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20:16
요절: 출애굽기 20:16
오늘은 십계명 중에 아홉
번째 계명입니다. [너는 네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16). 재판에서 거짓 증거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홉 번째 계명은 [너는
네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16)입니다.
사람들은 협박이나 위협 때문에, 자기에게 닥칠 이익이나
불이익 때문에 거짓 증거를 합니다. 역사상 거짓 증인들의
거짓 증거로 이루어진 가장 왜곡된 재판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재판이었습니다.
군중들은 두 명의 거짓 증인들의 거짓 증거를 바탕으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를 외쳤는데, 그 순간
그들은 모두 아홉 번째 계명을 깊이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덕분에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한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거짓 증거는 하나님의 율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수단이 되게 하는 가장 악한 죄 가운데 하나입니다. 생명을
줄 율법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죽이는데 사용하는
것이 바로 거짓 증거입니다.
구약에서 거짓 증인들의
거짓 증거로 된 대표적인 재판은 나봇에 관한
재판이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탐낸 아합 왕의 탐욕을
만족시켜 주려는 왕비 이세벨의 계략으로 인해 진행된 이
재판은 전적으로 거짓 증인들의 거짓 증언에만 의존한
재판이었고, 신실한 믿음의 종 나봇은 신성 모독죄로 돌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땅을 상속받을
아들들마저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살인을 목적으로 한
재판이었고, 그 주역들은 거짓 증거를 한 백성의
장로들이었습니다. 열왕기상 21:8-14절입니다. [그녀가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의 인으로 봉인하고
나봇의 도시에서 그와 함께 거하는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내니 그녀가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힌 뒤에 벨리알의 아들 두
사람을 그 앞에 마주 앉히고 그를 대적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모독하였다, 하게 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 돌로 쳐서 죽이라, 하였더라. 그 도시의 사람들 곧 그
도시에 사는 거주민 장로들과 귀족들이 이세벨이
자기들에게 보낸 대로 곧 그녀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행하여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매 그때에 벨리알의 자손 두 사람이 들어와 그 앞에
앉고 그 벨리알의 사람들이 백성의 눈앞에서 나봇을
대적하여 증거하며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모독하였다, 하매 사람들이 그를 도시 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서 죽이고 이세벨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나이다, 하니라.](왕상21:8~14).
이들은 주님이 주신 아홉 번째 계명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거짓 증거의 결과 그들은 아합과 이세벨과의 정교 일치와
연합을 통한 불법적인 거래는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그들이
누리던 종교적 지위도 계속 보장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봇이
흘린 피는 아합의 집에 그대로 돌아갔고, 거짓 증거했던
장로들과 백성들 모두 심판을 받았습니다.
[너는 네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16)는 이 계명은 진리와
공의의 하나님께서 율법의 공정한 집행과 법도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법을 어긴 사람들,
율법이 무너진 사회를 회복케 하는 시금석과 같은
말씀입니다. 다른 모든 계명이 율법을 범하지 않도록 하는
예방책의 계명이라면 이 계명은 이미 율법을 어긴 것으로
여겨지는 상태를 전제로 하는 말씀입니다. 사법부의 공정한
재판은 율법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거짓 증거는 사법
교란이며, 재판을 방해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법의 테두리를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성도들은 단지
거짓 증거만 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이 말씀은 역으로 말하자면 ‘신실한 증거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네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거짓을 말하거나 침묵을 지키기보다는
정확하고 바르게 증거하는 신실한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곳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지만 서울에서 살
때는 교통 사고 현장을 지나다 보면 ‘목격자를 찾습니다.’란
배너(banner)가 붙어 있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목격자를
찾습니다.”란 신문 광고를 본 적도 많습니다. 재판을
하는데 증인을 찾느라고 애쓰는 경우도 많습니다. 많은
경우에 보고 들은 것이 있고, 내용을 알지만 송사에
휘말리는 것이 싫어서 입을 닫고, 피해버리는 성향이 많아서
재판이 왜곡되고 피해를 입는 분들이 많습니다. 거짓에 대해
침묵하는 것 역시 거짓에 동조하는 것이며, 거짓 증거자와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아홉 번째
계명보다 한 층 더 강화된 말씀을 주셨는데,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거가 아니라 아예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형제요,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거짓말을 버리고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遲體)이기 때문이니라.](엡4:25).
