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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구원자가 나셨으니(02)

구원자가 나셨으니(02)

말씀: 눅2:11-14
요절: 눅2:1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은 모두가 경이롭고 은혜롭지만 특히 구원자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소식만큼 우리를 기쁘게 하는 소식도 드물 것입니다.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경건의 신비가 온 세상에 알려지고 각 성도들의 마음에 다시 새겨지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늘에서 주의 천사가 외친 [이 날 다윗의 도시에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란 이 말씀은 우리를 흥분과 기쁨 속에 잠기게 합니다. 이 말씀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자가 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선포입니다. 주의 천사는 이 한 구절 속에서 매우 상세한 정보를 전해 줍니다. 이 날이란 말은 천사가 나타나 말씀을 전하는 날입니다. 이 날이란 주님이 탄생하신 날입니다. 이는 12월 25일이 아니라 9월 24-25일경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묘사하면서 '거하시니'(tabernacled, 장막을 치시니)라는 예상외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獨生)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여기에 나오는 "거하시매"라는 말은 영어로는 "dwelt"이고 그리스어로는 "tabernacled"로서, 이 "tabernacle"이라는 단어가 바로 장막절을 나타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분께서 장막절에 출생하셨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장막절은 지금의 월력으로는 대략 9월 중순에서 10월 중순경에 해당합니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정상적인 수태기간이 사십 주임을 고려해 볼 때 정확하게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태양력의 12월 25일은 예수님의 탄생이 아니라 예수님이 잉태한 시점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천사들이 왕궁 위나 예루살렘 성전이나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이 아니라 베들레헴 근교의 목동들에게 나타남으로써 이 날이 겨울이 아니란 점을 밝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장소 역시 정확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도시”입니다. 다윗의 도시는 베들레헴입니다. 이는 다윗이 이곳에서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고, 이곳 태생이어서 누구에게나 다 알려진 장소입니다. 미가서 5:2에 이르기를,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치리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니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미5:2)고 합니다.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치리자(왕)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분명히 있습니다. 주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천사들이 계시한 또 한 가지 내용은 구주의 탄생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탄생하셨습니다. [이 날 다윗의 도시에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 주님은 일생을 자신을 위해서 살아 보신 적이 없습니다. 주의 천사는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나셨으니]라고 선포했습니다. [참으로 그분께서는 창세 전에 미리 정하여졌으되 이 마지막 때에 너희를 위하여 드러나셨으며](벧전1:20). 주님의 탄생은 천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탄생은 주님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다윗의 도시에 나신 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전히 우리를 위해 존재하신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지 않으신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주님이 죽기 직전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또 예수님께서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나누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하시고 저녁 식사 뒤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그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라.](눅22:19-20). 주님의 탄생이 “너희를 위하여”였듯이 주님의 죽으심 역시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입니다. 주님의 몸과 그 흘린 피마저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온전히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전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롬5:8). 우리를 위한 죽음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구원자의 탄생은 우리를 위한 탄생이요, 구원자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죽음입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주님의 승천 역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하늘에 올라가신 것 역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내가 너희를 위하여 ..가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 저택들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주님이 하시는 일 가운데 우리를 위해 하시지 않는 일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며, 우리를 위해서 재림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주인이시며, 왕이시며, 머리시지만 우리를 위해서 존재하시는 것은 마치 머리가 몸을 위해 존재하는 것과 같습니다(고전6:13).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여러분과 저를 위해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란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실을 알고 믿는다면 우리가 기쁨으로 이 땅을 살아야 할 충분한 근거가 되지 않습니까?

