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예레미야 12:1-17

요절: 예레미야 12:5


예레미야 12장은
예레미야의 불평과 하나님의 응답으로 되어 있습니다. 12:1을
보십시오. 예레미야의 기도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모순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오 [주]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하오나 내가
주의 심판들에 대하여 주께 아뢰고자 하오니 어찌하여
사악한 자들의 길이 형통하니이까? 어찌하여 심히 반역하는
자들이 다 행복하니이까?
](1).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
성도라면 누구나 ‘주는 의로우시나이다’라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 많은 성도들이
주님 앞에 “어찌하여...하나이까?”란 질문을 합니다. 이런
일은 예레미야, 욥, 다윗, 하바국 등 많은 대언자들이 던졌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욥은 [강도들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격노하게 하는 자들은 안전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에 풍성히 가져다 주시는도다.
](욥12:6)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고, [어찌하여 사악한 자가 살아남고
늙도록 지내며 게다가 권세도 강하냐?
](욥21:7)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공의인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시편 73편을 쓴 아삽은 이 문제로 자신의
믿음이 실족할 뻔했다고 고백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실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곧 마음이 깨끗한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도다. 그러나 나로 말하건대 내 발은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내 걸음은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사악한
자의 번영을 보고 어리석은 자를 부러워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조이는 끈이 없고 오히려 그 힘이
강건하며 다른 사람들같이 고난 중에 있지도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같이 재앙을 당하지도 아니하니 그러므로 교만이
목걸이처럼 그들을 두르고 폭력이 옷처럼 그들을 감쌌도다.
그들의 눈은 기름져서 솟아오르고 그들이 가진 것은 마음이
원하는 것보다 더 많으며 그들은 부패한 자로서 학대하는
것에 관하여 악하게 말하고 거만하게 말하며 그 들의 입은
하늘들을 향해 열려 있고 그들의 혀는 땅을 활보하는도다. ..
볼지어다, 이들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로되 세상에서
형통하며 재물을 불리는도다.
](시73:1-12). 1절의 고백과
아래의 진술은 상당히 모순되는 진술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이런 경우를 얼마나 많이 봅니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악인들이 형통하다가 망하는 것을 기대합니다.
피를 토하며 죽던 객사를 하던, 갑작스런 재앙을 당하면
속이 시원합니다. 80이 넘어도 아침에 조깅을 할 정도로
건강을 과시하며,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합니다. 어떻게
악인이 저럴 수 있나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잘 먹고 잘 살다
좋은 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의 보호를 받아가며 평안히
죽습니다. 예레미야나 아삽은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사악한 자가 형통하고, 어찌하여 심히 반역한 자들이 다
행복하니이까?” 견딜 수 없이 궁금했습니다. 이 문제가
개혈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자신의 모습에
절망했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무죄함에 씻은 것이 참으로 헛되니 이는 내가 종일토록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계를 당하였음이로다.
](시73:14-15).
성도들이 성경대로 살고, 양심대로 사는 것이 바보스럽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이제 신앙 생활 때려 치운다!는 말이
나올 직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답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분명히 주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그들을 파멸에 던지셨나이다. 그들이 어찌 그리 순식간에
황폐하게 되었나이까! 그들이 두려움으로 완전히
소멸되었나이다.
](시73:17-19). 아삽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잘먹고
잘사는 것 같은데 끝이 파멸이었습니다. 이 생이 전부인줄
알고 하나님께 이상하다, 궁금하다, 뭔가 잘못되지 않았느냐?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종말을 보니 모두 지옥에 던져지더란
것입니다. 그들은 지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이 생의 인생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지옥에 간 부자를 생각해 보십시오(눅16).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았다가 죽고 지옥으로 갔습니다. 만약 이 세상만
생각한다면 우리도 예레미야와 같이 주님께 “어찌하여...”라고
물을 수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주된 가르침은 악한 현
세상에서 승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저 하늘에서 승부를 보는
것, 다가올 세상에서 결판내는 것입니다. 현 세상만
생각한다면 바울이 말한대로 우리가 가장 비참한
자들입니다(고전15:19). 그러나 다가올 심판을 생각한다면, [이는
내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이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기 때문이라.
](롬8:18)입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의로우신 주님의 심판에 대해서 변론했습니다. [..하오나
내가 주의 심판들에 대하여 주께 아뢰고자 하오니 어찌하여
사악한 자들의 길이 형통하니이까? 어찌하여 심히 반역하는
자들이 다 행복하니이까?
](1b). 이 세상만 바라 볼 때
우리는 당연히 이런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몇몇
잘난체 하는 목사들 가운데 ‘천국을 설교하지 말고 현실을
설교하라. 내세를 말하지 말고 오늘을 이야기하라’고
떠듭니다. 그러면서 사회 개혁, 민중 신학, 자유주의 신학이
마치 혁명적인 성경 해석이요, 자신들이 이 시대의 등불인
것처럼 떠듭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 극히 일부분이며,
