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새 페이지 1 하나님의 성품 중에 거룩과 질투 사랑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사랑과 질투는 동전의 양면과 같고 손바닥과 손등처럼 하나로 묶여져 있습니다. 동전의 한 쪽만 있고 한 쪽이 없다면 그것은 화폐가 아니며, 손 바닥만 있고 손 등은 없는 손이 없듯이 사랑의 하나님은 반드시 질투의 하나님이실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너무나 크고 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요, 거룩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실만큼 깊고도 큰 사랑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질투 역시 사랑과 비례합니다. [/너는/ 나를 도장같이 네 마음에 새기고 도장같이 네 팔에 새기라. 이는 사랑이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가 무덤같이 잔인하기 때문이니 그 숯은 극히 맹렬한 불꽃을 지닌 불붙은 숯이니라.](아8:6). 주님의 사랑은 크고도 강렬하듯이 질투의 불꽃 역시 맹렬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와 동일한 정도로 “하나님은 질투”이십니다.

흔히 사람들은 질투를 시기심과 혼동해서 나쁜 것으로 보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경건한 질투를 했는데 이는 주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질투로 너희에 대하여 질투하노니 이것은 내가 너희를 한 남편에게 정혼시켜 순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고자 함이라.](고후11:2). 성도는 모두 하나님의 질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가 이르되, 내가 [주] 만군의 하나님을 위하여 심히 질투하였사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들을 헐며 칼로 주의 대언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제거하려 하나이다.](왕상19:14). 성도들이 주님을 버리고 죄를 짓는 것을 보면 질투해야 합니다. 마음 속에 분노가 일어나야 합니다.

유교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은 질투를 죄악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자의 질투를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고 해서 죄악시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질투는 여성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졌고, 부정적이고 나쁜 성품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에서는 바로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과 관련해서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질투입니다. 나훔서 1:2에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주]는 원수갚으시는 /주/시니라. [주]는 보복하시며 격노하시는 /주/시니 [주]는 자신의 대적들에게 보복하시고 자신의 원수들을 위해 진노를 간직하시며](나1:2)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질투는 큰 질투입니다. 결코 작은 질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와 대화하던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예루살렘과 시온을 위하여 큰 질투로 질투하며](슥1:14),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큰 질투로 질투하며 그녀를 위하여 큰 격노로 질투하였노라.](슥8:2). 주님의 질투가 얼마나 큰지 우리는 성경을 읽다보면 곳곳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어리석은 자들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오직 사랑, 은혜, 긍휼만 외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질투를 소멸케 하시는 불(신4:24,히12:29), 타는 불(시 79:5)로, 타오르는 연기(신 29:20)로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이자 이름으로서의 질투는 하나님의 진노나 주의 분노라는 감정과 함께 언급되며, 이것은 늘 주의 날의 복수와 연관이 있습니다(나1:2). 특히 잠언 6:27-35 말씀은 "복수의 날"(눅 21:20-24)에 있을 이스라엘과 이방에 대한 주의 분노를 남편의 질투로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그의 원수에 대해 용사같이 나가시며 전사같이 질투를 일으키시고(사 42:13), "주의 진노의 날" 이 질투의 불로 온 땅을 삼키시며 모든 악을 소멸하시는 것입니다(습1:18, 3:8). 주 하나님께서는 우상의 제단에 자기 자식들을 희생 제물로 바친 음행(겔16:20,21)을 저지른 창녀 예루살렘에게 진노와 질투의 피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겔16:38,23:45, 레20:10; 계14:19,20) 또 주의 심판의 날에 대해서는 주의 질투의 불과 주의 진노의 불 속에서 경고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겔36:5,6, 38:18-23). 하나님의 질투*는 대환란 때 심판과 보복으로 나타나고, 성도들의 영적 음행과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이는 나 곧 [주] 네 하나님이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니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20:5). 사랑과 질투의 관계는 정비례합니다.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시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질투가 없는 사람은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질투가 없는 사람은 거룩한 분노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난 성도들, 하나님의 신성에 동참한 성도들은 주님과 동일한 성품을 지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에 있는 우상들을 보았을 때 영이 격동했습니다. 엘리야는 주를 위해 질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를 위한 이런 질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질투입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경배하지 말지니 이는 [주]가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니라.](출34:14). 하나님이 얼마나 질투하는지 안다면 감히 한눈 팔 생각은 아예 버려야 할 것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들이 강한 자의 질투를 일으킴으로써 망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질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는 [주] 네 하나님이 소멸시키는 불이시요, 심지어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라.](신4:24). 질투는 본능입니다. 육신적 질투는 육신의 본능이요, 영적 질투는 영적 본능입니다. 영적 질투와 영적 시기심은 약간 다릅니다. 시기심은 상대를 인정해 주지 못하고, 자기보다 나은 것은 무너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죄악입니다. 시기심은 육신의 타락한 본성에서 나오는 죄악입니다. 그러나 질투는 죄가 아닙니다. 시기심은 뼈를 썩게 하지만 질투는 주님께 칭찬을 받습니다. 광야에서 발람의 꾀에 빠져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의 여인들과 음행에 빠졌을 때 질투를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비느하스입니다. [그들이 또 스스로 바알브올과 연합하고 죽은 자들에게 바친 희생물을 먹어서 자기들이 창안(創案)한 것들로 이같이 그분의 분노를 일으키므로 재앙이 그들에게 임하였도다. 그때에 비느하스가 일어서서 심판을 집행하니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시106:28~30). 비느하스는 주를 위해 질투를 했고, 그의 이름은 영원히 성경에 기록되어 우리에게 본이 되고 있습니다. 비느하스가 주를 거슬러 이방 여인과 함께 장막으로 들어가는 형제를 따라가 침상에서 창으로 그들을 꿰뚫어 버렸는데, 매우 잔인한 장면같아 보이지만 주를 위한질투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주님의 재앙은 비로소 그쳤습니다(민25:8).

