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br />무엇인가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생명은 부모에게 물려 받습니다. 문제는 태어난 자식들이 모두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요구 사항을 충분히 만족시켜 주지 못할 때, 원망과 불평을 토해냅니다. 자식의 필요를 다 채워주지 못할 때, “왜 날 낳으셨나요? 하나님께는 왜 날 만드셨나요? 라고 합니다.

삶이 괴로울 때면 태어난 것을 후회합니다. 이는 욥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부터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가 뱃속에서 나올 때에 숨지지 아니하였던가?](욥3:11). 이런 고백은 곧 바로 주님에 대한 원망으로 돌아갑니다. [어찌하여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셨나이까? 오 내가 숨을 거두어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욥10:18). 모태에서 우리를 지으시고 나오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모두 주님의 은혜요, 주님의 돌보심 가운데 있습니다. [모태에서부터 나를 붙드신 이도 주시며 내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를 꺼내신 이도 주시오니 내가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시71:6). 이런 이유로 유산이나 의도적 사산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이 임의로 낙태를 하는 것은 엄청난 재앙입니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꺼내시고 내가 내 어머니 품에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하셨나이다. 내가 모태에서 나와 주(主)께 던져져서 /맡겨졌으며/ 내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시22:9-10). 좋은 부모 만나 부족한 것 없이 잘 살 때는 불평 불만이 없지만 고생하며 살 때는 자신을 원망하고 부모를 원망하고, 결국 자신을 태어나게 한 주님을 원망하는 것이 사람들입니다.

불신에 빠져도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것을 원망하고 현실에 대해 독한 회의를 품습니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며 이르되, 우리 형제들이 [주]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민22:10). 그들은 죽임을 당하였으며 좋았겠다고 말합니다. 먹고 살 것이 없을 때는 극단적인 발언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법입니다. 배가 고프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주님의 지속적인 돌보심과 공급하심이 함께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못하면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업에 망한 사람들, 인생에 절망한 사람들이 자살을 택하는 이유입니다. 현재 자살로 죽어가는 사람의 수는 너무나 많습니다. 매 40초마다 한 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엄청나게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고기 솥 옆에 앉았던 때와 빵을 배불리 먹던 때에 [주]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터이니 이는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전체 회중을 굶주려 죽게 하기 때문이로다, 하니라.](출16:3). 단지 먹고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기를 소원하는 이들을 보십시오. “죽었더라면” 이들의 말은 너무나 부정적이고, 불신에 차 있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생각하는 또 하나는 격심한 슬픔입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극한 감정이 솟아 오를 때 죽음을 생각합니다.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죽었을 때 격한 감정이 올라 왔습니다. [이에 왕이 크게 격동(激動)하여 문 너머에 있는 방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이같이 말하기를, 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18:33). 아들을 잃은 부모, 연인을 잃은 사람들,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극한 슬픔으로 인해 “죽었더라면”하면서 죽음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아마 너무 많아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언뜻 생각나는 것만 말해 보십시오. 돈이 필요합니까? Yes. 돈이 필요합니다. 왜 필요합니까? 돈으로 다른 모든 필요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돈이 있어도 살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돈이 필요하고, 즐거움이 필요합니다. 건강이 필요하고, 신실한 친구가 필요합니다.

