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이사야 18:1-20:6
요절: 이사야 18:7
이사야 18장은 이디오피아 강 건너편에 있는 지역에 대한 경고입니다. ‘화 있을진저, 이디오피아 강 건너편에서 날개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땅이여!’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매우 생소한 표현이지만 이사야 대언자 당시 사람들이나 정통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쉬운 표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들에게 ‘강남 지역’이라고 하면 예전 사람들은 모두 ‘중국의 양자강 이남 지역’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물어보면 이 표현은 ‘서울의 한강 이남 지역’을 말하는 줄로 압니다. 그동안 많은 주석가들이 이 구절이 의미하는 지역에 대해서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창세기 2:13에 따르면 이디오피아 지역을 두르는 강은 ‘기혼’입니다. ‘날개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땅’은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만 ‘이집트’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유는 30:2,3에 ‘이집트의 그늘’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성경의 관용어구 중의 하나입니다. 2절은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흩어지고 벗겨진 민족, 곧 처음부터 지금까지 두려움을 주던 백성...](2)이라고 말합니다. 출애굽 당시에 이집트와 그 주변 모든 민족들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다 점점 힘이 약해져서 흩어지고, 벗겨졌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다시 주변 지역들은 이스라엘로 인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흩어지고 벗겨졌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때에 다시 온 세상 민족이 그들로 인해 두려움에 떨게 될 것입니다. 3-4절은 천년 왕국에서 있을 일입니다. 주님이 깃발을 세우시는 분이심은 구약 성경 곳곳에 등장합니다. 이미 앞서 11:10,12절에서 주님이 만백성의 기(旗)란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가 있어서 만백성의 기(旗)로 설 것이요, 이방인들이 그에게 찾아오리니 그가 /베푸는/ 안식이 영화로우리라.(10), 또 그분께서 민족들을 향하여 기(旗)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의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함께 모으시리니(12)](사11:10,12).
깃발은 뭔가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며, 사람들을 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힘차게 휘날리는 깃발과 찢어지거나 부러진 깃발, 내려진 깃발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대영제국의 깃발이 전 세계를 휘날리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미국의 성조기가 휘날리는 것을 보면 깃발의 의미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旗)에 대해서 몇 구절을 살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파별로 기(旗)를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 속한 각 사람은 자기 조상 집의 기(旗)와 함께 자기 군기 옆에 진을 치되 회중의 성막에서 멀리 칠지니라.](민2:2). 출애굽의 여정 때 주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조상 집의 기를 세우도록 하심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언약의 하나님을 분명히 알도록 하셨습니다. 학교에 국기를 게양하는 것이나 회사에서 회사의 깃발을 세우는 일은 모두 애국심과 애향심을 고취하려는 목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기 조상 집의 기(旗)를 세우게 하심으로 언약의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신 것입니다.
시편 20:5을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깃발을 세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깃발에 새겨진 문구는 우리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우리가 네 구원을 기뻐하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주]께서 네 모든 청원(請願)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시20:5). 우리가 이 깃발을 세울 때 주님은 우리의 청원을 들어 주십니다. 깃발을 높이 치켜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마땅한 자세입니다. 적에게 패하는 군대, 항복하는 군대는 백기(白旗)를 들 수밖에 없습니다. 정복지에는 정복자의 깃발만이 서 있을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깃발을 주시고, 펼치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주를 두려워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로 인하여 그것을 펼치게 하셨나이다. 셀라.](시60:4). 깃발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우고, 진리로 그것을 펼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00 교회 협의회’, ‘00 선교 단체’ ‘00 연합회’ 등의 이름을 세워진 깃발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진리로 펼쳐지지 않는 깃발은 더러운 종교 행위에 불과합니다. 원수들도 우리가 하는 일을 그대로 모방합니다. 그들 역시 깃발이 있습니다. [주의 원수들이 주의 회중들 한가운데서 소리를 지르며 자기들의 깃발을 세워 표적을 삼았나이다.](시74:4).
우리는 아가서에서 깃발에 대한 더 깊은 영적 조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잔칫집으로 인도하시니 내 위에 나부끼는 그분의 깃발은 사랑이었노라.](아2:4). 우리 위에는 주님의 깃발이 나부낍니다. 그 깃발은 사랑의 깃발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사랑 아래서 은혜와 긍휼을 받아 사는 주님의 신부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사랑이 나부끼는 그 깃발 아래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위엄을 갖추어야 합니다. 넘치는 죄와 허물, 세상의 모든 더러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넘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위엄을 지녀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묻습니다. [아침같이 찬란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위엄 있는 여자가 누구인가?](아6:10). [오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같이 아름다우며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위엄이 있구나.](아6:4).
