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속죄와 구속에 대해


저는 얼마 전 몇몇 형제들과 이야기하면서 머리 속에 번뜩 떠오르는 한 가지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강단에서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속죄의 설교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거의 매주 설교되어야 할 피의 복음은 어느덧 1년에 한 두 번 설교될까 말까한 설교 제목이 되어 버렸고, 그 결과 교회는 복음의 능력은 완전히 잃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절대성을 외치는 교회에서 오히려 피의 복음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저는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이단이란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영적 생명을 새롭게 하는 가장 귀한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피"의 종교라는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피비린내를 자아내고, 성전을 "도살장"으로 바꾸어 버리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피"를 요구하므로 다시 말해서 "푸주간의 종교"(Religion of the Shamnles)이며,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에게는 반감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입니다. 성경은 피의 책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계속해서 흐르는 피는 온 세상의 강과 바다를 모두 붉은 피로 바꾸어 놓을 만큼 넘치게 흐릅니다. 피와 우리 몸의 생명이 불가분의 관계이듯이 "그리스도의 피"와 성경도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성경에서 붉은 것과 관련된 단어를 빼 버린다면 성경은 죽은 책이 될 것입니다. 피없는 육신이 죽은 몸이듯이 피없는 성경은 죽은 책이며, 생명이 없는 글귀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는 죄로 인해 죽은 모든 사람들의 혼과 인류에 내려진 하나님의 모든 진노와 저주를 제거하는 유일무이한 치유책입니다.

우리 몸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피가 흐르지 않는 곳이 없고, 어느 부분을 칼로 베어도 피가 나오듯이 성경은 어느 한 페이지라도 피와 연관되지 않는 곳이 없고,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어디를 펼쳐도 피가 나오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만일 펜에 붉은 잉크를 묻혀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자세히 읽어가면서 피를 말하고 있거나 피와 관련된 모든 구절들을 지워 버린다면, 성경에서 남는 부분이 얼마 안 된다는 것에 매우 놀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은 아무 가치도 없는 책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역사적인 부분들은 무의미하게 되고, 윤리적인 가르침은 무력해 질 것이며, 예언의 말씀들은 전혀 성취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교리는 "피"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피가 없이는 "죄의 용서"도, "거듭남도“, "의롭게 됨"도, "거룩케 됨"도 "하늘"(천국)도 "옷을 씻음"도, "새 노래"도 없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께서는 무려 28번이나 "어린 양"이라 불리시는데, 그 이름은 항상 그분의 속죄 사역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속죄(atonement)란 말은 당연히 피를 근거로 한 말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가 됨"(AT-ONE-MENT)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은 "둘이 됨"(AT-TWO-MENT)으로, 서로 간격이 벌어지고 분리되어 버렸습니다. 속죄의 목적은 이 둘을 다시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속죄란 범법에 대한 합리적이고, 정당한 사면을 위한 또 하나의 법입니다. 범법에 대한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면이나 용서는 사랑이 아니라 정의를 무시하는, 무법천지를 만드는 또 하나의 악입니다. 그러나, 범법에 대한 확실하고도 분명한 근거 위의 사면은 법적 공의와 정당성을 완전히 확보하는 것이며, 법의 요구를 수용하며, 그 법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면은 단지 인간이 지은 죄를 용서하는 것 이상입니다. 십자가의 피가 아니더라도 주님은 지상 사역 기간 동안에 여러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 가운데 십자가의 피가 필요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양과 송아지의 피로 속죄제를 지내고 죄를 용서받았지만 그들의 죄가 결코 완전히 깨끗해지지는 않았습니다. 속죄는 용서 이상의 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갈보리 언덕에서 높이 메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십자가를 통해 흘러내리는 피는 믿는 자들의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저 에덴 동산에서 범한 최초의 범법으로 인해 빚어진 형벌과 저주, 진노를 모두 제거하는 그런 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죄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로마서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먹었을 때, 그것은 단지 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는 한 가지 죄로 그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창조 형상이 파괴되었습니다. 이 땅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으로 가득 채우려던 하나님의 계획을 박살내 버린 것이 바로 에덴 동산에서 벌어진 범죄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신 마귀의 형상으로 가득한 인간들이 이 땅을 차지하게 물줄기를 틀어 버린 사건이 바로 죄였습니다. 이제 죄 문제는 단순히 죄를 짓고 안짓고 행위의 문제를 넘어서 죄성을 지닌 인간 자체에 대한 처리가 필요한 문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속죄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한 말씀을 어기지 않고서는 죽음의 "형벌"을 철회하실 수 없게 되셨고, 그럴 경우에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그분의 "참되심"(truthfulness)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아담과 이브 위에 형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들을 대신할 수 있는 자에게 형벌이 내려져야만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랑과 공의로 마련하신 대속자는, 바로 그분의 아들의 인격 속에 계신 그분 자신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다름아닌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속은 즉시로 준비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아담의 불순종에 대한 형벌을 받으신 것은 4000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러나 4000년 동안에 수소나 염소, 또는 흠없는 어린 양이 히브리인들의 희생단(제단) 위에 올려져서는 연기를 내고, 흔들었는데, 이는 피흘림이 없이는 죄를 위한 사면이 없다는 한 가지 목적의 교훈을 위해 사람들 앞에서 행해졌습니다. 매년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뿌린 것은, 세상 죄를 제거하시려고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셔야 했던 분에 대한 암시였습니다(요1:29).

