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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다른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성도들에게 성경의 진리를 매우 날카롭게 분별하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는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오늘은 다섯 번째 시간으로 그리스도는 다 같은 그리스도인가?에 대해 함께 성경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부주의하게 성경의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진리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음을 자주 봅니다. 우리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인용하고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가 하면, 적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이란 뜻입니다. 아론은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었습니다. 다윗 또한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루시퍼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자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요5:43). 여기서 자기 이름으로 오는 다른 자란 누구입니까? 신, 구약은 모두 마지막 때에 나타날 “신비하고도 무서운 이 존재”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그의 이름은 “루시퍼”(사14:12), 앗시리아인(사10:5,12,24, 30:27-33), 작은 뿔(단7:8,8:9), 무서운 용모를 한 왕(단8:23), 장차 올 통치자(단9:26), 자기 마음대로 하는 왕(willful king-단11:36)입니다. 신약에 예언된 그의 이름은 “죄의 사람”이요, “멸망의 아들”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불법의 신비”, “저 사악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적그리스도”요 “짐승”(Beast-계13:1-8)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반면 사탄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온 것은 적그리스도입니다. 현재 이 세상에는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사탄의 신경세포처럼 모든 곳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정부에서 일하기도 하고,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기도 합니다. T.V를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상과 가치관을 주입하기도 합니다. 지금 각 교회는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 거짓 일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 내에 있는 사탄의 사역자들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니 이는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사탄의 사역자들도 의의 사역자로 가장한다 하여도 결코 큰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들의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4,15).

사탄은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에 빛을 본 사람들은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빛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보았습니다. 반면 마호메트는 빛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의 빛을 보았습니다. 몰몬교를 창시한 요셉 스미스도 빛을 보았습니다. 이교도의 창시자 가운데 빛을 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빛을 보았다는 사실 하나에 너무나 쉽게 속아 버렸습니다. 그 빛의 근원을 살펴 볼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빛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마귀를 분별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위로부터 옵니다. 반면 적그리스도는 아래로부터 옵니다. 요한복음 6:38에 이르기를 [이는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내려 왔음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오셨습니다. 적그리스도는 바닥없는 구렁에서부터 올라옵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증거를 마칠 때에 바닥 없는 구덩이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을 대적하여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죽일 터인즉](계11:7).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출생부터 죽음의 그 순간까지 철저히 기록된 성경에 따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데 전념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셨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자신의 뜻을 행하기 위해 이 땅에 옵니다. [그 왕이 자기 뜻대로 행하며 자기를 높이고 모든 신들보다 자기를 크게 하며 놀라운 말들을 하여 신들의 하나님을 대적하여...](단11:36). 예수 그리스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그러나 내 뜻이 아니옵고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혹시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할 때, 정반대로 기도하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주여, 제가 구하는 이것만은 꼭 들어 주옵소서!”라고 매달리지 않습니까? 자기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자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요5:43).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자기 이름으로 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스스로를 높이는 자는 끌어 내려질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반면 마귀는 자기를 높이고, 드러내는 일을 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겸손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심지어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낮추심으로 죄인들 가운데 하나처럼 되셨습니다. 빌립보서 2:7,8에 이르기를,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우리의 대장이시며, 구원의 근원이신 주님이 자신을 낮추었다면 그의 제자들의 삶의 자세는 너무나 자명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라도 자기를 낮추는 것을 삶의 지표로 삼고,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낮게 여기는 자세를 취합니다. 이것이 잘 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적그리스도에게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자신을 높입니다. [그는 대적하는 자요, 하나님이라 불리거나 혹은 경배를 받는 모든 것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로서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2:4). 이 세상에서 자기를 과시하고 뽐내는 사람들은 모두 적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4.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으로부터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결코 영광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멸시를 당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우리는 그를 피하려는 것같이 우리의 얼굴을 감추었으니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3). 사람들은 강도 바라바를 예수보다 더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십자가를 목이나 귀에만 달고 다니면서 결코 어깨에 메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수치와 저주의 상징인 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면 어떻게 그의 제자들이 환영을 받을 수 있습니까?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기독교가 되기 위해서는 회개, 십자가, 피의 속죄, 자기 부인과 같은 주님의 가르침을 빼 버리고 평화, 사랑, 영광, 축복을 설교하면 됩니다. 앞으로 성경에서 이런 것만 설교하는 한 사람이 나타날 것이고, 모든 사람에게 영광과 찬양을 받을 것입니다. 계시록 13:3-4에 이르기를, [또 내가 보매 그의 머리들 가운데 하나가 상처를 입어 죽게 된 것 같더니 그의 치명적인 상처가 나으매 온 세상이 놀랍게 여기며 그 짐승을 따르더라. 사람들이 그 짐승에게 권능을 준 용에게 경배하고 또 그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그와 전쟁을 하겠느냐? 하더라.]

