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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기도와 경건의 능력


오늘은 [기도와 경건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을 함께 상고해 보겠습니다. 경건이란 국어 사전적 의미로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삼가며 조심성이 있다.’란 뜻이지만 성경적 의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인격과 법에 순종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경건의 신비’라고 말합니다(딤전3:16).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우리를 부르사 영광과 덕에 이르게 하신 분을 아는 것을 통하여 그분의 신성한 권능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나니](벧후1:3). 이런 이유로 우리는 불경건한 모든 것을 거부하고 경건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은 믿음, 성령, 하나님의 말씀, 지극히 보배로운 약속들, 그리스도의 마음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주님이 주신 경건에 속한 것들을 전혀 받지 않는 것처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것들을 차례대로 정리해 주었습니다. 베드로후서 1:5-7, [이것과 더불어 /너희는/ 열심을 다하여 너희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1:5-7)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나, 오 하나님의 사람아, 너는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라.](딤전6:11)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외로 경건에 대한 성경적 정의와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성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웹스터 영영 사전의 원저자였던 노아 웹스터는 ‘경건’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인격과 말씀에 대한 존경, 그분에 대한 사랑의 원리로 사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경건한 삶이란 하나님의 법에 일치하는 삶이며, 경건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맞추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경건은 믿음과 달리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경건 운동, 경건 훈련, 경건 연습, 경건 시간 등 경건이란 말이 들어가는 많은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경건주의 운동은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막고, 검소하고 청빈한 삶을 살며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와 금식을 강조하는 그런 신학 운동의 한 조류로 각광받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프로그램이나 운동으로는 ‘경건의 능력은 갖추지 못하고 경건의 모양만 갖추게 되는 슬픈 현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성경적인 경건의 의미, 경건의 훈련을 배우고 기도를 통해 경건의 겉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소유하는 법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경적 의미의 경건은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transform)에서 출발합니다(롬12:2). [너희의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어](엡4:23)란 말은 경건의 초석이 되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외적인 형식의 변화가 아니라 조용한 내적인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생각이 다르면 길도 다른 법이며, 생각이 다르면 말도 달라지고, 행동도 달라집니다. 무엇보다도 추구하는 목표가 달라집니다. 생각의 변화없는 행동의 변화는 거짓이요, 위선입니다. 그런 사람을 사기성이 많은 사람, 거짓말쟁이라고 부릅니다. 생각의 변화가 있지만 행동이 변화가 없다면 그는 구별된 삶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으로써 회개를 필요로 합니다.

‘경건’이란 생각이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믿는 성도들에게 ‘건전한 생각의 영’(딤후1:7)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the mind of Christ)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그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6).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육체의 정욕이나 세상에 없어질 것들에 애정을 두지 않습니다. 생각이 변화되었고 새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을 경건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나는 나에 대해서 뭔가 된 줄로 알았는데 생각이 변화되고 보니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되고, 이전에는 존경하는 인물이 정치인이나 재벌이나 학자들이었는데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고 보니 바울이나 스데반이나 믿음의 선배들을 존경하게 되는 것이 바로 변화된 증거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생각이 바뀌면 세상도 바뀌어 보입니다. 생각이 변화되면 모든 것이 변화됩니다. 경건이란 바로 생각의 변화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현대 교회는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크게 결여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명령했습니다. 종교심은 경건의 외적인 모양만 가꿉니다. 십자가의 피가 없는 교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결코 체험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능력에 대해서 부인합니다. 성령에 대해서 듣기는 했지만 성령의 능력을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합니다. 성경을 들고 다니지만 그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합니다. 진정한 거듭남, 중생의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교인으로서 경건의 모양은 갖추고 있지만 그들 안에는 세상, 죄, 육신, 마귀 중 어느 한 가지도 이길 경건의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경건의 능력을 부인합니다. 거듭난 신자라 할지라도 성령 안에서 살고, 성령 안에서 걷지 않는 성도들은 경건의 모양만 있을 뿐 결코 경건의 능력을 알지 못합니다. 기도와 금식과 새벽기도, 철야 기도를 하지만 정욕과 애정에 기초한 기도를 하는 성도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합니다. 그래서 이런 자들은 교회 생활을 신앙 생활로 알며 성경이 말하는 영적인 삶, 거룩한 삶, 능력의 삶, 열매맺는 삶에 대해서 마음속에 지독한 회의와 불신을 지닌 채 삽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오랫동안 교회에서 신앙 생활해 보니까 신앙과 실제는 많이 다르더라’고 간증합니다. 이런 분들은 성경 말씀이나 설교 말씀이 자신의 삶이나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란 생각이 듭니다. 극히 일부분의 초인적인 그리스도인들이나 거룩한 사도들이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자들에게나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는 줄 알며,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그런 부류의 삶인 줄로 압니다. 경건은 평범한 성도의 지극히 평범한 삶의 방식이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입니다.