희생물로 드려질 때가 이르자, 우리는 공의와 긍휼이 갈보리 언덕 위에 서 있음을 보게 되었고, 공의가 긍휼에게 "4000년 전에 에덴 동산에서 세상 죄를 위해 그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 준 자가 어디 있느냐?"라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러자, 긍휼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올라오시는 그분을 보라"고 대답합니다. 그분께서 언덕 정상에 이르시자, 공의는 수천년 전에 언도했던 "증서"(Bond)를 내보이며, 그 대가의 지불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오늘 그 증서를 제하여 버리겠노라." 이내 희생을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고, "하나님의 어린양"이 십자가의 희생단 위에 놓여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가로대 위에 자신의 손을 얹으셨을 때, 그분께서는 그 손안에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말소시켜야 할 그 "증서"를 쥐고 계셨습니다. 로마 군인이 그 손을 못박았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한 사도의 말이 이루어졌습니다. [또 너희의 죄들과 육체의 무할례로 죽어 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너희의 모든 범법을 용서하시고 손으로 쓴 규례들 곧 우리를 대적하고 반대하는 규례들을 지우시고 그것들을 길에서 취하사 그분의 십자가에서 못박으시고](골2:13-14). 그 "증서"를 제하여 버리심으로 율법과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충족되었고, 그렇게 하시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때에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사 자신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롬3:26)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무죄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죄를 질 수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오직 무죄한 사람이 죄 있는 사람과 결합하여 연대적인 하나(Corporate Oneness)가 되고, 그 죄인과 동일시(IDENTIFIED)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가난한 과부의 빚을 그 이웃인 백만장자에게 짐 지우는 것은 공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함께 결합하여 그녀의 모든 의무를 맡는다면, 그는 그녀의 빚에 대해 공정하고도 합법적으로 책임질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으니; 이는 너희가 다른 분, 곧 죽은 자들로 일으켜지신 그분과 결혼하여, 우리로 하나님께 대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로마서 7:4).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분에 의해 율법에 진 우리의 모든 빚을 갚기 위한 "합법적인 해결책"으로 귀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들에게 "오, 어리석은 자들아, 대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아, 마땅히 그리스도가 이런 일들을 겪고 자기의 영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눅24:25-26) 라고 말씀하시면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이 겪으셔야 할 모든 고난들의 당위성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는 단순히 "대속"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결합하여 "연대적인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연합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아들에게서 죄의 대가를 가차없이 거둘 정도로 공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자로서 "우리 자신을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롬7:4). 다시 말해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들처럼 믿고 행동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고"(롬8:1),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해 심판을 받았으며, 우리가 "죄"로 인해 받은 심판은 지나간 과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이는 기록된 바, 나무 위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았음이라](갈3:13).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나무는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는 죽었는데, 실제로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형벌"은 결코 두 번 집행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나무 위에서 그 자신의 몸에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셨다면"(벧전2:24), 그 죄들은 더 이상 우리 위에 있지 않으며,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나 우연이 아니라, 미리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은과 금과 은 썩어질 것들로 구속받은 것이 아니라…] (벧전 1:18-20).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한 가지 목적, 곧 갈보리의 십자가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단순히 아버지를 증거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은 속죄의 범위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속죄를 택함받은 자들에게만 제한시킵니다. 이들은 속죄를 "상업상의 거래"와 같은 것으로 여기고, "너희는 값으로 산 바 되었으니"(고전6:19-20)라는 말씀을 자주 인용합니다. 