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예레미야 10:1-

요절: 예레미야 10:


예레미야 10장은 세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1-16절은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 17-22절은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23-25절은 주께 드려진
기도입니다. 예레미야는 주님과 우상의 차이를 대조하면서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날 때 사람들이 피조물들을
신들로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민족들이 천체 숭배[일월성신]나
신들을 섬기는 것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타락한 인간의 죄가
창조주대신 피조물을 경배하고 섬긴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경배하고 섬겼음이라.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받으실 분이시로다. 아멘.
](롬1:25).


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이교도들의 길을 배우지 말며
하늘의 표적들에 놀라지 말라. 이는 이교도들이 그것들에
놀라기 때문이니라.
](2). 이교도들의 길이란 신들을
만들고 다듬어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교도는 하나님의
법을 받지 못한 백성들,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이 없는
백성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백성으로서 이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들을 쫓아서 행하는 영적 역전 현상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분의 영광을 이교도들 가운데, 그분의
놀라운 일들을 모든 민족들 가운데 밝히 알릴지어다
.](대상16:24).
하나님은 이교도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불러내셔서 제사장
왕국으로 삼으셨고,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들은
모든 민족들 가운데 있는 신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불러냄을 받았습니다. 가르쳐 주어야 할
백성이 오히려 배우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입니까? [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참으로 내 목소리에 순종하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내게 모든 백성들보다 뛰어난 특별한 보배가 되리니
이는 온 땅이 내 것이기 때문이라. 또 너희는 내게 제사장
왕국이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 너는 이 말들을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출19:5~6). 오늘날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킨다면서 세상으로 뛰쳐나가지만
교회가 도리에 세상에 물들고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과 철저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원칙을 무시함으로써 세상의 조류는 급격히 교회 속으로
밀고 들어오고 말았습니다. 뒤늦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세상과 일치하지 말라, 세상과 친구가 되지 말라, 세상에
동화되지 말라고 설교해도 이미 늦어 버린 그런 시점입니다.
이스라엘이 이교도와 분리되어야 하듯이 세상과 분리되면
될수록 더 밝은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표적들에 놀라지
말라”는 말씀은 이교도들의 행하는 점성술, 점괘에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갈대아 사람들은 점성술(천문학)이 매우
발전해 있었습니다. 다니엘서에는 왕궁 안에서 마술사들과
별을 살피는 자들, 마법사들을 정책적으로 키우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 역시 그런 교육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정확한 예언이며, 주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통해 누구나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대언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가운데
계속해서 표적을 주셨는데, 그들은 하늘의 표적들에 놀라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고, 백성들 가운데 주의
말씀을 받은 대언자가 없어서 하늘의 별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이교도들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을 보고 부러워
하는 것은 마치 전기불을 가진 사람이 반딧불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는 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대언자들의 대언은
하늘의 표적들보다 몇 백배 더 정확합니다. 이교도들이
이스라엘을 보고 놀라야 하는데 이 역시 반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네가 수많은 계획으로 인하여 피곤하게
되었도다. 이제 별을 살피는 자들과 별을 바라보는 자들과
달마다 예언하는 자들로 하여금 일어나서 네게 임할 이
일들로부터 너를 구원하게 하여 보라
.](사47:13).


미래를 알고 싶습니까?
하늘의 별이나 점괘를 보지 마시고 성경을 보십시오. [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도 있으니 너희 마음
속에서 날이 새어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벧후1:19). 성경은 대언의 말씀입니다.
전 인류의 미래를 다 기록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미리 기록된 역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이 대언의 말씀들을 읽는 자와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들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
](계1:3).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
이는 예수님의 증거가 대언의 영이기 때문이라, 하더라.
](계19:10).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배교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의 빛과 조명보다는 인간들이 창안한 학문이란 이름을
가진 이론과 학설을 더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박사 학위를 가진 학자란 사람들의 말을 더 신뢰합니다.
전문가 그룹이 예측하고 진단하는 미래를 더 믿습니다. 누가
주식 시장의 동향을 분석해서 맞아떨어지기라도 하면
엄청나게 인기를 얻고 명성을 얻습니다. 국제 정세나 정치
질서에 대해서 예측해서 맞추기만 해도 학문에 정통한
사람처럼 그 분야에서 권위를 얻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진단은 점성술보다 정확도가 더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사람들은 정말 위기의 순간에 용하다는 점술가들을 찾아가
조언을 구합니다. 이교도들이 그것들에 놀랐듯이
유대인들인 역시 그랬습니다. 이는 오늘날 성도들이
성경보다 뉴스에 더 귀를 기울이며 놀라는 것과 매
한가지입니다.


