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이사야 52:1- 53:12
요절: 이사야 53:5
52장은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기사입니다. 1-5절은 주님이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을 말씀해 주셨는데 주님은 네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① 깰지어다 ②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③ 티끌을 버릴지어다 ④ 목의 굴레를 스스로 풀지어다(1-2).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동일합니다. 주님은 성경을 믿는 성도들에게 깨어나라 말씀합니다. 성도들은 깨어 믿음에 있어야 하고, 깨어 기도해야 하고, 깨어 마귀를 대적해야 하며, 의에 대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이 잠에서 깨어야 할 때라고 말합니다. [또한 때를 알거니와 지금이 잠에서 깨어야 할 바로 그때이니 이는 지금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보다 가깝기 때문이라.](롬13:1). 주님은 우리에게 시온이나 우리나 모두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너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주시리라, 하시느니라.](엡5:14). 이런 권면은 성경에 너무 많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기도 중에 감사를 드리며 깨어 있으라.](골4:2).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잠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자.](살전5:6). 우리는 항상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시온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의의 옷을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옷차림은 모두 우리의 속 사람에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의 겉 사람의 옷 모습은 단정한 옷이면 됩니다. 디모데전서 2: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한 옷으로 자기를 꾸미되 얌전하게 맑은 정신으로 하고 장식한 머리나 금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으로 하지 말며](딤전2:9). [너희가 단장(丹粧)하는 것은 머리를 땋고 금으로 치장하며 옷을 차려 입는 외적인 단장으로 하지 말고](벧전3:3).
성경이 말하는 아름다운 옷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빛의 갑옷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 둘째,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오직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육신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롬13:14). 그리스도 안에서 침례를 받으면 됩니다. [또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음이라.](갈3:27). 셋째, 장차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옷 입게 됩니다. [우리가 이 장막에서 신음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옷 입기를 간절히 원하노니](고후5:2). 넷째, 긍휼히 여기는 심정, 친절, 겸손한 마음, 온유함, 오래 참음으로 옷 입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요,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로서 긍휼히 여기는 심정과 친절과 겸손한 마음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골3:12).
“티끌을 버릴지어다.”란 말은 더러움을 내어버리란 말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누룩을 내어 버리라, 더러움을 내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룩함, 깨끗함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 약속들을 가졌은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접붙여진 말씀 곧 능히 너희 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1:21).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고전5:7).
“목의 굴레를 스스로 풀지어다”란 말은 속박의 멍에를 메지 말고 자유를 누리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그 안에 굳게 서고 다시는 속박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며 살되 자유를 악의 도구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너희에게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를 악을 가리는 도구로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들로서 행하라.](벧전2:16). 성도들은 자유를 악의 도구로 사용하거나 죄를 짓는데 쓸 때 부패의 종이 된다는 뜻이며, 죄의 종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자유를 약속하나 정작 자기 자신은 부패의 종이 되었으니 이는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라.](벧후2:19). 이스라엘은 아무 것도 받지 않고 자신을 팔았고(3), 아무 것도 받지 않고 자신을 잡혀갔습니다(5). 이들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은 계속해서 모독을 받았습니다(5).
