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십자가와 기도]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십자가 시리즈에서
다루려고 했다가 기도 시리즈에서 이 내용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경의 핵심, 모든 것의 중심이 십자가에
있음을 여러 차례 증거 했습니다. 십자가는 성경의 핵심이며,
동시에 우리의 생명, 우리의 사고, 우리의 신앙 생활에
중심입니다. 기도 역시 그 중심은 갈보리의 십자가란 점은
달리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이외로 대부분의
오늘날 교회는 기도 사역에서 십자가의 위치, 십자가의
중심성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누가 말하기를, “기도는
설교보다 앞선다. 그러나 기도보다도 앞서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곧 십자가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이
듣지 아니 하시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설교는
교인들이 듣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통찰력이
넘치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없고, 십자가를 통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께 말씀드릴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기에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참된
성도의 기도는 결코 자신의 육신, 살아있는 자아를 위해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경험한 성도는
결코 육체의 정욕과 세상을 위해 구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이 죽은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육신과 함께 그 애착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기도의 가장 큰 장애 요인이 바로 자아란 사실을 안다면
십자가는 그 장애 요인을 제거해 준 것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봅시다.
골프 광은 좋은 골프 장비를 선물 받고 싶어하고, 구하고
싶어합니다. 반면 낚시 광은 좋은 낚싯대를 구하려고 합니다.
누가 좋은 낚싯대를 선물하면 매우 좋아합니다. 그러나
골프나 낚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데 돈을 쓰지도
않을뿐더러 관심도 없습니다. 누가 주어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을 보았을 때 ‘갖고 싶다’, ‘누가
나에게 저런 것 하나 선물해 주었으면 좋겠다’ 는 등의
마음이 이는 것은 바로 그런 것에 대해 정욕이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자매들은 좋은
화장품이나 옷, 보석 등을 볼 때 그런 마음이 일어납니다.
학생들은 좀 더 좋은 학교, 졸업하면 좀 더 좋은 직장, 그
후에는 좀 더 좋은 배우자, 좀 더 좋은 가정, 좀 더 좋은 자녀,
좀 더 좋은 은퇴 생활, 그러다 죽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돈, 명예, 권력 등에 관심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이것을 복(福)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육신과 함께 그 애착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십자가는 우리 속에 일어나는 육신의 정욕과 애착을 못
박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구하지도, 탐내지도 않습니다.
손이 없는 사람에게 멋진 털실 장갑을 선물하는 것은
모독입니다. 발이 없는 사람에게 좋은 신발을 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죽은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습니까? 죽은 사람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덤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육신과 함께
그 애착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린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선물로 주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아무 소용도 없고, 그런 것들을 필요로 한
것처럼 구할 때 주님은 ‘너는 아직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기도의 핵심, 기도의 필수
요건이 바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자아가 처리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성도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에 그가 하는 기도는 온전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자기를 위해 무엇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는 자기에 대한 사망 선고입니다. [
이는
우리 중에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기 때문이라.](롬14:7).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은 자기 중심적인 기도나 자기를 위한 기도 역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목적은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5).
성경은 자기를 위해 구하지 말라고 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 자기를 위해 말들을
늘리지 말 것이요. [
오직 왕이 된 자는
자기를 위해 말들을 많이 늘리지 말 것이요,](신17:16).
저와 여러분은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장차 주님과 함께 이
땅을 다스릴 왕으로 예정된 자로서 동일한 명령을 받습니다.
말들을 늘리는 것은 군사력을 강화해서 안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말을 늘리는 것은 평안과 안전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을 더
많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성도는 자신의 안전을 모두 주님께 의탁한
사람들입니다.
둘째, 자기를 위해 아내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
또 그는 자기를
위해 아내를 많이 두어서 마음이 돌아서게 하지 말 것이며](신17:17a).
아내는 한 명이면 족합니다. 오늘날 음란 문화는 결혼과
가정에 대한 성경적 가치관을 급격하게 허물어뜨리고
있습니다. 마귀는 건전한 가정을 무너뜨림으로써 건전한
교회를 무너뜨립니다. 혼외 정사, 혼전 동거, 이혼은 모두
마귀가 가정을 무너뜨리기 위해 부여한 죄의 결과들입니다.
