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예레미야 1:1-19
요절: 예레미야 1:7
예레미야
1장은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1-3절은 예레미야의
출생, 신분, 대언자로서의 사역의 시작과 주의 말씀이 임한
기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가운데 하나인 힐기야의 아들이었고(1), 유다 왕
요시야 제위 13년에 주의 말씀을 받아 대언자의 직무를
시작했으며, 그의 사역은 유다가 망한 시드기야 제 십일년 5월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의 패망 장면을
자세하게 묘사할 수 있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뱃속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모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거룩히 구별하였으며 너를 여러 민족을 향한 대언자로
세웠노라, 하시기에](4-5). 하나님의 사역은 언제나 한
사람을 부르시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제도를
개선하거나 혁명을 일으키거나 정치 개혁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는 한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이 우상 숭배를 향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을 때 한 사람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씨를 통해 온
세상에 한 민족을 이루시고, 온 세상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를 통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삼손을 부르셨고, 기드온을 부르셨고, 다윗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통해
주님을 말씀하셨고,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모든
대언자들이 다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야말로 사역의
첫 번째 자격 요건입니다. 예레미야는 삼손이나 침례인
요한과 마찬가지로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대언자만이 아니라 여러 민족을 향한 대언자였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사도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나를 구별하시고 자신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갈1:15). 바울은 유대인들의 일꾼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사도였습니다.
현재 이 세상이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는 모두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요약하면 ① 내게로 오라. ② 다음엔 내게
배우라. ③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④ 나를
따르라 ⑤ 나와 함께 떠나자 입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마11:28)하시며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부르셨습니다. 이는 구원으로의 부르심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안식을 찾으리니](마11:29). 주님은
부름받은 성도들을 향해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 이는 십자가의 삶으로의
부르심입니다. 후에 주님은 영광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바라보니, 보라,
하늘에 문이 열려 있더라. 전에 내가 들은 첫번째 음성 곧
나팔 소리와 같이 내게 이야기하던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반드시 일어날 것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더라.](계4:1).
시몬 베드로는 자신의
서신에 우리의 부르심을 단계적으로 요약해 놓았는데 ①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called out of-벧전2:9) ② 고난으로의
부르심(벧전2:20). ③ 십자가의 삶을 살기 위해서(벧전3:9), ④
영원한 영광으로의 부르심(벧전5:10)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부르심을 하늘의 부르심(히3:1), 거룩한 부르심(딤후1:9),
높은 부르심(빌3:14)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악한 현 세대에서 예레미야나 바울과 동일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갇힌 자 된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를 부르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걸으며](엡4:1). 이것은 언제나
우리의 기도 제목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께서 너희를 이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자신의 선하심의 모든
참된 기쁨과 믿음의 활동을 권능으로 성취하사](살후1:11).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예레미야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는 모세와
마찬가지로(출3:11) 말을 잘 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그는 아이라 말을 잘 할 줄 모른다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30세 이전의 청년은 다 아이로 보았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때가 30세였고(삼하5:4), 요셉이 고난을
끝내고 파라오 앞에 선 나이가 삼십이었습니다. 이는
민수기에 서른 살에서 쉰 살까지 회중의 성막에서 일을
하도록 계수했기 때문입니다(민4:3,23,35,43,47,50). 이 때
예레미야는 약 20세 였을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어린
목사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을 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아직 30세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제, 오 [주] 내 하나님이여, [주]께서
종으로 하여금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요, 나가고 들어올 줄을 알지
못한 채](왕상3:7).
7-9절은 주님의 소명과
더불어 임무를 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②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니 /너는/ 그들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라. [주]가
말하노라, 하시고 [주]께서 자신의 손을 내미사 내 입에
대시며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들을 네
입에 두었노라.](7-9).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라’고 하셨습니다. 요나는 이
점에서 실패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이
점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온 세상으로 가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이것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철칙입니다.
말씀에 더하거나 빼거나 묽게 하는 것은 주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목적으로 예레미야를 부르셨고,
예레미야의 입에 손을 대시며, 말씀들을 입에 담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레미야와 동일한
전도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목적으로 세움을 입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로든지 갈 수 있어야 하며, 무슨 말이든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인기 영합주의에 물든 설교나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가르침은 자신의 부르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대로 마지막 날 들에는 주의 진리의
말씀대신 [이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선생들을 쌓아
두고 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들을 따를 것임이라.](딤후4:3~4)고
한 대로입니다.