7절은 전도자의 직분에 대한 말씀입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고 화평을 선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고 구원을 선포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네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7).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에게 적용했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그들이 어찌 선포하리요? /이것은/ 기록된바, 화평의 복음을 선포하며 좋은 일들의 반가운 소식을 가져오는 자들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함과 같으니라.](롬10:15). 발은 신체 각 부분 중에서 가장 더러움을 많이 타는 지체입니다. 특히 먼지가 많고 샌들을 신고 다녔던 중동 지방에서 발은 너무나 쉽게 더럽혀졌습니다. 덕분에 발은 신체 어느 부분보다도 더 자주 씻겨졌습니다. 주님께서 허리 숙여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는데, 이는 제자들의 신체 부위 가운데 주님의 가장 극진한 사랑과 섬김을 받았던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섬기는 종의 정신을 본으로 보이셨는데, 이 때 온 몸이 깨끗한 자는 발밖에 깨끗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온 몸이 깨끗하니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요13:10). 이렇게 더럽혀지기 쉬운 발이라도 좋은 소식을 가져오고, 화평을 선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고, 구원을 선포한다면 그는 하나님이 감탄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발이 됩니다. 우리의 가장 연약하고 더러운 것을 주님을 위해 사용할 때 그것은 가장 존귀하고 아름다운 지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더 약하고, 천하고, 형편없는 것을 존귀하게 쓰시는 분이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 종이 슬기롭게 행할 것인즉 높임을 받고 격찬을 받으며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13). 내 종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슬기롭게 행한다는 말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이름 위에 가장 높은 이름으로 주셨습니다(빌2:9,10). 14절은 초림의 예수 그리스도, 15절은 재림의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의 얼굴이 누구보다도 더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의 아들들보다 더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너로 인하여 놀랐느니라. 그러므로 그가 많은 민족들을 헤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자기 입을 다물리니 이는 그들이 지금까지 전해 받지 못한 것을 볼 것이요, 지금까지 듣지 못한 것을 깊이 생각할 것임이라.](14-15). 주님은 슬픔의 사람이며, 많이 상한 얼굴이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한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상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상하고 있음을 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한 분이시지만 수많은 적그리스도들이 이 세상에 나와 있듯이, 성경은 하나이지만 수많은 거짓 성경들이 시중에 나와 있습니다(요일2:18, 요이7절 참조).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이요, 같은 아브라함의 씨라고 일컬어지는 유대인들에 의해 예수님의 얼굴이 누구보다 더 상하셨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셨듯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인 성경은 소위 근본주의자들이라고 하는 교단의 신학자들과 목사들과 비평가들에 의해 그 진실성에서 너무나 손상을 당한 결과 과연 어느 것이 진짜 성경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53장은 왜 그분의 얼굴이 그토록 상했는지 잘 나옵니다. 이 장은 구약 전체에서 시편 22편과 더불어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시는 모습이 가장 정확하게 예언되어 있는 곳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신약 성경과 정확한 일치를 보임으로써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저와 여러분의 탄생 장소입니다. 들에서 나는 모든 식물이 태어나고 자라나는 장소 그 자리는 바로 알갱이가 죽은 무덤의 장소입니다. 밀밭의 모든 밀은 한 알 한 알 죽은 밀의 무덤에서 피어납니다. 저와 여러분의 무덤은 바로 갈보리 십자가요, 그곳이 저희들의 태어난 탄생 장소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보고(report)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계시되었느냐(revealed)?](1-KJV 직역). 이사야를 비롯한 구약의 모든 대언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다가올 고난과 영광을 부지런히 탐구했습니다(벧전1:10). 하지만 유대인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일반 백성들은 구약의 대언자들이 미리 말하고 기록한 보고를 믿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누가 믿었으며, 누구에게 계시되었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계시되었으며, 저와 여러분이 믿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과 선배들이 이 사실을 믿었던 반면, 수 십억의 인간들이 이 보고를 무시하고 믿지 않았으며, 지금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이사야 대언자는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주 앞에서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랄 것임이라. 그에게 /고운/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2).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보잘 것 없었습니다. 인간적인 매력도, 흠모할 만한 덕망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화술도 없었습니다. 그분의 지상 생애의 모습은 샤론의 꽃도 레바논의 백향목도 아니었습니다. 하다 못해 진달래도 되지 못했습니다. 연한 싹,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이것이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고통과 슬픔의 사람이어서 얼굴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놀랐듯이 그의 용모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의 아들들보다 더 상하였도다.”(사52:14). 30대 초반의 예수님을 50세로 알아 볼 정도였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이 주께 말하기를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하니”(요8:57).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는 앞이 9가닥으로 갈라진 채찍에 70대나 맞으셔서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내어 주고 머리털을 뽑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어 주며 수치와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도다.](사50:6).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가장 낮은 종의 형체를 입으셨습니다. 모양도 장엄함도 없으시고, 흠모할 아름다움도 없으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의 이런 모습 외에 더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단지 위대한 사상가, 민중의 혁명가, 기독교의 창시자, 4대 성인의 한 사람으로만 생각할 줄 알지, 인간의 죄 때문에 맞으시고, 죽으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니 참으로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분을 더 이상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 계시로 주어진 지혜와 지식이 아니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고,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소위 신학교에서 신론, 인간론을 가르치는 교수들이라는 사람들이 예수를 인간으로만 가르치며 주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좀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운운하며 그의 사상이 어쩌고저쩌고 하며 지껄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를 위해 죄와 저주가 되신 구원자로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육신을 따라 안 결과이거나 무지에 따른 결과입니다.
