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예레미야 14:1-22
요절: 예레미야 14:11
예레미야 14-17장은
예레미야의 다섯 번째 설교입니다. 14,15장은 유다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가뭄으로 심판하신 것에 대해 예레미야가
중보 기도한 내용입니다. 흔히 한해(寒海)라 불리는 가뭄의
재앙은 어느 민족에게나 무서운 재앙입니다. 특히 중동
지역은 제때에 늦은 비와 이른 비가 오지 않으면 그 정도는
심합니다. 농경 사회에서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뭄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백성들을 심판하시고 징계하시는 수단이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주]의 말씀이라. /이르시되/,
유다가 애곡하고 그 성문들이 피곤해 하며 그들이 암담하게
되어 땅에 주저앉으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로
오르는도다.](1-2). 가뭄이 얼마나 심했던지 유다는
애곡하고, 암담하고 땅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이 위로 올라왔다는 것은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농경
신이었던 바알을 섬겼습니다. 바알이 비를 주는 줄로 알았고,
바알이 풍요로운 수확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제단도
쌓고, 제사도 지냈습니다. 그러나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 누구이며, 비를 내리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우상은 하늘과 땅을 만든 창조주가
아닙니다. 유다의 백성들은 가뭄이 단지 자연 현상이 아니라
불신과 불순종,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너희 권능의 교만을 꺾고 너희
하늘을 쇠 같게 하며 너희 땅을 놋 같게 하리니 너희가
헛되이 힘을 쓸 것이라. 이는 땅이 그 소출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가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할 것임이라](레26:19-20).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할 때 그들에게 주실 벌,
재앙에 대해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께서 폐병과
열병과 염증과 심한 화상과 칼과 마름병과 곰팡이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가서 너를 진멸하리라. 또한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쇠가 될
것이며 주께서 비 대신에 먼지와 티끌을 네 땅에 비처럼
내리시리니 하늘에서부터 그것이 네 위에 내려 마침내 너를
멸하리라.](신28:22-24). 그래서 백성들은 애곡하며,
암담하여 주저앉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울었습니다.
회개의 눈물이라기 보다는 죄와 고난에 대한
눈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눈물과 탄원이 하늘의
부르짖음이 되게 하신 것은 그들을 돌이키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 선인과 죄인의
구분없이 생존에 가장 필요한 것들을 값없는 은혜로,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유다가
애곡하고 그 성문들이 피곤해 하며 그들이 암담하게 되어
땅에 주저앉으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로 오르는도다.](2).
한해의 고통은 당해보지 않는 사람들은 짐작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해(旱害)는 인성을 마비시키는 재해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라면서 여름에 물이 없어서 땅이 거북
등처럼 갈라지고, 밭이 타 들어가고, 식물들이 죽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강과 호수의 물이 말라 바닥이 날 때
사람들은 미쳐갔습니다. 이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재앙이
아닙니다. 들의 초목들, 산의 짐승들 역시 고생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백성들이 성전에 모여 죄를 회개하는 통곡의
기도가 하늘 위로 올라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고통과 신음의 부르짖음만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여기서 잠깐 부르짖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은 의인의 부르짖음만 아니라
죄인들의 부르짖음도 들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감사와
찬양도 들으시지만 불평과 투정도 들으십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땅의 부르짖음이 하늘 위로 오른 예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아벨의 피였습니다. 그는 비록 죽었지만 오히려
말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동생의 핏소리가 땅에서 내게 부르짖느니라.](창4:10).
흔히 사람들은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전혀
성경적 진리가 아닙니다. 살인자 가인은 어떻게 아벨을
죽임으로써 입을 막았다고 생각했겠지만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동생의 핏소리가 땅에서 내게 부르짖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욱 뛰어난 희생물을 하나님께 드려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들에 대하여
증거하시느니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 지금도 말하고
있느니라.](히11:4)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때로 의로운
성도는 살았을 때보다 죽음으로써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늘로 향하는 땅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일으키고 맙니다. 창세기 18:20-21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들의 죄가 심히 중하므로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들이 행한
모든 것이 과연 내게 들린 그 부르짖음과 같은지
살펴보고 알려 하노라, 하시니라.](창18:20-21). 여기서 ‘소돔과
고모라의 부르짖음’이 아니고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란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죽은 사람들, 피해를 당한 사람들, 고통당한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의로운 혼들은
죄악의 사회에서 고통당했으며, 그들은 모두 죽고 의인 다섯
명도 남지 않는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직접 내려오셔서 그 부르짖음을
확인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이곳 미국의 LA,
샌프란시스코, 뉴욕, 파리, 런던, 도쿄, 서울과 같은
대도시들에서 벌어지는 각종 악행과 범죄로 인한 의로운
혼들의 고통 소리 역시 주님이 다 듣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로 고통을 당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으로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다 들으셨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이집트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노예 생활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노예 생활로 인하여 부르짖는
그들의 소리가 올라와 하나님께 이르니라.](출2:23). 이
시간도 삶의 고통으로 인해 울부짖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때로는 죄의 속박으로 인해 부르짖고,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현실로, 경제적 어려움으로 부르짖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다 하늘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특히 성도들이
당하는 고통과 고난은 주님이 다 보고 듣고 계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았고 또 그들이 자기들의 작업 감독들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들었나니 이는 내가 그들의 고통을 알기 때문이니라.](출3:7).
