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예레미야 6:1-30

요절: 예레미야 6:16


예레미야 6장은
예루살렘에 닥칠 큰 파멸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예루살렘에서 멀리 도망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주님은 다가올 전쟁과 파멸에 대비해서 피할
길을 주셨는데 만약 이 길을 가지 않으면 달리 길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이 다가올 심판을 피하는 첫 번째 길은
‘훈계를 받는 것입니다’(8). 두 번째 길은 믿음의 조상들이
걸었던 옛 행로들 곧 선한 길이 어디 있는지 물어 보고 그
길로 걷는 것입니다(16). 세 번째 길은 굵은 베를 두르고 재
속에서 뒹굴며 애곡하는 것입니다(26). 이는 진실된 회개를
말하는 것입니다. 위의 세 가지 방법은 주님께서 심판을
앞둔 범죄한 예루살렘에게 주신 처방책이며, 동시에 오늘날
배교한 교회에 주신 처방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
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혼이 너를 떠나며 내가 너를 황폐하게 하여 거주민이
없는 땅으로 만들리라
.](8).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의
길에 있습니다(잠10:17). 훈계는 잠언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잠언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말씀인데 기록 목적이
아들을 훈계하기 위한 것입니다. 잠언 1:3, 1:8, 4:1, 8:10, 10:17,
19:20이 모두 훈계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훈계를
멸시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며(잠15:5), 훈계를 거절하는
자는 자기 혼을 멸시하는 자입니다(잠15:32). 주님의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재앙이 닥치기 전에는 결코 재앙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은 심판이 임하기 전까지 심판의
경고를 우습게 여깁니다
. 마치 롯의 사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에 롯이 나가서 자기 딸들과 결혼한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이 도시를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을 떠나라, 하였으나 그의
사위들이 그를 농담하는 자로 여겼더라.
](창19:14).
성경에서 유일하게 한번 사용된 농담이란 단어는 불신자가
신자가 주는 하나님의 경고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왔습니다.
롯이 증거의 능력을 상실한 것도 문제지만 롯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기는 사위들의 태도
역시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덕분에 그들은 불에 타
죽었습니다. 노아의 경고에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반대로 요나를 통해
전파되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은 니느웨 성읍은 회개하고
금식함으로 용서받았습니다. 침례인 요한의 경고를 받은
유다의 백성들은 회개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불신자들은 사람이 죽은 후에는 주의 심판이 있고, 지옥에
가게 된다는 경고를 우습게 여깁니다. 육신적인 성도들 역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손실을 당하게 될 유업의 보상들에
대해서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말씀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선포되는 말씀이 있음에도 듣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10절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고를 주어야 그들이 듣겠느냐?
보라, 그들의 귀가 할례받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이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도다
. 보라, [주]의 말이 그들에게는
치욕거리가 되며 그들이 그 말을 기뻐하지 아니하는도다.
](10).
주님은 유다가 말씀을 주어도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도다!
탄식하셨습니다. 유다의 백성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로 작정을 한 사람들입니다. 참고 구절-6:10,
17,19, 7:24,26,27, 11:8,11, 16:12, 17:23, 27, 23:16, 25:3, 25:7, 26:4, 27:9,
27:14, 16,17, 29:19, 32:33, 34:14,17, 35:13,1415,16; 36:31, 37:2, 14, 44:5,16.
타락과 배교의 첫 단계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설교가 듣기 싫고, 성경 읽기가 싫어지고, 성경
공부 모임이 마음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타락의
첫 징조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귀가
할례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할례 받지
못했다는 말은 무엇인가 덮고 있다는 뜻입니다. 할례란 덮고
있는 것을 잘라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추운
겨울에 벙어리 모자나 귀 가리개가 있는 모자를 쓰고 있으면
소리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을 치워야 잘 들립니다. ‘그들의
귀가 할례 받지 못하였으므로’란 말씀은 무엇인가가 귀를
막고 있는데, 그것을 걷어내지 않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으로 자신의 귀를 막습니까?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자신의 손으로 귀를 막습니다. 듣기 싫으면 귀를
막아 버립니다. [이에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자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행7:57). 결국 귀가
할례 받지 못한 문제는 보청기를 써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기 싫어 귀를 막는 대신 자기 욕심에 합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잘 듣습니다. [이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선생들을 쌓아 두고
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들을 따를 것임이라.
](딤후4:3-4).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교한 상태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자기 귀를 막는 귀먹은 독사 같으니
](시58:4).
흔히 술사들이 뱀을 부릴 때 피리를 불면 피리 소리에 맞춰
뱀들이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 뱀은 소리를 듣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술사의 동작을 보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코브라는 귀머거리입니다. 이는 배교한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입에는 독이 가득하고 귀는 먹어 버렸습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가 아무리 좋은 말씀을
전해도 귀먹은 청중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과 땅을 만드는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듣기를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성도는 죄에 대해서는 귀를 막아야 하고, 눈을
감아야 하며, 입을 닫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정
반대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를 막아 버렸고,
눈을 감아 버렸고, 짖지 못하는 개처럼 입을 닫아
버렸습니다. [그들이 귀 기울이기를 거절하여 어깨를
빼고 듣지 아니하려고 자기 귀를 막으며
](슥7:11).


