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제목: 크도다, 경건의 신비여

말씀: 딤전 3:16
요절: 딤전 3:16


성탄절이 다가오면서 장사꾼들은 조금이라도 더 수익을 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교회들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각종 행사를 준비하느라 소란스럽습니다. 여기에 성경도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정신없이 동조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주님의 탄생과 전혀 관계없는 절기입니다. 하지만 온 세상이 성탄(聖誕)이라고 말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성경적으로 주님의 오심에 대해서 함께 성경을 상고해 보고, 바른 영적 분별력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아기 예수 베들레헴에 수 천 번 나셔도/ 그리스도 그대 마음에 탄생하지 않는다면/ 그대 영원히 버림 받으리니/ ...(A.시레시우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목적과 이유를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 어떻게 믿고 계십니까? 오늘날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잘못 이해하고 계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억압받는 민중들을 구원하려고 왔다고 이야기하고, 어떤 분들은 위대한 종교 지도자요 사상가로서 자신의 이념과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하고 소외받는 자들을 돌보아 주시기 위해 왔다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사람들마다 나름대로 견해를 제시할 수 있지만 우리의 관심은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가 반드시 영과 진리로 경배할지니라.](요4:24). 주님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15:45). [이제 {주}는 그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에 거할 수도 없고, 인간들과 교제할 수도 없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봅시다. 사람이 아무리 어릴 때부터 애완용 개/고양이를 키웠다고 해도 개와의 communication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개/고양이는 주인의 말을 몇 마디 알아들을 수 있고, 음성과 발소리도 알아들을 수 있지만 그것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사람 역시 자신이 기르는 개/고양이의 표정이나 동작을 통해 약간은 개의 기분을 알 수 있지만 이것 역시 매우 제한적입니다. 서로 의사 소통이 되지 않는 까닭입니다. 방법은 개/고양이가 사람이 되거나 사람이 개/고양이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동물을 사랑한다고 해도 개/고양이 사이에 거할 수는 없으며, 그들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본질은 혼이며, 동물의 본질은 육(肉)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본질은 혼이라면 하나님의 본질은 영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이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시므로 어디에나 계실 수 있고, 언제든지 이곳에 오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면 이 땅 외에 어디에도 계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것을 일컬어 사도 바울은 경건의 신비라고 했습니다. [크도다 경건의 신비여, 논쟁의 여지가 없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지사 영접을 받으셨느니라.](딤전3:16).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셔서 완전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신비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함께 하시고, 인간들 사이에 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한 영이시기 때문에 인간들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들이 겪는 슬픔과 눈물을 체험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들이 겪는 한계를 경험할 수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겪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도저히 겪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피조물인 인간의 모든 것을 직접 겪으시고, 동정과 긍휼을 베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시고, 강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으로 연약함에 싸여 있습니다. [그가 무지한 자들과 길에서 벗어난 자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음은 자기 자신도 연약함에 싸여 있기 때문이라.](히5:2). 이것이 바로 경건의 신비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지 않으시고는 도저히 하실 수 없는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가 어디를 가거나 어디에 오는 데에도 반드시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저 먼 하늘에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인간으로 오신 이유는 우리의 구원, 생명, 삶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과 이유를 알면 우리의 삶은 분명한 방향이 잡히고, 인생관이 바로 서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육신을 입고 오셨는가? 우리는 수많은 이유를 발견할 수 있지만 오늘 성경을 통해 그 이유와 목적을 함께 살펴보고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실 지라도 육신을 입지 않으시면 결코 하실 수 없는 일들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하셔야만 할 일들입니다.

1. 주님이 육신을 입으신 것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獨生)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주님은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우리 가운데 거니시며, 함께 먹고 자고, 대화하며, 인간들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육신을 입으시고, 완전한 인간이 되심으로 배고픔, 갈증, 피곤함, 번민, 연약함을 몸소 느끼셨습니다. 영으로 계실 때는 알고는 계셨겠지만 결코 느낄 수는 없었던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몸소 느끼신 것입니다. 영으로 계실 때는 결코 받으실 수 없는 육체의 한계의 시험을 다 받으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이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라.](히4:15).