잠언 기자는 말하기를 경건치 아니한 자들은 악을 캐는 광부와 같고, 불타는 입술을 가졌으며, 공의를 비웃고, 불법을 삼킨다고 했습니다. 잠언 16:27, [경건치 아니한 자는 악을 캐내나니 그의 입술에는 타오르는 불 같은 것이 있느니라.], [경건치 아니한 증인은 공의를 비웃고 사악한 자의 입은 불법을 삼키느니라.](잠19:28). 주님은 경건치 않는 것들은 다 심판의 대상이며, 불경건은 불의와 동일하게 보십니다. 로마서 1:18,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 안에서 진리를 억누르는 자들의 온갖 불경건과 불의를 대적하여 하늘로부터 계시되었음이니](롬1:18).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심판이 불경건한 자들 위에 임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는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옛 세상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의 선포자인 여덟번째 사람 노아만 구원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2:5). 주님은 노아의 시대를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마지막 세대를 노아의 날들이라고 말합니다(눅17:26).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대가 바로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이란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세대를 일컬어 주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습니다(마16:4). 이 세대를 일컬어 악한 현 세상(갈1:4)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심히 패역하고 사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2:45). 노아의 때에 사람들은 모두 육체가 되고, 경건의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없었듯이 이 세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주님의 의(義)를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자기 마음대로, 육신의 정욕을 쫓아 사는 사람들의 세상을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이라고 하셨습니다.

경건치 아니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도시들을 뒤엎으심으로 정죄하사 재가 되게 하여 훗날에 경건치 아니하게 살 자들에게 본보기로 삼으셨으며](벧후2:6). 주님은 롯이 살던 소돔과 고모라의 도시가 바로 경건치 아니하게 산 자들의 도시였음을 증거하십니다. 그들을 불로 심판하신 것은 훗날에 곧 지금 우리들을 위한 경고요, 본보기였습니다. 주님은 지금이 롯의 날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롯의 날들에 이루어진 것과도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건축하되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바로 그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내려 그들을 다 멸하였느니라.](눅17:28-29). 롯의 날들에 사람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건축했습니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향락 문화가 발전하였고, 동성 연애와 결혼이 이곳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나 뉴욕보다 훨씬 더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창19:4). 또 포도주 산업이 발전해서 술 권하는 사회, 술 취하는 사회였습니다(신32:32). 오늘날 이곳이 소돔과 고모라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노아의 때에도 의의 말씀은 전파되었지만 듣는 사람이 없었듯이, 소돔과 고모라에도 주의 말씀은 전파되었습니다. [너희 소돔의 치리자들아, [주]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사1:10). 마치 이곳 LA에도 주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교회에는 동성 연애를 하는 주교가 임명되고, 목사들은 동성 연애자들의 주례를 서주고, 크리스찬들은 살인을 합법화하는 낙태를 지지하고, 주님이 금하신 이혼을 죄로 생각하지 않으며, 간음과 간통을 사랑이라고 우기는 그런 자들이 교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소돔의 시민들처럼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건축하는 일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들에게 쉼을 주지 않으며,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일해서는 죄를 짓는데 쓰게 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어떤 소망도 두지 마십시오. 이곳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건축하는 일이 전부가 아닙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삶의 방식, 경제관은 성도들의 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일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현 세상은 모두 불타 없어질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은 /주께서/ 같은 말씀으로 보관하사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기 위하여 예비해 두신 것이라.](벧후3:7).