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나셨으니
말씀: 눅2:11-14
요절: 눅2:11
해마다 12월이면 세상을 휩쓰는 크리스마스라는 잘못된 기독교 전통을 거슬러 성경적인 성탄의 의미를 조명해 보고, 말씀을 상고하는 시간을 가져왔습니다. 올해는 4번에 걸쳐서 구주의 탄생에 대한 설교를 할 계획입니다. 잠깐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성도들은 제 말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듣기 위해 왔습니다.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권능의 말씀, 의의 말씀, 위로의 말씀, 은혜의 말씀, 권면의 말씀, 믿음의 말씀, 지혜와 지식의 말씀을 들으러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 오면 책망의 말씀을 듣고, 꾸짖음도 듣습니다. 말씀으로 인해 실족하는 일이 없고, 걸림이 되지 않기 바랍니다.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근심과 슬픔이 임한다면 주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구원이 얼마나 다양하고 폭넓게 적용되는지 깨닫고,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주님,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를 빕니다. 죄로부터 혼이 구원받았지만 우리는 매 순간, 매사에 구원자를 필요로 합니다.
약 2,000년 전 나사렛 북서쪽에 위치한 스불론 지파의 작은 마을(수19:15)에서 인류의 구원자요, 세상의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의 동산에서 선포하셨던 [여자의 씨]를 충만한 때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야곱의 때에는 에브닷이라 불렀습니다. 다윗은 이곳에서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고, 엘리멜렉(나오미의 남편), 입산(이스라엘의 열 번째 사사-삿12:8-10), 보아스(룻기의 주인공)의 고향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에게 흔히 “다윗의 동네”라고 불려 졌고, 그렇게 알려졌습니다. 베들레헴이란 지명은 빵 집이란 뜻입니다. 이곳에서 주님은 인류의 모든 사람들이 먹고 또 먹어도 결코 주리지 않을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내가 곧 그 생명의 빵이로다.](요6:48)고 했습니다. 주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신 것은 구약의 미리 기록된 말씀(믹5:2)에 따른 것이지만 그 지명이 주는 의미 또한 적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탄생할 즈음에 하나님은 먼저 제사장 사가랴에게 이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사가랴는 당대의 제사장으로서 구약 성경을 잘 알았고 주님의 대언에 익숙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아들을 하나 낳을 것이란 소식을 전해 주면서 동시에 그 아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사가랴야, 두려워하지 말라. /주께서/ 네 기도를 들으셨느니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네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들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그가 {주}의 눈앞에서 크게 되고 포도즙이나 독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에서부터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의 많은 이들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임이라. 그가 또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 그분보다 앞서 가서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불순종하는 자를 의인의 지혜로 돌아오게 하며 {주}를 위하여 예비된 한 백성을 준비하리라.] (눅1:13~17). 사가랴는 자신이 나이가 들고 아내가 나이 들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천사가 전해 준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그가 놀란 것은 뒷부분입니다. 메시야의 탄생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가랴의 자식이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 온다는 것은 당대의 제사장이라면 즉각 메시야의 도래의 징조임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구약 마지막 책인 말라기 4:5-6절에 [보라,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대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며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리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말4:5~6). 제사장 사가랴는 천사를 통해 늙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다된 자신들 사이에 자기 자식이 태어난다는 소식보다 메시야가 곧 도래할 것이란 더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만간 수천 년간 대언자들을 통해 약속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오신다는 소식입니다. 사가랴는 구원자가 이 땅에 태어날 것이란 소식을 접했던 것입니다. 이는 분명 그토록 간절히 기도했던 응답으로 자기 아들이 태어난다는 소식보다 더 놀랍고 고대했던 소식입니다. 여러분에게 자식이 태어난다는 소식이 놀랍습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곧 바로 재림하신다는 소식이 더 놀랍습니까? 2000년 교회사를 통해 우리는 오직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이 곧 성취될 것이란 소식이 오늘 내게 전해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미 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소식을 듣게 되면 까무러칠 것입니다.
