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제목: 임마누엘
말씀

말씀: 사7:14
요절: 사7:14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모든 것을 다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루, 하루 창조를 마치신 후에 “좋았더라”로 끝을 맺습니다

1:4,10,12,18,21,25,31). 물론 이튿날은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 홀로 있는 것을 보셨을 때 주님은 ‘좋지 못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좋지 못하다고 한 최초의 언급은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합당한 협력자를 만들리라, 하시니라.](창2:18). 사람은 누구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지어주신 배필인 이브와 함께 있었을 때 완벽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 아담과 이브에게 복을 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매우 좋았더라. 그 저녁과 아침이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아담 혼자서는 결코 좋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혼자서는 결코 좋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고독, 외로움을 견디지 못합니다. 누군가 평생을 자신과 함께 있어 줄 사람을 찾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하늘로 들어 올리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세상을 정죄하고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참된 가치와 행복, 만족을 맛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배우자, 친구, 친지와 같이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개, 고양이 등과 같이 애완용 동물들과라도 함께 하고 싶어합니다. 요즘은 그것도 잘 안 되는지 자동차나 컴퓨터와 같은 오락용 기계와 함께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도 저도 안되면 아예 마약과 같은 약물과 함께 합니다.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와 함께 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진정으로 함께 해야 할 존재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이상 고독과 절망, 허무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덴마크의 유신론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명저를 남겼는데, ‘죽음도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다. 절망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성탄의 본질이며,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사실이 복음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성경 전체에 세 번나옵니다1).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보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하나님은 창세기 3:15에서 처녀를 통해 아이가 태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여자를 속여서 인간을 범죄케 함으로써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게 했습니다. 죄는 분리를 가져옵니다. 죄는 단절을 불러옵니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 숨어 버렸습니다. 죄는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아담과 이브는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범죄로 인해 아담과 이브 서로 간에도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죄는 인간 사이의 관계성도 파괴하고 단절합니다. 이제 인간 편에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려면 첫째, 마귀를 제거해야 합니다. 죄를 야기한 마귀를 멸하고 마귀의 일들을 멸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곧 바로 아담과 이브가 아닌 마귀를 향해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일을 행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평생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적대감(敵對感)을 두리니 여자의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4-15). 14절은 당시 뱀에게 즉각적으로 집행된 명령이며, 15절은 약 4000년 후에 이 땅에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서 성취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마귀를 멸하시고(히2:14),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요일3:8),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풀어 주려고 오셨습니다(행10:38, 딤후2:26).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동정녀를 통한 탄생과 마귀와의 한 판 전쟁을 선포하셨습니다. “여자의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란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마귀를 멸하고, 마귀의 일을 멸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문자 그대로 마귀의 머리를 부수실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밑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롬16:20). 주님의 탄생 소식은 인류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지만(눅1:19, 2:10) 마귀에게는 사형 집행관의 발걸음 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소위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마귀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반대로 무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마귀를 지나치게 의식하여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한대로 마귀를 이기시고, 마귀의 일들을 멸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귀가 없다고 생각해서도 안되며, 마귀를 두렵다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주님이 오셔서 마귀를 이기셨으며, 마귀를 완전히 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죄가 제거되어야 하며, 마음속에 두려움도 제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안에 있는 죄나 두려움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죄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고행, 금욕, 수행, 선행 등 갖가지 종교적 활동을 합니다. 심지어 스스로 자해(自害)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무슨 방법으로도, 어떤 행위로도 죄를 제거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율법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깨끗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면(赦免)이 없느니라.](히9:22).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니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 /뿌려/ 너희 혼을 위해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기 때문이니라.](레17:11).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죄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몸으로 친히 죄를 제거하심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셨고, 그 목적으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잘못된 종교는 피의 속죄를 부정함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길을 스스로 막아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침례를 통해 죄가 제거되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침례는 죄를 제거하지 못합니다(벧전3:21). 어떤 사람들은 교회만 오랫동안 부지런히 다니면 구원받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교회 생활이 죄를 제거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죄들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함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히10:4), [제사장마다 날마다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희생물들을 드리되 이것들은 결코 죄들을 제거하지 못하거니와](히10:11).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죄들이 완전히 제거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속죄를 믿어야 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자신의 피를 흘림으로 죄들을 제거하기 위함이요, 자신의 몸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려는데 있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요일3:5). 주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심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피의 대속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그 까닭은 이것이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이기 때문이라.](마26:28,막14:24,눅22:20). 주님은 죽음을 통해, 자신의 피를 통해 새 언약을 맺으셨는데, 죄들을 제거한 언약입니다. [이는 내가 그들의 죄들을 제거할 때에 그들을 향한 내 언약이 이것이기 때문이라, 함과 같으니라.](롬11:27), [이는 그리하였더라면 그분께서 반드시 창세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세상 끝에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음이니라.](히9:26). 죄와 죄들이 제거되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속에 있는 두려움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아담이 범죄한 직후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죄로 인한 두려움이 사라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원초적인 두려움을 제거하기 위해 종교를 만들고, 명상을 하고, 마음 속에서 죄책감을 몰아 내려고 갖은 애를 다 써 왔습니다. 잊어 보려고도 하고,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이 두려움은 불쑥 솟아납니다. 우리 스스로는 결코 이 두려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맺지 않으면 내면 깊은 곳에 잠재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도다.](롬5:1)-peace with God. 하나님과 화평(화목)의 관계를 해야 하나님의 화평(평강)이 내 안에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화평이 너희 마음 속에서 /너희를/ 다스리게 하라. 너희도 이 화평에 이르도록 한 몸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니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peace of God.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침례인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요한이 태어난 날 성령이 충만하여 이렇게 대언했습니다. [69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자신의 종 다윗의 집에 일으켜 세우셨기 때문이니... 75평생토록 자신 앞에서 거룩함과 의로 두려움 없이 자신을 섬기게 하고자 하심이라.](눅1:69,75). 사가랴는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와 목적을 정확하게 알았던 것입니다.