5.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높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주사]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가장 큰 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셨지만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가장 높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신을 낮춤으로써 하나님이 높여 주시는 은혜를 기다릴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행동 양식 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자랑하고, 광고하며, 개성을 중시하고, 표현하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 지금의 시대 정신에서도 변함없이 존귀한 가치는 겸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되<대적하시되-resisteth>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 하시느니라.](약4:6). [주의 눈 앞에서 너희 자신을 낮추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겸손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그리하면 정하신 때에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적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끌어내림을 당했습니다. 그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이사야 14:14-15에는 하나님께서 마귀를 심판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가 구름들이 있는 높은 곳 위로 올라가서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이 되리라, 하였음이라. 그러나 너는 끌려가<끌어내려져--shalt be brought down> 지옥으로 곧 구덩이의 옆면으로 내려가리로다(사14:14-15). 이들은 계시록 19:20에 가서 불 못으로 던져짐으로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겸손은 주님의 성품이요, 교만은 마귀의 성품이란 사실을 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이 사실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는 모든 높은 것을 바라보는 자요, 모든 교만한 자녀들을 다스리는 왕이니라.](욥41:34). 루시퍼는 현재도 이 세상의 왕이요, 주님이 오실 그 날까지 여전히 위풍당당한 통치자입니다. 느부갓네살이 교만했을 때 주님은 그를 소처럼 들에서 풀을 뜯게 만드셨습니다(단4:34-37). 헤롯이 교만했을 때 그 자리에서 즉사 시켜 버렸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시기 바랍니다(빌2:3-4).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을지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마음이라.](빌2:5). 여러분은 지금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까? 적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까?

6.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아들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음이니라.]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신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구원은 언제나 교회의 가장 중요한 관심 가운데 하나이며,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열망해야 하는 소원 중의 하나여야 합니다. 적그리스도는 멸망시키기 위해 옵니다. [그의 권세가 강할 것이나 자기의 권세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그가 놀랍게 파괴하며 형통하여 마음대로 행하며 강한 자들과 거룩한 백성을 멸하리라.](단8:24). 적그리스도는 거짓말쟁이요, 처음부터 살인자입니다. 그의 정책은 항상 속임수이며, 평화를 미끼로 사람들을 멸할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들과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과 개신교에 대해서는 항상 Anti(反) 정책을 사용합니다. 교회나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반유대정책이나 친회교정책은 모두 마귀의 일꾼들이 하는 짓들입니다.