1. 굶주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빵입니다. 범죄한 이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언제나 빵이었습니다. 빵 문제의 해결은 인류의 절대적인 과제입니다. 빵의 부족은 농경법의 문제가 아니라 범죄의 결과입니다. 이는 성경적 증거입니다.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범죄한 땅은 주님께서 기근을 보내시고, 의를 행하는 민족에게는 빵을 보내십니다. 이는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국가는 비기독교 국가보다 훨씬 잘 삽니다. 세계 상위 30개 경제 성장 국가는 풍족한 천연 자원의 순이 아닙니다. 핵심은 믿음입니다. “왜 어떤 나라들은 잘살고 어떤 나라들은 못살까?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연방준비은행 연구원들이 최근 이 의문에 대한 흥미로운 답을 찾아냈다. 지옥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가 잘살고 덜 부패한다는 것이다. 물론 국민의 소득수준 결정요인에 대한 전통적인 경제학적 설명도 중요하다고 이들은 인정했다. 인구, 노동의 질, 인플레, 저축, 투자, 법과 제도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생산성은 이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있으며, 갈수록 많은 학자들이 비경제적 요소, 특히 종교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이들은 말했다. 연구팀은 국제투명성기구의 조사자료 등을 이용, 미국과 유럽연합(EU), 일본, 인도, 터키 등 종교적 영향이 큰 35개국의 소득과 부패지수, 종교적 믿음을 상호 비교했다. 그 결과, 지옥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높은 나라가 덜 부패한다는 경향성이 나타나고, 또 부패지수가 낮은 나라일수록 1인당 국민소득이 높다는 명확한 관계가 도출된다는 것이다.”(워싱턴). 이는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하면 네가 땅에 뿌릴 씨에게 그분께서 비를 주시며 땅의 소출(所出)인 빵을 주시되 그것을 기름지고 풍성하게 하실 것이며 그 날에 네 가축이 넓은 초장에서 먹을 것이요,](사30:23). 죄를 회개하고 의를 행할 때 주님은 빵을 주십니다.

사람이 주를 찬양하면 굶주리지 않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백성들이 주를 찬양하게 하시며 모든 백성들이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 그때에 땅이 자기 소출을 내리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시67:5~6).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찬양할 때 땅에 복을 주십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기복 신앙이 강한지라 복을 받기 위해 별 방법을 다 씁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복을 받는 비결을 성경에서 찾지 않고 사람들이 말하는 방법, 종교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매사에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주님을 두려워할 때 주님은 소출을 주십니다. [내가 [주]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이는 그분께서 자신의 백성과 자신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임이라. 오직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짓으로 돌아가지 말지어다. 참으로 그분의 구원이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로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義)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리로다. 참으로 [주]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자기 소출을 내리로다.](시85:8~12).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원칙이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죄의 회개, 주를 찬양, 주님을 두려워 함, 의와 화평 등과 같은 영적인 문제 해결이 없이 소출이 풍성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영적인 문제 해결의 선행 조건 없이 풍성한 빵은 결코 없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 없이 빵이 넘친다면 그것은 재앙입니다. 영적인 손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빵이십니다. 주님에게 나아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빵을 준 것이 아니니라. 오직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빵을 주시나니 이는 하늘로부터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자 곧 그가 하나님의 빵이기 때문이라.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이 빵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하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2~35). 생명의 빵을 먹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습니다. 영적 양식이 해결되면 육신적 양식은 저절로 해결됩니다.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라고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양식이 없는 나라에 선교사들이 파송되고, 교회가 들어서고, 복음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그 곳의 기근과 굶주림 문제는 급격히 해결되는 것을 역사는 분명히 증거합니다. 영적 문제가 해결되면 육신적 문제는 부수적으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2. 목이 마른 사람에게 생각나는 것은 시원한 물입니다. 세계는 곧 물 부족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미 수자원의 부족에 대한 우려가 심각한 수준입니다. 중동에서 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샘으로 인해 목자들이 다투고 전쟁이 벌어지는 일은 다반사입니다. 강을 두고 분쟁을 벌이는 일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물은 어떻게 해결합니까? 진정으로 갈증을 한 번 겪어 본 사람들은 물의 소중함을 너무나 잘 압니다. 하나님은 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사막 사이로 그들을 인도하시던 때에 그들이 목마르지 아니하게 하시되 그들을 위하여 반석에서 물이 흘러나오게 하시며 또 반석을 쪼개사 물이 솟아나게 하셨느니라.](사48:21). 물이 있는 곳이어야 생존이 가능합니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동물이나 물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 마른 자에게 물을 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이는 내가 목마른 자에게 물을 부어 주며 마른 땅에 큰 물들을 내고 내 영을 네 씨에게 내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줄 것임이니 그들이 풀 가운데 있는 것같이 솟아나며 수로(水路) 옆의 버드나무같이 솟아나리라.] (사44:3~4). 주님은 우리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물 부족을 겪지 않습니다. 주님은 샘들 곁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하며 더위와 해가 그들을 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물이 넘치는 샘들 곁으로 그들을 인도할 것임이라.](사49:10).

