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예레미야 3:1-19
요절: 예레미야 3:15
예레미야 3장입니다. 3-6장은
이스라엘의 타락을 지적하시고, 회개하지 않으면 바빌론의
포로가 될 것이란 엄중한 심판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3장에서의
핵심 어휘는 ‘돌아 오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라- 3:1, 7, 12, 14, 22. 주님은
언제나 범죄한 영혼들을 향해 부르십니다. 주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해 오래 참으셨듯이 오래 참으십니다. 심판은
최후의 수단입니다. 이스라엘은 많은 연인들과 더불어
창녀짓을 했습니다(1). 이스라엘은 행음과 사악함으로 땅을
더럽혔습니다(2). 하지만 주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향해 [그러할지라도
너는 다시 내게로 돌아올지니라. [주]가 말하노라.](3:1).
사람들은 버림받은 아내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다가
다시 본 남편에게 돌아가는 일이 가증한 일이며,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신24:1-4, 레18:25-28).
창녀 짓을 한 아내를 다시 받아들일 남편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아내를 받아들이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향해
참으로 오래 참으십니다. 시편86:15, [그러하오나, 오 {주}여,
주는 동정심이 많으시며 은혜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며
긍휼과 진리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86:15).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주님의 성품을 오해하고,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 불신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지 않고, 다른 사람의 죄악에 대해서
분노합니다. 그래서 독재자들이나 부정부패 사범들이나
흉악한 강도나 폭력배, 도둑들, 인륜을 파괴한 파렴치범들,
사기 전과범들에 대해서 속히 정의의 심판이 집행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 분노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혹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함을 알지 못한 채 네가 그분의 선하심과
관대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2:4)란
말씀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곧잘
오해합니다. 주님은 심판을 보내시기 전에 오래 참으십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신 것이 아니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었다면 저와 여러분은 결코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벧후3:15a). 주님은 파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들에게도 오래 참으시고(롬9:22), 동시에 우리를 향해서
심히 오래 참으십니다. 바울은 자신의 구원이 주님의 오래
참으심의 결과란 점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런 까닭으로 긍휼을 얻었나니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내 안에서 심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앞으로 그분을 믿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될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1:16). 생각해 보십시오.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조하고, 교회를 뿌리채 뽑아
버리겠다고 설치는 바울을 향해 주님의 불같은 진노와
의로운 심판이 임한 것이 아니라 심히 오래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아마 몇몇 교인들은 주님이 왜 저런
인간을 저토록 오래 살려 두시는가?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그런 오래 참으심의 수혜자들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소나기가 그치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러할지라도/
네가 창녀의 이마를 가졌으므로 부끄러워하기를
거절하였도다.](3).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해 주님은 비를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징계였습니다. 비를 거두시는 것은 주님의 진노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세계 어느 민족에게나 있는 무속 신앙이
아니라 성경적 진리입니다. 비를 내리지 않으시는 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땅에 사는 인간들을 향한
진노요, 심판입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잘 행하면 주님은
정확히 비를 주실 것입니다. 신명기 11:13-14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날 너희에게 명령하는바 내 명령에 너희가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고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여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섬기면 내가 너희 땅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제 때에 주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즙과 기름을 거둘
것이요,](신11:13-14). 그러나 비가 범죄할 때면 주님은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시므로 땅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시고, 농사를 망하게 해 버리십니다. [[주]의
