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예레미야 13:1-27
요절: 예레미야 13:23
예레미야 13장은 비유적
표적을 통해서 유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을
보여준 대언자의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종들에게 ‘실물
설교’를 하게 하심으로 듣는 이들의 이해를 돕고, 믿음을
주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1-11절은 ‘아마포 허리 띠’에
관한 비유입니다. 이는 하나님에게 밀착해 있어야 할
백성들이 하나님과 멀어짐으로써 받는 심판입니다. 12-14절은
가죽 부대에 관한 비유입니다. 이는 백성들의 술취함으로
받게 될 심판을 보여 준 것입니다. 15-17절은 교만에 대한
경고입니다. 18-19절은 여호야킨 왕과 그의 어머니가 받게 될
심판을 말합니다. 그들은 597 B.C에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20-27절은 예루살렘 위에 선포되는 재앙입니다.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마포 띠를
구해 네 허리에 띠고 물 속에 두지 말라, 하시기에](1).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실물 설교를 하게 하셨습니다.
구약의 대언자들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사야는 3년 동안 벌거벗었고(사20:3),
호세아는 창녀를 아내로 삼았고, 에스겔 역시 좌우로 번갈아
누워야 했습니다(겔4:5,6). 그는 빵을 먹을 때도 덜덜 떨면서
먹었고, 근심하면서 물을 마셨는데, 이는 이스라엘 위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겔12:18).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명령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 무엇인지 열매를
보여 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말과 선한 행실을
통해서 불신자들이 그것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고(마5:16), 자신들의 행동을 부끄럽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벧전2:12).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말이
아닌 삶을 통한 실물 설교를 해야 합니다. 그들은 말을
듣지는 않지만 행위는 보기 때문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는 것은
종의 자세입니다. 주님은 [너희 허리에 띠를 띠고 너희
등불을 타오르게 하며](눅12:35)라고 말씀합니다. 침례인
요한은 허리에 띠를 띤 타오르는 등불이었습니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나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동안 그의 빛을
기뻐하기 원하였느니라.](요5:35). 우리 역시 이런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의 빛을 비추는 등불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빛을 비추는 등불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허리에 띠를 띠고 있을 때 주님 역시 허리띠를 띠고
종들을 섬깁니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허리띠를 띠고 그 종들을 음식 앞에 앉히고 나아와
그들을 섬기리라.](눅12:37). 허리에 띠를 띠는 것은 군인의
자세입니다. 허리 띠가 없는 군복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는 진리의 허리띠를 매어야 합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를 동여매고 의의 흉갑(胸鉀)을 입고](엡6:14).
주님은 우바스의 정금으로 띠를 두르셨습니다(단10:5).
2절입니다. [내가 [주]의
말씀대로 띠를 구해 내 허리에 띠니라.](2).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대로 아마포로 된 허리 띠를 구해 허리에
매었습니다. 허리 띠는 사람들의 신분과 특징을 나타내
주기도 했습니다. 엘리야는 가죽 허리 띠를 매었습니다.
아하시야는 털이 많은 살마,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다는
말에 곧 바로 그가 엘리야인줄 알았습니다(왕하1:8). 침례인
요한 역시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매우
고운 실로 정교하게 짠 허리 띠를 찼습니다. [가늘게 꼰
아마 /실/과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로 허리띠를 만들되
바느질로 만들었으니 [주]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출39:29). 이들이 허리 띠를 찬 것은 주님을
섬기는 종의 자세를 보여 준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는데, 이 역시 섬김의
표입니다(요13:4). 예레미야는 제사장의 허리 띠를 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허리 띠와 같은 존재로서
몸에 달라붙어 있어야 하는 것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레미야와 같이 주의 말씀대로 허리띠를 구해서
허리에 띠어야 합니다. 고급 문양이 새겨진 가죽 띠가
아니라 우리가 매어야 할 것은 마음의 허리 띠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오실 그 은혜로
인하여 끝까지 소망을 가질지어다.](벧전1:13).
