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예레미야 2:1-37
요절: 예레미야 2:13
예레미야 2장입니다. 2:1-3:5은
예레미야가 주께로부터 처음 받은 말씀입니다.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의 타락을 지적하셨고 그들의
죄를 밝히셨습니다. 예레미야서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는
타락입니다. 2:19, 3:6,8,11,12,14,22, 5:6, 8:5, 14:7, 31:22, 49:4 참조할
것. ‘타락’이란 문자 그대로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그들의
본래 상태는 2:1-3의 모습입니다. [[주]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크게
외칠지니라.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억하며 네 젊은 시절의 친절과 네 정혼한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그때에는 네가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곧 광야에서
나를 따랐느니라. 이스라엘은 [주]께 거룩한 /자/요, 그분의
소출(所出)의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는 다 실족하고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 [주]가 말하노라.](2:1-3). 주님은
이스라엘을 기억하시며, 한 때 주님을 잘 따랐던 날들을
기억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서부터 급격하게 미끄러지고
돌아서기 시작했습니다. 4-13절은 그들이 어떻게
배교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들은 광야에서의 첫 실패를
거울로 삼아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임을 여호수아와
더불어 맹세했지만 그들의 첫 세대가 죽자마자 곧 바로
배교해 버렸습니다. 때로 하나님을 져버리는 자들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자들보다 더욱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주님을 따랐다면 가나안에서는
더욱더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믿음에서 출발하였다가
허무하게 끝나버려서는 안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법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허무한 것을 따르며 허무한 자가
되었느냐?](5). 피조물이 참 하나님을 따르지 않을 때 그는
허무를 느끼게 되고, 허무한 자가 됩니다. 허무주의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돌아설 때 그
마음은 허무로 가득하게 되고, 그 사람은 헛된 것을 따르게
되고, 허무한 자가 되는 법입니다. 타락과 더불어 한 축을
이루는 주제는 허무, 헛것입니다. 3:23, 4:14, 4:30, 8:19, 10:3, 8,15,
14:14,22, 16:19, 18:15, 51:18참조. 인생의 허무는 성경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신자들은 허무를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는 언제 허무를
느끼는가? 첫째,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기도하지 않을 때입니다(6). [그들이,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의 땅, 가물고
사망의 그늘 진 땅, 아무도 다니지 아니하고 아무도 거하지
아니하는 땅을 지나가게 하신 [주]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도 아니하였도다.](6). 신앙 고백이 없는 것은 타락의
현상입니다.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보호하시며, 복을 주신
주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없어졌다면
이는 이미 타락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선하심에 대한
기억이 없는 사람은 기도하는 일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신앙 고백이 없었고, 주님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소홀히 할 때입니다(7).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심지
않는 곡식에서 열매를 얻었고, 개간하지 않는 전답을 받았고,
짓지 않는 집들을 얻었습니다. [그들에게 이교도들의 땅들을
주시매 그들이 그 백성들이 수고한 것을 상속하였으니](시105:44)라고
하신 대로 그들은 모든 것을 공짜로 얻었습니다. 주님이
이들에게 베푸신 은혜는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주] 네
하나님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게 주리라 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좋은 도시들을 주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집 곧 좋은 물건이 가득한 집을 주시고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주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올리브나무를 주사 네가 먹고 배부르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이집트 땅 속박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를
잊지 말고 [주]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을 섬기고
그분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6:10~13). 이들이 받은
것에 대해서 할 일은 주님을 잊지않고, 두려워하며,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약 성도들은 구약 성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혜와 성령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크고 좋은 약속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주님을 잊어
버릴 때 그 사람은 허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와 은사들을 잊을 때, 첫 사랑은 식어지고 허무하게
됩니다.
셋째, 영적 지도자들이
타락하면 허무하게 됩니다(8). [제사장들은, [주]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고 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목양자들도 내게 범죄하고 대언자들은 바알을
힘입어 대언하며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들을 따랐느니라.](8).
주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층 4 부류를 언급했습니다. 제사장들,
법을 다루는 자들, 목양자들, 대언자들입니다. 이들의
타락과 배교는 백성들을 모두 타락과 배교를 이끌었습니다.
제사장들의 임무는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큰 죄입니다.
사무엘은 제사장의 임무와 대언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한 나로 말하건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쉼으로 내가 결단코 [주]께 범죄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삼상12:23).
우리 역시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기도를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법을 다루는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읽어주고, 가르치고, 법을 어기는 자들에 대해
책망하고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이런 임무를 하지 않을
때 주님은 화있을진저, 율법사들이여!라고 저주를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서기관들과 율법사들에게
그토록 경멸에 찬 노여움을 발하셨던 것은 그들이 성경을
다루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목양자들이란 양들을 말씀으로 먹이는 임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요10:14)시오, 양들의 큰 목자(히13:20)이시며,
‘너희 혼의 목자’(벧전2:25)이시며, 목자장(벧전5:4)이십니다.
