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20:4-6
요절: 출애굽기 20:4-6
오늘은 십계명 중에 두
번째 계명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은
별개의 계명이 아니라 거의 같은 종류의 계명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첫 번째 계명을 다양하게 해석하고 영적
적용을 해 보았습니다. 다같이 제 1계명을 외워 보겠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취하지 말라](출20:3). 이
말씀이 내 마음에 깃발이 되고, Banner로 걸어두시기를 빕니다.
첫째 계명만 제대로 지키면 신앙 생활의 거의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됩니다.
이 말씀을 잠깐 정리하면
1.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는 첫째 계명을
어긴 것이라고 했습니다. 2.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는 첫째 계명을 어긴 것이라고 했습니다. 3.
하나님보다 더 소유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는 첫째 계명을
어긴 것이라고 했습니다. 4.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선택하면
그는 첫째 계명을 어긴 것이라고 했습니다. 5. 하나님보다 더
존경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는 첫째 계명을 어긴 것이라고
했습니다. 6. 하나님보다 더 신뢰의 대상이 있다면 그는 첫째
계명을 어긴 것이라고 했습니다. 7. 하나님보다 더 영광을
돌리고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는 첫째 계명을 어긴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다른 것을 취하는 것이 곧 우상
숭배이며, 주님을 멸시하는 것이며 첫 번째 계명을 범하는
것임을 증거했습니다. 구약의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다양한 방법으로 첫째 계명을 어김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징계와 심판을 받은 생생한 역사적 기록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달해 줍니다.
오늘은 둘째 계명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이는 나 곧 [주] 네 하나님이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니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들을 지키는 수천의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느니라.](출20:4-6). 첫 번째
계명이 모든 종류의 우상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계명이었다면 두 번째 계명은 좀 더 구체적인 행동 강령과
같은 것입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확연히 다른 계명이기도
합니다. 첫째 계명이 참된 하나님을 경배하는 대상에 관련된
것이라면 두 번째 계명은 경배의 수단, 방법에 관한
계명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선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했을지라도 어떤 새긴 형상을 만든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영의 인도를 받은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 정상에서 주님 면전에 지금
십계명을 받는 순간에 땅 아래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
송아지를 만들어서 이것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하며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흔히 성상, 성화,
성물이라고 해서 교회 내에 십자가, 예수님의 초상화 등을
걸어 놓거나 동상을 세우는 등의 일은 예배의
일환이라기보다는 무서운 영적 범죄의 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경배가
아니라 예배의 보조 수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흔히 믿음이 없는 성도,
말씀을 믿지 않는 성도들이 예배의 보조 수단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형상을 자꾸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뭔가를 세웁니다. 기독교 문구점에 가면 유난히
성화들,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의 동상 등이 많습니다.
목걸이, 귀걸이에 십자가가 나옵니다. 만약 누군가가 형상을
만들어서 ‘이것이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순간 그는
거짓말쟁이가 되고 맙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고,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눈밭은 가다가 찍었다는 예수님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검은 색으로만 된 것인데 그냥 보면 별 그림이
아니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예수님의 형상이 나온다고
해서 집집마다 걸려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말씀으로
충분하지 못한 사람들은 계속 신들을 만드는 시도를 합니다.