흔히 세상 사람들 가운데 역경을 이기고, 불굴의 도전
정신을 외치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인 감동적인 이야기들은 사실 자신의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음을 먼
훗날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뽐내고 자랑스러워 한 모든
것이 다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될 때 그들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모든 것이 주로부터 비롯되고, 주님으로
돌아간다는 이 진리는 우리가 단지 그릇이요, 도구일 뿐이란
점을 보여 주며, 겸손하게 합니다. 구약의 역사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이 죄의 결과로 인한 고통스런 부르짖음의
연속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부르짖을 때마다 사사(재판관)을
일으켜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삿3:9,15, 4:3, 6:6, 10:1,etc).
우리는 많은 위대한 부르짖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백성들을
향한 모세의 부르짖음은 그들을 죽음의 심판에서 건졌고,
죽음을 앞둔 회개한 영웅 삼손의 부르짖음은 원수들을
단번에 멸했고, 사울을 향한 사무엘의 부르짖음은 중보
기도의 전형을 보여 주었으며, 모르드개의 비통한
부르짖음은 민족을 구했습니다(에스더4:1). 다윗은 밤낮으로
부르짖었던 부르짖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시편은 온통
다윗의 부르짖음에 관한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부르짖음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다윗이 거기서 [주]께 제단을 쌓고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드려 [주]께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 헌물 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대상21:26).
솔로몬 역시 성전을 건축한 후에 주께 부르짖었습니다.
주님은 영광의 구름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엘리야의
부르짖음은 죽은 아이의 혼을 돌아오게 했고(왕상17:21),
아사의 부르짖음은 너무나 위대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기도의 본이 되고 있습니다(대하14:11). [아사가 [주] 자기
하나님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여, 많은 사람들로 돕든지
능력이 없는 자들로 돕든지 주께는 문제가 되지
아니하나이다. 오 [주]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이는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으로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음이니이다. 오 [주]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대하14:11).
이 전통은 히스기야 왕에게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까닭에 히스기야 왕이 아모스의 아들 대언자 이사야와 함께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니라.](대하32:20).
하나님은 이 땅에서 성도들의 부르짖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그분의 멸망 속에서 부르짖을지라도 그분께서 자신의 손을
내미사 무덤에 이르게 하지는 아니하시리라.](욥30:24).
그렇습니다. 욥이 말한대로 히스기야는 죽음을 앞두고 주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기도의
부르짖음이 아니더라도 주님은 들으십니다. 오늘 본문의
예루살렘 주민들은 가뭄의 고통으로 부르짖었습니다.
출애굽의 백성들은 광야에서 불신으로 절망해서
부르짖었습니다. [이에 온 회중이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울었더라.](민14:1).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에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내게
불평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내게 불평하는바 그 불평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께서 말씀하시되, 진실로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너희가 내 귀에 말한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7-28). 하나님은 부르짖음대로
응답하십니다.
성경에는 몇 가지 잘못된
부르짖음에 대해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이 못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들으시지만 그들이 부르짖는대로 응답해 주지 않는
경우인데, 회개하지 않는채 구원을 위해 하는 부르짖음,
말씀을 거부하면서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부르짖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거부하면서 부르짖는 기도는
주님이 듣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그들이 능히 피하지 못하리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리라.](렘11:11),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우상을 섬기면서 주님께 부르짖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더블 플레이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나도 격노로 /그들을/ 대우하리니 내 눈이 /그들을/ 아끼지
아니하며 내가 불쌍히 여기지도 아니하리라.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겔8:18).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때에 그들이
[주]께 부르짖을지라도 그분께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겠고 그들이 자기 행위로 악하게 행한 것같이
그때에 그분께서 자신의 얼굴을 돌려 그들에게 숨기시리라.](미3:4).
