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새 페이지 1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묻는다면 우리는 하늘에 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스라는 기도하면 [우리 조상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으므로](스5:12)라고 했고, 욥은 [또한, 보라, 이제 내 증인은 하늘에 계시고](욥16:19)라고 했으며 솔로몬은 [이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기 때문이니라.](전5:2)고 증거했으며, 다니엘은 [오직 은밀한 일들을 계시하시는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이시니이다.](단2:28)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 계시를 받았고, 조명을 얻었습니다. [이는 높고 높으시며 영원히 거하시고 이름이 거룩이신 이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고](사57:15). 주님은 높고 거룩한 곳 셋째 하늘에 거하십니다. 무엇보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복해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마5:16,45,48, 6:1,9 7:1)라고 말씀하셨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묻는다면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고백하기를,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리이까? 내가 주의 눈앞을 떠나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오며 지옥에 내 침상을 펼지라도, 보소서, 주께서 거기 계시나이다.](시139:7~8)란 말씀처럼 주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내가 보지 못하도록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는 자가 누구냐? [주]가 말하노라. 내가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지 아니하느냐?](렘23:24) 하셨습니다. 주님이 어디에나 계신다는 지식은 우리의 삶을 경건함과 두려움 가운데 살도록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묻는다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말씀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곁에 계십니다. 성경의 분명한 진리 가운데 하나는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우리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내가 또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내가 [주] 곧 그들의 하나님으로서 그들 가운데 거하려고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나는 [주] 곧 그들의 하나님이니라.](출29:45-46).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영 가운데 계셨고, 백성들 한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불신과 불순종으로 반역할 때 주님은 하늘에 계신 주를 멸시했다고 하시지 않으시고 ‘너희 가운데 거하는 [주]를 멸시하고’(민11: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성막과 성전을 만들었는데 그곳은 주님이 거하시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성막, 성전 속에 거하시는 것을 영광의 구름을 통해 보여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솔로몬 왕이 성전 건축을 했을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건축하고 있는 이 집으로 말하건대 만일 네가 내 법규 안에서 걷고 내 법도를 집행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 그 안에서 걸으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행할 것이요,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더라.] (왕상6:12~13).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이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시는 것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 주님의 법규 안에 걷고, 법도를 집행하며, 모든 명령을 지켜 그 안에서 걸으면 주님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시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떠나 버리십니다. 이스라엘은 주님을 한 가운데 모신 상태에서도 불신, 불순종, 음란, 우상 숭배와 같은 죄로 망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결국 그들을 떠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에스겔을 통해 성전을 떠나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겔10:18).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던 하나님은 그들이 범죄함으로 포로로 잡혀갔을 때 성전을 떠나 버리셨습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려면 다시 오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한 가운데, 인류 한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獨生)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육신을 입으시고 백성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들은 알지 못했고, 영접하지 않았으며, 배척하였고, 죽여 버렸습니다. 이제 주님이 다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는 다시오셔야 합니다. [오 시온의 딸아, 노래하며 기뻐하라. 이는, 보라, 내가 와서 네 한가운데 거할 것임이로다. [주]가 말하노라. 그 날에 많은 민족들이 [주]와 연합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한가운데 거하리니 그리하면 만군의 [주]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슥2:10-11). 이는 재림의 때입니다. 이스라엘을 떠나셨던 주님이 다시 시온으로 돌아오십니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으로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한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도시라 일컬음을 받겠고 만군의 [주]의 산은 거룩한 산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슥8:3).

주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셨듯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너희에게 다시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어 주시리라. 이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니라.] (마18:19~20). 주님은 기도하는 성도들 사이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두 사람이 모여 기도하면 주님과 함께 셋이 있는 것이요, 세 사람이 모여 기도하면 주님이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넷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집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가족 공동체라면 네 식구인 집은 다섯명이며, 다섯 식구인 집은 여섯 명인 것입니다. 주님은 “나도 그들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니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마28:20).