전에 법무부 장관, 사법 연수원생들이 일일 교도소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루 동안 죄수복을 입고 교도소 생활을 했는데, 죄수들 사이에 거하면서 똑같이 생활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만 따로 프로그램에 맞추어서 해 놓고는 좋은 체험을 했다고 자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성육신의 원리가 아닙니다. 요즘 회사에서는 해병대나 군부대에 위탁교육을 해서 군복을 입고 몇 일 훈련을 받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군인들 사이에서 거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자기들끼리만 하는 훈련인데, 엄청난 체험을 했는 것처럼 합니다. 이들은 완전한 죄수, 완전한 군인이 되어 그들 사이에 거하면서 그들의 모든 것을 몸소 느낀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장애인 체험 프로그램이란 것이 있어서 정상인들을 하루 동안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게 하는 것, 눈을 안대로 묶어서 살아 보도록 하는 그런 학습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약간의 피상적 이해만 줄 수 있지만 아무도 실제로 장애인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한 인간이 되셔서 인간들 사이에 거하면서 모든 것을 직접 느꼈고,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고관대작이나 왕의 모습이 아니라 철저히 무명(無名)한 자가 되셨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스스로 무명(無名)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빌2:7).

돈 많은 사람들은 돈 없이 사는 삶을 두려워합니다. 권세있는 사람들은 권력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합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몸이 아프거나 불구가 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인물이 아주 좋은 아가씨가 있었는데, 그녀는 늙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만약 그런 부류의 사람에게 돈, 권세, 건강, 인물을 빼앗아 버리면 절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원해서 사람이 되셨고, 육신을 입으셨고, 무명한 자가 되셨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시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 죄를 정죄하셨느니라.](롬8:3).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습니다. 죄가 전혀 없으신 분,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건강한 사람이 나병 환자가 되어 나환자들과 살면서 그들이 모든 병을 감당하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데미안(1840-1888) 신부는 하와이의 모로카이 섬에 선교를 하러 갔는데,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설교해도 씨도 먹히지 않자, 결국 하나님께 자신도 저들처럼 나병이 들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데미안은 면도를 하다 자신의 얼굴에 나병 반점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감사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완전한 나병 환자가 되어 그들에게 전도했습니다. 그 이후로 모로카이 섬에 있는 나병환자들은 복음을 믿고 영접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상인이 문둥병자가 되는 것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인간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로 인해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의 신비이며, 성육신의 본질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간략한 기록이 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수태 고지를 하면서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 이렇게 밝혔습니다.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임이라, 하니라.](마1:21).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사람이 되셔서 여자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은 먼 하늘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핵심은 “우리와 함께”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이라는 뜻이라.](마1:23). 주님은 어부들, 세리들, 창기들 가리지 않고 어떤 죄인들도 다 영접하셨고, 함께 식사하셨고, 대화하셨고,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담당하셨습니다. 주님은 말 그대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2. 주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딤전2:5)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지 않으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인 존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지 않으셨을 때 의인 욥은 자신을 중재해 줄 중재자가 없음을 한탄했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우리 둘 위에 손을 얹을 중재인도 없기 때문이로다.](욥9:33). 하나님 역시 중보자가 없음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분께서 사람이 없음을 보시고 중보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느니라. 그러므로 그분의 팔이 그분을 위하여 구원을 가져오고 그분의 의가 그분을 지탱하였으니](사59:16). 그래서 주님은 스스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이는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기 때문이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딤전2:5). 주님은 육신이 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와 허물, 연약함을 모두 담당하셨습니다. ‘경건의 신비’란 바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중보자가 되신 것이며, 하나님을 죄인에게 드러내시고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신 것은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율법의 저주와 심판을 자신의 몸에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율법을 성취하셨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자신이 제정하신 율법의 구속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서 인간에게 주어진 율법을 성취할 수 없으시기 때문에 인간이 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대언자들의 글을 폐(愎)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성취하러 왔노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성취되리라.](마5:17-18).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대속하셨습니다. 어떤 범죄자가 스스로 경찰서나 검찰에 출두하여 ‘나의 죄에 대해 벌을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율법이 정한 법대로 형(刑)을 받으면 그는 더 이상 율법의 저주와 정죄(定罪) 아래 있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셔서 우리를 구속하심으로 율법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언자들의 영감 받은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대속(代贖)하셨으니 이는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는 다 저주받은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할례자들의 사역자가 되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통해 제정하신 약속들을 모두 성취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말하노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할례자들의 사역자가 되신 것은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들을 확증하려 하심이요](롬15:8). 경건의 신비란 바로 자신의 몸으로 율법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은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과 약간의 모순되어 보이지만 전혀 모순이 아닙니다. 이유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위해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우리를 율법에서 벗어나게 하셨고,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에게는 율법이 더 이상 우리 위에 군림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떨어져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는 그분께서 우리의 화평이시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둘을 하나로 만드사 우리 사이의 중간 벽을 허무시고 원수 되게 하는 것 곧 규례들에 수록된 명령들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없애셨으니 이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 화평을 이루게 하시고](엡2:13-15). 율법은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둡니다. 이 세상 누구도 율법을 다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율법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율법은 의롭고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12)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아무에게도 구원의 능력을 주지 못합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율법은 거울과 같은 것이어서 나의 더러운 모습을 비춰주어 알게 하지만 씻겨 주지는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의롭게 될 육체는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도 한가지만 어기면 범법자가 되고 맙니다.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 한 조목이라도 어기면 모든 것에서 유죄가 되나니](약2:10). 주님은 율법 아래 있는 우리를 위해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묻혔고 또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하나님의 활동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일으킴을 받았느니라. 또 너희의 죄들과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너희의 모든 범법을 용서하시고 손으로 쓴 규례들 곧 우리를 대적하고 반대하는 규례들을 지우시고 그것들을 길에서 취하사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政使)들과 권능들을 노략하사 십자가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골2:12b-15).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이 무서운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율법을 폐하신 것입니다. 경건의 신비란 율법 아래 있던 사람들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함으로써 율법을 폐한 것입니다.