3-7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두번째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구해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프라테스로 가서 바위틈에
그것을 감추라, 하시기에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대로 내가
가서 그것을 유프라테스 옆에 감추었느니라. 여러 날이 지난
뒤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유프라테스로 가서
내가 네게 명령하여 거기에 감추게 한 띠를 가져오라,
하시기에 내가 유프라테스로 가서 띠를 감춘 곳을 파고 띠를
가져오니, 보라, 띠가 훼손되어 전혀 쓸모 없게 되었더라.](3~7).
주님은 예레미야가 구한 허리 띠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
유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허리 띠를
유프라테스로 가서 바위 틈에 감추게 하셨는데, 이는 이들이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말합니다. 70년간의 포로
생할을 통해 다시 돌아오는데 띠가 훼손되어 전혀 쓸모없게
되었듯이 이스라엘 역시 그러함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아마포로 된 고운 허리 띠가 상하고 썩어버렸다면 그 허리
띠는 옷에도 소용없고, 끈으로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 이렇게 쓸모없이 망가지는가? 맛을 잃어 버릴
때입니다. [너희는 땅의 소금이나 소금이 만일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리요? 그 뒤에는 아무 쓸모
없고 다만 버려져서 사람들의 발 밑에 밟힐 뿐이니라.](마5:13).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맛을 잃어 버린 유다의 백성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 버려지고, 사람들의 발밑에
밟혔습니다.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이 예수를 거부하고,
스데반을 죽임으로써 그들은 로마에 의해 전세계로 버려저
사람들의 발밑에 밟혔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없고, 사람들의 발 밑에 밟힐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이 택한
그릇들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긍휼의 그릇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긍휼의 그릇들은 우리니 곧 그분께서
유대인 중에서 뿐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들이니라.](롬9:24). 이 그릇 안에는 놀라운 보배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졌나니 이것은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며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후4:7). 그래서
우리는 이 그릇을 제대로 소유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밥
그릇과 국 그릇도 구분해서 쓰면서 자신의 그릇을 소유할 줄
모르면 곤란합니다. [저마다 거룩히 구별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그릇을 소유할 줄 알되](살전4:4). 자기 그릇을 잘
소유하고, 깨끗하게 하면 주님은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합당하게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하게 쓰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딤후2:21). 안타까운 것은
성도들이 성령의 전인 자신의 몸을 그릇되이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없는 쓸모없는 그릇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띠가 훼손되어 쓸모없게
된 유다 백성들처럼 아무 쓸모없게 된 성도들이 교회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어떻게 성도가
망가지며, 쓸모없게 되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a. 주의 말씀을 믿지 않을
때 성도들은 쓸모없는 존재가 됩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왜
자기들은 주님과 같은 능력이 없는지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너희가 믿음이 없기 때문이로다’(마17:20)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성경 공부나 설교가 아무런
유익을 끼칠 수 없습니다. [우리뿐 아니라 그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으나 그 선포된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한 것은 그 말씀이 그것을 들은 자들 속에서
믿음과 결합되지 아니하였음이라.](히4:2). 말씀은 믿는
자들 안에서만 효력있게 일합니다(살전2:13). 믿음이 없으면
기도도, 예배도, 봉사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b. 성도가 사랑으로 일하지
않을 때 쓸모없는 존재가 됩니다. 사랑으로 행치 않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바쳐 가난한
자를 먹이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이 말씀은
교훈으로 받아서는 안됩니다. 이 말씀은 기록된 그대로
사실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일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행치 않는 모든 것은 죄이지만 사랑으로
행치 않는 모든 것은 무(無)입니다. 그리스도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무슨 짓을 해도 받을
상급은 없습니다. 사랑이 없이 행한 모든 일의 결산 회계
보고에는 0이라고 적힐 것입니다
c. 현실적 이익과 현재의
필요 때문에 영적인 명분을 버리는 사람은 아무 쓸모없게
됩니다. 에서가 귀한 아들에서 썩어 버린 허리 띠처럼 된
것은 영적인 것을 경시하는 그의 가치관, 영적 사고
때문이었습니다. 창세기 25:32에 [에서가 이르되, 보라,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권이 내게 무슨 유익을 주겠느냐?