거짓 증거를 하지 않고, 거짓말을 버려야 하는 동시에
우리는 진리를 말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형제간에 서로 거짓말하는 것은 주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너희가 옛
사람과 그의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골3:9-10). 사람들은 조그마한 난처한
상황이 닥쳐도 거짓말을 합니다. 잠깐의 어색함, 약간의
자존심, 드러내고 싶지 않는 사실들 때문에 부부 지간에도
쉽게 거짓말을 하고, 형제지간에도, 친구 지간에도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은 자기를 방어하는 인간 본성입니다. 하지만
거짓말로 가린 잠시의 수치는 금방 드러나 영원한 수치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입술을 매우 가증스럽게
여기십니다. [거짓말하는 입술은 주께 가증한 것이나
진실하게 행하는 자들은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자들이니라](잠12:22).
순간적인 재치와 순발력을 발휘해서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는 것은 지혜로와 보여도 어리석은 자입니다. [거짓말하는
입술로 미움을 감추는 자와 헐뜯는 말을 내는 자는 어리석은
자니라.](잠10:18).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거짓말로 모면할
순간이 오면 손해와 부끄러움을 무릎쓰고서라도 정직하게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주]여, 내 혼을 거짓말하는 입술과
속이는 혀로부터 건지소서.](시102:2).
[너는 네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16)는 말씀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유업의 상급과 연관된 계명입니다. 거짓
증거는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사건을 다시 덮어 버리고,
왜곡하는 것이므로 다른 어떤 죄보다 더 악질적인 죄라 할
수 있습니다. 거짓 증거는 하나님의 정하신 율법을
무효화시키는 것이며, 악인을 더욱 악하게 의인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죄입니다. 시편 기자는 [속임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눈앞에서 머물지 못하리이다.](시101:7)라고 경고했습니다.
거짓 증거자들은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거짓을
지어내는 자들입니다. 이들에 대한 심판은 이렇습니다. [이는
개들과 마법사들과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누구든지
바깥에 있기 때문이라](계22:15). 이들은 하나님의 도성
밖에 있는 지옥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거짓 증언을 할 때
하나님은 이렇게 갚으십니다. 신명기 19:15-21, [15어떤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에는 한 증인이 일어나서 어떤
불법이나 죄에 대해 그 사람을 정죄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문제를 확정할
것이니라. 16만일 거짓 증인이 일어나서
어떤 사람이 잘못했다고 그 사람을 대적하여 증언하면 17그
분쟁하는 두 사람이 [주] 앞에 함께 나아가서 그 당시의
제사장과 재판관 앞에 설 것이요, 18재판관은
부지런히 조사할지니, 보라, 그 증인이 거짓 증인이요, 자기
형제를 대적하여 거짓으로 증언하였거든 19너희는
그가 자기 형제에게 행하려고 생각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가운데서 악을 제거하라. 20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그 뒤로는 너희 가운데서
이런 악을 다시는 행하지 아니하리라. 21네
눈이 불쌍히 보지 말라. 오직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을지니라.](신19:15~21).