질투와 비슷한 말로 시기심이 있습니다. 질투와 시기심은 너무나 유사해서 거의 같은 단어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질투는 죄가 아닙니다. 반면 시기심은 뼈를 썩게 하는 죄악입니다.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건전한 마음은 육체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잠14:30). 시기심으로 인해 자멸한 대표적인 사람은 사울 왕입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인물이 좋고, 겸손하였습니다.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고, 백성들로부터 최초의 민선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울이 시기심으로 인해 망해 버렸습니다. 시기심은 능력많고 잘 생긴 사울 왕을 졸장부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다윗에 대한 시기심으로 인해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갔습니다. 시기심은 일상의 삶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사울 왕은 블레셋과 전쟁하다 다윗이 온다는 소식에 전쟁도 마다하고 다윗을 잡으러 갔습니다(삼상24). 이성이 마비되어 버린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기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종교적 죄목을 열거하며 빌라도에게 사형을 촉구했지만 빌라도는 그들의 속 마음을 정확히 읽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분을 시기하여 넘겨준 줄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더라.](마27:18). 그들의 시기심은 구원자 메시야를 사형수로 죄수로 만들어 죽이는 사법 살인을 자행한 것입니다. 시기심은 육친의 형제라 해도 살인을 불러 옵니다. 왜 형제들이 요셉을 죽였습니까? 시기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족장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이집트로 팔아 넘겼으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사](행7:9). 질투는 해도 상관없지만 시기는 해서는 안되는 죄악입니다. 여러분은 질투와 시기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 것입니다(고전13:4). 사도 바울은 시기하지 말자(롬13:13, 갈5:26) 권면했고, 명령했습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갈5:26). 시기심은 자신이 받아야 할 인정, 영광, 존경 등을 남이 가로채었다는 피해의식과 비교의식, 열등감에서 비롯됩니다. 또 영광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독점욕에서 비롯됩니다.