사람들은 고민이 생기면 썩은 물(술)을 마십니다. 독한 술은 썩은 물입니다. 생수를 마셔야 해결되는데 생수는 찾지도 않습니다. 물이란 표현은 문자적으로 육신에 필요한 물 외에도 많이 사용됩니다. 학문을 배운 사람에게는 대학물을 먹었다고 말합니다. 도시에 산 사람들을 도시물을 마셨다고 하고 유학을 다녀온 사람에게는 외국물을 마셨다고 합니다. 물이란 곧 삶입니다. 무슨 물을 마셨는가? 대학물, 외국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권력의 단물을 마시고 싶어 합니다. 여러 가지 물을 마시고 싶어 하지만 그런 물로 결코 갈증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두 죄악의 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수의 샘을 저희 배안에 두심으로 목마름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우물이 되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하리라.](요4:14).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한 것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요7:38). 주님이 주시는 물은 생수입니다. 생명을 주는 물이란 뜻입니다. 갈증을 유발하지 않는 물입니다. 오늘날 물의 중요성을 인식한 사람들이 알카리수, 심층수, 증류수, 정한수, 이온수, **물 하면서 마시지만 결국 주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지 못하면 갈증은 더 심해집니다. 주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개스실에서 허덕이는 사람은 시원한 공기를 필요로 합니다. 이 세상은 혼탁합니다. 도시화, 산업화가 진행될수록 공기는 더욱 나빠집니다. 환경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고 있지만 환경을 한 번에 바꾸어 주는 것이 바람입니다. 강력한 바람이 한 번 불어와서 공기를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바람은 순환 회로에 따라 분다고 합니다. 바다에 강력한 바람이 불어 태풍이 일어나면 물 속에 공기가 들어가게 되고, 물 고기들은 살 수 있습니다. 바람이 없으면 고기들은 살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곳에 성령의 바람이 한번 불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자신의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들이 흐르는도다.](시147:18). 성령은 바람과 같습니다. [그때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바람에게 대언하라. 바람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오 숨아, /사방의/ 네 바람으로부터 와서 이 죽임 당한 자들 위에 숨을 불어 그들로 하여금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겔37:9). 이 바람이 몰아치면 죽은 뼈들도 살아납니다. 맑고 시원한 생명의 기운이 스며듭니다.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의 생명이 담긴 바람입니다. 마치 독 개스실과 같은 이 세상에 저 하늘로부터 신선한 바람이 임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바람입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실 때를 보십시오.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같은 소리가 나서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에 가득하며](행2:2). 성령의 바람이 불어 왔습니다. 믿고 기도하던 사람들은 성령 충만함을 입었고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안에 있던 모든 더럽고 사악한 것들은 바람에 모두 흩어져 날려 갔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임할 때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4. 내가 몸이 아플 때 필요한 분은 유능한 의사이십니다. 주님은 Divine Healer이십니다. 몸을 고치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는 의사이십니다. 주님은 분명히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오순절을 비롯한 은사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치유 사역 가운데 몸의 치유를 강조하는 반면, 세대주의를 비롯한 근본주의 침례교인들은 몸의 치유보다는 영적 치유를 강조합니다. 일부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은 주님이 치유 사역보다는 병원을 훨씬 더 의존합니다. 성경에서 주님이 치유하신다는 구절은 대환란 때 유대인들에게 해당하는 것처럼 적용하고 현 교회 시대의 성도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것처럼 믿습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치유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치유를 믿지 않는 것은 헛된 기도입니다. [그분께서 네 모든 불법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질병을 고치시며](시103:3), [자신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며 멸망들에서 그들을 건지셨도다.](시107:20). 이는 분명히 육신적 질병을 고치시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전에 이미 성경적 건강법에 대해서 한번 말씀을 증거한 적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치유 사역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 병원은 사람의 영혼의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고치십니다. [마음이 상한 자들을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시147:3). 주님은 놀라운 치료자이십니다. 마음 속의 미움, 분노, 시기, 원망, 불평 등 각종 병들을 다 고쳐 주십니다. 마음의 병이 나으면 육신의 병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 뿐 아니라 병을 담당하신 주님에 대해 증거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 (벧전2:24). 이 말씀은 재림이 아닌 초림 때 십자가에서 이루신 주님의 사역에 대한 증거입니다. 이사야 53:5을 인용한 것인데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러나 그가 찔림은 우리의 범죄들로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불법들로 인함이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사53:5).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그 순간 모든 질병이 떠나지 않습니다. 당뇨병 환자는 여전히 당뇨를 앓고, 치과에 갈 사람은 여전히 치과에 가야 합니다. 눈이 아픈 사람은 안과로 가야 하고, 암 환자는 지속적으로 의사의 지시에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치유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기적을 기대할 수 밖에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후에는 말씀을 보내셔서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고, 주님이 맞으신 채찍에 근거해서 치유를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학자들에 따르면 사람들의 질병은 70% 이상은 마음에서 기인한다고 합니다. 마음의 변화가 있으면 신체적 질병의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통해 영적 평안과 기쁨이 있고, 참된 은혜가 있으면 몸의 질병은 이미 70% 이상 회복된 것이나 같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그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웟치만 니는 2주 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살리라. 서리라. 걸으리라”는 세 구절의 성경이 마음 속에 임했습니다.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서 믿음으로 걸어서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왔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는 자신을 진단한 의사가 죽는 것을 본 후에도 살아 있었습니다. 이런 예는 부지기수입니다. 콩고 선교사로 갔다가 간암에 걸려서 사형 선고를 받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중 기적을 체험한 어느 목사님의 간증을 읽어본 일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이렇게 보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아내를 시켜 침대를 양지쪽으로 옮겨놓도록 하고, 따뜻한 햇 빛을 받으면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콩고 선교사로 나가서 일할 정도였으므로 성경은 일생을 통하여 수십 번 읽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목사님이 읽은 말씀이 베드로전서 2장 24절이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벧전2:24). 목사님이 여기까지 읽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셨다는 말씀이 너무나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목사님은 눈물을 흘리며 다음 성경구절에 주의를 집중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거기에는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선교사는 지금까지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이 말씀이 마음 속에 강력하게 임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믿음이 없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콩고 선교사로 나갔던 그 목사님은 말씀에 집중적으로 귀를 기울인 결과 성령의 음성을 듣고 이제 병자가 아니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 즉시 목사님은 부인을 불렀습니다. "여보, 내 옷을 가져다주시오." 갑자기 돌변한 목사님의 태도에 부인은 의아스런 눈빛을 하며 물었습니다. "아니, 왜 그래요?" 그러자 목사님은 활기를 띤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이 성경말씀을 보시오.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소. 물론 나는 이 말씀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말씀에 전심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소.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내 것으로 받았소. 나는 이제 믿을 수 있소. 나는 간암 환자가 아니오, 나는 정상인이요. 정상인이 왜 드러누워 있어야 하겠소? 그러니 나는 일어나 활동해야겠소." 그리고 목사님은 부인이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일어나 활동하기 시작했고 곧 간암에서 고침 받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보내셔서 고침을 주십니다.