어떤 신비주의자들은
이사야나 예레미야, 에스겔, 사도 요한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환상 가운데 신비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해도 원고 준비 없이 성령께서 말씀하게 하시는 대로 한다며
강단에 빈 손으로 올라가 기분내키는대로 지껄이다
내려옵니다. 신약 성도들에게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너희 마음 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골3:16).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함으로써
우리 안에 풍부하게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66권의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영적인 생활의 핵심은 말씀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노래하고,
가르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요15:7).
불타는 말씀을 전하고
싶으면 마음 속에 불타는 말씀이 있어야 하며, 혼을
시원하게 하는 설교를 하고 싶다면 내 안에 그런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풍성한 찬양과 기도를 드리고 싶다면 내
안에 그런 말씀이 풍성히 거해야만 합니다. 예레미야의 입에
말씀이 있었다는 것은 그의 마음 속에 불타는 말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그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아니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분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타오르는 불 같아서 내 뼈 속에 사무치니 내가 참기에
지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노라.](렘20:9). 성도들은
저절로 성령이 충만해 지고, 저절로 영적 각성이 일어나는
신비적인 체험을 원할지 모르지만 영적 원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말씀을 충만케 하신 후에 그
일을 이루십니다. 능력있는 삶을 살고 싶다면 능력의 말씀을,
지혜로운 삶을 살고 싶다면 내 안에 지혜의 말씀을 가득
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10절은 예레미야가 세움을
입은 목적이며, 예레미야서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보라,
내가 이 날 너를 여러 민족과 여러 왕국 위에 세워 /그것들을/
뿌리째 뽑고 무너뜨리며 파멸하고 파괴하며 세우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10). 예레미야는 여러 민족과
왕국의 대언자로 세움을 입었습니다. 이점에서 그는 바울과
비슷합니다. 예레미야의 첫 번째 할 일은 “그것들을
뿌리째 뽑고”입니다. 새로 무엇을 심기 위해서는
뽑는 일이 먼저입니다. 작은 정원에 씨를 뿌리기 위해서도
우리는 이미 나 있는 잡초들을 뽑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 역시 세상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의 위선과 가식,
형식적인 종교 의식을 뿌리 뽑는 일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뿌리 뽑고 묵은 땅을 가는 일까지 했습니다. [주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의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말라.](렘4:3).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로 거두며
너희의 묵은 땅을 부술지니 이는 지금이 곧 주를 찾을
때이기 때문이라. 마침내 그분께서 오사 의를 비같이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10:12). 우리는 좋은 것으로
심기워지기 위해서 뽑혀야 하며, 뿌려지기 위해서 갈고,
부수어져야만 합니다.
다음은 “무너뜨리며”(pull
down)입니다. 밭에 있는 것은 뽑아내지만 밭의 곁에 있는
것들은 뽑지 않고, 무너뜨립니다. 큰 나무는 베어 버리고,
가지들은 잘라 버립니다. 작물이 자라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은 다 무너뜨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던 제단들이나 영적 생활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다 무너 뜨려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상상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거슬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고후10:5).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은 너무
높아져 있습니다. 배운 것이 많고 아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우려는 마음이 아니라 판단하는
마음이 앞서 있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배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마음이 헛
것이요, 무너져야 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주께서
지혜로운 자들의 생각을 아시며 그들의 생각이 헛됨을
아신다, 하였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을
자랑하지 말지니 이는 모든 것이 너희 것이기 때문이라.](고전3:20-21).
다음은 “파멸하라”입니다.
뽑고, 끌어내린 다음에 때로 완전히 파괴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루터기나 돌은 완전히 파괴해야 합니다. 잘
안되면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해서라도 완전히 부수어
버립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 자아를 완전히 부수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육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기 전에는 결코 육신의
정욕을 모두 처리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받아 들이고,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세상을 못박아 버리고 세상에 대해
못 박힌 성도들만이 자아의 요새에서 나오는 모든 죄를
처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못박을 수
없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 자신이 동일한 못박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던져 버리고’(throw
down-파괴하며/흠정역 번역)입니다. 무엇을 심기 위해서는
땅을 갈아 엎어야 합니다. 사사기에는 헐어 버리라고 번역한
어구가 바로 throw down입니다. [너희는 이 땅의 거주민들과
동맹을 맺지 말고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throw down),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어찌하여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느냐?](삿2:2). 예레미야와 기드온이
그러했듯이 우리 역시 우리의 삶가운데 있는 우상들과
제단들을 던져 버러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섬기고
경배하는 것들이 있다면 모조히 던져 버려야 합니다. 이제
이런 일을 한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이제 세우고 심어야 합니다.