5.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자신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아들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음이니라.](눅19:10).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아들이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려고 왔음이라.](마18:11).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며,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주인이십니다. 그런 인간이 죄로 인해 타락하여 잃어버린바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온데 간데 없고 마귀의 형상대로 마귀에게 종노릇하며, 일생 죄와 사망의 사슬에 메여 종노릇하는 것을 구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만든, 자신의 사랑하는 어떤 소유물을 잃어버렸을 때 어떻게 합니까? 찾으러 가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찾아 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천사의 몸으로가 아니라 친히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찾아 오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부모가 나를 버릴 때에라도 주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27:10). 하나님의 부성애(父性愛)는 어떤 육신의 아버지보다 강합니다.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어머니의 모성애(母性愛)보다 훨씬 더 강력합니다. [여인이 어찌 자기의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겠느냐? 참으로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사49:15). 하나님은 이런 사랑으로 인해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 죄인들을 구원하신 거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에 대해 잃어버린 바 된 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부르셨습니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에도 주님이 먼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시며 찾아 오셨습니다. 이 사랑의 음성에 응답할 때 누구라도, 언제라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경건의 신비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잃어버린 자를 찾아오신 것을 말합니다.

6.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이것은 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다](요12:46). 빛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 것 같지만 빛 가운데 나오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매우 많습니다. 빛이 없는 밤에 항해하던 배에겐 항구의 등대에서 비추는 한 줄기 빛이야말로 구원입니다. 하지만 밀항선을 탄 사람들이나 밀수꾼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 재수없게 계속 비추네~]. 도둑놈이 경찰이 싫듯이 어둠 가운데 있는 죄인들은 빛되신 예수님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피해 숨거나 고함을 지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시매](요8:12).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요9:5).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이유가 많지만 가장 큰 이유는 빛 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요, 자신의 행위가 빛 가운데 드러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는 것은 앞이 어두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빛이 있어도 못 보는 것은 마귀가 눈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경건의 신비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빛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7.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사람의 아들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고 왔음이니라.](막10:45). 누구나 섬김을 받고 싶어하지 섬기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섬기러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섬겼을 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 같은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섬기신 것입니다. 생명을 내어놓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는 저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영과 진리로 주님을 경배하고 섬겨야 할뿐만 아니라 형제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도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므로 우리가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나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 놓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주님을 위하여 죽겠다는 사람이 자기 형제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저런 작자와 같이 취급당하다니 불쾌해!”, “저런 인간도 꼴에 교회 다닌다고!”, “형제라고 부르기에 내 입이 더럽다. 저런 놈이 같이 천국 간다면 저 세상도 깨끗하긴 틀렸군!” 형제가 배고파하고 헐벗었는데 도와 줄 생각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실거요. 기도하시오’하고 좇아 냅니다. 형제를 핀잔주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욕하고, 헐뜯는 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운운할 때 사람들은 그 안에서 아무런 사랑도 발견하지 못하며, 예수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주님이 섬기러 오셨다면 우리도 마땅히 섬겨야 하고 서로 사랑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형제, 자매님들은 이 말씀을 평생의 신앙 요절로 삼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경건의 신비란 섬김받아 마땅한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낮아져 오셔서 죄인들을 섬기신 놀라운 사건입니다.

