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예레미야 5:1-5:31
요절: 예레미야 5:25
예레미야 5 장은 유다의
전적 타락을 다루고 있습니다. 1절은 예루살렘에 공의를
구하거나 진리를 찾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음을 선포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는지 맞는지 너희 스스로 한번
찾아보라고 도전하셨습니다. [너희는 이리저리 예루살렘
거리를 뛰어다니며 이제 보고 알며 그 넓은 곳에서 찾아보라.
만일 너희가 공의를 집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거나 혹은 거기에 그런 자가 있다면 내가 예루살렘을
용서하리라.](1).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이 의인 열
명이 없어서였다면(창18:31), 지금 망하게 될 예루살렘은 의인
한 명이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국가와 도시와 가정이
멸망하지 않고 유지되는 한 가지 비결은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한 명의 의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위하여 내 앞에서 울타리를
세우며 무너진 곳에 서서 나로 하여금 그곳을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들 가운데서 찾았으나 아무도 찾지
못하였나니](겔22:30)라고 하십니다. 세상이 망하고,
국가가 망하고,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붕괴되고, 한
개인이 구렁텅이에 빠지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원인을 찾고 이유를 분석하다가 안되면 운(運)이 따르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유다가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악함이나 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인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자신을 의롭다고 하거나 합리화합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탄식을 들어보십시오. [대부분의 사람이 저마다 자기의
선함을 외치거늘 누가 신실한 사람을 찾을 수 있으리요?](잠20:6).
2절에 보면 유다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말로는, [주]께서 살아 계신다, 할지라도 참으로 거짓되이
맹세하느니라.](2). 하지만 이는 믿음에서 나온 신앙
고백이 아니라 유다의 전통과 종교로서 고백하는 형식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믿음은 너무나
중요한 믿음이요, 신앙 고백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히11:6).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자신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니라.](히11:6). 그러나 말로는 믿고 행위로는
거부하는 자들이 말하는 그런 고백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 고백이 아니라 자신을 속이고
위장하는 위장 고백입니다. 야고보서 2:9, [네가 한
하나님이 계시는 줄 믿으니 잘하는도다. 마귀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
3-6절은 회개를 거부한
자들의 받게 될 심판입니다. [오 [주]여, 주의 눈이 진리
위에 있지 아니하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으나 그들이
근심하지 아니하였고 주께서 그들을 소멸시키셨으나 그들이
징계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며 자기 얼굴을
바위보다 굳게 하고 돌아오기를 거부하였나이다.](3).
성경은 주의 눈이 불꽃 같은 눈이라고 말씀합니다. 주의
눈은 진리 위에 있기 때문에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십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차마 악을 보지 못하시며 또 차마 불법을
보지 못하시거늘 ...](합1:13a). 주의 눈은 모든 악을 흩어
버립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심판의 왕좌에 앉은 왕은
자기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하느니라.](잠20:8)고
말씀합니다. 이런 이유로 유다는 범죄하고 돌이키지
않음으로써 주의 눈에 은혜를 입지 못하고 도리어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채찍과 심판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근심하지 아니하였고, 징계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돌아오기를 거부했습니다. 여기서
징계라고 번역된 단어는 ‘바로잡음’(correction)이란
뜻입니다. 성경의 기록 목적 가운데 하나는 교리와 책망과
바로 잡음입니다(딤후3:16). 잠언의 주제 가운데 하나는
징계와 바로잡음인데,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아들을
징계하시고 바로 잡아 주십니다. 잠언 3:11-12, [내 아들아, /너는/
[주]의 징계를 멸시하지 말며 그분께서 바로잡아 주심을
싫어하지 말지니 이는 [주]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바로잡아 주시기를 마치 아버지가 자기가 기뻐하는 아들을
바로잡아 주는 것같이 하시기 때문이라.](잠3:11-12).