거짓 증인이 일어나서 거짓 증언을 하게 되면 재판관은
부지런히 조사한 후에 거짓 증인이 무엇 때문에 거짓 증언을
했는지 목적과 이유를 알아내고, 그 숨은 의도를 파악하여
그가 처음에 거짓 증언한 의도대로 그에게 되갚아 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여 어느 누구도 감히 이웃을 향하여
거짓 증언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하지
못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하십니다. 솔로몬은 명
판관으로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는 재판을 잘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주님은 그것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솔로몬의 재판이라고 하면 공평 무사하고 정확한
재판의 대명사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솔로몬보다 훨씬 더
정확한 재판관이라고 한다면 어느 누가 그 앞에서 자신을
변명하고,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 재판이 전부가 아닙니다. 저 하늘에서 우리는 모두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은 큰 백보좌 심판석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없다면, 거짓 증거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황급히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시116:11)라고
했고,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 참으로 하나님은
진실하시되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라
할지어다. ....](롬3:4a)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람이 거짓
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다른
모든 계명과 마찬가지로 거짓 증거 역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거짓증거,
신성 모독이기 때문이니](마15:19). 이로써 십계명의 모든
계명은 행동 이전에 이미 마음에서부터 범하는 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렘17:9).
성경은 거짓말, 거짓 증거,
거짓 증언, 거짓 맹세, 거짓 소문, 거짓 이적, 거짓 대언자,
거짓 교사 등 거짓으로 시작되는 말이 너무 많습니다. 이
모든 거짓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할 때에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요8:44).
마귀는 거짓 대언자들을 일으키고, 거짓 이적과 거짓
교사들을 세워 거짓 교리들을 가르칩니다. 잠언 기자가
말한대로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여도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내느니라.](잠14:5)고 했습니다. 거짓
증거는 거짓 증인들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우리의 혀는
진리를 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지어진 기관입니다.
누가 말하기를 하나님은 혀를 지키기 위해 그 앞에 이를
두었고, 그 앞에 입술을 두어 이중 안전 장치를 해 두셨다고
합니다.
거짓 증인들과 거짓
증거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거짓 증거로 인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거짓 증거로 인해 수많은 의인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으며, 모진 고문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세상에서도 위증(僞證)의
죄는 악질 범죄로 취급합니다. 위증을 교사하는 혐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잠19:5),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하는 자는 망하리라.](잠19:9).
[거짓 증인은 멸망하려니와 듣는 사람은 확고하게
말하느니라.](잠21:28). 주님은 거짓 증인에 대해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실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너는 네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16)는 말씀은 신실한
증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십자가의
전달자요, 부활의 증인으로 세움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복음의 증거자들입니다. 주님은 신실한 증인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5, 3:14을 보십시오.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자들 중에서 처음 나신 분이시며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씻으시고](계1:5),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요,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이요,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인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계3:14). 주님은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이십니다. 우리 역시 동일한 증인들입니다. [또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 바로 그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 우리는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듣고
배웠습니다. 성령께서 증거자가 되셔서 우리가 배운
진리들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증거의 말씀입니다.
신실한 증인은 자기에게
피해가 오고, 목숨이 위태로워도 거짓을 말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약간의 유혹이 와도 타협해
버리고, 조그마한 위협이 오면 정신없이 도망치거나 침묵해
버리는 사람들은 신실한 증인 될 수 없습니다. [달같이,
하늘에 있는 신실한 증인같이 영원히 굳게 세워지리로다,
하셨도다. 셀라.](시89:37).
주님은 우리가 거짓
증인이 아니라 신실한 증인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신실한 증인이 되고 싶어하지만 몇 가지
이유로 인해 거짓 증인이 되고 맙니다. 성경의 믿음의
영웅들 가운데도 거짓말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는데 이는 아내의
미모를 탐낸 아비멜렉 왕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
갈까 두려워서였습니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역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야곱은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야곱은 영적 야망과 탐욕 때문에 거짓 증거를 했습니다.
야곱의 외삼촌 라반은 야곱을 속였습니다. 라반은 야곱의
노동력을 갈취하기 위해서 거짓말했습니다. 라반의 딸
라헬은 자기 아버지를 속였고, 야곱의 아들들은 야곱을
속였습니다. 이들은 시기심 때문에 거짓말했습니다. 요셉은
후에 이집트에서 형제들에게 속여 거짓말을 했습니다.
