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이사야 62:1-66:24
요절: 이사야 66:22
62장은 천년 왕국 때의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은 그 이름이 평화란 뜻과는 달리 지금도 극도의 분쟁과 다툼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다윗이 수도로 정한 이후에 평안함이 없는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곳이 어떻게 될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첫째, 주님은 예루살렘을 위하여 잠잠하지 않고 안식하지 않고 일하실 것입니다(1). [나는 시온의 의가 광채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타는 등불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안식하지 아니할 것인즉](1).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천년 왕국의 수도요, 다윗의 보좌를 놓는 지상의 중심지로 가장 높이실 것입니다. 이곳은 전쟁과 분란의 중심지에서 의가 광채같이, 구원이 타는 등불같이 나타나는 도시가 될 것입니다. 둘째,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의 의와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2). [이방인들이 네 의를, 모든 왕들이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주]의 입이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 것이며](2). 이는 예루살렘에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義)이십니다. 고로 이방인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새 이름을 지어 주십니다. 4절에 따르면 헵시바, 뷸라란 새로운 이름이 나오는데 헵시바는 “나의 기쁨이 그녀 안에 있다”란 뜻이며, 뷸라란 “결혼”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새 이름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성도, 신자, 형제, 제자, 크리스찬 등으로 다양한 이름을 받았습니다. 성도란 주님의 거룩하심으로 인해 주어진 이름이요, 신자란 주님을 믿음으로 인해 주어진 이름이요, 형제란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주어진 이름이며, 제자란 주님을 아는 지식과 그분을 따름으로써 주어진 이름이며, 크리스찬이란 우리가 그분의 소유이기 때문에 주어진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시고 이름을 바꾸어 주시는 일은 성경에서 매우 자주 발견됩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요시아를 여호수아로, 시몬을 (베드로)게바로, 사울을 바울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름을 바꾸어 주신 것은 그의 존재와 신분 등 모든 것이 바뀌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7, 3:12절을 보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감추어 둔 만나를 주어 먹게 하고 또 흰 돌을 주리니 이 돌에는 새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이 돌을 받는 자 외에는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느니라.](계2:17), 이 돌에 있는 새 이름은 성도 자신의 이름인지, 아니면 주님의 이름인지 알 수 없지만 참조 구절을 보자면 계시록 19:12을 참조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 역시 기록된 한 이름을 가지고 계시며, 주님 한 분 외에는 그것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 [이기는 자는 내가 내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다시는 나가지 아니하리라. 또 내가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할 것이며 나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계3:12). 주님은 여기서 ‘나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 하셨습니다. 나의 새 이름이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일지, ‘하나님의 말씀’일지 모르겠지만 어쨋든 주님은 새 이름을 가지십니다. 셋째,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영광의 왕관, 귀중한 왕관이 됩니다(3). 넷째, 예루살렘은 새 이름을 받게 됩니다(4). 이미 2절에서 언급한 대로입니다. 다섯째, 주님이 예루살렘을 기뻐하실 것입니다(5). 더 이상 예루살렘은 파괴되지도 황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예전에 로마가 누렸던 영광이나 현재 미국의 어떤 대도시가 누리는 영광도 천년 왕국 때 예루살렘이 누리는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6-7절은 전도자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오 예루살렘아, 내가 네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웠나니 그들이 낮이나 밤이나 잠잠하지 아니하리라. [주]에 관하여 말하는 자들아, 너희는 잠잠하지 말며 또 그분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사 땅에서 찬양이 되게 하시기까지 안식하시지 못하게 할지니라.](6-7). 파수꾼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언자, 설교자, 교사들이 다 해당됩니다. 대언자들, 목자들이 깨어 있는 사회가 가장 건강한 사회입니다. 주님은 파수꾼들이 밤낮 잠잠하지 말고, [주]에 관하여 말하라고 하십니다. 파수꾼은 사람들에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말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세우신 파수꾼이었습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오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집에게 이와 같이 파수꾼으로 세웠나니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내게서 나온 /것으로/ 그들에게 경고할지니라.](겔33:7). 우리 역시 이런 파수꾼의 역할을 다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파수꾼의 직무는 주님이 예루살렘을 세우셔서 땅에서 찬양이 되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63장입니다. 63장은 복수의 날, 복수자로서의 주님을 선포한 장입니다. 1-6절은 진노의 포도즙틀을 밟으시는 주님의 모습인데, 초림과 달리 재림의 모습은 유다 지파의 사자(lion)입니다. 초림 때 주님은 평강의 왕으로 오셨다면 재림 때 주님은 의의 왕으로 오십니다. 우리는 재림의 행로를 공부하면서 이미 이 부분을 다루었습니다. 주님의 옷이 붉은 이유는 주님이 홀로 그 포도즙 틀을 밟으시기 때문인데, 대환란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 것인지 생생하게 보여 주는 회화적인 표현입니다. [또 불을 다스릴 권능을 가진 또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을 가진 자에게 큰 외침으로 외쳐 이르되, 너의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들을 모으라. 이는 그 포도들이 충분히 익었음이니라, 하더라. 