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경건한 삶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는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저 복된 소망 즉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음이라](딛2:11~13).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는 강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은혜의 영입니다(히10:29). 성경은 은혜의 말씀입니다(행20:32). 기도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아뢰는 것입니다(히4:16). 베드로전서 5:10에 [그러나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부르사 자신의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신 분께서 너희가 잠시 고난을 받은 뒤에 너희를 완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고 정착시키시리니](벧전5:10). 은혜를 받으십시오. 은혜의 말씀과 은혜의 영으로 충만하십시오. 경건의 능력은 저절로 드러납니다. 은혜받지 못한 성도는 말투부터 다릅니다. 짜증을 내고, 투정을 부리고, 감사대신 불평과 불만이 가득합니다. 은혜받지 못하면 비판하는 영이 가득 찹니다. 설교나 기도 모임을 통해서도 여러분은 은혜입기를 사모해야 하며, 더 많은 은혜를 누리기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경건의 능력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마음 속에 누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봉사와 섬김 역시 은혜를 소유해야 참다운 봉사와 섬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움직일 수 없는 왕국을 받을진대 은혜를 소유하자. 이 은혜를 힘입어 우리가 공경하는 마음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도록 섬길지니](히12:28). 여러분은 날마다 은혜를 소유하십시오. 충만한 은혜를 얻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경건의 능력은 은사가 아닙니다. 은혜와 은사는 다릅니다. 경건의 능력은 우리 자신을 스스로 훈련함으로 나타납니다. 디모데전서 4:7-8을 보십시오. [오직 속되고 늙은 부녀(婦努)들이 꾸며낸 이야기들을 거부하고 도리어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훈련하라. 이는 육체의 훈련은 유익이 적으나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하며 현재의 생명과 앞으로 올 생명의 약속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니라.](딤전4:7-8). 경건은 부단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훈련하라(exercise)”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엄중한 명령입니다. 훈련받지 않는 군인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아무리 천재라도 훈련없이, 한번도 연습하지 않고 잘 할 수는 없습니다. 천재란 자기가 받은 재능(은사)을 부단하게 연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받은 은사들, 능력들을 부단하게 훈련함으로써 경건의 능력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몸의 훈련은 몸의 건강, 체력 유지에 유익하지만 경건의 훈련은 모든 일에 유익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몇 가지에 대해서 훈련(연습)하라고 말하는데 첫째가 경건의 훈련이고, 둘째가 의의 말씀을 통한 감각의 단련입니다(히5:13-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니 그들은 곧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4). 전자가 기도의 훈련이요, 후자는 말씀의 훈련입니다. 말씀을 통해 감각들을 훈련하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의지하지 않고, 환경을 의지하지 않는 연습입니다. 오직 기록된 말씀만을 의지하는 그런 훈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가 양심의 훈련입니다. [이 소망 속에서 나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스스로 힘쓰나이다.(And herein do I exercise myself...)](행24:16). 건강한 몸도 그냥 두면 둔해지고, 약해지듯이 믿음으로 깨끗해진 양심도 그냥 두면 더러워지고, 약해집니다.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하여 항상 훈련해야 합니다. 이 훈련은 자아 속에 숨겨둔 모든 더럽고 추한 것들을 다 벗겨내는 훈련입니다. 넷째가 징계를 통한 훈련입니다. 이 훈련은 자신을 스스로 훈련하지 않을 때 주님이 강제로 주시는 훈련입니다. 무엇이든지 강제로, 억지로 하는 일에는 슬픔이 있습니다. [이제 징계가 그 당시에는 기쁜 것으로 보이지 아니하고 슬픈 것으로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그로 말미암아 단련된(them which are exercised thereby) 자들에게 의의 화평의 열매를 맺느니라.](히12:11). 징계는 온 몸과 마음을 한꺼번에 종합적으로 훈련받는 것입니다. 이 훈련은 경건의 훈련, 말씀으로 감각들을 단련하는 훈련, 양심의 훈련이 다 포함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받는 훈련대신 다른 것으로 고도의 훈련을 받습니다. [또 음욕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죄를 그칠 줄 모르며 동요하는 혼(魂)들을 속이나니 /이들은/ 곧 탐내는 습관으로 마음을 단련시킨 자들이요(an heart they have exercised with covetous practices), 저주받은 자식들이라.](벧후2:14). 