사가랴 다음으로 메시야의 탄생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은 마리아였습니다. [천사가 그녀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님께서 네게 임하시고 가장 높으신 이의 권능이 너를 덮으시리니 그런즉 또한 네게서 태어날 그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눅1:35). 마리아는 천사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는 인류의 구원자를 낳을 것임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 소식은 곧 바로 마리아의 정혼자였던 요셉에게로 전해졌습니다.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임이라, 하니라.](마1:21). 구약 성경에 대언자들이 기록한 말씀이 속속들이 문자적으로 성취되는 과정들을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역사는 따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 현장에서 검증되고 성취되지 않는 말씀이라면 그것은 영감 받은 성경이라 할 수 없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자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천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던 바로 그 날 하늘에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러 이 땅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천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가져왔노라.](눅2:10). 대언자들이나 왕들이 전한 소식이 아니라 하늘의 천사들이 구원자의 탄생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T.V뉴스나 신문 기사를 통해서 이 소식이 전해진 것이 아니라 하늘의 천사를 통해 직접 이 소식이 울려 퍼졌습니다. 주의 천사가 전한 소식을 현장에서 직접 들어 보십시오. [이 날 다윗의 도시에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은 천사가 외치는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날 다윗의 도시에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나셨으니”란 소식은 인류가 가장 고대하고 소망하던 소식입니다. 이 소식이야말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이미 마리아에게 개별적으로 이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의 눈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기쁜 소식을 네게 말하며 보이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눅1:19). 하나님은 꿈이나 환상이나 계시를 통해서 소식을 전하지 않고 직접 천사를 보내어서 그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태중에 들어선 아이는 하나님이 구약 성경 전체에서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한 바로 그 여자의 씨였습니다. 이제 때가 차 아이가 세상에 나오던 날 주의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가져왔노라.] (눅2:10). 주님의 탄생은 한 가정이나 가문이나 유대 민족에게만 미치는 좋은 소식이 아니라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신문 기사나 뉴스도 이 보다 더 좋은 소식을 비중 있게, 흥분되게 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소식은 요즘 같은 세상이라면 특종 중의 특종이여야 할 만한 소식이며, 이 소식을 기사화하는 사람에는 퓰리처상을 받고도 남을 일입니다. 죄악 된 세상, 악한 현 세상에서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구원자의 탄생에 대한 소식보다 더 기쁜 소식, 더 큰 소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직접 전한 구주의 탄생 소식은 이미 성경에서 기록되어 있던 그대로였습니다. 인류의 구원자가 탄생했다는 이 소식은 동방의 박사들이 그분의 별을 보고 찾아온 것보다 훨씬 먼저 전해졌습니다. 들판의 목자들에게 전해진 이 소식은 먼저 전해들은 사람들에 의해서 온 세상에 전해졌고, 이 땅에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전해졌습니다. 믿고 안 믿고는 그 사람의 문제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구원자가 나셨다’는 소식은 다 알려졌습니다.
천군 천사들은 이 땅에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 날 다윗의 도시에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 되리라, 하매 갑자기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그 천사와 함께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와 사람들을 향한 선하신 뜻이로다, 하니라.](눅2:11~14). 구주의 탄생 소식은 비단 유대 땅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온 세상의 인류, 온 우주에 미치는 크고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인간과 동일한 몸을 입고, 인간의 몸을 통해 탄생하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믿는 자들에게는 경이로움 그 자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은 신비란 말 외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혼을 구원하러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주님의 탄생과 사역에 대해서는 구약의 대언자들이 이 소식을 얼마나 듣고 싶어 했으며, 살펴보기를 원했는지 모릅니다. 구원자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이 혼의 구원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에 대하여 대언한 대언자들이 부지런히 조사하고 탐구하되](벧전1:10). 천사들이 전했던 목동들에게 전했던 이 소식은 구약의 누구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접하고 듣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 땅에 태어나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여 있고 그의 이름은 기묘라, 모사라, 강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는 아버지라, 평화의 통치자라 할 것임이라.](사9:6). 이 땅에 성경이 말한 바로 그 구원자가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체로 태어나셨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놀랍고도 위대한 소식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렇게 선포합니다. [크도다 경건의 신비여, 논쟁의 여지가 없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지사 영접을 받으셨느니라.](딤전3:16). 오늘날 이 진리가 가려진 채 해마다 12월이 되면 캐럴 송이 울려 퍼지고, 선물과 카드를 주고받으며, "Merry Christmas, Happy Holidays"만 외친다면 그것은 그 영혼에 아무런 유익도 기쁜 소식도 될 수 없습니다. 구주의 탄생이 나의 영적 탄생이 되고, 구주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구주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며, 구주의 오심이 진정한 나의 복된 소망이 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자로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도시 베들레헴에 구원자로 태어나셨습니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까? 