잠깐 지나가는 순례의 길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사회 개혁,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 주님께 물어
보아야 합니다. 하박국 대언자는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차마 악을 보지 못하시며 또 차마 불법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속이는 자들을 바라만 보시고 사악한
자가 자기보다 더 의로운 자를 삼키는데도 주의 혀를
억제하시나이까?
](합1:13)라며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2:4)고
답변해 주셨습니다. 말라기에 보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이는 너희가 이르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우리가 만군의 주 앞에서 그분의 규례를
지키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걷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를 행복하다 하고 참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이 세움을 받으며 참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들마저
건짐을 받는다, 하노라, 하기 때문이라.
](말3:14-15). 그들은
성전을 짓는데 엄청 고생을 했습니다. 돈도 많이 들었고,
시간도 들고, 노동력도 엄청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어놓은
성전에는 솔로몬의 성전에서처럼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도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 섬겨봐야 헛되다.
필요없다,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에 바칠 십일조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지금 모든 것을 결판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영원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성도들은 재림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너는
악을 행하는 자들로 인하여 초조해 하지 말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부러워하지 말라.
](시37:1).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곧 풀같이 베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시들 것이기
때문입니다(시37:2). 그들은 잠시 후면 모두 사라지고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불타는
지옥에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참으로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를 내리고 참으로
그들이 자라서 열매를 맺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속 중심은 머나이다
.](2). 예레미야는 그들의 위선을
고발합니다.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속 중심은
머나이다.” 위선자들은 철저히 세상과 동화된 교회에서
성장하고,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습니다. 성경의 가르침
대신 철저히 사람의 훈계로 가르칩니다(사29:13). 인간의
전통과 철학과 과학을 성경보다 앞세우고 “세상을
사랑하자, 세상을 변화시키자!”라고 외치면 됩니다. 오늘날
교회에 입은 주께 가깝지만 그 속 중심은 먼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오 [주]여,
하오나 주는 나를 아시고 나를 보셨으며 주를 향한 내
마음을 시험하셨사오니 도살할 양같이 그들을 끌어내시고
도살할 날을 위하여 그들을 예비하옵소서.
](3). 3절은
무서운 기도입니다. 일명 저주의 기도 또는 심판의 기도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보시고, 시험하신 후에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눈 앞에 있었고,
주님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다 주님의 시험을
받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셨나이다. 주께서 밤에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살피셨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작정하고 내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시17:3)라고 했고, [오 [주]여,
주께서 나를 살피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시139:1)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징계하시고
매질하시며(히12:6), 시험을 통해 단련하신 후에는 생명의
왕관을 주시며(약1:12), 왕국의 상속자로 합당한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해 불같은 시련을 보내십니다(벧전4:12). 반면 아무
징계도 시련도 매질도, 책망도 없었던 자들은 도살할 양같이
끌어내시고, 심판하십니다. 예레미야는 심판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악인들은 결코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불신자들 가운데 지옥의
심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착역이 지옥이란 사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
땅이 거기 거하는 자들의 사악함으로 인하여 어느 때까지
애곡하며 모든 들판의 식물이 시들리이까? 짐승과 새들이
소멸되었사오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그분께서 우리의
마지막 끝을 보지 못하시리라, 하기 때문이니이다.
](4).
땅은 사람들로 인해 더럽혀지며, 사람들로 인해 저주를 받고,
사람들로 인해 애곡합니다. 땅에 거하는 사람들이 사악하면
땅은 급속하게 황폐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에 비를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또 모든 창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는 줄을
우리가 아나니
](롬8:22)라고 한 대로 땅은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죄인들이 악을 행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땅에 거하는 자들에 따라서 땅의
상태를 변화시키십니다. [거기 거하는 자들이 사악하므로
결실의 땅이 변하여 불모지가 되게 하시고
](시107:34). 이는
사람으로 인해 땅이 변화될 것이란 말입니다. 천년 왕국 때
이 땅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살게 되므로 그 때는 땅의
저주가 걷히고, 옥토가 될 것입니다. 사악한 자들은 [그분께서
우리의 마지막 끝을 보지 못하시리라,
](4)고 하는데, 이는
심판은 결코 우리에게 임하지 않는다는 강한 확신의
표현입니다.


