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엡6:11
마귀는 간계(wile)의 대가입니다. 간계(奸計)란 속임수, 노략 등 정당하고 순수하지 못한 지혜를 일컫습니다. 마귀의 지혜, 세상의 지혜, 육신의 지혜를 성경은 간계(奸計), 또는 간교(奸巧)함이라고 말합니다. 마귀는 간계에 능하며, 성도들을 속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엎으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마귀의 간계(奸計)를 능히 대적하고 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全身甲胄)를 입을지니](엡6:11)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마귀의 간계, 즉 간계자(奸計者) 마귀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령께서는 능하신 조언자이시며, 상담자이시며, 훌륭한 전략가이십니다. 킹제임스 영어 성경에서는 counsel이라고 말하는데 우리말로는 조언, 상담, 모략, 권고, 계획 등 다양하게 번역되었습니다. [나를 권고하시는 [주]를 내가 찬송하리니 내 속 중심도 밤에 나를 훈계하는도다.](시16:7)-counsel: 권고, [[주]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분의 마음의 생각들은 모든 세대에 이르리로다.] (시33:11)-counsel: 계획. 우리 주님의 이름 중에 하나는 Counsellor(상담자)이십니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여 있고 그의 이름은 기묘라(Wonderful), 모사(Counsellor)라, 강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는 아버지라, 평화의 통치자라 할 것임이라.] (사9:6). 우리 주님은 모든 지혜로 가득한 모사이시기에 그분의 계획은 완전합니다. [그분은 반석이시요 그분의 일은 완전하니 이는 그분의 길이 다 공의롭기 때문이라. 그분은 진실하고 불법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의로우시고 진실하시도다.](신32:4). 주님의 말씀에는 간계나 교묘함이 없습니다. 속임수나 불법이 전혀 없는 순수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완전하고 순수하고 의롭고 거룩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따라 사는 성도일수록 생각과 삶은 점점 단순해집니다. 성도의 삶은 성경의 조언, 상담을 받아 단순함과 진실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행할 때에 단순함과 하나님께서 주신 진실함으로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였으며 또한 너희를 향하여는 더욱더 그리하였노니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또 우리 양심이 증거하는 바라.](고후1:12). 성령의 인도함, 성경의 권고대로 사는 삶은 단순함과 진실함입니다. 성도들은 복잡하게 살지 않습니다. 생각이나 삶이 매우 단순하고, 진실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생활 태도입니다. 육체의 지혜대로 사는 삶은 복잡하기 그지없고, 얼마나 꼬여 있는지 모릅니다. 흔히 세상을 복마전이라고 합니다. 복마란 마귀가 숨어 엎드려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세상을 통찰하고 있는 말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세상에서 세상 방식대로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성경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고 어렵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옛 생활 습관, 사고방식이 그대로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바뀌어야만 합니다. 성도들과 세상 사람들은 살아가는 방식, 원리가 다릅니다. 한 마디로 다른 rule을 가지고 삽니다.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다르듯이 세상 자녀들의 삶의 방식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방식은 완전히 다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익숙한 룰(rule)이 아닌 난생 처음 접하는 룰(rule)에 따라서 살라고 하면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익숙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문화라고 말합니다. 유교 문화, 기독교 문화, 불교문화, 이슬람 문화 하듯이 문화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차이, 다양성, 다원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뭐라고 정의하든 세상의 영을 받아서 사느냐?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사느냐? 의 차이일 뿐입니다.
성경의 기록은 놀라운 모략입니다. [내가 모략과 지식에서 심히 뛰어난 것들을 네게 기록함은](잠22:20). 성령 역시 모략의 영입니다. [[주]의 영 곧 지혜와 명철(明哲)의 영이요, 모략과 능력의 영이요, 지식과 [주]를 두려워하는 영께서 그 위에 머무시며](사11:2). 주님의 모략은 놀랍습니다. [이것 또한 만군의 [주]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분의 모략(謀略)은 놀라우며 행하시는 일은 뛰어나시도다.](사28:29). 주님의 모략은 정당하고 순수하고 의롭습니다. 이를 흉내 낸 것이 마귀의 계략입니다. 마귀는 간계에 능합니다. 함정을 파는 일, 올무를 놓는 일, 스스로 넘어지게 하는 일 등을 꾸미는데 마귀는 최고의 책략가이며, 놀라운 지혜를 발휘합니다. 단순함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마귀의 간교함입니다.