말 그대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란 이름은 “하나님이 구원 하신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십니까? 우리는 왜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놀라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소식을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자를 통해서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진노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악한 상황으로부터 건져 내시는 분이십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구원이란 의미는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신약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은 주로 이것입니다. 혼의 구원 즉 지옥으로 빠질 우리 혼이 복음을 믿음으로 하늘로 가게 되었다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는 분명한 성경적 진리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사람들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구원이 필요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구원이란 말은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됩니다. 수치를 당하는 사람은 수치가 가려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건짐을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불길 속에 쌓여 있는 사람은 불에서 나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재난이나 파산이나 이혼이나 자녀 문제나 교회의 어려운 문제 등에서 우리는 어떻게 손을 써볼 도리가 없는 경우를 봅니다. 크게는 국가적인 문제에서 민족, 사회, 학교, 가정, 나 자신의 문제에게 이르기까지 때로 우리는 자주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건져냄을 받아야 합니다. 빈곤의 악순환 속에 있는 사람은 외부의 자본이 투입되어야 하듯이, 무지로 인해 빚어지는 문제는 교육의 혜택을 받게 해야 하며, 악한 성품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은 이전 성품이 죽고 새로운 성품이 심겨져야 합니다. 물이 없으면 물을 얻는 것이 구원입니다. 전쟁에서는 살아 남는 것이 구원입니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는 아이를 낳는 것이 구원입니다.
죄에서 구원을 흔히 혼의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미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더 이상 혼의 구원만 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복음을 믿음으로 혼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약 성경이 주로 다루는 구원은 육신의 죽음에서 구원입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는 급히 “주여, 구원해 주소서”(마14:30) 외쳤는데 이는 육신의 생명을 살려 달라는 말입니다. 병에서 고침 받는 것 역시 구원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켜 세우시리라. 혹시 그가 죄들을 범하였을지라도 용서받으리라.](약5:15). 병든 자를 구원한다는 것은 병이 낫는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병자들을 향해 먼저 죄 사함을 선포하신 예가 허다한데 이는 그 병이 죄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비 환자를 이렇게 고치셨습니다. [보라, 사람들이 마비 증세로 침상에 누운 사람을 그분께 데리고 오거늘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마비 환자에게 이르시되, 아들아, 기운을 내고 네 죄들을 용서받을지어다, 하시더라.](마9:2). 병을 고침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주님이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은 여러분의 질병을 고치시는 구원자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흔히 혼적 구원 외에는 더 이상 구원을 적용하지 못하고, 구원자를 멀리 내팽개쳐 두는 것은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나 제한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몸이 아플 때 얼마든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구원자가 되신 것은 몸의 질병의 치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벧전2:24). 여기서 고침이란 영혼의 병과 육신의 질병을 다 포함합니다. 이는 기복 신앙이나 오순절 교리가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몸의 질병이 낫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며, 주님은 구원자로 오셨음을 선포하는데 이 둘을 링크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의 사역 가운데 많은 부분은 질병을 고치시는 사역이었습니다. [이것은 대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이르시되, /그가/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도다, 하였느니라.](마8:17). 주님은 구원자이십니다. 몸이 너무 아프면 아무도 주님이 맡기신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아프면 힘도 없고, 살 의욕도 없고, 삶의 능력도 없습니다. 예배도 참석할 수 없고, 기도 모임도 올 수 없습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힘을 주셔서 질병에서 능히 구원하시고, 아픔이 있다면 그것을 이길 힘을 주시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때로 우리를 연단하시고,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 병을 주시면 주님은 그 연약함을 통해 더욱 강한 능력을 드러내시며, 은혜를 족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오늘날 다윗의 도시에 구원자가 나신 이유입니다. 몸의 질병을 고치는 일은 혼의 구원과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족합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눅7:50).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시력을 받으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 하시니](눅18:42). 혼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듯이 몸의 질병에서 구원 역시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때로 우리는 죄로 인해 영이 상하고, 혼이 약해지고, 몸은 상처투성이가 됩니다.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아픈 것이 더 큰 고통입니다. 몸이 쇠약하면 운동을 하든지, 식사를 하든지, 약을 먹으면 되지만 혼의 쇠약(정신 쇠약)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영이 상처를 입으면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잠언 기자는 말하기를, [사람의 영이 그의 병약(病弱)한 것을 지탱하려니와 상처 입은 영은 누가 감당하리요?](잠18:14). 