주님이 죽으시기 전까지 우리와 하나님과는 원수 관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죽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은즉 화해하게 된 자로서 더욱더 그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임이라.](롬5:10).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화해, 이것이 복음입니다. [또 십자가로 그 원수 되게 하는 것을 멸하사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6). 생각해 보십시오. 만유의 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분과 원수된 상태에서 무슨 평안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산다고 해도 그것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원수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오셨고, 죽음을 통해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셨고, 우리는 그 사랑을 통해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두려움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외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치 싸구려 엿장수의 가위 흔드는 소리보다 더 하찮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발견됩니다. 십자가의 사랑, 이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결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이는 두려움에 고통이 있기 때문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완전하게 되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사랑은 완전하게 하는 띠(골3:14)이며,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벧전4:8). 사랑이 무엇입니까?2) 완전한 사랑은 어디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겪는 허망함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십자가에서 발견됩니다.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아들을 보내시고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신 것이라.](요일4:10). 이로 인해 에덴에서 아담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두려워 숨었던 문제는 해결되었고, 이제 다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일컬어 그분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수 많은 이름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복된 이름이라면 단연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의 뜻이 무엇입니까? 마태는 이사야를 인용하면서 그 의미를 정확히 해석해 주었습니다.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이라는 뜻이라.](마1:23). 처녀가 낳은 한 아들이 임마누엘이란 것은 그분이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처녀가 낳은 한 아들이 위대한 선생이나 구도자나 정치가나 장군이 아니라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동정녀 마리아가 낳은 한 아들은 천사가 아닙니다. 성인 군자나 종교 창시자가 아닙니다. 위대한 선지자가 아닙니다. 여자를 통해 나온 한 아들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난 것이 아니라면 아무 의미도 소용도 없습니다.

임마누엘은 잠시동안 “우리와 함께 계실 하나님”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현재형)이란 점에 주목하십시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세십니다. 이는 더 이상 헤어지거나 분리나 단절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주님은 자기를 믿는 성도들과 잠시도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마28:20). 임마누엘이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란 뜻이므로 우리를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습니다. 우리를 쫓아내지도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하나님은 항상 함께 계십니다. 이제 주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주님을 볼 것이며 영원히, 항상 함께 주님과 함께 지내게 될 것입니다.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도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게 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7).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며, 단독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살며, 함께 걷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문제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성경을 통해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예를 좀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을 때 그는 위대한 족장이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주위의 대적들, 원수들조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는 줄을 알았습니다. [그때에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 총대장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행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는도다.](창21:22). 그는 나그네로서 남의 땅에 거하면서 그 땅의 왕이었던 아비멜렉을 책망할 수 있었고, 협상을 구걸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구걸 받았습니다(창21:25-27). 그의 힘은 물리력이나 경제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서 온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를 원수들의 땅에서 원수들을 호령하는 권세를 줍니다.