1-4절을 요약하면, 하나님
어찌하여 사악한 자들이 형통합니까? 하나님 어찌하여
반역자들이 다 행복합니까? 왜 주님은 악한 자들을 심판하지
않으십니까? 의인들이 얼마나 더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여기에 대해서 명료하게 답변해
주셨습니다. 5절부터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기도에 대해
응답해 주신 장면입니다. [네가 보병들과 달릴 때에
그들이 너를 지치게 하였거늘 어찌 네가 능히 말과
겨루겠느냐? 또 네가 신뢰하던 화평의 땅에서도 그들이 너를
지치게 하였거늘 요르단 /강/이 넘치는 속에서 네가
어찌하겠느냐?
](5). 이 말씀은 뭘 그 정도로 그렇게
고민하느냐?는 것입니다. 앞으로 더 어려워질텐데 뭘
그러느냐?는 책망입니다. 자신의 고향 아나돗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죽이겠다고 함으로써 예레미야가 지금처럼
호들갑을 떨면 앞으로 닥칠 유대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아나돗 사람들이 보병이라면
앞으로 만날 유대의 대언자들, 목양자들, 왕들은 말에
해당합니다. 아나돗이 화평의 땅이라면 이곳 예루살렘은
요르단강이 넘치는 거친 세파 속이란 뜻입니다. 한마디로
아나돗 땅에서 받은 위협과 박해는 아무 것도 아니란
뜻입니다. 흔히 우리는 조그만 어려움도 엄청 큰 어려움인
줄 알지만 하나님은 “아직 시작도 안했다”라고 하십니다.


6절은 5절의 보충
설명입니다. [이는 네 형제와 네 아버지의 집조차도 너를
속이며 참으로 무리를 불러 네 뒤를 따르게 하였음이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그들을 믿지 말지니라
.](6).
한마디로 믿을 사람 한 명도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사회는 불신의 사회가 됩니다. 이미 예레미야 9:4에서 [너희는
각각 자기 이웃을 조심하고 어떤 형제든지 믿지 말지니 이는
모든 형제가 철저히 빼앗아 대신 차지하며 모든 이웃이
비방하며 다닐 것임이요,
](렘9:4)란 말씀을 배웠습니다.
공산주의, 회교, 불교, 사회주의 국가들의 가장 큰 문제는
불신이 팽배한 사회 현상을 고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상호간에 신뢰가 없습니다. 한국
사회는 불신이 만연합니다. 기독교인도 많고, 교회도 많지만
이웃과 형제도 믿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는데, 이는 그만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회란 뜻입니다. 이제 예레미야는 오직
혼자 뿐입니다.


7-8절입니다. [내가 내
집을 버리고 내 유산을 버려 두며 내 혼이 극진히 사랑하는
자를 그녀의 원수들의 손에 넘겨주었나니 내 유산이 내게
숲의 사자같이 되어 나를 향해 울부짖으므로 내가 그것을
미워하였느니라.
](7-8). 내 집이란 말은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을 말합니다. 내 유산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말합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자란 유다의 백성들입니다.