타고난 죄의 본성으로 음욕과 탐심이 가득하지만 처음에는 머뭇거리고, 주저하게 되며, 양심의 가책도 받습니다. 그러나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서 이후로는 마음보다 먼저 몸이 움직일 정도로 숙달됩니다. 거짓말, 도둑질로 시작되는 훈련은 강도, 강간, 살인까지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도록 훈련됩니다. 타고난 소질, 적성이 없는데 받는 연습은 한계가 있지만 천성으로 타고난 것들은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서 무한대로 개발됩니다.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들이 경건의 훈련을 받아도 조만간 한계에 부딪힙니다. 그러나 죄와 육신에 관한한 그 사악함은 끝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받았기 때문에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얼마든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심지어 육신의 목숨이 빼앗긴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기를 저주하고 죽이는 자들을 위해 축복하고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 안에는 거룩의 열매가 있으며, 사랑이 부어졌으며,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고, 생명의 성령이 있고,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경건이란 거듭난 성도의 마음 가운데 심어진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divine nature)을 가지고 육체로 살아가는 연습입니다. 육신이 본성대로 살아가는데는 고된 연습이나 훈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그것이 실전(實戰)입니다. 그래서 곧 악을 행하는데 익숙해지고, 죄를 지어도 별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육체가 하나님처럼 살아가는데는 많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육신은 너무나 오랫동안 하나님의 뜻에 통제 받지 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육신은 오랫동안 옛 습관과 옛 행실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곧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발휘하면서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만 합니다. [이로 인하여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수 있을 때에 주께 기도할지니 참으로 큰 물들의 홍수 속에서도 물들이 그에게 닥치지 못하리이다.](시32:6). 기도는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우리 몸을 통해 열매 맺게 하는 통로와 같습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습니다. 기도를 통해 불가능한 일들을 하나님이 대신 이루시도록 할 수 있습니다. 경건의 능력이란 곧 기도의 능력입니다. 경건의 능력이란 곧 말씀의 능력이며, 경건의 능력이란 곧 모든 죄를 깨끗케 하는 보혈의 능력이며, 경건의 능력이란 성령의 능력입니다. 시편 4:3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주께서 자신을 위하여 경건한 자를 따로 두신 것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주를 부를 때에 그분께서 들으시리로다.](시4:3). 경건한 자란 주님이 따로 자신을 위해 구별해 둔 자들입니다. 주님은 진리로 성도들을 거룩히 구별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따로 거룩하게 구별하신 존재들이라면 우리는 기도할 때 주님이 들으십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의 용도를 다른데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용도,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때에 있을 현상을 설명하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할 것임이니 너는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딤후3:5)고 명령했습니다. 이들은 항상 배우나 진리를 아는데 이르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딤후3:7).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에게서 돌아서야 하고, 이득을 경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떠나야 합니다. [또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가 없어 이득을 경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언쟁이 생기나니 너는 그러한 자들로부터 떠나라.](딤전6:5). 흔히 사람들이 신앙 생활, 신앙 생활하지만 참된 신앙 생활이란 어떤 생활이겠습니까? 기도 생활이 곧 참된 신앙 생활입니다. 기도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며, 기도의 은혜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지못한 성도는 참된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신자의 모든 생활은 기도의 유산이며, 기도의 대답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인들의 영적 가치관, 삶의 가치관, 도덕적 기준이 점점 낮아지고 참으로 가치가 있는 것들을 버리고 사라져 없어져 버릴 것들을 사랑하는 것은 모두 기도 생활의 결여에 달려 있음을 절감합니다.