하니]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에서와 같이 현실적 문제를
영적 명분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은 상하고 썩어버린 허리
띠처럼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는 음행하는
자나 혹은 먹을 것 한 조각을 위하여 장자권을 판 에서와
같이 속된 자가 있을까 염려함이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 뒤에 그가 복을 상속받고자 하였으되 거절당하였으니
이는 그가 눈물을 흘리며 마음을 다하여 복을 구하였으나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음이니라.](히12:16-17).
d. 성도가 불신자와 결혼할
때 쓸모없는 존재가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이 우상 숭배와 같은 동일한 부류의 범죄란
인식이 희미합니다. 현명하던 솔로몬이 망한 것은 그의
잘못된 결혼관 때문이었다고 느헤미야가 증거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하기만 하면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에서 역시
그런 부류였습니다.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의 딸들로 인하여 살기에 지쳤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헷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유익이 되리요? 하더라.](창27:46) 믿음의 여인 리브가의
결혼관은 신약 성도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결혼관입니다.
침례가 주님을 믿는다는 신앙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간증이라면 불신자와의 결혼은 주님의 기록된 말씀을
공개적으로 거역하겠다는 의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는
공개적인 간증입니다. 가끔 자신의 육신의 정과 욕심에
이끌려 불신자와 결혼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살면서
구원시키면 한 영혼 얻는 것’이란 그럴듯한 핑계를 댑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을 것입니다. ‘너희는
불신자와 결혼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거라.’ 불신자와
결혼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생의 삶에 아무 유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세상에서도 별 유익이 없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e. 우상 숭배자들, 거짓
대언자들을 의지할 때 그 사람은 아무 쓸모도 없게됩니다.
아무리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이라도 우상을 숭배하는 순간
그의 영적 생명은 끝나 버립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거짓 꿈들을 대언하고 말하며 자기의 거짓말과
경솔함으로 내 백성으로 하여금 잘못하게 하는 자들을 내가
대적하노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지도 아니하였은즉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을
끼치지 못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23:32). 오늘날도
목사는 많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경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f. 불의의 교제를 할 때
성도는 급격하게 망가집니다. 성경은 모임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합니다. 성경은 성도의 교제를 매우 강조합니다. 하지만
어떤 교제는 전혀 유익이 없습니다. [속지 말라. 악한
사귐은 선한 습성을 부패시키느니라.](고전15:33).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형편없는 놈팽이로 전락하는데는 그와
사귀는 친구들을 보면 원인과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로 모여야 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르 자들과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의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의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서로 권면하여 그 날이 다가옴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일수록 악하고 유익이 없는 경우가
성경에 나옵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밝히 말하는 이
일로는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곧 너희가 함께
모이는 일이 유익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해가 된다는 것이라.](히11:17).
모임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모이면 기도와 찬양과 말씀을
나누며 서로를 깊이 생각하여 사랑과 선행을
불러일으키도록 격려하며(히10:24), 서로에게 덕을 세워주며,
짐을 나누어 지며, 믿음의 경주를 경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익은 고사하고 도리어 해가 된다면 그 교회는 이미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g. 부활을 믿지 않을 때
그가 행하는 어떤 종교 활동도 쓸모없습니다. [내가
사람들의 방법대로 에베소에서 짐승들과 더불어 싸웠을진대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면 그것이 내게 무슨
유익을 주겠느냐? 내일 죽을 터이니 우리가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전15:32). 바울은 일생 개와 사자와 이리,
독사들과 싸웠습니다. 그는 늘 승리한 것 같지만 인간적으로
볼 때는 늘 패배했습니다. 바울이 스스로 고백했듯이 [내가
수고를 더욱 넘치도록 하고 매도 지나치게 맞고 감옥에도 더
자주 갇히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후11:23).
