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이사야 58:1- 61:11
요절: 이사야 59:16
58장은 거짓 경배와 참 경배의 차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1-5절은 위선적인 거짓 경배를 드리는 이스라엘의 죄입니다. 하나님은 대언자에게 이들의 죄를 보여 주라고 외치며, 보여 주라고 하셨습니다(1). 이들의 죄는 위선입니다. 2절을 보면 이들은 모범적인 신앙의 모델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렇게 보여주기 위한 신앙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보편적인 일상 생활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보여 주듯이 위선자들은 겉보기에는 흠잡을 것이 없습니다. 의를 행하고, 기도하고, 날마다 주를 찾아 성전에 나오고, 금식합니다(2-3). 또 주님께서 자신들의 수고와 행위를 알아주시도록 요구합니다(3).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마치 의를 행하며 자기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한 민족과도 같이 날마다 나를 찾아서 내 길들 알기를 즐거워하나니 그들이 정의의 규례를 내게 구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는 것을 즐거워하는도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금식하였으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우리 혼을 괴롭게 하였으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는도다. 보라, 너희의 금식하는 날에 너희가 쾌락을 구하며 너희를 위하여 모든 수고를 강요하는도다.](2-3). 위선자들은 위선을 행하면서 심판을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보상을 바랍니다. 주님은 이런 위선자들을 매우 싫어 하셨습니다. 위선자들의 행동 패턴을 이렇습니다.
· 위선자들은 구제를 하되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합니다(마6:2).
· 위선자들은 기도할 때 길게 기도하며 역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합니다(마6:5). 골방에서 은밀한 기도의 능력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 하나님과 은밀한 교제를 누리지 못한 사람들은 늘 사람들 앞에서 길게 기도하는 법입니다.
· 위선자들은 금식을 하되 슬픈 표정을 짓고 자기 얼굴을 흉하게 합니다. 자신이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인정받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마6:16).
· 위선자들은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봅니다(마7:5).
· 위선자는 입으로는 믿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멉니다(마15:8-9).
· 위선자들은 하늘의 생긴 모습은 분별하지만 시대의 표적들은 분별하지 못합니다(마16:3).
· 위선자들은 하나님을 시험합니다(마22:18).
· 위선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마22:13).
· 위선자들은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겉치레로 길게 기도합니다(마23:14).
· 위선자들은 개종자 하나를 얻어서는 두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합니다(마23:15).
· 위선자들은 율법의 모양을 율법의 정신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합니다(마23:23).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이는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음이라. 너희가 마땅히 이것들을 행하였어야 하거니와 저것도 행하지 않은 채 버려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마23:23).
· 위선자들은 밖은 깨끗이 하지만 속은 더러움으로 가득합니다(마23:25,27).
5-7절은 금식의 진정한 의미, 어떻게 행하는 금식이 참된 금식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금식은 회개의 결과로 보여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금식은 자기 혼을 낮추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번번이 금식을 했지만 바른 금식에는 실패했습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세 번에 걸쳐 물으셨습니다. [이러한 금식이 내가 택한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 혼을 괴롭게 하는 날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갈대같이 자기 머리를 숙이고 자기 밑에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이겠느냐? 너는 /과연/ 이것을 금식이라 하겠으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날이라 하겠느냐?](사58:5). 대답은 전부 ‘아니다’입니다. 마음에 애통함과 슬픔이 없는 금식은 금식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회개와 돌이킴이 없는 금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함이 없는 금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매해 두 번씩 금식 절기를 정해두고 금식하는 이스라엘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백성들과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가 그 칠십 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곡하였거니와 그 금식한 것이 조금이라도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슥7:5). 오늘날 금식하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물으실 것입니다. [...그 금식한 것이 조금이라도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그렇지 않다면 그런 금식은 아무 소용이 없는 금식입니다.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그들이 번제 헌물과 봉헌물을 바칠지라도 내가 그것들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오히려 칼과 기근과 역병으로 그들을 진멸하리라, 하시니라.](렘14:12).