[
또 너는 네 이웃의 아내와 육체적으로
함께 누워 그녀와 함께 네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레18:20)고
하셨습니다. [
자기 이웃의 아내에게
들어가는 자도 그와 같으리라. 누구든지 그녀에게 손을 대는
자는 무죄하지 아니하리라.](잠6:29). 교회 내에는
은밀하게 이런 죄를 범하는 형제, 자매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이곳 교포 사회는 믿지 않는 자들이 교회 내에
득실거리기 때문에 교회는 마치 연애당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육신과 함께 그 애착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는
이 말씀 외에 달리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성경은 일부일처제입니다. 주님은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결혼식장에서 주례서시는 목사님이나
하객들이 증인의 전부가 아닙니다. 믿음의 성도가 하는
결혼이라면 그 사이에는 주님이 증인이십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된 까닭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주]께서 증인이
되셨음이라. 그녀는 네 짝이요, 네 언약의 아내로되 네가
그녀를 대적하여 속임수를 행하였느니라. 주께는 영(靈)의
여분이 있었으되 주께서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것은 주께서 경건한 씨를
구하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너희 영을 조심하여 결코
어려서 취한 아내를 대적하며 속임수를 행하지 말지니라.](말2:14~15).
셋째, [
자기를
위해 금은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신17:17).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은 곧 선(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청지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돈은 하나님께서 이웃을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해서 자기를 위해 금은을 쌓아 두지
말고 약한 자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행20:35). 또 힘이 없는
자들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
형제들아,
이제 너희를 권면하노니 제멋대로 행하는 자들에게
경고하고 마음이 약한 자들을 위로하며 힘이 없는 자들을
도와 주고 모든 사람에게 인내하라.](살전 5:14).
성도들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고(롬12:13),
선을 행하고 선한 일들에 부요하고, 베풀기를 좋아하고
기꺼이 나누어 주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딤전6:18). 이런
일을 위해 구한다면 주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기꺼이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해 구한다면 주님은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위해서는 하지
말라고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역시 동일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
너희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이 먹고 녹이 슬며 도둑이
들고 훔치느니라.](마6:19).
그렇다면 성도가 자기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
또
앞으로 오는 때를 대비하여 자기를 위해 좋은 기초를 쌓게
할지니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붙들게 하려
함이라.](딤전6:19). 십자가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기도를 없애 줍니다. 대부분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가는 대신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것은 그들의
기도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는 살아있는 육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육신의 정욕을 따라 자기 만족을
구하게 마련입니다. 죽은 시체를 위해서 좋은 음식을 구하는
사람이 없듯이, 죽은 시체는 좋은 옷과 좋은 집을 구하지
않습니다.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믿음과 체험이 없는 성도들로 인해 죽은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온갖 필요를 구하는 기도회가 빈번하게 열리고
있습니다. 나의 마음에 있는 것이 입으로 나온다고 다
합당한 기도가 아닙니다. 나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이 있고, 나의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힌 상태에서 나온
기도만이 참된 기도이며, 하나님의 향로에 담아지는
기도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게 해줍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기도에 대한 이 가르침은 구약에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고,
이전에도 결코 가르치지 않으셨던 혁신적인 내용이며,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무려 7번에 걸쳐 주님은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다윗, 솔로몬, 느헤미야, 에스라를 비롯한
위대한 어떤 대언자들도 결코 이 이름으로 기도해 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도 제자들은 결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하는 기도는 십자가 사건 이후에 효력이
발생하는 기도였습니다. 요한복음 16:23, [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구하지 아니하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리라.](요16:23).