예화- 한번은 국제 경기에서 우승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한 영웅을 위해,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동상을 세워 주었다고 한다. 이 일로 질투심에 불타던 그 영웅의 친구는 그 기념비를 허물기 위해 매일 밤 그곳으로 가서 그 밑을 조금씩 조금씩 파들어 가기 시작했고, 얼마 후 그는 사람들 모르게 그곳에 그 동상을 쓰러뜨릴 수 있을 만큼의 구멍을 파는 데 성공했다. 며칠 간의 고된 노력 끝에, 마침내 국가의 영웅이 된 친구에게 치욕을 안겨 줄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떠 더욱더 힘차게 삽질을 하던 그는, 순간 무게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그 동상 밑에 깔려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시기심은 자신을 파멸로 몰아 넣습니다. [누구든지 구덩이를 파는 자는 거기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그 돌에 도로 치이리라.](잠26:27), [구덩이를 파는 자는 거기 빠질 것이요, 누구든지 울타리를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로다.](전10:8). 인간의 시기심이 얼마나 큰지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진노는 잔인하고 분노는 포악하거니와 시기 앞에야 누가 능히 서리요?](잠27:4). 시기심은 자기 중심적인 욕심과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질투는 올바른 사랑의 관계성에서 나옵니다. 주님께서 시기하신다는 말씀이 성경에 딱 한 구절 나오는데 이는 간음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 너희는, 우리 안에 거하는 영께서 시기하기까지 간절히 바란다, 하신 성경 기록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약4:4-5).

질투는 남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주를 위해 질투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위해 질투했습니다. 질투는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만약 질투가 죄라면 하나님은 죄악 자체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얼마나 자주 질투하시는지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질투의 법을 두셨고 배우자가 간음이나 부정을 했을 때는 죽임으로써 질투를 해소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불타는 불꽃같아서 한번 타오르면 누구도 끌 수 없습니다. [(이는 너희 가운데 계신 [주] 네 하나님이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 [주] 네 하나님의 분노가 너를 향해 /불같이/ 타올라 너를 지면에서 멸하실까 염려하노라.](신6:15). 질투는 심판을 불러옵니다.

저와 여러분이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아닌 다른 형상이 서 있다면 주님은 단호하게 심판하십니다. 에스겔 14:3-7을 펴 보십시오. [사람의 아들아,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며 자기 불법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두었으니 과연 그들이 내게 물을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의 집에서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며 자기 불법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두고 대언자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에게 나 주가 그의 우상들의 많은 수효대로 응답하리니 이것은 이스라엘의 집이 다 자기 우상들로 말미암아 나와 사이가 멀어졌으므로 내가 그들의 마음 상태대로 그들을 취하고자 함이라.](겔14:3-5). 하나님은 바깥 산당이나 산에 세워둔 우상이 아니라 이스라엘 집이 마음 속에 세워둔 우상들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우상들’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마다 자기 우상들이 마음 속에 있습니다. 성도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해야 합니다. 마음 속에는 그리스도가 있고, 성령이 충만히 거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소망이 마음 속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두신 기쁨과 화평과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같은 형제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 대신 자기 우상들이 세워져 있다면 주님은 불같이 진노하시며, 질투가 활활 타오르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가득차 있는가는 그 사람의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보고(寶庫)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보고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5)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정욕이 가득한 사람은 욕망의 화신이 됩니다. 마음에 교만이 가득한 사람은 주님이 대적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고, 마음의 상태대로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이 마음 속에 자기 우상들을 둔 채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은 우상들의 수효대로 응답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집은 우상들로 말미암아 주님과 멀어졌는데, 주님은 그 멀어진 마음 상태대로 그들을 취하신다고 하십니다. 이는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경고를 받고 깨어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 속에 세워둔 우상들, 마음 속에 새겨진 형상들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시간 우리 마음 속에 세워 두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버려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 보시기를 바랍니다. 마음 속에 질투의 형상을 세워둔 채 주님께 나아옴으로 주님의 질투를 불러 일으키고 진노의 대상이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멸망에 앞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전에 질투의 형상을 세웠습니다. [그때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북쪽을 향한 길을 /바라보라/, 하시기에 내가 눈을 들어 북쪽을 향한 길을 /바라보니/, 보라, 제단 문의 북쪽 어귀에 그 질투의 형상이 있더라.](겔8:5). 우리는 우리 몸이 바로 주님의 성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질투의 형상이 서 있었듯이 우리 마음 속에는 질투의 형상이 서 있지 않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 속에 세워 두어야 할 것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만약 이런 것들이 마음에 없다면 여러분은 우상을 마음 속에 세워둔 것이며, 주님의 질투를 유발할 수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날 내가 네게 명령하는 이 말씀들을 너는 마음 속에 두고](신6:6). [원하건대 /너는/ 그분의 입에서 법도를 받고 그분의 말씀들을 네 마음 속에 쌓아 두라.](욥22:22). 말씀이 마음 속에 있는 사람은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결코 미끄러지지 아니하리로다.](시37:31). 처음에는 신앙이 좋았다가 삶의 연수가 더할수록 믿음이 약해지고, 퇴색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고, 묵상하지 않고,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앙연륜에 비해 터무니없이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오늘날 지역 교회가 약화되고 세속화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예 읽지도 않고, 혹 읽더라도 늘 보는 부분만 보는 편식 현상이 있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단어가 다 하나님의 말씀이요, 모든 기록들이 다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욥이 말한 대로 [그분의 말씀들을 마음 속에 쌓아 두라.] 이는 묵상과 암송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때 범죄하지 않게 됩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 속에 숨겼나이다.](시119:11).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는 그 사람의 인격과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불법이 들어있으면 불법자요, 해악이 들어 있으면 범죄자가 됩니다. 잔꾀가 들어 있으면 약은 사람이 되고, 정욕이 들어 있으면 우상 숭배자가 됩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오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옵니다. 말씀이 속에 있으면 주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고, 불법이 마음 속에 있으면 기도가 막히고, 마음에 평안이 사라지고, 죄악에 빠지게 되며, 마음의 속임수에 넘어가게 됩니다.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오니 참으로 주의 법이 내 마음 속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8).

