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예레미야 7:1-34
요절: 예레미야 7:5
예레미야 7-11장은
예레미야가 행한 세 번째 설교입니다. 주님은 성문에 서서
주께 경배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증거하게 했습니다.
앞의 두 번의 설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님은 유다의 죄악에
대한 질책과 경고, 권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국의 배교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판에 박은 듯이
봅니다. 조국의 교회와 성도들은 사람이 만든 은혜로운
이야기에 너무 쉽게 감동하며, 마귀가 조작한 신비로운
체험에 너무 쉽게 동의해 버리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러나
정작 성경의 정확한 청사진과 성경 그대로의 성취에
대해서는 쉽게 감동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으려는 경향이
짙은데, 그만큼 우리의 믿음의 수준이 순수한
성경말씀에서부터 많이 멀어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2절입니다.
[/너는/ [주]의 집 문에 서서 거기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주]께 경배하려고 이 문들로 들어가는 너희
모든 유다 사람들아, [주]의 말씀을 들으라.](2). 유다의
거민들은 성전 예배에 익숙했습니다. 율법의 정신과 본질은
잊어 버렸지만 형식은 지니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가면 경배하기 위해서 성전으로 오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들려주시는데,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타락하고 범죄 했을지라도 교회에 오면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시장이나 길 어귀나 산 위나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실 수 있으시며
실제로 그런 예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 주께
경배하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성문에서 말씀을 전하게 하신
것은 성전을 찾는 자들에게 우선적으로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큰 은혜였습니다.
3절입니다. [만군의 [주]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너희 행위를 고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하여금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3). 길을 고치라는 말씀은 삶의
방향, 삶의 가치관, 잘못된 신앙관을 고치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방향은 잘못된 열정보다 중요합니다. 올바른 방향은
어떤 노력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들은 옛 길을 물어서 그
길로 걸어야 합니다. 자기 길을 버리고 믿음의 길, 의의 길,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노선(路線)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길이십니다. 다음은 행위를 고쳐야 합니다.
행위는 믿음의 표현이며, 열매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하기를, [이와 같이
믿음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만으로는 죽은 것이라. 참으로
어떤 사람은 이르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위가 있으니
행위가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내 행위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느니라.](약2:17-18)고 말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이 없는 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행위가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은 자로다.](계3:1).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성전에 오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 길과 행위를 고치지 않고
온다면 그는 주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예배 행위
이전에 예배를 드리는 이의 마음을 보시며, 그들의 생활
방식을 보십니다. 마음이 고쳐지지 않고, 행위가 고쳐지지
않는 한 어떠한 의식이나 종교 행위로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죄의 삶을 살면서 드리는 예배를 예배라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회개는 긍휼을
얻는 길이며, 심판을 유예하거나 면제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회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습니다.
성도는 구원받기 위해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선한 행위를
해야만 합니다. 선행은 은혜의 결과이며, 구원의 자연스런
현상이며, 성령의 열매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선한 행위를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로 하여금 너희의 선한
행위를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불신자들은 우리의 믿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를 봅니다. 성도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불신자는 성도의 선한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흔히 디도서는 바울이 쓴 야고보서라고 합니다. 바울이
얼마나 선한 행위를 강조했는지 보십시오. 우리는 이 말씀에
따라 우리의 길과 행위를 고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너 자신을 선한 행위의 본으로 보이라. [모든 일에
네 자신을 선한 행위의 본으로 보이며 교리에서 부패하지
아니함과 신중함과 성실함을 보이고](딛2:7). 보이며,
보이고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행위는 보이는 것입니다.
본으로 보이는 일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통해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도저히 있을 수
없습니다.
둘째,
우리의 선한 행위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목적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주심은 모든
불법으로부터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사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곧 자신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선한 행위를 통해
구원받지 않았지만 구원의 결과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구원받기 전이나 후가 동일한 삶이라면 그는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셋째,
선한 행위는 일생동안 지속되어야 합니다. 누구나
한 두 번은 선한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지속성입니다. [이 말이 신실하도다. 원하건대 너는
확고하게 이것들을 단언(斷言)하라. 이것은 이미 하나님을
믿은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행위를 지속하게 하려
함이니 이것들은 선하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3:8).