그렇다면 목양자들(목사)들은 마땅히 주님과 같이 선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양들을 먹이고, 양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는 목자가 없고 대신 양들로부터 이익을
취하려는 목자들만 있을 때 교회는 급격히 타락하게
성도들은 허무함을 느끼게 됩니다. 교회 내에서 목사든
집사든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은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않아야’ 합니다(딤전3:3,8, 딛1:7,11, 벧전5:2).
대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대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고 바알을 힘입어
대언했다는 것은 당시에 거짓 대언자들이 주류를
이루었음을 짐작케 해 줍니다. 거짓 대언자들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행위를 이렇게 증거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너희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이는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대언자들에게 이같이 행하였음이라.](눅6:26).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 교사, 거짓 대언자들이
교회를 장악하고 신학교를 장악하여 완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교회와 성도들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삶은 허무에 지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어느 민족이 자기 신들을 신이 아닌 것들과
바꾼 적이 있느냐?](11a). 주님은 놀라운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주변에 수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신들도 아닌
자신들의 신을 섬기면서 그것들을 다른 신으로 바꾸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민족은 없습니다. 10절을
보면 깃딤 섬에서부터 게달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살펴
보고 그런 일이 있는지 부지런히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서쪽에서 동쪽에 이르기까지 다 살펴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살펴 보십시오. 인도는 몇 천년 동안 여전히
힌두교입니다. 티벳은 불교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을
보십시오. 그들의 신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거대한 불상을
세우고, 신전(神殿)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자들은 수백년,
수천년 동안 여전히 그곳을 버리지 않습니다. 듣지도,
보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돌맹이나 나무와 산을 섬깁니다.
선교사들이 고전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들의 신을 버리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독 한 민족만이
자신들의 신을 쉽게 버렸는데, 이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가기 전까지 자신들의
하나님을 얼마나 쉽게, 자주 버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백성은 자기 영광을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과 바꾸었도다.](11b).
하나님은 하늘들을 불러 이 일에 증거자로 삼으셨습니다(12).
그들의 죄는 무엇입니까? [이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음이니 곧 그들이 생수의
샘인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물 저장고들을 판 것인데
그것들은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저장고니라.](13). 생수의
샘인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샘을 버리고 물 저장고를
파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샘은 물이 솟아 나오는 것이지만
저장고에는 계속 쏟아 부어야 유지가 됩니다. 물이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면 누구든지 그 샘을 차지하려고 하지, 샘을
버리고 물탱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런 선택을 했습니다. 그나마
스스로 만든 물 탱크도 물을 가두지 못한 터진
저장고였습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수의
근원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버리고 스스로 살길을
찾아 나름대로의 방법을 강구하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을
버리더라도 내 주머니에 채워 넣을 무엇이 있어야만 마음이
든든한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신을 바꾼 이스라엘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분이시며(계14:7),
친히 생수의 샘이 되시며, 우리 안에 생수를 주셨습니다.
믿기만 하면 물을 구하러 다닐 필요가 없고, 저장고를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한 것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요7:38).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우물이 되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하리라.](요4:14). 주님이 주시는 물은 모든
갈증을 해결해 주는 물이며, 넘치도록 풍성한 물입니다.
이는 생활, 삶의 문제가 아닙니다. 생명의 문제입니다. 주의
생명이 넘치면 삶은 저절로 변화됩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그들의
죄악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 자신의 사악함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타락함이 너를 꾸짖으리라. 그런즉 네가
[주] 네 하나님을 버린 것과 네 속에 나를 두려워함이 없는
것이 악한 일이요, 쓰라린 일인 줄 알고 주의하라. {주}
만군의 [하나님]이 말하노라.](19).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지만 본래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사악함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은 악한 일이며, 쓰라린 일입니다. 사람들은 살인이나
거짓말이나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악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악한 일은 마음 속에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쓰라림을 겪게 되며, 그 일은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미칩니다. [네 길과 네 행위가 이 일들을 초래하여 네게
임하게 하였느니라. 이것이 네 사악함이니 그 까닭은 이것이
쓰고 네 마음에까지 미치기 때문이니라.](렘4:18).
주를 버리고, 마음 속에
주를 두려워 함이 없는 것이 타락의 첫 번째 원인입니다.
주를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의 집을 버립니다(렘19:4).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곳을 멀리하였으며 이곳에서
자기들과 자기 조상들과 유다의 왕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고 무죄한 자들의 피로 이곳을 채웠음이요,](렘19:4).
마음이 주께로부터 떠나면 당연히 주님의 전(殿)도 멀리하게
됩니다. 마음이 떠난 사람들이 왜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지
보십시오. 그들은 많은 이유를 댑니다. 바쁘다. 몸이 안 좋다.
다른 일이 있다. 여행을 가야 한다. 공부를 해야 한다. 돈을
벌어야 한다. 이렇게 한 두 번 예배를 빠지게 되면 계속해서
빠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종교적 이유를 발견하는데,
‘율법적으로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이 예배는 아니다.