물론 주님이 모든 종류의
형상을 못 만들게 명령하신 것은 아닙니다. 화가들에게
그림을 못 그리게 한 것이 아니며, 조각가들에게 조각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체하는 어떤 형상을
만들거나 그리는 것을 금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성전을
건축할 때 그룹들을 만들게 하셨습니다(출25:19, 왕상6:32).주님께서
인간의 예술 활동을 금하신 것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금하신 것은 어떤 예술 활동도 그것이 경배의
대상이 되거나 하나님을 대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단군상을 그려 놓고 그
앞에서 향을 피우고 절을 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서울에 낙성대란 곳을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맨 높은
곳에 사당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란 그림이 있었고 그림 앞에는 향이 피워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외의 모든 종교 행위는 이런
그림이나 조각, 동상과 같은 예배의 보조 도구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무엇이 없으면 종교 활동을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자 마자 해야 할 일을
정해 주셨는데 그 중 하나는 '그림과 부어만든 형상'을
부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땅의 모든 거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며 그들의 그림과 부어 만든 형상을 다
멸하고 그들의 산당을 다 허물며](민33:5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코 그들의 본을 받는 것을 원치
않으셨으며, 그런 것들에 경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장차 주의 날, 그날이 오면 역시 그림들은
부서질 것입니다. [다시스의 모든 배와 모든 아름다운
그림에 임할 것임이라.](사2:16). 킹제임스 성경에는
구약에만 ‘부어만든 형상’이란 말이 47회나 나옵니다. 단
한번도 좋은 뜻이 없습니다. 그림이나 조각은 그 자체로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장의 그림은 천 마디의
단어보다 더 생생하게 마음 속에 이미지를 형성합니다. 한
장의 사진 역시 그렇습니다. 그림이나 사진, 조각이나
부어만든 형상들이 예배를 드리는데 가치있는 것이라면
성경에는 왜 한 장의 그림도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말씀 본위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4). 여기서 ‘너를
위하여’라고 번역된 부분은 'unto thee'(너에게)라고 되어
있습니다. ‘너는 너에게...어떤 것도 만들지 말라’는 것은
유형의 형상, 무형의 상상력, 생각까지 다 포함되는
명령입니다. 그려진 그림, 만들어진 조각상만 문제가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종류의 미신과 인간의 상상으로 만들어
낸 하나님에 대한 형상까지를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각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image)를 마음
속으로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의
상상으로 생각으로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옛날
동화를 많이 읽은 아이는 하나님은 수염이 하얗고, 흰 옷을
입은 백발의 할아버지를 연상합니다. 무협지를 많이 읽은
어떤 아저씨는 하나님은 자신이 무협지에서 읽은 무협
고수를 연상하고, SF 영화를 많이 본 사람들은 하나님은 저
먼 외계의 고등 외계인의 형상을 그립니다. 물론 상상력의
소산입니다. 마음 속에 그런 형상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주로 외계인이나
우주인들을 연상시키는 것, 신화적 상상물)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짐승들, 토테미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용왕,
해신 등 바다와 관련된 신화나 전설에서 기인한 형상)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라고 한 것입니다. 저는
미술에는 워낙 소질이 없어서 만들고 싶어도 못 만든다는
분들이 많지만 이것은 마음 속에 상상으로 만들고 그리는
것까지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떤 철학자에게 ‘하나님은
누구와 같은 분이신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화가도 그릴 수 없으며, 어떤
시인도 표현할 수 없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올바른
대답이라면 “하나님과 같은 분은 없다”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과도 누구와도 조금도 같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독특하시며 유일무이한 분이십니다.
사람이 마음 속에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거나 형상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 생각 속에 상상 속에 가두어 놓는 역할을 합니다.
성경에 계시된 그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나름대로 만든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결국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창조주가 되는 기현상이 발생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읽고 배우지만
나름대로 자기 안에 자신이 정립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만들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만든 하나님은 곧
우상이지 성경에 계시된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이 마음 속에 지닌 하나님의 개념은
성경에 계시된 지고하신 하나님의 영광과는 너무나 달라서
현실적으로 영적 파산, 도적적 재앙이라 부를 만큼
심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고, 지극히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느껴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부지불식간에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두 번째
계명을 범하는 이유는 그들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계시와 조명을 충분히 받지 못한 대신 성경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이미지를 마음 속에 채웠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계명은 하나님을 다른 무엇으로
대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멋대로 개념짓거나 생각하거나 상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참되신 하나님 대신에 인간
자신이 원하는 신, 자신에게 맞는 신을 만들어 내며, 자신의
모습을 닮은 신을 만들어 내놓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신의
창조자가 되고, 하나님은 그 사람 마음 속에서 피조된
피조물에 불과할 뿐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점점 인간 중심적으로 쇠락하여 [...네가 나도
전적으로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시50:21)란
지점까지 떨어집니다.
