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용서받지 못할 죄 vs 사망에 이르는 죄

 

 

성경은 이 세상의 어떤 책보다 거룩한 책입니다. 그러나, 어떤 책보다 인간의 죄에 대해 많이 다룹니다. 죄의 종류나 죄에 대한 형벌과 심판, 속죄, 구속 등 인간에 대해서는 거의 죄밖에 기록된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처음 창세기 3장부터 시작된 인간의 범죄는 요한 계시록이 끝 부분인 19장의 시점까지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죄는 성경에서 매우 강도가 높은 매우 독특한 죄입니다. 흔히 사람들에게 알려진 용서받지 못할 죄-unpardonable sin-라고 알려진 성령 모독죄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인데다 그 강도가 너무나 높아서 그리스도인들조차 매우 두려워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분명한 조명이 없는 사람들은 “내가 만약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닐까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요한 사도가 말한 “사망에 이르는 죄입니다. 요한 사도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고, 그렇지 않는 죄가 있다고 말합니다. 진리에 대한 불분명하고 모호한 기준과 정의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주의 종들을 어둠 가운데 갇히게 했습니다. 성도들의 자유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그 진리를 바르게 알 때만 옵니다. 우리는 오늘 공부를 통해 성령에 관련된 이런 죄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살펴보고 참된 자유를 얻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2:31,32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들의 온갖 죄와 신성 모독은 용서받되 성령님을 대적하여 모독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사람의 아들을 대적하면 용서받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님을 대적하면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나 용서받지 못하리라.](마12:31,32). 이 사건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표적을 눈으로 목격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 인정할 때, 고의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며 방해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표적을 행하여 자기들을 믿게 하기를 요청했고, 그 표적의 유무(有無)에 따라 믿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할 권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고전1:21). 유대인들이 표적을 보고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메시야가 표적을 행치 못한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데는 22-30절까지의 사건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22절, [그 때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자를 데려왔거늘 그분께서 고쳐 주시매 눈멀고 말못하는 자가 말도 하고 보게 되니라.] 이것은 메시야의 표적입니다. 광야에서 돌아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처음 읽으신 성경 구절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체적 불구가 마귀들림의 현상일 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귀는 정신적, 영적 문제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며, 입을 막아 벙어리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인류는 죄로 인해 6,000년 동안 마귀에게 포로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죄의 노예로, 짓밟힌 채 살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찾아 다니시며 고쳐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4:18-19, [주의 영께서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음이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구원을,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짓밟힌 자를 자유하게 하며 주의 받아 주시는 해를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예수님은 유대인 백성들과 바래새인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메시야임을 당당하게 보여 주셨고, 표적으로 확증하셨습니다. 이를 본 백성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23절, [이에 모든 사람이 놀라서 이르되, 이 분은 다윗의 자손이 아니시냐? 하되](23). 정상적인 이성과 지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분이 행하는 일을 보고 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에서 오시기로 약속된 다윗의 자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확하게 보았고, 정확하게 고백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이요, 교회 시대의 우리에게 약속되지 않는 독특한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는 듣고 믿어야 하는데, 그들은 보고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 그렇게 못하겠거든 내가 행하는 그 일들로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11)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믿음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부정할 수 없는 명명백백한 증거 앞에서, 고의적인 무지를 드러내었습니다. 사건을 보고 나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 가운데 작정한 가운데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을 해도 믿지 않기로 작정을 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무조건 마귀의 사역으로 몰아 버렸습니다. 이는 자기들만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들어가려는 사람들까지 못 들어가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24절, [바리새인들이 듣고 이르되, 이 자가 마귀들의 통치자 바알세붑을 힘입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내쫓지 못하느니라, 하거늘](24). 