게다가 상업상의 거래에는 구매자와 판매자, 매매할 물건, 그리고 지불되어야 할 가격이 있어야 하므로, 하나님은 구매자이시고, 율법은 판매자이며, "택함받은 자들"은 판매된 물건이고, 그리스도의 피는 "구입된 가격"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지불되어야 할 가격과, 인도되어야 할 물품의 수량 및 품질에 대해서도 상호간의 이해관계가 있어야만 하는데, 속죄에 대한 이러한 "상업적인 견해"는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선택하시고자 하신 특정한 수의 사람들만을 구입하셨고, 또 정확한 숫자뿐만 아니라, 같은 종류의 것이 인도(引導)되기만을 고집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 100마리를 샀다면, 말들이 도착하자 정확히 100마리인지를 헤아려 볼 뿐만 아니라, 구입하고자 했던 것과 동일한 종류의 말인지 알아보고자 원할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속죄를 "상업적인 견해"로 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구매가치를 택함받은 자들에게만 제한시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몇몇 사람들만을 구원하시려고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아담의 불순종에 대한 "형벌"을 치르시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그 형벌은 죽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분께서는 인류를 "죄의 저주"로부터 구속하셔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위치에 두시려고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 1Jo 2:2 And he is the propitiation for our sins: and not for ours only, but also for the sins of the whole world.] "화해"(Propitiaton)라는 말은 "화목케하는 행위"(act of reconciliation)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하나님께서 긍휼로써 온 세상을 대하실 수 있고, 또 대하시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롬5:10). 십자가 위에서 하신 그리스도의 속죄는 온 인류를 위한 것이며, 온 인류를 구원받을 수 있는 위치에 올려놓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므로 "보편적 구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구원의 조건, 곧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하신 일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속죄와 구속이란 두 단어는 마치 동일한 의미인 것처럼 사용됩니다. 이 두 가지 용어는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의 결과이지만, 시간과 행위(act)와 관련하여 볼 때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구속이란 합법적으로 자신의 소유인 것을 되찾는 것(redeem)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으며, 그 소유물의 법률적 문제가 해결되어져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를 구원하는 복음을 들은 뒤에 그분을 신뢰하고 또한 그분을 믿은 뒤에 거룩하신 약속의 영으로 인치심을 받았나니 이 영께서 우리의 상속 보증이 되사 값주고 사신 그 소유물이 대속을 받기까지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시느니라.](엡1:13-14). 그러면 구속되어야 할 소유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되찾으시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 8:22-23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또 모든 창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는 줄을 우리가 아나니, 그들뿐 아니라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곧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림은...] 이로써 우리는 피조물과 인간에게 속해 있는 어떤 부분이 자신들의 속박에서 풀려나 회복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창세기 3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몸의 영원성과 땅의 상속권을 상실했습니다. 그 후 아담의 씨들이 받아야 할 모든 상속마저도 사탄의 수하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아담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서는 "친족"(kinsman)이 잃어버린 소유를 되찾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레25:23-24). 그리고 그 친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심으로 예비 되었습니다. 친족이 되기 위해서는 그분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동정녀 탄생"으로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속의 값을 치르셨는데, 그 구속의 값은 바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분 자신의 피였습니다(벧전1:18-2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때 값을 주고 사셨으나, 그것을 아직 요구하지는 않으십니다. 구속은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상당한 기간을 요구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구원의 날"이라고 부르며, 이 "구원의 날"은 1900년 이상이나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구속의 날"은 적어도 1000년 동안 지속될 것입니다. 이 "구속의 날"은 죽어 있는 의로운 자들의 몸이 부활할 때 시작하여 새하늘과 새땅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천년 왕국 동안 모두 구속될 것입니다.