‘그 날에는’이란 말은 지금이 아니라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후에, 부활하신 후에를 말한 것입니다. 그날에는
예수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한 것은 예수를 믿는
성도는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함께
묻혔고,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도는
그 안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고, 그
역시 주님 안에 거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사용하는 권위를
위임받은 것입니다. 주님이 아무에게나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도록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피로 맺어진 하나님의 가족들에게만 주신 특권입니다. 이런
성도는 결코 예수의 이름을 헛되이 오용하거나 남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의 이름을 도용하는 사람은 항상 불의한
목적, 자신의 사욕(私慾)을 채우기 위해 불법적으로
사용하지만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한 주의
종들은 결코 그렇게 사용하지 않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가는 벽을 허물며, 모든 더러움과
걸림돌을 제거합니다. 때로 기도를 하기 위해 무릎을 꿇지만
도무지 기도가 나오지 않고, 하나님과의 친교가 단절된 것
같은 그런 때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 안에 죄가 있거나
불법으로 인해 주님이 얼굴을 돌리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에 십자가는 그런 불법의 장애물들을 모두 제거해
줌으로써 기도의 문을 열어 줍니다. 성도가 되는 첫 관문은
곧 바로 십자가에서 '나'의 장례식을 요구합니다. 주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 것을 절대적으로 요구합니다. '자기'의
장례식을 치르지 않고 성도가 된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장례식이 끝난 사람 안에만
주님이 내주(內住)하실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내 안에
하나님이 복을 주실 수 없는 모든 것을 처리하는
사형틀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더러운 옷을 깨끗하고, 희게 하는 표백제입니다.
십자가와 그 보혈은 더러운 양심을 순수하고 선하게
만듭니다. 십자가의 피는 하나님과 죄인의 모든 걸림돌을
제거합니다.
어떤 직장에 다니는
종업원이 사장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자기는 십일조와
세금을 한번도 어김없이 꼬박꼬박 낸다고 하자, 사장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사장인 나도 세금을 내는데 허덕이는데...거기다
십일조까지라니’ 하며 놀라워했습니다. 그러자 종업원은
말하기를, ‘저는 월급을 받자마자 십일조와 세금을
떼어놓은 후에 생활을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그를 해고해 버렸습니다. 종업원이 나보다 훨씬 나은
생활을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신실한 성도로서 그는 해고의
사유를 납득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곧 더 좋은 직장을
주시겠거니 생각하며 직장을 찾았는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새 직장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왜 기도 응답을 주시지
않나? 생각하다가 이유를 알았습니다. 마음 가운데 이유없이
자신을 해고한 사장에 대한 불평, 원망, 용서하지 않는 마음
등이 가득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솔직히 그는 자신을
해고한 사장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그는 십자가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때리고, 모욕하고, 침을
뱉고, 십자가에 못박아 버린 그 사람들을 향해서 용서의
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이유 없이 나를
괴롭히고 고문하고, 모욕하고, 채찍질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죽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향해 [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더라.](눅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는 즉시 다음날 자신을 해고한 사장에게
찾아가 자신이 일주일동안 마음 가운데 사장에 대해 가졌던
모든 악한 마음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 다음날
그는 주님으로부터 훨씬 좋은 직장을 구했습니다. 그의 기도
응답을 막던 요소를 십자가를 통해 해결 받았기 때문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용서의
기도를 가능하게 합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화해를 위한
기도를 하게 합니다. 용서와 화해는 기도 응답을 지체케
하는 것들을 제거하는 확실한 보증입니다. 화해는 제단에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며, 선행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네 길로 가서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고 그 뒤에 와서 네
예물을 드리라.](마5:24)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를
비는데 인색하고, 용서하는데 인색한 형제들은 결코 기도
응답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용서와 화해의
장소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죄와 허물을 모두 사함 받았습니다. 그 점을
생각하면 형제들의 범법이나 빚을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
너희가 사람들의 범법(犯法)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들의 범법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범법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저는 지독한 빚쟁이들을 많이 듣고, 보았습니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철저하게 받아내려고 목을
조이고, 검찰에 사기죄로 고소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크리스천이라고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돈을
떼 먹힌 사람이 제 정신일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용서해야
합니다. 이곳 LA에 사는 교포들은 유난히 가해자들보다는 ‘피해자’들이
많아 보입니다. ‘당했다’는 말을 한 두 번 들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처럼, 용서할 수
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은 한
비유를 통해 [
내가 너를 가엽게 여긴 것
같이 너도 네 동료 종을 불쌍히 여겼어야 함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기까지 그를
형벌 주는 자들에게 넘겨주었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의 범법(犯法)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하시리라.](마18:33-35)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모두에게 참된 회개의 기도로 이끌어 줍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토해 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회개할
줄 모르며, 잘못을 빌 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를
볼 때 우리는 모든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길은
잘못을 비는 길이며, 곧 회개의 길입니다. 자기 잘못을 빌 줄
모르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잘못을 빌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죄인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회개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회개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마9:13). 마가복음 2:17에
이르시기를, [
예수님께서 이것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온전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나니 내가 의로운 자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하시니라.](막2:17, 눅5:32)고 하셨고, 심지어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 사람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으로
인하여 더 기쁨이 있으리라.](눅15:7),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의 눈앞에서 기쁨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5:10)고
하셨습니다. 회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며,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행11:18).