이 점에서 우리 역시 배울 점이 많습니다. 구원자를 통해 구원받은 우리 역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본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사는가? 당연히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삽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수십 번 설교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의 입구에 쓰여 있는 구절이 무엇입니까? ① 먹든지 마시든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② 살든지 죽든지 -[이는 우리 중에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기 때문이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14:7~8). 다음에 또 한 가지는 이것입니다. ③ 무엇을 하든지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골3:17). 이것은 우리 삶의 목표이며,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위한 사랑은 어떻게 표현되며, 실천할 수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우리는 어떻게 영광을 돌립니까? 영이신 하나님, 하늘 보좌에 계신 그분을 위해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사는 우리가 사는 방법은 주님처럼 “너희를 위하여” 살면 됩니다. 우리는 자기를 위해 살아서는 안 됩니다. 구원받은 영적인 성도는 자기를 위해서 해서는 안 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살지 말고(롬14:7, 고후5:15)-이미 위에서 말씀드린 것과 일치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자기 배를 채우고, 자기 일신(一身)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구원자가 나신 이유와 목적과 위배될 뿐 아니라 구원받은 목적과도 위배됩니다. 성령을 주신 이유와도 위배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신 것은 남을 세워주고,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 중에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기 때문이라](롬14:7),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5). 여러분의 인생이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라면 많은 부분에서 인생의 계획과 목적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형제들을 위해 살리라고 마음먹는다면 일하는 목적이 달라집니다. 삶의 방식이 달라집니다. 어디에 집을 구해야 할지 살아야 할 장소가 달라집니다. 어느 학교를 가야 하는지, 어디에 직장을 잡아야 하는지 기준이 잡힙니다. 이런 기준이 잡히면 기도 제목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기준과 원칙과 목표가 없는 사람은 기도 제목조차도 불투명하며,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준과 목표가 성경적으로 잡히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한 줄로 죽 꿰이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를 위해서라면 고기도 먹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는 자신의 식생활도 기꺼이 바꾸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롬14:15). 나를 위해 사는 사람은 직장이 있는 곳, 교육 환경이 좋은 곳, 주거 환경이 좋은 곳을 찾지만 교회를 위해 사는 사람은 교회가 있는 그곳이 중심이 됩니다.

자기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그의 유익을 구하여 세움을 받게 할지니라.](롬15:2), [나와 같이 모든 일에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10:33).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삶은 맘몬의 숭배자입니다. 그러나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삶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매우 간단하게 누구를 경배하는 자인가?를 판별하는 방법입니다. 오늘날은 신앙마저 자기 유익의 수단이 되어 버린 시대입니다. 교회마저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존재합니다. 특히 이곳 이민 교회는 성도들의 유익을 위한 터전이 되지 못하면 사람이 모이지 않습니다. 아이들 교육 문제, 삶의 정보 교환은 물론이요, 여러 가지 현실적 이익이 없으면 결코 교회를 오지 않습니다. 희생이 아니라 이익을 추구하는 곳이라면 우리는 제사장이 아니라 장사꾼입니다. 교회는 영적 유익을 끼치는 곳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영적 유익을 위해 기도하고, 권면하고, 위로하고,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기 위해 교회를 와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 그 말씀을 나누며, 그 말씀으로 살아본 체험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지난 주에 무슨 설교를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한 주간 그 말씀이 어떻게 자신의 영과 혼을 다스렸으며, 승리를 주었으며, 싸움에서 이기게 했는지 도저히 함께 나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한다고 해서 남에게 차를 사주고, 돈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함께 기도할 수 있고, 함께 찬양과 감사를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웃의 형제를 위한 삶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고- [그런즉 우리 강한 자들은 마땅히 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하리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그의 유익을 구하여 세움을 받게 할지니라. 이는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음이니 오직 /이것은/ 기록된바, 주를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나를 덮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15:1-3). 사도 바울은 이 짧은 구절에서 우리가 누구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며, 우리의 구원자가 어떻게 본을 보이셨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일은 자기만 기쁘지만 남을 기쁘게 하는 삶은 주님과 이웃과 나를 동시에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이 아닌 우리를 위해 태어나신 그리스도가 성탄(聖誕)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해 다윗의 도시에서 오늘 구원자가 나셨다고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주는 기쁜 소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구하지 않으셨고, 자기 영광을 조금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고, 자기만족을 위해 사시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 채 사셨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태어나서 온전히 그 목적대로 사신 분이 바로 우리를 위해 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천사들이 계시한 또 한 가지 내용은 태어난 구원자가 누구냐? 란 점입니다. 그는 바로 ‘그리스도 주’ 즉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날 다윗의 도시에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 우리의 구원자가 누구냐? 란 점은 가장 중요한 이슈입니다. 이 점이 영생(永生)과 영벌(永罰)을 갈라 줍니다. 이 부분이 핵심입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주의 천사가 증거 한 ‘이 날 다윗의 도시에 우리를 위해 나신 구원자가 누구신가?’를 아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복과 행복의 첩경입니다. 복(福)과 행복(幸福)은 이 사실을 알고, 믿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누리는 복과 행복은 아무리 화려해도 한낱 신기루에 지나지 않으며, 허무(虛無)로 종결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목동들에게 증거 한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나셨으니’의 주인공 구원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원자란 말의 핵심 요체는 이것입니다. [나 곧 나는 [주]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43:11). 구원자란 칭호는 바로 구약의 기록된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 외에 구원자란 없습니다. 그런데 주의 천사는 구원자가 다윗의 동네에서 났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곧 이어 천군 천사들이 찬양을 했습니다. 이는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소식이야말로 가장 놀라운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구원자(Saviour)가 오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오셨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숨겨져 있던 하나님이십니다. [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자신을 숨기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45:15). 자신을 숨기셨던 하나님께서 스스로 사람이 되셔서 온 인류에 드러나셨습니다. 영이시며,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볼 수도 없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누구나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직접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은 정확무오한 증거들과 넘치는 증인들로 인해 이미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입니다.