7. 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이십니다(요10:14-15). 예수님은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목자는 중동 지역에서 결코 환영받는 최고의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목자는 매우 천하고 힘들며, 위험한 직업이었습니다. 목자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현대인들은 목자라는 직업을 한가로운 목장에 양들을 풀어 두고, 풀피리나 불면서 한가하게 초원을 거니는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직업인 줄 압니다. 양떼들이 있는 목초지에는 항상 야수들이 몰려들었고, 양들을 훔쳐가려는 도적과 강도들이 출몰했습니다. 풀이 부족할 때면 목자들은 적게는 수십 마일 많게는 몇 백마일 까지 여행하며 양들을 먹여야 했고, 밤에는 서리와 이슬을 맞아가며 양들을 지켜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는 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 목자들은 모두 들에서 양떼를 지켰지 화로가 있는 실내에 있지 않았습니다(눅2:8). 목자는 집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양떼가 있는 그곳이 바로 자기가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그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노략질하기 위해 들끓는 험하고 거친 세상의 야수들과 도적들로 여러분을 지키기 위해 지금 바로 이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적그리스도는 우상 목자(idol shepherd)입니다. [화 있을진저, 그 양떼를 버리는 우상 목자여! 칼이 그의 팔과 오른쪽 눈에 임하리니 그의 팔이 완전히 마르고 그의 오른쪽 눈이 완전히 어둡게 되리라, 하시니라](슥11:17). 우상 목자는 양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양떼에게 섬김 받고 경배 받기만을 원하는 목자입니다. 우상 목자는 양들을 돌보지 아니하고 기름진 것들의 고기를 먹고 자신의 이익을 취합니다. 양들은 어떤 목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주님은 자신의 피로 사신 양떼를 먹이고 감독할 목자들을 지역 교회마다 세우시고 계십니다. 주님께 세움 받은 목자는 양들을 먹이는데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아야 합니다. 목자로 세움받지 않는 목자들이 교회를 세우고,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더 큰 문제입니다. 지금같이 평화로운 때는 차이가 드러나지 않겠지만 환란이 닥치면 금방 드러날 것입니다.

8. 예수 그리스도는 참 포도나무이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시라.](요15:1). 포도나무의 번식은 주로 접목(接木)과 꺽꽃이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접목된 사람들입니다. 포도나무는 포도 열매를 많이 맺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농부들은 겨울에 전정을 실시하여 2-3눈의 짧은 가지와 6-7눈의 긴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십니다. 성도들이 성령의 열매를 더 많이 맺게 하기 위해서 가지치기 작업을 하십니다. 때로는 가족간의 불화를 통해서 신앙 생활을 방해하는 부모, 형제간과 멀리 떨어뜨리십니다. 때로는 파산을 통해서 돈에 집착했던 마음을 꺾어 버리십니다. 때로는 질병을 통해서 육신을 신뢰하고 이 세상에 파묻혀 있던 마음을 일거에 돌이켜 놓으십니다. 한가지 주목할 점은 전정은 나무의 수령(樹齡)이 더해짐에 따라서 정도를 강하게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노목이 되면 수세(樹勢)가 쇠약해져서 결실도 불량해지기 쉬우므로 굵은 가지를 잘라내고 세력이 강한 가지와 교체하는 갱신전정(更新剪定)을 하는 수가 많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 할수록 삶을 더 단순하게 만드십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이런 작업이 있다면 열매 맺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적그리스도는 땅의 포도나무입니다. 땅의 포도는 줄기를 타고 올라가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땅의 지표면을 기어서 넓게 퍼진 채 아주 작은 열매를 맺습니다. 농부들은 전정을 하는 대신 낮을 가지고 와서 확 긁어서 다 제거해 버립니다. [너의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들을 모으라. 이는 그 포도들이 충분히 익었음이니라, 하더라.](계14:18).

9.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주님은 유일무이한 절대 진리이십니다. 유교의 시조라 할 수 있는 공자는 평생 동안 이 진리를 듣고 싶어 소원했지만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남긴 말 가운데 “朝楣면 夕死라도 可也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입니다. 그는 일생동안 道를 찾아 나섰지만 정녕 도(道)를 듣지 못하고 죽은 것입니다. 제자 중에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 묻자, “산 것도 다 알지 못하는데 죽은 이후의 세계를 어찌 알 수 있겠느냐?”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거리낌없이 진리를 선포했으며, 이 생의 삶과 죽은 후의 세계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불교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석가모니는 평생 도(道)를 찾아 수행에 수행을 거듭했지만 그가 안 것은 진리는 “없다(無)”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인 불교의 승려들은 항상 “無라, 無라”를 외치고 다닙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만약 이사야의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면 진리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승려로 존경을 받고, 성인의 반열로 추앙을 받은 성철 스님은 죽기 전 “임종계”를 남기셨는데 그 내용인즉 이렇습니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그는 평생을 수행했지만 “진리”는 고사하고 자신이 죽어 지옥에 간다는 사실만 알고 간 것입니다.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고려 팔만대장경은 불교 철학의 핵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라마다경 38:8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荷時 爺素來 吾道 由無之燈也”(하시 야소래 오도 유무지등야). 그 뜻인즉 “언젠가 예수님이 오시면 나의 가르침은 기름없는 등과 같으니라.”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은 진리란 없다거나,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다라고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니...]고 말씀하십니다. 반면 적그리스도는 거짓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행하고자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할 때에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요8:44).