주님은 [거짓말하는
자들의 증거를 헛되게 만들고 점치는 자들을 미치게 하며
지혜로운 자들을 물리쳐서 그들의 지식을 어리석게 만들고 자기
종의 말들을 확증하며 자기 사자(使者)들의 계획을 이행하고

예루살렘에게는 이르기를, 네 안에 사람이 거하리라, 하며
유다의 도시들에게는 이르기를, 너희가 세워지리라. 내가
그곳의 무너진 곳들을 일으켜 세우리라, 하고
](사44:25~26)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오직 하나님의 증거, 기록된 말씀만을
신뢰하게 만드시려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바빌론으로 잡혀간 유다 민족이 다시 돌아와서 나라가
세워지고, 도시가 건설된다는 것은 누가 상상이나 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은 성취되었습니다. 약 2000년간 땅도 없이
유랑하던 이스라엘이 다시 나라가 건설된다는 사실은
성경을 믿었던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성도들의 휴거가 있고, 대환란이 있고, 적그리스도의
통치가 있고, 천년 왕국이 전개된다는 사실은 성경을 믿는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예측하거나 상상하지도 못하는
일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
백성들의 관습은 헛된 것이니 이는 사람이 숲에서 나무를
베어 내고 장인의 두 손이 도끼로 /그것을/ 만들며
](렘10:3).
나라마다 미풍 약속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관습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습은 헛된 관습입니다.
나라마다 여러 가지 관습이 많이 있지만 대부분의 관습은
제사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설, 추석은 조상 제사와 관련된
관습입니다. 교회 내에 있는 부활절, 성탄절 역시
이교도들의 신전 제사와 연관된 관습입니다. 고린도전서
10:20, [그러나 내가 말하건대 이방인들이 희생물로 드리는
것은 마귀들에게 드리는 것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마귀들과 교제하는 자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라.
](고전10:20).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교도들의
우상 숭배를 보면서 그것을 따라갔다는 것은 마음이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보여 주는 예입니다.