너에게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는 두
번째 계명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석상이나 동상, 그림
앞에서 엎드리지 말라는 것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 숭배의 본질은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데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감사치 않으며 다른 것에 관심이 끌릴 때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형상이 만들어진 것이며,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인식, 그릇된 지혜, 잘못된 개념이
마음에 자리 잡는 것이 바로 두 번째 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계명은 하나님에 대해 성경의 기준이
아닌 자기 마음대로 상상하고, 그 상한 것들이 참인 것처럼
믿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 마음
속에 자리 잡는 것이 바로 두 번째 계명을 범하는
핵심입니다. 어느 교회든, 어떤 성도이든 성경의 빛에서
멀어지고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의 image를 갖게될 때
타락의 첫 걸음을 내 딛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를 위하여 우상들이나 새긴 형상을 만들지 말고 서 있는
형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돌로 된 형상을 세우고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 이는 내가 [주] 너희 하나님이기
때문이니라.](레26:1). 오늘날 문명인들 가운데, 특히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이 이런 죄를 지을 리는 거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구약의 역사나 교회사를 통해
볼 때 이런 우상 제작과 우상에 끌리는 유혹은 거의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계시와 조명없이 우상
숭배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상 숭배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단 지파는 우상
숭배에 너무 깊이 빠져서 영원히 유업을 잃어 버렸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도 같은 이유로 제외되었습니다(호4:17). 우상
숭배자는 유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우상을
숭배할 경우 유업의 상속을 받을 수 없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을 일삼는 자나 부정한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결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왕국에서 아무 상속도 받지 못하리라.](엡5:5).
여러분이 만약 마음 속에 그릇된 하나님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살고 있다면 평생토록 우상을 숭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계시의 빛, 조명, 성령의 영감으로
주어진 믿음이 아닌 인간의 사유와 전통에서 내려온
가르침이라면 여러분은 헛되이 주님을 경배한 것입니다.
한 가지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섬겼습니까? 우상을 섬겼습니까? 그들은 우상을 철저히
미워하고, 율법에 약간만 어긋나도 출회시킬 정도로 엄하게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평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니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막7:7). 그들의 경배는 헛된
경배였습니다. 평생을 성전에서 살았고, 성경을 읽었고,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바쳤다 해도 그들은 평생 우상 숭배자로 살았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의 계시가 아닌 사람의 명령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믿고
확신했던 하나님의 개념, 하나님의 형상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통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외적인 우상
숭배는 하지 않았지만 내적으로는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우상 숭배자는 우상과 같습니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도
우상들과 같으며 우상들을 신뢰하는 자들도 다 그와 같도다.](시115:8,135:18).
이는 외적인 우상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의 우상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왕 솔로몬은
말년에 우상을 숭배함으로 인해 왕국을 잃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으로 인해 두 지파만을 남겨 주셨습니다. 우상
숭배는 성적 타락과 함께 갑니다. 우상 숭배가 만연한
곳에는 반드시 음행과 술취함이 있고, 동성연애가
성행합니다. 열왕기상 14:22-24을 보십시오. [유다가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되 그들이 자기 조상들이 행한 모든
것보다 더 많은 죄를 범하여 그분의 질투를 일으켰으니 이는
그들도 모든 높은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밑에 산당들과
형상들과 작은 숲들을 세웠음이라. 그 땅에 또한 남색(男色)하는
자들이 있었고 또 그들이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민족들의 모든 가증한 일을 본받아 행하였더라](왕상14:22-24).
우상 숭배는 가족 문제를 일으키고(왕상15:9-15), 요술과
마술을 동반합니다(대하33:17). 믿지 않는 불신자들도 우상
숭배의 폐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각국의 근대화를
이끈 정치 지도자들, 계몽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미신
혁파’였습니다. 오랫동안 숭배해 오던 우상에 대한 믿음을
교육과 문명으로 깨뜨리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
작업에 성공한 나라들은 근대화의 기틀을 다지고, 빈곤에서
탈출했지만 그 작업에 실패한 나라들은 여전히 후진국의
오명을 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우상 숭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풍성히
거하지 않고는 도저히 우상 숭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이는
그들이 직접 우리에 관하여 보여 주면서 우리가 어떻게
너희에게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살전1:9).