다니엘의 세 친구인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용광로에 던져졌을 때 주님은 그들과 함께 계셨고, 불 한가운데 계셨습니다.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보라, 내가 보니 결박이 풀린 네 사람이 불 한가운데서 걷고 있는데 그들이 아무 해도 입지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도다, 하더라.](단3:25). 주님은 불 곁에 계신 것이 아니라 불 한가운데서 걸으셨습니다. 주님은 함께 하시고 그 가운데 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도시/ 한가운데 계시매 그 /도시/가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요, 하나님께서 그 /도시/를 도우시되 이른 새벽에 도우시리로다.](시46:5). 전쟁의 때에도 주님은 그들 한 가운데 계셨습니다. 앗시리아 왕 산헤립은 대군을 거느리고 왔지만 그 도시 한 가운데 계신 주님은 하룻 밤에 18만 5천명의 앗시리아 군대를 죽여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노래해야 합니다. [시온의 거주민아, 너는 소리 높여 외칠지니 이는 네 한가운데 계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께서 위대하시기 때문이니라, 할 것이니라.](사12:6).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은 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 가운데, 이 시간 우리 한 가운데 주님이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찬양 중에 거하시며, 집회의 회중들 사이에 거하시는 주 하나님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네 한가운데 계시는 [주] 네 하나님은 능하신 이시니 그분께서 구원을 베푸시고 너로 인해 기뻐하며 즐거워하시고 친히 사랑하시는 중에 안식하시며 너로 인해 노래를 부르고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이제 우리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두고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날에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4).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등과 함께 계시던 주님께서 느닷없이 ‘내가 너희 안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정신, 나의 말, 나의 사상, 나의 영향력이 너희 안에 있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 안에'(I in you)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이 직접 우리 안에 있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태어날 아이가 10개월 동안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사람 안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 안에 거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잃어버린 존재이며, 지옥을 향해 가고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그 위에 머물고 있으며, 육신의 본능에 따라 세상의 행로를 그대로 따르는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거하지 않고 기독교 정신이 거하고, 기독교 사상과 영향력만 살아 있다면 그는 고매한 종교인일 뿐 그의 영은 여전히 죽어 있으며, 마귀의 자녀일 뿐입니다. 이는 저의 견해나 의견이 아닙니다. 이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살펴보고 너희 자신을 입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13:5).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지 않으면 그는 버림받은 자입니다. 그는 교회에 빠짐없이 출석하고 성경 공부를 통해 성경을 어느 정도 이해하며, 많은 선행과 봉사를 통해 헌신된 사람이요,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 그는 버림받은 자요, 진노의 자녀요, 불순종의 자녀요, 마귀 새끼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원받았다, 그리스도인이란 의미는 어느 정도의 종교적 교양과 성경적 지식을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가? 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롬8:9).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인이며, 새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는 버림받은 자요, 여전히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믿을 때 주님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할 때 주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을 그냥 주(a lord)가 아니라 유일한 주(the Lord)로 믿고 고백할 때 주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거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영접하는 자들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晩餐)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3:20). 주님은 우리를 불러내셔서 식사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열어 주는 문을 통해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함께 만찬을 먹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 들어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상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님은 우리 안으로, 우리 속으로 들어와 영원히 거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일서를 보십시오.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자는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께서는 그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힘입어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4). 내 안에 감정적 변화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마귀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순종하는 성도만이 승리의 삶, 풍성한 삶, 능력의 삶, 열매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도 볼 수 없고, 세상 어디에나 편재해 계신 무소부재의 하나님도 볼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역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때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전하게 되느니라. 그분께서 자신의 영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4:12-13).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내 안에 누가 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으며, 분명하게 알아야만 합니다.

주님은 왜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까? 우리 안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주님은 손님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주인으로 오셨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왕국을 임하게 하신 왕으로 오셨습니다(롬14:17).