창조주를 아는 지식이
없으면 우상을 아는 지식 역시 없습니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무나 돌,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서 세워두지만
호흡이 없고, 들을 귀나 보는 눈도 없습니다. 움직이지도
못합니다(4-5). 그래서 주님은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화를 주지도 못하고, 선을 행할 줄도 모릅니다.
[이제 우상들에게 바친 것에 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로 아나니...
](고전8:1). 저와 여러분은 우상에 관한
지식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상들에게 바친 희생물을 먹는 것에 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는 줄 아노라.
](고전8:4).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런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고전8:7). 지식이 있는
자들은 자신의 지식으로 지식이 없어 양심이 약한 형제들을
시험에 들게 해서는 안됩니다. 영적 지식이 약한 형제들은
우상에 대해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리낌도
있습니다. 우상은 사람들의 보호를 받아야 존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보호가 없다면 쥐가 갉아먹고, 새가 똥
오줌을 싸도 꼼짝하지 못하며, 바람이 불어서 쓰러지면 땅에
떨어지고 낙엽이 덮이고, 먼지가 가득 쌓이며, 썩어
버립니다. 우상이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우상을 보호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보호를 받지 않고,
사람을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6-7절은 위대한 믿음의
고백이요, 찬양입니다. [오 [주]여, 주와 같으신 이가
없사오니 주는 크시며 주의 이름은 권능이 크시나이다. 오
민족들의 왕이여, 주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자 누구리이까?
그리함이 주께 마땅한 일이오니 이는 여러 민족들의
지혜로운 자들 가운데서와 그들의 모든 왕국 안에서 주와
같으신 이가 없기 때문이니이다.
](렘10:6~7). 주님은 비교를
불허하시는 분이십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유대인들은 주위 민족들의 신들이 더 멋있어
보이고, 더 복을 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바알을 섬기고,
숲을 만들고, 그들의 관습을 따라 천체를 경배하고, 몰렉을
섬겼습니다. 주님이 유다 백성들을 향해, [이는 내 백성이
어리석어 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미련한 자녀들이요,
지각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로다. 그들이 악을 행하는 데는
지혜로우나 선을 행하는 데는 지식이 없도다.
](렘4:22)고
탄식하셨습니다. 사람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지식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스스로 지식이 솟아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창조자가
아니라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철저히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가 바로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것이 넘치지만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는
너희가 모든 일 곧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풍부하게 되었음이요
,
](고전1:5).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계시가 없는 지식은 자신을 망하게 합니다. 교육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그 지식은 구원을 주는 지식이 아니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자기 지식으로
말미암아 짐승같이 /우둔하게 되고/ 주물공마다 새긴
형상으로 말미암아 당황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형상은
거짓이며 그것들 속에는 호흡이 없기 때문이로다.
](렘51:17).
계시로 주어진 지식이 아닌 자기 지식은 하나님과 가깝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짐승과 가깝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거부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부족하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거부하였으므로 나도
너를 거부하여 나를 위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은즉 나도 네 자녀들을
잊으리라.
](호4:6). [그러므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포로로 잡혀갈 것이요, 그들의 존귀한 자들은
굶주릴 것이며 그들의 큰 무리는 갈증으로 목마를 것이라.
](사5:13).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을 때 그들은 철저히 망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진리의 지식에 이르러야 합니다(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2:4).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딤후2:15). 신앙 고백은 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아는 정도에 비례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오직 우리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벧후3:18)고
권면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참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0-16절은 우상과 비교해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① 주님은 참
하나님이십니다(10). 예수님은 참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증거하셨습니다(요17:3). 요한일서 5:20에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로써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성경의 분명한 계시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상 숭배자에
불과합니다.


② 주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상이 아니십니다. 우상들은
생명이 없습니다. 흔히 신들은 죽지 않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신들은 죽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라. 너희는 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자녀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사람들같이 죽을 것이요,
통치자들 중의 하나같이 넘어지리로다
.](시82:6~7) 신들은
멸망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그들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하늘들과 땅을 만들지 아니한 신들은 땅과 이
하늘들 아래에서 멸망하리라, 하라
.](11).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토록 살아 계십니다.


③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10c).