문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징계(바로잡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느니라”(렘2:30, 5:3,
7:28)고 하셨습니다. 당대의 모든 대언자들은 유다가 주님의
책망과 징계와 바로잡음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한결같은 증언은, [그녀가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며 징계(correction)하는 것을 받지 아니하고 [주]를
신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습3:2)입니다. 4절은 주의 길도 하나님의
심판도 알지 못하는 백성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5절은 주의
길과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만 그것을 무시하는 자들에 대해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이 받을 심판은
너무나 끔찍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숲에서
나오는 사자가 그들을 죽이고 저녁때의 이리가 그들을
노략하며 표범이 그들의 도시들을 노려볼 것인즉 거기서
나오는 자마다 갈기갈기 찢기리니 이는 그들의 범죄가
많으며 그들의 타락이 늘어났기 때문이라.](6). 사자,
이리, 표범에게 갈기갈기 찢긴다고 합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흔히 짐승들에 비유했는데 여기서 사자, 이리, 표범은
심판자들을 가리킵니다. 예레미야 4:7에는 사자의 정체가
앗시리아입니다. 호세아 13:7에는 하나님이 친히 사자와
표범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사자같이 되고
길가의 표범같이 그들을 지켜보리라.](호13:7). 이는
이방인들을 통한 심판이 전적으로 주님의 손에서
비롯되었음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들의 말들은 또한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때의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기병들은 /널리/ 퍼지고 멀리서 오므로 마치 급히 먹으려
하는 독수리같이 날아오리라.](합1:8). 여기서 표범과
독수리가 비유로 쓰였는데 앗시라아 군대의 기병대를
말합니다. [그녀 안에 있는 통치자들은 울부짖는
사자요, 그녀의 재판관들은 뼈를 갉아먹되 이튿날까지
기다리지 아니하는 저녁때의 이리요,](습3:3). 스바냐에는
유다의 타락한 통치자들과 재판관들이 사자요, 이리라고
말씀합니다. 유다 내에 사자와 이리가 있었듯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뱀들과 개들과 돼지들과 이리들이 득실댑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믿음이 없이 위선을 부리는 작자들을 “뱀들아,
독사들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떠나면서 “사나운 이리들”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올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행20:29). 믿지 않는 남자들을 개,
믿지 않는 여자들을 돼지라고 하십니다(벧후2:22). 하나님의
순수한 양무리들이 타락할 때 그들은 이런 짐승들에게
찢기우게 됩니다(6c).
7-9절은 심판의 당위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판사가 범죄자들에게 왜 형을
집행해야 하는지 판결문을 읽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죄는 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죄, ② 음행의 죄,
③ 자기 이웃의 아내를 따른 탐욕의 죄(8)입니다. 이는 우상
숭배와 성적 타락이 결코 분리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란
사실을 잘 보여 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살아 있는
믿음만이 세상을 이기며, 육체의 정욕을 이기며, 죄를
거부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에서
떠나면 누구도 세상을 이길 수 없고, 성적 타락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날 현대 문화는 소돔과 고모라에 못잖은 성적
타락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신문, 잡지, 영화,
소설은 물론이고 안방에 상영하는 T.V에 까지 거의 모든 것에
성적 타락이 넘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를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너를
용서하겠느냐?...](7). [[주]가 말하노라. 내가 이런
일들로 인하여 징벌하지 아니하겠느냐?...](9).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12-13절은 거짓 대언자들의
행태입니다. 유다에는 제사장들, 법을 다루는 자들,
목양자들, 대언자들(2:8)이 있었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자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특히 대언자들은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바알을 힘입어
대언하는지라, 주님은 없다!, 재앙은 없다!라고 대언합니다.
[그들이 [주]에 대하여 그릇되이 전하며 말하기를, 그분은
계시지 아니하니 재앙이 우리에게 닥치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가 칼이나 기근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대언자들은
바람이 되리라. 말씀이 그들 속에 있지 아니한즉 그와 같이
그들에게 이루어지리라, 하였도다.](12-13). 거짓
대언자들은 얼마나 확실하게 증거하는지 듣는 자들은
그들의 음성만으로도 저절로 확신이 들 정도였습니다. 마치
마귀가 여자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4)고
거짓 확신을 심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강단에서 거짓
목사들이 거짓 복음을 확신있게 증거하는 것도 다 같은
원리입니다.