넷째,
선한 행위는 열매를 맺는 삶이며 배워야 합니다. [또
우리에게 속한 사람들도 필요한 용도를 /채워 주기/ 위해 선한
행위를 지속하는 것을 배우게 하라. 그리하여야 그들이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아니하리라.](딛3:14).
주님은 성전에 올라오는
유다의 백성들에게 ‘너희 길과 너희 행위를 고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치는 일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해야 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이전까지
행로를 부인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고치고, 바로 잡으면 ‘의의 화평의 열매’를
맺습니다(히12:11). 이런 이유로 주님은 우리를 징계하시고,
채찍질하십니다. 맞고서 고치는 것보다 맞기 전에 고칠 수
있다면 훨씬 나을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것들이 [주]의 /성/전이라. [주]의 /성/전이라. [주]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4).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한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키시기 위해서라도 예루살렘을
외적으로부터 지켜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자신들의 죄악과 악행에 대해 심판을 면제해 주지
않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많은 거짓 대언자들이 그렇게 말했고,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명령과 내 법규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에게 준 땅에서
친히 그들을 끊을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집도 내 눈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속담거리와 웃음거리가
될 것이며](왕상9:6~7). 주님은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이
이스라엘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만 안전할 수 있음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잘못된
믿음은 도처에 너무나 많습니다. 나는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새벽 기도를 나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직분을 맡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벌주시거나 재앙을 내리시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큰 오산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명함에 20개
이상의 직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쓰러지면 교회는
물론이고 자신이 속해 있는 모든 단체가 마비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을 계속해서 지켜 주실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주님은 범죄한 사람은
그가 모세든 다윗이든 솔로몬이든 베드로이든 바울이든 다
징계하셨고, 그에 따른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왕이든
대제사장이든 대언자이든 불순종한 죄인들은 다 심판을
받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는
만일 너희가 너희 길과 너희 행위를 철저히 고치고
사람과 그 이웃 사이에서 철저히 심판을 집행하며](5).
주님은 다시 한번 말씀합니다. “너희 길과 너희 행위를
철저히 고치라.” 성전에 주께 경배하러 오려면 먼저 우리의
길과 행위를 철저히 고쳐야 합니다. 성전에 올라오는 사람의
마음은 겸손함과 애통함과 상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8장에서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오는 바리새인과
세리를 볼 수 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긍휼을 베푸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라](눅18:13).
세리는 성전에서 자신의 길을 고치고, 자신의 행위를 철저히
고치는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이것이
의롭다 함을 얻는 길입니다. 주님은 세리가 의롭게 되어서
돌아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람이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느니라...](눅18:14). 대부분의 교인들은 주께
경배하려고 교회를 오지만 가치관의 변화, 사고의 변화,
삶의 변화가 거의 없습니다. 예배를 드린 후에는 예배를
드리기 전과 뭔가 고쳐지고, 뭔가 바뀌어야 합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대충 대충 고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고치기를
간절히 촉구하십니다.
성전에서 바른 예배를
드린 사람은 길과 행위를 철저히 고친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롯이 주께 제단을 쌓았다는 기록을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길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롯에 뒤지지 않는 많은 실패와 허물 속에서도
그는 반복해서 주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에
비해서 그리 인품이나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형보다 나은 점은 주께 제단을 쌓는 점이었고, 그
때마다 한 가지씩 고쳐 나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특히 그가
인생에서 맞은 가장 위기의 순간에 제단을 쌓음으로써
자신의 길과 행위를 철저히 고쳤습니다(창35:1-5). 그는
벧엘에서 제단을 쌓기 전에 일행들에게 이방 신들을
내어버리고 정결하게 옷을 갈아입게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우상들,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까지 세겜 옆 상수리나무
밑에 다 묻었습니다(창35:4). 이것이 철저히 자기 길과 행위를
고친 모습입니다.