여러분은 속에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차 있지 않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무엇인가 다른 것으로 차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상을 마음 속에 품고 나온 이스라엘 장로들과 똑 같습니다. 이는 주님의 질투를 유발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너희 마음 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골3:16). 바른 말씀없이 바른 신앙이 있을 수 없고, 바른 신앙없이 바른 신앙인이 될 수 없으며, 바른 신앙인이 없이 바른 교회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없이 성경적인 삶을 산다는 사람은 그리스도없이 그리스도인처럼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예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둘째, 우리 마음 속에는 성령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 속에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셨느니라.](갈4:6).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느니라.](고후1:22).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외치지만 정작 자신 안에는 성령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살거나 전혀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충만하라”(Be filled with Spirit)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이 공허하고 텅 빈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마음 속에 말씀과 성령으로 채움 받지 못한 사람들은 주로 다른 무엇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듯이 사람의 마음은 세상의 어떤 피조물로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풍요를 사랑하는 자도 소출로 만족하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5:10). 돈, 명예, 권력, 정욕 등 어떤 것으로도 사람의 마음은 결코 차지 않는데 이는 본래 아담이 모든 피조물의 왕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보다 존귀하며, 혼은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에(막8:36-37) 천하의 어떤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허한 것입니다. 오직 사람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높고도 크시며, 무한광대하신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성령으로 채움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마귀들로 자신을 채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잠언 기자가 말하기를, [그러므로 그들이 자기 길에서 난 열매를 먹으며 자기 계략들로 채워지리니](잠1:31), [마음이 타락한 자는 자기 자신의 길들로 채워지려니와 선한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만족을 얻으리라.](잠14:14)고 한 대로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채워지라.]는 명령대로 우리는 주의 영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 속에 성령이 없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성령이 있지만 성령이 억누름을 받아 없는듯 하는 성도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성령의 은사가 드러나지 않으며, 성령의 능력과 확신이 없습니다. 나이 40세만 된 사람에게 물어 보십시오. ‘사는게 어때?’ 하면 대부분 ‘공허하지!’ 라고 합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성령 대신 다른 것을 마음 속에 채우려할 때 질투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주의 엄중한 명령이란 점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충만하지 못한 것은 그 자체가 죄이며, 주님의 질투의 대상입니다.