-[묵상과 경건-‘주님이 듣지 않으시는 기도’ 참조할 것].
3-6절은 가뭄의 재앙으로
인한 고통스런 현장, 비참한 상황을 마치 방송 리포터가
뉴스를 보도하듯이 현장감있게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귀족들이 자기의 작은 자들을 물로 보내었으나
그들이 구덩이에 갔어도 물을 찾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매 부끄럽고 당황하여 자기 머리를 가리는도다. 땅에
비가 없어 토지가 갈라지므로 쟁기질하는 자들이 부끄러워
자기 머리를 가리는도다. 참으로 암사슴이 들에서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그것을 내버리며 들나귀들은 높은
곳에 서서 용들같이 바람을 들이쉬나 거기에 풀이 없으므로
그것들의 눈에 힘이 없도다.](3-6). 구덩이에 물이 없어 빈
그릇으로 돌아오고, 땅에 비가 없어 토지가 갈라집니다.
짐승들의 처지 역시 불쌍하기 그지없습니다. 죄는 죄를 지은
당사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심지어 자연 환경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는 파급 효과가
큽니다. 아간의 죄는 온 민족을 위험에 빠뜨렸고 멸문지화를
당했습니다. 다윗의 죄 역시 온 민족을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그의 죄로 인해 사흘 동안 칠만 명이 죽었습니다(대상21:12-14).
7-9절은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입니다. 범죄한 백성들은 기도하지 않았지만 대언자인
예레미야는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오 [주]여, 우리의
불법들이 우리를 치려고 증거할지라도 오직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그 일을 행하소서. 이는 우리의 타락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오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고난의 때에 그를 구원하시는 이시여, 어찌하여
주께서 그 땅에서 나그네같이 계시며 하룻밤 묵으려고
돌이키는 여행자같이 계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놀란
사람같이 계시며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같이 계시나이까? 오
[주]여, 그러할지라도 주는 여전히 우리 한가운데 계시오며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사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7-9). 예레미야는 ‘우리의 불법’, ‘우리의
타락’,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어느 구약의 대언자들과 마찬가지로 결코 유대
민족 공동체에서 떨어진 자신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들의 이런 관점은 지금도 그대로 이어져 동족에서 따로
떨어진 나, 동족의 운명체와 분리된 개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동족의 운명이 곧 자신의 운명이었습니다. 그가
중보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런 민족 공동체에
대한 운명 공동체적 의식 때문입니다. 흔히 좋은 일, 이익을
나눌 일에는 ‘우리’가 되었다가, 피해가 되는 일에는 ‘너’라고
말하거나, 반대로 자신의 이익 앞에서는 ‘나’가 되고,
자신이 받을 피해 앞에서는 '우리'가 되는 부류와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성도들은 모두 예레미야와 같이 교회
공동체에서 벗어나거나, 떨어지거나,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신앙 공동체이며,
예수의 피로 맺은 혈연 공동체입니다. 형제가 아파하면 함께
아파하고, 형제가 슬퍼하면 함께 슬퍼하며, 형제가 기뻐하면
함께 기뻐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진정한 공동체라면 마음에서 저절로 생사고락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며 슬피 우는 자들과 함께 슬피 울라.](롬12:15).
사도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공동체 의식을 교회에 그대로
전해주었는데, 오히려 한층 더 강력한 내용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하느니라.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개별적으로 다 지체라.](고전12:26-27).
개인주의가 발달한 현 세대의 교회는 공동체 의식, 지체
의식이 너무나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공동체로서, 지체로서의 고유한 기능과 역할이 거의
사라지고, 공동의 관심과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 단체나 사교
클럽보다도 그 유대 관계가 약한 실정입니다. 이것은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본문을 보십시오.