예배는 아무 곳에서나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교회란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의 모임이다’ 등등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것은 영적인 것이 중요한 만큼 그
영적인 것이 실제적으로 드러나는 구체적인 것들 역시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보이는 지역 교회를 소중히 여깁니다. 보이지 않는
말씀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소중히 합니다. 보이지 않는 주의 율법을
귀히 여기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법과 제도를 잘 준수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깊이 사랑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사람에 대한 약속을 신뢰할 줄 압니다.
하나님을 몰아낸 공산주의 국가들이 공산주의가 무너진 후
가장 크게 겪는 후유증은 인간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점입니다. 동구권이 공산화에 벗어난 지금
그들은 부부 관계나 친구 관계도 불신이 팽배해 있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
한 분만 사랑하고, 하나님께만 순종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어떤 것도 믿지 않고, 어떤 사람도
사랑하지 않고, 권위에 대해서는 불순종을 일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믿음이요, 거짓 신앙입니다. 특히 지역
교회의 목사들의 권위를 업신여기는 것이 종교 개혁의
성과인 줄 아는 형제들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혼들의
목자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지역 교회의 목자에게
순종합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타락의 세 번째 단계는
주님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시리아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주]를 버려 그분을 섬기지
아니하므로](삿10:6). 주의 집을 버린 사람이 주를 섬기는
일을 할 리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몸만 떠났지 마음은
떠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화도 하고, 때로는
멀리서 선교 헌금도 보내 주고, 기도한다는 말도 덧
붙입니다. 그러나 조만간 주님을 섬기는 일은 없어지고 자기
배만 섬기게 됩니다.
네 번째 단계는 구원의
주를 버립니다. [그러나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기름지고 비대하고 기름으로 덮이매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소홀히 여겼도다.](신32:15).
어려울 때는 주님만을 찾고, 따랐지만 이제는 배가 부르고
기름으로 비대하고 덮이게 되자 자기 하나님을 버리고
소홀히 여깁니다. 오늘날 이런 현상이 얼마나 많이
벌어집니까? 어느덧 예수를 믿은 지가 얼마나 되었던가?
추억 속을 헤매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은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타락은 이슬비에 옷이
젖듯이 조금씩 조금씩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결국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기억에 아물거리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타락한 상태를 다양한 비유를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20절은
멍에를 맨 황소에 비유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집트의
속박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셨는데, 이를 ‘내가 옛적에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었더니’(20a)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은혜와 주의 구원 사역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이 때만 해도 ‘내가 범죄하지 아니하리라’(20b)
결심했습니다. 21절은 포도원으로 비유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주님이 심으신 귀한 포도 나무요, 올바른
씨앗이었지만 이들은 이방 포도 나무요, 변질된 초목이 되어
버렸습니다(21). 우리 역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지들입니다. 22-25절은 발정난 야생 암나귀에 비유해서
유대인들의 영적 음행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26절은
훔치다가 발각난 도둑에 비유하셨고, 27-28절은 어리석은
우상 숭배자들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들이/ 나무줄기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하고 돌에게, 너는 나를 낳았다,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자기 등을 내게로 돌리면서도 자기 얼굴은
내게로 돌리지 아니하다가 스스로 환난을 당할 때에는
이르기를,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할 것임이라. 그러나
네가 너를 위하여 만든바 네 신들이 어디 있느냐? 네가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이 너를 구원할 수 있거든 일어나게
할지니라. 이는, 오 유다야, 네 신들이 네 도시의 수만큼이나
되기 때문이로다.](27~28). 주님은 어리석은 유다에게 한 가지
도전적인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가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이 너를 구원할 수 있거든 일어나게 할지니라.”입니다.
만약 석상들이 벌떡 일어나 걷게 하고, 동상들이 호흡을
하고, 걸어다니게 할 수 있거든 그렇게 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29-32절은 생각없고,
감사함이 없는 백성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33절은 뻔뻔스런
범죄에 대해서 34-37절은 눈먼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유다는 세 가지 잘못된
교환을 했습니다. 이방 민족들도 좀처럼 하지 않는 자기
하나님을 바꾼 것입니다. 그리고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을
버리고 자기들이 만든 물 저장고로 바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길을 바꾸었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네가
어찌하여 들떠서 나다니며 네 길을 바꾸느냐? 네가
아시리아에게 부끄러움을 당한 것같이 이집트에게도
부끄러움을 당하리라.](36).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바꾸는
자들이 가장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는
이런 예가 너무나 흔합니다.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고,
바른 하나님의 말씀인 킹제임스 성경을 버리고 현대
역본으로 바꾸고, 성경적인 교리를 버리고 인본주의를
취하고, 올바른 교회를 버리고 가려운 자기 귀를 긁어 줄
선생으로 가는 것 등이 다 여기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 결과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36c), 형통하지 못할 것임이라(37b)입니다.
문제는 이런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거나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인이니 다시는 주께 가지 아니하겠다](31b), [나는
무죄하니 그분의 분노가 분명히 내게서 떠나리라.](35a)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필요한 것은 회개를 통해 임하는
하나님의 긍휼 뿐입니다. [자기 죄들을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누구든지 죄들을 시인하고 버리는 자는
긍휼을 얻으리라.](잠2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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