성경은 우리가 주의
말씀에 귀를 막으면 주께서는 우리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아
버리신다고 경고하셨습니다(잠1:24-30).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기도 생활의 본질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
주께 많은 것을 말씀드렸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시간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는가? 에 있습니다.
기도는 주께 말씀드리는 것에 앞서 주께 듣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여러분이 주께 듣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기도는
결코 응답될 수 없습니다. 에스겔 8:18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도 격노로 /그들을/ 대우하리니 내 눈이 /그들을/ 아끼지
아니하며 내가 불쌍히 여기지도 아니하리라.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겔8:18).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가? 에 달려 있습니다. 주의
말씀에 귀를 막고 주께 입을 열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그들이 [주]께 부르짖을지라도 그분께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겠고
그들이 자기 행위로 악하게 행한 것같이
그때에 그분께서 자신의 얼굴을 돌려 그들에게 숨기시리라
.](미3:4).


성경은 우리가 주의
말씀에 귀를 막으면 일곱 배나 더 벌을 주시고, 재앙을 내리
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면 너희 죄들로 인하여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벌하리라.
](레26:18). 레위기 26:11에는
일곱 배나 더 재앙을 내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서는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온다고 했는데,
사람의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
](렘17:9)라고
한 대로입니다. 귀에 할례받지 못한 사람은 입술에 할례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누가 마스크를 쓰고
제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입술에 할례받지
못한 사람이 제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할례받지 못한 귀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듯이 할례받지 못한
사람은 진리를 선포할 수 없고, 할례 받지 못한 마음이
주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고, 순종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대언자는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사53:1)고 말했습니다. 선포되는
주님의 말씀이나 기록된 말씀에 불신과 불순종으로 일삼는
것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할례를
받지 못한 마음의 문제입니다
. 스데반은
조상들이나 당대의 유대인들의 문제가 바로 마음과 귀에
할례받지 못한 것임을 지적했습니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자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역하되 너희 조상들이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는도다.
](행7:51).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난지 8일만에 몸에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말에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한대로 할례는 마음의
할례여야 합니다. [오직 속으로 유대인이 유대인이요, 할례는
마음의 할례이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하니라
.
이런 사람에 대한 칭찬은 사람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느니라.
](롬2:29). 주님이 인정하시는
할례자는 몸에 할례를 받는 자가 아닙니다. 진정한 할례자의
요건이 무엇인지 봅시다. [① 이는 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②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뻐하며 ③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자이기 때문이라
.](빌3:3).
이는 비단 신약 시대의 교리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제정하실 때 몸의 할례 뿐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제정하셨습니다. 신명기 10: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의
포피(包皮)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말지니
](신10:16). 우리는 모두 손으로 하지 않는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의 칼로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할례
받지 못한 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은 치욕거리가 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길들 가운데 서서 보며 옛
행로들 곧 선한 길이 어디 있는지 물어 보고 그 길로 걸으라
.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들을 위한 안식을 얻으리라,
하였으나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그 길로 걷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며
](16). 오늘날은 new란 말이 유행입니다. 뭐든지
이전보다 새로워야 합니다. 그러나 신제품이나 신사고,
신자유, 신교육, 신문명, 신기술, New age, 새로운 종교, ...
어느 것도 죄 가운데 태어난 옛 사람을 새롭게 할 수
없습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어떤 새로운 성경(NIV, NASV, NKJV,
NTE, NRV, NRSV, etc...)도 사람을 새롭게 하지 못합니다. 오직 OLD
KING JAMES BIBLE이 아담 안에서 죄 가운데 태어난 OLD MAN을
새롭게 만듭니다. OLD GOSPEL만이 죄인을 새롭게 하며, 속
사람을 새롭게 합니다.


