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기도와 예배



오늘은 [기도와 참된 경배, 예배]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worship이란 단어는 우리말로 경배, 예배, 숭배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었습니다. 이는 대상에 따른 방법론적 분류이고, 본 의미는 같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주일이면 예배드리러 간다고 말합니다. 예배 시간이 있고, 기도, 찬양, 헌금, 설교, 광고 등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그리고 오늘 예배를 다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주의 첫날에 모여 이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고, 특히 설교 한 편 듣는 것이 예배 한 번 드린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주일에 교회에도 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예배는 일상 생활 속에서 주의 뜻대로 사는 것이 곧 바른 예배’란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배란 무엇인가? 성경은 여기에 대한 명쾌한 정의가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께 경배하라는 명령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천사도 주님께 경배하며, 마귀도 주님께 경배합니다. 주님은 경배받으셔야 할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경배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귀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예배, 영적인 예배, 주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위해 우리는 마땅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예배의 향기입니다. 풍성한 기도는 향기를 가득 채우는 일이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됩니다. 요한계시록 5:8을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그냥 흘려듣고 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그 책을 취하시매 네 짐승과 스물네 장로가 저마다 하프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들을 가지고 어린양 앞에 엎드리니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라.](계5:8). 주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다 모아 두시며, 금 대접에 담아 두십니다. 기도가 품는 향기는 강력하며, 저 하늘을 가득 메울 것입니다. 천상에는 꽃의 향기로 진동하는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 드린 기도의 향기로 가득하며, 천사들은 향수대신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피어난 향의 연기를 하나님 앞으로 올리게 될 것입니다. [또 다른 천사가 금 향로를 가지고 와서 제단 앞에 서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것은 그로 하여금 그 향을 모든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왕좌 앞에 있는 금 제단 위에 드리게 하려 함이더라.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피어난 향의 연기가 천사의 손에서 나와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더라.](계8:3-4). 여러분은 매주 틈날 때마다 더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은혜롭고, 복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배를 뜻하는 영어의 Worship이란 앵글로 색슨어의 worth(가치)+ ship(신분)이란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즉 가치가 있는 존재에게 그의 신분에 합당한 이름을 부르며 고백하고, 예를 표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주]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분께 드리며 거룩함의 그 아름다움으로 [주]께 경배할지어다.](시29:2). 주는 경배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경배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분께 드릴지어다. 헌물을 가지고 그분 앞에 들어갈지어다. 거룩함의 그 아름다움으로 [주]께 경배할지어다.](대상16:29). 이런 예는 계시록에 나옵니다. [그들이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께서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시도다(Worthy),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바다에 있는 것들과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이르되, 왕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토록 있으리로다, 하니 네 짐승이 이르되, 아멘, 하고 스물네 장로가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그분께 경배하더라(worshipped).](계5:12-14).

