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예레미야 9:1-26
요절: 예레미야 9:7
예레미야 9장은 눈물의
대언자 예레미야의 슬픔과 눈물에 대한 기록입니다.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보는
대언자에게 있는 심적 고통은 매우 큰 것이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미래를 미리 볼 수 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의
은사를 주시고, 환상을 보여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런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잠시도
평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보는 일은 무거운 짐이며, 눈물의 근원이 됩니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성경의 기록들을 문자 그대로
마음에 믿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혼들을 향한 무거운
부담감을 안고 살 것이며, 지옥으로 향해 달려가면서도 아무
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눈물이 쏟아질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오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되어 내 백성의 딸의
죽임 당한 자들을 위하여 밤낮으로 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1). 예루살렘의 패망을 미리 보지 못하던
제자들은 성전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에 놀랐지만 예루살렘의
멸망을 미리 본 주님은 우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는 평안과 기쁨을 빼앗겨서는
안되지만 점점 타락하는 교회의 상태와 살았다고 하나 죽어
있는 교회를 볼 때 절로 눈물이 나야 합니다.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이웃들을 볼 때 그들의 종착역이 지옥이란 사실을
미리 보는 성도는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이제 주님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계시를 분명히 보는 성도들은 주님 오시는 기쁨에 들떠
흥분하는 동시에 죄인들에게 임할 파멸로 인해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되고, 밤낮으로 울게 됩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눈물도 없고, 그렇다고 기쁨도 없는 것은 그들이 성경에
기록된 조명이 마음 속에 너무나 희미하게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 가운데 용하다는
점장이의 말이나 자신이 신뢰하는 의사의 말에도 매우
주의하며 조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점쟁이의 말을
신뢰하기 때문에 행동으로 표출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그런 정도의 신뢰도 없어 보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면 그 신뢰하는 정도만큼 그 사람의
사고와 행동은 변화됩니다. 죠나단 에드워즈는 믿지 않는
이웃들이 지옥에 떨어져 고통당하는 울부짖는 소리가
귓전에 맴돌아 자다가도 몇 번씩이나 일어났고, 옷을 챙겨
입고 복음을 전하러 나가곤 했습니다. 그에게 기록된 지옥의
말씀은 어떤 영화나 비디오나 신문에 나오는 뉴스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실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에게
유다의 파멸은 그런 생생한 살아있는 소식이었지, 막연한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에 눈물이 쏟아졌던 것입니다.
2-7절은 범죄한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혀를 구부려 거짓을
말하고, 진리를 위해서 용감하지 못하고, 악에서 악으로
나아가며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3). 우리는 여기서 신앙의
상실이 곧 인간성 상실임을 보게 됩니다. 어느 민족이나
사회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식어지고, 믿음에서 떠날 때
그 사회는 필연적으로 도덕적 타락과 거짓이 팽배했습니다.
진리를 떠날 때 거짓은 넘치고 이웃간에는 비방과 거짓과
속임수가 사회적 현상이 됩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저버리면
여러분의 가정은 필히 부부간에 서로 속임수가 있고, 부모와
자녀간에는 서로 빼앗고, 비방하고, 속이는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교회도 사회도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
59:4에 이르기를, [정의를 위하여 외치는 자도 없고 진리를
위하여 변호하는 자도 없으며 사람들이 헛된 것을
신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해악을 품어 불법을 낳고](사59:4)라고
했는데 진리를 위하여 일하지 않을 때는 죄악에 삼킴을
당합니다. 성도들은 진리를 위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할 수 있기 때문이요,](고후13:8)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진리만이 배교한 이 시대에 저와 여러분을
지켜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알기를 거부하는 백성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의 딸로
인하여 어떻게 할까? 내가 그들을 녹이고 단련하리라.](7).
주님은 그들을 녹이고 단련하실 것을 결심하셨습니다.