다시 10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이 날 너를 여러 민족과 여러 왕국 위에 세워 /그것들을/
뿌리째 뽑고 무너뜨리며 파멸하고 파괴하며 세우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10). 주님은 세우(build)라고
하셨습니다. 성장을 위해서 우리는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세움을 입은 존재들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움을 입어야 합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여 이 젖으로 자라가도록 하라.
너희가 주의 은혜로우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참으로
사람에게는 거부당하였으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돌
곧 보배로운 산 돌이신 주께 나아와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built)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벧전2:2-5). 든든히 세움을 입기
위해서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고, 그것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목자들은 누구나 성도들은
든든히 세우고 싶어합니다. 때로 어떤 성도들은 자기들이
교회를 반석 위에 든든히 세워 둔 후에 떠난다는 꼴 같지
않는 간증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정말 무지의
극치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떠나면서 성도들을
어떻게 세우는지 말해 주었습니다.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맡기노니 이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워 거룩히 구별된 모든
자들 가운데서 너희에게 상속을 주리라.](행20:32). 오늘날
교회들이 말씀을 떠나 자꾸 모임을 만듭니다. 요즘 유행하는
Cell Church, Para church, 구역 모임 같은 것은 사람을 세워주지
못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 성경을 가지고
설교하고 성경 공부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할 일은 ‘심으라’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밭에 무엇을 심어야 합니다. 심기 위해서
모든 사전 작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심지 않으면 거둘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심든지 심는대로 거두게 됩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이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뿌려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을
통해서 동일한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소명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세미나, 새로운 프로그램, 새로운 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믿음과 순종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란 말씀을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1:11,13,24:3).
이런 동일한 물음은 아모스와 스가랴에게도 있었습니다.
아모스7:8(다림줄), 8:2(여름 과일 한 바구니)참조, 슥4:2(전부
금으로 된 등잔대), 5:2(날아가는 두루마리)참조. 에스겔이나
사도 요한, 다니엘 역시 이런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아몬드 막대기를 보여 주셨습니다(11). 우리나라의 봄은
매화나 진달래가 전령이듯이, 유대에는 아몬드가 봄의
전령입니다. 아몬드 막대기는 아론의 영적 지위가 흔들릴 때
하나님께서 권위를 부여해 주신 나무이기도 합니다. [다음
날 모세가 증거의 성막 안에 들어가니, 보라, 레위의 집을
위해 내놓은 아론의 막대기에 싹이 나고 봉오리가 나오고
꽃이 피어 아몬드가 열렸더라.](민17:8). 대언자에게
아몬드 막대기가 보였다는 것은 미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용꿈을 꾼 것보다 더 탁월한 환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 말씀을 전할 능력과 권위를 부여 해
주신 것을 보여 준 구절이 바로 11-12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기에 내가 이르되, 내가 아몬드나무
막대기를 보나이다, 하매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으니 이는 내가 내 말을 재촉하여 그 일을 이루려
하기 때문이라, 하시니라.](11-12). 이제 어린
예레미야는 이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술에 담아
두신 주의 말씀을 주님이 속히 이루려 하신다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한 가지 환상을 더 보여 주셨습니다.
13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두번째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기에 내가 이르되, 내가
끓는 가마솥을 보는데 그 표면이 북쪽을 향하고 있나이다,
하니](13). 주님은 두 번째로 끓는 가마솥의 표면이 북쪽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끓는 솥, 가마솥은 늘
주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리워야단을 묘사하실 때, [그의 코에서는 연기가 나오니
끓는 솥이나 가마솥에서 나오는 것 같도다.](욥41: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리워야단을 상징하는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의 침공과 유다의 파멸을 예고한 것입니다.