8-14절은 올바른 경배, 올바른 금식을 한 경우에 주어질 복입니다. 첫째, 네 빛이 새벽같이 쏟아지고(8).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의 빛이요, 빛의 자녀들입니다. 결코 어둠에 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빛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형제를 미워하면 우리 안에는 빛이 없습니다. [빛 가운데 있다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도 어둠 가운데 있는 자라.](요일2:9).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가운데 있고 어둠 가운데서 걸으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2:11).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빛은 없습니다. [/그들이/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만일 그들이 이 말씀에 따라 말하지 아니하면 그 까닭은 그들 안에 빛이 없기 때문이니라.](사8:20).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빛을 비춤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그 빛을 인해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게 해야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쏟아지고 ...](8). 10절, [네 혼을 이끌어 굶주린 자를 향하게 하며 고난 당하는 혼을 만족시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올라 네 어둠은 대낮같이 될 것이며](10). 주님께서 택한 금식을 하게 되면 우리는 빛나는 등불처럼 타오를 것입니다. 욥기에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얻게 될 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네 일생이 대낮보다 더 밝으리니 네가 빛을 발하여 아침같이 될 것이요,](욥11:17). 둘째, 건강이 신속히 솟구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바르게 행할 때 그들의 육신의 건강도 지켜주셨습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의 율법대로 살 때 질병이 없는 민족입니다. 출애굽기 15:26, [이르시되, 네가 [주] 네 하나님의 음성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고 내 눈앞에서 옳은 것을 행하며 내 명령들을 귀담아 들으며 내 모든 법규를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내린 이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치유하는 [주]이기 때문이라, 하시니라.](출15:26). 하지만 이들이 엇나갈 때 주님은 치유해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그 날에 그가 맹세하여 이르기를, 나는 치유(治癒)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겠노라. 이는 내 집에 빵도 없고 옷도 없기 때문이니 /너희는/ 나를 백성의 치리자로 삼지 말라, 하리라.](사3:7). 오늘날 치유사역자들,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참된 치유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 주께서 주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이는 내 얼굴의 건강이시요,...](시42:11).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읽고, 묵상함으로 영혼의 양식으로 삼을 때 건강해 집니다. [그것이 네 배꼽에 건강이 되며 네 뼈들에 골수가 되리라.](잠3:8). [그 까닭은 그것들을 찾는 자들에게 그것들이 생명이 되며 그들 모두의 육체에 건강이 되기 때문이니라.](잠4:22). 지혜로운 자의 혀(잠12:18), 신실한 대사(잠13:17), 즐거운 말들은 모두 건강하게 하는 최고의 영약입니다(잠16:24). 셋째, 네 의가 네 앞에서 나아가고(8). 우리는 주님을 믿는 믿음의 의가 있고, 성도로서 행위의 의가 있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할 때 우리는 아마포로 옷 입게 됩니다(계19:8). 넷째, [[주]의 영광이 네 후위대(後衛隊)가 되시리니](8). 주님은 성도들의 든든한 후위대가 되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 앞에서 우리를 이끄시는 인도자가 되시기도 하시고, 우리의 뒤를 받쳐 주시는 후위대가 되시기도 하십니다. 다섯째, 주님은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9). 우리가 부를 때 주님은 내가 여기 있다 대답해주십니다. 주님과의 바른 관계성이 없다면 우리는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은혜입니다. 여섯째, 주님께서 우리를 항상 인도하사 건강하고 열매맺게 하십니다(11). 주님을 믿고, 말씀대로 사는 자들은 가뭄 속에서도 목마름을 모릅니다. 이는 우리 안에 주님이 주신 샘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우물이 되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하리라.](요4:14). 물이 없는 곳은 푸른 초장이 될 수 없습니다. 물이 없는 곳은 생명이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우물을 주심으로 우리는 언제나 물 댄 동산 같게 됩니다. 일곱째, 건축자요 보수자가 되게 하십니다(12).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적용할 수 있습니다. 폐허가 된 땅을 다시 건축할 것입니다. 영적으로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교회를 건축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롬15:20, 고전3:10). 여덟째, 약속의 땅을 완전히 회복합니다(14). 이 구절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 사항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59장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왜 구원받지 못하는지, 왜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1-8절은 이스라엘의 범죄입니다. 1,2절은 기도에 관한 설교에서 자주 인용되는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보라, [주]의 손이 짧아져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그분의 귀가 둔하여서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너희 불법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분의 얼굴을 돌려 너희에게 숨겼으므로 그분께서 듣고자 하지 아니하시느니라.](1-2). 사람들은 자신에게 원인을 찾기보다는 다른 사람이나 외부적 환경에서 실패 요인을 찾습니다. 문제는 늘 자신이요, 자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간과한 채 이런 저런 이유를 찾다가 하나님께 불평을 합니다. 기도 응답이 없는 이유는 전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주님이 언제나 동일하시듯이, 주님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주]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이루어지는지 그렇지 아니하는지 보게 되리라, 하시니라.](민11:23). [어찌하여 내가 왔을 때에 아무도 없었느냐?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느냐? 어찌 내 손이 짧아져서 구속(救贖)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건져 낼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은즉 바다가 마르며 강들이 광야가 되어 강들의 물고기가 악취를 내나니 이는 물이 없으므로 그것이 목말라 죽기 때문이니라.](사50:2). 때로 우리의 불신은 하나님을 의심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째, 너희의 불법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1). 십자가는 죄와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고,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킵니다. 둘째, 너희 손이 피로 너희 손가락이 불법으로 더러워졌기 때문이요(2). 우리는 신체 어느 한 부위도 주님께 속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께 거룩한 산제물로 드려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손과 손가락은 더러워 질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너희 입술이 거짓을 말하고 너희 혀가 사악한 것을 내기 때문이라(2b). 주님은 차례대로 이스라엘의 죄악을 다 드러내십니다(3-8). 9-15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9절은 영적인 암흑의 이유, 10절은 걸려 넘어지고 황폐한 이유, 11절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의 괴로움, 12절은 자신들의 죄성, 13-15절은 그들의 사악함을 고백했습니다.