우리를 위한 구원자가 나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해 주시며, 사망의 사슬에서 풀어주시며, 마귀의 권능에서 해방시키시며, 진정한 자유를 주시는 이 구원자는 누구십니까?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만이 구원자이십니다. [너희는 알리며 그들을 가까이 데려와 참으로 그들로 하여금 함께 의논하게 하라. 이 일을 옛적부터 밝히 알린 자가 누구냐? 그때부터 이 일을 말한 자가 누구냐? 나 [주]가 아니냐?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의로운 하나님이며 구원자라.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45:21). 구약에서 예언된 그 구원자가 이 땅에 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요, 그리스도란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은 성경이 있는 한 결코 변개될 수 없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태어나실 수 없고, 만져질 수 없고, 죽으실 수 없고, 보여 질 수 없는 분이시기에 우리와 동일한 몸을 입으시고, 우리를 위해 죄가 되시고 저주가 되셨습니다.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란 분명한 진리는 다음 구절에서도 발견됩니다. [내가 신뢰하는 나의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주께서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삼하22:3). 하나님의 다양한 묘사 중에 “나의 구원의 뿔”이란 말에 주목하시고 성령 충만한 제사장 사가랴의 증언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자신의 종 다윗의 집에 일으켜 세우셨기 때문이니](눅1:69). 사가랴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대언하였는데 “구원의 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구원자이신 하나님과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한 분이시며, 한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자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잘 드러낸 말씀은 디모데전서 4:10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수고하고 치욕을 당하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니 그분은 모든 사람의 구원자시요, 특히 믿는 자들의 구원자시라.](딤전4:10). 여기서 대명사 그분은 누구입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 ... 그분은 모든 사람의 구원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신성을 가장 분명하게 선포했습니다. 이런 근거 구절들은 매우 많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곧 우리 구원자의 눈앞에서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딤전2:3).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동격으로 쓰였습니다. [자신의 말씀은 /복음/ 선포를 통하여 정하신 때에 드러내셨으니 이 /복음/ 선포가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내게 맡겨졌느니라.](딛1:3). 여러분이 성경을 약간만 주목해서 읽으시면 구원자란 말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번갈아가며 사용되고 있음을 수도 없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몇 구절만 살펴보겠습니다. 구원자 하나님(딤전1:1),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딤후1:10),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딛2:10),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딛2:13).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딛3:4),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딛3:6). 얼마나 많이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었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성경이 의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우리 마음속에 알려지고, 새겨지게 하도록 하신 성령님의 작품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반복적으로 읽기만 해도 [구원자]란 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습니다. 구원자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하늘로 올라 가셨고, 다시 오십니다. 여러분은 구원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으셨습니다. 이곳에 계신 분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혼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자를 통해 얻는 것은 당연히 구원입니다. 그러나 구원자는 구원만을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해 나신 구원자는 구원과 동반된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시지만 헌신에 걸맞은 충분한 은혜와 믿음에 따른 넘치는 보상, 유업의 상급을 주십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고달픈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비록 우리가 이같이 말하지만 너희에게는 더 좋은 것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이 있음을 확신하노니 이는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의 행위와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보여 준 사랑의 수고 곧 너희가 지금까지 성도들을 섬기며 지금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라.] (히6:9~10). 이 시간 저는 여러분과 함께 구원자를 통해 얻은 구원과 함께 그와 동반되는 것들을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구원에 동반되는 것은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습니다. [공통된 믿음을 따라 나의 친아들 된 디도에게 내가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곧 우리의 구원자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을지어다.](딛1:4).