첫째,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은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시기 위함입니다.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줄을 /내가/ 확신하노라.](빌1:6). 사람은 아무도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힘과 지혜와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들을 위하여 창조된 자들이기 때문이니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주님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육신의 일들이 아닌 영적인 일들, 땅에 속한 일들이 아닌 하늘에 속한 일들, 썩을 일들이 아닌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일들을 행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배를 위해서 일하지만 주님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이는 너희 안에서 일하시며 자기가 참으로 기뻐하는 것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빌2:13). 저와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면 우리는 놀랍고도 놀라운 체험과 간증을 수없이 맛보게 될 것입니다.

중국에서 활동했던 영국의 유명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선교지에서 혹독한 고생과 시련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탈진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서 모든 일을 다 했다고 자신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몸은 병들고 마음은 지쳤습니다. 하지만 그가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말씀을 통해 자신이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을 통해서 일하는 존재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목사님은 순간 포도나무 가지가 습기와 양분을 뿌리로부터 끌어당기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가지는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습기와 양분을 가지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나는 예수께 붙은 가지이므로 예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서 일만하면 될터인데, 예수님이 할 일을 내가 맡아서 하려고 고민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동안 자신이 그 모든 일을 하려고 했던 것을 크게 회개하였습니다. 그때에 마음속에 넘치는 평화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 목사님은 고민하거나 번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 도울 수 있는 사람을 보내시는 이도, 물자를 주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저는 주께 받아 주님이 시키시는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니 저를 붙들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엎드려 주께 기도하자 기도하는 것마다 주님이 응답해 주셔서 그는 중국이 공산화되기 전까지 중국내지에서 800개의 교회를 세우고 12만 5천명을 구령하는 위대한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내 안에 계신 주님을 골방에 감금해 두고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일함으로써 실패와 좌절의 쓰라림을 경험하는 예가 허다합니다. 술을 끊는 일이나 담배를 끊는 일이나 악한 습관을 끊는 일도 내가 하려고 하지 말고,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일하시는 분이심을 신뢰하고 맡긴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끊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선한 일을 행하시는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의뢰하십시오. [이제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권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도록 능히 행하실 분에게](엡3:20). 이것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주님의 능력입니다.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모든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도록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저 하늘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은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이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하기 때문이니 그분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고후13:3). 바울은 이적과 기사, 능력과 표적을 행함으로 사도로 인정을 받았지만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바울 사도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구했습니다. 바울이 구원받기 전에 하나님은 하늘에서 빛을 비추시며 말씀하셨지만 구원받은 후에 주님은 하늘에서 말씀하시지 않고, 바울 사도 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의 빛을 보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은 자신 안에서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환란의 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준비조차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말하는 이가 너희가 아니요,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기 때문이라.](마10:20). 주님께서 친히 그 안에서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주님은 내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기도할 때 주님은 내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찬송할 때 주님은 내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어떤 일을 통해서, 사건을 통해서 주님은 내 안에서 말씀을 깨우쳐 주시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 때 우리는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주님이 나를 통해서 일하시는 선한 손길을 체험하게 됩니다.

셋째,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은 우리 안에서 은혜를 넘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은혜의 복음으로 은혜의 성령으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부르십니다. 주님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또 그들이 너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로 인하여 직접 너희를 위해 기도함으로 너희를 사모하느니라.](고후9:14).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며 넘치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을 가져다 주며(딛2:11),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며(딛3:7),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를 가르칩니다.