옛 행로들이란 앞서간
사람들이 발자국으로 만든 길을 말합니다. 산이나 들이라도
사람이 같은 길을 계속 다니면 그 발걸음으로 인해 길이
생기는데 이 길이 바로 행로(path)입니다. 이 길은 먼저
주님이 걸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21, [이는 참으로
너희가 이것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니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남기사 너희로 하여금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벧전2:21). 주님이 앞서 걸으셨던 그 길을
우리는 걸어야만 합니다. 이 길이 옛 길입니다. 이 길은 선한
길이며, 의의 길이며, 좁은 길입니다. 이 길은 갈보리
십자가로 이어져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 길에 세우셔서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의가 그분
앞에 나아가며 그분의 발자취가 있는 길에 우리를
세우리로다.
](시85:13). 사람으로서 가장 먼저 이 길을
걸었던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로마서 4:12에, [또한 할례자들에게
속할 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아직 할례 받기
전에 가졌던 그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자들에게
할례의 조상이 되려 함이라.
](롬4:12). 역사적으로
기독교인이란 이름을 가진 자들은 결코 이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옛 길을 따라 걸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다른 이름으로 불렸고, 이단으로 낙인찍혔습니다. ‘몬타니스트(A.D
156), 노바티안(A.D 250), 도나티스트(A.D 310), 폴리시안(1세기),
알비겐시스, 왈덴시스, 불가리안, 아르메니안, 까따리,
보고마일즈, 아나뱁티스트’ 등이 바로 그런 명예스런
이단들의 이름입니다. 아나뱁티스트란 말은 주후 3세기
경부터 불려진 이름인데, 후에 ‘아나(재-ana)’란 말이
떨어지고 뱁티스트(침례교도)라고 불렸는데 지금의
성경대로 믿는 독립 침례 교회가 걷는 길입니다.
길이란 곧 ‘피흘린 발자취’입니다.
이들은 교황 제도를
인정하지 않았고, 국가 교회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유아
세례를 실행하지 않았으며, 교권과 마리아 숭배와 행위에
의한 구원 교리를 거부하였고, 인간이 만든 전통을 단호히
배척하고 오직 성경만을 유일한 권위로 두었기에 거짓
그리스도인들부터 끊임없이 잔악하고 무서운 핍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누구도 로마 캐톨릭 사본의 성경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킹제임스 성경의 저본이 된 순수한
성경인 다수 필사본에서 나온 성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용했습니다. A.D 426년부터 시작되었던 약 12세기 동안의
암흑시대에 무릇 5천만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자의 죽음을
당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암흑시대 이전과
이후에도 수 십만명의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잔악한 박해의
손길 아래 죽어갔습니다.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란
칭호가 아니라 파당의 이름으로 불렸고, 영광스런 칭호인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은 모두 거짓 교인들이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옛 길을 걷는 자들의
기본적인 교리는 이렇습니다. 1.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시며 입법자(立法者)이시다. 2. 교회의 의식(儀式)은
침례와 주의 만찬 두 가지 뿐이다. 이것은 상징적이며
기념하는 것 뿐이요 구원을 위한 것은 아니다. 3. 교회의
직분은 감독 즉 목사와 집사 단 두 가지이며 그들은 교회의
종이다. 4. 교회의 운영은 순수한 자치주의이며 법을
시행하는 기관이요 입법기관이 아니다. 5. 교회의 법과
교리는 신약성경 그 것뿐이다. 5. 교회의 회원은 믿는 자에
한한다. 행위로서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구원받은 사람이다. 6.
교회가 요구하는 것은 구원받은 자가 교회에 들어올 때는
침례(浸禮)에 의한 침례를 받고 신약성경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며 이에 충실할 것. 7. 다른 교회들에 대해서는 말씀과
회원의 훈계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책임에 대해서는 각각
분리 독립되어 있지만 사역은 서로 협조한다. 8.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 즉 정교 분리가 원칙이다. 9. 모든
사람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의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길을 걷던 사람들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어떤 성도나
교회도 이 길을 걷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옛 길을 걷다가는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주님의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이름을 가진 종교 단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은 킹제임스 성경을
들고 개역 성경을 쓰는 교회에 앉아 있는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침례받고 성당 나가는 것이나 성경 들고 연등 행사에
참여하는 것만큼이나 어색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을 아름다운 연합과 종교 일치라고 칭찬해 줍니다.


