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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구약개론 이사야(8) -Pastor. Peter Yoon

말씀: 이사야 25:1-29:24 

요절: 이사야 28:16


25장과 26장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입니다. 25:1과 26:1은 둘 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한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4절에 “가난한 자들에게 힘이 되시고”란 말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산상수훈과 일치하는 말입니다. 구약에서 지상에서 물질적인 부는 주님이 복을 주신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물질적인 부(富)대신 영적인 복을 주시며, 고난과 박해를 주십니다.

8-9절은 천년 왕국에서 이스라엘이 부르는 영광스런 찬양입니다. [승리로 사망을 삼키시리라. {주} [하나님]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신의 백성을 향한 책망을 온 땅에서 제거하시리니 이는 [주]께서 그것을 말씀하셨음이니라. 그 날에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로다. 우리가 그분을 기다렸나니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분은 [주]시로다. 우리가 그분을 기다렸나니 우리는 그분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하리니](사25:8-9). 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첫째, 승리로 사망을 삼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부활을 찬양한 것이며, 이스라엘 민족의 부활을 노래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음의 고난을 맛보심으로 부활의 승리를 주시고,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셨습니다. 이런 부활의 소망은 구약 성도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주님은 호세아를 통해 [내가 그들을 무덤의 권세에서 속량(贖良)하며 사망으로부터 구속(救贖)하리니, 오 사망아, 내가 네 재앙이 되리라. 오 무덤아, 내가 네 파멸이 되리라. 뜻을 돌이키는 것이 내 눈에서 숨으리로다.](호13:14)고 말씀하셨고, 이 일의 실체는 고린도전서 15:54에서 주님의 부활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이제 주님이 오시는 그 날에 모든 성도들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 문자적으로 성취되는 실체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주께서 /승리로 사망을 삼키시리라,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고전15:54).

둘째,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씻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과 고난을 통해 흘린 눈물이 저 하늘에서 계속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 하늘에도 두 번의 눈물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두 번이나 닦아주십니다. [이는 왕좌 한가운데 계시는 어린양께서 그들을 먹이시며 생명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임이라, 하더라.](계7:17). 이 눈물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흘릴 눈물입니다. 세상에서 주를 위해 살지 못하고 썩어질 육신과 사라질 정욕을 위해 살았던 회환의 눈물이 될 것입니다. 내가 행한 모든 것들이 심판석에서 불타 없어지고 손실을 당할 때에 흘리는 눈물입니다. 두 번째 눈물은 요한계시록 21:4에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음이라.](계21:4). 이제는 누구의 눈에도 눈물이 없습니다. 더 이상 사망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아픔도 없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모든 얼굴의 눈물을 씻기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십니다.

셋째, 자신의 백성을 향한 책망을 제거해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자를 기다렸다고 노래합니다. 그들은 처음에 구원자를 배척하고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 때에 자신들이 기다린 메시아를 죽인 죄를 회개하고 구원자를 영접할 것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죽인 죄로 인해 그 피가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의 머리 위로 돌아갔고, 수치와 모욕을 당했습니다. 나라없는 민족으로 온 세상을 유리 방황하며 온갖 박해를 받았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약속의 땅으로 모으시고, 이들 위에 쏟아졌던 모든 책망을 제거하시며, 주님께서도 책망하지 않으시고 받아 주십니다. 대환란은 이스라엘을 향한 책망의 날이라면 천년 왕국은 책망이 제거되는 날입니다. [책망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폐하게 되리니 내가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반드시 있을 일을 알렸노라.](호5:9). 교회는 이스라엘과 달리 이런 책망의 날이 없습니다. 다만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은 우리를 책망하시고, 징계하시고, 권면하시고 바로 잡으십니다.