완전한 치유 사역은 천년 왕국에 있는 일입니다. 천년 왕국 때는 십자가를 믿음으로 낫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낫습니다. 그러나 현재 이 시대에 우리에게 있는 치유 사역은 말씀을 듣고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장로들은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켜 세우시리라. 혹시 그가 죄들을 범하였을지라도 용서받으리라. 너희 잘못들을 서로 고백하고 병 고침을 받도록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 의로운 자의 뜨겁고 효력 있는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느니라.](약5:14-16). 오늘날 성도들이 이외로 질병으로 오랫동안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을 봅니다. 질병을 통해 은혜 가운데 있고, 질병을 통해 성령이 충만해졌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질병을 통해 믿음이 약해지고, 고통 당한다면 당연히 나음을 입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병 낫기를 기도해도 마음 속에 거의 믿지 않고 형식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낫습니다.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고난은 분명히 천년 왕국 성도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5. 지혜가 부족할 때 우리는 스승이 필요하고, 조언자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승이시며, 조언자이십니다. wonderful counsellor이십니다. 주님은 지혜를 주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이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식은 학교에서 책으로 어느 정도 배울 수 있지만 지혜는 학교 교육으로 되지 않습니다. 지혜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사람의/ 속 /중심/부에 지혜를 넣어 주었느냐? 누가 마음에게 명철(明哲)을 주었느냐?](욥38:36).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지혜를 넣어 주시면 우리는 지혜롭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사람을 지혜롭게 합니다. [[주]의 율법은 완전하여 혼을 회심(回心)시키고 [주]의 증거는 확실하여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시19:7). [또 어린아이때부터 네가 성경 기록들을 알았기 때문이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딤후3:15). 여러분이 매일 성경을 읽는다면 성경은 여러분을 능히 지혜롭게 해 줍니다.