몸의 구속(The Redemption of the Body)

우리는 부활한 몸의 영광을 감히 상상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변형산에서 변형되셨던 사건은 이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그려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성경은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의 몸이 그분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일3:2). 또한 바울은 부활에 대해 기록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한 몸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십자가의 피와 연관되어 있음을 명시해야 합니다.

1.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는 것"으로 뿌려지고 썩지 아니하는 것으로 일으켜지며](고전 15:42). 이것은 꾸밈없는 진실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썩어질 더러운 것으로 심겨졌습니다. 바울은 이를 "천한 몸"이라고 불렀습니다(빌3:21). 이러한 썩어짐은 어디서 유래되었을까요? 그것은 죄가 구체화되고, 극에 달함으로 연유된 것입니다. 그러나 몸은 썩지 아니하는 것으로 일으켜질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몸들이 다시는 죽지 않을 몸과 결코 쇠하지 않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무덤에서 나오며, 또 살아있는 성도들이 변화되어 영광의 옷을 입고서 공중으로 들여 올라가 자신들의 구속주를 만나는 날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2. "치욕 으로 뿌려지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일으켜지며"(고린도전서 15:43). 수많은 몸들이 추악함을 유발하는 죄로 말미암아 천한 것으로 심겨졌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이 모든 것을 변하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때에 영광 가운데 일으켜지고,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몸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약한 것 으로 뿌려지고, 권능있는 것으로 일으켜지며"(고린도전서 15:43). 죽은 몸(시신)은 약함이 구체화된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몸보다 더 무용지물인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명없는 몸도 하나님의 성도 중 한 사람이 된다면, 그분께서는 그 몸을 권능있는 것으로 일으키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의 무덤을 헐어버림으로써 자신의 권능을 펼쳐 보이실 뿐만 아니라, 그 몸은 새로운 시력과 청력과 기억력 등의 권능들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빛의 속도로 여행할 수 있고, 달려도 지치지 아니하며, 걸어도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4. "자연의 몸으로 뿌려지고, 영적인 몸으로 일으켜지나니"(고린도전서 15:44). 이 말은 우리의 "영적인 몸"이 영기성(靈氣性)으로 변화된 영과 같은 구조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과 뼈"를 가진 실질적인 몸을 가지게 될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피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몸을 썩게 하는 것이 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된 몸과 같은 몸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몸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고 하셨습니다(눅24:36-43). 지금 우리의 몸은 자연 법칙에 지배를 받지만, 그때에는 영적 세계의 법칙에 의해 다스려질 것입니다. 그때에는 슬픔도, 고통도, 죽음도 없는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빛 안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구속하시기 위해 돌아가셨을 뿐 아니라, 황폐화된 피조계와 땅까지 구속하시기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구속의 날"에는 이사야 11:6-8에 있는 바와 같이 될 것입니다. [또한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울 것이요, 송아지와 살진 것들이 함께 하며, 어린 아이가 그들을 이끌리라. 또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 새끼들이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으리라. 또한 젖을 빠는 아이가 독사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을 뗀 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으리라.]

사람의 타락으로 인한 영향력은 실로 광범위한 것이었습니다. 온 인류가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온 땅과 대기까지도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네 아내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너는 그것을 먹지 말라, 한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었으니, 너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았고, 너는 너의 내 생애의 모든 날 동안 고통 중에 그것에서 나는 것을 먹으리라. 또 땅은 네게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낼 것이요] 여기서 "가시들"과 "엉겅퀴"들은 죄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 또한 다른 성경구절들을 보면 동물도 고통을 받으며, 땅도 죄로 인해 그 소산물을 내지 못합니다. 또한 땅을 죄로 저주받은 상태에서 구속하실 분께서 가시로 된 면류관을 쓰셨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땅이 저주받은 상태에서 구속되고, 땅의 외부표면은 불 침례를 통과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에는 가시와 엉겅퀴들이 불태워져 멸절되고, 모든 병균들과 기생충, 죄의 결과로 인한 모든 것, 그리고 대기까지도 불로 정화되며, 또한 악한 영들도 제거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는 의가 거할 것이며, 그 위에는 하나님의 "구속받은 자"들의 본향인 "새 도시"가 놓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모든 부조화가 그치고, 영원한 조화가 하나님의 전 우주에 걸쳐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 죽으신 이 땅을 파멸시키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 땅은 너무나 신성하고 거룩한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십자가의 사역이 단지 인간의 혼의 구원만을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몸의 구속과 더 나아가 땅의 구속까지도 포함되어야 함을 바라보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바라 보십니까? 갈보리의 언덕에 높이 메달린 채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속죄하시고, 구속하신 그분이 보이시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 눈을 열어 주사 그 피를 보게 하옵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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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