14-18절은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첫째, 예레미야의 말을 불이 되게 하시고,
백성들을 나무가 되게 하셔서 다 태워 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14). 이는 은혜와 생명의 말씀이 아니라 심판의
말씀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둘째, 멀리서 강한 민족 즉
바빌론을 데리고 와서 그들을 멸하시겠다고 하십니다(15).
갈대아인들은 유다를 불모지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17). 이
말씀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18절은 그
가운데서도 완전히 끝내지는 않으시겠다는 주님의 은혜의
말씀입니다. 19절은 유다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으므로, 그들의 땅이 아닌 우상의 본고장인
바빌론으로 옮겨서 거기서 마음껏 우상을 숭배하도록 해
버리시는 내용입니다. 반복되는 우상 숭배의 죄악으로 인해
그들은 70년간 우상 숭배의 허무함을 절감하도록 해 버리신
것입니다. 21절은 지각이 없어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백성들을 향해 외칩니다. 왜
백성들이 지각이 없고, 귀와 눈이 있으면서도 귀머거리와
맹인처럼 되었습니까? 우상을 숭배하고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도 우상들과 같으며
우상들을 신뢰하는 자들도 다 그와 같도다.](시115:8,
135:18). 우상을 만들고 우상을 신뢰하면 우상과 같이
됩니다. 우상들은 듣지 못하며, 보지 못하며, 깨닫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하게 됩니다. 경건(godliness)이란
하나님과 같게, 하나님처럼이란 말입니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또 모두 당황하며 다 같이
혼동에 빠질 것이로되](사45:16). 우상을 만들면 혼동에
빠집니다. 고로 지각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재물을 우상을
섬기지는 않습니까?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기 배를 섬기고, 자존심과 자기 명예를
지키고자 합니다. 그런 자들은 항상 배워도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며, 설교를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성경을
읽어도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딤후3:7). 신약 성도들은
구약의 유대인들처럼 어떤 형상을 만들거나 그 앞에서
절하지는 않겠지만(캐톨릭 제외) 더 많은 우상을 숭배합니다.
교육을 숭배하고, 과학을 숭배하고, 기술을 숭배하고, 돈을
숭배하고, 자녀들을 숭배하고, 자신이 숭배받기를 원합니다.
자아를 십자가에서 처리받지 못한 성도들은 주님을
섬기면서도 우상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肢體)들을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 숭배니라.](골3:5).
이런 우상 숭배에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아무런 상속이
없습니다(엡5:5). 사도 바울과 요한의 공통적인 권면을 들어
보십시오. [그런즉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를 피하라.](고전10:14), [어린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들을 멀리하라. 아멘.](요일5:21).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가정 교사(몽학 선생)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스승이라면, 우상은 거짓 선생입니다. [새긴
형상은 그것을 만드는 자가 새긴 것이니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부어 만든 형상은 거짓 선생이니라. 자기의
세공품을 만드는 자가 말 못하는 우상들을 만들고 이것을
신뢰하니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합2:18).
22-25절은 자연에도 경계가
있고, 주께서 정하신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께서 정하신 경계와 범위를 마구 넘어버리는
죄악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주님은 자연 계시를 통해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주시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 역시
바다와 모래, 비를 통해서 가르침을 주십니다. 22절은 오늘날
해양 공학에서 참으로 신비라고 여기는 부분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너희가 내
눈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영원한 법령으로
모래를 배치하여 바다의 경계로 삼아 바다가 모래를 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바다의 물결이 일어도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큰소리를 질러도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22).
해변의 모래는 하나님이 세우신 영원한 법령입니다.