몸이 약하면 영으로 지탱하면 되지만 상처 입은 영은 아무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구원자 주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마음의 질병이 치유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오 [주]여, 주는 나의 찬양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고침을 받으리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받으리이다.](렘17:14). 여러분은 몸의 고침보다 먼저 마음의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필요할 때면 언제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요청하십시오. 주님은 구원해 주십니다. [{주}의 영께서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음이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구원을,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짓밟힌 자를 자유하게 하며](눅4:18). 여러분에게 임한 구원이 치유와 고침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심리학자, 카운슬러, 정신과 의사, 인생 선배 등 사람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지만 그들은 결코 여러분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구원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옵니다.
구원이란 또 하나의 의미는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민이 있고, 피할 수 없는 어떤 처지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 구원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살을 택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의 혼만을 지옥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자가 아닙니다. 모든 것에서부터 여러분을 구원해 주십니다. 주님이 친히 하신 기도를 보십시오. [지금 내 혼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이때로부터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런 까닭으로 이때까지 왔나이다.](요12:27). 주님은 자신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했는데 주님이 무슨 죄를 지어서 용서를 받아야 하거나, 혼의 구원이 필요하신 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전혀 죄가 없으시고, 입술에는 궤휼도 없으시며,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주님이 하나님께 구원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어려운 환경이나 처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일에 대해 감당할 힘을 주시라는 의미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자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은 우리 역시 동일한 시험과 환란과 어려움에서 구원을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완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가 되시고](히5:9). 구원자이신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가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처지에서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 있으면 주님께 구원을 요청하십시오. 구원자란 이름이 얼마나 달콤하고도 요긴한 말씀입니까? 가정이 어렵습니까? 우리에게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우상이 아니라 살아계시며 항상 함께 하시는 전능하신 예수 그리스도란 구원자가 계십니다. 기도하십시오. “주여,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구원이 임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어려울 때마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요청합니다. 지금까지 저희 교회는 두 번이나 재정이 적자가 났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정확한 날짜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외자(外資)가 투입되었습니다. 예상하지도 않는 곳에서, 예상하지도 못한 돈이 넘치도록 공급되었습니다. 주님은 구원자이십니다. 주님은 넘치게 공급하십니다. 저는 제가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면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찾고 기도합니다.
구원자이신 주님은 우리를 감당 못할 어려움에 두시고 혼자 해결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시험 당할 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하여금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은 먼저 혼의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모든 면에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적용하고 구원을 체험하며 다윗과 같이 찬양해야 합니다.
구원의 또 한 가지 의미는 원수들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들을 이기는 것, 전쟁에서 이기는 것 등입니다. 전쟁에서 목숨을 건지는 것을 성경은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이 땅에 전쟁이 났거나 여러분이 전쟁터에 있다면, “주여, 나를 구원해 주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구약의 시편에 기록된 대부분의 구원은 전쟁에서, 원수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오직 주께서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시44:7). 다윗은 이런 부류의 구원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이방인들 중에 누구도 이런 구원의 기도를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믿는 성도가 된 후로 이런 구원의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불신자들에게 수치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특히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여러 사람의 함정이나 사기에 걸렸을 때,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죄도 범하지 않았는데 감옥에 가게 되었을 때에 여러분은 무엇을 기도합니까? 구원을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구원자이십니다. 여러분이 말씀의 인식의 폭을 넓힐수록 믿음의 폭도 넓어집니다. 진정한 구원은 사람에게서 오지 않습니다. [군대의 많은 사람으로 구원 받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많은 힘으로 건짐을 받지 못하는도다.](시33:16). 이것이 현실입니다. 특히 믿는 성도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질병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지만 의사를 찾고 의지했다가 죽었던 아사 왕이나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아도 될 아합이 대언자 미가야의 말을 듣지 않고 나가 화살에 맞아 죽은 것 등은 그들이 구원을 거부한 결과입니다.