이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삭이 부자가 되자 블레셋 사람들은 시기하여 이삭의 우물을 메워 버리고(창26:14-15), 아비멜렉은 “우리에게서 떠나 가라”(창26:16)하며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그는 이동하여 우물을 다시 팠는데 이번에는 그랄의 목자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는 계속 도망다녀야 하는 신세였습니다. 이삭이 이런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은 이삭에게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힘든 때에 힘이 되는 친구 하나도 감사한 일인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 밤에 [주]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내 종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내가 너와 함께하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씨를 번성하게 할 것임이라, 하시매](창26:24). 하나님이 함께 했을 때 이삭을 괴롭히던 주변 민족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가 이제 우리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를 맺고 우리가 너와 언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창26:28). 그들은 도리어 이삭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양보와 패배로 일관했던 이삭이 실상은 값진 승리를 쟁취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인생 역전! 이것은 주님의 함께 하심, 즉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인해 가능한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패배자의 인생을 역전시켜 줍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목숨을 건지려고 집을 떠나 먼 타향으로 도망갈 때 야곱과 함께 하셨습니다. [또,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리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할 것임이라, 하시니라.](창28:15). 주님은 야곱의 도망자 길 뿐 아니라 평생을 함께 해 주셨습니다. 그는 혼자 산 것 같지만 언제나 주님이 그와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그 결과 그는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왔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12 지파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도망자 야곱을 돌이켜서 민족의 머리, 창시자로 만들어 줍니다.

주님은 살인자로 광야로 도망쳐 온 모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하리라. 네가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낸 뒤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그 일이 내가 너를 보낸 증표(證票)가 되리라.](출3:12). 사람들은 흔히 모세의 지도력, 모세의 리더쉽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모세의 지도력은 이미 40년 전에 바닥이 나서 한 명의 백성도 지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유대인을 구원하기는 고사하고 살인자로 들통나서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지혜와 능력을 잃은 80의 나이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을 때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지도력, 지휘력, 영적 권위와 같은 힘은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졸자들의 인생들에게 영적 지도력, 영적 권위를 갖추어 줍니다.