이렇게 한 결과는 부활 후에 얻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이 없다면 죽음으로 다 끝나고 맙니다. 바울에게 부활
신앙이 없다면 이렇게 맞고 터지는 것은 고행과 자학에
불과합니다. 부활 신앙이 없다면 지금의 신앙 생활은 아무런
유익도 힘도 주지 못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저 멀리
미래의 세상, 죽음 이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세, 지금
이 시간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부활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부활
신앙은 그들의 현재의 삶의 방식을 결정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선택의 순간에 미련없이 불타는 용광로를
선택했습니다. 히브리서 11:35b에 이르기를 “다른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고문을 당하되 풀려나기를 원치
아니하였으며” 부활 신앙은 현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이길 힘을 제공해 줍니다. 현재 여러분에게 이런
부활에 대한 소망과 신앙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현재 생활이 바뀝니다.
h. 성도가 자신을 자랑할
때 그는 쓸모없는 종이 됩니다. 심지어 간증조차도 유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자랑하는 것이 물론 내게 유익하지
아니하나 내가 주의 환상들과 계시들로 나아가리라.](고후12:1)
바울은 자신이 체험을 간증하는 것조차 유익이 되지
못한다고 했으며, 간증을 하다가 그만 두고 말았습니다(6).
이는 사람들이 듣는 것 이상으로 나를 생각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6b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직접
나를 보는 것이나 혹은 나에 관하여 듣는 것 이상으로 나를
생각할까 염려하여 그만 두노라.](고후12:6). 간증은
자칫하면 그 사람의 본 모습 이상의 과장된 모습으로 보이게
하거나 생각하게 합니다. 별 것 아닌 골통도 간증 한번으로
믿음의 영웅으로 바뀝니다. 여러분이 부득불 간증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 일이 끝난 후 한 참 뒤에 충분히 검증을 받고
하시기 바랍니다. 간증이란 때로 남에게 유익을 주기도
하지만 자신에게는 전혀 유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i. 베풀어 주는 신앙이
아니라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떠나가라.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2:16).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양식
가운데 하나는 물질의 나눔입니다. 고린도후서 8, 9장은
물질의 나눔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선교
헌금이나 구제 헌금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물질을 내야 가능한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베풀다,
나눈다”는 말은 대부분 물질적인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너희가 마땅히 이렇게 수고하여 약한 자들을 도와
주고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도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5).
우리가 일하는 목적은 돈이나 부가 목적인 아닙니다.
부지런히 일해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필요 이상을 주실 때 그것은 필요한
자들에게 주라고 더 맡기신 것이란 믿음이 바로 청지기
신앙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는 청지기 신앙을 소유한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j. 성도가 장로에게
불순종할 때 그는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너희를
다스리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너희 자신을 낮추어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혼을 위해 깨어 있기를 마치 자기가 회계
보고할 자인 것같이 하나니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13:17). 재주도
많고, 능력도 많은 형제가 반골(反骨)기질로 인해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경우를 수없이 봤습니다.