우리 안에 은혜가 넘치면 형제를 향한 구제와 이웃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신약 성경에 은혜란 표현은 구제 헌금과 나누어주는 일에 자주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말이 아니라 행동과 나누어 주는 행위로 드러납니다. 은혜를 넘치게 하시는 이유는 모든 선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항상 모든 일에서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선한 일에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어떤 목사님이 성도들이 헌금을 잘 하지 않는 문제로 고민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헌금을 하라는 설교를 하기에도 민망하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그런 실정이었습니다. 구제와 헌금은 은혜가 넘치면 저절로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내 속에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받게 되면 물질적 은혜 역시 넘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내 안에 탐욕이 넘치면 절대로 헌금과 구제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되면 항상, 모든 선한 일에 넉넉하고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색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내 안에 은혜를 풍성하게 하신 하나님은 내가 하는 모든 일에도 풍성하게 하시며, 풍성한 씨앗을 뿌리고, 많은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자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인색하게 억지로 일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넷째,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은 우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너희 안에서 영광을 받고 너희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1:12). 사람은 밖에서 인정받는 것보다 안에서 인정받는 것이 훨씬 더 기쁩니다. 내가 모르는 사람 만명의 칭찬보다 내가 아는 사람 한 사람에게 칭찬 듣는 것이 더 보람 있습니다.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서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자식은 아버지의 아버지는 자식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우리 안에서 영광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이 내 마음 깊은 속에서, 내 마음으로부터 존경과 감사와 찬양이 흘러 날 때 주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속 중심에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남들이 오해해도 상관없습니다. 주님은 내안에서 거하시며 내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진리대로 행할 때 사람들은 나를 비난하고, 박해하고, 욕하지만 내 안에 계신 주님은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때로는 같은 신자들도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보는 대신 나의 겉모습만 봅니다. 우리가 모욕과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은 더욱 존귀해지며, 더욱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는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이 우리를 위하여 훨씬 더 뛰어나고 영원한 영광의 중(重)한 것을 이루기 때문이니라.](고후4:17). 주님이 고난을 주시는 것은 주님만 신뢰함으로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려 하심입니다. [형제들아, 아시아에서 우리에게 닥친 고난에 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가 힘에 겹도록 너무 눌림을 당하여 심지어 생명까지도 단념하고 우리 속에 사형 선고를 받았느니라.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1:8~9)

다섯째,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은 부활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성/령은 의로 인하여 생명이 되시느니라. 만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분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을 통하여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0-11). 주님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고, 마른 뼈도 부활하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날마다 죽음을 통해 부활의 권능,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 몸은 이미 죽은 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 사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2:20).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삶은 영적인 부활을 기초로 한 삶입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부활한 사람들입니다. 이는 육체의 부활과는 달리 옛 사람의 죽음, 아담 안에서 물려받은 자아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동차의 겉모양은 그대로이지만 속은 이전에 있던 디젤 엔진이 개솔린 엔진으로 바뀌고, 수동에서 자동으로 바뀌고, 4기통이 8기통으로 바뀐 것보다 더 큰 변화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몸은 여전히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질그릇 속에 있는 내용물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졌나니 이것은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며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고후4:7). 우리 안에는 성령이 거하시며,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주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주신 변화는 성경에서 족히 210가지가 넘습니다. 얼마나 바뀐 것이 많은지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우리가 가진 재능, 우리가 가진 힘과 지혜로 산다면 우리는 지치고 힘들고 낙담하고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기를 치고, 속이고, 남의 것을 이용해 먹고, 누구의 도움을 받고 그렇게 아등바등 삽니다. 그러나 내 안에 부활하신 주님이 거하시고, 주님의 힘과 능력과 지혜가 거함을 알고, 뛰어난 권능이 우리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을 안다면 자원의 고갈, 힘의 고갈, 지혜의 고갈, 영감의 고갈...고갈과 부족을 모르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여섯째,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드러내려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신비의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가를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게 하려 하시나니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골1:27). 하나님은 자신의 성도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십니다. 머리가 천재인 사람은 손과 발과 입을 통해서 자신의 천재성을 드러냅니다. 아무리 머리속에 영감이 넘치는 구상이 떠올라도 손이 말을 듣지 않으면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고, 입이 말을 듣지 않으면 노래나 시로 읊을 수 없고, 몸이 부자유스러우면 연극이나 영화로 드러낼 수 없습니다. 뿌리가 튼튼한 나무라 해도 가지가 시원치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은 우리의 지체들을 통해서 자신의 성품과 능력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주님이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것을 드러내는 몸의 지체들입니다. 주님이 뿌리가 되시고 우리는 열매를 맺는 주님의 가지들입니다.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안에 없는 것을 밖으로 드러낼 수 없습니다. 때로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있지만 그것은 위선이요, 가식이요, 거짓이며, 열매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을 통해서 뿌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맺는 영적 열매로써 사랑과 희락, 화평과 오래 참음, 부드러움, 선함, 믿음, 온유, 절제입니다(갈5:22-23). 십자가에서 이미 처형된 옛 사람의 본성을 드러낼 필요가 없습니다. 죽은 시체는 깊이 묻어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썩은 시체 냄새만이 진동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무슨 냄새를 맡는가? 산 자의 냄새인가? 죽은 자의 냄새인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이제 감사하노라. 이는 우리가 구원받은 자들 중에서나 멸망하는 자들 중에서나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냄새이기 때문이니 멸망하는 자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사망의 냄새요, 구원받은 자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냄새라. 누가 이런 일들을 감당하리요?] (고후2:14~16).