마귀의 특징은 간교함입니다. [이때에 뱀은 [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들의 어떤 짐승보다 간교하더라. 그가 여자에게 이르되,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동산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니](창3:1). 뱀이 얼마나 간교하게 행했는지 우리는 창세기의 기사를 통해 잘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을 던지고, 유혹하며, 거짓 확신을 심어주는 일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모릅니다. 뱀은 여자를 유혹하고 시험하는데 어떤 어려움도 없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께서 아시느니라, 하니] (창3:4~5). 단 몇 마디 말로 끝을 보았습니다. 뱀은 여자를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무력(武力)이나 완력이나 마술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뱀은 간교하게 말을 했을 뿐입니다. 마음 속에 생각을 파고 들어왔습니다. 마귀의 간교함은 단순함과 진실함에서 벗어나 복잡하고 혼동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뱀이 그의 간교함으로 이브를 속인 것같이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 변질될까 내가 두려워하노라.](고후11:3).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 때 단순함과 진실함에서 벗어나게 하는 3대 요소는 사탄, 세상, 육신입니다. 이 셋은 늘 죄를 짓게 만들며, 간교함으로 살게 하는 것들입니다. 사탄, 세상, 육신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며, 영적 정신적 세계를 파괴하는 것들입니다.
이브가 사탄의 간계와 간교함에 속았다면 야곱은 육신의 본성으로 인한 간교함으로 인해 험한 삶을 살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간교함의 대명사는 야곱입니다. 야곱은 마귀와 세상이 아닌 자신의 육신의 본성으로 인한 간교함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형의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서 계략을 꾸몄습니다. 그의 삶에는 정직함이란 없었습니다. [이삭이 이르되, 네 동생이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아 갔도다.](창27:35). 그는 속임수로서 형의 축복을 빼앗아 가 버렸는데, 이는 매우 간교한 행위였습니다. 그의 간교함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품성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야곱의 간교함을 순수함으로 바꾸시는데 수십년의 연단과 징계와 슬픔과 고통이란 훈련을 가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속인 대가로 그는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합니다. 형에게 축복을 빼앗은 대가로 그는 가장 사랑했던 아들 요셉을 잃어버립니다. 야곱은 자신의 간교함을 최대한 발휘한 대가로 그 이후로부터 평생 동안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도 통하지 않는, 어떤 간교함도 통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게 됩니다. 20년의 타향살이 동안에 라반은 간교한 야곱의 천적이었습니다. 그는 라반에게 얼마나 혹독하게 당했던지 7년을 정당하게 봉사하고 얻기로 한 라헬을 결혼 한 후 첫날 아침에 신부가 레아로 바뀐 것을 알았습니다. 이는 형 에서에게 장자권을 사기 친 아픔을 느끼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간교하게 얻고자했던 것을 쉽게 얻었던 삶과는 달리 무엇 하나 쉽게 얻을 수 없었습니다. 라헬을 얻는데 14년이 걸렸습니다. 품삯은 제 때에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었노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가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창31:7). 라반은 외삼촌이면서도 야곱에게는 지독한 악덕 고용주였습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인 대가를 그는 철저하게 지불했습니다. 라반에게는 야곱의 잔머리와 간교함이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야곱은 이 때에야 비로소 한 가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였던 나의 간교함이 외가의 피로부터 유전하였으며, 자신은 간교함의 본가(本家)에 들어와 있음을 말입니다.