9절입니다. [내 유산이
내게 점 있는 새 같으매 주위의 새들이 그녀를 대적하나니
너희는 와서 들짐승을 다 모으고 와서 삼킬지어다.
](9).
하나님의 백성은 특별한 백성이며, 보석입니다(출19:5, 시135:4).
그러나 이제는 점박이 새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이는 이방과
혼합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바알 종교와
혼합되었습니다. 이방 여인들과 결혼함으로써 가정에서도
몇 개의 종교가 생겼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점박이
새와 같습니다. 종교와 세속으로 섞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점박이 새와 같습니다. 순수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들이 사용하는 성경도 점박이 새처럼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에 이교도의 철학과 사상, 종교가 혼합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과 하나가 되고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위의 새들이 그녀를
대적하고, 들짐승들까지 합세해서 덤벼듭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 일이 눈앞에 닥치고 임할 때까지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많은
목양자들이 내 포도원을 부수고 내 몫을 발 아래 짓밟으며
내가 기뻐하는 몫을 황폐한 광야로 만들었도다. 그들이
그것을 황폐하게 만들었으므로 그것이 황폐하게 되어 나를
향해 슬퍼하는도다. 온 땅이 황폐하게 됨은 그것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기 때문이로다.
](10-11). 내 포도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주거지를 말합니다(사5:3-5).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포도원이었고, 백성들은 옮겨 심은
포도나무였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외적들이 아니라
목양자들이 주님이 포도원을 부수고, 짓밟고, 황폐한 광야로
만든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외부의 적에 의해서 망하기
전에 내부의 적에 의해서 망한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는 북왕국은 앗시리아, 남왕국은 바빌론에게
망했지만 그들을 망하게 한 것은 외적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양떼를 먹이고 돌보아야 할
목양자들이 오히려 짐승같이 되어 주를 찾지 않았습니다. [이는
목양자들이 짐승같이 되어 [주]를 찾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그들이 형통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의 양떼가 다
흩어지리로다.
](렘10:21). 배교의 시대에는 늘 성직자들이
먼저 타락합니다. 재정 러시아가 망하기 전에 그리이스
정교희의 성직자들은 얼마나 타락했던지 왕과 귀족을 위한
예배만 드렸습니다. 백성들에게는 무조건 순종하라,
존경하라만 설교했습니다. 그들은 사치와 방탕 가운데
빠졌는데 결국 러시아는 공산 혁명으로 완전히 망하고,
종교는 아편이란 수치와 모욕 가운데 교회는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성직자가 정치적 권력을 지니고, 영향력을 행사할
때 양들을 돌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양들을 이용할 뿐입니다.
선한 목자들이 사역하는 올바른 교회가 있다면 그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12절입니다. [노략하는
자들이 광야를 지나 모든 높은 곳에 이르렀나니 이는 [주]의
칼이 땅 이 끝에서 땅 저 끝까지 삼킬 것임이요, 모든 육체가
평안하지 못할 것임이로다.
](12). 타락으로 내부는
붕괴되고, 밖에서는 강력한 군대를 이끈 바빌론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전 세계를 질주하는 바빌론은
차례대로 이웃 나라들을 점령했고 이제 유다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도구로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을 세우셨습니다(렘25:9, 27:6). 그의 임무는 유다
백성을 쳐서 놀랄 일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고 그 땅을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13절입니다. [그들이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고 스스로 수고하여도 이득을 얻지
못할 것인즉 그들이 네 소산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리니 /이것은/ [주]의 맹렬한 분노로 인함이라.
](13).
하나님의 저주 가운데 하나는 일한데 따른 수고의 대가를
얻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을 했는데
월급을 받지 못하는 것이나, 돈은 받았는데 사기를 당하는
것이나, 저축해 두었는데 도둑을 맞거나, 벌금으로 날리거나,
병원에 갖다 바치거나 등입니다. 이것은 운(運)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입니다. 주의 율법과 명령을
버릴 때 그들은 무슨 짓을 해도 저주를 받으며, [네 땅의
열매와 네 모든 수고의 열매를 네가 알지 못하는 민족이
먹겠고 너는 항상 억눌림과 짓밟힘을 받을 뿐이리니
](신28:33)라는
말씀대로 됩니다. 외적이 안 쳐들어오면 벌레가 먹어 치워
버립니다. [네가 많은 씨를 들에 가져갈지라도 메뚜기가
먹으므로 적게 거둘 것이며 네가 포도원을 세우고
가꿀지라도 벌레가 먹으므로 포도를 거두지도 못하고
포도즙을 마시지도 못할 것이며 네 모든 경계 내에
올리브나무가 있을지라도 그 열매가 떨어지므로 그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네가 아들딸들을 낳을지라도
그들이 포로가 되므로 네가 그들로 인하여 즐거워하지 못할
것이며 네 모든 나무와 땅의 열매는 메뚜기가 먹어 치울
것이며
](신28:38~42)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는
네 손이 수고한 것을 네가 먹을 것임이라. 네가 행복하고
형통하리로다.
](시128:2). 자신의 수고를 먹을 수 있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주님의 저주가 임한 자들은 결코 자신의
수고를 먹지 못합니다.


주의 성전을 돌보지 않을
때 주님은 그들의 수고를 헛되이 만들어 버리십니다. [너희가
많이 뿌렸을지라도 적게 거두며 먹을지라도 충분하지
아니하고 마실지라도 마신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고 삯을 받는 자는 삯을 받아 구멍 난
자루에 넣느니라.
](학1:6).