넷째, 이스라엘은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구원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야곱이 자녀들에게 복을 주며 한 예언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 [주]여, 내가 주의 구원을 기다렸나이다.](창49:18). 기다림은 소망이요, 단절없는 믿음의 연속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기다렸고,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오래 동안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주님을 기다렸고, 주의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은 신앙 생활에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의 성장을 위해서 우리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회복을 위해서도 우리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열매 맺기를 위해서도 우리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몇 천년 동안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린 이스라엘은 막상 메시야가 왔을 때 알아 보지 못하고 배척해 버렸습니다. 그 이후에 다시 2000년 이상을 기다림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다림은 결국 결실을 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의 재림이요, 메시아 왕국입니다.

26장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성문들을 열고 진리를 지키는 의로운 민족이 들어오게 할지어다.](2). 이는 재림의 입성입니다. 주님은 재림의 때에 예루살렘 동문을 통과해 들어가서(겔10:19,11:1) 다윗의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 시편 24:7,9절은 [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존하는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께서 들어가시리로다.](시24:7)라고 말합니다. 영광의 왕은 바로 주님이십니다(시24:10).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예루살렘 동문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9절입니다. [밤에 내가 내 혼으로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참으로 /아침/ 일찍 내 속에서 내 영으로 주를 찾으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상의 거주민들이 의를 배울 것임이니이다.](9). 천년 왕국 때에 생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아침 일찍 주를 찾음으로 하루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일어나면 운동을 하거나 밥을 먹거나 집안을 청소하거나 하루 스케쥴을 짜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고, 할 일이 없으면 기도하거나 성경을 읽는 일을 합니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주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 습관을 형성해 주셨는데, 40년 동안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만나를 줍게 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16:12을 보십시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이 불평하는 것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저녁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빵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주]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출16:12). 그들은 아침에 빵을 거두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나는 녹아 버립니다(출16:21). 빵은 생명의 빵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아침에 영적 양식을 먹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여호수아 6:12, 7:16, 8:10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매 제사장들이 [주]의 궤를 메고](수6:12). 주의 궤를 메는 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시간 역시 아침 일찍이어야 합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수7:16). 기도하는 시간 역시 아침 일찍이어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 일어나 이스라엘 지파를 나아오게 했듯이 주님은 우리를 아침 일찍 나아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백성의 수를 세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백성 앞에서 아이로 올라가매](수8:10). 사역은 아침 일찍 시작되어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보여 준 것처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역 역시 아침 일찍 시작됩니다. 우리는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주님과 친교의 시간을 갖고,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오 [주] 우리 하나님이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지배하였사오나 우리가 주를 힘입어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13). 이들은 그동안 주 하나님이 아닌 다른 주들의 지배를 받았음을 고백합니다. 이 말은 다른 민족들의 지배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역사상 이스라엘만큼 오랫동안 많이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은 족속은 없을 것입니다. 재판관기를 보면 그들은 반복적으로 이방민족의 지배를 받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앗시리아, 바빌론의 지배를 받습니다. 또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지난 2000년 동안 다른 주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배를 거부했습니다.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말한 모든 것에서 그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자기들을 통치하지 못하게 하려 하였기 때문이니라.](삼상8:7).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이 소리를 지르되, 없애 버리소서, 없애 버리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하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 하매 수제사장들이 대답하되, 카이사르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요19:15). 이들은 이런 역사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한번도 남의 종이 되어 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그분께 대답하되, 우리는 아브라함의 씨라. 결코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네가 어찌하여, 너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하매](요8:33). 이 말은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는 무지요, 거짓말이었습니다. 이들은 이 말을 하는 당시에도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영적으로는 죄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년 왕국이 오면 정치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완전한 독립과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주의 죽은 자들은 살겠고 그들이 나의 죽은 몸과 함께 일어나리이다. 흙 속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할지어다. 주의 이슬은 풀잎의 이슬 같사오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어 놓으리로다.](19). 이것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한 노래입니다. 구약 성도들은 신약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몸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이사야 자신도 부활을 확신했습니다. 25:8-9절에서 이미 살펴본 것과 같습니다. 몸이 죽어 흙 속에 묻혀 있는 것을 가리켜 ‘흙 속에 거하는 자들아’라고 말합니다. 흙 속에서 죽은 것이 아니고 흙 속에 거하기 때문에 마치 이슬이 내리고, 비가 내리면 땅 속에 있던 씨앗들이 자라 열매를 맺음같이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 이슬은 생명의 부활을 주는 이슬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같이 자라겠고 레바논같이 뿌리를 뻗으리라.](호14:5). 땅속에 있는 씨앗이 이슬을 받아 싹을 내듯이 땅 속에 죽은 자들은 주의 이슬을 통해 일어납니다. 매일 저녁과 아침마다 내린 이슬을 통해 꽃과 풀, 나무가 자라듯이 성도들 역시 이런 이슬을 받아 영적 성장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 죽었던 영이 부활한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내 가르침은 내리는 비요, 내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내리는 가는 비요, 풀밭에 내리는 소나기로다](신33:2). 누구라도 주의 말씀을 받아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민족 역시 이 지상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오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들을 열고 너희로 하여금 너희 무덤들에서 나오게 하며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겔37:12). 이 예언은 1948년 이스라엘의 국가 건설과 함께 어느 정도 성취되었지만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약속의 땅의 절반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천년 왕국이 되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모든 땅이 유대인들의 손에 돌아갈 것이며,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의 귀환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아, 올지어다. 너는 네 방들로 들어가 네 문들을 닫고 격노가 지나가기까지 잠시 숨을지어다.](20). 주님은 잠시 동안 숨으라고 하셨습니다. 잠시 동안이란 말은 대환란 기간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잠시 동안 숨어야 합니다. 잠시 후면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 복음 16:16-19에는 ‘조금 있으면’(a little while-잠시 동안)이란 말이 무려 일곱 번나옵니다. 이 말은 대환란을 표현하는 말입니다(21절을 볼 때 분명하다).