진노가 너희를 향해 /불같이/ 타올라 그분께서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시며 땅이 열매를 내지 아니하게
하시므로 [주]께서 너희에게 주신 좋은 땅에서 너희가 속히
멸망할까 염려하노라.](신11:17). 이스라엘은 제 때에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 때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은 그들이 이런
현상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기도하면 비를 내리시고 재해를
거두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역대기하 7:13-14절을 보면,
[혹시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시
메뚜기에게 명령하여 땅을 삼키게 하거나 혹시 내 백성
가운데 역병(疫病)을 보낼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자기를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 땅을 고치리라.](대하7:13-14). 지금
중동지역은 극도로 황무지와 사막화로 인해 열사의 땅이
되었습니다. 본래 그 지역은 그런 땅이 아니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던 가나안 땅이 사막이 되고, 황무지가 된 것은
범죄로 인해 주님이 그 지역에 비를 주지 않으신 결과입니다.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내버려 두리니 가지를 치거나
땅을 갈지 못하고 다만 찔레와 가시가 올라올 것이며 또 내가
구름들에게 명령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사5:6). 오늘날 전 세계는 급격한 사막화로
인해 해마다 2-3억의 인구가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갈수록 비는 부족할 것이며, 물은 부족해 질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경고임을 알고 회개해야 할 일이지
인공비를 만들겠다고 연구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비를
내리지 않는 심판은 오늘날 교회 시대를 거쳐 천년 왕국
때에도 여전히 유효한 주님의 징계 수단입니다. [땅의
모든 가족들 중에서 그 왕 곧 만군의 [주]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주께서/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슥14:17). 여러분은 모두
도시 생활을 하면서 농부들처럼 비에 대해서 심각성을 못
느낄 수 있습니다. 이곳 캘리포니아는 연강수량이 15-20mm밖에
되지 않는 사막임에도 불구하고 곳곳 수도 시설을 잘 해
두어서 나무와 잔디가 자랍니다. 하지만 어느덧 물이
부족하니 주의하라는 뉴스가 나오고, 제한 급수가 시작되고,
마침내 물이 나오지 않는 그런 날이 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때 교회와 성도들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땅을 파고,
저수지를 만들어야 합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business에서는
돈이 마르고, 성경을 읽을 때는 영감이 마르고, 부부
관계에서는 애정이 마르고, 친구 사이에는 우정이 마르고,
내 영혼에 은혜가 고갈 될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겠습니까?
기도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비가 없으면 과실수는 열매를
맺지 못하듯이, 성도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할 때 우리는
어김없이 기도하고 회개함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말씀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이는 주께서, [내 가르침은
내리는 비요, 내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내리는
가는 비요, 풀밭에 내리는 소나기로다.](신32:2)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4절입니다.
[네가 이제부터 내게 부르짖어 /말하기를/, 내 아버지여,
아버지는 내 어린 시절의 인도자시니이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또 그분께서 자신의 분노를 영원히
간직하시겠느냐? 그분께서 끝까지 분노를 품으시겠느냐?
하리라...](4-5a).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십니다. 어린
시절은 누구나 아버지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패역하고
범죄한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분노하고 매질하실 수 있지만
아들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이키고
바르게 자라나기를 원하시며, 평생토록 아버지와 바른
관계성을 맺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날 가정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이들은 아버지의 가르침보다 학교 친구들의
가르침을 더 비중 있게 받아들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침대신 세상 선생들을 많이 두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그는 어김없이 타락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도자이십니다. 언제까지? 평생토록입니다. [이는
이 하나님께서 영원무궁토록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
그분께서 /우리가/ 죽기까지 우리의 인도자가 되시리로다.](시48:14).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그분을 보고,
그분에게서 듣고, 그분의 인도를 받게 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그를 백성들에게 증인으로 주었으며 백성들에게
인도자와 지휘자로 주었노라.](사55:4). 주님은 우리를
뒤따르게 하게 하시려고 크고, 또렷한 발자취를 남겨
두셨습니다(벧전2:21). 그리고 우리를 그분의 발자취가 있는
길에서 세우셨습니다. [의가 그분 앞에 나아가며 그분의
발자취가 있는 길에 우리를 세우리로다.](시85:13).