교회에서 끝없이 분란을 일으키고, 불순종을 선동함으로
죄를 쌓아가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성경대로 믿고
실행한다는 교회들에는 기존 장로교단이나 교회들의 성직자
제도의 폐해를 들어가며 목사 알기를 우습게 아는 풍조가
은근히 퍼져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알면서 몇 줄 배운
지식으로 제도 교회 목사들 욕하는 재미를 본 사람들은 특히
그러합니다. 목사는 하나님이 세운신다고 말은 하지만
자신들 앞에 있는 목사는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순종을 죄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다스리는 자에게 반역하고 불순종할 때 여러분은 주님을
섬긴다 하나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k. 성도가 음식을 따라
처신하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이상한
교리에 끌려 다니지 말지니 이는 은혜로 마음을 굳게 함이
선한 일이요, 음식으로 할 것이 아님이라. 음식에 전념하는
자들에게 음식이 유익을 끼치지 못하였느니라.](히13:9).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모세의 음식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몰몬교, 안식교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음식에 전념하여 ‘건강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지키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자들에게 ‘음식이
유익을 끼치지 못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음식 규례를 잘
지킨다고 영적 성장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돼지 고기 안
먹고, 커피 안마시고, 채소만 먹는다고 몸된 성전이 더
신령해지고 깨끗해지는게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에 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론은 ‘유익이 없다’입니다.
예레미야는 [보라, 띠가
훼손되어 전혀 쓸모 없게 되었더라.]고 증언합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훼손되어 쓸모없게 된 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친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때에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훼손시키리라.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자기
마음에서 상상하는 대로 걸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고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경배하나니 그들이 전혀 쓸모 없는
이 띠와 똑같이 되리라.](8-10). 주님께서 띠를
훼손시키시듯,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훼손시키겠다고 하셨습니다. 교만은 마귀의 속성이며,
마귀는 모든 교만한 자녀들의 왕입니다(욥41:34). 이들이
쓸모없는 띠가 된 것은 1.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사울이 전혀
쓸모없는 존재가 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자는 쓸모없는 띠와 같습니다. 2. 자기 마음에 상상한
대로 걸으며. 기록된 성경과 대언자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면 누구나 자기 마음에서 상상하는대로 걷게
마련입니다. 자신이 만물의 척도요, 기준인 사람은 쓸모없는
띠와 같습니다. 3. 다른 신들을 따라가고. 우상을 섬기고
숭배하는 자는 우상만큼이나 쓸모없는 자이며, 전혀
쓸모없는 띠와 같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는
띠가 사람의 허리에 붙어 있는 것같이 내가 이스라엘의 온
집과 유다의 온 집을 내게 꼭 붙어 있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나를 위한 백성이 되게 하며 이름과 찬양과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고자 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주]가
말하노라.](11).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아들일만하며, 완전하신 뜻은 백성들의 불신과
불순종으로 인해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띠로서
이름을 날리고, 찬양과 영광이 될 수 있었지만 온 세상의
수치와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재벌이 될 수
있었는데 거지가 된 것이나, 천재가 될 수 있는데 돌머리가
되었다는 것이나,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는데 파산한
가정이 되었다는 것보다 더 억울하고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슈퍼 스타가 될 수 있었던 선수가 술과 담배와 약물 복용과
여자 문제로 후보 선수로 전전하다 은퇴하는 것보다 더
한심한 일이 ‘나를 위한 백성, 이름과 찬양과 영광이 되게
하려하였으나 듣지 않아서 3류 국가도 아닌 남의 나라
포로가 되어 버린 이스라엘’입니다. 이는 오늘날 성도들,
교회에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간증도 능력도, 열매도 없는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렇다면 그 뜻을 받아들이십시오. 그것이 비전이
있는 인생이요, 소망이 있는 인생이요, 믿음의 삶입니다.
12-14절은 가죽 부대의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모든 가죽
부대가 포도즙으로 차리라, 하셨다 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모든 가죽 부대가 포도즙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확실히 알지 못하리요? 하리니 그때에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거주민 곧 다윗의 왕좌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대언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거주민을 술
취함으로 가득히 채우고 그들을 던져 서로 부딪치게 하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도/ 다 같이 그리하게 하리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주]가 말하노라.](12-14).