우리는 매주 예배로
모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면 그는 헛된 예배를 드린 결과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
어둠의 행위란 거짓말, 간음, 음행, 더러운 이익을 탐하는 것,
사기, 악한 생각 등 모든 것이 다 포함됩니다. 이런 것들에
참여하지 말고, 연루되지 말고 철저히 벗어버리십시오. [열매
없는 어둠의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그것들을
책망하라.](엡5:11).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듯이 여러분은
그런 행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의 옷에 독이
묻었거나 나균이 묻었거나 시체의 썩은 고름이 묻었다면
당장 벗어버리고, 태워 버릴 것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다시
입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둠의
행위는 벗지 않고 계속 입고 있을 수 없고, 벗었다가 다시
입을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성도들이 벗어 버려야 할
일은 더러운 대화입니다. [이제는 너희도 이 모든 것을
내어 버리라. 곧 분노와 진노와 악의와 신성 모독과 너희
입에서 나오는 더러운 대화라.](골3:8). 흔히 농담,
유머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더러운 대화는 성도의 영적
생명에 치명타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회계 보고를 하리니](마12:36).
이왕 고치는 것이라면 철저히 고칩시다. 이렇게 고치면
주님은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 곧 이곳에서 너희로
하여금 영원무궁토록 거하게 할 것임이라.”(7)고
약속하셨습니다.
8-11절은 유다가 행하는
죄악들입니다. 그들은 성전에 주께 경배하러 오는 동시에
그들은 여전히 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이민
교회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교회에 오는 것은 오는 것이고
생활은 생활입니다. 믿음은 믿음이고 삶은 삶입니다. 유다의
백성들은 완전히 별개로 놀았습니다.
[보라, 너희가 유익을
끼치지 못하는 거짓말을 믿고 있도다.](8). 이 말씀은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망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거짓말을 믿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거짓말은 성경은 좀 틀려도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마귀의 공격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다 유익을 끼치지 못하는 거짓말입니다.
반면 이런 거짓말도 잘 믿습니다. “예배는 개인적으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지 모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신약
시대에는 성도의 몸이 성전이기 때문에 꼭 교회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도는 모두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목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런 논리는 부분적으로 맞기 때문에
초신자들이 잘 믿습니다. 그러나 분명 유익을 끼치지 못하는
거짓말입니다.
9-10절은 십계명을 철저히
파괴하는 모습입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건짐을
받는다면 주님께서 자신들이 계속해서 이런 짓을 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10절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내 이름으로 일컫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강도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심지어
내가 그것을 보았느니라. [주]가 말하노라.](11). 이 말씀은
주님이 성전을 정화하실 때 직접 인용하신 구절입니다.
성전의 고유 기능이 무엇입니까? 주의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마21:13, 막11:17, 눅19:46-사56:7인용). 성전은 주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으로 이곳에 오지 못하는 사람도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면 주님이 들으십니다(왕상 8:30,35,42). 심지어
이방인들도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면 주님은 들어 주십니다.
주의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점에서 기도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신약 성도들은
어디에서나 기도할 수 있고, 어느 때나 기도할 수 있지만
교회야말로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먹고
마시고 잡담하는 곳으로 전락하고, 사교의 장이 되어 버리면
성전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 되고 맙니다.
12절은 역사적 교훈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너희는 실로에 있는 내 처소
곧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곳으로 이제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악하므로 내가 그곳에 어떻게 행하였는지
보라.](12). 실로는 예루살렘 북쪽 18마일 정도에 있는
도시인데 처음에 주의 성소가 있었고, 언약궤가 있던
장소였습니다. 사무엘 시대에도 실로에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로는 주전 1050년에 망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이 실로와 마찬가지로 철저히 파괴될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13절은 멸망의 이유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모든 일을 행하였으므로 이제 내가
너희에게 일찍부터 일어나 말하고 말하였어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고 내가 너희를 불렀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하였도다.](13). 주님은 일찍부터 일어나
말씀하셨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불렀지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역대기하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자신의 거하는 곳을
불쌍히 여기사 자신의 사자(使者)들을 통하여 백성에게 /말씀을/
보내고 늦기 전에 일어나 보내셨으나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들을 멸시하며 그분의
대언자들을 학대하여 마침내 [주]께서 자신의 백성을 향해
진노하사 구제할 방법이 없게 되었으니](대하 36:15-16).
이는 멸망을 앞둔 이 시대의 교회를 보는 듯 합니다.
오늘날처럼 강단에서 설교의 위력이 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목사의 말에 권위가 사라진 적도 없습니다.