6-11절은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해 전혀 교훈을 받지 못한 유다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로 타락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들은 앗시리아(722 B.C, 사르곤 2세)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그런 북왕국의 모습을 보면서도 회개함이
없었습니다(6-7). 주님은 대언자들을 보내 “너는 내게
돌아오라”(6) 하였지만 돌아오지 않았고, 유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8절은 그들이 전혀 교훈을 얻지 못했음을
주님이 지적하신 내용입니다. [타락한 이스라엘이 이 모든
이유로 인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녀를 버리고
그녀에게 이혼증서를 주었으되 이스라엘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이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도
가서 창녀 짓 하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8).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혼 증서를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버림을 받아 이방인들의 종으로 팔려 갔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17:18, [그러므로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심히 분노하사 자신의 눈앞에서 그들을
옮기시니 유다 지파 외에는 아무도 남은 자가 없었더라.](왕하17:18).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서 북왕국의 배교한 상태를 실물
설교를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유다는 자매된 이스라엘을
보고 크게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유다는
이스라엘보다 한 수 더 떠서 부정을 더 많이 저질렀습니다. [그녀의
동생 아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자기 언니보다 더 지나치게
사랑하며 자기 언니의 행음보다 더 많이 행음하여 자기
언니보다 더 부패하게 되었느니라.](겔23:11).
말씀을 듣고도, 역사의
교훈을 통해서도, 옆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고 들으면서도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습니다.
시편 49:20, [존귀함 중에 거하는 사람이라도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시49:20). 새들조차 그물을 치는
것을 보면 도망을 가고, 산짐승들도 덫을 놓으면 다른 길로
갑니다. 그러나 멸망하는 짐승들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물에 걸리고, 함정에 빠지고, 덫에 걸립니다. [짐승 같은
자는 알지 못하며 어리석은 자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나이다.](시92:6).
성경에는 여러 가지 짐승들이 나옵니다. 성경을 알지만 믿지
않는 위선자들을 독사요, 뱀들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여자들을 돼지, 믿는 않는 남자들을 개라고
합니다. 성도가 그런 짐승들과 어울리고, 같이 지내다 보면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아도 깨닫지 못합니다. 깨달음은
머리(지능지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어떤 성도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을 본다면
여러분은 즉시 자신을 돌아보고, 돌이켜야 합니다. 전에
마음이 황폐했던 때 했던 생활 습관이 반복되고, 그 때
좋아했던 음악이 다시 들리기 시작하고, 그 때 맛보았던
음식이 다시 먹고 싶고, 그 때 보았던 것을 다시 보고 싶을
때, 그 때 쓰던 말투가 다시 돌아올 때, 그 때 즐겼던 것들이
다시 마음 속에 그리워질 때 여러분은 즉시 깨달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외치기를, [백성 중의 짐승 같은 자들아,
너희는 깨달으라.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운
자가 되려느냐?](시94:8)고 했습니다. 유다는 이스라엘의
죄와 그에 따른 심판을 통해서 배운 것도 깨달은 것도
없었습니다.
· 죄에
연루되면 사람의 마음은 완악해지고, 보고 들어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악한 자들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주]를 찾는 자들은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28:5). [많은
사람들이 정결하게 되고 희게 되며 단련을 받을 것이나
사악한 자들은 사악하게 행하리니 사악한 자들은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들은 깨달으리라.](단12:10).
· 불신은 우리의 깨달음을 방해합니다. 주님이 복음서에서
말씀을 듣고도 믿지 못하고, 계속되는 표적을 보면서도 불신
가운데서 또 다른 표적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장 자주 인용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이에 그분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기를, 참으로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참으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느니라, 하며](사6:9). 우리는 주님이 그토록 자주
“너희는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을
통해 볼 때, 말씀을 듣는 마음의 자세가 성경 공부에 가장
중요한 것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저는 성경을 처음 통독할
때 반복적으로 ‘그들은 ...깨닫지 못하더라’란 말을
보았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 교회나 대부분의 성도들이 매주
교회에 나오면서도 전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영적
성장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예입니다. · 완악한
마음은 깨달음을 방해합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동행하면서 늘 말씀을 듣고, 보았지만 깨닫지 못했던 것이
많았는데 이유는 그들이 마음이 완악했기 때문입니다(막6:52,
8:17,행19:9).