여자들은 해산함으로써 구원을 받기도 하는데 이는 해산하는 순간 불임녀로서의 수치와 모욕에서 구원받는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불임은 저주로 생각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자를 업신여겼고, 인간 이하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여자가 해산함으로 자식 못 낳는 여자란 비방과 수치는 일거에 사라집니다. 불임을 누가 해결해 줍니까?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불임녀들로는 사라, 한나, 엘리자벳 등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을 낳은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수치를 제해 주고 구원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태를 닫기도 하시고, 여시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자들은 해산하면 어머니가 되고, 진정한 여자가 됩니다. 이때부터는 처녀 때와는 달리 미혹으로부터 잘 속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은 여자와 낳아 보지 않는 여자의 정신 연령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가운데 거하면 그녀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받으리라.] (딤전2:15). 특히 여자는 해산함으로 인해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등과 같은 세상과 마귀의 많은 유혹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혼에 대한 유혹도 해산한 여자와 그렇지 않는 여자는 차원이 다른 법입니다. 주님은 구원자입니다. 자매들이 이런 점에서 구원받고 싶으면 자녀를 낳고, 많이 낳으면 됩니다.
주님이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는 모든 면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영적 생활을 하는 가운데 겪는 현실 문제들에서 구원자를 찾으십시오. 질병, 경제적 어려움, 난처한 상황, 원수들, 각종 사고, 범죄자들로부터 여러분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혼의 구원은 한 번에 영원토록 받는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안전합니다. 그러나 제가 위에서 증거한 이런 구원은 날마다 받는 구원입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은택(恩澤)을 더하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셀라.](시68:19), [[주]께 노래하고 그분의 이름을 찬송하며 그분의 구원을 날마다 나타낼지어다.](시96:2).
구원이란 건져냄, 보호하심, 도우심 등이 모두 포함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기도에 응답하시고, 보호하시며, 도우시는 분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삼손이 물이 없어 죽게 되었을 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주]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주의 종의 손에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져야 하리이까? 하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턱의 우묵한 곳을 쪼개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 나오므로 삼손이 그 물을 마시매 그의 영이 돌아와 그가 회복되었으므로 그곳의 이름을 엔학고레라 하였으니 이것이 이 날까지 레히에 있더라.] (삿15:18~19). 원수를 이기는 것도 구원이요, 물을 마시는 것도 구원입니다. 사사기에 보면 사사들을 일컬어 이스라엘의 구원자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일으키사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니 곧 갈렙의 동생이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더라.](삿3:9). 옷니엘은 죄에서 혼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아니라 전쟁에서 원수들로부터 자기 민족을 구원하는 구원자였습니다. 에훗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일으키셨으니 곧 베냐민 족속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시켜 모압 왕 에글론에게 예물을 보내니라.](삿3:15).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주님은 사사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셨듯이,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저와 여러분을 마귀의 간계와 속임수, 세상과 그 정욕으로부터, 죄와 죄의 권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과 마귀와 육신과 죄를 싸워 이기는 구원자가 되십니다. 주님께서 태어나신 것을 마귀를 멸하시고, 마귀의 종노릇하는 자들을 풀어 주시고, 사망을 폐하시고, 죄를 멸하시며,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진정한 구원자이십니다. 이런 구원을 큰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누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가?
첫째, 겸손한 자입니다. 주님은 겸손한 자에게 더 많은 은혜를 베푸시며, 쓰러질지라도 구원해 주십니다. [사람들이 쓰러지거든 너는 이르기를, /그분께서/ 높여 주시리라, 할지니 그리하면 그분께서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욥22:29). 하나님은 거만하고 교만한 자를 구원하신 예가 없습니다.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자들을 구원하시며, 일으켜 세우십니다.