히브리어로 이 말은 ‘샤하아라’는 단어로 ‘엎드린다, 절한다’의 뜻으로 굴복, 순종을 뜻합니다. 하나님 앞에 복종을 표시하는 엎드리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는 “머리 숙여 [주]께 경배하고"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머리를 숙이는 것이 경배의 형태였습니다. ‘아바드’란 말 역시 예배란 의미인데, 이는 일한다(work), 노동한다(labor), 섬긴다(serve) 등의 뜻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성전에서 봉사'라는 뜻입니다. 레위 지파의 하는 일이 곧 예배 담당이었는데, 그들은 그것이 직업이었습니다. ‘[주]를 섬기리이다’란 말은 예배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무엘하 22:44, [또 주께서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또 나를 지키사 이교도들의 머리가 되게 하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던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삼하22:44). 시편 101:6에, [내 눈이 땅의 신실한 자들 위에 있어 그들로 하여금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 안에서 걷는 자가 나를 섬기리이다.](시101:6). 예배란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우리 몸을 드리는 것을 합당한 섬김이라고 했습니다(롬12:2). 신약 성경에서 예배의 의미로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낱말은 ‘프로스쿠네오’(proskuneo)입니다. 이 말의 뜻은 '손에 키스하다', '무릎을 꿇다', '허리를 굽힌다'(kiss the hand and the ground toward)는 뜻으로 이는 예배자가 자신의 몸을 꿇어 엎드리는 외부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겸손과 사랑과 존경을 드려야 하는 마음의 자세가 있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성도들은 주님께 경배할 때 머리를 숙여 경배했습니다. 아브라함, 엘리에셀, 모세, 출애굽의 백성들은 예외없이 모두 ‘머리 숙여 주께 경배하더라’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어떤 이는 땅에 엎드렸습니다. 이는 완전한 순종과 존경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살아있는 영적 제사입니다. 윌리암 템플은 "예배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의식을 소생시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로 마음을 풍성케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마음을 여는 것이요, 하나님의 목적에 뜻을 바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되며, 세상에서 오염된 우리의 영혼을 거룩하게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를 위해 희생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며,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듣는 시간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믿음의 선한 고백으로 화답하는 시간입니다. 폴 훈(Paul Hoon)은 말하기를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람의 응답이다.”(Paul Hoon)이라 했고, 브루너(Brunner)는 "예배는 회중을 향한 하나님의 봉사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회중의 봉사이다."(Brunner)라고 했습니다. 모두 예배의 훌륭한 정의입니다. 순교자 마틴(Martin)은 "예배는 하나님과 함께 갖는 영적인 축제이다."(Martin)라고 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존재의미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교회를 다니지만 참된 예배를 드리지 못함으로써 영적 위기를 자초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삶의 모든 것을 주님께로 집중하는 것입니다. 삶을 단순화해서 주님을 축으로 사는 것입니다. 올바른 예배는 기도를 통해 풍성해집니다. 성도들이 생각없이 교회를 오는 것이 아니라 예배로 부르신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모인다면 그 예배는 훨씬 더 생동력이 있고, 은혜가 있고, 성령의 임재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께 예배를 잘 드리는데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예배의 기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예배의 출발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예배는 종교적 의식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의식함으로써 그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있습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임재를 의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들은 반응할 수 없습니다.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요. 또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 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바른 예배관을 가지고 주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배의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린 성도들은 영적 생활이 철저히 이중적이고, 위선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경배의 대상이 누구인가? 어떻게 경배를 드리는가?를 바르게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하나님은 경배 받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올바른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4:23-24, [그러나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가 반드시 영과 진리로 경배할지니라.](요4:23-24). 주님은 이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일하십니다. 주님을 경배하는데 실패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쓰임도 받지 못합니다. 가인과 아벨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가인은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의 일생은 잘못드려진 예배로 망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생은 제단을 쌓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하지만 롯은 단 한번도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참된 경배자에게 권위를 주십니다. 참된 경배는 하나님의 권위에 철저히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권위에 순복하는 자에게 권위를 주신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여러분이 제대로 경배드리기 위해서는 주님 앞에 무슨 예물을 드릴 것인가? 무슨 희생물을 바칠 것인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주님께 예배를 드렸던 장면으로 가 봅시다. 창세기 4:4-5절을 보십시오. [아벨도 자기 양떼의 첫 새끼들과 그 기름 중에서 가져왔더니 [주]께서 아벨과 그의 헌물에는 관심을 가지셨으나 가인과 그의 헌물에는 관심을 갖지 아니하시므로 가인이 몹시 분하여 침통해하니](창4:4-5).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거절하시기 전에 먼저 가인을 거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시기 전에 먼저 아벨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예배의 원칙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롬12:1).