겨우 외삼촌 라반의 그늘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그는 자신의 간교함이 통한 적이 없습니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고 야곱의 아들들은 12명이나 되었지만 야곱은 그 누구 하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라헬을 잃고, 사랑했던 아들 요셉을 잃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년에 얻은 베냐민조차 잃어버릴 지경이 되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능자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긍휼을 베푸사 그 사람으로 하여금 너희의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들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하니라.](창43:14). 베냐민을 이집트로 보낼 때 야곱은 자신이 이 땅에서 얻은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심정이었습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긍휼만을 기대하며 자신의 지혜와 꾀와 요령과 수단을 포기했습니다. 야곱의 육신의 간교함은 평생의 세월을 거치면서 지독한 연단을 받으면서 처리되었습니다. 성도들 역시 하나님 앞에 거슬리는 육신의 본성에 속한 간교함은 이렇게 처리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 육신의 본성을 자극합니다. 마귀는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도 성도들을 괴롭힐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육신의 본성 때문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거니와 /성/령을 따르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망이요,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그 까닭은 육신적인 생각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참으로 그리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 그런즉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5-8). 야곱과 같이 육신의 간교함으로 사는 인생은 육신이 전혀 통하지 않는 천적(天敵)들, 그런 상황들 속에 던져짐으로써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만을 구하게 될 때 그는 참된 믿음의 삶-단순함과 진실함-을 살게 됩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는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르기 때문이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갈5:16-17). 육신의 간교함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마귀의 간계를 싫어하실 뿐 아니라 육신의 간교함 역시 싫어하십니다.
간교함의 대명사로는 요나답이 있습니다. [그런데 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그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더라.](삼하13:3). 그는 암논에게 누이 다말을 취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암논은 다윗의 아들인데 이복 누이 다말을 취하고자 하는 욕정이 일었습니다. 진실한 친구라면 죄악을 지적하고, 충고와 조언을 했야겠지만 간교한 자는 자신의 간교함으로 죄악을 이루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는 암논에게 병든 체 했다가 문병 온 다윗 왕에게 부탁해서 다말에게 음식을 차리게 했습니다. 다윗은 전쟁에서는 백전 용사였지만 아들 교육 문제에 있어서는 평범한 촌부(村夫)만도 못했습니다. 그는 아들의 꾀병도 알아보지 못했고, 간계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암논은 친구 요나답의 간계대로 음식을 차려 준 누이 다말을 강제로 욕을 보였는데 이 일은 결국 자신의 죽음을 불러 오고 말았습니다. 다말의 오빠였던 압살롬은 이 일로 인해 암논을 죽여 버렸습니다. [욕심이 잉태(孕胎)한즉 죄를 낳고 죄가 완료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는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간계의 대가는 눈앞의 목적을 수행하지만 결국 망하는 법입니다.
욥기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간교한 자들의 계략을 실패로 돌리사 그들의 손으로 하여금 그들이 경영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게 하시며](욥5:12)라고 말씀합니다. 마귀의 지혜는 간교함이요, 간계이며, 궤계입니다. 간계는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나도 열매가 좋지 않습니다. 간계는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간교함도 지혜라고 칭송하는 시대이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에 속한 것이요, 관능(官能)적인 것이요, 마귀에게 속한 것이니 이는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기 때문이라.] (약3:15~16). 하나님의 지혜는 간교함, 간계, 술수, 거짓, 속임수와는 정반대입니다. 성도들은 세상 지혜, 육신의 지혜, 마귀가 주는 지혜를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죄악된 꾀는 순간순간 떠오르지만 성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간계는 항상 속임수를 동반합니다. 성도들이 구해야 할 지혜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부드럽고 대하기 쉬우며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하고 차별과 위선이 없나니] (약3:17). 주님은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면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 구함으로써 간교함과 간계와 속임수 대신 건전한 지혜로 살아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이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주시는 지혜를 구하지 않고, 잔 머리를 굴리는 성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을 계획할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합니까? 전문가들의 조언을 구하고, 친구들이나 그 방면에 유경험자들을 찾습니까? 스스로 몇 날 며칠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고민을 합니까? 여호수아는 훌륭한 장수였습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에게 직접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음성을 들었고, 주의 군대 대장을 만났습니다. 그런 그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했을 때 속았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주]의 입에서 조언을 구하지 아니하고 여호수아가 그들과 화친(和親)하며 그들과 동맹을 맺어 그들을 살게 하였고 회중의 통치자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수9:14-15). 기브아 족속의 간계를 간파하지 못했습니다(수9:4). 주님께 지혜를 구하고, 주의 입에서 나오는 조언을 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를 위해주는 척 하는 사람들의 간계에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해롭게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늘 win-win 전략이라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덥석 물었다가 망하는 법입니다.