16-19절은 주님의 은혜로운 개입을 보여 줍니다. 특히 16절은 중보자 메시야의 필요성을 제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분께서 사람이 없음을 보시고 중보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느니라. 그러므로 그분의 팔이 그분을 위하여 구원을 가져오고 그분의 의가 그분을 지탱하였으니](16). 이 세상 사람 가운데는 중보자가 없으므로 주님은 스스로 중보자가 되셔야만 했습니다.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내가 본즉 도와 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겼노라. 그러므로 내 팔이 내게 구원을 가져왔으며 내 격노가 나를 떠받쳤느니라.](사63:5). 하나님은 이 땅에 구원을 줄만한 사람, 하나님께 중보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낳은 모든 아들들 중에서 예루살렘을 인도할 자가 없고 예루살렘이 기른 아들들 중에서 손으로 예루살렘을 이끌 자가 없도다.](사51:18). 욥기의 욥 역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우리 둘 위에 손을 얹을 중재인도 없기 때문이로다.](욥9:33). 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재자가 계십니다. [이는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기 때문이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딤전2:5). 지금 이사야 본문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초림 때의 모습이 아니라 재림 때의 모습입니다.
60장입니다. 60장은 천년왕국 때 회복된 예루살렘의 영광을 묘사해 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위에 빛을 비추시고, 이스라엘은 그 빛으로 나아옵니다. 19-21절입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광체(光體)가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밝은 광채의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요, 오직 [주]가 네게 영존하는 광체가 되고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라.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가 네 영존하는 광체(光體)가 되며 네 애곡하는 날들이 끝날 것임이라. 또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원토록 땅을 상속하리니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영광을 받으려고 내 손으로 만든 작품이라.](19-21). 천년 왕국에는 자연계의 급격한 변화가 있습니다. 땅은 저주에서 풀려 가시와 엉겅퀴 대신 많은 열매를 낼 것이며, 동물들 역시 저주에서 풀려 모두 순한 초식 동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해와 달도 마찬가지입니다. 천년 왕국 때 해는 지금보다 일곱 배는 밝아질 것입니다. 해가 밝아지면 달은 해를 반사하기 때문에 자연히 그만큼 더 밝아집니다. [또 [주]께서 자신의 백성의 터진 곳을 싸매시고 그들의 맞은 곳을 치유(治癒)하시는 날에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나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사30:26). 예루살렘에는 아예 해와 달이 빛을 낼 필요가 없어집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 둘을 대신해서 친히 그 도시의 광체가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태양과 달 대신 주님이 광체입니다. [그 도시에는 해와 달이 빛을 비출 필요가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시를 밝혀 주고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광체(光體)이시기 때문이라.](계21:23). [거기에는 밤이 없겠고 등잔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주시기 때문이라. 그들이 영원무궁토록 통치하리로다.](계22:5). 새 예루살렘에 해와 달이 필요 없다고 해서 해와 달이 사라지고 없는 것은 아닙니다(시89:36,37).
