아니며, 사람들의 강론이 아닙니다. 설교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 말씀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순히 인간적인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통하여 전달되고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는 형식입니다. 하지만 어느 설교자도 자기의 말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할 수 없으며 자기의 말을 신격화시켜서도 안 됩니다. 설교자의 말은 여전히 인간의 말이고 이 말을 하나님 말씀 되게 하는 것은 설교자의 재능이나 제도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설교자들을 세우시고 자신의 말씀을 증거 하도록 하신 것은 주님을 증거하고 증언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해서 행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견해가 아니라 구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나 빌립의 설교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어느 하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말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거짓 대언자요, 거짓 교사요, 거짓 사역자들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또한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를 드림은 너희가 우리에게서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들 안에서 효력 있게 일하느니라.](살전2:13).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은 바울의 말을 사람의 말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강건하게 세워졌습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어떠했습니까? [우리뿐 아니라 그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으나 그 선포된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한 것은 그 말씀이 그것을 들은 자들 속에서 믿음과 결합되지 아니하였음이라.](히4:2). 그들은 그 선포된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래서 아무 유익도 얻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얼마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말할 전도자를 찾으시며, 그 입에 말씀을 담아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견해가 아니라 성경의 증거를 말할 때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이지 사람의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지만 전혀 유익을 얻지 못하는 것은 설교를 듣는 자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마치 관람객이 멀리서 연극을 관람하듯이 하는 자세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설교자를 통해 자신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멘”으로 화답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미 이전에 기록해 두신 말씀을 성령을 통해, 설교자를 통해 여러분 안에 이 시간 새롭게 말씀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여러분이 들을 수 없다면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아삽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옵소서. 오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히 계시지 마옵소서.](시83:1). 우리 역시 이런 기도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늘 듣고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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