예화)- 지금부터 약 100년 전 영국의 런던 다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추운 겨울날 한 불쌍한 노인이 지나가는 행인들로부터 동전 한푼을 얻을까 싶어서 다 낡은 바이올린을 열심히 켜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별로 신통치 않는 재주에 지나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고 동전 한푼도 던지는 사람 없습니다. 날은 점점 추워지고 노인의 손은 굳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외국인이 여행을 하다가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가만히 서서 노인을 보더니만 노인 앞에 나가서 “노인장 그 바이올린을 내게 좀 빌려 주십시오.” 노인이 조금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러나 날씨도 춥고 손도 굳어졌으니까 바이올린을 빌려 주었습니다. 이 노신사는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습니다. 어찌나 그 선율에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 나오는지 지나가는 사람마다 발을 멈추고 돈을 던져 넣기 시작했습니다. 그 걸인 노인의 모자에 동전이 던져지니 은전이 던져지니 나중에는 지폐가 던져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이 노신사가 바이올린을 타니까 대군중이 모여서 그 추운 날에 정신없이 그 바이올린을 들었습니다. 경찰관이 교통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놀라서 이 분을 저지하려고 뛰어 왔다가 경찰관조차 그 음악에 그만 홀딱 빠져 가지고서 정신없이 듣고 있었습니다. 한참동안 듣고 있다가 한 사람이 고함을 쳤습니다. “아~ 저 사람은 니콜로 파가니니다.” 세계적인 바이올린의 천재, 니콜로 파가니니가 그 옆을 지나가다가 노인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그 다 낡은 바이올린을 빌려서 타기 시작하니까 그 다 낡아 빠진 바이올린에서 나오는 선율이 모든 사람을 매혹시켜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군중들 사이로 파가니니는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낡아빠진 바이올린과 같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켜 봤자 별볼일 없습니다. 사람들이 관심도 없고 원수가 치면 우리는 무너집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우리를 켜주는 위대한 주님이 계신 것입니다. 불의하고 추악한 우리 인간은 낡은 바이올린과 같이 보잘 것 없지만 그리스도의 손에 들려질 때에 그 가치의 중요성은 하늘과 땅처럼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연주하시도록 우리 몸을 내어 드릴 때 아름다운 음악이 나옵니다. 우리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경영하고 연주하겠다고 하면 아무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일곱째,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은 승리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그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라.](요일4:4). 한국은 5000년 역사 동안에 약 950회의 전쟁을 겪었습니다. 약 5년마다 한 번씩 전쟁을 했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최근 50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국 땅 안에 주한 미군이 캠프를 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안에 세계 최강국인 미국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 중국, 일본, 북한 등 아무도 쳐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우리 안에는 세상에 있는 누구보다도 크고 강하신 이가 거하십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승리자입니다. 열왕기하 6:14-17절에 보면 시리아 왕 벤하닷은 번번히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지만 패하는데 그 원인이 그 땅에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엘리사가 거기에 있는한 결코 전쟁을 이길 수없게 되자 엘리사를 먼저 잡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군대를 보내었습니다. 아침에 엘리사의 종이 밖에 나가보고 기겁을 하고 뛰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종이 일찍 일어나서 나가 보니, 보라, 군대가 말과 병거와 함께 그 도시를 에워쌌으므로 그의 종이 엘리사에게 이르되, 아아 슬프다. 