성경의 증언, 많은 증인들의 증언, 눈 앞에서 보고 있는 증거들을 모조리 부인해 버린 채 예수 그리스도를 마귀요, 마귀들의 통치자 바알세붑의 힘을 입어 일한다고 비난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졸지에 마귀로 변했고, 하나님은 마귀의 통치자 바알세붑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한 순간에 악령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신성 모독입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귀로 만든 것은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을 스스로 배척했을 뿐 아니라 영원히 막아 버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당시 율법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지니고 있었고, 백성들은 그들의 말에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있을진저, 너희 율법사들이여! 이는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가서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아니하고 또 들어가는 자들도 막았음이라, 하시니라.](눅11:52).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한 가지 길이라도 열어 두어야 행여나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길을 완전히 막아 버리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없어지고 맙니다. 성령께서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죄인들의 마음에 죄에 대한 찔림을 주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마귀라고 해 버리면 성령은 어떤 죄인도 구원할 수 없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살인자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간음자, 술주정뱅이, 거짓말하는 자, 우상 숭배자...그 누구라도 성령의 감동과 역사하심을 통해 새 새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그 사람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인했다고 해도 죄사함 받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했지만 용서받았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절대 구원할 수 없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귀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죄를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성경의 기록된 표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의 믿음까지 송두리째 엎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한 성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완전히 마귀로 몰아버린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들의 온갖 죄와 신성 모독은 용서받되 성령님을 대적하여 모독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사람의 아들을 대적하면 용서받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님을 대적하면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나 용서받지 못하리라.](마12:31,32).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의 온갖 죄는 용서받습니다. 신성 모독은 용서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성령님을 대적하여 모독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면 성령을 대적하여 모독할 수 있는가?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고 "마귀의 사역"이라고 하면 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마귀의 통치자 "바알세붑을 힘입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마귀라고 하며, 그들의 믿음을 뒤엎으면 됩니다. 

이 셋이 충족되면 성령을 모독하고 대적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런 죄를 지어 보았거나, 짓는 것을 보았거나, 들은 적이 있습니까? 이 사건은 현재 아무도 지을 수 없습니다.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보고 나서 바알세붑을 힘입어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뒤엎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교회를 핍박하고, 믿는 자들을 박해하여, 잡아 가두고, 죽이는 일은 성령을 대적하여 모독하는 죄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교회를 핍박하고, 신자들을 잡아 가두고, 죽였지만 용서받았을 뿐만 아니라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은사주의 교회나 집단에서 방언이나 신유, 축사를 베푸는 것을 보고 ‘저것은 미친 짓이다. 저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마귀의 역사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너희는 성령을 대적하여 모독하는 죄를 지었다!”며 외칩니다. 그들이 하는 방언이나 신유, 축사는 성령의 역사인데,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고 마귀의 역사라고 했다면 우리는 큰 죄를 지은 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약 시대의 어떤 성도도 성령을 대적하여 모독하는 죄를 지어서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 용서받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 죄를 이단들에게 아무렇게 적용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많은 이단들이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교리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피조된 신으로 보는 여호와의 증인, 천사장으로 보는 안식교, 선지자로 보는 이슬람교 등은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들의 교리는 결코 이 세상에서나 다가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가르침이요, 누구도 죄사함을 받지 못하게 할 영벌받을 이단들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속한 사람들이라도 마음을 회심하여 회개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3:28-30절입니다. 28,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들의 아들들의 모든 죄와 그들이 범하는 신성 모독은 다 용서받되*모든 죄, 신성 모독은 다 용서받습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전에 예수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어떻게 말했으며, 어떻게 불렀는가? 기억해 보십시오. 그러나 주님은 그 모든 죄들과 신성 모독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피는 용서하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29. [성령님을 대적하여 모독하는 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하고 영벌(eternal damnation)의 위험에 처하게 되느니라.] 성령님을 대적하여 모독하는 자는 다름 아닌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이었습니다. 30, [그 까닭은 그들이 말하기를, 그가 부정한 영에 사로잡혔다, 하였기 때문이더라.]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한 영에 사로잡혔다고 말하는 것이 성령을 대적하여 모독하는 자입니다. [...결코 용서받지 못하고...] 이 말은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 해당되는 말입니다. 설령 그렇게 말했다 할 지라도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고의적으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고의적으로 예수를 부정하고, 부정한 영에 사로잡혔다고 말함으로 스스로 구원의 기회를 차버리는 것이 바로 용서받지 못하는 죄입니다. 이 시대에 용서받지 못하는 한 가지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도 구원해 줄 수 없는 유일한 한 가지 죄입니다.