④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땅을 만드셨고 자신의 지혜로 세상을 굳게
세우셨으며 자신의 분별로 하늘들을 펼치셨도다.
](12).
하나님은 성경 전체에 걸쳐서 자신이 창조주이심을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창세기에서부터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등장합니다(계10:6, 14:7). 13절 역시
주님의 창조 사역입니다. 하늘, 물, 수증기, 비, 번개가
언급되었는데 이는 팔레스타인의 농경 사회에 농경신들이
이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보며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했습니다(렘7:18). 물, 수증기(안개, 이슬), 비는
농사와 너무나 밀접한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농경신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그러나 비를 내리고 수증기를 주시는 분은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이란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14-15절은 이들이 만든
우상이 헛 것이요, 거짓이며, 그로 인해 당황할 것이란
말씀입니다. 우상은 결코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는 [새긴 형상들을 섬기는 자들과 우상들을
자랑하는 자들은 다 당황하리니 모든 신들아, 너희는 그분께
경배할지어다
.](시97:7)라고 했습니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또 모두 당황하며 다 같이 혼동에
빠질 것이로되
](사45:16). 우상을 섬기는 자, 우상을
자랑하는 자,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다 당황하며,
부끄러움을 당하고, 혼동에 빠집니다. [새긴 형상들을
신뢰하며 부어 만든 형상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은 우리의
신들이니이다, 하는 자들은 뒤로 물러가 크게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사42:17). 우상 제작자나 우상을 사서 섬기는
자들이나 몸에 지니고 다니는 자들은 다 우상과 같은
자들입니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도 우상들과 같으며
우상들을 신뢰하는 자들도 다 그와 같도다.
](시135:18).
우상 숭배로 멸망을 앞둔 유다의 백성들은 우상의 본 고향
바빌론으로가서 3000 여종이 넘는 우상 숭배를 몸소 체험하게
됩니다. 그들은 70년 바빌론 포로 생활을 통해 바빌론이
메데와 페르시아에게 철저히 멸망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빌론의 우상들이 아무 것도 아님을 눈으로 보게 됩니다. [너희는
민족들 가운데 밝히 알리고 널리 알리며 군기를 세우라.
널리 알리며 숨기지 말고 말하라. 바빌론이 탈취를 당하고
벨이 당황하며 므로닥이 산산조각 부서지고 그녀의
우상들은 당황하며 그녀의 형상들은 산산조각 부서졌다,
하라.
](렘50:2).


16절입니다. 유다 백성은
우상 숭배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경배하는 민족입니다. [야곱의
몫은 그것들과 같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께서 만물의
조성자시요, 이스라엘이 그분의 상속 막대기이기 때문이라.
그분의 이름은 만군의 [주]시니라
.](16).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그들의 몫이며, 상속입니다. [이는 [주]의 몫이
자신의 백성이기 때문이라. 야곱은 그분의 상속 몫이로다.
](신32:9).
하나님의 유업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상속이 약속되어 있는데,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공동 상속자들입니다(롬8:17, 엡4:6, 골1:12, 3:24, 딛3:7, 히6:17).
아브라함이 실의에 빠졌을 때 주님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방패요, 지극히 큰 보상이라고 하셨습니다(창15:1). [
일들 후에 [주]의 말씀이 환상 속에서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防牌)요,
네가 받을 지극히 큰 보상(報償)이니라, 하시니
](창15:1).
주님은 우리에게 땅을 상속으로 주시고, 여러 가지 유업의
상급을 주실 수 있지만 최대의 상급, 보상은 주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다윗 역시, [[주]는 나의 상속과
나의 잔의 몫이오니 주께서 나의 몫을 지키시나이다.
](시16:5)라고
동일한 고백을 했습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수치를 당하고,
당황하게 되고, 혼동할 때 하나님의 성도들은 주님의 보상과
상급을 받습니다.