[그는 멸시를 당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우리는 그를 피하려는 것같이 우리의 얼굴을 감추었으니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3). 예수님은 멸시를 당하고, 버림받았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섭리와 돌보심 가운데 살았던 유대인들조차 주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생아요, 단지 인간일 뿐이라며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제일 싫어하는 행위가 무엇입니까? 누가 올 때 얼굴을 싹 돌려버리고 안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사람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그를 피하려는 것같이 우리의 얼굴을 감추었으니] 사람들은 주님을 마치 못 볼 사람이나 문둥 병자나 무서운 전염병자나 흉악범을 보듯이 얼굴을 숨긴 것입니다. 예수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인간들에게 못된 짓을 했습니까? 왜 사람들에게 멸시받아야 하며, 사람들은 왜 멸시해야 합니까? 여러분은 이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으십니까? 이것은 본능적인 죄성 때문입니다. 박쥐가 빛을 싫어하듯이, 도둑놈이 경찰을 싫어하듯이, 죄인들은 그런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합니다. 이것은 죄인들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그는 참으로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찔림을 받고 하나님께 맞아 고난 당한다, 하였노라.](4).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고통의 원인과 목적에 대해서 의심의 여지를 두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고통, 우리의 슬픔을 졌다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받으신 고난은 우리의 고통과 우리의 슬픔이었고, 주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해결해 놓으심으로 믿는 모든 자들의 고통을 감당하셨으며, 성령의 위로와 소망을 통해 모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믿는 여러분 가운데 고통과 슬픔이 있습니까? 이 시간 우리의 고통과 우리의 슬픔을 지고 가신 주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나의 빚을 해결해 주었는데 아직도 빚 걱정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특별 사면 받은 죄수가 남은 징역살이 걱정을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믿는 여러분들의 삶은 고통과 슬픔대신 기쁨과 화평이 넘칩니다. 반면 믿지 않는 자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예수, 자기가 잘못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놓고 구세주래!”, “젊은 나이에 너무 튀다가 당시의 기득권층의 눈밖에 나서 희생양이 되었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찔림은 우리의 범죄들로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불법들로 인함이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5).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그러나,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그러나 그가 찔림은 우리의 범죄들로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불법들로 인함이라. 사람들이 무엇이라 생각하고, 무엇이라고 믿든지 간에 주님께서 찔리시고, 상하신 것은 우리의 범죄들, 우리의 불법들로 인한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오.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범죄들과 불법들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죄없는 삶을 사신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끔찍한 십자가형을 당하셔야 했는지 그 이유를 완벽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대속(代贖)하셨으니 이는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는 다 저주받은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벧전2:24).