주님은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들에 한 가지씩 명령을 내리셨는데, 그것은 바로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등잔대를 옮겨 버리시고, [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기억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하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네게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5).
회개하지 않는 교회는 말씀의 등불을 비출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내 입의 칼로 그들과 싸우리라’
하셨습니다(계2:16). [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네게 가서 내 입의 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2:16). 회개하지 않으면 큰 환난 속에
던져 넣을 것입니다(계2:22). [
볼지어다,
내가 그녀를 침상에 던질 것이요, 그녀와 함께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 행실을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속에
던져 넣을 것이며](계2:22).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이
오셔도 언제 어느 시에 왔는지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하고 굳게
붙잡아 회개하라. 그런즉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네게 이르리니 어느 시각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3:3).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이미 오셨는데도 교회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회개의 기도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입니다. 죄인이 회개하면,
하나님 역시 회개(돌이키심)하십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순종의
기도로 이끕니다. 십자가의 기도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입니다. 주님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고,
‘아버지여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26:39, 막14:36)라고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가장 바른 자세입니다. 기도는 나의 뜻을
하나님께 관철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나에게 관철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수용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성취됩니다. 예레미야 13:11을
보십시오. 예레미야 13:11, [
이는 띠가
사람의 허리에 붙어 있는 것같이 내가 이스라엘의 온 집과
유다의 온 집을 내게 꼭 붙어 있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나를
위한 백성이 되게 하며 이름과 찬양과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고자 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주]가
말하노라.](렘13:11).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온
집을 허리띠처럼 주님에게 꼭 붙어 있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졌고, 결국은 돌아섰습니다.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나를 위한 백성이 되게 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시적으로
버림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름과 찬양과 영광이 되게
하려하였으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찬양과 영광은 고사하고
민족들의 수치와 멸시거리가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에 순종한 사람은 어떤 것도 순종할 수
있습니다.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빌2:8).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이 십자가의 도(道)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앞에 놓인
영광을 바라보고 걷는 것이며, 그 앞에 기쁨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하여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만약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당장 핍박과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상속받을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거룩함입니다. [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거룩히 구별되는 것이라. /그런즉/
너희는 음행을 멀리하고](살전4:3). 그렇다면 우리는
이 뜻을 수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이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아무 유익도 없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이 있고, 순종한다면
십자가는 내 마음의 모든 정욕을 능히 죽이며, 모든 더러운
것들을 다 제거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불평과 불만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불평하다가 파멸시키는 자에게 멸망을
당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불평하지 말라.](고전10:10).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이 뜻을
받아들인다면 무엇이든지 감사할 일뿐입니다. 어떤 과부가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살았습니다. 20살이 된 아들이 죽어
버렸습니다. 그때 그 자매는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외로운 나의 처지를 감안하여 20년이나 함께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데리고
가셔서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간절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그 사랑,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날
매튜헨리 목사가 돈지갑을 소매치기 당했습니다. 그 일에
대해 그는 자신의 일기에 쓰기를 "나는 그 이전에
소매치기 당한 적이 한번도 없었기에 하나님께 감사한다.
소매치기는 지갑을 훔쳐갔지만 내 생명은 훔쳐가지 못했다.