다시 16절을 보십시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길들 가운데 서서 보며 옛
행로들 곧 선한 길이 어디 있는지 물어 보고 그 길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들을 위한 안식을 얻으리라,
하였으나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그 길로 걷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며
](16). 유다의 백성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여호수아가 걸었던 그 길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 길로
걷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옛 행로들, 선한 길로 걸으면
얻을 수 있는 안식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보기에 옳은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
](잠14:12,16:25).
주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길을 주시고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너는 또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
](렘21:8).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옛
길을 걸으면 혼을 위한 안식을 얻습니다.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안식을 찾으리니
](마11:29)라고
하셨는데, 옛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미 마음에 두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이들의 결심이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는 그 길로 걷지 아니하리라(16b).
이들은 믿음의 선조들이 살았던 삶의 방식을 답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종교의 틀을 갖추는 것은 몰라도
전적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싫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육신적인 성도들이 적당히 종교적이고, 적당히 영적이면서
적당히 육신적인 삶을 즐기고 싶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성가대 연습 끝나고 술집 가는 성도들이나 수련회 끝나고
유흥가로 가는 성도나 예배 끝나고 놀러 가는 성도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교육이 우상이라고 설교하면서 자기
아이는 명문대 못 보낼까봐 과외시키고, 예배 빠지는 것도
관여하지 않습니다. 목사란 사람이 자기 아이가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도 막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성경대로,
설교하는 대로 살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겠노라
(17).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들을 세우고 말하기를,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하였으나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겠노라, 하였느니라.
](17). 하나님은
파수꾼들을 세워 주셨지만 백성들은 듣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마지막 시대의 배교한 교회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오늘날 배교한 교회는 성경적인 설교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십자가와 보혈을 설교하지 말라, 죄에 대해
설교하지 말라, 부정적인 것들을 설교하지 말라, 지옥에
대해 설교하지 말라, 마귀에 대해서 설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 축복, 성공 등에 대한 설교만
요구합니다. 이사야 30:10,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보지 말라, 하고 대언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들을 대언하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들을 대언하라.
](사30:10).


한마디의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더 듣고자 해야 마땅한데 세상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설교자로서 최악의 상황을
맞았습니다. 자기 설교를 듣지 않겠다는데 설교자가 설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찾아다니며 이르기를,
네가 우리 손에 죽지 아니하려거든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말라
, 하는도다.
](렘11:21). 신정국가인
유다에서도 주의 대언자는 존경받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이런 이방 사회에서는 달리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설교자의 생명이 위협받는 그곳은 분명 멸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시계와 같습니다.