미국의 잭 하일스 목사님은 지혜를 얻기 위해 매일 잠언을 읽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箴言)이라. 이것은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明哲)의 말씀들을 파악하게 하고 지혜와 정의와 공의와 공평의 훈계를 받게 하며 단순한 자에게 민감함을 주고 젊은 자에게 지식과 분별을 주기 위한 것이니] (잠1:1~4). 잠언의 기록 목적이 지혜를 주는데 있습니다. 잠언 뿐 아니라 성경 어디를 읽어도 지혜롭게 됩니다.

6. 인생의 순례길에서 나를 인도해 줄 목자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양들은 많은 것이 필요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목자입니다. 양들은 푸른 초장이 필요합니다. 물이 필요합니다. 이리를 막아 줄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한꺼번에 다 해결 해 줄 수 있는 목자가 가장 필요합니다. 목자가 있으면 나머지는 다 해결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선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부족함이 없는 것은 이미 모든 것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목자가 있기 때문에 목자를 통해서 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주는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들 사이에 거하시는 이여, 주는 빛을 비추소서.](시80:1). 주님은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어둠에 빛을 비춥니다. 주님은 양떼를 먹이시며 품에 안으시는 목자이시오, 부드럽게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목자같이 양떼를 먹이시고 어린양을 자기 팔로 모아 품에 안아 옮기시며 어린것들과 함께하는 어미들을 부드럽게 인도하시리로다.](사40:11). 주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가장 불쌍한 양떼는 목자가 없는 양입니다. 아무리 초원 위에 한가로이 풀을 먹는 양이라도 목자가 없으면 잃어버린 양입니다. 물가에 있어도 목자가 없으면 그 양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목자없는 양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언제 적이 올지 모릅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은 목자를 세워 주십니다. [또 내가 그들을 먹일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부족하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23:4).

7. 무질서한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법이 필요합니다. 사회에도 법이 있고, 가정에도 법이 있고, 개인에게도 법이 있습니다. 법이 없으면 우리는 혼란 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법은 구속과 통제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질서와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법의 수여자이십니다. 주님은 법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주]가 우리의 심판자시요, [주]가 우리에게 법을 주시는 이시요, [주]가 우리의 왕이시니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 (사33:22).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가 내 것이며 또한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힘이요, 유다는 나의 법을 주는 자로다.](시60:7). [율법을 주시는 이가 하나이시니 그분께서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네가 누구이기에 남을 판단하느냐?](약4:12). 개개인은 모두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주의 법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주]의 법규들은 정당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는도다.](시19:8). 주의 법은 우리를 모든 더러움에서 지켜 줍니다. [[주]의 법 안에서 걸으며 길에서 더럽혀지지 아니한 자들은 복이 있도다.](시119:1).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있으면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결코 미끄러지지 아니하리로다.](시37:31).

성경은 한 권의 법전입니다. 행위에 앞서 믿음으로 다루는 법인고로 믿음의 법이라고 합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 있느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롬3:27). 이 법은 생명을 주며, 영적인 법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이 법은 모순되거나 차별됨이 없는 완전한 의의 법입니다.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의의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롬9:31). 서로 짐을 나누어 짐으로써 형제 사랑을 완수하게 하는데 이것을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합니다. [너희는 서로 남의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왕가의 법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성경에 따라,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왕가의 법을 성취하면 잘하는 것이거니와](약2:8). 우리 안에 자유를 줍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그래서 자유의 법이라고 합니다. [너희는 자유의 법에 따라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2:12). 여러분 안에 이런 법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법대로 행하는 준행자들이지 법을 판단하는 심판자가 아닙니다.