녹이고 단련한다는 말은 제련소에서 은이나 금, 동,
철등에서 주물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용광로 속에 넣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을 주님의 단련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분께서 아시나니 그분께서 나를 단련하신 뒤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단련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시편 11:4-5에 이르기를 [[주]는
자신의 거룩한 전(殿)에 계시며 [주]의 왕좌는 하늘에 있도다.
주의 눈은 사람들의 자녀들을 바라보시며 주의 눈꺼풀은
그들을 단련하시는도다. [주]께서 의로운 자는 단련하시되
사악한 자와 폭력을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혼이
미워하시는도다.]했고, 다윗 역시 자신을 단련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시편26:2에 [오 [주]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시며 내 속 중심과 마음을 단련하소서.](시26:2)라고
간구했습니다. 시편 66:10에도 [이는, 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은을 단련함같이 우리를
단련하셨음이니이다.](시66:10). 주님이 버리지 않으시고
녹이고 단련하시는 것은 다시 회복하시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며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운동을
통해 자신의 몸을 단련하는데 많은 시간과 돈을 씁니다.
그러나 주님은 몸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단련하십니다.
사람들은 몸에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나 먹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영혼에 유익을 위해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십니다. “육체의 훈련은 유익이 적으나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하며 현재의 생명과 앞으로 올 생명의 약속을
지니고 있기 때문”(딤전4:8)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단련하십니다. [도가니는 은을, 용광로는 금을
단련하거니와 [주]는 마음을 /단련/하시느니라.](잠17:3).
주님은 무엇으로 우리를
단련하시는지 살펴봅시다.
① 주님은 사람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만일 그가 불법을 범하면 내가 사람들의
막대기와 사람들의 자녀들의 채찍으로 벌을 줄 것이로되](삼하7:14).
이는 인간 관계를 통해 연단하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군대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집안에서 나의 천적들을
배치해 두시고, 때로는 가정 내에 가족간의 갈등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제가 존경하는 서울에 어떤 목사님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적인 가르침을 준 사람은 자신의
딸과 자신의 아내라고 고백하곤 하셨습니다. 딸과 아내는
그분의 인생에서 막대기였고, 채찍이었습니다.
②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이 임하기까지 /그러하였도다/.
[주]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105:19). 시편 기자는
요셉이 종으로 팔리고, 발은 족쇄에 상하고, 쇠사슬에 묶인
감옥 생활이 모두 주님의 단련이었음을 말해 줍니다(시105:17-19).
주님은 요셉에게 미리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이집트에서 무려 13년의 혹독한 시련의 세월을 통해서
단련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받은 후에 곧 바로
성공과 축복의 대로가 놓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단련합니다. 다윗 역시 그러했습니다.
[내가 고난 당할 때에 이것이 내 위로가 되었사오니 이는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시119:50).
③ 사람의 칭찬을 통해서
단련합니다. [도가니로 은을, 용광로로 금을 /단련/하듯이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잠27:21).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동시에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됩니다. 다윗은 전쟁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여인들이
뛰놀며 서로 화답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이요,
다윗은 수만이로다, 하니라.](삼상18:7)란 칭찬을 통해
극심한 단련을 받았습니다.
④ 쓰라린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단련하십니다. [내 마음을 쏟아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찾아보고 탐구하였나니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이 쓰라린 해산의 고통을
주사 그것으로 단련받게 하셨느니라.](전1:13),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아들들에게 해산의 고통을 주사 그 안에서
단련받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전3:10). 우리는
인생의 시련을 통해서 주님의 단련하시는 손길을 봅니다. 왜
그렇게 일이 풀릴 듯 풀릴 듯 하면서도 풀리지 않는지
답답함이 적게는 수년 어떤 경우에는 수십 년이 갑니다.