히브리서 10:29을 보십시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히 구별한 언약의 피를 거룩하지 아니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영께 무례히 행한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해 보라.](히10:29). 이 구절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구절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은 것이 아니라 나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언약의 피를 보혈로 생각하며 귀하게 여깁니다. 은혜의 영이신 성령 충만을 간절히 구합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적용해서 구원받은 성도가 육신적으로 살 때 경고용으로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자기 자녀가 그렇게 타락할 때, 당연히 징계를 가하실 것입니다. 그 징계의 강도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하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만큼 가혹할 수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적용하려면 끝까지 영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형벌을 지옥이라고 적용해서는 안됩니다. 이 구절의 정확한 문자적 적용은 유대인들에게 해야할 것입니다. 이유는 10:28절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멸시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인하여 긍휼을 얻지 못하고 죽었거늘](히10:28). 모세의 율법은 이방인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해당 사항이 있었고, 그들은 그 법을 준수하고, 그 법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동족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상기시키며 더 위대한 법이요, 더 나은 언약에 대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과 비교할 수 없는 이 법(새 언약)을 수많은 증인들이 증거하였음에도 멸시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당연히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고, 단지 요셉과 마리아의 사생아 정도로 믿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는 스데반에게 돌을 던져 죽여 버렸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는 바울을 따라 다니며 돌을 던졌습니다. 이들이 받을 형벌은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보다 훨씬 더 클 것입니다.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형제들에게 육신적으로 살면 지옥 간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 구절의 단어를 모두 바꿔치기 해야 가능한 해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해서 죄 가운데 거하면 하나님은 병을 줄 수 있습니다. 또는 어려움 가운데 처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심하면 죽여 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에 가지는 않습니다. 은혜의 영(성령)께 무례히 행하는 것과 성령을 대적하여 모독하는 죄는 같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5:16,17은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서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짓는 것을 보거든 간구할 것이요, 그러면 그분께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아니하는 자들로 인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나니 이로 인하여는 그가 기도하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느니라.](요일5:16,17).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선입견에 따라 단어를 함부로 바꿔서 읽거나 이해하는 버릇을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흔히 이 구절을 읽는 독자들은 사망이란 단어를 지옥이라고 이해하거나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망은 지옥도 아니고 구원의 상실도 아닙니다. 사망은 어디까지나 사망이며, 죽음이란 뜻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질병이 죄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많은 죽음이 죄의 결과란 사실도 가르쳐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로 인해 약하여 병들기도 하고, 잠들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임이라.](롬8:13)고 말합니다. 이는 말 그대로 육신이 죽는 다는 뜻입니다. 죄의 결과는 첫째 영적 죽음이요, 둘째 육신의 죽음입니다. 우리의 몸은 언젠가 죽습니다. 이는 죄의 결과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들입니다. 우리는 형제들이 죄를 지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죄로 인해 병든 형제들은 회개하고 깨끗함을 입어야 합니다. 장로들을 청하고 서로 잘못을 고백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죄는 그런 과정이 필요치 않습니다. 바로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었을 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어떤 형제는 죽여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고린도전서 5:5, [이런 자를 사탄에 넘겨주어 그 육체를 멸하게(destruction of the flesh) 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영이 주 예수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바울 사도가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도록 기도한 것이 아니라 죽여 주시도록 기도한 사람의 죄는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형제”(고전5:1)입니다. 이런 죄가 바로 사망에 이르는 죄에 해당합니다. 

디모데전서 1:20, [그 중에 후매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 준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모독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딤전1:20). 사도 바울이 죽음에 이르도록 기도한 두 번째 사람은 선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서 파선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법을 배우는 더 큰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죽여주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이 죄는 바로 죽음에 이르는 죄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 죽음에 이르는 죄 짓는 형제들의 예를 바울이 보여 준 것입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를 죽음에 이르는 죄로 규정하고 그들의 몸을 죽음에 넘겨주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형제들을 속인 것이 아니라 성령을 속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실상은 남모르게 은밀한 죄를 짓고 있으면서 그의 형제들에게는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있는 것처럼 꾸민다면 그는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보다 사람들 앞에서 더 거룩한 것처럼, 경건한 것처럼 종교적 위선을 꾸미는 일을 하지 않도록 삼가야 합니다. 다행히 이 시대에 주님은 수많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추종자들을 죽이지 아니하시고 살려 두시는 것은 은혜 중의 은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베드로처럼 그런 자들을 모두 죽음에 넘겨주었다면 교회는 장사 치르느라 예배를 보기도 힘들 상황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매주 죽는 사람이 산 사람보다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었을 때, 우리는 그 형제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형제의 죄를 쉽게 단정지을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행 형법이 정하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을 때, 우리는 사면을 위해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반면 그렇지 않는 죄라면 간절히 함께 기도하여 사탄의 올무에서 벗어나고, 죄를 씻음 받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많은 죄들로 멍들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능력은 죄를 치유하고, 그들의 삶을 경건하고 거룩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가정이 오히려 부서지고, 살던 사람이 헤어지고, 온갖 더러움이 씻어지는 대신 덧칠하고 있다면 우리는 모두 슬퍼하고, 회개하며, 애통해야 합니다.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지역 교회는 성도들의 죄를 막지 못합니다. 