설령 내게 있는 모든 것을 털어 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
많은 것이 아니다. 또한 내가 약탈하지 않고 약탈 당했기에
더욱 감사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기도가 바로 십자가를 진 성도의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
너희는
{주}를 위하여 사람의 모든 규례에 복종하되 왕에게는 최고
권위자에게 하듯 하고 총독들에게는 악을 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을 행하는 자를 칭찬하기 위하여 {주}께서
보내신 자들에게 하듯 하라. 그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이것은 너희가 잘 행함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무식한 /말/을
잠잠하게 하려 함이라.](벧전2:13~15).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사회를 개혁하고, 정의 사회를 실현한다는 명목아래
반정부 운동이 전개되고, 시위를 하고, 촛불 기도회를
벌이는 등의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의
뜻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사람의 모든 규례, 왕,
총독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십자가를 진 성도들은
마땅히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순종합니다. 대신 십자가를
팽개친 성도들은 저항하고, 반역합니다. 우리는 부당하고,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큰 것을 요구해도 우리의 목숨 이상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목숨을 요구하면 그것 역시 들어주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
너희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3:17).
스데반이 그러했듯이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을 때는
자기 혼을 주께 맡기면 됩니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선을 행하는 가운데
자기 혼을 하나님 곧 신실하신 창조{주}께 맡겨 지키시게
할지어다.](벧전4:19).
하나님의 뜻은 내가
받아들이지 않을 때 결코 성취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의 뜻을 꺾고 주님의 뜻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그들의 불신, 불순종,
배교로 깨어졌듯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 저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 역시 불신과 불순종으로 깨어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뜻을 깨어 버리시고, 주의
뜻을 영원히 세우시고자 하십니다. [
그런즉
그는 자기 육체의 남은 때를 더 이상 사람들의 정욕대로
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리라.](벧전4: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듯이,
우리 역시 십자가를 통해 주님의 뜻을 수행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기도를 가장 성경적인
기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로 이끌어 줍니다. 모두
십자가로 자아를 처리하고, 십자가의 정신으로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올바른 기도를
위해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 역시 주님의
피로 씻겨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회개를
필요로 하는 기도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너무나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이어서 십자가에 못박아
버려야 마땅한 그런 기도가 많이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기도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
나의 기도가
주 앞에 향을 올려 드림같이 되며 나의 손을 들어올림이
저녁 희생물을 /올려 드림/같이 되게 하소서.](시141:2).
우리 역시 십자가로 모든 더러움과 악을 제거한 순결한
기도를 배우고,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는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 순결한 기도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귀한 향이 됩니다. 우리는 육신의 정욕과 애정을 십자가에
못박지 못함으로 육신의 애정과 정욕에 이끌려 방탕한
형제나, 배우자나 자식을 용서해 주시도록 구할 수 있지만
그들을 매질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방탕한 아들을 위해 매일 새벽 기도를 드렸는데,
어느 날 자신의 기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불러 앉혀두고,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께서
너를 지켜 보호해 주시도록 기도해 왔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그 손길을 거두어 주시기를 기도하겠다. 네가 죽든지 살든지,
다치든지, 병들든지 다 주님의 손에 맡기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자식을 향한 육신적이고 이기적인
애정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십자가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자아에서 나온
맹목적이고 정욕적인 기도를 자주 올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아를 십자가로 처리한 순결한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순결한 기도를
요구하십니다. 욥은 고백하기를, 자신의 고난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님을 당당히 주장하며, [
...내
기도는 순결하니라.](욥16:17b)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진 양심, 십자가에 못박힌 육신,
말씀으로 단련된 기도가 아니라면 누가 순결한 기도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
나의
기도가 주 앞에 향을 올려 드림같이 되며 나의 손을
들어올림이 저녁 희생물을 /올려 드림/같이 되게 하소서.](시141:2).
그는 순결한 기도를 드리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한 구절 더 보십시오. [
오
나의 능력이시요, 나의 구속자(救贖者)이신 [주]여,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想)이 주의 눈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때로 우리는 너무나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열정적인 기도로 인해 금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에 앞서 하나님
앞에 바른 마음, 바른 사람이 되게 해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회개없는 종교 행위를 받지 않으십니다.
오늘날 금식 기도원이 그렇게 많고, 40일 금식 기도를 수행한
사람들이 넘치고 있지만 그들의 기도가 모두 응답받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가 끝난 후에 내려오다 죽은 사람도
수두룩합니다. 건강을 잃어버린 예도 허다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회개없는 기도요, 순결하지 않는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기도를 돌아보고 바른 기도, 순결한 기도, 믿음의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