8.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이 온 것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죽을래야 죽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죄인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이 되셔야만 했습니다. 영원히 죽으실 수 없으신 생명의 창시자요, 생명 자체이신 분께서 죽으시기 위해서 주님은 육신을 입으시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가 상함 받는 것을 기뻐하사 고통을 받게 하셨은즉 주께서 그의 혼을 죄로 인한 헌물로 삼으실 때에 그가 자기 씨를 보며 자기 날들을 길게 할 것이요, 또 [주]의 기뻐하시는 일이 그의 손에서 형통할 것이며](사53:10).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으니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생명을 버리노라.](요10:15). 경건의 신비란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셔서 죄인들의 몸 값, 대속물이 되신 것을 말합니다.

9.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사람들이 더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은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일시적인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얻게 되며, 더욱 풍성히 얻게 됩니다. 전능하신 주님이시지만 주는 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거절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강제로 안길 수는 없습니다. 경건의 신비란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셔서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10.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으되 네가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사람들이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매우 제한적이고 피상적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볼 수 있는 것만 보이는 법이듯이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만 이해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왜곡되고, 잘못된 지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해 주시고, 보여 주시고,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써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풍성하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볼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넘겨주셨사오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낼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니라.](마11:27). 예수를 통하지 않고 아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경건의 신비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오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보는 안경을 주신 것입니다.

11.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뒤에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오나이다, 하셨으니 그분께서 그 첫째 것을 제거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히10:9). 밥 죤스 시니어 목사님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대로 사는 것이 성공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저마다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두고 계십니다. 우리는 모두 그 뜻을 깨달아 행할 때 인생의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선하신 뜻, 기뻐하시는 뜻, 온전하신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뜻은 성경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심히 읽고 믿음으로 행하시면 됩니다. 자신에게 두신 개인적이고도 특별한 뜻은 기도하고 찾아내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사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셨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내려왔음이니라.](요6:38). 주님은 철저히 성경대로 사셨으며, 성경대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바와 같이)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오나이다, 하였노라, 하시느니라.](히10:7). 경건의 신비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두신 뜻을 알지 못해 고민합니다. 제가 이 시간 아는 방법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기록된 말씀을 믿고 순종하십시오. 둘째,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그러면 뜻은 저절로 계시됩니다. “만일 누구든지 그분의 뜻을 행하려고 한다면, 그 교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내가 내 자신에 관하여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되리라.”(요7:17). 순서를 바꾸면 안됩니다. 뜻을 알아보고 나서 내가 가부(可否)간에 결정을 내리겠다고 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뜻을 계시해 줄 수 없습니다.

12.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다른 도시들에서도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여야 하리니 이는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음이라, 하시고](눅4:43). 하나님은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3년 반동안의 지상 사역 기간 동안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왕국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매 열두 제자가 그분과 함께하였고](눅8:1). 주님은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복음을 증거하시기 위해서란 것입니다. 경건의 신비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신 것입니다.

13.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불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땅에 불을 보내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12:49). 주님은 분명히 땅에 불을 보내러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불의 주된 의미는 심판을 말합니다. [참으로 나는 너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려고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능력이 더 있으시매 나는 그분의 신을 드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님으로 침례를 주시고, 불로 침례를 주시리니 곧 손에 키를 들고 자신의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케 하사 자신의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되 껍데기는 꺼지지 아니하는 불로 태우시리라.](마3:11-12). 불로 침례를 주시는 것의 의미는 바로 심판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그 죽음은 불로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주님은 죄인들의 모든 죄를 지고 불타는 지옥으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경건의 신비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죄와 저주가 되셔서 지옥으로 가신 것을 말합니다.