우리 교회를 보십시오. 지난 한 해 동안 온갖 허물과 죄로 가득했습니다. 강단은 설교의 능력이 떨어지고, 성도들은 점점 죄 가운데 빠졌습니다. 헤어졌던 가정이라도 합쳐져야 정상인데, 멀쩡한 가정이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정상적인 교회에서 말씀을 들으면 이혼을 생각하다가도 마음을 고쳐먹고 신혼처럼 사는 것이 간증입니다. 싸우던 부부가 금슬이 좋아지고, 삐딱하던 자녀가 순종적이 되고, 냉냉하던 가슴이 뜨거워져 집회에 더 열심히 참석하는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반응이나 열매는 전혀 없고, 반대로 되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사망에 이르는 죄가 아니라면 함께 기도해서 회복하게 해야 합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라면 지금 속히 하늘로 데려 가 버리셔서 다른 형제들에게 두려움과 떨림이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몇 가지 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 죄들은 모두 심각한 것들이지만 그 종류와 성격이 사뭇 다릅니다. 아무렇게나 적용하기에는 매우 조심스럽고, 위험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그 구절이 말하는 바를 이해한다면 전혀 다루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 구절들을 함부로 사용할 때 사람들은 한없는 영적 침체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성도들이 짓기 쉬운 성령에 관련된 몇 가지 죄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9, [성령을 억누르지 마라(Quench not the Spirit.)] 성령을 억누르는 것은 신자들이 흔히 짓는 죄입니다. 설교나 간증을 들으면서 그것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판단하거나 비판하면 성령은 금방 소멸되고 맙니다. 내 영안에서 호소하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죄를 지을 때 성령은 소멸하고 맙니다. 성령은 내 영을 밝히는 불입니다. 성령이 기름에 비유되는 것은 내 영을 밝히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영은 주의 등잔불이니 뱃속의 모든 부분을 살피느니라.](잠20:27). 주님의 영은 나의 영에 빛을 공급하는 에너지원입니다. 만약 죄를 짓거나 불순종하면 성령은 빛을 발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소멸시켜야 할 것은 성령이 아니라 원수 마귀가 날리는 불붙은 화살입니다. 에베소서 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취하며 이것으로 능히 저 사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끄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사악한 자의 불화살을 끌 수 있습니다. 성령을 소멸해 버린 사람들은 사악한 자의 불화살에 온 몸이 불탈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로 그 불을 옮겨서 온 교회를 불태워 버립니다.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시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죄를 범할 때, 우리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주의 성령은 구속받은 성도가 진리의 편에 서지 않고, 세상과 육신과 마귀의 편에 설 때 한없는 슬픔을 느끼십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가 불순종할 때, 슬픔을 느낍니다. 스승은 제자가 가르침을 거부하고 엉뚱한 것에 몰두할 때 슬픔을 느낍니다. 사랑하는 연인은 나 보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일 때 슬픔을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한 영은 우리가 불순종할 때,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할 때, 하나님보다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일 때 슬퍼하십니다. 성경에서 성령이 독수리가 아니라 비둘기에 비유된 것을 유념해서 보십시오. 성령은 쉽게 슬퍼하며, 매우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우리가 농담이나 거짓말, 비속되고 허황된 말을 할 때도 성령은 슬퍼하십니다. 아이가 부모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백명의 부모에게 다 물어 보십시오. 언제 아이가 제일 사랑스럽냐? 백이면 백 모두 “말 잘 들을 때”입니다. 이것이 아이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주님의 교훈입니다.

이사야 63:10, [그러나 그들이 반역하여 그분의 거룩한 영을 괴롭게 하였으므로 그분께서 돌이키사 그들의 원수가 되어 친히 그들과 싸우셨느니라.] 반역은 하나님의 영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반역은 하나님을 원수로 돌리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반역죄는 어떤 죄보다 엄하게 다스렸습니다. 여기에는 친척도 아들도 없습니다. 역적, 역모에 연루된 사람들은 죽음에 처해지는 것이 법입니다. 다윗의 아들은 반역을 꾀했다가 죽었습니다. 모세에게 반역을 꾀했던 사람들은 산채로 지옥에 던져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처음 하나님께 반역한 것은 사무엘에게 달려와 왕을 달라고 조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의 왕인데 불구하고 왕을 구했습니다. 신약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도록 로마에 넘겨 주었습니다. 이런 죄는 성령을 괴롭게 하는 죄였으며, 하나님을 원수로 돌려 그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하나님께 반역하는 죄를 범치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배운 것을 요약합니다.

1. 성령을 대적하여 모독하는 죄--용서받지 못하는 죄
2. 사망에 이르는 죄
3. 은혜의 영께 무례히 행하는 죄
4. 성령을 소멸하는 죄
5.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죄
6. 성령께 반역하는 죄입니다. 

우리는 이 중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는 사실과 사망에 이르는 죄의 차이를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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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구조, 세 하늘에 대해서  (1) 2005.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