17-20절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들이 전파된 말씀을 통해서
돌이키지 않고,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먼 바빌론 땅으로
돌팔매로 돌을 던지듯이 던지신다는 것입니다. 19절 말씀은
포로 생활이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감당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자는 식으로
저항을 선택했는데, 그 결과 엄청난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주님이 지워준 멍에를 메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주님이
징계를 주시면 받아 들이는 것이 덜 고생하는 일입니다. 20절은
완전한 멸망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미 4:20에서 한 차례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패망 위에 패망이 크게 소리를
지르나니 이는 온 땅이 노략을 당하였음이라. 나의 장막들이
갑자기 노략을 당하고 나의 휘장들이 순식간에 노략을
당하였도다.
](렘4:20). 그러나 이렇게 패망한 민족을 다시
일으켜 세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는
목양자들이 짐승같이 되어 [주]를 찾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그들이 형통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의 양떼가 다
흩어지리로다.
](21). 주님은 이 모든 재앙의 일차적 책임을
이스라엘의 목양자들에게 돌리셨습니다. 목양자들이
짐승같이 되었기 때문에 양들이 다 흩어진 것입니다. 본래
목양자의 임무는 주님의 말씀을 양들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내가 또 내 마음에 맞는 목양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明哲)로 너희를 먹이리라.
](렘3:15).
그러나 그들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범죄했습니다(렘2:8). 그들은 포도원을 부수었습니다(렘12:10).
예레미야 23:1,2에는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화
있을진저, 내 초장의 양들을 멸하고 흩어지게 하는
목양자들이여! 그러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내
백성을 먹이는 목양자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가 내 양떼를 흩으며 그들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으니, 보라, 내가 너희의 악한 행위에 대하여
너희를 징벌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렘23:1-2).
목양자들이 목양자의 직분을 다 하지 못했을 때에 재앙이
임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목사, 목양자, 목자란
칭호로 교회내의 직분을 세워서 양들을 먹이는 일을 하게
합니다. 많은 교회에서 목사의 권위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거나 또는 반대로 지나치게 낮게 평가함으로써
목사의 정체성이 성경적 지위에서 벗어남으로 양들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목자(shepherd)와
목양자(pastor-목사)에 대한 성경적 조명을 통해 바른 인식을
얻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라(요10:11,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인도하고,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목자를 의미합니다(요10:11). 선한
목자란 양들을 알고, 양들 역시 그의 음성을 알며, 그 음성을
듣고 따르는 그런 목자를 말합니다(요10:14). 양들을
인격적으로 알고, 깊은 앎의 관계를 맺지 못하면 감히 선한
목자란 평가를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양들의 큰
목자이십니다(히13:20). 양들의 큰 목자는 자신의 피를 통해
양들을 모든 선한 일에서 완전하게 하시고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게 하는 목자를 말합니다(히13:20-21참조). 하나님은
양들에게 직접 역사하지 않으시고 양들의 큰 목자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고, 예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혼의 목자입니다(벧전 2:25). 주님은 우리의 혼을
지키시고, 먹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두 구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전에는 길 잃은 양 같았으나
지금은 너희 혼의 목자요 감독이신 분에게 돌아왔음이니라.
](벧전2:25).
[우리에게 있는 이 소망은 혼의 닻과 같아서 확실하고
굳건하여 휘장 안에 있는 곳으로 들어가나니
](히6:19).
이상은 모두 주님 자신에게만 목자(shepherd)란 말이 성립될 수
있는 예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주님의 어떠하심은 곧
우리의 어떠함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큰 목자이시면 우리 역시 목자가 되어야 하며,
주님이 왕 중의 왕이시면 우리 역시 왕이 되며, 주님이
대제사장이면 우리가 영적인 제사장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역 교회의 목사는 shepherd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5:4, [그리하면
목자장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가 사라지지 아니하는
영광의 왕관을 받으리라.
] 주님은 목자장입니다. 이는
우리가 목자란 전제하에서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목자였습니다(사63:11). 다윗
역시 목자였습니다(겔34:23, 37:24). 이들의 네발 달린 양떼를
친 목자의 경험과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고
인도한 목자였습니다. 이런 목자(shepherd)란 직분의 기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결코 교단이나 신학교나
자기 확신에서 오지 않습니다.