이사야에는 재림과 관련하여 깃발이 많이 나옵니다. [또 그분께서 멀리 있는 민족들을 향하여 기(旗)를 세우시고 그들에게 쉿 소리를 내사 땅 끝에서부터 오게 하시리니, 보라, 그들이 속력을 내어 속히 올 것이로되](사5:26). 주님은 이스라엘을 부르시기 위해 기(旗)를 세우셨습니다. 주님이 기(旗)를 세우시면 온 민족이 다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거주민들과 땅에 거하는 자들아, 그분께서 산 위에 기(旗)를 세우시거든 너희는 볼지어다. 그분께서 나팔을 부시거든 너희는 들을지어다.](사18:3). 이 기(旗)는 많은 민족들, 특히 유대인들을 박해하고 괴롭히던 민족들에게는 두려움의 상징이 될 것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주의 불이 시온에 있고 주의 용광로가 예루살렘에 있으매 그가 두려움으로 인하여 자기 요새로 물러가겠고 그의 통치자들도 그 기(旗)로 말미암아 무서워하리라.](사31:9). 주님의 깃발의 정체는 바로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남은 자들은 산꼭대기의 깃대요, 작은 산의 기(旗)와 같습니다. [한 사람이 책망한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 사람이 책망한즉 너희가 도망하리니 너희의 남은 자는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작은 산의 기(旗) 같으리라, 하시느니라.](사30:17). 주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깃대처럼 들어 올리심으로 온 세상이 그들을 바라보게 하시며, 열방의 머리로 삼으실 것입니다. [그 날에 [주] 그들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의 백성의 양떼같이 구원하시리니 이는 그들이 왕관의 보석같이 되어 그분의 땅에서 기(旗)처럼 들려질 것임이라.](슥9:16).
생각해 보십시오. 이 땅에서 이스라엘은 어떠했습니까? 2,7절에 나오는 말씀대로 [...너희는 흩어지고 벗겨진 민족, 곧 처음부터 지금까지 두려움을 주던 백성...](2)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이 땅에서 성도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사자같이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했지만 파리같이 하찮게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렇지만 천년 왕국 때,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습은 [... 이는 그들이 왕관의 보석같이 되어 그분의 땅에서 기(旗)처럼 들려질 것임이라.](슥9:16)입니다.
5-6절은 누군가(or 무엇인가)가 잘라내어지고(take away), 끊어집니다(cut down). 이는 아마겟돈 전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추수’란 말은 성도들을 거두어 들이는 것 외에 이 세상의 악한 자들을 함께 모아 심판하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추수하기 전 곧 봉오리가 완전해지고 신 포도가 꽃 속에서 익어갈 때에 그분께서 가지치는 낫으로 작은 가지를 치시고 큰 가지를 가져다가 잘라 내시어 그것들을 다 같이 산의 날짐승들과 땅의 짐승들에게 남겨 주시리니 날짐승들이 그것들로 여름을 나며 땅의 모든 짐승들이 그것들로 겨울을 나리라.](5-6). 수확에 대한 직접적인 참고 구절로는 예레미야 8:20, 51:33, 요엘3:13, 마태복음 13:30입니다. 여기서는 호세아 6:11을 보겠습니다. [또한, 오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포로 된 것을 돌이킬 때에 그가 너를 위하여 추수할 것을 정하였느니라.](호6:11). 여기서 수확은 곧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과 유사한 장면을 한 구절 보겠습니다. [이 날 [주]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취하고 블레셋 사람들 군대의 사체(死體)를 공중의 날짐승과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삼상17:16).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면 골리앗은 적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때 주를 대적하던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아 짐승의 밥이 될 것입니다(겔32:1-10, 계19:17-18).
7절은 이방 민족(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함께 주님께 나아오는 장면입니다. 7절은 2절의 반복적인 설명입니다. [그때에 흩어지고 벗겨진 백성 곧 처음부터 지금까지 두려움을 주던 백성이 만군의 [주]께 예물을 가져오되 /분량대로/ 측량되고 짓밟힌 민족 곧 강들이 그 땅을 못쓰게 만든 민족이 만군의 [주]의 이름이 있는 곳 시온 산으로 가져오리라.](7).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반복하시는 이유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진리를 각인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파라오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굳게 정하셨음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속히 이 일을 행하실 터이니](창41:32). [또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참으로 거듭 말씀하시되 사람이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로다.](욥33:14). 주님이 우리에게 두 번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깊이 새기고 더욱 순종해야 합니다.