10.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24에는 마귀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르되, 나사렛 예수님이여, 우리를 내버려두소서.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오셨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시니이다.] 거룩함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특징짓는 가장 두드러진 요소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서 거룩함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포기한 결과이며, 그분의 말씀을 버린 결과입니다. 거룩함이 없는 성도들, 성결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체험할 길은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외침에 무관심한 것은 그들의 외침과 가르침이 자신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온갖 더러움과 정욕을 씻어 버리고 거룩함을 입어야 할 성도들이 오히려 그 더러움 속으로 들어가지 못해 안달이라면, 그들이 외치는 성경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적그리스도는 사악한 자입니다. [그 뒤에 저 사악한 자가 드러나리니 주께서 자신의 입의 영으로 그를 소멸하시고 친히 오실 때의 그 광채로 그를 멸하시리라.](살후2:8).

11. 예수 그리스도는 슬픔의 사람입니다. 이사야 53:3에 [그는 멸시를 당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애 동안 울었다는 구절은 찾아 볼 수 있어도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어떤 신앙 서적에서 예수님이 유머 감각이 많으셨다고 기술한 것을 보았지만 성경의 증거는 정반대로 “슬픔의 사람”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인생들의 수고와 비참함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의 회개하지 않는 완악한 마음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들이 받게 될 엄중한 심판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그들의 불신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인생들의 연약함을 보고 우셨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짧은 구절은 요한복음 11:35인데 “예수님께서 우시더라”(Jesus wept)입니다. 성도들에게 기쁨의 면류관을 씌워주시기 위해 주님은 고통의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죄의 사람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동정과 연민이 없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3에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일어나고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드러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할 것임이라.]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를 그냥 시대의 분위기나 영향력, 악한 세력 정도로 규정짓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적그리스도가 인격과 신격을 동시에 지닌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적그리스도(Anti Christ)는 멸망의 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같이 적그리스도는 사탄의 성육신한 아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성경을 살펴 보겠습니다.

12. 예수 그리스도는 경건의 신비입니다. 경건의 신비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말합니다. [크도다 경건의 신비여, 논쟁의 여지가 없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딤전3:16). 기독교와 유대교, 회교의 근본적인 차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믿는 것이 구원입니다. 기독교의 이름 아래 많은 종파가 있습니다. 그 중에는 경건의 신비를 부정하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모든 성경에는 경건의 신비에 대한 교리가 가려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란 선언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확증해 주지만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란 단어 대신 “그”(he)란 대명사를 사용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불법의 신비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7에 [이는 불법의 신비가 이미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라. 다만 지금은 막고 있는 이가 있어 그 길에서 옮겨지기까지 막으리라.] 창세기 3:15에서 여자의 씨와 뱀의 씨가 대조되어 나옵니다. 여자의 씨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뱀의 씨는 당연히 적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6:70에서 “너희 중의 하나는 마귀니라”<Jesus answered them, Have not I chosen you twelve, and one of you is a devil?>고 말씀하심으로 가룟 유다의 정체가 사람이 아님을 밝힌 적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가 죽었을 때, 지옥으로 갔다고 말하지 않고 자기 처소(행1:25-his own place)로 갔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은 다 같이 이 사람을 가리켜 “멸망의 아들”(요17:12, 살후2:3)이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17:7,8에서 이 짐승의 신비에 대해서 말하기를,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앞으로 바닥 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와...] 그렇다면 이 사람이 누구인지 정체가 드러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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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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