그럼 우리는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남의 잘못이나
남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여도 자기의 허물이나 잘못은
잘 못 깨닫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자기 잘못들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주여, 은밀한 허물에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시19:12)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첫째, 주님의 임재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아무도 스스로
무엇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깨달음은 옳고 그름을
확인해 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없이
스스로 깨달은 것은 자기들을 위하여 우상을 만든
것이었습니다(호13:2). [이제 그들이 더욱더 죄를 범하여
자기들의 은으로 자기들을 위하여 형상들을 부어 만들되
자기들이 깨달은 대로 우상들을 만들었으니...](호13:2).
솔로몬 같은 지혜자도 해아래서 깨달은 것은 허무함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의 임재 앞으로 가는 것, 그 때 우리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73:17).
우리는 날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깨달을 수
있습니다.
둘째,
창조주를 깊이 생각할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의 손이 이것을 이루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이것을
창조한 것을 보고 알며 깊이 생각하고 함께 깨달으리라.](사41:20).
대자연을 통해 우리는 우리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반대로 작은 꽃잎 하나, 생명체 하나에서도 하나님의 오묘한
솜씨를 느끼게 되는데 이를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지는
저녁놀을 보면서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밤하늘의
은하수를 하염없이 쳐다보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도시 문명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한 것들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흙대신 아스팔트가
가득하고, 거리에는 차들이 넘쳐나고, 사람들이 만든 고층
빌딩들이 하늘을 가리며, 하늘에는 별들 대신 인공 위성이
돌고 있다는 생각을 함으로써 사람들은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어린 아이들은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별이 움직인다!고 외쳤는데, 요즘은 ‘아냐
인공위성이 도는거야!’라고 말합니다. 유성이 떨어지면, ‘위성이
고장나서 추락하나!’ 이런 식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창조물을 바라보고, 거기에 노출되는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셋째,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곧 그의
통치 제일년에 나 다니엘이 여러 책을 통하여 [주]의 말씀이
대언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사 /알려 주신/ 그 햇수를
깨달았나니 곧 그분께서 예루살렘이 황폐한 가운데 칠십
년을 채우시리라, 하신 것이니라.](단9:2). 다니엘은 여러
책을 통하여 예레미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성경의 예언이 여러 책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구원의
지식을 얻고, 깨달음을 얻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는 바를
너희가 깨닫게 되리라.)](엡3:4)고 성경 읽기를
촉구했습니다. 잠언 기자는 잠언서의 기록 목적이 우둔한
자와 단순한 자에게 깨달음(명철)을 주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깨닫게 되는데, 이는 세상 어떤 학교에서도 배울 수
없는 지혜들입니다.
넷째,
징계와 책망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모두 깨달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어려운 환경이나 전혀
성격이 맞지 않는 동료나 상관, 불편한 가족 관계, 경제적
파산이나 수고에 따른 대가를 받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때로는 질병이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통해서 주님은 바로
잡아 주시는데, 그 때 우리는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비웃는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단순한 자도 주의하리라. 명철이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깨달으리라.](잠19:25).
다섯째,
주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라. {주}께서 모든 일에 네게
깨달음을 주시기 원하노라.](딤후2:7). 사람이 명철을
얻는데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호흡으로 만들어진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몸은
흙으로 지어졌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호흡을 불어 넣으셨고,
그 호흡이 우리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욥이 고백하기를 [하나님의
영께서 나를 만드시고 전능자의 호흡이 내게 생명을
주었느니라.](욥33:4)고 한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 가운데 하나님의 숨(호흡)이 직접적으로
불어넣어진 것은 단연 성경입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입니다(딤후3:16). 그렇다면 내
안에 있는 생명, 내 안에 있는 영은 같은 하나님의 호흡이
담긴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 안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영감(靈感)이
사람들에게 명철(明哲)을 주시나니](욥32:8). [주의
말씀들이 들어오면 빛을 주며 이 빛이 미련한 자에게 명철을
주나이다.](시119:130). 저는 여러분이 이런 방식으로
영적인 깨달음에 풍요로운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한 가지 확실한 깨달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생명이시오, 구주란 사실입니다. 이
한 가지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면 나머지 어떤 위대한
깨우침도 모두 거짓입니다(요일5:20).