요셉은 그들을 시험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온통 속이고 속는 거짓말들의 연속입니다.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거짓말을 했습니다. 일시적인
위기를 모면하고자 거짓 증거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이요, 본성입니다. [악한 자들과 미혹하는
자들은 점점 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딤후3:13).
이것이 오늘날 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웃들에게 어떤
경우에도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성경에 대해서 거짓
증거해서는 안됩니다.
[너는 네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16)는 말씀은 진리를 알면
그것을 선포하고, 숨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알고 진리를 알면서 선포하지 않는 것 역시 거짓말쟁이가
되고 맙니다. 주님은 자신이 말씀을 선포하는 이유를 이렇게
증거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 하면 내가 너희와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오직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키노라.](요8:55). 알면서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믿음을 져버린 행위일 뿐만 아니라 거짓 증거입니다.
예수를 믿은 많은 사람들이 신실한 증거자요, 증인으로 생을
마감하기 위해 죽었습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진 초대
교회의 폴리갑은 위대한 증거자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재판관은 폴리갑이
노인임을 생각하여 고문과 죽음을 당하느니 개심하도록
충고했습니다. 이때 폴리갑은 총독에게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 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가 있겠소” 말했습니다. 그러자 총독은
“나는 사나운 짐승들을 준비해 두고 있소, 만일 당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당신을 그 짐승들에게 던져
버리겠소”라고 위협했습니다. 폴리갑이 대답하기를, “그
짐승들을 부르시오. 우리는 선을 버리고 악으로 돌이켜서는
안 되오, 오히려 악에서 돌이켜 덕을 택하는 것이 선한
일이오” 뜻을 굽히지 않는 폴리갑을 향해 총독이
마지막으로 위협을 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당신을 화형 시키겠소”.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잠시 타오르다가 곧 꺼져버리는
불로 나를 위협하고 있소. 왜냐하면 당신은 장차 임할
심판과 악인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형벌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요”. 그는 스데반이나 사도 바울이 갔던 그 믿음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신실하게 증거하면서 갔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의
일을 속임수로 행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억제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받을 것이로다.](렘48:10).
[너는 네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16)는 말씀은 믿음과 삶의
행위를 일치시키라는 말씀입니다. 거짓 증거는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실, 삶의 모습은 말보다 더 큰
증거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의 말을 하지 못해서가
믿음의 삶이 뒷받침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거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귄다 말하고 어둠 가운데서 걸으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거니와](요일1:6).
[그분을 아노라 말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2:4). 우리가 하나님과 사귄다, 그분을
아노라 말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후에 어둠 가운데서 걷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거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신실한 증인은 말과 더불어 행동과 삶과 열매로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선한 행실과 의의 열매가 없는 증거는
거짓 증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너는 네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16)는 말씀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거짓 증거이며,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거짓 증거입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거짓말은 “나는 한 번도
거짓말 안 해봤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보다 더 큰
거짓말은 “나는 죄없다”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말하면 스스로를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는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말하면 그분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요, 또한 그분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8-10).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회개를
거의 하지 않고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거짓
증거를 하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회개하지 않고, 회개의 눈물없이 메마른 심령으로 하는
기도는 거짓된 신앙입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다섯 가지 물이 필요합니다. 1. 말씀의 물-이것이
없으면 깨끗함을 입을 수 없습니다. 2. 회개의 눈물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위선자가 되고 맙니다. [내가
신음하므로 피곤하며 밤새도록 내 잠자리를 띄우고 눈물로
내 침상을 적시나이다.](시6:6). 3. 기도의 땀과 눈물입니다.
한나의 기도를 보십시오. 그녀가 어떻게 열심히 기도했는지
통곡을 하면서 기도했습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고,
몸은 땀으로 적셔지는 그런 열정적인 기도는 우리 주님의
기도에서도 잘 볼 수 있습니다(눅22:44). 히스기야 역시
기도를 할 때 눈물을 흘렸는데, 주님은 ‘내가 네 눈물을
보았노라’고 하시며 응답하셨습니다. 4. 성령의 생수 5.