이것은 아주 모범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사탄은 계속해서
우상을 숭배하도록 유혹하고 올무를 놓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어린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들을
멀리하라. 아멘](요일5:21)고 권면했습니다. 우상은 반드시
외적인 것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우상 숭배에
준하는 죄들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예를 들어 완고함은
우상숭배와 같은 죄입니다. [이는 거역하는 것은 마술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불법과 우상 숭배와 같기
때문이니이다. 왕이 주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그분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더라.](삼상15:23).
완고한 것이 우상 숭배와 같다면 완고한 성질이 죽지 않는
이상 그는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서 있는 우상을 파괴하려면 십자가로 자아를 죽이는 일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는대로 ‘고집 센
사람’치고 믿음 좋은 사람 없습니다. 그는 고집으로 인해
믿음이 자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집이 세다는 말은 우상
숭배자란 말과 동의어입니다. 탐욕도 우상 숭배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遲體)들을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
숭배니라](골3:5). 완고한 것, 탐욕은 밖으로 만들어진
형상이나 그림은 아니지만 분명히 마음 속에 새겨진
우상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많은 사람을 누가
좋아합니까? 하나님은 그를 우상 숭배자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다시 본문을 보십시오.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이는 나 곧 [주] 네
하나님이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니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들을
지키는 수천의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느니라.](출20:4-6).
왜 하나님은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못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친히 하나님의 형상을 보내 주시고, 보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처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창1:27). 그러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은 잃어 버렸습니다. 인간은
잃어버린 형상을 찾으려는 잠재적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뭔가를 만들고, 새기고, 그려댑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아무도 자신에게
새긴 형상을 만들거나 거기에 절하거나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4: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니라.](고후4:4)고 합니다. 골로새서
1:15, [이 아들께서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形像)이시요,
모든 피조물의 처음 나신 분이시니](골1:15a).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형상을 새기거나 만들거나 그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신 하나님의 형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계명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가
스스로 어떤 형상을 만들어도 그것은 하나님이 될 수 없으며,
결코 하나님이 아니란 것입니다. 구원자는 인간이 만들거나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형상은 하늘 위나 땅 아래나
바다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오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라.](히1:3a).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형상도 새기지 말고, 단지 주님이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영접하라!!
왜 하나님은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못하게 하셨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그것은
바로 주님이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이는 나 곧 [주] 네
하나님이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니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20:5). 사랑과 질투의
관계는 정비례합니다.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시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질투의 화신’이란 말도 있고 보면
질투는 살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살인 동기 중에 ‘질투’라고
하면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을만큼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
바로 질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질투입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경배하지 말지니 이는 [주]가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니라.](출34:14).
하나님이 얼마나 질투하는지 안다면 감히 한눈 팔 생각은
아예 버려야 할 것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들이 강한
자에게 질투를 일으킴으로써 망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질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는
[주] 네 하나님이 소멸시키는 불이시요, 심지어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라.](신4:24).
질투와 시기심은 좀
다릅니다. 시기심은 상대를 인정해 주지 못하고, 자기보다
나은 것은 무너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죄악입니다. 질투는
죄가 아닙니다. 시기심은 능력많고 잘 생긴 사울 왕을
졸장부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다윗에 대한 시기심으로 인해
파멸했습니다. 시기심은 일상의 삶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사울 왕은 블레셋과 전쟁하다 다윗이 온다는 소식에 전쟁도
마다하고 다윗을 잡으러 갔습니다(삼상24). 반면 질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주를 위해 질투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위해 질투했습니다. 질투는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만약 질투가 죄라면
하나님은 죄악 자체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얼마나 자주 질투하시는지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질투의 법을 두셨고 배우자가
간음이나 부정을 했을 때는 죽임으로써 질투를 해소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불타는
불꽃같아서 한번 타오르면 누구도 끌 수 없습니다. [(이는
너희 가운데 계신 [주] 네 하나님이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 [주] 네 하나님의 분노가 너를 향해 /불같이/
타올라 너를 지면에서 멸하실까 염려하노라.](신6:15).