이에 그 천사가 자기의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모아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즙 틀 속에 던지매](계14:18-19). [또 그분께서 피에 담근 옷을 입으셨는데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일컬음을 받더라.](계19:13). 대환란의 참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을 주의 피를 믿는 믿음에 이르도록 증거해야 합니다. 주께서 흘린 피를 믿지 못하는 자는 자신이 피를 흘려 죽게 될 것이며,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7-19절은 구출받는 이스라엘에 관한 기사입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대표하는 듯이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했는데 그 기도 내용을 보십시오. 7-9절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신 일에 대한 고백입니다. 10절은 이스라엘의 반역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이스라엘이 불신과 불순종으로 반응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구원자에서 그들의 원수가 되셨습니다. 10-14절은 출애굽의 역사적 사건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전의 역사는 현재 우리에게 영적 교훈과 배움을 줍니다. 성경에 기록된 과거의 역사는 미래에 있을 예언이 됩니다. 15-19절은 도움을 구하는 탄원입니다. 16절은 위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틀림없이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니이다. 비록 아브라함은 우리를 알지 못하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오 [주]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요, 우리의 구속자시니 주의 이름이 영원부터 있나이다.](16).세상의 모든 관계가 파괴될 수 있어도 부정될 수 없는 관계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사이가 좋지 않을 수는 있어도 그 관계 자체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선한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며(벧전5:7), 보호하며(마18:6), 필요를 채워주며(빌4:19), 인도하고 가르칩니다(요14:26). 아버지는 아들을 돕고(시46:1), 아들에게 힘을 주며(빌4:13), 때로 징계하기도 하십니다(히12:5-11). 아버지는 아들을 먹이며(마4:4), 아들을 향한 선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롬8:28-29). 내가 기도할 때 바로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란 점을 주장하는 것은 가장 강력한 호소라 할 수 있습니다. [오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한 백성이여, 너희가 [주]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분은 너를 사신 네 아버지가 아니냐? 그분께서 너를 만드시고 세우시지 아니하였느냐?](신32:6). 이사야는 주님이 우리의 아버지란 분명한 근거와 사실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오 [주]여, 그러나 이제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우리의 토기장이시오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64:8). 우리 모두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오 [주]여, 어찌하여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주의 길을 떠나 잘못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사 주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까? 주의 종들 곧 주의 상속인 그 지파들을 위하여 돌아오시옵소서](17). 이런 이유로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대환란 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는데,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는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임이니이다. 아멘.](마6:13)입니다. 이스라엘이 배교하고, 주님께 반역한다면 그들은 주의 길을 떠나 잘못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상실한 마음 가운데 버려 두심으로 잘못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악한 영을 보내심으로써 잘못하게 하십니다(사19:14). 하나님은 그들에게 악한 지도자들을 주셔서 잘못하게 하고(대하33:9, 사3:12, 9:16), 거짓 대언자들을 주셔서 잘못하게 하십니다(미3:5).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할 때 이들은 잘못하게 됩니다(호4:12). 성도들 역시 깨어있지 않으면 잘못하게 됩니다. 성도가 돈을 사랑하면 잘못에 빠집니다(딤전6:10). 성도가 형제의 잘못을 보고도 모른 척 하거나 죄를 용납할 때 잘못에 빠지게 됩니다(갈6:1). 우리는 온유한 영으로 잘못을 바로 잡아 주고, 자신이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돌아보고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큰 은혜를 입습니다(약5:19-20). 성도들이 헛된 것을 크게 부풀려 말하면 잘못에 빠지게 됩니다(벧후2:18). 정욕에 쓰려고 뭔가를 구하는 기도를 할 때 잘못에 빠지게 됩니다(약4:3). 탐욕을 따라 가면 잘못하에 빠지게 되며(유11a-발람의 잘못), 자기를 인도하는 목자에게 반역할 때 성도들은 크게 잘못에 빠지게 됩니다(유11b-고라의 반역). 우리는 이런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하며, 주님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64장은 주님이 속히 오시도록 기도하며, 남은 자들을 구원해 주시도로 간구합니다. 이는 사도 요한이 기도한 것과 같습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 하시는도다.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계22:20). 1-3절은 주님의 지상 재림 때의 모습을 잘 묘사해 줍니다. ‘산들이 흘러 내리고’, ‘녹이는 불’과 같은 표현은 성경에 매우 자주 등장하는 재림을 나타내는 어휘들입니다. 재림은 구약의 주제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는, 오 하나님이여,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다리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것을 주 외에는 들은 자가 없으며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이 본 적도 없었음이니이다.](4). 이 구절은 사도 바울이 신약 성경에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적용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 이 두 구절은 비슷해 보여도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다리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시온과 이스라엘의 회복과 같은 재림에 관련된 것들입니다. 반면 신약 성도들은 구원, 주의 성령과 같은 영적인 것들로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라고 함으로써 영적인 은혜와 은사, 성령의 내주와 같은 것들임을 말해 줍니다.