27장입니다. ‘그날에’(1)라고 시작하는 이 장 역시 대환란에서 천년 왕국까지의 예언을 다루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날에’ 리워야단을 벌하시고,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리워야단과 용을 실제로 보지 않고 상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명한 주석가들 역시 이것은 실제 존재하는 생물이 아니라 문학적 상징 정도로 여겼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이해되지 않거나 믿기 어려운 것들은 다 상징이나 비유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본문의 리워야단은 성경 전체에서 총 4번 나옵니다(욥41:1, 시74:14, 104:26). 하나님은 욥에게 리워야단에 대해서 너무나 자세하고 상세하게 설명하셨기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첫째, 그는 모든 높은 것을 바라보는 자요, 모든 교만한 자들의 왕입니다(욥41:34). 둘째, 그는 두려움 없는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욥41:33). 이 지상에 두려움없는 피조물은 없습니다. 그러나 리워야단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셋째, 리워야단은 머리가 여러 개 있습니다(계12:1-6, 시74:14). [리워야단의 머리들을 산산조각 내시고 그를 광야에 거하는 백성에게 먹을 것으로 주셨으며](시74:14). 넷째, 리워야단은 구부러진 뱀이요, 꿰뚫는 뱀입니다(사27:1). 용, 비히못, 사티로스, 리워야단, 유니콘 등은 킹제임스 성경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동물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실재 존재하는 존재들이며, 결코 상징이 아닙니다. 용은 사탄을 가리키며, 용들은 마귀들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이들을 벌 주시고, 죽이실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역시 ‘그날에’라고 말합니다. [그날에 너희는 붉은 포도즙의 포도원을 두고 노래할지어다.](2). 이는 심판의 피를 의미합니다. 이사야63:1-3을 참고할 것. 주님은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데려 오심으로 경배와 찬양을 받으실 것입니다(13).