19장은 이집트에 대한 엄중한 경고입니다. 이집트는 성경에서 이스라엘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나라입니다. 이집트는 세상을 상징하며,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민족이며, 우상 숭배의 나라입니다. [이집트에 대한 엄중한 경고라. 보라, [주]께서 빠른 구름을 타시고 이집트에 임하시리니 이집트의 우상들이 그분의 눈앞에서 흔들리며 이집트의 마음이 그 한가운데서 녹으리로다.](1). 이 모습은 재림의 모습입니다. 구름, 회오리 바람, 북풍, 불과 같은 표현은 주로 재림을 나타내는 어휘들입니다. 16절에 ‘그날에’란 표현 역시 재림의 시점을 명시해 주는 말입니다. 이집트를 향한 주님의 심판은 첫째, 자중지란(自中之亂)입니다(2). 이 말씀들을 현재 우리 세대에 적용하자면 이렇습니다. 국가에 내분이 있고, 시위가 끊이지 않고, 반목하고 대립하는 것은 단순히 견해의 차이가 아니라 주님의 심판의 결과란 점입니다. 지역 감정, 계층간의 갈등, 세대간의 갈등으로 인한 분란과 충돌, 분열은 그 땅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누구나 다 걱정과 근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심각한 분열이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이런 현상은 더욱 커지고 깊어 질 뿐입니다. 마태복음 10:21에도 말하기를, [또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음에 넘겨주며 자식들이 자기 부모를 대적하여 일어나 죽게 하리라](마10:21). 둘째, 이집트의 영이 쇠진해지고 이집트의 계략을 멸하십니다(3). 지금 말로 하면 국운이 쇠퇴해진다는 말입니다. 경제 개발 계획을 세우고, 각종 프로젝트를 추진해도 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잇따른 정책의 실패는 정치, 경제, 외교, 군사적 문제를 모두 붕괴시킨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주님의 심판의 결과란 점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잔인한 통치자를 주십니다(4). 지도자 복이 없는 나라, 독재자가 다스리는 나라 역시 민중의 우매함 보다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전혀 두려워 하지 않는 불경건한 지도자들에게 권세를 주신 주님은 이집트 백성들을 심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북한에 김일성, 김정일이라든지, 이라크에 후세인을 대통령으로 주신 것 역시 같은 원리입니다. 넷째, 물의 기근을 주십니다(5-10). 이집트가 자랑하는 나일강이 말라 버릴 것입니다. 물부족은 말세로 갈수록 심각한 현상입니다. 현재 전 세계의 대부분 국가는 물부족 국가로 분류되었습니다. 물이 부족하면 겪는 고난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린 민족들에게 영이 마셔야 할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육신이 마실 물도 부족한 것입니다. 11-13절은 재앙의 날에 이 땅의 지혜, 세상 지혜가 얼마나 무용한가를 보여 주는 예입니다. 하나님이 물을 주시지 않으시는 상황에서 통치자나 지혜자나 모사가 무슨 힘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헛된 것에 불과합니다.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께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요, 또 기록된바, 그분께서 지혜로운 자들을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신다, 하였고](고전3:19).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자기 지혜, 육신의 지혜, 세상 지혜를 의지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위로부터 오는 순수한 지혜, 완전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한 자들 가운데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것은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아무 쓸모 없는 이 세상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며 오직 신비에 쌓인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2:6). 하나님의 지혜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부드럽고 대하기 쉬우며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하고 차별과 위선이 없나니](약3:17).
다섯째, 주님은 이집트 한 가운데 비뚤어진 영을 섞으심으로 이집트는 바로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14). 우리는 오늘날 세상이 점점 악해지고, 이상해져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심판의 결과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께서 이집트 한가운데서 비뚤어진 영(靈)을 섞으셨으므로 그들이 이집트로 하여금 그 모든 일에서 잘못하게 한 것이 술 취한 자가 자기의 토한 것 가운데서 비틀거리는 것 같게 하였으니](14). 마지막 때에 세상이 미친 질주를 거듭하는 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비뚤어진 영을 섞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몇 가지 예를 보겠습니다.
○ 하나님은 배교한 이스라엘에게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부어 주셨습니다(사29:10). [이는 [주]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 눈을 닫으셨음이요, 대언자들과 너희 치리자들과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사29:10). 그래서 이스라엘은 비틀거렸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멈추며 놀랄지어다. 너희는 부르짖고 부르짖을지어다. 그들이 포도주로 취한 것이 아니며 독주로 비틀거리는 것이 아니니](사29:9).