북왕국이 망하기 전에
백성들은 주의 대언자들에게 동일한 요구를 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나사르 사람들에게 포도주를 주어 마시게 하고
대언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대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암2:12). 아모스는 같은 벧엘에서 대언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마샤가 또한 아모스에게
이르되, 오 너 선견자야, 너는 가서 유다 땅으로 도망하고
거기서 빵을 먹으며 거기서 대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대언하지 말라. 이는 이곳이 왕의 예배처요, 왕의 뜰이기
때문이니라, 하니라.
](암7:12-13). 이 말은 종교적 망명을
떠나란 것입니다. 이곳은 주의 대언자들이 대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아직 종교의 자유가 있는 유다로 가서
대언하라는 것입니다. 주의 대언자를 쫓아내고, 설교하지
못하게 하는 곳 그 사회는 멸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점점 성경적인 목회자와 선교사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종들을 데려 가 버리시는
것은 무서운 심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것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역경의 빵을 주시거나
고통의 물을 주시는 것으로 인해 불평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의 대언자, 성경적인 목회자가 여러분 가운데
있다면 여러분은 결코 완전히 심판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30:20-21, [비록 주께서 너희에게 역경의 빵과 고통의
물을 주시나 다시는 네 선생들을 구석진 곳으로 옮기지
아니하리니
네 눈이 네 선생들을 볼 것이며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나는 말을 네 귀가 들으리니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 길로 걸으라 할 것이며
](사30:21,22). 말씀을
가르칠 선생들을 구석진 곳으로 옮겨버리는 일이야말로
성도들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입니다. 성경적인 지역
교회가 없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재앙입니다. 사람들은
역경의 빵을 먹기 싫어서 킹제임스 성경을 쓰는 성경적인
교회가 없는 지역으로 직장을 찾아 이사를 갑니다. 고난의
물을 마시고 싶지 않아서 성경이 틀리지만 그냥 장로교회에
다니고 순복음 교회에 다닙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지금 이 시대는 급격히 배교로 줄달음치고 있습니다.
순수하게 보존된 오류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킹제임스
성경을 버리고 새역본들을 쓰며, 옛 길을 버리고 새 길로
걷고, 십자가의 복음대신 사회 복음을 외치고, 성도들은
증거의 능력을 상실함으로 영적 기갈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순수하게 보존된 킹제임스 성경을
들고 설교하는 목사를 아무리 찾아도 찾아 볼 수 없게 될 그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
땅아, 들으라. 보라, 이 백성이 내 말들과 내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거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위에 재앙을
가져오리니 /이것은/ 곧 그들의 생각의 열매니라.
](렘6:19).
주님은 유다를 심판하는 판결문을 읊어주셨습니다. 그들의
죄목은 하나님의 말씀과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거절한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그들의 생각의
열매였습니다. 생각은 행동의 이전 단계입니다. 생각을
품으면 그것이 행동으로 나옵니다. 영적인 일들을 생각하면
영적인 열매를 맺습니다. 육신적인 일들을 생각하면
육신으로부터 열매를 거둡니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뿌린
대로 거둡니다(갈6:8). 육신적인 생각은 그 생각 자체가
주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7, [그 까닭은
육신적인 생각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참으로 그리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
.](롬8:7). 그러므로 행동을 바꾸기 전에 먼저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마음의 생각이 행동을 낳고,
행동이 습관을 낳고, 습관이 인격을 낳고, 인격이 그 사람의
운명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들을 다 아시고,
살피십니다. [[주]의 영께서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말하기를,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오 이스라엘의
집아, 너희가 이렇게 말하였으니 이는 너희 생각 속에
일어나는 일들을 내가 다 알기 때문이라.
](겔11:5).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머리 속에 떠도는 생각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음란한 생각이나 헛된 생각이나 사악한
생각들이 마음대로 활개를 쳐도 어떻게 할 줄을 모릅니다.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고후10:5). [/우리는/ 상상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거슬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
](고후10:5).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셨기 때문에 성도는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생각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생각들을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은 그 사람의 영적
성숙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생각은
완전히 다릅니다(사55:8-9)1). 결혼한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은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많이 다릅니다.
학생들과 직장인과는 생각이 많이 다릅니다. 어른의 생각과
아이들의 생각이 다릅니다. 이는 사람과 하나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추구하는 것이 다르고,
관심 분야가 다르고, 사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아이와 같으며 생각하는 것이 아이와 같았으나 어른이
되어서는 유치한 일들을 버렸나니
](고전13:11). 그래서
잠언 기자는 생각의 정도와 사람의 정도가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어떠함같이 그
사람도 그러하기 때문이라.
](잠23:7a). 성도들은 같은
생각을 품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 틀리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생각을 품어야 합니다. 이는 군대처럼
획일화를 말하거나 공산주의처럼 집단적으로 세뇌 교육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남을 돌아보는데 같은 생각을
품어야 합니다. [그러나 디도의 마음 속에 열심을 내어
너희를 돌보려는 같은 생각을 넣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8:16).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받는
고난에 대해서 같은 생각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하셨은즉 그와 같이
너희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 이는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한 자가 이미 죄를 그쳤기 때문이라.
](벧전4:1). 우리는
복음에 대해서 같은 생각이어야 합니다. [나는 너희가
조금도 다른 생각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를 통하여
확신하노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희를 어지럽히는 자는
심판을 받으리라.
](갈5:10).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을 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면서
특별히 두 사람을 지목했습니다. 이들은 매사에 생각이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내가 유오디아에게 간청하며
순두게에게 간청하노니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주} 안에서
같은 생각을 품게 하려 함이라.
](빌4:2). 만약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편지를 쓴다면 누구와 누구를
지목해서 이런 부탁을 하겠습니까? 혹시 나의 이름이
거론되지는 않겠습니까?