질투는 심판을 불러옵니다. 저와 여러분이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아닌 다른 형상이 서 있다면 주님은 단호하게
심판하십니다. 에스겔 14:3-7을 펴 보십시오. [사람의
아들아,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며 자기
불법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두었으니 과연 그들이 내게
물을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의
집에서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며 자기 불법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두고 대언자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에게 나 주가 그의 우상들의 많은 수효대로 응답하리니
이것은 이스라엘의 집이 다 자기 우상들로 말미암아 나와
사이가 멀어졌으므로 내가 그들의 마음 상태대로 그들을
취하고자 함이라.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의 집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회개하고 너희 자신을 돌이켜 우상들을 떠나라. 너희 얼굴을
돌려 너희의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이는 이스라엘의
집과 이스라엘에 머무는 타국인 중에 자기 자신을 분리하여
나를 떠나고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며 자기 불법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두고 나에 관하여 묻고자
대언자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에게는 나 주가 친히 응답할
것임이라.](겔14:3-7). 하나님은 바깥 산당이나 산에 세워둔
우상이 아니라 마음 이스라엘 집이 마음 속에 세워둔
우상들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우상들’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마다 자기 우상들이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둔 신들이 되며,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되거나 더 두려운 대상이 되거나 더 신뢰할
대상이 될 때 첫 계명은 깨어지고, 동시에 두 번째 계명이
부수어집니다. 이때 하나님의 질투는 불타오르게 됩니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이 마음 속에 자기 우상들을 둔 채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은 우상들의 수효대로
응답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집은 우상들로 말미암아 주님과
멀어졌는데, 주님은 그 멀어진 마음 상태대로 그들을
취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경고를 받고 깨어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 속에 세워둔 우상들, 마음 속에 새겨진
형상들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5절을 보십시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이는 나 곧 [주] 네
하나님이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니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20:5). 하나님의 질투는
얼마나 센지 당대로 끝나지 않고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조상의 불법과 죄를 후손에게 전가하는 것이
정당한가? 또는 왜 내가 부모의 죄의 굴레를 덮어 써야
하느냐?와 같은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말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할 때
그는 당연히 벌을 받습니다. 문제는 그 자녀가 단호히 조상
때부터 내려오던 우상 숭배나 불경건한 모든 것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섬겨야하는데, 조상들로부터 받은 전통을 어길 수
없다며 계승하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그 죄를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요시야와 히스기야처럼 조상들의
죄를 단호하게 단절하고 우상을 혁파했을 때 주님은 크게
복을 주셨고 강하게 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코
아버지의 죄와 불법을 그들에게 물리지 않으셨습니다.
조상들의 죄와 불법이 전수된 것은 후손들이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에 조상들의 전통을
단절하지 못해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어린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명절이면 제사 문제로 곤혹을 치르는 사람들,
연초면 가족 전부의 운세를 받아 오는 할머니나 어머니를 둔
자녀, 절에 나의 이름을 등재해 두고 기도하는 어른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어떻게 가계(家系)에 흐르는
저주를 끊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상 숭배자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랐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남으로써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남의 탓하기를
잘하는 한국인들은 조금만 잘못되면 조상탓 하는 습성이
있어서 이 말씀을 가지고 조상탓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외로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문을 영적 명문 가정으로 일으켜 세울
책임과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들을 지키는 수천의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느니라.](출20:6). 이 역시 조상 잘 두면 복을 받는다는
말로 해석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들을 지키는 자’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이는 신구약의
구분이 없습니다. 마음 가운데 새긴 형상, 자기가 만든 신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되고, 계시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 주님은 긍휼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너는 너에게
어떤 생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계명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사유나 지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나 image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살아 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믿을 때 주님이 들어오심으로서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넘겨주셨사오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낼
자(reveal)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니라.](마11:27).
우리는 성경이란 절대적인 계시를 필요로 하며 이 계시를
통해 주님을 알아 가야 합니다. 그 외의 어떤 수단,
방법으로도 주님의 형상을 마음으로도 새기거나 그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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