○ 주님은 말씀을 버린 대언자들에게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두려워하던 미가야를 제외한 아합의 궁중에 있던 모든 대언자들은 거짓말로 대언했습니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대언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이르시되, 너는 그를 설득하겠고 또 이기리라. 나가서 그와 같이 하라, 하셨사오니](왕상22:22). 이 시대에 하나님은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든 교회들에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셨습니다. 강단에서 설교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90% 이상이 성경과는 완전히 상반된 거짓 교리입니다. 목사들은 마치 성공학 강좌를 하는 비즈니스 맨들 같고, 성도들은 성공과 행복을 갈구하는 세일즈맨들 같습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셔서 거짓을 믿게 하십니다. 주께 부름받지 않는 목회자, 주님께서 보내시지 않는 자칭 주의 종들을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언자 예레미야가 대언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야, 이제 너는 들으라. [주]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으로 하여금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렘28:15). [포로 된 모든 자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주]가 느헬람 사람 스마야에 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스마야를 보내지 아니하였는데도 그가 너희에게 대언하고 너희로 하여금 거짓을 믿게 하였도다.](렘29:31). 어떤 이는 이렇게 묻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진리를 믿게 하시지 않고, 어떻게 거짓말하는 영을 보낼 수 있는가? 우리 목사님이 좀 심한 설교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악한 자들을 벌주시기 위해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시고, 강한 미혹을 보내셔서 사람들로 거짓말을 믿게 하십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살후2:11).
○ 주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자기 뜻대로 행하는 사울 왕에게 주님은 성령을 거둬 가신 대신 악한 영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의 영께서 사울을 떠나고 [주]께로부터 온 악한 영이 그를 괴롭게 하므로 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온 악한 영이 왕을 괴롭게 하온즉](삼상16:14-15). 사울은 이후로 더욱 악해져서 다윗을 죽이고자 여러 차례 시도했는데 악한 영이 임한 결과였습니다(삼상18:10). 성도가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을 소멸하고, 성령을 근심케 하고, 성령을 슬프게 하는 성도들은 이 세상의 영, 곧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몸과 마음이 괴로워합니다. 적극적으로 죄를 짓지는 못하지만 죄를 버리지도 못하고, 교회를 다니지만 악을 이기지 못하는 성도들은 늘 마음이 고통스런 법입니다. 다행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은 영원히 내주하시고 떠나지 않지만 자기 안에 성령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고 사는 분들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없습니다.
○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아버지의 아들들, 즉 자기 형제들을 70명이나 죽이고 세겜 사람들을 동원해서 정권을 잡았습니다(삿9:1-5). 주님은 살인자 아비멜렉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악한 영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삿9:23). 우리는 살인자들이나 큰 죄를 범한 사람들이 정신병을 앓거나 미쳐 버리는 일들을 자주 보는데, 이것은 그의 양심이 가책을 받거나 의지의 문제에 앞서 주님이 악한 영을 보내신 심판의 결과일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이나 아비멜렉과 같은 죄를 통해 고통을 앓는 사람들은 정신병원이나 상담 치료사들을 찾을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나아와 자백하고, 회개함으로 치유받아야 합니다.
○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두려움의 영이 아니요,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기 때문이라.](딤후1:7). 우리 안에 있는 영은 바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킨 그런 권능의 영이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은 원수들을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고 기도하신 바로 그런 사랑의 영이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은 악을 미워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를 기뻐하는 그런 생각의 영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더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눅11:13). 성령 충만을 구하십시오. 간절히 소원하십시오.