61장입니다. 61장은 이스라엘과 세상을 향한 메시야의 사역입니다. 이 구절은 주님이 처음 사역에 나서시면서 유대인의 회당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읽으신 성경 구절입니다. 1-2절과 누가복음 4:18-20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주} [하나님]의 영께서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온유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선포하게 하셨음이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이 상한 자를 싸매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감옥에 결박된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주]의 받아 주시는 해와 우리 하나님의 원수갚으시는 날을 공포하고 애곡하는 모든 자를 위로하며](1-2). 주님은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서 이 부분을 읽으실 때 다 읽지 않으시고 중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자라난 나사렛에 가사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섬기는 자가/ 대언자 이사야의 책을 드리거늘 그분께서 그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영께서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음이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구원을,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짓밟힌 자를 자유하게 하며 {주}의 받아 주시는 해(年)를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6-19). 이는 주님의 초림 사역이 ‘주의 받아 주시는 해와’까지셨기 때문입니다. 뒷 부분인 ‘우리 하나님의 원수 갚으시는 날’은 재림 사역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한 구절 내에서 수천년의 시간 간격(gap)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예는 성경에 너무나 많습니다.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절 하반부에서 3절은 재림 사역입니다. 4-9절 역시 재림 사역입니다. 주님의 재림 때에 이스라엘에 있을 여섯 가지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주의 재림 때에 있을 일들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이스라엘로서 이런 복에 관한 영적인 적용이 가능합니다. 첫째, 오랫동안 폐허가 된 곳이 세워집니다(4). 이 부분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무엇이든지 서로 세워 줄 수 있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가정을 세우고, 넘어진 형제들을 일으켜 세워줄 수 있습니다. 주님으로 인해 우리는 온전한 사람으로 세워집니다. 둘째, 속박에 메였던 이스라엘이 섬김을 받게 됩니다(5). 우리는 죄의 종에서, 마귀의 속박에 메여 있었지만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의 섬기는 본을 따라 서로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섬긴다면 모두가 서로 섬김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 우리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靈)들로서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히1:14). 셋째, 주의 제사장과 하나님의 사역자가 됩니다(6). 본래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온 세상의 제사장 국가로 삼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 너희는 내게 제사장 왕국이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 너는 이 말들을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19:6).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지상의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배교와 우상 숭배로 이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주님은 교회를 통해 이 사역을 이루어 나가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습니다(벧전2:9). 우리는 천년 왕국 때에 왕과 제사장으로서 이 땅을 통치하게 됩니다(계1:6, 5:10).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 역시 주의 제사장과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지위가 회복됩니다. 넷째, 고통받던 이스라엘은 수치대신 보상을 혼돈대신 자기 몫을 받는 기쁨을 누립니다(7). 죄로 고통받던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보상으로 받았습니다(히11:6). 주님은 우리에게 참된 기쁨을 주셨습니다. 다섯째, 이스라엘은 주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8). 성도들 역시 주의 인도를 받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시며, 성령께서는 진리 한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여섯째, 흩어진 이스라엘은 다시 모이게 되고 이방인들에게 주께서 복주신 씨임을 인정받게 됩니다(9). 성도들 역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며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느니라.](롬14:18).
10-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를 크게 기뻐하며 내 혼이 내 하나님을 기뻐하리니 이는 마치 신랑이 장식으로 자기를 꾸미고 신부가 보석으로 자기를 단장(丹粧)하는 것 같이 그분께서 구원의 옷으로 나를 입히시고 의의 겉옷으로 나를 덮으셨기 때문이요, 또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에 뿌려진 것을 솟아나게 하는 것같이 {주} [하나님]께서 의와 찬양을 모든 민족들 앞에 솟아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라.](10-11). 여기서 핵심은 주님께서 ‘구원의 옷으로 나를 입히시고 의의 겉옷으로 나를 덮으셨기 때문이요’란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이유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한 정확한 묘사입니다. 사람들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었지만 어떤 옷도 자신의 더러움을 가려주지 못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구원의 옷, 의의 겉옷을 입혀 주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자기 앞에 서 있는 자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그에게서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네 불법을 네게서 떠나게 하였으니 이제 의복을 바꾸어 입히리라, 하시기에](슥3:4).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옷을 갈아입게 해 주셨습니다. 옷은 신분과 지위를 드러내는 수단이며, 자기를 보호하고 가리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옷입는 것에 대한 세 가지 시제를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옷 입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다(갈3:27). [또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음이라.](갈3:27). 이것은 과거형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 사람을 입었도다.](엡4:24),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골3:10).
다음은 현재형입니다. 우리는 옷 입으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오직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육신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롬13:14). [젊은 사람들아,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 자신을 낮추어 장로에게 순복하고 참으로 다 서로 복종하며 겸손으로 옷 입으라. 이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니라.](벧전5:5). 이는 현재형입니다.
셋째는 미래형입니다. [우리가 이 장막에서 신음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옷 입기를 간절히 원하노니](고후5:2). 이는 우리의 몸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저 하늘에서 입게될 아마포 옷은 성도들의 의입니다(계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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