유다는 이스라엘의 타락을
보았으며(7), 그들이 받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으며(8), 오히려 가벼이 여기고 반역했습니다(9).
이스라엘이 회개를 거부했듯이 유다 역시 회개하기를
거부했습니다(10).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단지 거짓으로 돌아왔느니라. [주]가
말하노라.](10). 참된 회개를 마음을 다하여 자신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버리지 않고
돌아선다면 그것은 거짓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마음이
거짓된 사람은 자신의 길을 결코 버리지 않은 채 하나님께로
나아옴으로써 여전히 자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성도들 역시
자신의 길을 그대로 간직한 채 좀 더 열심히 종교 생활을
함으로써 자신은 헌신했다고 생각합니다. 잘 안나오던
교회를 규칙적으로 나간다고 해서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안 하다가 이제 다시 한다고 해서 회개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전혀 소용없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추구하고 사랑하던 마음을 버려야 하고, 자기 중심적인
마음을 버려야 하고, 자기 유익을 추구하던 것을 버리지
않은 채 주님께로 돌아왔다면 더러운 몸도 씻지 않고,
더럽혀진 옷도 벗지 않은 채 새 옷을 입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은 회개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자기
길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발람은 주의 명령대로 행한 줄로
알았지만 그는 회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돔에서 발길은
돌렸지만 눈과 마음은 돌리지 못했던 롯의 아내는 결국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은 거짓으로 나아오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스겔 14:3-5. [사람의
아들아,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며 자기
불법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두었으니 과연 그들이 내게
물을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의 집에서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며 자기
불법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두고 대언자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에게 나 [주]가 그의 우상들의 많은 수효대로
응답하리니 이것은 이스라엘의 집이 다 자기 우상들로
말미암아 나와 사이가 멀어졌으므로 내가 그들의 마음
상태대로 그들을 취하고자 함이라.](겔14:3-5).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그대로 응답하심으로 이들을 모두
속여 버리십니다.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며 나올 때는
우상들의 수효대로 응답하십니다. 거짓 대언자들을 주시는
것 역시 그들이 거짓 회개를 했기 때문입니다(겔14:7,9). 아합
왕은 거짓 대언자들의 말대로 전쟁에 나갔다가 승리는
고사하고 화살에 맞아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자신들의 마음 속에 우상을 세워두고, 그런
욕구를 채워줄 교회와 목사를 찾고 있습니다. 그들의 결국은
패망입니다.
11절은 타락한 이스라엘의
불만입니다. [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타락한
이스라엘은 반역한 유다보다 자기를 더 의롭다
하였느니라.](11). 이 말씀은 죄인들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낸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비교하는 상대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예루살렘보다 먼저 멸망했는데, 그들은
하나님께 할 말이 있었습니다. 죄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항상 누구와 비교하는 것입니다. 비교의식, 상대주의,
열등감, 교만은 모두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과 사람들을
비교한 결과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늘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다보다 더 의롭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억울하고, 피해자란 생각을 할 것입니다.
지금 지옥에 있는 많은 혼들은 자기가 아는 사람이 그곳에
없다는 이유로 매우 억울해하고, 자신이 복음의 피해자요,
십자가의 희생자라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지지난 시간에
이와 비슷한 말씀을 본 적 있습니다. [이르기를, 너는 너
스스로 서 있고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 이는 내가 너보다
거룩하기 때문이니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하루 종일 타오르는 불이로다.](사65:5).
저는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성도들이 좀처럼 이런 비교의식과 상대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처음에 자신이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고후11:5, 12:11). 특히 사역에서나 지식에서는
어떤 사도와 비교해도 결코 부족할 것이 없으며 마땅히
칭찬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옥중
서신에서 쓴 자신의 편지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도 가운데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富饒)함을
이방인들 가운데 선포하게 하시고](엡3:8). 그는 지극히 큰
사도들이 아니라 모든 성도 가운데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가 죽기 직전에 쓴 디모데전서에는
[신실하도다 이 말이여,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하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
함이로다.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딤전1:15).