18-25절은 이집트의 회복입니다. 18절에 따르면 다섯 도시가 가나안 언어를 말하며, 주님께 맹세합니다. 한 도시는 멸망의 도시입니다. 이는 주의 심판을 통해서도 주를 알기를 거부한 도시일 것입니다. 19절은 대피라밋(great Pyramid)이 있는 지점입니다. 이집트의 한 중앙에 있는 주를 위한 제단은 대피라밋입니다.1) 이 건축물은 신자와 불신자 구분없이 모두 경이의 대상이었습니다. 현재는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입니다. 대피라밋은 파라오의 무덤이 아닙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그 피라밋을 보고 자신들의 무덤을 그렇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 날에 이집트 땅 한가운데에 [주]를 위한 제단이 있겠고 그 경계에는 [주]를 위한 기둥이 있을 것이요, 이것이 이집트 땅에서 만군의 [주]를 위한 표적과 증거가 되리니 이는 그들이 학대하는 자들로 인하여 [주]께 부르짖겠고 [주]께서는 한 구원자 곧 위대한 자를 보내사 그로 하여금 그들을 건지게 하실 것임이라. 또 [주]께서 자신을 이집트에게 알리시리니 그 날에 이집트 사람들이 [주]를 알고 희생물과 봉헌물을 드릴 것이며 참으로 그들이 [주]께 서원을 하고 그것을 이행하리로다.](19-21). 이집트는 대환란을 거쳐 주님을 알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땅에 있는 건축물을 주를 위한 표적과 증거로 알고, 주님께 희생물과 봉헌물을 드릴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에도 이집트는 열번의 재앙을 통해 주님을 충분히 알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날에도 이들은 주님을 알게 됩니다. 천년 왕국 때 이집트 사람들은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올라와 장막절을 지킬 것입니다(슥14:16-21). 주님은 이들을 치셨을지라도 다시 고쳐 주시고 회복해 주십니다. 23-25절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집트를 내 백성이라고 부르시며, 아시리아를 내 손으로 지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천년 왕국 때에 주님은 온 땅의 민족들을 복 주십니다.
20장은 다시 역사적 사건입니다. 711 B.C에 있었던 일로 아시리아 왕 사르곤이 군대 장관 다르단을 보내 아스돗을 취했습니다. 아스돗은 예루살렘 동편, 가자 지역의 북쪽으로 지중해 바다와 맞닿아 있는 곳으로 유다 지파의 땅이었습니다(수15:46,47). 유다는 아시리아의 침공을 막기 위해 이집트와 동맹을 꾀했습니다. 그러나 앗시리아는 이집트와 이디오피아를 패퇴시킴으로써 그들을 포로로 잡아 갔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에 대한 예를 보여 주시기 위해 이사야에게 삼년 동안 벗은 몸과 맨 발로 다니게 했습니다(2-3). 유다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집트와 이디오피아를 의지할 때 당할 수치를 몸소 보여 주신 것입니다. 6절은 1-5절의 역사적 사건을 근거로 미래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에서 패한 병사들이 포로로 잡혀갈 때 옷을 완전히 벗긴 예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감옥의 죄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옷이 없으면 도망가기가 쉽지 않고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며, 감시하기에 훨씬 편합니다. 그 날에 이집트와 이디오피아 역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들의 도움이 될 줄 알았던 이들의 패망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 날에 이 섬의 거주민들이 말하기를, 보라, 우리가 기대하던 나라 곧 우리가 아시리아 왕으로부터 건짐을 받으려고 피하여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와 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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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피라미드는 견고한 암반석위에 지어져있다. 그 암반석은 피라미드 둘레선으로 수평으로 묻혀 있는 거대한 바위층이다. 척도에 사용된 큐빗은 히브리의 도량형인데 25.025인치이다. 피라미드의 바닥의 둘레선은 365.2422큐빗으로 이는 태양력으로 정확하게 일년을 나타낸다. 이 수치는 매 4년마다 생기는 하루의 공백과 윤년까지도 정확하게 포함하는 수학적 계산이다. 경사지게 되어있는 피라미드의 높이는 232.52큐빗이다. 왜 하필이면 이런 높이로 지었을까? 이는 바닥의 둘레선과 축면선을 나누어 보면 원주율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365.242÷232.52=3.141·592). 이것은 피라미드가 고도로 정확한 기하학적 계산에 의해서 지어졌음을 알게 해 준다. 피라미드 평면의 길이는(365.2422×4=14609.68)는 피라미드의 높이의 두배와 원주율(3.1416)을 곱한 것(232.52×2×3.1416=14609.68)과 일치한다. 측면 경사각은 10:9로 되어있다. 즉, 매 10피트를 올라가면 고도는 9피트씩 증가하는 것이다. 피라미드의 고도에 따라서 10피트씩 계속 곱해나가면 91,840,000이란 숫자가 나오는데 이는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miles)이다. 피라미드는 또한 별들의 주기인 항성년(sidereal)과 매년 봄 가을에 있는 춘분과 추분의 주야평분을 정확하게 나타내준다. 별들은 해마다 뜨고 지는 시각이 약간씩 늦춰졌다가 빨라지는데 해마다 50초 정도의 차이가 생긴다. 항성년과 주야펑분선이 일치하는데는 25,827년이 걸리며, 이것이 한 주기이다. 피라미드의 바닥의 둘레를 재어서 합해보면 25,827인치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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