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예레미야 11:1-
요절: 예레미야 11:
예레미야 11-13장은
예레미야의 4번째 설교입니다. 주제는 ‘깨어진 언약’입니다.
주님은 신명기 28:1-30:9에 축복과 저주의 언약을 주셨는데
이는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행위 언약이었습니다. 그들이
언약을 지키면 복을 받지만 언약을 깨뜨리면 저주를
받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언약에 기초해서 유다가 받게 될
저주에 대한 기록입니다. 1-8절은 언약의 말씀들에 대한 유다
백성들의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언약이란 말이
11장에 거의 집중되어 있는데 이는 그들이 받게 될 심판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그들이 이미 출애굽할 때
모세를 통해 주어진 언약에 따른 심판이란 점을 분명하게
하신 것입니다(2,3,4,6,8,10 참조). 우리는 복을 받든 심판을
받든 그것은 이미 주의 말씀에 기록된 언약을 기초로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11:1을 보십시오. [[주]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이르시되,](1).
예레미야에게 처음 말씀이 임한 후에(렘1:2) 그는 유다의
대언자가 되었고,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그 이후에 2:1, 7:1에
말씀이 임했고 11:1은 주님이 다시 전할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이번에 주신 말씀은 ‘언약의 말씀’들에 관한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 언약의 말들을 듣고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주민들에게 말하라.](2).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주님이 일방적으로 주신 약속이 있고,
약속의 백성과 상호간에 맺은 쌍방 언약이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언약을 은혜의 언약 또는 무조건적
언약(unconditional covenant)이라고 하고, 인간의 행위에 따라
영향을 받는 언약을 행위 언약 또는 조건부 언약(conditional
covenant)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처음에는 아담에게 언약을 주셨고, 다음에는 노아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아담의 언약은 조건부 행위
언약이었습니다. 아담의 행동 여부에 따라서 복을 누리느냐?
저주를 받느냐?가 결정났습니다. 반면 창세기 9장의 노아의
언약은 무조건적 언약입니다(창9:9-17). 노아가 어떻게 하든지,
그 후손이 어떻게 살든지 물로 이 땅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언약입니다. 주님은 언약의 증표로 하늘과 땅 사이에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다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시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 언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주신
언약입니다(창15:8, 17장). 주님은 언약의 증표로 할례를
행하게 하셨습니다(창17:10-11). 이후에 주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는 전적인 행위
언약이었습니다(출24:7-8). 그들은 피를 뿌리고 언약의 책에
기록된 내용들을 들은 뒤에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이것이
호렙에서 맺은 언약입니다(신5:2). 언약의 증표는 십계명의
돌판이었습니다. 후에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축복과
저주의 언약을 맺었습니다(신29:1). 이 언약은 철저히 조건부
언약이요, 행위 언약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주님이 주신
언약은 다윗의 언약입니다(삼하7:12-13). 이 언약은 다윗과
그의 씨에게 영원한 왕국을 주신다는 약속인데 일명 소금
언약이라고 불립니다(대하13:5,대하21:7). 이 언약은 무조건적
언약입니다. 이후에 신약이 체결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체결되는 새 상속 언약입니다(히12:24).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이스라엘과 맺을 새 언약이 있습니다(렘31:31,
히8:8,13). 이 두 언약은 너무나 복된 주님의 언약입니다. 지금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증거하는 언약은 모세의 언약 중에
신명기 28-30장에 언급된 언약을 말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씀들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니](3). 주님은 마치 계약서를 다시
확인하듯이 언약의 내용들을 상기 시켜 주십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27장에서 온 백성들이 주님이 “...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했을 때, 백성들은 “아멘”으로 응답함으로
맺었던 언약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저주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우상을
새기거나 만들어 은밀한 곳에 두는 자(신27:15) ②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업신여기는 자(신27:16), ③ 자기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신27:17), ④ 눈먼 자를 길에서 헤매게
하는 자(신27:18), ⑤ 나그네나 아버지 없는 자나 과부의
재판을 굽게 하는 자(신27:19), ⑥ 근친상간(신27:20,22,23), ⑦
수간(獸姦)-짐승과 함께 눕는 자(신27:21) ⑧ 자기 이웃을
은밀히 죽이는 자(신27:24), ⑨ 청부 살인(신27:25). 마지막으로
이 모든 말씀을 행하려 하지 않거나 행할 의도가 없는 자들
역시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확인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할 것이요, 온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27:26).