28장입니다. 주님은 에브라임(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해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교만했기 때문입니다(1). 이 역시 ‘그날에’ 있을 일입니다(5). 5-6절은 주님은 남은 자들에게 자신이 무엇이 되실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만군의 [주]께서 자신의 백성의 남은 자들에게 영광스런 왕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왕관이 되실 것이요, 재판하려고 앉은 자에게는 판단하는 영(靈)이 되시며 싸움을 돌이켜 성문에 이르게 하는 자들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5-6). 첫째, 주님은 남은 자들에게 영광스런 왕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왕관이 되십니다. 둘째, 주님은 재판하려고 앉은 자들에게 판단하는 영이 되십니다. 셋째, 싸움을 돌이켜 성문에 이르게 하는 자들에게는 힘이 되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주님이 성도들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무엇이 되시는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이 되시는가? 아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주님은 왕관을 주실 뿐만 아니라 왕관이 되십니다. 주님은 판단력을 주실 뿐만 아니라 판단하는 영이 되십니다. 주님은 용기와 담력, 힘을 주실 뿐만 아니라 힘이 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사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별(聖別)과 구속(救贖)이 되셨으니](고전1:30)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양들에게 목자가 되시고, 주린 이들에게 생명의 빵이 되시고, 눈먼 자에게는 빛이 되시며, 연약한 자에게는 힘이 되시고, 죄인들에게 의가 되시고, 어리석은 자들에게 지혜가 되시며, 더러운 자에게 성별이 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의 모든 것(all in all)이 되십니다(고전12:6, 15:28, 엡1:23).