둘째,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기도하는 성도들의 부르짖음에 늘 귀를 기울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어려울 때 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 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께 부르짖는 대신 이집트나 앗시리아에 외교적 군사적 동맹을 맺고 원조를 요청했을 때, 전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가엾은 자가 부르짖으매 [주]께서 그의 말을 들으시고 그의 모든 고난에서 그를 구원하셨도다.](시34:6). 기도를 하면서도 자신의 기도를 신뢰하지 않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기도는 기도대로 하면서 기도한 것과는 정 반대로 술수를 부리는 사람들, 꾀를 꾸미고, 사람들과 손잡고, 방책을 강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뢰하는 것이 다 무너지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기도할 때까지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하는 법입니다.
셋째, 마음이 올바른 자를 구원하십니다. [나의 방벽은 마음이 올바른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시7:10). 어떤 어려움이 닥칠 때 가장 먼저 살펴 보아야 할 것은 나의 마음 상태입니다. 나의 마음이 올바른가? 간사한가? 순수한가? 더러운가? 삐딱한가? 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이 자신을 정죄한다면 구원받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양심이 자신을 정죄한다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 상태대로 취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나는 그분 앞에서 곧바르므로 내 자신을 지켜 내 불법에서 떠났나니 그러므로 [주]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친히 보시는 대로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아 주셨도다.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는 주께서 주의 긍휼을 보이시고 곧바른 자에게는 주의 곧바르심을 보이시며 순수한 자에게는 주의 순수하심을 보이시고 거역하는 자에게는 주의 적대(敵對)하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고난받는 백성은 구원하시나 교만한 눈빛은 낮추시리이다.] (시18:23~27). 육신적인 생각은 사망입니다. 영적인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롬8:6-7). 여러분의 마음 속에 생명과 평안이 없다면 여러분의 생각은 영적 생각이 아닙니다. 육신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내가 행한 일이 악행인지 선행인지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로마서2:9-10에 간단한 판별법이 나옵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혼 위에 환난과 곤고(困苦)가 닥치리니 먼저는 유대인의 혼 위에요, 또한 이방인의 혼 위에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와 화평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이방인에게로다.] (롬2:9~10). 여러분의 혼에 환난과 곤고가 있으면 악을 행한 것입니다. 양심이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주님을 봅니다. 사람의 눈길도 피하는 사람이 어떻게 불꽃같은 눈을 지닌 그분을 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지난 주, 지난 달 스스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 보시고, 믿음 안에 있었는지 입증해 보십시오. 자기를 살피고, 판단하는 일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주님은 마음이 올바른 자를 구원하시며, 곧바르게 걷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든지 곧바르게 걷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자기 길들이 비뚤어진 자는 곧 넘어지리라.](잠28:18).
넷째, 회개하는 영혼을 구원하십니다. [[주]는 상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가까이 하시며 통회(痛悔)하는 영을 가진 자들을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자들을 구원하시며(고후7:10), 통회하는 영을 지닌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죄로 인해 회개하고, 눈물을 흘린다면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맛볼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거니와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기 때문이니라.] (고후7:10).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고, 연약함과 허물 속에서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다음입니다.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고, 변명하고, 이해를 구하고, 설명하는 대신 통회하며 회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울과 다윗은 다 같이 죄를 지었고, 다 같이 자신의 죄를 지적받았고, 다 같이 죄에 대해 인식했지만 한명은 변명을 했고, 한명은 회개를 했습니다. 사울은 멸망했고, 다윗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회개하는 영혼을 구원하십니다.