쓰라린 해산의 고통을 주시는 것은 그것으로, 그 안에서
단련 받게 하신 것입니다. 시험에 떨어지고 취업에 실패하고,
결혼에 실패하고, 사업에 실패하는 등의 갖가지 실패는
쓰라리지만 주님은 그것을 통해서, 그 안에서 우리를
단련받게 하셨습니다.
⑤ 징계를 통해
단련하십니다. [이제 징계가 그 당시에는 기쁜 것으로
보이지 아니하고 슬픈 것으로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그로 말미암아 단련된 자들에게 의의 화평의
열매를 맺느니라.](히12:11). 징계는 하나님이 가장 자주
애용하시는 단련 방법입니다.
⑥ 시험을 통해서
단련합니다. [시험을 견디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그가
단련을 받은 뒤에 {주}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왕관을 받을 것임이라.](약1:12). 생명의
왕관은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시험을 견디고, 단련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왕관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통해서
그의 믿음의 순도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시험을 통과하지
않는 믿음은 약효가 입증되지 않는 약이나 검증이 안된
시제품과 같습니다. 설계대로 만든 모든 제품은 반드시
시험을 해 본 후에야 좋은 제품인지 그저 그런 제품인지
불량품인지 알 수 있듯이 시험을 통해서만 우리의 믿음은 알
수 있습니다.
⑦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연단하십니다. [이것은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단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훨씬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드러나게 하려 함이니라.](벧전1:7). 주님은 우리를
단련하려고 시련을 보내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단련하려고 오는 불 같은 시련에 관하여는 마치 이상한
일이 너희에게 일어난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4:12).
교회사의 역사는 믿음의 불같은 시련에 관한 증언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세상을 거부하고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 산
사람들은 모두 불같은 시련을 통해서 단련 받은 자들입니다.
8-11절은 유다의 죄악에
대한 철저한 심판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무더기로,
용들의 소굴로, 거주민이 없는 도시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대언자 예레미야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미리 알았던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예루살렘을 향해 우시는
주님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곧 다가올 이 세상의
종말과 믿지 않는 자들이 받게 될 심판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도 감각도 없다면 차마 그를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분명 경고를 농담으로 여기는 롯의 사위들과
같은 부류입니다. 예수를 믿고, 성경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은 그 마음 속에 전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다 행하지는 못하지만 누구나
자신이 믿는대로는 행동합니다. 믿음은 행동입니다(Faith is
Action).
12절을 보십시오. [지혜가
있어서 이 일을 깨달을 자 누구인가? [주]의 입의 말씀을
받아서 이 땅이 어찌하여 멸망하고 광야같이 불에 타서
지나가는 자가 없게 되었는지 밝히 알릴 자 누구인가?](12).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아무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믿지 않으면 아무도 알릴 수 없습니다. 오늘날
강단에서 지옥에 대한 경고가 사라진 것은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지만 건성으로 읽고, 듣는 자들은 깨닫지 못하며, 밝히
알리지 못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누가 [주]의 뜻
가운데 서서 그의 말을 깨닫고 들었느냐? 누가 그의 말을
주목하고 들었느냐?](렘23:18). 깨닫지 못하는 것은 지능의
문제나 정보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깨닫지 못하는 것은
말씀을 들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며, 믿음으로 말씀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13-14절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그 까닭은 그들이 내가
그들 앞에 세운 내 법을 버리고 내 음성에 순종하지
아니하며 그 안에서 걷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 마음에서
상상한 것을 따르며 자기 조상들이 자기들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따라 걸었기 때문이라.](13-14). 우리가 성경을
배우면서도 다가올 미래에 대한 경고를 가볍게 여기고,
마음에 전혀 부담을 갖지 않고, 복음에 빚진 자의 심정을
갖지 않는 이유는 유다의 백성들이 성전 예배를 드리면서도
전혀 깨달음이 없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법을
버렸습니다.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말씀
안에서 걷지 않았습니다. 자기 마음에서 상상한 것을
따랐습니다. 주님대신 바알들을 따랐습니다. 이는 현대
교회가 성경을 버리고, 주의 음성에 불순종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말씀 안에서 걷지 않고 humanism을 따라 걷습니다.