8. 법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가장 필요한 것은 변호사입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죄를 지었을 때 필요한 것은 유능한 변호사입니다. 주님은 유능하시고, 의로운 변호인이십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범죄하여도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계신 변호자가 계시니 곧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 여러분들의 법적 문제를 전적으로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변호인이 있다면 여러분은 세상 살아가면서 걱정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주님께 문제를 맡기면 100% 승소합니다. 죄를 범했을 때는 자신이 모든 것을 대신 담당하는 그런 변호사이기 때문입니다.

9. 친구가 필요하십니까? 주님은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상담자가 필요하십니까? 주님은 상담자가 되어 주십니다.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재물이 필요하다. 돈이 필요하다는 분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 구하십시오. [오직 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 가운데서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빌4:19). 여기서 모든 필요는 영적인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는 물질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항상 모든 일에서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선한 일에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여기서도 은혜란 일차적으로 돈을 말합니다. 구제 헌금을 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물질을 말합니다. 왜 돈이 필요한가?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네게 빌리고자 하는 자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마5:42)란 말씀에 순종하려면 뭔가 있어야 합니다. 부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듯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과 청빈하게 사는 것은 다릅니다. 돈이 많아도 청빈하게 살 수 있습니다. 가난한 것이 좋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게을러도 상관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왜 일합니까? 첫째, 정직하게 걷고, 궁핍이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우리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같이 조용히 지내고 자기 일을 하고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바깥 사람들을 향하여 정직하게 걷게 하고 또 너희에게 아무 궁핍도 없게 하려 함이라.](살전4:11~12). 궁핍함이 있을 정도면 더 일해야 합니다. 궁핍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려고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의 노동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네 자신의 지혜를 버릴지니라.](잠23:4). [신실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자가 되려고 하는 자는 무죄하지 아니하리라.](잠28:20). [급히 부자가 되려 하는 자는 악한 눈을 가졌나니 그는 궁핍이 자기 위에 임할 줄을 깊이 생각하지도 못하느니라.](잠28:22).

둘째, 궁핍한 자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도둑질을 한 자는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말고 오히려 노동을 하여 궁핍한 자에게 줄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선한 일을 할지니라.](엡4:28). 도와줄 수 있을 정도로 일을 하십시오. 우리는 가난한 자를 도와 주어야만 합니다. 기도로만 돕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도움을 줄 수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너는 그에게 네 손을 넓게 펴서 그가 원하는 대로 그의 필요를 위해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신15:8). 모두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선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항상 모든 일에서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선한 일에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일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을 합니다. 선을 행하는데는 돈이 필요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선한 일에 넘치게 하시기 위해서 재물을 주십니다. 일에 대한 수고와 복을 주시는데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은혜의 의미 중 하나는 바로 재물입니다.

넷째, 건전한 신앙 생활을 위해서입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요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이것들을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헛된 것과 거짓말들을 내게서 아주 멀리 옮기시오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며 오직 알맞은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이는 내가 배불러서 주를 부인하며 말하기를, [주]가 누구냐? 할까 염려함이오며 또는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할까 염려함이니이다.](잠30:7~9). 가난한 사람은 먹고 사는 문제에 매이게 됨으로써 거짓말을 하게 되거나 부정직한 일에 대한 유혹이 커집니다. 부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갑작스런 부(富)를 원치 않습니다. 지나치게 가난한 것도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주님은 모든 것 안에 계시며, 모든 것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무슨 필요가 있든지 주님께 구하십시오. [활동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같으시되](고전12:6)-은사에 관한 것. [교회는 그분의 몸이니 곧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이니라.](엡1:23)- 은혜에 관한 것. 주님은 차별이 없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예외없이 거하시며, 모든 것이 되어 주십니다. [거기에는 그리스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바바리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가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요, 모든 것 안에 계시느니라.](골3:11).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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