7-8절은 오늘날 배교한 교회들의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잘못하며 제사장과 대언자도 독주로 인하여 잘못하고 포도주에 잠기며 독주로 인하여 길에서 벗어났도다. 그들이 환상을 볼 때에 잘못하며 재판할 때에 걸려 넘어지나니 이는 모든 상이 토한 것과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여 깨끗한 곳이 없기 때문이로다.](사28:7-8). 이스라엘이 그러했듯이 오늘날 교회 역시 잘못하고 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제사장과 대언자가 독주와 포도주를 마시는 세상이라면 일반 백성들은 어떠했겠습니까? 목사와 집사들이 술을 먹고 마시고 취할 정도면 교인들은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오늘날 교회의 타락한 모습은 타락한 목사들의 책임인 동시에 타락한 성도들의 책임입니다. 타락한 성도들은 건전한 진리의 교리를 견디지 못합니다. [이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선생들을 쌓아 두고](딤후4:3). 성경적인 설교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근본, 정통, 분리, 성별, 보수를 주장하고 설교하는 목사들은 강단에서 밀려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보이는 반응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우리에게 바른 것들을 대언하지 말라.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보지 말라, 하고 대언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들을 대언하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들을 대언하라.](사30:10). 오늘날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설교하지 못합니다. “너희 행실을 탐욕이 없게 하고 너희가 가진 것들로 만족하라.”(히13:5)고 설교하지 못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모두 박해를 받으리라’고 설교하지 못합니다. 이런 설교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교회를 나오고 성경대로 믿으면 참으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포기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감히 요구하는 설교를 못합니다. 그러다 보면 죄에 대한 책망은 사라지고 성공과 행복에 대한 설교만이 강단을 울리게 됩니다. 둘째,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말라. 이제 정도가 더 심해져서 아예 성경적인 설교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찾아다니며 이르기를, 네가 우리 손에 죽지 아니하려거든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말라, 하는도다.](렘11:21). 이런 때는 매우 악한 때임에 틀림없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땅에는 주의 이름으로 설교하는 자체가 불법인 시대가 올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하는 자체가 불법인 시대가 올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인 믿음이 없이, 성경에 대한 믿음이 없이도 교회에 나옵니다. 이들은 설교 시간에 성경 이야기하는 것보다 세상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 주는 만담을 듣고 싶어합니다. 이런 추세로 나가면 정말 믿음을 소유한 성도들은 영적으로 기갈이 들리고, 속 사람이 피폐해지고 맙니다. 셋째, 대언하지 말라. 이제 정도가 더 심해져서 아예 대언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나사르 사람들에게 포도주를 주어 마시게 하고 대언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대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암2:12). 그들은 목회자들에게 술을 주어 마시게 하고, 완전히 동화되기를 요구합니다. 종교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회유합니다. 교회 밖에서 어떤 목사님을 만난 성도가 슬며시 이렇게 묻습니다. ‘목사님, 오늘은 아는 성도도 없는데 술이나 한잔하시죠? 저는 목사님이 술을 마시든 골프장에 가시든, 카지노에 가시든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목사님도 남자고, 사람 아닙니까?’라며 ‘저한테는 설교하지 마세요.’라고 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갈수록 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재앙, 그들에게 임한 모든 심판이 주의 말씀을 듣지 않은 데서부터 온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레미야 22:21, [네가 형통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너는 이르기를,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내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한 것 곧 그것이 어려서부터 네 습관이라.](렘22:21). 한번도 묵상과 경건의 훈련을 해 본 적이 없고, 주의 뜻대로 살아 보려는 몸부림조차도 없었던 성도들이 교회의 주류가 되고 다수가 되어 버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하려고 부단히 주의를 기울이고, 주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9-13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오늘날 저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성경 공부 방법이며, 영적 성장에 관한 것입니다. [그분께서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시려는가? 그분께서 누구에게 가르침을 깨닫게 하시려는가? 젖을 떼고 품에서 물러난 자들에게로다. 이는 반드시 훈계 위에 훈계가 있어야 하며 훈계 위에 훈계가 있어야 하고 줄 위에 줄이 있어야 하며 줄 위에 줄이 있어야 하되 여기에도 조금 저기에도 조금 있어야 할 것임이요, 또 그분께서 더듬는 입술과 다른 언어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실 것임이라. 그분께서 이 백성에게 이르시되, 이것이 안식이니 너희가 피곤한 자로 하여금 이 안식으로 안식하게 하라. 이것이 상쾌함이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고자 하지 아니하므로 [주]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하여/ 훈계 위에 훈계가 되며 훈계 위에 훈계가 되고 줄 위에 줄이 되며 줄 위에 줄이 되고 여기에도 조금 저기에도 조금 있게 하사 그들로 하여금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올무에 걸려 붙잡히게 하셨느니라.](9-13). 주님은 갓 태어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식을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누구나 다 영적으로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갓난아이들은 순수한 말씀의 젖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여 이 젖으로 자라가도록 하라. 너희가 {주}의 은혜로우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2:1-3). 어린아이에서 자라가면 단단한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영적 아이들만 넘치는 교회는 다툼과 분쟁과 시기가 끊이지를 않습니다.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아이들이 크는 것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이기 때문에 다투고 싸웁니다. 아이들이기 때문에 시기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에게 말하는 것같이 하였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단단한/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지금까지 너희가 그것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지금도 못하기 때문이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어찌/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처럼 걷는 것이 아니리요?](고전3:1-3). 교회에 아이들이 매우 적고 어른들이 많다면 아이들은 능히 통제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아이들이고, 어른이 한 둘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육신은 나이가 들면, 세월이 흐르면 저절로 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나이가 든다고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시간으로 보았을 때는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영적 연령은 어린아이인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히브리서 5:12-14 [이는 시간으로 보건대 너희가 마땅히 가르치는 자가 되었어야 할 터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원리인 것들을 남에게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 너희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자가 되었나니](히5:12). 평생 동안 구원의 교리 한 가지만 알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그것마저도 불분명한 사람들이 교회에 즐비합니다. 젖을 사용하는 자들은 다 어린아이입니다. 이들은 은혜의 말씀, 선한 말씀은 좋아하지만 의의 말씀에는 능숙하지 못합니다. [이는 젖을 사용하는 자마다 갓난아이이므로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한 자로되](히5:13). 어린아이들은 선악을 이성적으로 분별하는 판단력보다 좋고 나쁨의 감성에 따라 판단합니다. 그들은 옮고 그름,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없습니다.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의 차이를 말하면 ‘그게 뭐가 다른데...’ 이런 식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것과 하나님 중심적인 것, 성경적인 것과 비성경적인 것에 대한 분별력이 없습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의 것입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니 그들은 곧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4).