합당한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골방에서 충분히 기도해야 합니다. 은밀히 기도하는 생활없이 나의 몸은 충분히 주님 앞에 드려질 수 없습니다. 멋진 예배를 드리기 위해 좋은 옷을 입고 교회에 오는 것보다 상한 심령과 애통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자가 드리는 예배가 훨씬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예배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마귀 역시 경배 받기를 원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네가 만일 엎드려 내게 경배하면 내가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9)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얼마나 경배 받기를 원하는지 잘 보여 주는 예입니다. 마귀는 주님께 드려져야 할 경배를 자신이 대신 받고 있습니다. 마귀가 주님을 마지막으로 시험한 것은 그의 예배관이었습니다. 주님은 바른 경배관을 가지고 계셨고,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40일을 굶는 육신의 극한 상황에서도 그분이 선택한 것은 천하 각국의 영광이 아니라 주님을 경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기서 물러가라. 이는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길지니라, 하였음이니라, 하시더라.](마4:10). 오늘날 간단한 이유로 너무나 쉽게 예배를 포기하는 성도들을 봅니다. 바쁘다고, 일 생겼다, 시험있다, 어디 가야한다...같은 핑계가 예배를 드리는 일보다 우선 순위에서 밀리는 그런 성도들은 주님의 본(本)을 깊이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 역시 누구나 경배 받기를 원합니다. 느부갓네살은 금 신상을 만들어서 경배를 강요했습니다. 사람들은 능력만 되면 그런 위치에 있고 싶어합니다. 영광을 받고, 존귀와 칭찬을 받고 싶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성경은 오늘날을 일컬어 ‘인간의 날들’이라고 합니다. 지금 시대는 인본주의가 지고지선의 가치가 되어 버린 시대입니다. 민주주의(民主主義)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없고, 인간만이 전부이다란 것입니다. 사람들은 경배받기 위해 질주하는 경주마처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정권을 잡든지, 부자가 되든지, 영화나 스포츠를 통해 스타가 되든지, 공부를 해서 유명한 학자가 되든지, 예술가가 되든지 어떤 분야에서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이는 다 경배 받기를 원하는 인간 본능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지금은 인간이 경배를 받는 시대입니다. 별 볼 일없는 인간들을 내세워 star란 이름으로 돈벌이에 급급하는 세상입니다. 나 자신의 가치를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 우상이 되고 싶은 욕망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숨겨도 결코 숨길 수 없는 것이 숭배받고자 하는 본능입니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는 바로 이런 자기 우상을 파괴하는 사형 도구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짐승이 경배를 받을 것입니다. [그가 첫째 짐승 앞에서 첫째 짐승의 모든 권능을 행사하고 또 땅과 그 안에 거하는 자들로 하여금 첫째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치명적인 상처가 나은 자라. 그가 큰 이적들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의 눈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 위로 내려오게 하고 또 그 짐승의 눈앞에서 기적들을 행할 권능이 있어 이 기적들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속이며 또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로 상처를 입었다가 살아난 그 짐승을 위하여 형상을 만들라 하더라. 또 그가 그 짐승의 형상에게 생명을 줄 권능이 있어 그 짐승의 형상으로 하여금 말도 하게 하고 그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고자 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다 죽이게도 하더라.](계13:12-15). 경배의 대상은 갈수록 타락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짐승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을 때 짐승처럼 퇴화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올바른 예배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예배자는 예배의 대상자에 따라 인생관, 가치관이 결정납니다. 우상에게 경배하면 우상과 같이 됩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는 하나님과 같이 됩니다.