14.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심판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려고 이 세상에 왔으니 이것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눈멀게 하려 함이라, 하시매](요9:39). 주님은 이미 이 세상을 악한 현 세상이라고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형벌은 완전한 화형으로 모조리 불태워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현재 이 세상은 재판(심판) 결과가 나온 상태요, 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은 /주께서/ 같은 말씀으로 보관하사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기 위하여 예비해 두신 것이라.](벧후3:7).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신 것이 아니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밤의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큰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원소(元素)들이 뜨거운 열에 녹으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도 불태워지리라.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해체될진대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느냐? 모든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 가운데서](벧후3:9~11). 하나님은 거의 매일 화재 사고를 통해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눈 먼 인생들이야 몰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진리의 지식을 안 그리스도인들이 알고도 세상에서 부해지고자 한다면 얼마나 정신나간 짓이겠습니까? 경건의 신비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을 심판하신 것을 말합니다.

15.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왕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그분께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냐? 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하는도다. 내가 이런 목적으로 태어났으며 이런 까닭으로 세상에 왔나니 이것은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고자 함이로다. 진리에 속한 자마다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시매](요18:37).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이르되, 유대인들의 왕으로 태어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마2:2). 그리고 왕으로서 죽으셨습니다. 빌라도는 십자가의 명패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분 위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로,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왕], 이라 쓴 글도 있더라.](눅23:38). 주님은 눈에 보이는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지상 메시야 왕국의 왕으로 등극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왕국의 왕으로 등극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이 다시 오시면 주님은 정치적, 지상 메시야 왕국의 왕이 되실 것입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왕국을 임하게 하셨습니다(마12:28). 주님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요3:5,7). 경건의 신비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임하게 하시고 그 왕이 되신 것을 말합니다.

16.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그분께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냐? 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하는도다. 내가 이런 목적으로 태어났으며 이런 까닭으로 세상에 왔나니 이것은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고자 함이로다. 진리에 속한 자마다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시매](요18:37). 주님은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14:6). 주님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경건의 신비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진리를 증거하신 것을 말합니다.

17.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실하도다 이 말이여,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하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 함이로다.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딤전1:15). 주님은 의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으면 누구도 죄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구원에 필요한 모든 사역을 완수하심으로 이제는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경건의 신비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죄인을 구원하신 것을 말합니다.

18.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신실한 대제사장으로서 화해를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모든 일에 자기 형제들과 같게 되심이 마땅하니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에서 친히 긍휼 많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되사 백성의 죄들로 인하여 화해를 이루려 하심이라.](히2:17). 죄인은 본래 하나님과 원수 사이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미워하시며, 심판하십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미워합니다. 이 둘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사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모든 일에 자기 형제들과 같이 되셔서 둘을 하나로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원수된 것을 제거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벽을 허무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됩니다. 경건의 신비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셔서 원수된 것을 하나 되게 한 것을 말합니다.

19.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그리하였더라면 그분께서 반드시 창세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세상 끝에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음이니라.](히9:26). 이 세상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죄입니다. 인류의 문제는 모두 죄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칼 막스는 인류의 문제가 경제적 불평등, 부(副)의 불균형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인류의 문제가 자신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자는 인류의 문제가 인(仁)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 제도의 부재(不在)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이는 잘못된 교육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어떤 이는 마음 속에 솟아나는 생각, 번뇌가 문제이기 때문에 고행과 금욕으로 육신 속에 깃든 악한 것들을 통제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죄의 결과, 죄의 현상들을 문제의 본질로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근본 문제는 언제나 죄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를 제거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요일3:5).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모두 가져가셨습니다. 요한은 증거하기를, [이튿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로다.](요1:29)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죄를 제거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경건의 신비라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세상 죄를 제거하신 것을 말합니다.

20.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이는 마귀가 처음부터 범죄하기 때문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마귀의 일들을 멸하려 하시는 것이라.](요일3:8). 예수님이 나타나신 목적은 마귀의 일들을 멸하려는 것입니다. 마귀는 속이는 자요, 살인하는 자요,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배우지 않고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아비가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불의의 속임수로 다가와 온 세상을 미혹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할 때에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요8:44). 주님은 이런 일을 멸하려고 오셨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결코 자살하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신문에서 보는 오늘의 운세, 사주 팔자, 별자리, 바이오리듬, 기(氣), 마인드 콘트롤, 요가, 선(禪), 단전호흡, 성공의 비법, 동양학 등 모든 것이 마귀의 술책이요, 속임수입니다. 회사나 학교에서 돼지 머리에 절하는 것이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모두 다 마귀에게 속아서 하는 행동입니다. 마귀는 병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귀나 입이 의학적으로 정상인데 들리지 않고 말하지 못한다면 마귀 들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님께 성령님과 권능으로 기름을 부으시매 그분께서 두루 다니시며 선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억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하셨음이라.](행10:38)