그는 이제 사람들과 비교해도 자신의 모습은 죄인들 중에
우두머리란 사실을 고백하고 인정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런 변화를 통해 무엇을 배웁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았고, 그 모습은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욥기에서도 동일한
진리를 배웁니다. 욥은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욥은 친구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 나의 순전함을 아시기를 원하노라.](욥31:6)고
탄식할 정도였습니다. 욥은 세상 어떤 사람과 비교해도
자신은 의롭고 잘못이 없었습니다. 앞에서 설교하는
친구들과 비교해도 조금도 나쁠 것이 없었습니다. [너희가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내가 너희보다 못하지 아니하니라.](욥13:2)
욥은 비교를 거부할 정도였지만 여전히 비교 우위에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나도 너희만큼이나 명철(明哲)하며
너희보다 못하지 아니하니 참으로 그와 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리요?](욥12:3). 욥의 이런 자세는 친구들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너만큼이나, 너희보다”란
말에 기분 좋을 사람없고, 전적으로 수긍할 육신은 거의
없습니다. 친구 중 하나는 즉각 [너는 아는데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너는 깨달았는데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에게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연로한
사람도 있으며 네 아버지보다 훨씬 더 늙은 사람도 있느니라.](욥15:9-10)고
반박했습니다. 이들은 끝없이 서로가 서로를 비교하며
논쟁하고, 반박하고, 싸웠습니다. 사람 앞에서 의로운 것,
사람들보다 거룩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욥이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는 더 이상 누구와
비교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본 모습을 바로 보았는데, 그때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더라.](욥42:6).
우리는 모두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보아야만 합니다.
12-15절은 타락한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므로 회개하면 분노를 붓지 않으실 것입니다(12).
주님은 ‘오직 네 죄를 인정할지니’(13)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으로서 그들을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13).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가 신랑과 신부의
관계이듯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
“내가 너희와 결혼하였으니”(14)란 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혼 관계를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에 따른 것이
아니니 내가 그들의 남편이었을지라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주]가 말하노라.](렘31:32). 주님은
자신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정혼할 것이며, 남은 자들은
하나님과 혼인하게 될 것입니다. [또 내가 영원토록 나를
위하여 너와 정혼할 것이요, 참으로 나를 위하여 의와
공의와 인자와 긍휼로 너와 정혼하며](호2:19). 주님은
포로된 이스라엘을 시온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 맞는 목양자들’을 주실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내 마음에 맞는 목양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明哲)로 너희를 먹이리라.](15).
양떼에게 가장 큰 복은 목양자들을 얻는 것입니다. 여기서
목양자로 번역된 pastors란 말은 신약 성경에서 딱 한번
나오는데 ‘목사’라고 번역된 말입니다. 주님은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맞는 목양자는 지식과 명철로 양들을 먹이는 자들입니다.
목양자가 세워지면 양들은 놀라거나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또 내가 그들을 먹일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부족하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23:4). 오늘날 교회와 양들은 이런 목자들을
많이 세워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16절은
새언약하에 있게될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주의 언약궤는
옛 언약, 즉 율법을 가리킵니다. 이제 회개하고 돌아온
주님의 목양자들 아래서 양육받고, 정혼한 이스라엘은 새
언약하에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17-18절은 천년 왕국에서
땅을 상속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17절은
그들의 마음 가운데 주의 율법이 새겨졌음을 말하는 것이고,
18절은 유업을 상속받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계속 반복되어 나오므로 그 때 좀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19절은 다시 한번 주님의 반복된 권면이자
명령입니다. “너희가 나를 내 아버지라 부르고, 나를
떠나지 말라”(19). 바알을 따라 갔던 그들이 이 권면에 귀를
기울였다면 그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