심판은 생각의 열매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도 응답도 생각의 열매입니다. [이제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권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도록 능히 행하실 분에게
](엡3:20).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는가? 누구를 생각하는가? 여러분들은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어’(엡4:23)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히3:1). 그리고 말씀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깨달음에 도달할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라. {주}께서 모든 일에 네게 깨달음을 주시기
원하노라.
](딤후2:7). 말씀의 묵상은 복있는 사람들의 행동
패턴이며, 그들의 생각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생각들을 지켜 주십니다.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4:7). 이런
생각이 가득할 때 생각의 열매로 우리는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헛된 생각을 하지 않으며,
땅의 일들을 생각하지 않고(빌3:19), 육신적으로 생각하여
우쭐대지 않습니다(골2:19). 영적인 생각을 하는 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 삶을 사는가?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이든지
진실한 것과 무엇이든지 정직한 것과 무엇이든지 올바른
것과 무엇이든지 순수한 것과 무엇이든지 사랑스런 것과
무엇이든지 좋은 평판이 있는 것과 덕이 되는 것과 칭찬이
되는 것이 있거든 그러한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라
.
](빌4:8)는
말씀대로 삽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의
열매를 제대로 맺고 있습니까? 씨마다 열매가 있듯이
생각마다 열매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자녀를 태의
열매, 몸의 열매라고 합니다(시127:3). 수고한 대가를 소출의
열매라고 합니다. 찬양을 입술의 열매라고 말합니다. 열매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어야 하며, 더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맺지 못하는 가지는 다 잘라지고
불에 던져지기 때문입니다(요15). 주님은 각인이 맺은 열매를
보고 판단하십니다.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고 각 사람의 길과 각 사람의 행위의 열매대로 각
사람에게 베푸느니라
](렘17:10).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은
것은 그들의 생각의 열매였습니다. 육신의 열매였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는 의의 열매,
화평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향을 가져오고, 향품을 가져오고,
번제헌물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잘못된 사람이
드리는 예배는 아무리 화려하고 율법의 형식에 틀림이
없다해도 바른 예배가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헌물을 받을
수 없으며, 그런 희생물은 향기롭지 않다고 하셨습니다(20).
우리의 예배가 주님께 열납되게 하는 것은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올바른 마음, 바른 생각에서 출발해야 함을 배웁니다.
21-30절은 바빌론의 침략이 멀지 않았음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이 땅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지옥은 저
세상에서 죄에 대한 주님의 심판입니다(Bob Jones. Sr).


30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버림받은 은(銀)이라 하리니 이는 [주]가
그들을 거절하였음이라.
](30). 이스라엘은 본래 하나님의
특별한 보배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를 버렸을 때, 주님
역시 그들을 거절하심으로 그들은 버림받은 은이 되고
말았습니다. 버림받은 은이란 도가니에서 단련하다
찌꺼기로 걸러져 나온 그런 은(銀)을 말합니다. 마치 물탄
포도즙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특별한 보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참으로 내 목소리에 순종하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내게 모든 백성들보다 뛰어난 특별한 보배가 되리니
이는 온 땅이 내 것이기 때문이라
.](출19:5).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의 목소리에 순종하고 언약을 지킬 때만 그런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버림받은 은이요, 찌꺼기가 되고
맙니다(사1:12).



이스라엘은 특별한 백성이었습니다.
[이는 네가 [주]
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이라. [주] 네 하나님께서
지면 위의 모든 백성들보다 너를 높여 자신을 위하여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신7:6, 14:2). 신명기 26:8에서도 역시
[[주]께서도 네게 약속하신 대로 이 날 너를 자신의 특별한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또 자신의 모든 명령을 지키게 하리라
하셨은즉
](신26:18). 시편 135:4에서는 [이는 [주]께서
자신을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신의 특별한 보배로
택하셨음이로다.
](시135:4)고 했습니다.


신약 성도들 역시 영적인
이스라엘로서(갈6:16) 특별한 백성이요, 특별한 보배입니다(딛2:14,
벧전2:9). 주님은 우리를 모두 귀한 진주로 비유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속의 피를 헛되이 여기고, 성경을 경시 여긴다면
우리 역시 버림받은 은과 같이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 보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더 비참합니다. 우리 모두 훈계를 받고,
옛 길을 물어 그 발자취를 따름으로 혼의 안식을 얻고, 자기
길을 버리고 자기 생각을 버리고 회개함으로 주의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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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기 때문이니라. [주]가
말하노라. 이는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기 때문이니라.
](사5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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