다섯째, 마음이 의로운 자를 구원하십니다. [의로운 자의 구원은 [주]께로부터 오나니 그분은 고난의 때에 그들의 힘이 되시리로다. [주]께서 그들을 도우시며 건지실 것이요, 사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건져 구원하시리니 그 까닭은 그들이 그분을 신뢰하기 때문이니이다.](시37:39-40). 부끄러울 것이 없는 상태, 의로움은 영적 전투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 됩니다. 죄는 성령의 능력을 소멸시켜 버리지만 의는 영적 능력을 최고도로 끌어 올립니다. 모든 영적 능력의 바탕은 의로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을 달아 보시며(삼상2:3), 중심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다시는 그와 같이 심히 교만하게 말하지 말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이는 [주]께서 지식의 하나님이신즉 /사람의/ 행동을 달아 보시기 때문이로다.](삼상2:3). 여러분이 복있는 사람이라면, 알곡이라면 주님이 달아 보실 때 무게가 나갈 것입니다. 마귀가 밀까부르듯 해도 날려 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길이 자기 눈에는 깨끗하여도 [주]는 영(靈)들을 깊이 살피시느니라.](잠16:2). 살핀다고 번역된 이 부분이 WEIGHT(무게를 달다)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의 의를 입고 정결한 세마포란 의로운 행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사람의 길이 자기 눈에는 모두 옳게 보여도 [주]는 마음을 살피시느니라.](잠21:2).
저는 지금까지 설교를 하면서 제가 한 설교에 대해서 조금도 양심의 거리낌이나 찜찜한 기분을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주의 영으로 충만하여 증거 했습니다. 제가 만약 남의 설교를 베끼거나 남의 가르침이나 도용하고, 자기 생각으로 나의 사상이나 철학을 설교하다 누가 제 설교에 상처를 받았다고 하거나, 제 설교로 누가 실족했다고 한다면 저는 미쳐 버릴 것입니다. 특히 제 설교로 누가 실족했다고 한다면 저는 목회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머리를 땅에 박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선포하는 설교에 대해서 늘 당당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단 한 번도 성도들의 반응을 살펴가며, 그들의 입맛에 맞추고, 인기에 영합하는 설교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반대로 전혀 눈치 없이, 막무가내로 있는 그대로, 받은바 말씀을 증거 하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하나님의 말씀 설교자가 아니라 훌륭한 연사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양심의 순수함, 의로움은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설교하게 했으며, 그로 인해 겪는 여러 가지 교회의 어려움이 조금도 저를 두렵게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말씀 선포와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관한 한 의롭습니다. 제 자신이 조금도 저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역시 마음이 의롭고, 행위가 의로울 때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담대함을 얻고](요일3:21).
여섯째, 마음이 온유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이는 [주]께서 자신의 백성을 즐거워하시기 때문이니 그분께서 온유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시리로다.](시149:4). 마음이 온유한 자라는 완악함, 완고함, 고집을 꺾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 고침을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징계와 책망을 받아들이고, 바로 잡히는 사람들을 온유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생각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배워온 가치관이 있고, 관습이 있고, 자기만의 고집이나 철학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설교 시간마다 깨어지고, 책망을 받고, 바로 잡힌다면 가장 온유한 사람입니다. 어떤 이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를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믿지 않으면서 왜 교회에 다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듣고, 믿고,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고치려고 오셨습니다. 징계를 통해서라도 주님은 CORRECTION(바로 잡음)을 하십니다. 이는 성경의 기록 목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레미야는 기도하길, [오 [주]여, 주는 나의 찬양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고침을 받으리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받으리이다.](렘17:14). 고침을 받은 상태가 온유함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를 고치려 하십니다. 때로는 채찍으로 매질하시고, 질병으로, 파산으로, 사별이나 이혼, 자녀 등으로 고치게 하십니다. 주님, 저를 고쳐 주시고, 구원해 주시옵소서.
일곱째,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분께서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그들을 구원하시리로다.](시145:19). 우리는 언제나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것이 되면 사람이나 환경이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망하거나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말입니다. 구원자이신 주님이 베푸시는 구원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모든 것들에서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망하는 것이 두렵지 않는 사람에게 무엇으로 위협할 수 있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 무엇으로 겁을 주겠습니까? 주님은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데 이는 정확한 기도 응답을 말합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원하심으로 세상의 환란이나 어려움을 이기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혼의 구원이 아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영역을 넓혀서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주님께서 전할 말씀을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모든 성도들이 은혜와 진리와 생명이 풍성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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