결국 유다 백성들은 이 율법들을 행하지 않으면 기꺼이
주님의 저주를 받겠다는 서약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시대에 이 언약들은 철저히 무시되고
파기되었습니다. 우상 숭배가 얼마나 많았던 우상의 수효가
도시의 수만큼이나 많았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엉터리
재판이 많았습니다. 이 말씀을 기준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만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만약 이 기준에 따르면 우리는 주님의 저주로
인해 이미 이 땅에서 죽임을 당해 마땅한 죄인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까닭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이
다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니 이는 기록된바,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기 위하여 항상 그것들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저주받은 자라, 하였음이라.](갈3:10).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위한
저주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대속(代贖)하셨으니 이는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는 다 저주받은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제 더 이상 율법의 저주가
없습니다.
신약 성도들은 누구도
저주해서는 안되며, 내가 누구에게 저주를 받을 때는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저주받을 일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할 때입니다(갈1:9).
은혜의 복음이 아닌 변질된 복음을 전할 때 그는 차라리
전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주}께서 임하심으로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16:22)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요14:23,24).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들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우리의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14:23-24).
4절입니다.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이집트 땅 곧 쇠 용광로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에 순종하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에 따라
그것들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될 것이요,](4). 이미 말씀드린대로 주님의
언약 가운데 출애굽할 때 맺었던 언약을 말합니다. 이
언약은 순종할 때만 유효한 언약입니다. 불순종할 때는
저주가 임합니다. 주님은 레위기 26장을 언급하십니다. [너희가
내 법규 안에서 걷고 내 명령을 지켜 행하면](레26:3)...주님은
여러 가지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적당한 때에 비를 주고,
땅은 소출을 내고, 나무는 열매를 맺고, 수확이 계속되며,
빵을 배불리 먹고, 안전히 거하며, 땅에는 평화가 임하고,
외적이나 악한 짐승이나 칼이 없을 것이며, 원수들을 쫓아
내 주십니다. 전쟁이 나면 다섯 명이 백명을 백명이 만명을
이기며, 다산하고 번성하게 하십니다.”(레26:5-11) 많은 복
중에 가장 큰 복은 [나는 너희 가운데서 걸으며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리.](레26:12)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언약을 깨뜨리고 불순종하면 임할
재앙은 두려움과 폐병과 열병과 마음의 고통이 임하고 씨를
뿌려도 원수가 열매를 먹고, 죽임을 당하고, 원수들의
통치를 받고, 적을 이길 힘이 없이 도망다녀야 합니다(레26:13-14).
주님은 일곱 배의 벌, 일곱 배의 재앙, 일곱 배의 징계를
내리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레26:18,21,28). 주님이 언약을
다시 말씀하신 것은 이제 그 언약대로 집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한 맹세 곧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맹세를 이행하리라, 한 것인데
그것은 곧 이 날과 같으니라, 하라, 하시기에 내가 대답하여
이르되, 오 [주]여, 그대로 되리이다, 하였노라.](5).
주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고, 현재
유다는 주님의 약속을 누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언약대로
복을 주셨고, 언약대로 인도하셨듯이, 언약대로 재앙과
저주가 임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오 주여, 그래도
되리이다,’ 하였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주님의 언약을 다 알고 있었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의 말씀을 들을 때 그대로 된다는
믿음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난파당한 배에 선원들과 함께
죽음을 목전에 둔 바울은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기운을
내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노니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행27:25). 마리아는 주의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수태고지를 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을 보소서. 당신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리이다, 하매 천사가 그녀를 떠나가니라.](눅1:38).
주님은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어떤 것도 신실하게 이행하지
않으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라도 우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한 맹세, 내가 너희에게 한 약속을 이행하리란 한
것...그것은 곧 이 날과 같으니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도 주님이 말씀하신 것 가운데 제게 해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심중에서 나온 신앙 고백은 ‘오 주여,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이다.’입니다.