셋째, 우리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께서 거하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세워 두는 대신 우상을 세워두면 우리의 마음은 마귀들의 본부가 되고 맙니다.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 속에 거하게 하옵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엡3:17). 성도들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마치 방안 어딘가에 감금해 두고 없는 것처럼 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대신 밖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찾고, 은혜를 구합니다. 밖에서 무엇인가를 얻고, 가져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성도의 능력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영적인 역사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신비의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가를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게 하려 하시나니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 우리가 그분을 선포하여 각 사람에게 경고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자로 드리고자 함이니 이것을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강력하게 활동하시는 분의 활동을 따라 힘쓰며 수고하노라.] (골1:27~29). 사도 바울이 선포한 이 신비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저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알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가 바로 내 안에 거하시는 이 신비에 대해서 알아야 하며, 믿어야 합니다.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속에 거하게 하셔야만 합니다. 마음에 우상을 세워둔 사람들은 결코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계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알 수 없으며, 그 능력을 따라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고, 지각의 눈을 열어 주셔서 우리 안에 계신 신비,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마음 속에 그리스도 대신 다른 것을 세워두고 사는 성도들을 향해 질투하시며, 분노하십니다.

넷째, 우리 마음속에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오직 너희 마음 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하며](벧전3:15). 소망 역시 믿음과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셔야 의미가 있지 우리 밖에 계신 그리스도는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아니라면 성령은 나의 생명이나 능력이나 확신이 될 수 없듯이 소망 역시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소망이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신비의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가를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게 하려 하시나니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골1:27). 성도들은 낙담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는 자들이며, 육신의 겉모습을 통과해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들입니다. 소망은 환난과 연단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우리 마음 속에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지 입증하는 방법은 환난과 연단을 통해서입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이 숨어 계신 것 같고, 없는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환란을 당해보면 우리 마음 속에 무엇이 가득 차 있는지 다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그분을 통해 지금 서 있는 이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느니라.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로다.](롬5:2~4).

성경은 이 소망을 일컬어 복된 소망, 영광스런 소망, 의의 소망, 산 소망, 부르심의 소망, 하늘에 쌓아 둔 소망, 영광의 소망, 구원의 소망, 영원한 생명의 소망, 좋은 소망, 더 나은 소망이라고 합니다. 소망은 혼의 닻과 같습니다(히6:19). 이 소망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갑니다(히7:19). 소망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결정지어 줍니다. 소망이 있으면 깨어 있게 됩니다. 소망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디게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오실 그 은혜로 인하여 끝까지 소망을 가질지어다.](벧전1:13). 이 소망을 가진 사람들의 삶은 순결합니다.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분께서 순결하신 것같이 자기를 순결하게 하느니라.](요일3:3).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순결하지 못한 것은 마음 속에 소망되신 주님대신 우상들을 세워 두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우리 마음속에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두셨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 속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포도즙이 불어날 때의 /기쁨/ 보다 더 크니이다.](시4:7). 여러분의 소득의 증대, 수입의 증가, 급여의 상승, 투자한 주식이 오르는 기쁨보다 더한 기쁨이 주님이 우리 속에 두신 기쁨입니다. 주를 기뻐하는 것이 힘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의가 되시려고 죄가 되셨듯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슬픔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기쁨은 구원받은 성도의 표지입니다. [의로운 자들아, 너희는 [주]를 기뻐하라. 찬양은 곧바른 자들이 마땅히 행할 바로다.](시33:1). 환경이나 지금 처한 현실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의 근원은 주님이시오, 기쁨의 대상 역시 주님이십니다. [너는 또 [주]를 기뻐하라. 그분께서 네 마음의 소원들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라.](시37:4). 주님이 기쁨의 대상이요, 근원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그때에 즐거워하며 [주] 너희 하나님을 기뻐하라. 이는 그분께서 너희에게 이른 비를 적당히 주셨기 때문이며 또 너희를 위해 비를 내려 주시되 이른 비와 첫째 달의 늦은 비를 내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니](욜2:23). 마음 속에 우상이 있는 분들은 결코 주님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를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것을 쓰는 것이 참으로 내게는 부담이 되지 아니하며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3:1). [항상 {주}를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주님이 기쁨의 대상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무엇을 얻고, 성취하고, 뭔가 되었기 때문에 기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살전5:16). 여러분의 마음 속에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분명히 마음 속에 우상을 세워두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기쁨이 없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불행이지만 여러 사람에게 화를 입히며, 하나님이 분노하시고, 질투하시는 것입니다. 신약 성도들은 기쁨으로 일했고, 찬양했고, 주님을 섬겼고, 구제했습니다. 빵을 나누는 교제도 기뻐했고, 맞으면서도 기뻐했고, 감옥에 갇혀서도 기도한 후 기쁨으로 찬양을 불렀습니다. 기쁨이야말로 성도의 진정한 힘입니다. 기쁨은 내면에서 솟아나는 능력입니다. 기쁨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음 속에 우상을 세워 둔 채 하나님 앞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제거하십시오.