그나마 신실하던 강단의 거성들은 서서히 숨을 거두고 하나
둘 사라지고 있습니다. 주를 알지 못하는 후대들이 신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강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밥벌이로 어떤 이는 사업으로 어떤 이는 물려받아서
목사직을 수행합니다. 성도들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좋은 말’을 듣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종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잠언 기자는 말합니다.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거절하였고 내 손을 내밀었으나 중시하는
자가 없었으며](잠1:24). 이사야 대언자는 말합니다. [어찌하여
내가 왔을 때에 아무도 없었느냐?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느냐? 어찌 내 손이 짧아져서 구속(救贖)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건져 낼 능력이 없겠느냐?.....](사50:2a).
여러분은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백성은 반드시 망합니다.
주님은 순종을 가장 좋아하십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주]께서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주]의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시겠나이까? 보소서, 순종이 희생 헌물보다 낫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번제헌물이나 희생물에
대해서 가르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은 순종이었습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는 번제
헌물이나 희생물에 관하여 그들에게 말하지도 아니하였고
명령하지도 아니하였으며 오직 내가 이것만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음성에 순종하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길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잘되리라, 하였으나](22-23).주님이 무엇을 가장
기뻐하셨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율법사들은 구약 성경을 오해하여 늘 희생제를 드리는
일에만 철두철미했지만 주님은 그들의 잘못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자주 인용하신 구절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는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기 때문이니
하나님을 아는 것이 번제 헌물보다 나으니라.](호6:6)였습니다.
여러분이 아침, 저녁으로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통해서, 성경 공부를 통해서
듣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일은 가장 복된 일입니다.
14-15절은 예레미야가
민족의 반역자로 몰리는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거짓
대언자들과는 달리 그는 예루살렘이 실로와 같이 파괴될
것이며, 유다의 백성들은 북왕국처럼 동일한 운명을 밟게 될
것이란 대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후로 예레미야는
동족들로부터 배반자로 몰리게 됩니다. 16절은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이런 예는 출애굽기 32:10에서
모세에게 처음 발견됩니다. [그런즉 이제 나를 홀로
내버려 두라. 내가 그들에게 맹렬히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부터 큰 민족을 만들리라, 하시니](출32:10).
그러나 모세는 주님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중보 기도를
감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살아났습니다. 사무엘 역시
사울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사울을 위해 사무엘은 온 밤을 주께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이는 그가 나를 따르는 것에서 돌이켜 내 명령을
수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이에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주]께 부르짖으니라.](삼상15:11). 이런
사무엘의 중보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건짐을 받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사무엘에게 [... 네가 그를 위하여
어느 때까지 애곡하겠느냐?...](삼상16:1)라고 기도를
중지시키셨습니다. 예레미야 역시 동족 유다를 위해서 울며
기도할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고 그들을 위하여 소리 높여 부르짖거나 간구하지도 말며
내게 중재하지도 말지니 이는 내가 네 말을 듣지 아니할
것임이라.](16). 주님은 중보자를 없애 버리심으로써
심판을 집행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11:14, 14:11에도
반복됩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일이 얼마나
복된 일이며, 큰 일입니까? 오늘 주님은 나를 위해
기도하십니다(롬8:34). 오늘 성령은 나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롬8:26,27). 얼마나 놀랍습니까?