다시 본문을 보십시오(사28:9-13). 주님은 이들에게 훈계 위에 훈계를 줄 위에 줄을 있게 하시며, 여기에서도 조금 저기에서도 조금 취하셔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공부할 때 항상 이런 식으로 공부합니다. 성경을 여기서 찾고, 저기서 찾아 공부하는 것은 성경을 공부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렇게 능숙하게 되면 이를 통해 안식을 얻고 상쾌함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지 않으면 뒤로 넘어져 부러지고, 올무에 걸려 붙잡히게 됩니다(사28:13).

14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말씀에 걸려 넘어진 자들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들은 사실상 ‘사망과 언약을 맺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대신 마귀의 약속을 믿습니다. 하지만 사망과 맺은 언약은 취소되며, 그것으로 인해 짓밟히게 됩니다(18).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쾌락의 종노릇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사망과 언약을 맺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그것으로 인해 망합니다.

16절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위대한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로 삼으리니 곧 단련한 돌이요, 보배로운 모퉁이돌이며 견고한 기초로다. /그것을/ 믿는 자는 다급하지 아니하리로다.](16). 예수님은 시온의 기초이십니다. 교회의 반석이십니다(고전3:11, 벧전2:6,8; 마21:42,44, 엡2:20).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도 다급하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29장입니다. 1절에 보면 아리엘에 대한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아리엘은 하나님의 사자(lion)란 뜻입니다. 아리엘은 다윗의 도시라고 불렸는데, 이는 곧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주님은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부어 주셔서 성경은 봉인된 책과 같이 되었습니다(10-11). 주님은 배교하고 타락한 사람들에게 어떤 영을 보내시는지 전에 자세히 살펴 본 적이 있습니다. 악한 영, 거짓말 하는 영, 비뚤어진 영을 보내십니다. 주님은 대언자들과 선견자들, 치리자들에게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보내심으로써 이들은 성경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11-12절은 성경에 관한 한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책이 되어 버린 비참한 상황입니다. 성경은 원어를 모르면 이해할 수 없어. 성경은 고대 사회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어. 성경은 고고학적 지식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어...성경은 최소한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영어, 독어 등 5개 국어 이상에 능통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사람들은 성경을 더 모릅니다. 히브리어로는 이런 뜻인데 헬라어는 이렇게 되어 있고, 라틴어는 또 다른단 말이야...이렇게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영어 역본끼리도 또 다릅니다. 그렇다면 누가 성경을 이해하는가? 18-19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귀먹은 자들이 그 책의 말씀들을 들을 것이요, 눈먼 자들의 눈이 어둡고 캄캄한 데서 볼 것이며 온유한 자들도 스스로 더 많이 [주]를 기뻐하겠고 사람들 가운데 가난한 자들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기뻐하리니](18-19). 주님은 귀먹은 자들이 그 책의 말씀을 들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눈먼 자들이 볼 것입니다. 온유한 자와 가난한 자들이 성경을 알게 되고, 주님을 기뻐합니다. 성경을 이해하고 아는 것은 학식의 유무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임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을 읽는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원어를 전혀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고, 영이 가난한 자들은 영적 보화들을 한없이 쌓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으로 이스라엘이 받을 가장 큰 복 가운데 하나는 24절입니다. [영으로 잘못하던 자들도 깨닫게 되고 불평하던 자들도 가르침을 받으리라, 하셨느니라.](24). 깊이 잠든 영이 거두어지고 말씀을 깊이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생명이며, 부흥이며, 복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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