에스겔 11:7, [그러므로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가 이 도시 한가운데 남겨 둔 너희의
죽임 당한 자들은 그 고기요, 이 도시는 그 가마솥이거니와
내가 너희를 도시의 한가운데서 끌어내리라.](겔11:7).
주님은 자신이 보여준 환상들의 의미를 친히 해석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달리 해석을 할 필요가 없는데 그 해석은 14-16절입니다.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북쪽에서 재앙이 일어나 이 땅의
모든 거주민들에게 갑자기 임하리라. 이는, 보라, 내가 북쪽
왕국들의 모든 족속을 부를 것임이라. [주]가 말하노라. 그들이
와서 그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게 경배하였은즉 내가 그들의 모든
사악함에 대하여 나의 심판을 선고하리라.](14-16).
예레미야의 사역은 심판을
선포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심판의 이유는 ①
그들이 나를 버리고 ②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③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게 경배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출애굽 이후로 늘 이 문제로 반복되는 심판을
받았지만 이제 그 죄악이 극에 달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면 인간성도 상실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사람에
대한 신뢰도 사라집니다. 가장 인간을 사랑하고 가장
휴머니즘이 넘치는 사람은 가장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면 사람들과의 관계성도 파괴됩니다. 공산주의가
휩쓸고 간 나라들은 상호 신뢰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렸기 때문에 누구도 믿지 못하는
불신 사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부부 관계나 친구 관계나
부모와 자식의 관계성도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란 기준에서만
측정되고, 형성된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그들의 죄악을 깨닫게 하고, 심판을 선포하시는 이유는
심판의 집행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개하고 이런 심판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누구든지 경고의 음성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다가오는 심판을 피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지옥의 저주를 피하는 법 역시 저희들을 통해
선포되는 경고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17-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의 얼굴을 대할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로 하여금 그들 앞에서 당황하지 아니하게
하리니 이는, 보라, 내가 이 날 너를 방벽(防壁)을 세운 /견고한/
도시,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여 그 온 땅과 유다의 왕들과
그 통치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의 백성을 치게
하였음이라. 그들이 너와 싸우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주]가
말하노라.](17-19). 이는 말씀을 전파하는 전파자의
자세입니다. 첫째,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라. 주님께서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라는 말은 정신무장을 단단히 하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이르기를,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오실 그 은혜로 인하여 끝까지 소망을
가질지어다.](벧전 1:13). 우리는 제자의 길이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님을 알고 늘 깨어 있어야 하며, 고난을 각오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허리에 띠를 띠고 너희 등불을
타오르게 하며](눅12:35)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진리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속에 담아두고 맑은 정신으로 있는 것이 바로 허리를
동여맨 자세입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를
동여매고 의의 흉갑(胸鉀)을 입고](엡6:14). 둘째, 모든
것을 말하라. “내가 내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라.” 전도자는 결코 임의로 하나님의 더하거나 빼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후에 다시 한번 예레미야에게 이 사실을
주지시키셨습니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는/ [주]의
집 뜰에 서서 [주]의 집에서 경배하려고 오는 유다의 모든
도시들에게 내가 네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전하라 한 모든
말을 전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렘26:2).
실제로 자기 민족의
저주와 심판을 선포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입니다.
예레미야는 담대해야 했습니다. 주님은 예레미야를 방벽을
세운 견고한 도시, 쇠 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말 표현식으로 하자면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정하였으니’(사50:7)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 역시
예레미야와 마찬가지였습니다. [내가 네 이마를
부싯돌보다 굳은 금강석 같게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집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모습에 놀라지 말라, 하시니라.](겔3:9). 복음을
증거하는데는 남들이 볼 때에 지나치게 염치도, 예의도 없는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체면치레 다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얼굴을
이와 같이 만들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와 같은 수치를 모르는 담대함과
두려움을 모르는 용기를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니
사람이 내게 무엇을 행하든지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하노라.](히13:6).
'Archived(완료) > 구약 개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레미야(4) (0) | 2005.08.31 |
---|---|
예레미야(3) (0) | 2005.08.30 |
예레미야(1) (0) | 2005.08.27 |
이사야(16) 말씀: 이사야 62:1-66:24 (0) | 2005.08.26 |
이사야(15) 이사야, 말씀: 사58:1-66:11 (0) | 2005.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