17-20절 말씀은 왜 심판을
받아야만 하는지, 왜 예레미야의 기도를 중지시켰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특히 18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은 나무를
모으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여인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과자를 만들어 하늘의 여왕에게 바치고 다른 신들에게 음료
헌물을 부음으로 나의 분노를 일으키느니라.](18). 하늘의
여왕이란 표현은 예레미야에만 5번이나 반복됩니다(44:17, 18,
19, 25). 이는 노아의 증손자인 니므롯(Nimrod)의 어미
세미라미스가 하나님을 대항하여 자신을 구축하고, 자기
아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대항하는 온갖 이교종교를
세웠습니다. 한 구원자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서(창3:15), 그녀
자신과 아들을 "그 구원자와 그의 모친"이라고
내세웠습니다. 고대 조각들이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기 이름을 "하늘의 여왕", "천사들의
여왕"이라고 불렀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그녀는 "창녀들의 여왕"으로서 각국에서
다이아나, 주노, 비너스 등과 같은 여러 다른 이름으로
숭배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서, 사탄의
지휘에 따라 하나님을 앞서 가서는 지상에 온갖 음탕한
종교와 자신의 더럽고, 반역적인 마음에서 솟아난 각종 반-하나님(Anti-God)
종교를 만들어냈습니다. -페리 락 우드-
캐톨릭은 다이아나를
숭배하기 위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으로
명명했습니다. 단테는 그의 신곡에서 마리아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한 딸, 거룩한 어머니, 거룩한 배우자"라고
함으로써 캐톨릭 교리를 세웠습니다. 오늘날 캐톨릭 성가에
‘하늘의 여왕’이란 제목이 많이 있습니다. 마리아와
성령과의 관계에 대한 천주교의 교리를 요약하면(원세호,
천주교란) [첫째로 마리아는 성신의 배필이며 그의 아내라는
사실, 둘째로는 성신의 모든 선물을 나누어주는 배분자로서
마리아 부인을 선정한 사실, 셋째로는 모든 천상의 선물은
마리아를 통하여 주어지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
넷째로는 성신은 마리아의 신랑이라는 사실, 다섯째는
마리아는 영혼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탄생시키는 중생의
역사를 하며, 여섯째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자는
천주를 아버지로 모시지 않는 자이다. 일곱째로 마리아의
신랑인 성신은 마리아가 영혼 안에 내주 함을 보기 위하여
그 영혼이 마리아에게 자리를 양보한 만큼 성신은 당신의
풍성함을 나누어준다]는 주장입니다.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몽천승천 교리를 선언할 때, “성모마리아께서 죽음과
몽소승천으로 하늘에 올라가셨을 때에 우리 주님께서는
여왕으로서 당신의 어머니 머리 위에 관을 씌우셨다. 그러나
관을 받으셨기 때문에 여왕이 되신 것이 아니라 여왕이시기
때문에 관을 받으신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배교한 유대인들이 숭배했던 것과 오늘날 카톨릭이
숭배하는 것과 동일함을 알 수 있습니다.
24-26절은 다시 한번
반복입니다. [그들이 듣지도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기들의 악한 마음이 꾀하고 상상하는 대로
걸으며 뒤로 물러가고 앞으로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이 날에 이르기까지
내가 너희에게 나의 모든 종 대언자들을 날마다 일찍부터
일어나 보내고 보내었으나 그들이 내 말을 듣지도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 목을 굳게 하여 자기
조상들보다 더 악하게 행하였느니라.](24-26).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습니다. 이제 예레미야가
할 일은 심판의 선포 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주님이 구원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사역은
열매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백성들의 상태를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네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며,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설교자로서, 대언자로서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청중에게 설교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앉아서 졸다가 성경을
떨어뜨리고, 떨어져서 목이 부러지는 일이 터질 때 목사는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당황할 일이 아닙니다.
심판이 목전에 이르렀다는 경고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는 그들에게 이르되, 이 민족은 [주] 자기들의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도 아니하며 징계하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는 민족이니 진리가 사라졌고 그들의 입에서
끊어졌도다, 할지니라.](28). 주님은 여러 차례 가벼운
징계를 통해서 이들을 돌이키시고자 하셨지만 이들은
징계를 거부함으로써 마지막에는 심판 외에 달리 처방이
없게 되었습니다. 성도들 역시 주님이 주지시는 권고와
징계를 받음으로써 바로 잡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심판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29-34절은 이들의 죄악과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유다 자손은 성전에 자기의 가증한
것들을 세웠습니다(30). 이는 마음 가운데 우상을 들고
성전으로 왔다는 말입니다. 자기 길을 고치지도 않고,
행위를 고치지도 않고 성전에서 경배를 드릴 때 주님은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는 유다
백성이 자기 자녀들을 인신 공양하여 몰렉이란 신에게 바친
곳입니다. 도벳의 산당이란 인신 공양을 하는 이교를
숭배하는 산당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을 심판하셔서
이곳이 살육의 골짜기로 불릴만큼 많은 죽임을 당하게
하시겠다는 엄중한 경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에을 통해 그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레위기에서 [너는 결코 네 씨 가운데 하나라도 몰렉을
위하여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지 말고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주]니라.](레18:21)는 말씀을
정면으로 어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순종하기
싫어하면서도 몰렉을 위해서는 자식도 불에 태워 죽이는
비정한 종교심을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