발을 씻는 겸손의 물입니다. 현대 교회의 특징은 회개없는
신앙 생활이 너무나 만연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물먹듯이 먹고 마시면서 ‘나는 죄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 앞에서 거짓 증거하는
것이며, 형제들을 대적하여 거짓 증거하는 것입니다.
[너는 네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16)는 말씀은 공정한 재판,
바른 판단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관이십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마땅히 공의로운 재판을
해야 하며, 사람의 외모를 따라서 재판을 굽게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가장 유행하는 재판은 여론 재판입니다.
분명히 죄인데도 동정 여론이 일어나면 재판의 영향을
미칩니다. 어떤 경우에는 판결이 뒤집어집니다. [너는
군중을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소송에서 재판을 뒤집으려고
다수를 따라 기우는 말을 하지 말라.](출23:2). 여론 재판,
다수결의 의견을 진리로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민중이란 다수의 거짓 증인들이 거짓 증거한 결과입니다. [너는
가난한 자의 소송에서 그에 대한 재판을 뒤집지 말지니라.](출23:6).
이는 외모를 취한 결과입니다. 외모는 증거의 능력이 될 수
없고,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런 것을
증거의 자료로 취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재판관이 이러할
정도라면 재판정에 선 증인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고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강력한 자라고 예우하지 말고
오직 의롭게 네 이웃을 재판할지니라.](레19:15).
재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증거와 증인입니다. [자기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언하는 자는 큰 망치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니라.](잠25:18).
이웃을 대적하는 가장 큰
거짓 증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과
거짓 대언자들이 거짓 이적을 보여 주면서 전하는 은사주의
복음, 행위 복음, 율법주의 등은 어떤 거짓 증언보다 강력한
독소들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진리를 신실하게 증거할 때,
주님은 우리의 신실한 증인이 되십니다.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만일 [주]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보내사 /이르시는/ 모든 것대로 우리가 행하지
아니하거든 [주]께서 우리 사이에 참되고 신실한 증인이
되시기를 원하나이다.](렘42:5).
[너는 네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16)는 말씀은 위선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위선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어합니다. 위선자들은
하나님의 눈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하며, 사람의 눈에
인정받는 것을 더 추구합니다. 그들의 위선적인 행동은 그
자체가 이웃에 대해 모두 거짓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준수한다고 백성들에게 보였고,
인정받았고, 믿어졌지만 그것은 백성들을 속이는 거짓
증거였습니다. 우리는 때로 위선으로 말미암아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며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약3:14). 위선자들은 그의 삶
자체가 이웃에 대한 거짓 증거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이는 너희가 마치
회칠한 돌무덤 같기 때문이니 그 겉은 참으로 아름답게
보이나 그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부정한 것으로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되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이는 너희가
대언자들의 묘를 만들고 의로운 자들의 돌무덤을 수리하며](마23:27-29).
우리는 남들에게 과장된 모습, 정도 이상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자기 과시욕으로 인해 망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나니야와 삽비라의 경우가 바로 그런
케이스입니다.