내 선생님이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그가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우리와 함께한 자들이 그들과 함께한 자들보다 많기 때문이니라, 하고 기도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여시사 보게 하옵소서, 하니 [주]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보라,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6:15~17). 우리도 일생을 살면서 우리 주위에 시리아 군대와 같은 원수가 첩첩이 둘러쌉니다. 죄가 우리를 둘러싸고, 세상 유혹이 우리를 둘러싸고, 혹은 질병이 우리를 첩첩이 둘러싸고, 생활의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 우리를 둘러싸는가 하면 원수가 둘러싸고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가 그때 우리 힘으로 싸우려고 하다가는 질그릇에 불과한 우리는 박살이 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누가 있는지 모르고 덤벼오는 원수들은 전쟁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권능과 두려움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두려움에 떱니까? 왜 평안이 없습니까? 높고 높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하나님만 알고 내 안에 계시며, 말씀하시고, 은혜를 넘치게 하시고, 승리주시고, 새 생명으로 살게 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주님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길을 [주]께 맡기고 또 그분을 신뢰하라. 그분께서 그것을 이루시고](시37:5). 주님께 맡기지 않으면 주님은 일하실 수 없습니다. 사기꾼들은 네 돈을 맡기라고 하지만 주님은 네 짐을 맡기라고 하십니다. [네 짐을 [주]께 던져서 맡기라. 그분께서 항상 너를 붙드시고 의로운 자의 흔들리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55:22). 주님은 우리의 모든 일들을 맡기라고 하십니다. [네 일들을 [주]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생각하는 것들이 굳게 세워지리라.](잠16:3). 우리의 원수 갚는 일도 주님이 맡아서 처리해 주실 것이니 맡기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된바, 원수갚는 일이 내게 속하였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느니라.](롬12:19). 성질이 나면 [주여, 이 일을 주께 맡깁니다] 하고 접수해 버리십시오. 주님이 어떻게 처리하시는지 지켜 보시기만 하면 됩니다. 마음 속에 불현듯 불길한 생각, 걱정, 염려가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거나 마음 한 구석에 자리를 잡으면 그것을 얼른 주님께 맡겨 버리십시오.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이는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기 때문이니라.](벧전5:7). 이런 일을 맡아 주실 분은 주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왜 너희는 나를 놀리느냐? 나에게 맡겨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 맡긴 것을 노트에 메모해 가면서 확인하고 점검해 보십시오. 주님이 얼마나 철저히 야무지고도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시는지 경험하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무릎 굻고 기도로 맡기는 순간 바로 접수하십니다.

맡기는 것이 승리입니다. 맡기는 것이 평안입니다. 맡기지 못한 채 붙들고 있으면 힘만 들고, 일은 엉망이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 속에 거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도전하는 골리앗들에게 그보다 더 큰 이가 우리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시기 위함이란 사실을 알고 모든 삶의 도전들을 흔쾌히 받아 들이시기 바랍니다. “주님, 또 한 놈이 도전을 하는데 받아 주겠습니다!”라고 하십시오. “왜 내게 이런 일이 닥쳤습니까? 왜 자꾸 이런 일이 터집니까?” 하면서 불평을 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시련을 없애 주시지 않으시고, 시련을 이길 힘을 주시고, 친히 안에서 싸우시고 이기십니다.

우리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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