주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이 불평할 때도, 범죄할 때도, 우상을 만들어 섬길 때도 주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40년을 하루 같이 목자가 양을 인도하는 것같이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했기에 그들은 이집트의 노예 백성에서 가나안의 정복 민족으로서 우뚝 솟아 오르게 되었습니다. 정복 국가로서의 힘을 보여 주지 못하면 주위 민족들의 밥이 되고 맙니다. 노예 백성으로 그냥 들어와서 살았다면 그들은 가나안 민족에게 완전히 동화되어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했을 때 이집트에서 탈출은 물론이려니와 가나안의 모든 부족들을 힘으로 정복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경제력을 키운 것도 아니고, 외교를 잘 맺어 외세를 힘입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여리고 성을 비롯한 강력한 가나안 부족들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승리를 주시는 정복자로 이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여호수아와 함께 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명령하지 아니하였느냐?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이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주] 네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기 때문이니라, 하시니라.](수1:9). 그는 모세의 뒤를 이어 모세보다 더 큰 일을 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앞까지만 인도하고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가나안 부족들을 정복하고, 그들의 땅을 차지해야 하는 과업을 맞았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강력한 여당, 군부의 절대적인 지지, 백성들의 압도적인 여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함께 하심으로 33번의 전투를 ‘아이 성’에서 단 한번의 패전을 제외한 전승으로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여호수아와 같이 전쟁을 수행해야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승리가 불가능한 전쟁을 승리로 연전연승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함께 하심이었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를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숨어서 타작하는 농부 기드온과 함께 하셨습니다. [[주]의 천사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강한 용사여,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삿6:12).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하리니 네가 미디안 족속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삿6:16). 당시 이스라엘은 완전히 패망 직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산으로 도망하여 피난 생활과 같은 그런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회복할 만한 능력이나 전략이 전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급한 것은 백성들을 하나로 모으고 방향을 제시해 줄 지도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때 주님은 기드온과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을 때 기드온은 삼백 용사로만도 미디안 족속을 완전히 물리쳤습니다. 그들의 무기는 최첨단 무기가 아니라 나팔과 빈 항아리였습니다(삿7:16).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들어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며, 무너뜨리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다윗과 함께 하셨습니다. 다윗은 목동 시절부터 주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주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주와 동행하는 법을 깊이 터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시73:23). [주의 명령들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주께서 그것들을 통해 나를 내 원수들보다 지혜롭게 하셨나이다.](시119:98). 우리는 다윗의 모델을 따라 주님과 함께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들과 함께 할 때 항상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솔로몬에게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내가 명령한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이고 내 길로 걸으며 내 눈앞에서 올바른 일을 행하여 내 종 다윗이 행한 것같이 내 법규와 내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행한 것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왕상11:38). 주님은 언제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주님은 4가지를 제시하셨습니다. ① 내가 명령한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이고 ② 내 길로 걸으며 ③ 내 눈 앞에서 올바른 일을 행하며 ④ 다윗이 행한 것같이(다윗이 모델이다) 내 법규와 내 명령을 지키면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말하자면 복음의 진리를 떠나지 않으며, 길되신 주님을 따라가며, 믿음을 따라 행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성령을 따라 걸으면 주님의 함께 하심을 언제나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의 세 친구와 함께 했을 때 용광로의 뜨거운 불도 그들의 머리카락 한 올 태우지 못했습니다. [그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깜짝 놀라 급히 일어나 자기 모사(謀士)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세 사람을 결박하여 불 한가운데로 던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오 왕이여, 옳소이다, 하매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보라, 내가 보니 결박이 풀린 네 사람이 불 한가운데서 걷고 있는데 그들이 아무 해도 입지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도다, 하더라.](단3:24~25). 이는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나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강들을 건널 때에 강들이 네 위로 넘쳐흐르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속을 걸어갈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43:2). 하나님이 다니엘과 함께 했을 때 사자굴의 사자들의 입은 막혔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환경, 불같은 시련을 없애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맞게 하시며, 그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의 불꽃같은 믿음의 시련을 함께 감당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레미야, 이사야, 에스겔 등 성경적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와 어떻게 함께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어디서 체험해야 합니까? 우리는 목자들이 찾아갔던 말 구유간이나 동방의 현자들이 찾아갔던 어떤 집으로 찾아가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제자들과 같이 함께 먹고 마시며, 갈릴리 해변을 활보하며, 성읍들을 돌아다니시는 주님과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주님과 함께 하는가? 그것은 십자가에서부터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2:20).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우리와 함께 죽으시고 함께 사시는 생명의 관계를 맺으심으로 영원히 분리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죽으심으로부터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음과 연합함으로써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시작되고, 그분의 생명을 공급받고, 그분의 신성에 참여하게 되고, 그분과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됩니다. 주님의 죽음과 함께 한 성도만이 참 성도라 할 수 있고,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생명이 죽어 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이 자신 안에 자리잡지 않기 때문에 주님과의 함께 하심은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로부터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늘 어찌하여 세상에 살고 있는 것같이 규례들에 복종하느냐?](골2:20).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이라.](골3:3).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의 죽음을 십자가에서 처리하고, 그 죽음에 이른 생명을 말합니다.

부활의 동굴에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합니다.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2:5). 이제 우리는 주님으로 인해 새 생명으로 삽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능력으로(벧전1:3-4)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본체가 되시고, 머리가 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가지가 되고 몸이 됩니다. 이렇게 생명의 관계가 됨으로써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의 본질입니다.

십자가의 못 박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만이 생명을 맛볼 수 있고, 죽음을 통과한 것만이 열매를 맺습니다. 성도의 영적 교제는 주님과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밝히 드러냄은 너희 또한 우리와 사귐을 갖게 하려 함이니 참으로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라.](요일1:3).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친구가 되셨듯이 우리의 친구가 되십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과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죄인들을 의롭게 하셔서 생명의 교제를 나누시는 분이십니다.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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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다를 지나가며 범람(氾濫)하여 흐르고 목에까지 이르리니, 오 임마누엘이여, 그가 날개를 펴서 네 땅을 넓게 채우리라, 하셨느니라.](사8:8).

2)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 수많은 정의를 내리지만 성경적 사랑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사랑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분의 명령대로 걷는 것이요, 명령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안에서 걸으라 하는 것이라.](요이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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