주님의 것을 도둑질할 때
주님은 그들의 수고를 헛되이 만들어 버리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내 /것/을
강도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강도질하였나이까? 하나니 이것은 곧 십일조와 헌물이니라. 너희가
저주로 저주를 받았나니
이는 너희 곧 이 온 민족이 내
것을 강도질하였음이라.
](말3:8~9). 주님은 저주를 할
것이니라가 아니라 이미 저주를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충분한 소출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십일조를 냅니다. 하나님께 내든가 마귀에게
내든가? 둘 중 하나입니다. 십일조로 나갈 돈을 병원에
내었던가? 벌금으로 경찰서에 내었던가? 친구나 친척의
간절한 요청으로 그들에게 내었던가, 약값으로 내었던가?
아니면 수입이 적게 들어와서 죽을 쑤고 있던가, 그도 저도
아니면 말년에 일시불로 재산의 반을 위자료로 내던가?
자식이 들고튀던가?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한국 교회는 사이비
부흥사들이 헌금을 갈취하는 몇 십년의 세월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헌금 이야기하는 목사는 양식이 없는 목사,
탐욕스런 목사, 사이비 목사처럼 되어 버려서 약 10년간은
전혀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하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특히
킹제임스 성경을 쓰는 교회 목사들은 헌금 설교를 거의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제관, 물질의 사용, 돈에 대한 것은 삶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반복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십일조를 잘하는 것은 대단한 믿음이 아닙니다.
나의 돈이 다 주님의 소유란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 아닙니다. 이미 율법 이전에
있었습니다. 십일조는 간단한 가이드라인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버지의 날(어머니의 날), 어린이 날, 스승의 날 같은 것이
있습니다. 1년에 하루지만 그날만 아버지에게 잘 해 주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1년 내내 그날처럼 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다짐하고 보여 주는 행위입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엉망으로 살고 주일에만 예배를 드리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머지 날도 주일처럼 살겠다는 뜻입니다. 십일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주님의 소유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이 주신 것을
청지기로써 관리할 뿐입니다.


우리가 헌물을 드리고,
선교 헌금을 내고, 구제를 하는 일은 주님을 위해 하는
일이지만 결국 우리의 행복을 위한 일입니다. [내가 이 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령하는 [주]의 명령과 그분의
법규를 지키는 것이 아니냐?
](신10:13).


14절은 이방인들에 대한
예언인데 천년 왕국 때 성취될 말씀입니다. [[주]가 나의
모든 악한 이웃 곧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물려 준
상속에게 손을 대는 자들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서 뽑아 내고 유다의 집을 그들
가운데서 뽑아 내리라
.](14). 앗시리아, 바빌론, 이집트,
시리아, 로마 등은 하나님의 상속 백성들에게 준 땅을
탐했고,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죄로 인해
그들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지만 그들 역시 하나님의
백성을 건드린 죄에 대한 대가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괴롭한 나라들을 다 멸하셨고, 이후로도 멸하실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과 일부 국가를 제외한 전 세계는
반유대 정책을 견지하고 있는데, 이는 심판받을 큰 죄입니다.


15-16절은 이방인들에게
주신 회복의 소망입니다. [그들을 뽑아 낸 뒤에 내가
돌이켜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각 사람을 그의 유산으로, 각
사람을 그의 땅으로 다시 인도하리니 그들이 내 백성의
길들을 부지런히 배워, [주]께서 살아 계신다, 하면서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르쳐 바알을
두고 맹세하게 한 것같이 하면 내 백성의 한가운데서
세워지려니와
](15-16). 주님은 심판받은 백성들이 회개하고
부지런히 성경을 배우고,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신앙을
가지면 세움을 받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바알을 가르쳤듯이 이제 반대로
이스라엘로부터 주님을 배우고 맹세하면 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만일
순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 민족을 철저히 뽑아내고
멸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17). 이로써 예레미야의 모든
궁금증은 다 풀렸습니다. 지금의 침략 국가들, 주변
민족들의 먼 미래까지 다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방 민족들은
순종하지 않으면 철저히 망할 것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잠깐이 전부가 아닙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에 모든 역사는
결산됩니다. [이는 너를 섬기려 하지 아니하는 민족과
왕국은 멸망할 것임이니 참으로 그런 민족들은 완전히
피폐하게 되리라.
](사60:12). 이스라엘은 열방의 머리가
됩니다(신28:13).






'Archived(완료) > 구약 개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레미야(15)  (0) 2005.09.16
예레미야(14)  (0) 2005.09.14
예레미야(12)  (0) 2005.09.12
예레미야(11)  (0) 2005.09.11
예레미야(10)  (0) 2005.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