6절입니다. [그때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말을 유다의 도시들과
예루살렘의 거리들에서 선포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들을 듣고 그것들을 행하라](6). 하나님은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들을 듣고
그것들을 행하라’ 하셨습니다. 약속 이행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 행해야 합니다. 듣기만 하면
자신을 속이는 자에 불과합니다(약1:22). 말씀을 들으면
두려워해야 하며, 말씀을 들으면 요시야처럼 자기 옷을
찢어야 하고(왕하22:11), 말씀을 들으면 느헤미야와
에스라처럼 백성을 가르쳐 주님을 경배해야 (느8:9)
정상입니다. 살기가 등등하던 유대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손에 들었던 돌을 놓고 차례대로
떠났습니다(요8:9). 그러나 죄인들은 선포되는 말씀을 들어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부자 청년처럼 근심하며 가 버리고(마19:22),
어떤 이들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과 쾌락으로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하며(눅8:14), 어떤 이들은 들으려
하지 않고 귀를 막고 덤벼듭니다(행7:57).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말씀들을 듣고 그것들을 행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말씀들을 듣고 행하는 자들을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라고 하셨고(눅8:21), 말씀을 듣고 행하면 100배의
열매를 맺는 자라고 하셨습니다(눅8:8,15). 주님은 어떤
여자가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이 빤 젖이 복이 있나이다란
말에 [그러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느니라,.](눅11:28)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으며(마7:24), 말씀을 듣고 행할 때 주님 역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말은
듣지 아니하시나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사람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이제 우리가 아나이다.](요9:31).
우리는 구약의 언약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언약
아래 있기 때문에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구약에 기록된
저주를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기는 하지만
행하지 않을 때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리고(시51:12),
하나님의 증거를 잃어버리며(고전15:33,34), 하나님의 치유를
잃어버리고(고전11:30), 하나님의 보상을 잃어버리며(고전3:13-15),
천년 왕국 때의 통치권 즉 유업의 상급(눅19:15-26)을
잃어버리며, 심하면 육신의 생명을 잃습니다(고전11:30).
7-8절입니다. [내가 너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그들에게 진지하게
단언(斷言)하였으며 이 날에 이르기까지 일찍부터 일어나
단언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에 순종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순종하지도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저마다 자기의 악한 마음이 상상하는대로 걸었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령하였으나 그들이 행하지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말이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라, 하라.](7-8).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희생물을 드리는 법이 아니었습니다. 급하고 중요한 것은
번제 헌물이나 안식일이나 십일조나 주일 성수가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모이면 먼저 성전
건물을 짓고, 종교 체계를 갖추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순종이었습니다. [내가 너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는 번제 헌물이나 희생물에 관하여
그들에게 말하지도 아니하였고 명령하지도 아니하였으며
오직 내가 이것만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음성에 순종하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길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잘되리라,
하였으나](렘7:22~23).
이제 주님은 그들에게
행하라고 명령하였으나 행하지 아니한 언약의 모든 말이
백성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심판이요, 징계며,
벌입니다.
9절입니다. [[주]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주민들 가운데
반역하는 일이 드러났도다.](9). 유다의 불순종을 주님은
반역죄로 다루십니다. 어느 나라나 반역은 어느 죄보다 그
형량이 크고 무겁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불신하는 것은
반역입니다(민14:9).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탐을 하고
돌아와서 불신에 빠져 울부짖는 백성들을 향해 [오직
너희는 [주]를 대적하여 반역하지 말며 또 그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그들이 우리의 빵이기
때문이라....](민14:9)라고 했습니다. 불신은 반역입니다.
반복되는 시험과 불평은 반역입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는
문제로 인해 계속 불평하자 모세는 [...너희 반역자들아,
이제 들으라,](민20:10)고 외쳤습니다. 우상 숭배는
반역입니다. [우리가 번제 헌물이나 음식 헌물이나
희생물을 위하여 [주] 우리 하나님의 성막 앞에 있는 그분의
제단 외에 다른 제단을 쌓음으로 [주]께 반역하고 이 날 [주]를
따르는 일에서 돌이키려 함은 결코 아니니라.](수22:29).
이런 점에서 유다는 심히 반역하는 백성이며, 주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 반역자들이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 선조들의 불법들로 돌아가 다른
신들을 따르고 섬겼은즉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도다.](10). 하나님이
먼저 언약을 깨뜨리시는 법은 없습니다. 시편89:34에 [내
언약을 깨뜨리거나 내 입술에서 나간 것을 변개하지
아니하리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깨뜨리는
것은 항상 사람들입니다. 타국인들의 신들을 따라가면
언약은 깨어집니다(신31:16). 먹고 배부르고 살찌면 다른
신들을 섬김으로써 언약을 깨뜨립니다(신31:20). 이스라엘이
그러했듯이 경제적 풍요로움은 언제나 배교의 씨앗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는 부요하기 때문에 영적 능력을 잃어
버렸습니다(계3:18). 돈을 사랑하다가, 돈을 탐내다가
믿음에서 떠났습니다(딤전6:10). 호렙산에서 맺은 언약은
언제나 깨어질 수 있는 언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언약은 결코 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취소되거나 변개되지 않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그들이 능히 피하지 못하리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리라.](11). 언약이 깨어지면 하나님은 성경에
기록된 재앙을 내리시는데,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가장
확실한 기도 응답의 비결은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유다의 도시들과 예루살렘 거주민들이 자기들이 향을
드리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들의
고난의 때에 결코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리라. 오 유다야, 네
신들이 네 도시의 수와 같도다. 너희가 예루살렘 거리의
수대로 그 수치스런 물건을 섬길 제단들 곧 바알에게 분향(焚香)하는
제단들을 세웠도다.](12-13).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들 역시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주님은 이미
전에 [그러나 네가 너를 위하여 만든바 네 신들이 어디
있느냐? 네가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이 너를 구원할 수
있거든 일어나게 할지니라. 이는, 오 유다야, 네 신들이 네
도시의 수만큼이나 되기 때문이로다.](렘2: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상은 평소에는 몰라도 환란과 고난의
때에 얼마나 허무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14절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7:16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기도를 금한 명령은 단 한 번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나 구할 수 있지만 다음의 경우는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짓는 것을 보거든 간구할 것이요, 그러면
그분께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아니하는 자들로 인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나니 이로
인하여는 그가 기도하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요일5:16).