가죽 부대는 물이나 포도즙을 담고, 저장하는데
사용했습니다. 가죽 부대가 포도즙으로 차는 일은 가마니에
쌀을 담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런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것을 누가 모르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풍요로움이 아니라 그들이 술에 가득 취해
서로 부딪히고 싸운다는 말씀입니다. 병이 서로 부딪히면
깨어지듯이, 죄는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깨질 때까지
부딪히게 합니다. 이들이 얼마나 술에 취했는지 아버지와
아들 사이도 없습니다. 실제로 술로 인한 범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영국 총리실에서는
영국인들이 알코올 남용으로 인한 영국의 사회적 비용이
연간 최소한 200억파운드에 달한다는 보고를 했습니다. 숙취
및 과음으로 인한 근로자들의 결근 일수가 1천700만일에 달해
고용주의 연간 손실이 64억 파운드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으며, 알코올 관련 질환 치료비용 17억 파운드, 알코올
관련 범죄 퇴치 비용 73 억 파운드, 알코올 중독자 재활처리
등, 기타 사회적 비용 60억 파운드 등 영국의 과음 문화가
국민경제에 주는 부담이 엄청나다는 것이 총리실의
결론이었습니다. 총리실은 보고서를 통해 남자는 3명중 1명,
여자는 5명중 1명 꼴로 음주를 절제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며 폭음을 시작하는 연령도 매년 낮아지고 있으며, 연간
120만건의 알코올 관련 폭력사건이 발생하고 있으며 평일
외과병 동을 찾는 환자들의 40%가 음주와 관련된 사건,
사고를 부상의 원인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은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술취한 사회, 술권하는 사회는
예배를 방해하고, 그들을 육신과 마귀의 종으로 타락시키고
맙니다.
15-21절은 교만에 대한
경고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듣고 귀를 기울이며
교만한 자가 되지 말지니 이는 [주]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니라.](15). 사람들은 자신이 교만하다는 사실을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성도가 교만할 때 하나님은 심판 외에 달리 어떤 은혜도
베풀 수 없습니다. [이는, 보라, 화덕같이 불태우는 날이
임하기 때문이니 참으로 교만한 자와 악하게 행하는 자가
다 지푸라기가 되리라. 그 날이 임하여 그들을 불태우고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말4:1).
주님은 교만을 모든 죄 가운데 늘 맨 앞에 두시는데, 이는
교만을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자신 아래,
또는 뒤에 두는 것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판단합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고, 인정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15절의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교만하게 굴지 말고 듣고,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 대신 ‘그러나, 그런데’란 말이
반복되면 여러분은 교만한 것입니다.
16절은 심판이 오기 전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주] 너희 하나님께서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에, 너희 발이 어두운 산들에 걸려 넘어지기
전에, 너희가 빛을 찾을 때에 그분께서 그 빛을 사망의
그늘로 변하게 하사 짙은 어둠으로 만드시기 전에 /너희는/
그분께 영광을 돌릴지어다.](16). 어리석은 사람들은 꼭 ‘전에’가
아니라 ‘후에’ 무엇을 합니다. 심판이 임한 후에 후회하고
회개해야 소용없습니다. 임하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칙령이
나가기 전, 그 날이 겨같이 사라지기 전, [주]의 맹렬한
분노가 너희에게 이르기 전, [주]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습2:2). 구주를 믿는 것은 ‘나중에,
내일에’가 없습니다. 항상 즉시, 그 순간에 해야 합니다. [이제
/너는/ 젊은 시절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재난의 날들이
이르기 전에 혹은 네가 말하기를, 나는 아무 낙이 없다, 하는
해들이 가까이 이르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기 전에 혹은 비가 온 뒤에 구름들이 되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12:1-2).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만일 너희가 이것을 듣지 아니하면 내 혼이 너희 교만으로
인하여 은밀한 곳에서 울 것이며 [주]의 양떼가 포로로
끌려감으로 인하여 내 눈이 심히 통곡하고 눈물을 쏟으리라.](17).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슬픔과 눈물은 끝이 없습니다. 바울은 동족
유대인을 향해 큰 근심과 계속적인 슬픔이 있었습니다. [내
마음 속에 큰 근심이 있고 계속해서 슬픔이 있으니](롬9:2).