다니엘은 목숨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면 죽을 줄 알면서도 기도했습니다. 그런 그의 기도 생활이 그의 삶의 능력이며, 경건의 비결이었음은 초신자들도 다 아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을 듣고도 교훈을 받아 기도에 목숨을 걸고 하는 사람은 몇이나 됩니까?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은 그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원리로 살기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런 이야기도 성경에 있더라’는 식이라면 그는 경건의 능력을 철저히 부인하는 사람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말하기를 ‘우리의 실생활이 철저하게 기도의 반응이어야 할 터인데, 기도를 잊은 우리 생활이야말로 비참한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자면 기도 없는 우리의 말과 행위는 곧 교회와 세상에 위선의 도를 전하여 주는 좋은 본보기에 불과한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시대는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신실한 자들이 없어지는 시대입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주여, 도우소서. 이는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신실한 자들이 사람들의 자녀들 가운데서 없어지기 때문이니이다.](시12:1)라고 했습니다. 이 시대는 배교의 시대입니다.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시대입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그는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다 핍박을 받을 터이나](딤후3:12). 경건하게 살고자 한다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산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산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산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산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산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사도 행전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다 이렇게 살다가 박해를 받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살았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았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기도였습니다. 꾸준한, 쉼없는 기도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주님의 본(本)을 따라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주님은 사역을 시작하시면서부터 사역을 마치시는 십자가 위에서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침례를 받으신 요단강에서도 기도 하셨습니다(눅3:21). 그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 오셨습니다. 주님은 한적한 곳에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눅5:16). 열두 사도를 부르실 때도 전날 밤을 새워 기도하셨고(눅6:12),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문제의 대답을 물어보신 때도 기도하신 때였고(눅8:18)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후에도 주님은 무리들을 떠나 홀로 기도하셨습니다(눅9:18). 변화산상에서 변화하실 때도 기도하신 그 다음이었습니다(눅9:28). 주님은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러 가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시기 위해 올라갔습니다. 주님은 고요한 산으로 가셔서 밤을 세워 기도를 하셨으며, 새벽에도 기도하셨고, 겟세마네에서 피와 땀을 흘리면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기도는 주님 생활의 일부분이었고, 생활의 응답이었습니다. 시련을 겪으실 때에도 기도요, 슬프고 외로우실 때에도 기도요, 뜻이 이루어졌을 때나 상심하였을 때나 기도로써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가셨습니다. 기도의 한 걸음, 한 걸음이 곧 주님의 생활이었습니다. 최후에 십자가 위에서도 죄인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숨을 거두셨으며(눅23:33) 주님께서 시종일관하신 것이 바로 기도였습니다. 경건의 신비이신 주님께서 이 땅에서 기도로 매일을 살아가셨다면, 그분으로부터 경건에 속한 모든 능력을 받은 우리가 얼마나 더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올바르게 구원받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주님의 몸된 지체들을 섬기려면 주님이 하신 것처럼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기도만이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능력을 기다리는 유일한 방법임을 우리는 마음 속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기도 없는 신자는 참 신자가 아니요, 기도 없는 목사와 집사는 교회의 방해자요, 기도하지 않는 교사는 눈을 속이는 사기꾼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본을 따라 기도에 진력한다면 우리의 일상 생활은 정확히 성경과 일치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며, 우리의 믿음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그런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경건한 삶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우리 자신에게만 한정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점점 그 범위가 넓어져야 합니다. [왕들과 권위를 가진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것은 우리가 모든 경건함과 정직함 가운데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자 함이라.](딤전2:2). 국가와 정부,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반정부 운동이나 비판을 하기에 앞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이는 우리의 경건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을 위해 기도할 때 온 나라가 모두 그 혜택을 입습니다.

주님은 불경건한 세상에서 불경건하게 사는 자들을 위해 자신을 주셨습니다. 예수를 믿을 때 누구나 다 경건의 능력을 부여 받습니다.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롬4:5). 주님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린 죄인은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아직 힘이 없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음이라.](롬5: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노아의 날들, 롯의 날들에 살고 있는 모든 불경건한 자들 대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경건에 따른 교리(딤전6:3)입니다.

우리는 이제 모두 경건의 능력을 소유한 성도로서 더욱 뜨겁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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