주님을 믿지 못하게 하고 예수란 이름만 나오면 이상하게 싫고 히스테릭하게 반응하는 것도 모두 마귀의 일입니다. 부적을 달고 다니거나 복권을 사면 당첨될 것 같은 기분이 들거나, 교회에 가는 것이 이상하게 싫고 한 숨 자고 싶은 것, 밤새도록 통신을 하거나, 신문을 본 것을 보고 또 보며 심심해하는 것, 성경이 읽기 싫고 기도를 하기 싫고 전도를 하기 싫고, 형제들과 이야기하기 싫은 것 이 모든 것이 마귀의 일입니다. T.V에서 하는 마술이나 최면술에 관심이 당기는 것, 급히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 정욕에 끌리는 것, 세상의 친구들이 멋져 보이고 구원받지 못한 재벌들이 불쌍해 보이지 않고 부럽다면 이런 모든 것이 마귀의 일입니다. 마귀의 가장 큰 업적은 성도들이 KJV 대신 TV를 매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마귀를 멸하신 방법은 놀랍게도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자녀들은 살과 피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에 참여하셨으니 이것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히2:14). 하나님은 크신 권능으로 마귀를 소멸시켜 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능력으로 마귀를 영원한 사슬에 묶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셨다면 주님은 육신을 입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마귀를 멸하시려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만 합니다. 경건의 신비란 마귀를 멸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마귀의 운명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제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리라.](요12:31). 자신의 죽음이 마귀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마귀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1.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땅에 화평을 보내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보내러 왔노라. 이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딸이 어머니를,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여 불화하게 하려고 내가 왔기 때문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사람들이리라.](마10:34-36). 주님은 평강의 왕이시면서도 동시에 세상에 분란을 일으키는 trouble maker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들고 동방박사들이 헤롯을 찾아 갔을 때 헤롯과 예루살렘 사람들은 심히 불안해했습니다(마2:2). 그리고 곧 이어 대규모 살상이 시작되었습니다. 헤롯은 군사들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온 지경에 사는 모든 사내아이를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여 버렸습니다(마2:16). 마귀는 본래 거짓말쟁이요, 살인자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태어나신 것을 알고 어릴 때 죽여 버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에, 주님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항상 마귀가 있고, 마귀의 역사가 뒤따르기 때문에 분란이 있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있습니다. 마음 가운데는 세상이 알 수 없는 평안이 있으면서도 늘 괴롭히는 가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인 동시에 세상을 소란케하고, 뒤집는 사람들입니다.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어떤 형제들을 끌고 도시의 치리자들에게 가서 외쳐 이르되, 세상을 어지럽게 만든 이 사람들이 여기에도 이르렀는데](행17:6). 주님은 세상을 악한 현 세상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주님과 세상은 원수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眼目)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이 다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났음이라.](요일2:15-16). [내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일3:13). 우리와 세상의 관계 역시 대적 관계이며, 원수 관계입니다.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약4:4). 주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세상과 친구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 “나는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다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세상을 믿음으로 싸워 이겨야 합니다. 주님은 저희들을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르셨습니다. 저희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오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22.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지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헌물로 드려지셨으며 또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 문제와 상관없이 두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리라.](히9:28). 하나님은 영으로 계시는 한 죄들을 위한 헌물이 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 자신을 죄들을 위한 헌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성육신의 목적은 바로 자신의 몸으로 죄들을 담당하는데 있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벧전2:24). 육신이 되신 하나님은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을 우리 죄를 담당하셨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행하신 이 일들로 인해 우리는 의롭게 되었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경건의 신비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죄를 담당하신 것을 말합니다.

23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룩한 본을 보이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참으로 너희가 이것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니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남기사 너희로 하여금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벧전2:21).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지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친히 인간이 되셔서 삶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고난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델이 되셨고, 앞선 걸음을 걸으시므로 뒤에 따라 올 자들을 위해 발자취를 남겨 두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에게 배워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안식을 찾으리니](마11:29). 경건의 신비란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셔서 우리에게 삶의 본을 보이신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오신 목적, 경건의 신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는 곧 우리의 삶의 목적과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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