건전한 지혜를 구하십시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조언을 구하고, 물으십시오. [그분께서는 의로운 자들을 위하여 건전한 지혜를 모아 두시며 곧바르게 걷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시고](잠2:7). 주님은 자신이 모아두신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풀어 주십니다. [계략과 건전한 지혜가 내 것이니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잠8:14).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묵상하십시오. 건전한 지혜를 줍니다. [내 아들아, 이것들이 네 눈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건전한 지혜와 분별을 지킬지어다.](잠3:21). 마귀의 간교함을 이길 수 있는 길은 건전한 지혜, 순수한 지혜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단 한 번도 마귀의 간교함에 속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는 마귀의 역사를 통찰하셨습니다. 주님의 가족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음성이든, 제자 베드로를 통해 들어오는 음성이든, 마귀의 직접적인 시험이든, 바리새인들을 통한 시험이든 주님은 정확히 분별하시고 대처하셨습니다. 주님은 어떤 시험에서도 주저함이 없으셨고 고민하거나 물러섬이 없으셨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의 간교함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눅20:23). 사람들의 간교한 질문에 주님이 당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생각 속에 간교함을 넣어 주고, 그것으로 주님께 올무를 놓으려고 했지만 주님은 단 한 번도 그런 올무에 걸린 적이 없으십니다.
마태복음 22장을 보십시오. 여기에는 주님이 연속해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시험을 당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그분을 말로 책잡아 올무에 걸리게 할까 의논하고] (마22:15). 바리새인들은 지혜를 모아서 주님을 책잡아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갖은 꾀를 다 썼습니다. 그들이 생각해 낸 첫 번째 문제는 세금 문제였습니다. [그런즉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소서. 카이사르에게 공세(貢稅)를 바치는 것이 율법에 맞나이까, 맞지 않나이까? 하거늘] (마22:17). 그 때에 주님은 그들의 악함을 보시고 간단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 형상(形像)과 그 위에 쓰인 글이 누구의 것이냐? 하시니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카이사르의 것이니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이 말씀들을 듣고 놀라며 그분을 떠나 돌아가니라.] (마22:20~22). 사람들은 주님의 답변에 놀라서 돌아 가 버렸습니다.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도전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에 대해서 질문하면서 한 여자를 취한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부활 때에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다 그 여자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는 그 여자가 그 일곱 사람 중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하니] (마22:28). 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답변은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권능도 알지 못하므로 잘못하고 있느니라. 이는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장가가지도, 시집가지도 아니하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기 때문이니라.] (마22:29~30). 주님의 답변은 얼마나 정확하고 성경적인지 보십시오. 주님은 사두개인들이 성경으로 믿는 출애굽기의 예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하여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셨으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시니 무리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의 가르침에 깜짝 놀라더라.] (마22:31~33). 이들은 이 말씀이 부활에 대한 말씀인지는 꿈에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듣고 보니 성경은 이미 부활을 입증하고 있음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율법사 하나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명령이 크니이까? 하매] (마22:36). 이 역시 주님은 주저없이 대답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즉문즉답(則問則答)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가는 큰 명령이요, 둘째 /명령/은 그와 같은 것으로서,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 모든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이 이 두 명령에 달려 있느니라.] (마22:37~40).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시험은 마태복음 4장에서 광야에서 마귀가 하는 시험과 유사합니다. 주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에 즉시 말씀으로 응답하셨듯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율법사들이 묻는 질문에 동일하게 성경으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시험을 어떻게 이기는가? 하는 모범적인 예가 됩니다. 우리는 답(answer)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구도자들이 아니라 이미 답(答)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질문에 답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시험에 대응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귀의 간교함이나 세상의 시험이나 육신의 정욕이나 죄의 속임수를 대적하고 답변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답변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의로운 자의 마음은 대답을 얻으려고(X) 연구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입은 악한 것들을 쏟아내느니라.]