그럼 예배는 어떻게 드리는 것인가? 구약의 성전 예배는 말씀, 기도, 찬양과 더불어 희생물로 이루어졌습니다. 희생물이 흘린 피가 없이는 예배의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율법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깨끗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면(赦免)이 없느니라.](히9:22). 예배의 핵심은 피흘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희생물의 피를 받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죽어야 할 존재이며, 피를 흘려야 할 존재인데 나의 죄를 대신해서 짐승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 죄를 깊이 자각하는 것입니다.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희생물이 흘리는 피와 희생을 드리는 경배자를 동일하게 보셨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란 곧 하나님 앞에 드려진 희생물, 제단 위에서 피흘려 죽임 당하는 희생이 곧 나라는 동일한 의식과 믿음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놋 제단 위에서 죽어가는 양들, 소들의 죽음과 그 피는 곧 나의 죽음이었습니다. 주님이 그 희생물을 받으시는 것은 나를 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의 예배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양과 염소의 피와 같은 짐승의 피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기초함으로써 완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 흘린 피가 나의 모든 죄를 씻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경배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9:12-14,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오직 자기 피를 힘입어 단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대속(代贖)을 얻으셨느니라. 수소와 염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거룩히 구별하고 정결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자신을 점 없이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위로부터 너희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9:12-14). 예배의 핵심 요소는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그리스도를 영원한 희생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근거로 하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미 계속 강조해서 말씀드린 것같이 예배하는 사람이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물은 예배자와 동일시된다는 점입니다. 이방 종교에서 제물은 경배자의 재력과 정성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물에는 자신들의 의(義)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 제단 위에서 죽는 양들의 죽음은 ‘내가 이렇게 비싼 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없는 재산이지만 다 바칩니다. 주님 저의 정성을 받아 주십시오.’의 개념이 아니라 ‘저 양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입니다.’란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의 주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지 못하면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볼 때 바른 경배의 유무가 한 개인, 한 가정, 한 민족의 생사화복, 흥망성쇠를 좌우했던 예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멸망한 것은 잘못된 경배의 대상에게, 잘못된 경배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느부갓네살에게 넘겨주신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대신 바알에게 경배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지금이 이방인의 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인간을 경배합니다. 슈퍼스타들, 정치인들, 학자들, 부자들, 각각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존경과 숭배를 받습니다. 이들은 경배와 영광을 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에게 영광과 경배를 돌리고 싶어합니다.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은 금 신상을 세워서 경배를 받고 싶어했는데, 그 심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다 있습니다. 다니엘 3장의 핵심은 성도는 누구를 경배해야 하는가? 예배의 대상은 누구인가?라는 시험에 직면한 내용입니다. ‘금 신상에게 경배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이는 예배, 즉 마음에 관련된 시험입니다. 마음으로 누구를 예배할 것인가? 그것이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고수할 수 있는가? 라는 시험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나는 하나님 한 분만을 경배하고 예배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하는 상황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제국의 왕이 세운 금 신상 대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선택함으로써 불타는 용광로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큰 영광을 받으시고, 존귀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바른 예배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사울이 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예배를 잘못 드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각 교회는 더 좋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다양한 악기와 찬양을 준비합니다. 교회 실내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많은 정성을 기울입니다. 설교에 더 많은 은혜를 받기 하기 위해 목회자들은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예배의 부흥은 기도에 있습니다. 성도들은 주중에 늘 주일을 기대하며 주일에 드릴 예배를 사모하며 살면서 주님의 임재와 성령 충만, 말씀의 은혜를 주시도록 기도할 때 그 예배는 최고조의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집회를 오지만 집회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오는 성도는 집회에서 별로 얻을 것이 없을지 모릅니다. 예배의 능동적 참여자가 되십시오. 그것은 예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목회자를 돕는 최선의 설교 자료입니다. 기도는 목회자의 힘을 돋우는 최고의 위로이며, 기도는 성도들이 더 많은 은혜를 받게 하는 선물 보따리입니다. 예배 시간이 참된 회개의 시간이 되고, 주님을 만나는 감격의 시간이 되고, 첫 사랑을 회복하는 영적 소생의 시간이 되고, 은혜와 간구의 영을 부어주시는 그런 감사와 찬양의 시간이 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많은 분들이 예배와 자신의 삶이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그들이 예배의 구경꾼이 되었고, 자신은 참된 예배의 동참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비극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예배의 회복, 예배의 부흥에서 시작되고, 예배의 부흥은 여러분이 골방에서 뜨거운 기도의 부흥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시간 날 때마다 여러분의 기도 제목의 첫 머리에는 이번 주에도 주님 예배를 복 주시옵소서. 참된 경배가 있게 하시고, 참된 은혜가 있게 하옵시고, 살아있는 말씀이 선포되게 하옵소서! 기도하십시오.