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 은혜와 평강이 옵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구원받은 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들입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아무런 값없이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긍휼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에 대한 무조건적 사면(赦免)입니다. 평강이란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는 그대로 안녕, 평안, 화평, 평화를 총 망라하는 단어입니다. 이 셋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고 있습니다. 낮에는 따스한 햇볕을, 밤에는 고요한 달빛, 별빛을 봅니다. 24시간 내내 쉬는 공기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시는 물, 발을 딛고 있는 땅, 울창한 숲과 흐르는 강과 대양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다 은혜로 주어진 것이지 여러분에게 값을 치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물질적이고 외적인 것 외에 구원, 죄 사함, 의, 거룩, 경건, 지혜와 명철 등은 모두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구한다는 것은 영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무론하고 필요한 필요를 무료로 채우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공급을 구하는 것입니다. 구원자가 이 땅에 나셨다는 것은 구원자를 통해 구원뿐 아니라 은혜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구원자를 통해 긍휼이 옵니다. 긍휼은 은혜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세상과 마귀와 육신”이란 3대 원수에 둘러싸여 삽니다. 덕분에 수많은 죄를 짓습니다. 성령을 거슬리고,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소멸하고, 멸시하고, 슬프시게 하는 죄를 범합니다. 형제들 간에 서로 다투고 불화합니다. 서로 복종하라고 했는데 서로 싸우고 다투는 일은 지체 속에 있는 육신의 정욕 때문입니다. [너희 가운데 전쟁과 싸움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속에서 싸우는 정욕(情欲)들로부터 나지 아니하느냐?](약4:1). 하지만 주님은 긍휼을 베푸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가 받아야할 모든 형벌을 면해 주십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가 담당해야 할 죄의 형벌과 율법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면제해 주는 긍휼이야 말로 육신을 입고 사는 저희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구원자를 통해 평강이 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는 평안을 주셨습니다. 구원자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면 하나님의 화평이 우리 안에 주어집니다. 이 화평이 우리를 다스리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불안하거나 요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화평이 너희 마음 속에서 /너희를/ 다스리게 하라. 너희도 이 화평에 이르도록 한 몸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니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둘째, 구원자를 통해 구원에 동반되는 것은 영원한 왕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이같이 하면 /주께서/ 우리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존하는 왕국에 들어감을 너희에게 풍성히 베푸실 것임이라.](벧후1:11).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땅에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왕국에 들어갑니다.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이 있는 그곳에 주님은 우리를 위해 맨션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살 거처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구원받은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구원 그 이후에는 더욱 영광스런 왕국과 도시와 지위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국에 대해서 여러분이 분명한 성경적 조명을 가지고 있다면 그 소망으로 인해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이 땅을 단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 안달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저 하늘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땅에 집착하며, 땅에 소망을 둡니다. 그곳이 어떤 곳입니까? 요한계시록 22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영(靈) 안에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에 이르러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저 큰 도시 곧 거룩한 예루살렘을 내게 보여 주니 그 도시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빛이 지극히 귀중한 보석 같고 벽옥 같으며 수정같이 맑더라.](계21:10,11). 지상에 이런 도시는 없습니다. 보십시오. [그 도시의 성벽 건물은 벽옥으로 되어 있고 그 도시는 순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도시의 성벽 기초석들은 온갖 보석으로 장식하였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사파이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에메랄드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귀감람석이요, 여덟째는 녹주석이요, 아홉째는 황옥이요, 열째는 녹옥수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그 도시의 거리는 순금인데 투명한 유리 같더라. 또 내가 그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전능자와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성/전이시기 때문이라. 그 도시에는 해와 달이 빛을 비출 필요가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시를 밝혀 주고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광체(光體)이시기 때문이라.