◆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6). 성경은 우리를 양같이 길을 잃어 각자 자기의 길로 돌이켰다고 합니다. 양은 극도의 근시이기 때문에 시력이 1m가 되지 않습니다. 양은 시력이 아닌 청력으로 목자를 따라 가는 동물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잃을 때 즉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자기 마음대로 길을 가는 것이 양의 특징입니다. 고집이 아주 세기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지 않습니다. [자기의 길]- 이것은 오늘날 청년들에게 늘 가르치는 세상의 철학입니다. 나의 길이란 My way란 노래가 얼마나 인기가 좋은지 아실 것입니다. “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길이 있으나, 그 끝은 죽음의 길이니라.”(잠14:12). 십자가의 길을 제외한 모든 길은 결국 사망이란 관문을 통과하여 지옥으로 가는 잘 닦인 고속도로에 불과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는 모든 길은 [각자 자기의 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주님께 지우셨습니다. [우리 모두의 불법]이란 말에 유념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모두 다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란 세상에 태어난 사람 모두를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의 모두의 죄악을 다 주님께 지우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죄는 이미 십자가 위에서 다 해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이런 말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다 졌으면 안 믿어도 구원받겠네!’ 그런 생각하시는 분 안 계십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이 지옥가는 이유는 살인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간음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도적질하거나 우상 숭배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이 지옥가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요](요16:9), 정죄를 받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아니하거니와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이미 정죄를 받았느니라.](요3:18). 여러분, 여러분이 구원받고 나서 하신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여, 제가 그동안 주를 믿지 않고 살아온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해 보지 않으신 분 계십니까? 주를 믿지 않고 사는 것이 죄인 줄 아는 사람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을 아직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 자리에 처음 나오셨거나 아직 교회는 다니지만 구원받은 확신이 없는 분들은 자신의 죄악을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침례인 요한은 주님을 한 눈에 알아보고 이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taketh away-빼앗아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죽음의 원인이었던 죄, 하나님과 원수되게 만들었던 죄, 마귀의 종노릇하게 만들었던 죄, 바로 이 죄를 주님께서 친히 지고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죄를 자신의 몸에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 상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는 순교자의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죄 덩어리로 메달려 저주의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가 학대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였어도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도살장으로 향하는 어린양같이 끌려가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7). 지금 예수 그리스도는 고통받는 가운데서도 죽음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마치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은 모습으로 예수님은 이리 저리 끌려 다니셨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 끌려갔다가 빌라도에게 왔다가 헤롯에게로 넘겨졌다가 다시 빌라도의 법정에 서서 채찍에 맞으시면서도 아무 말이 없으셨습니다. 이 모습은 영락없는 털 깎는 자들 앞의 양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본래 순종과 복종에는 말이 없는 법입니다. 이유가 많고 말이 많은 것은 모두 불순종입니다.
[그가 감옥에도 가지 못하고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밝히 드러내리요? 이는 그가 산 자들의 땅에서 끊어졌으며 내 백성의 범죄로 인하여 매를 맞았음이라.](8). 이사야는 1절에서 누가 믿었느냐? 누구에게 계시되었느냐?고 물은 뒤에 이번에는 누가 그의 세대를 밝히 드러내리요?라고 묻습니다. 누가 이 사실을 전파해야 합니까? 먼저 믿은 사람들이 전파해야 합니다. 주님은 감옥에도 가지 못하고, 공정한 재판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주님은 굴욕 중에 부당한 재판을 받았습니다(행8:33). 하지만 아무도 의의를 제기하거나 변호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도망쳐 버렸습니다. 누가 그의 세대를 선포하겠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죽었고, 옆구리에 창이 찔려 물과 피를 다 쏟아 놓으셨습니다. 모든 죽음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특히 십자가형으로 죽는 사람은 죄명이 있습니다. 억울하게 죽었다해도 사연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 백성의 허물로 인하여 형벌을 받아 죽은 사람’은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 외에 아무도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아직 힘이 없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음이라. 의로운 사람을 위하여 죽는 자가 거의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하여 용감히 죽고자 하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롬5:6-8).