이사야 6:1-9절을 펴 보십시오. 여기에 성경적 예배의 모델이 있습니다. 1절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왕좌에 앉으셨는데 그분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고](1). ‘내가 본즉’이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예배의 첫 출발은 계시와 인식입니다. 말씀의 조명, 성경의 계시가 없는 예배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에배의 시작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서 비롯됩니다. 계시된 하나님을 인식하여 그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하는 일은 바로 말씀을 통해 주님을 선포하고, 말씀을 선포함으로 듣는 성도들에게 그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보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들이/ 서로 크게 외쳐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여, 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3). 예배의 다음 단계는 바로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크게 외치는 것입니다. 찬양은 예배에 영감을 줍니다. 찬양은 예배에 윤활유 역할을 합니다. 성가대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함께 마음을 다해 주님을 기쁘게 찬양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찬양은 예배를 풍성하게 하며, 음악 자체가 예배 행위이기도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내가 이르기를, 화로다, 나여! 이는 내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므로 망하게 되었음이니 곧 내가 입술이 부정한 백성의 한가운데 거하면서 내 눈으로 왕 곧 만군의 [주]를 보았음이라, 하였더라.](5). 죄의 자백과 회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자, 그 영광을 보는 자는 필히 자신의 죄인됨을 보게 되고, 회개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은밀한 죄를 회개하고, 우리 가족의 단체적인 그런 죄를 회개하고, 우리 사회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민족이 해마다 지내는 추석, 설과 같은 명절에 마귀들에게 드리는 제사 문화를 회개합니다. 우리 가족 가운데 아직도 부적이나 운세나 토정비결을 믿는 자들이 있음을 회개합니다. 우리 가족 가운데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이 있음을 인해 회개합니다. 성경을 게을리 읽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회개합니다. 나의 말과 성격이 가족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가풍이 됩니다. 우리 가족은 곧 친척 형제들, 부모님들, 다른 친척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죄에도 영향력이 있고, 경건의 능력도 영향력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지체들이 범죄에 연루되면 같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을 내 입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으니 네 불법이 사라지고 네 죄가 깨끗하게 되었느니라, 하더라.](7). 자백과 회개에 따르는 사죄가 있습니다. 죄사함의 은혜가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사죄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또 내가 {주}의 음성을 들으니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라.](8). 깨끗해진 자에게는 주님이 사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이사야가 주의 음성을 들었듯이 우리 역시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설교를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 헌신이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는 말씀을 들은 이사야의 응답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설교를 들은 후에 그에 합당한 결단과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응답이 필요합니다. 헌신과 응답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에 그분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기를, 참으로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참으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느니라, 하며](9). 마지막으로 파송입니다.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파송하십니다. 예배에 이 모든 요소가 다 포함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주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찬양이 있고, 자백과 회개가 있고, 그에 따른 죄사함이 있고, 사명이 주어지고 결단과 헌신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가서 말하라’는 파송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배자의 특권입니다.

예배는 성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보다 더 소중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배없는 봉사, 예배 없는 충성은 헛된 열심입니다. 예배보다 더 급한 것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배는 오늘 못드리면 다음에 드리면 되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배는 그 순간 지나쳐 버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세상일은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됩니다. 그러나 예배는 오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놓치면 영영 돌아오지 않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그분의 위엄을 새롭게 발견하고, 하늘에 계신 지엄하신 분을 더 잘 이해하는 시간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예배는 헛된 예배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실상 예배의 위기에서 왔습니다. 외적인 예배의 환경은 분명 나아지고, 좋아졌지만 내적인 것들은 다 잃어 버렸습니다.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텅빈 그런 예배가 아니라 조용히 주님을 경배하고 주님의 말씀을 통해 전해지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그런 예배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자유와 기쁨과 능력을 소유하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예배를 통해 배출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시급한 기도 제목은 교회의 예배를 부흥시켜 주옵소서!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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