-The heart of the righteous studieth to answer : but the mouth of the wicked poureth out evil things(잠15:28). 간교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논쟁과 다툼만 일어날 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정직하고 순수하지만 마귀의 자식들은 간교합니다. [이르되, 오 모든 간교와 모든 악독이 가득한 마귀의 자식이여, 모든 의의 원수여, 네가 {주}의 바른 길들을 굽게 하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겠느냐?](행13:10). 마귀가 간교하듯이 마귀의 자녀들이 간교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세상은 마귀의 통치 아래 마귀의 자녀들이 간교함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의롭고, 경건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을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왜곡된 가치관이 교회내로 흘러 들어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만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적 가치관을 따라 세상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주님은 이 경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이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 세대에서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이니라.](눅16:8b). 세상이란 홈 그라운드에서 세상 자녀들이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경쟁하는 것은 이미 패배를 예약한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왜곡된 가치관으로는 영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세상적 사상과 방식으로 성경적인 삶을 사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애당초 불가능한 삶입니다. 오늘날 세속적인 교인들은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하는 대로 살았다가는 사업이 망한다’고 굳게 믿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세속적인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무작정 성경대로 믿다가는 인생살이 망한다고 굳게 믿는 듯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록된 말씀, 선포되는 설교를 통해서 우리 안에 생각의 영을 새롭게 하듯이, 마귀는 여러분들이 온 종일 생활하는 이 세상에서 보고, 듣는 모든 말들을 통해 세상의 영을 내안에 공급합니다. 신문, T.V 뉴스는 세상의 영을 내 안에 충만히 공급합니다. 친구들, 친지들 역시 세상의 영으로 충만하여 내 귀에 설교합니다. 책과 잡지 등 각종 메거진은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한 간증들로 가득합니다. “나는 이렇게 성공했다. 나는 이렇게 내 아이를 하버드에 합격시켰다. 일곱 자녀를 박사로 만든 어머니의 이야기, 50억을 만든 세일즈맨의 이야기...” 저는 서점에서 이런 부류의 책 제목들을 수도 없이 많이 봤습니다. 학교와 직장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법을 내 안에 가르쳐 주고, 격려해 줍니다. 주님은 자신이 부르시고 세우신 종을 통해 말씀을 증거하지만 마귀는 세상의 각종 유명 인사들, 앵커들, 연예인들, 스포츠 스타들, 교수들과 교사들을 총 동원해서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고, 크고, 좋은가를 증거합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주 동안 세상의 영을 더 많이 받았는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영을 더 많이 받았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 영을 받았으니](고전2:12a). 세상은 달리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은 세상의 영을 줍니다. 마귀는 마귀의 영을 줍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은 세상의 영을 내 안에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흔들림 없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설교 듣는 것으로 그런 것들을 모두 몰아낼 수 있고, 다 깨뜨리고 영적인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도저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교인들이 단순함과 진실함을 버리고 간교하게 사는 것은 남자가 입술에 립스틱을 진하게 바른 것보다 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추어 둔 정직하지 못한 일들을 버리고 간교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속임수로 다루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드러냄으로 하나님의 눈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게 우리 자신을 추천하노라.](고후4:2). “간교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이는 마귀의 간계에 속지 않고 사는 삶입니다. 마귀들은 성도들을 간교하게 속이며, 단순함에서 벗어나 변질되게 합니다. 믿음의 영을 받고(고후4:13), 지혜와 계시의 영(엡1:17)을 받아 살아야 할 성도들이 세상의 영을 꾸준히 지속적으로 공급받고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의 영이 있어야 믿음의 자녀입니다. 불신과 불순종의 영이 믿음의 영을 대신하면 그는 불순종의 자녀처럼 살게 됩니다. [그러나 뱀이 그의 간교함으로 이브를 속인 것같이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 변질될까 내가 두려워하노라.](고후11:3).
마귀의 간계는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부터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몰래 숨어서 간교한 술수로 속이고자 하는 자들의 온갖 교리의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밀려다니지 아니하고](엡4:14). 마귀는 간교한 술수로 이브를 속였듯이 성도들을 속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속였듯이, 라반이 야곱을 속였듯이, 발람이 이스라엘을 속였듯이 그렇게 속입니다.