그는 지역 교회들을 향해서 애타하며, 염려했습니다. [이렇게
밖에 있는 일들 외에도 날마다 내게 닥치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아니하더냐?](고후11:28~29). 눈물이 없는 교회, 눈물이 없는
성도는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동족들이 당할 심판으로 인해, 회개만 하면 피할 수 있는
재앙을 그대로 당하는 현실을 보면서 통곡하며, 눈물을
쏟았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너는/
왕과 왕비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스스로 낮추고 앉을지니
이는 너희의 수위권(首位權) 곧 너희 영광의 왕관이 내려갈
것임이니라, 하라.](18). 여기서 왕은 여호야긴이고,
왕비는 어머니를 말합니다. 열왕기하 24:12에 [유다 왕
여호야긴이 자기 어머니와 신하들과 통치자들과 관원들과
함께 바빌론 왕에게 나아가매 왕이 그를 붙잡으니 이때는
바빌론 왕의 통치 제팔년이라.](왕하24:12)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 느부갓네살은 유다의 사람들을 거의 대부분
포로로 잡아가고, 시드기야를 대신 왕으로 앉혀 놓았습니다.
그리고 586 B.C에 유다는 완전히 망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남쪽의
도시들이 닫히리니 그것들을 열 자가 없고 유다가 다 포로로
끌려가리니 전체가 다 포로로 끌려가리라.](19). 70년의
포로 생활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사야는 이들이 포로로
잡혀간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포로로 잡혀갈 것이요, 그들의 존귀한
자들은 굶주릴 것이며 그들의 큰 무리는 갈증으로 목마를
것이라.](사5:13). 하나님의 법을 버린 결과가 세월을 흘러
흘러 결국 완전히 멸망하는 사태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네가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런
일들이 내게 닥치느냐? 하겠으나 네 불법이 크기에 네
치마가 들추어지고 네 발뒤꿈치가 드러났느니라.](22).
예언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예레미야의
말대로 되고 마는구나!’란 깨달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찌하여...’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교만한 자들의 특징은 말해준 대로 되어도
배움이 없고, 깨닫지를 못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이디오피아
사람이 자기 피부를, 표범이 자기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겠느냐? 그리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23). 유다가 선을 행할 수 있는 확률은
이디오피아 사람(흑인들)이 피부색을 바꿀 수 있는 확률이나
표범이 자기 반점을 변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마디로
가능성은 0입니다. 전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이들이 말씀을 듣고 돌이킨다면
그들은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죄인들이 의인이 될 수 있는
확률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 가능성은 100%가 됩니다. 24-26절은 심판의 내용입니다.
27절입니다. [내가 네
간음과 네 울음소리와 네 행음(行淫)의 음탕함과 들의 작은
산들 위에 있는 네 가증한 것들을 보았느니라. 오
예루살렘아, 네게 화 있을지어다! 네가 깨끗하게
되고자 하지 아니하느냐? 언제나 한 번 그리되겠느냐?
하시니라.](27). 하나님의 애타는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네가
깨끗하게 되고자 하지 아니하느냐? 언제나 한 번
그리되겠느냐? 하시니라.](27). 죄인들의 문제는 빛되신
주님 앞으로 나아오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되고자 하는 소원이나 의지가 없습니다.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깨끗하게 되는 비결은 스스로
힘으로는 전혀 불가능하지만 우리 주님 앞으로 나아오면
너무나 간단합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갈보리의 십자가
아래 나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의 피는 모든 죄를
정결케합니다(요일1:7, 히9:14). ‘언제나한 번 그리되겠느냐?’는
주님의 말씀은 탄식과 동시에 체념처럼 들립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정결케 하는
작업을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