여러분이 해변의 모래밭을 걸을 때 이점을 생각하시면
자연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를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다의 물결을 모래 위로 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경계를 정하사 물들로 하여금
넘어가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시104:9). 바다는 그 법령에 순종하지만
반역하는 유다는 늘 그것을 넘어 서 버립니다(23). 우리는
자연을 통해 뭔가를 배울 수 있고 배워야 합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고, 추수 주간을 주시는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유대 백성들은 결국 70년간 이 땅에서 소출을 얻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일을 해서 소출을 얻고, 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지 둘러본다면 그것이 참으로 행복한 일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비를 주시고, 수확하는 기간을 주시는 주님을
두려워해야 하듯이 우리는 우리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이는
네 손이 수고한 것을 네가 먹을 것임이라. 네가 행복하고
형통하리로다.](시128:2). 여러분들은 월급을 받고, 소출을
수확할 때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25-29절은 유다의 현
상태입니다. 25절은 왜 기도의 응답이 되지 않는지를 보여
주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너희 불법들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들이 좋은 것들을 막아 너희에게 이르지
못하게 하였느니라.](25). 여기서 이러한 일들이란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지 않는 가뭄의 피해, 소출을 얻지
못하는 흉작의 문제를 언급한 것입니다. 때로 해일이 일어서
바다가 해변의 모래를 넘어오고, 태풍이 쳐서 물이 육지를
덮치고, 제 때에 비가 오지 않는 문제는 이상 기온이 아니라
유다의 불법과 죄들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는
예레미야 3:3을 볼 때 더욱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소나기가
그치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러할지라도/ 네가
창녀의 이마를 가졌으므로 부끄러워하기를 거절하였도다.](렘3:3).
농부에게 비가 없는 일이나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손님이
없는 문제나 연주하는 자들에게 관객이 없는 문제는 다 힘든
일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우리의 불법과 죄들이 이런 것들을 물리치고 좋은 것들을
막아 버립니다.
그런데 특이한 일은
불법과 죄악이 가득한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경우가
허다한데 우리는 헷갈리게 됩니다. 27-28절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사악한 자들이 크게 되고, 부유하게 되고,
기름지고 빛납니다. 죄로 인해 징계받고, 고난받는 성도들은
이런 현실에서 잠시 불신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걱정마십시오. 29절에서 주님은 “내가 이런 일들로
인하여 징벌하지 아니하겠느냐? 내 혼이 이같은 민족에게
원수를 갚지 아니하겠느냐?”(29)고 하십니다. 성도들은
주님이 회개하도록 고난을 주실 때, 벌받지 않는 악인들의
형통함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너는 악을 행하는 자들로 인하여 초조해 하지
말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부러워하지 말라.](시37:1).
다윗도 사람인지라 한 때, [이는 내가 사악한 자의 번영을
보고 어리석은 자를 부러워하였음이로다.](시73:3)고
말합니다. 주님은 학대하는 자를 부러워하지 말고(잠3:31),
죄인들을 부러워하지 말며(잠23:17), 악한 자들을 향하여
부러워하지 말며(잠24:1), 사악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라(잠24:19)고
하십니다. 때로 육신적인 성도들 가운데 내일 죽어도 좋으니
아방궁에서 한번 살다 죽어 봤으면 하거나, 총에 맞아
죽더라도 한 번 원없이 죄악을 누려 보았으면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들은 이 생이 전부요, 후에 반드시
주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0-31절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놀랍고도 무서운 일입니다. [이 땅에서 놀랍고도
무서운 일이 이루어지고 있도다. 대언자들은 거짓되이
대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방법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하니 그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30-31). “대언자들은 거짓되이 대언하고”.
주님은 이 일이 놀랍고도 무서운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신 사건입니다. 본래 거짓 대언자들은 백성들이 돌로 쳐서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거짓 대언자를 구분하는 방법은
예언의 성취여부입니다. 예를 들어 주의 이름으로 대언을
했는데 그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는 거짓 대언자입니다.
신명기 18:20,2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만일 어떤 대언자가 내가
말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자기 뜻대로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혹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대언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만일 대언자가 [주]의
이름으로 말하는데 그 일이 뒤따라 일어나지도 않고
성취되지도 않으면 그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대언자가 자기 뜻대로 말한 것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신18:22). 그래서 대언자들은 감히 함부로
거짓을 대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거짓
대언자들이 이스라엘의 교계와 정계를 완전히 장악해
버렸는데, 이는 백성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의 타락이 목사와 성도들의
합작품이란 사실을 말해 줍니다. 어느 한 편의 책임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거짓을 설교하는 목사를 좋아합니다.