6절은 주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오직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불법들이 우리를 바람같이 몰아가나이다.](6). 교만한 인간이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시편 기자의 말대로 [그들이 다 치우쳐서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시14:3), [그들이 저마다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시53:3)입니다. “우리는 부정한 물건 같아서”란 말은 우리의 행위가 어떠한 것 이전에 우리의 존재를 건드리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행하기 이전에 우리의 존재와 본질이 부정한 물건같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의인이 될 수도 없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자들은 종교를 만들고, 자기 수행을 통해서, 금욕과 고행을 통해서, 자선을 베풂으로써 더러움을 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아서’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필요하고, 그분의 죽음이 필요합니다.
죄는 우리 몸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끝없이 죄를 생산해내는 공장과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만히 있을 때는 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부정하지 않는 줄로 압니다. 약간의 선행이라는 하는 날이면 자신은 의로운 줄로 압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시기 전에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자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아서...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범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범죄가 주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하기 때문이요, 또 우리의 범죄가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이니라. 우리의 불법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그것들을 아나이다.](사59:12).
7절을 보십시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도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주의 얼굴을 돌려 우리에게 숨기시며 우리의 불법들로 인하여 우리를 소멸시키셨음이니이다.](7). 사람들은 자신이 부정한 줄도 모르고, 계속 범죄하고,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향해 얼굴들 돌려 자신을 숨기시고, 한 마디로 최악의 상황입니다. 불신과 불순종은 반역이 되고, 주님의 얼굴을 우리에게로부터 돌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때로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아무리 불러도 주님의 응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여러분은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범죄할 때 얼굴을 돌리십니다. [그 날에 내 분노가 그들을 향해 /불같이/ 타올라 내가 그들을 버리고 내 얼굴을 돌려 그들에게 숨길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며 그들에게 많은 재앙과 환난이 닥치리니 그 날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들이 우리에게 닥치는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아니하기 때문이 아니냐? 하리라. 그들이 돌이켜서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저지른 모든 악행으로 인하여 내가 그 날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신31:17-18). 성도가 가장 두렵고 떨리는 일은 하나님께서 나로부터 얼굴을 돌려 숨으시는 것입니다. 미가서 3:4, [그때에 그들이 [주]께 부르짖을지라도 그분께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겠고 그들이 자기 행위로 악하게 행한 것같이 그때에 그분께서 자신의 얼굴을 돌려 그들에게 숨기시리라.](믹3:4). 주님이 얼굴을 돌리시면 우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려야 합니까?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런 때일수록 더욱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자신의 얼굴을 돌려 야곱의 집에게 숨기시는 [주]를 바라며 그분을 바라보리라.](사8:17). 8-9절은 또 한번 위대한 신앙 고백을 통해 주님께 간구하는 장면입니다.
[오 [주]여, 그러나 이제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우리의 토기장이시오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오 [주]여, 심히 진노하지 마시오며 불법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우리가 간청하오니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8-9). 간구는 언제나 분명한 말씀의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언제나 정직하고 솔직한 신앙 고백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시며, 어떤 분이시고, 나는 누구며, 어떤 사람인가를 고백하고 필요를 감사함으로 아뢰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기도의 방법입니다. 본문이 가르쳐 주는 기도를 보십시오. 간절하고, 처절한 기도입니다. 분명한 신앙 고백 위에 간구한 기도는 분명한 주님의 응답으로 돌아옵니다.