인본주의는 마귀가 세상에 준 또 하나의 종교입니다.
성경대신 자신들의 상상대로 걷습니다. 인간의 상상은
건전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창세기 6:5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사악함이 땅에서 커지고 또 그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증거하셨습니다. 주님은 노아의 홍수로 땅을 심판하신 후에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이 마음에서 상상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이라....](창8:21)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동일한 증거를 했습니다. [그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되 그분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며 오히려 자기의 상상
속에서 허망해지며 어리석은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이요,](롬1:21).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상상하는
것들은 다 무너져야 합니다. [/우리는/ 상상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거슬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고후10:5). 당시 유다에 유행했던 바알의 가르침은
긍정적인 사고 방식, 적극적 사고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지키신다.”
그런 것이 주류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에서 주로
가르치고, 설교되어지는 바알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성공,
축복, 성장, 비젼, 꿈과 같은 단어가 설교의 주된 테마가
되었습니다. 지옥을 향해 가는 혼들에 대한 연민이나 눈물은
흔적도 없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의 성공학
강좌만이 난무합니다. 단전 호흡, Mind Control, 4차원의 정신
세계, 요가, 심신 수련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갖가지
프로그램들은 모두 하나님을 없애고 자신의 상상력을
최대한 자극하여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 바꾸어 보려는
운동들입니다. 교회 역시 본질은 비슷하고 껍질만 바꾸어서
이런 짓을 하고 있는데 모두 바알들의 가르침입니다. 이들은
성경을 깨닫지 못하며, 성경을 선포하지 못합니다.
15-16절은 심판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주]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내가 그들 곧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고 쓸개 물을 주어 마시게 하며 또
그들이나 그들의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이교도들 가운데로
그들을 흩어 버리고 그들의 뒤를 따라 칼을 보내어 마침내
그들을 진멸하리라, 하셨느니라.](15~16). 쑥을 먹이고,
쓸개 물을 주어 마신다는 표현은 유대교적 관용구입니다. 이
말은 오늘날 표현으로 하면 눈물 젖은 빵입니다. 시편 80:5에
[주께서 그들을 눈물의 빵으로 먹이시며 그들에게 많은
눈물을 주사 마시게 하셨나이다.](시80:5)라고
말씀하심으로 의미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어 먹고 마시게
한 빵과 물은 그들의 생각의 열매요, 그들이 뿌린 씨앗의
열매였습니다. 성경은 우리 마음을 밭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씨앗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뿌리든지 뿌린대로
거둡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고, 말씀의 물로 씻음 받지 못하고 여러 가지 이상한
교리들에 끌리게 되면 마음은 온갖 육신의 행위들을
쏟아내는 창고가 됩니다. 성령의 열매대신 육신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신명기 29:18에 [두렵건대 너희 중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이 날 그 마음이 [주]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이 모든 민족들의 신들에게로 가서
그들을 섬길까 염려하며 또한 너희 가운데 쓴 것과 쑥을
내는 뿌리가 생겨서 이 저주의 말들을 듣고도 마음
속으로 자기 자신을 축복하여 이르기를, 내가 비록 내
마음의 상상 속에서 걸으며 목마름에 술 취함을 더하려
할지라도 내게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염려하노라.](신29:18-19).
유다의 백성들은 이 말씀대로 그들 안에 먼저 쓴 것과 쑥을
내는 뿌리가 생겼고 육신은 그 결과를 거두었습니다. 마음에
쓴 뿌리가 생기면 육신은 쓰디쓴 맛을 경험하게 됩니다. [/너희는/
부지런히 살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게
하고 쓴 뿌리가 돋아나 너희를 괴롭게 하거나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더럽게 되지 않도록 할지니](히12:15).