마귀의 간교함은 결국 모두 속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속임수가 아니라면 단순하고 진실하게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속임수이기 때문에 간계와 간교함을 부리는 것입니다. 마귀는 무엇으로 우리를 간교하게 속이는가?
첫째, 재물의 속임수입니다. 모든 기복 신앙은 마귀의 간계입니다. [가시나무 사이에 씨를 받은 자 또한 말씀을 듣되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속임수로 인해 말씀이 숨이 막혀 열매맺지 못하는 자라.](마13:22). 많은 설교자들이 재물은 어떻게 사용하는가의 문제일 뿐 그 자체는 선, 악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가치 중립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재물의 속임수라고 재물에는 속이는 것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재물의 속임수는 영이요 생명인 말씀, 하나님의 호흡이 담긴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림으로써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재물의 속임수에 속은 성도들은 주님께 재물을 더 많이 주셔서 재물로 주님을 섬기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재물로 나를 섬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네 자신의 지혜를 버릴지니라.](잠23:4). 부(副)란 것은 삶의 목표나 과정이 아니라 신실한 삶이 결과여야 합니다. [신실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자가 되려고 하는 자는 무죄하지 아니하리라.](잠28:20). 믿음과 경건을 부(副)를 얻는 수단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부의 도구로 삼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급히 부자가 되려 하는 자는 악한 눈을 가졌나니 그는 궁핍이 자기 위에 임할 줄을 깊이 생각하지도 못하느니라.](잠28:22). 마귀의 간계에 속아 믿음에서 떠나게 되며, 많은 슬픔을 당하게 됩니다.
둘째, 교리의 속임수입니다. 이는 교회 내에서 흔히 벌어지는 마귀의 간계입니다. [오히려 감추어 둔 정직하지 못한 일들을 버리고 간교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속임수로 다루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드러냄으로 하나님의 눈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게 우리 자신을 추천하노라.](고후4:2). 저는 얼마 전에 “저는 성경을 믿습니다. 저는 성경을 믿을 뿐 킹제임스 성경을 믿지는 않습니다.”라며 열변을 토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에게 “그럼 당신이 말하는 성경, 당신이 믿는 성경을 말해 주세요.”라고 했더니 계속해서 “저는 그냥 단순히 성경을 믿습니다.”며 성경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는 성경이 무엇인지를 결코 알지 못했고, 결코 보지 못했으며, 손에 잡아 본적도 읽어 본적도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성경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간계입니다. 그는 현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성경에 대한 믿음만 있을 뿐이지만 성경에 대해서는 늘 화려하게 말합니다. 성경은 완전하고, 무오하고, 보존되었으며... 그러나 그 성경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이며, 어떻게 구하느냐? 는 질문에는 묵묵부답(??不答)입니다. 이 외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속임수로 다루는 많은 예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마귀의 간계에 속고 사는 성도들입니다. [이제 /성/령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셨으니](딤전4:1).
셋째, 철학의 속임수입니다. 삶의 철학은 매우 중요합니다. 삶의 철학이 확고하고 분명한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철학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흔히 말하는 개똥철학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조심하라. 이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을 따르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니](골2:8). 오늘날 실용주의, 합리주의로 대표되는 학교 교육과 삶의 철학은 성도들의 믿음을 완전히 뒤엎어 놓습니다. 특히 미국은 실용주의 철학이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습니다. 실용주의(Pragmatism)란 옳고 그름의 기준(right or wrong)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의 편리함, 능률, 효용성이 기준입니다. “편리한 것이 좋은 것이고, 좋은 것이 선이고, 그것이 곧 옳은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입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이제는 “어떤 유익이 있는 것은 모든 선한 것이다. 나를 개선, 발전시키는데 유용한 것이 곧 도덕적으로 타당한 것이다”란 사고 방식입니다. 이는 마귀의 간계일 뿐입니다. 합리주의란 것은 이성의 범주 내에서만 판별하는 것입니다. 이성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모두 악(惡)이요, 쓸모없는 것이요, 잘못입니다. 신앙은 이성을 능가하는 것이지 부합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용적, 합리적이란 말은 아무리 멋있어 보여도 마귀의 간계요 속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둘은 결국 인본주의, 물질주의의 바탕이 될 뿐입니다. 합리주의, 실용주의와 같은 철학이 성도의 정신 세계에 파고 들어와서 성경적 복음주의를 몰아내고 있습니다. 합리주의, 실용주의는 미국의 정신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에게 유용한 것들, 실질적인 것들, 현실적 유익이 있는 것들에만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덕분에 일의 능률, 효율을 철저하게 계산하고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의 유무가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는 철저한 인간 중심의 사고 방식이요, 인본주의의 산물입니다. 교회가 실용주의로 나간다면 예배의 효율성을 따지고 계산해야 할 것입니다. 오고 가는 시간과 경비, 이로 인해 내가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 얼마인지... 이것은 영적으로 볼 때 재앙입니다.