65장은 곧 바로 주님의 응답을 다루고 있습니다. 1절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다룹니다. 사도 바울은 1절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이르기를,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발견하였나니 내게 묻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내가 나타났노라, 하였으되](롬10:20),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공영권(共榮圈) 밖에 있던 외인들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낯선 자요,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더니](엡2:12). 2절입니다. 주님은 종일토록 손을 펼쳤습니다. 우리는 이 손이 긍휼과 은혜의 손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을 따라 선하지 않는 길로 걷고(2), 우상을 숭배하고(3), 무덤 사이에 머물며 무덤의 기념비 가운데 거하며 돼지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국을 그릇에 담아 먹습니다. 이는 이방 종교와 풍습에 따른 제사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5절, [이르기를, 너는 너 스스로 서 있고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 이는 내가 너보다 거룩하기 때문이니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하루 종일 타오르는 불이로다.](5). 회개하거나 돌이키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자신을 그렇지 않는 사람들보다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진리를 떠난 사람들의 거룩함에 대한 기준은 언제나 상대주의입니다. 그들의 가치관은 철저하게 왜곡되고, 뒤바뀌어져 있습니다. 6-7절은 이들에 대한 엄중한 심판을 다룹니다. 8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포도송이에서 새 포도즙을 찾았으므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것을 상하게 하지 말라. 거기에 복이 있느니라, 하나니 나도 내 종들을 위해 그와 같이 행하여 그들을 다 멸하지 아니하고](8). 여기서 우리는 새 포도즙과 독주(old wine)을 구분해야 함을 볼 수 있습니다. 흔히 새술이라고 말하는 새 포도즙은 포도주가 아닙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해 볼 때 포도즙은 포도 주스이지 포도주가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금하고 있습니다(잠20:1, 23:31 etc). 신명기 32:14, [암소의 버터와 양의 젖과 어린양의 기름과 바산의 숫양과 염소와 기름진 밀을 먹게 하시고 또 네게 포도의 순수한 피를 마시게 하셨도다.](신32:14). 17절을 보십시오. [이는, 보라, 내가 새 하늘들과 새 땅을 창조하기 때문이니 이전 것은 기억나지 아니하며 생각나지 아니하리라.](17). 이 말은 성경에서 총 4번 나옵니다. 66:22, 벧후3:13, 계21:1입니다. 여기서 약간 어려움이 등장합니다. 18-25절은 분명히 천년 왕국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17절은 천년 왕국 이후의 구절입니다. 본문과 66:22, 벧후 3:13은 새 하늘들로 복수형입니다. 계21:1은 새 하늘로 단수형입니다. 이는 요한이 본 것을 말한 것이며, 창세기 1:1로 돌아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절에는 예루살렘에 더 이상 슬픔이나 울음이 없습니다. 이 구절은 계시록 21:4절과 연결됩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음이라.](계21:4). 20절에는 날수가 적은 아이나 노인이 없고, 아이가 백세에 죽고 죄인들이 백세가 되어도 저주받은 자라고 합니다. 백성들의 수명은 나무와 같습니다(22). 주님은 그들이 기도를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24). 자연계는 완전히 회복됩니다. 모든 동물이 초식 동물로 돌아오고 해치거나 상하는 일이 없습니다(25, 사11:6). 이것은 영원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틀림없이 천년 왕국의 모습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천년 왕국에서는 죽음이 있고, 슬픔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눈물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영원에서입니다. 여기서 다루는 본문은 새 땅에 관련된 것들입니다. 반면 계시록 21장과 22장에 다루는 내용은 새 예루살렘에 관련된 것입니다. 영원에서는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들이 각기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새 땅을 상속받습니다. 성도들은 새 예루살렘에 살게 됩니다. 이방인들은 새 하늘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66장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이는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었기 때문이라. 그것들이 지금까지 존재해 왔느니라. [주]가 말하노라. 오직 가난하고 영으로 통회하며 내 말에 떠는 자는 내가 보살피느니라.](2), [[주]의 말씀에 떠는 자들아, 너희는 그분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고 내 이름으로 인하여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주]께서 영광을 받으소서, 할지라도 그분께서 나타나사 너희의 기쁨이 되실 것이요, 그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5).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이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은 주의 말씀에 떠는 자들입니다. 말씀을 멸시하고, 관심없는 사람들은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참된 예배와 거짓 예배가 드러납니다. 영으로 통회하고 말씀에 떠는 자들은 참된 경배자들입니다. 반면 3-4절에 나오는 성전 희생제를 드리는 자들은 거짓 예배자들입니다. 이들은 성전에서 적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용들을 경배하는 자들입니다. 5절은 참된 경배자들이 오히려 박해와 고난을 받게 될 것임을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실로 적그리스도는 자기를 경배하지 않는 자들을 죽일 것입니다. 6절은 주님의 재림의 모습입니다. 7-9절은 이스라엘이 다시 국가로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느 한 순간에 민족적으로 회심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롬11:26-27). 10-14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방의 머리가 될 것임을 보여 줍니다. 15-17절은 주님께서 주님의 복수와 심판입니다. 18-21절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다룹니다. 22절은 영원을 다룸으로써 계시록 22:15절과 일치합니다. 23절은 모든 이방인들이 주님을 섬길 것임을 보여 줍니다. 24절은 마가복음 9:44-48에 인용된 지옥입니다.
이로써 인류 전 세대를 포함한 예언서 이사야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까지를 포괄함으로써 끝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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