우리의 마음은 쓴 뿌리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하며,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림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
속에 거하게 하옵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엡3:17),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세움을
받아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넘치도록 감사를
드리라.](골2:7).
17-22절 주님께서 ‘애통하게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통곡을 하고, 눈물이 쏟아져야
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오 여인들이여, 그러할지라도
너희는 [주]의 말씀을 듣고 너희 귀로 그분의 입의 말씀을
받아서 너희 딸들에게 통곡하는 것을 가르치고 각 사람이
자기 이웃에게 애가(哀歌)를 가르치라.](20). 심판을
목전에 앞두고 유다의 백성들은 울어야 합니다. 통곡을 해도
부족한 판국입니다. 사망이 창문 안으로 넘어 들어오며,
자녀들과 젊은이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들에는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널려 있고, 아무도 거두지 못할 정도로
처참합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는 세대는 울어야 할 때 울지
않습니다. 물리적으로 죽은 자들은 육체에 반응이 없듯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영적인 반응이 없습니다. 주님의 지상
사역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를
향해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아니하고 우리가 너희를
향해 애곡하여도 너희가 애통하지 아니하였다, 하는
아이들과 같도다.](마11:17). 오늘날 교인들이 영적인
설교에 반응이 없는 대신 육신적인 설교에 열광하는 것은
그들의 영은 죽었고, 육신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23-24절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지혜로운 자는 자기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 용사는
자기 힘을 자랑하지 말며 부자는 자기 재물을 자랑하지 말라.
오직 자랑하는 자는 이것을 자랑할지니 곧 깨달아 나를
아는 것과 내가 땅에서 인자와 공의와 의를 집행하는 [주]인
줄을 /깨닫는 것/이니 이는 내가 이 일들을 기뻐하기
때문이니라. [주]가 말하노라.](23-24). 주님은 무엇을
자랑해야 하고 무엇을 자랑하지 말아야 하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지혜를 자랑하고, 자기 힘을
자랑하고, 자기 재물을 자랑합니다. 자랑할 것을 만들면
그것을 인생의 보람이요, 성취감이라고 좋아합니다. 지혜를
자랑한다는 말은 오늘날 말로 하면 학위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힘을 자랑한다는 말은 권력이나 지위를 자랑하고
가문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재물을 자랑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본입니다. [이제 너희가 스스로 자랑하는 것을
기뻐하니 이러한 기쁨은 다 악한 것이니라.](약4:16).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할례를 행함으로 육신을 자랑했습니다. 이런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갈6:14). 그는 약한 것을
자랑했습니다(고후12:5,9). [오직 자랑하는 자는 {주}를
자랑할지니](고후10:17)란 말씀대로 우리는 주를 자랑해야
합니다. 다윗은 [내 혼이 [주]를 자랑하리니 겸손한 자가
이것을 듣고 즐거워하리로다.](시34:2)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요, 주님이 땅에서 인자와 공의와 의를 집행하시는
분이란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자랑거리입니다. 주님은
이런 지식을 기뻐하십니다. 이런 지식을 성경은 진리의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the knowledge of the truth)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주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진리의 지식에 이르도록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딤후2:15).
공부하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육신을 자랑하고 외모를
자랑하고, 재물을 자랑하고, 자기 지혜와 힘을 자랑하는
자들은 결코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느니라.](딤후3:7).
성경을 공부하는데는 세상 지혜나 힘이나 재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겸손한 영, 말씀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25-26절은 다시 한번 심판의
선포인데 할례받지 못한 자와 할례받은 자를 더불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이스라엘을 할례받지 못한
자와 동일시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몸에는 할례를 받았지만
마음에는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할례없는
몸의 할례는 자해(自害)나 다름없습니다. 유대의 남자
아이들이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했다고 해서 율법을
행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할례는 마음의 할례까
우선이며, 그것이 없으면 할례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신10:16,
30:6, 렘4:4, 롬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