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이 그 도시의 빛 가운데서 다니겠고 땅의 왕들이 자기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그 도시에는 밤이 없으므로 낮에 그 도시의 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라.] (계21:18~25). 이런 도시는 전설 속에서도 신화속에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경에만 등장하는 도시인데, 거기에 살 사람들을 위해 구원자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다면 이 도시의 시민이며, 이곳에 이미 여러분의 살 집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셋째, 구원자 안에 있는 구원과 동반되는 것은 영원한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택하심을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견딤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딤후2:10). 우리는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은 후에 믿음으로 살아가며 인내와 절제로 오래 참고 모든 것을 견딜 때 구원과 더불어 영원한 영광을 함께 받게 됩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영원한 영광을 얻을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영원한 영광은 구원과 달리 조건이 있습니다.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니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 당하는 것은 함께 영광도 받으려 함이니라. 이는 내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이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기 때문이라.](롬8:17-18). 여기는 IF(..하면)란 조건이 있습니다. 영광은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애쓰고 수고해야 합니다. 상속은 반드시 수고를 전제로 해야 합니다. 구원은 은혜이지만 상속의 보상은 수고와 행위와 고난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너희가 상속의 보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이는 너희가 {주} 그리스도를 섬기기 때문이니라.](골3:24). 많은 성도들이 믿음을 통한 은혜로 구원의 상속자가 된 후에 상속의 보상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실 여러 가지 왕관을 마련하고 계십니다. 구원자가 나신 것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게 한 후에 상속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넷째, 구원에 동반되는 것은 고난을 견디는 힘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환란과 박해를 이기는 힘이 됩니다. 인내와 오래 참음은 성령의 열매이지만 구원이 이것의 뿌리입니다. 구원은 고난을 견디는 힘입니다. 구원은 영적 생명의 출발이며, 뿌리이며,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구원의 확신 없이 제대로 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박해를 받는다 하여도 너희의 안위(安慰)와 구원을 위한 것이요, 혹 위로를 받는다 하여도 너희의 안위와 구원을 위한 것이니 이 구원은 우리도 당하고 있는 동일한 고난을 견디게 하는 데 효력이 있느니라.] (고후1:6). 저와 여러분이 받은 구원은 단지 ‘저 하늘에 간다. 지옥가지 않는다.’가 전부가 아닙니다. 구원이야말로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시작이 없이는 중간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을 맛본 사람, 구원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성도만이 고난을 당할 수 있는 힘이 있는 법입니다.

다섯째, 구원자를 통해 구원에 동반되는 것은 성령이 임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그 성령님을 풍성히 부어 주셨으니](딛3:6).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를 성전으로 삼으시고, 우리 안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중보하시며, 진로 한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각종 은사를 주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성령이 없으면 새 생명이 탄생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없으면 하나님을 알 수도 없습니다. 성령은 구원에 동반되는 더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믿는 순간 성령을 받았고, 성령의 인침과 보호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느니라.](고후1:22),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이제 우리를 사용하시고 또 우리에게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니라.](고후5:5). 성령을 힘입어 우리는 아버지께로 나아감을 얻었습니다. [이는 그분을 통하여 우리 둘이 한 /성/령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감을 얻게 되었음이라.](엡2:18).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거처로 함께 세워졌습니다. [그분 안에서 너희도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처로 함께 세워졌느니라.](엡2:22).

여섯째, 구원에 동반되는 것은 천사들의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靈)들로서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히1:14).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순간에 우리는 천사들의 섬김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이나 사도들에게만 있었던 현상이 아닙니다. 모든 천사들은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위해 섬기는 영들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보호해 주신 것이나 바울이 파선한 배에서 주의 천사를 만나 것이나 베드로가 감옥에서 주를 만난 것 등은 모두 천사들의 섬김을 받은 예입니다. 이것은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입니다. 구원자를 통해 구원을 주시고, 더 좋은 것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을 주셨습니다.

오늘 저는 주님이 주신 말씀을 전했습니다. 아무쪼록 주신 말씀 마음에 받아 간직하시며, 은혜와 위로를 얻고 기쁨을 얻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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