[너는 네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16)는 말씀에서 다루고
넘어가야 할 한 가지 말씀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선의의
거짓말입니다. 전에 어떤 목사님이 제게 ‘선의(善意)의
거짓말은 성경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가?’란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에 파라오의 명을 거역한
히브리 산파들의 경우나 여호수아의 정탐꾼들을 숨겨 준
창녀 라합의 경우는 어떤가? 그런 예를 든 것입니다. 성경을
한번 찾아 보겠습니다.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집트 왕이 명한 대로 하지 아니하고 사내아이들을 살려
주니라. 이에 이집트 왕이 산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사내아이들을 살려 주었느냐? 하니
산파들이 파라오에게 이르되,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 같지 아니하고 활기가 넘쳐서 산파들이 자기에게
오기도 전에 해산하나이다, 하매](출1:17-19). 산파들은
왕명을 거역했습니다. 산파들은 왕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거짓말입니까? 아닙니까? 그 답은 아랫 줄에 바로
나와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산파들을 선하게
대우하시니 백성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게 되었더라.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가정을 세워 주셨더라.](출1:20-21). 하나님은 그들을 복
주셨습니다. 그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칭찬하셨습니다. 물론 히브리 산파들이 왕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일부러 산모에게 늦게 가서
아이가 난 후에 들어갔다면 거짓말은 아니라 할 수 있는데,
이것 역시 넓게 보면 왕의 명령을 거역하기 위해서,
핑계거리를 만들기 위해 늑장을 부린 것이라 한다면
거짓말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선의의 거짓말은
용납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들은 거짓말은
거짓말일 뿐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합니다. 물론 히브리
산파들이 파라오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왕을
거역하였나이다’라고 말하고 감옥에 들어가든가, 사형에
처해진다면 더할 나위없는 믿음이라 할 수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다 순교자의 신앙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옹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했다는
그들의 믿음을 귀히 여기신 것입니다.
또 한번의 예는 여호수아
2:3-6절입니다.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이는 그들이 이 온 지역을 탐지하러 왔음이니라, 하니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데려다 숨기고는 이같이 이르되,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날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그 사람들이
나갔으니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노라.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들을 따라 잡으리라, 하였으나
그녀가 이미 그들을 집의 지붕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지붕에
가지런히 쌓아 놓은 아마 줄기로 숨겼더라.](수2:3~6).
라합은 완벽하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여리고의 멸망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라합과 자신의 가족 역시 여리고와 함께
멸망당할 것입니다. 라합은 일생 악한 길을 따라 살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길을 바꾼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에
전혀 무지한 한 이방 여인에게 자신이 살기 위해
거짓말했다고 정죄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입니다. 성령
충만한 몇 사람을 제외하면 누구나 위험하면 다 거짓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라합의 거짓말을 인정하거나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때로 우리는 공공의
유익이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선의(善意)의 거짓말을
요구받기도 합니다. 극비를 요하는 보안상 문제 때문에
우리는 거짓말을 해야 할 상황이 오거나, 강요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한 것이
아니라면 그냥 거짓말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이
두려워서 거짓말을 합니다. 그것은 선의의 거짓말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 때문에 거짓말을 합니다.
이 역시 선의의 거짓말이 아닙니다. 게하시는 탐욕 때문에
거짓말을 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에 대한 질투와
분노로 거짓 증거를 했습니다(창39:7-20). 이런 것은 단 하나도
선의의 거짓말이 아닙니다. 선의의 거짓말이나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만약
전쟁 상황에서 적을 속이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훌륭한
작전이며, 지혜가 됩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시며(왕상22:22-23), 강한 미혹을
보내셔서 거짓을 믿게 하십니다(살후2:11).
우리 나라 사람들은 가족
중에 누가 불치병이 걸리면 한 참 동안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는 선의의 거짓말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해주어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믿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죽음이 곁에 왔는데도
가족들과 주위 사람들의 거짓 증거로 죽음을 준비하지도
못하고 곧 바로 지옥에 보내는데 대해서 아무런 죄책감도
갖지 않는 것은 큰 죄입니다. 신실한 증인이란 진리를
거슬러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며,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우리가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할 수 있기
때문이요,](고후13:8). 오늘날 가장 거짓 증거를 일삼는
무리들이 바로 거짓 교사들과 거짓 대언자들이 거짓
성경으로 전하는 설교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주님께서
마태복음 19:18, 마가복음 10:19, 누가복음 18:20, 로마서 13:9에서
4번에 걸쳐 “너는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아홉번째 계명을
인용하셨는데, 개역 성경에는 마가복음 10:19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말씀이 빠져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성경 자체가
거짓 증거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홉 번째
계명을 살펴보았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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