[그가 사악한 자들과 더불어 자기 무덤을 만들었으며 죽어서는 부자와 함께하였으니 이는 그가 폭력을 행사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속임수가 없었음이라.](9). 성경은 예언의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미리 기록된 역사 책이라고 합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700년전에 이미 예수님의 탄생뿐만 아니라 그의 묘자리까지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회원이었던 부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만약 예언이 없다면 우리는 정말 불빛없는 깜깜한 밤을 걷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리 다 예언되어 있으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밤에 헤드라이트는 무엇하러 켜고 달리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가로등 불빛은 무엇 때문에 보고 걸으며, 불은 왜 켜는지 물어 보십시오. 앞을 볼 수 없다면 구덩이에 빠지고 자빠지고 목적지를 갈 수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란 확실한 예언의 등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늘 빛 가운데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몇 천년 동안 펼쳐질 역사를 환히 내다보고 있으며,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다 내다보고 있습니다. 성경의 예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성경을 참으로 믿기 어려운 책이라고 하지만 성경의 예언을 아는 사람은 안 믿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가 상함 받는 것을 기뻐하사 고통을 받게 하셨은즉 주께서 그의 혼을 죄로 인한 헌물로 삼으실 때에 그가 자기 씨를 보며 자기 날들을 길게 할 것이요, 또 [주]의 기뻐하시는 일이 그의 손에서 형통할 것이며 그가 자기 혼이 해산의 고통을 치른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기리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리니 이는 그가 그들의 불법들을 담당할 것임이라.](10). 이 말씀은 잘 읽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하게 하고 고난에 두는 것을 즐겼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하신 사역이 완전히 성취되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고, 죄가 완전히 속해 진 십자가의 죽음의 사역을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의 혼을 속죄 제물로 만드셨다는 말씀은 주님의 죽음이 도덕적인 종교적인 죽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죄로 인한 죽음이란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냥 단순히 희생 정신이나 사랑이 아니라 대속을 위한 제물로 자신을 내어 놓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한 결과 주님이 받을 수 있는 보상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씨를 봅니다. 즉 자신의 죽음을 통해 수 많은 사람들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된 자신을 본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날들을 늘린다는 것은 부활을 말합니다. 그래서 수 많은 주의 자녀들을 얻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로 하여금 위대한 자들과 몫을 나누게 하며 강한 자들과 노략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혼을 쏟아 부어 죽기까지 하며 범죄자들과 함께 계수(計數)되었음이니라.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들을 위하여 중보(仲保)하였느니라.](12). 위대한 자들, 강한 자들은 이 세상의 정사와 권세들을 일컫는 말입니다(골2:15).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의 집에 들어가 그의 재산을 노략하겠느냐? 그 강한 자를 결박한 뒤에야 그의 집을 노략하리라.](마12:29, 막3:27, 눅11:22참조)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십자가를 통해 마귀를 멸하시고(히2:14). [자녀들은 살과 피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에 참여하셨으니 이것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히2:14). 정사와 권능들을 노략하시며, 십자가에서 그들을 이기시며, 지하의 아브라함의 품에 있던 구약 성도들을 이끌어 하늘로 데려가신 사건을 말합니다. 또한 믿는 자들을 모두 어둠의 권능에서 아들의 왕국으로 옮기신 사건을 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능에서 건져 내사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왕국으로 옮기셨으니](골1:13).
죽기까지 순종한 신실한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보상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가장 낮은 자로 오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교회를 얻었으며, 가장 존귀한 이름을 얻습니다. 이 땅을 천년 동안 주의 주요 왕의 왕으로서 통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주님은 생명 자체이시면서도 죽음에 이르셨으며, 흉악한 강도들 사이에 못 박혀서 강도들 중의 한 명으로 취급당하셨습니다. 마지막 소절은 다시 복음을 정립하고 있습니다. 그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지며-이것이 대속입니다. 범죄자들을 위하여 중보를 하였음이라- 주님께서는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으셨으나 범죄자들을 위해서는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분의 옷을 나누어 제비를 뽑고](눅23:34)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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