가룟 유다는 합리주의자요, 실용주의자였습니다. 제자들은 거기에 동조했습니다. 그러나 향유를 부은 여인은 낭비도 소비도 아닌 옥합의 향유를 전부 허비했습니다. 허비(虛費)란 말만큼 자본주의 사회에서 죄악은 없습니다. 돈 가방을 맡은 가룟 유다에게도 마리아의 허비는 분노의 대상이요, 참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마26:8,막14:4). [그분의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같이 허비하느냐?](마26:8). 12년이나 혈루증을 앓았던 여자는 고생도 많이 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했습니다(막5:26, 눅8:43). 약간의 나아진 것도 없기 때문에 허비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타향으로 간 둘째 아들은 가진 재산을 허랑방탕하여 다 허비했습니다(눅15:13). 그러나 주님께 허비하는 것이 우리들의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주님께 허비하는 대신 투자하는 사람들은 기복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투자하는 사람들은 더 남는 곳에 투자합니다. 투자는 이익을 목적으로 합니다. 여러분은 예배와 일하는 것, 예배와 시험 공부하는 것, 예배와 친구 만나는 것 중 어느 것에 먼저 투자하십니까? 저는 합리주의와 실용주의에 충실하며 그것에 동화되어 섬기는 교인들을 보면 절망스럽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귀의 올무에 매인 줄도 모르며, 마귀의 간계에 속은 줄도 모르고 오히려 영적인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비판하며 몰아칩니다.
합리적 사고 방식을 가진 성도는 투자하지 허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앙도 믿음도 아닙니다. 믿음은 계산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허비하십니까? 허비하는 신앙이 참된 복음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신이 지배하는 이 시대 정신과 동화되거나 언약을 맺어서는 안됩니다. 철저히 복음적인 신앙을 따라 걷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철학, 교육은 인권의 강조와 자아 중심적인 사고로 무장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이것이 시대 정신입니다.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인본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물질주의로 점점 정신은 타락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지성은 실용주의와 합리주의로 교육을 받고, 마음은 쾌락과 물질(돈)과 자기를 사랑하는 것으로 단련되고, 의지는 인권과 자기 권리를 지키는데 집중합니다.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진정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그분께 돌려드리는 데서부터 죄와 세상을 이기는 경건의 능력이 주어집니다. 이 시대는 인본주의, 자본주의 시대인지라 `인간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하나님을 지나치게 경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신본주의를 지향해야 합니다.
넷째, 불의의 속임수입니다. [불의의 모든 속임수로 멸망하는 자들에게로 오는 것이니 그 까닭은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살후2:10). 불의의 삯을 사랑하고, 불의의 대가를 즐기는 것은 마귀의 간계에 속은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요일5:17). 불의로 얻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마귀로부터 얻은 것이며, 죄의 삯을 지불해야 합니다.
다섯째, 죄의 속임수입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서로 날마다 권면하여 너희 중에 하나라도 죄의 속임수를 통하여 완악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3:13). 죄의 속임수. 죄는 모든 것을 속입니다. 죄를 짓는 일은 모두 마귀의 간계에 속은 것입니다. 주님은 죄를 씻기시고, 제거하시는 분이십니다. 마귀는 죄의 속임수를 통해 계속해서 죄를 쌓아나가게 합니다. 죄의 속임수를 이기기 위해서는 늘 죄를 정결케 하는 주님의 보혈과 말씀의 물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7)고 깨어 기도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성도들이 마귀의 간계에 능히 대적하고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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