성경을 볼 때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영적인 것이 있으면 거기에
상응하는 눈에 보이는 실체가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몸된 교회가 있으면, 그 몸된 교회를
구현하는 지역 교회가 있습니다. 영적인 왕국이 있으면
물질적인 왕국이 있습니다. 영들의 아버지가 있으면 육신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빛 되신 주님이 있으면 보이는 빛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속한 것들, 하늘에 속한 것들은 이
땅에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그 밀접한
관련성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목자이신
주님과 목자로 세움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모세의 유언과 같은
간절한 기도는 자신과 같은 목자를 세워 주시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그들 앞에 나가고 들어오게
하시며 또 그들을 인도하여 내고 들어오게 하사 [주]의
회중으로 하여금 목자 없는 양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하니라
.](민27:17). 이 기도의 응답으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목자로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모세와 여호수아,
다윗과 같은 주님의 뜻대로 세움받은 목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백성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같이
지치고 널리 흩어졌다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지치고 널리 흩어졌음이라
](마9:36).
주님은 탄식만 하신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 곧 바로
자신을 대신해서 이스라엘 전역으로 제자들을 보내셔서
질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고, 왕국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마10:1-7). 목자장이신 주님은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목자들로 파송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예는
오병이어 사건 때 한 번 더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매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이곳은 외딴 곳이요,
이제 때가 지났사오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로 들어가 양식을
사게 하소서, 하거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들이
떠날 필요가 없나니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매
](마14:15~16).
주님은 제자들이 목자의 역할을 수행할 것을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목자의 정체성이란
주님으로부터 주님의 양을 먹이라는 명령을 들은 적이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shepherd, pastor의 용어에 신경을
예민하게 쓸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목자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주님으로부터 세 차례에 걸쳐(요21:15,16,17)에서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 [내 양들을 먹이라], [내 양들을
먹이라.]는 직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목자들의 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놓았고, 받을 상급에
대해서도 밝혀 놓았습니다.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기꺼운 마음으로 하며
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군림하지 말고 오직 양떼에게
본이 되라
.](벧전5:2~3). 이렇게 목자의 직분을 수행한다면
목자장이신 주님이 오실 때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상은 목자(shepherd)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이제 pastor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pastor란 단어는 신약 성경에 단 한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직분은 하나님이 지역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pastors)와 교사로
주셨으니
](엡4:11). 흠정역에서는 이 단어를 이곳에만
목사로 번역했고, 나머지는 모두 목양자라고 번역했습니다.
목양자(목사)란 성도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고 이 역시
주님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5, [내가 또
내 마음에 맞는 목양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明哲)로 너희를 먹이리라.
] 여기서 주님이 목양자를
주시는 것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양자 역시
목자와 마찬가지로 ‘양들을 먹이는 일’이 주 임무입니다.
예레미야는 제사장 집안의 자손으로 대언자로 부름받았지만
그의 직분은 목양자(목사) 였습니다. [나로 말하건대 나는
서둘러서 목양자 /직분을/ 그만두지 아니하고 주를
따랐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치 아니하였사오니 /이것은/
주께서 아시는 바니이다.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바로 주
앞에 있었나이다.
](렘17:16).


목양자(목사)가 이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때 엄한 경고와 심판을 주실 것임을 여러 번
밝히셨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망한 것도 이들이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한 구절을 더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내
백성을 먹이는 목양자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가 내 양떼를 흩으며 그들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으니, 보라, 내가 너희의 악한 행위에 대하여
너희를 징벌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렘23:2). 여기서
목양자의 임무가 다시 한번 나와 있습니다. 1. 백성들을
먹인다. 2. 백성들을 돌본다. 에베소서 4:11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pastors)와 교사로
주셨으니
] 목양자와 교사는 겸직입니다. “그분께서....주셨으니”란
말로 우리는 목사가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셔야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부름받은 목양자들은 양들을 부지런히 먹이고, 돌보아야만
합니다.


23-25절은 이제 예루살렘의
패망을 주의 인도하심과 회복을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23절은
예레미야의 신앙 고백입니다. [오 [주]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그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며 걷는 자의
걸음을 인도하는 것이 그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23).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기대하지 않는 일들, 계획하지
않는 일들이 늘 우리 앞에 놓이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가는 것은 [주]께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 길을
깨달을 수 있으리요?
](잠20:24),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주]시니라.
](잠16:9).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을지라도
오직 [주]의 뜻만이 서리라.
](잠19:1). 이런 점에서 패망을
미리 내다보는 예레미야의 기도는 전적으로 주님께
의탁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멸망을 앞둔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데 분노가 아닌 징계로 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백성들이 이 사건을 통해 배움을 얻기를 바란
것입니다(24). 25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쓰임받은 민족들 역시 심판해 주실 것을 간구한 것입니다.
이 기도대로 이스라엘을 침략했던 민족들은 예외없이
멸망당했습니다. 바빌론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시기 위해 악인들을
사용하시지만 악인들 역시 주님의 손에 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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