여섯째, 우리 마음속에는 형제들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 모두에 대하여 이같이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라. 나의 결박당한 일과 복음을 변호하고 확증하는 일에서 너희는 다 나의 은혜에 참여한 자들이니라.](빌1:7). 형제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형제들이 있기에 그들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그들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게 됩니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아니하더냐?](고후11:29). 형제들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를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뜨거운 형제애가 자리 잡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우상이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직접 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어찌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리요?](요일4:20). 형제간에 서로 돕고, 우애있게 지내는 것보다 부모에게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서로 돕고 사랑할 때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일곱째, 우리 마음 속에는 화평/평안/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평안을 주셨습니다. 두려움, 불안, 걱정, 근심, 염려, 조급함, 초조함 등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있어야 할 항목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로 삼으리니 곧 단련한 돌이요, 보배로운 모퉁이돌이며 견고한 기초로다. /그것을/ 믿는 자는 다급하지 아니하리로다.](사28:16). 다급함, 초조함, 조급함은 모두 마귀가 주는 것들입니다. 단지 혈통의 성격 문제가 아닙니다. 평안이 있으면 자연히 마음의 여유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성소에는 기쁨,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나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하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하나님은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고후13:11). 여러분 안에 마음의 평안, 화평이 없다면 마음속에 우상을 세워 둔 채 주님께 나아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화평에 이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화평이 너희 마음 속에서 /너희를/ 다스리게 하라. 너희도 이 화평에 이르도록 한 몸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니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 속 우상을 제거하고, 불법을 제거하십시오. 마음속에 두어야 할 것을 두고, 버려야 할 것들은 버리도록 하십시오. 반대로 버려야 할 것들을 끌어안고, 마음 속에 간직해야 할 것들을 버리면 주님은 질투하십니다.

여덟째, 우리의 마음 속에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은혜가 없는 마음은 아무 것도 자랄 수 없는 황무지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움직일 수 없는 왕국을 받을진대 은혜를 소유하자. 이 은혜를 힘입어 우리가 공경하는 마음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도록 섬길지니](히12:28). 우리는 은혜 안에서 강건해야 하며(딤후2:1), 은혜로 주께 노래해야 하며(골3:16), 은혜가 우리 안에서 군림해야(reign) 합니다(롬5:21). 은혜가 우리를 가르치도록 해야 합니다(딛2:11-12). 은혜가 없는 사람들은 이미 교만이란 우상이 마음 속에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겸손한 자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말씀의 은혜가 있어야 할 마음에 은혜가 없다는 것은 그 사람 속에 교만의 우상이 세워져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더 많이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에 교만의 우상을 가지고 주께로 나오고, 예배하러 나오면 주님은 그 사람을 대적하시는 것입니다(약4:6). 교만은 교만의 왕인 마귀의 자녀들에게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교만하면 주님이 질투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우상을 세워두지 말 것을 명령하셨는데, 우상은 주님의 질투의 대상입니다. 우상이나 우상을 만드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자는 매 한 가지입니다. [우리가 {주}의 질투를 일으키겠느냐? 우리가 그분보다 강하냐?](고전10:22)고 말한 바울의 권면을 받아 우리는 주님의 질투를 일으키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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