15-17은 이스라엘이 행한
죄악에 대한 주님의 심판입니다. 유다의 죄는 음탕한 짓을
한 것인데, 이는 억지로 할 수 없이 한 것이 아니라 매우
기쁘게 자발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15). 모든 죄는 자신이
좋아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입니다. [네가 악을 행할 때에
기뻐하는도다.](15). 전에는 아름답고 푸른 올리브
나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불타고 가지가 꺽인 나무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좋은 포도나무, 무화과나무로
비유되었습니다. 올리브 나무가 꺾였다는 표현은 완전한
배교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로마서 11:17 [또한 그 가지들
중에서 얼마가 꺾이고 야생 올리브나무인 네가 그들 가운데
접붙임을 받아 그들과 함께 올리브나무의 뿌리와 기름짐에
참여하게 되었은즉](롬11:17). 이런 점에서 성도들 역시
올리브 나무와 포도 나무로 비유됩니다.
18-19절은 유다의 죄를
보게된 예레미야가 당하는 고난입니다. 대언자는 시대의
죄악, 백성들의 불법에 대해서 정확하게 통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여 주십니다(18). 그렇게 되면 그는
필연적으로 고난을 당합니다(19).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치려고 계략을 꾸미고 죽여 버리려고 했습니다. 의를
전파하는 자들이 세상에서 아무런 trouble이 없었던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바울과 그의 일행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어떤
형제들을 끌고 도시의 치리자들에게 가서 외쳐 이르되,
세상을 어지럽게 만든 이 사람들이 여기에도 이르렀는데](행17:6).
이것이 세상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은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환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더 심한 핍박이 가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절은 위험 앞에서
원수갚는 것을 주님께 맡긴 예레미야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억울함과 누명을 풀기 위해 일어설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원수 갚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그러하오나, 오 의롭게 심판하시며 속
중심과 마음을 시험하시는 만군의 [주]여, 내 사정을 주께
드러냈사오니 주께서 그들에게 원수갚으시는 것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20).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찾아다니며 이르기를, 네가 우리 손에
죽지 아니하려거든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말라,
하는도다.](21). 이는 멸망을 앞둔 배교한 현대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습니다. 멸망을 앞둔 유다의
백성들은 주의 말씀을 전하는 대언자에게 설교를 금지해
버렸습니다. 앞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경을 빼앗아
버리고, 성경이 금서(禁書)가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미
많은 교회들은 바른 성경을 빼앗겨 버린 채 거짓 성경으로
거짓 복음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아나돗 사람이란 베냐민
자파의 영토내에 있는 레위인의 성읍이며, 제사장
아비아달과 예레미야의 고향이기도 합니다(수21:18; 대상6:60;
왕상2:26; 렘1:1; 삼하23:27; 대상12:3). 아나돗이란 뜻이 “응답들”이란
말입니다. 아나돗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은 유다의
전지역 모든 백성들이 다 타락했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말해
주는 것입니다. 가장 성경적이고 영적이고 신앙심이 깊은
고장에서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은
다른 성읍들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22-23절은 주님이 어떻게
심판하시는가에 대한 언급입니다. 심판과 멸망을 결코 졸지
않습니다. 더딘 것 같아도 결코 더디지 않습니다. 지금
평안하다 해도 잠시 후면 이미 칼이 목에 다가 옵니다. 이제
우리는 얼마 후에 이 땅에 불어닥칠 대환란에 대해 경고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