목사는 거짓말을 잘 듣는 성도들이 기쁩니다. 이사야 30:10,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보지 말라, 하고 대언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들을 대언하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들을 대언하라.](사30:10).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이나 멸망에 앞서 늘 거짓 대언자들이 날뛰게 되어
있습니다.
대언자들이 거짓을 말하는
것은 백성들이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대언자들이
타락하는 것은 탐욕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렘6:13, 8:13).
대언자들이 거짓을 대언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렘14:14). 주님이 말씀을 주시지
않으면 단 한 마디도 대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대언자란
직업을 가졌다면 거짓 외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이는
교회의 설교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주시지 않으면
한 마디도 설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냄받지 않는
자들은 거짓 환상과 점술과 허무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수를 대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세상 일이나
세상 사람들의 말을 하다 내려 와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대언자들은 간음을 행하고, 거짓 속에서 걸으며, 악인들에
힘을 주고, 회개를 촉구하는 대신 죄를 합리화시켜 주는
일을 합니다(렘23:14).
거짓 대언자들은 말씀
대신 환상과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것을 말합니다(렘23:25).
그리고 속임수를 말합니다(렘23:26).
거짓 대언자들은 듣기에
좋은 말만합니다(렘27:14).
거짓 대언자들은 양의
옷을 입고 오지만 약탈하는 이리들입니다(마7:15). 거짓
대언자들은 많은 사람을 속입니다(마24:11). 거짓 대언자들은
큰 표적과 이적을 보이기도 합니다(마24:24). 거짓 대언자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습니다(눅6:26). 거짓 대언자들은
속죄의 교리를 부인합니다(벧후2:1). 이런 일이 현재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이 두 번째로
말씀하신 무서운 일은 제사장들이 자기 방법대로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율법에 기록된 대로
백성들의 죄를 속해주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하는 것보다 세상적인 방법이 훨씬 더 매력이
있는지라 성경대신 임의로 다스렸습니다. 백성들은 이것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나라의
사람들도 성경에 나오는 법을 지키는 것보다는 의회에서
따로 만든 법을 더 좋아합니다. 예를 들어 낙태 합법, 동성
연애 합법 이런 것은 이교도들에게 없는 법이지만 기독교
국가라 불리는 나라들에서는 엄연한 법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한 법률보다는 인본주의에
기초한 법률에 다스림 받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합니다.
문제는 교회의 성도들까지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음행의 연고 외에 이혼을 금지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성경
대신 세상의 법정에 가서 판사의 판결을 받아 아무 때나
이혼해 버립니다. 그것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신성 모독이나 욕설이나 더럽고 추잡한 말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것은 언론의 자유요 개인적인
문제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후자의 법을 사랑합니다.
목사들도 더 이상 성경의 원칙대로 교회를 운영하고,
성도들을 책망할 수 없는 것이 그렇게 하면 위법이 되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자녀를 매질해서
키우라고 합니다. 세상은 절대 때리지 못하게 합니다. 이제
목사는 더 이상 성경이 아닌 세상의 법과 문화를 배우고
이해한 후에 설교해야 할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훨씬 더 사랑합니다. 심지어 목사에게 찾아와서, “목사님,
그런 부정적인 설교는 좀 그만하십시오.”, “너무 성경,
성경만 말하지 마십시오.”라며 애정 어린(?) 충고를 하는
마귀의 자녀들도 있습니다. “너무 강하게 하지 마시고,
부드럽게 말하십시오.” 언제부터 목사가 성도들에게
설교하는 법을 배워가며 설교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놀라고 무서워하는 일이 바로 우리 교회
내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은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하니
그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31). 멸망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멸망의 직전에
살았던 유대인들을 보면서 종말을 앞둔 오늘날 교회가 얻을
수 있는 모든 교훈을 뼈저리게 새겨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