예레미야의 기도는 우리가 배울 점이 많은 기도입니다. 그는
죄를 솔직히 인정하고 시인했습니다. 우리의 불법이 우리를
증거하며, 우리의 타락이 많고,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다고
잘못을 고백했습니다. 성도는 죄를 시인하는데 느려서는
안됩니다. 십자가의 길은 잘못을 비는 길입니다. 기독교란
회개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의 종교입니다. 자기 잘못을 빌
줄 모르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잘못을 빌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잘못을 시인할 때 용서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영적인 제사장으로서 내 개인의 잘못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의 잘못, 우리 사회의 죄악들, 우리 민족의
죄악들을 하나님 앞에 놓고 자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점점 타락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타락하는
목자들을 보면서 우리는 지체 의식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그 자체로써 하나님의 큰
사역이란 점을 기억하십시오. 기도만 하고 다른 일은 하나도
안 했다 할지라도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일하시기 때문에 땀흘려 수고한 어떤 일보다 더 큰
사역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북한에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가 많이 설 수 있도록 기도하여, 주님이 그대로
응답하시면 북한 주민들에게 쌀 백 가마니 보내는 것 보다
더 큰 일을 하는 것이며, 병원 지어주고, 학교 지어주는
것보다 훨씬 큰 사역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역자인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사역자입니다.
기도하는 일꾼이 참된 하나님의 일꾼인 것입니다. 어떤
할머니는 매주 토요일에 자기 교회 목사님이 주일에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그 설교자는 설교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어느 날 이 분이 집에 손님이 너무 많이
와서 목사님을 위해 기도를 못했는데, 그 다음날 목사님의
설교가 엉망이었습니다. 목사님도 설교가 끝난 후 ‘내가
이렇게 설교로 죽을 쑤다니!’ 하며 심한 자괴감에
빠졌습니다. 그 때 할머니가 찾아와서 ‘목사님 죄송합니다.
어제는 제가 목사님을 위해 기도를 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며 울더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말씀 사역, 설교 사역은
목사님이 열심히 한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설교를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할머니가 바로 설교
사역자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만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10-12절은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이때에 [주]께서 이
백성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그들이 이같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사랑하여 자기 발을 억제하지 아니하므로 [주]가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불법을 기억하며 그들의
죄들을 징벌하리라, 하시고](10).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심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죄를 짓는 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들이 이같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사랑하여 자기 발을 억제하지 아니하므로’란 말은 말씀을
들으러 회당이나, 성전으로 가는 대신 산이나 도시에 세워
놓은 각종 신당들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오늘날 말로 하면 교회 오는 대신 그 시간에 산이나 들로
놀러 가는 것이나 어디 놀만한 명소들을 찾아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주말만 되면 캘리포니아 전역을 누비다가 이제는
다른 주(state)로 여행을 갑니다. 육신의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서 음식점, 술집, 각종 오락 시설이 즐비한 곳들을
찾아다니는 것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을 받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불법을 기억하며, 죄들을 징벌하겠다고
선포하십니다.
주님은 더 이상
예레미야에게 복을 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11).
이미 앞에서 두 번이나 주님은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민족들을 위해서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 그들을 위해 복을 빌지
말라! 차라리 그들이 징벌을 받더라도 마음을 돌이키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회개하지 않는 민족을
돌이키는 방법은 징계의 채찍, 즉 심판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방탕한 형제나, 배우자나 자식을
용서해 주시도록 구할 수 있지만 그들을 매질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방탕한 아들을
위해 매일 새벽 기도를 드렸는데, 어느날 자신의 기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불러
앉혀두고,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께서 너를 지켜 보호해
주시도록 기도해 왔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그 손길을 거두어
주시기를 기도하겠다. 네가 죽든지 살든지, 다치든지,
병들든지 다 주님의 손에 맡기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식을 향한 육신적이고 이기적인 애정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자아에서 나온
맹목적이고 정욕적인 기도를 자주 올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아를 십자가로 처리한 순결한 기도를
올려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순결한 기도를
요구하십니다. 욥은 고백하기를, 자신의 고난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님을 당당히 주장하며, [...내 기도는 순결하니라.](욥16:17b)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진 양심, 십자가에
못박힌 육신, 말씀으로 단련된 기도가 아니라면 누가 순결한
기도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의
기도가 주 앞에 향을 올려 드림같이 되며 나의 손을
들어올림이 저녁 희생물을 /올려 드림/같이 되게 하소서.](시141:2).
그는 순결한 기도를 드리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한 구절 더 보십시오. [오 나의
능력이시요, 나의 구속자(救贖者)이신 [주]여,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想)이 주의 눈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때로 우리는 너무나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열정적인 기도로 인해 금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에 앞서 하나님
앞에 바른 마음, 바른 사람이 되게 해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그들이 번제 헌물과
봉헌물을 바칠지라도 내가 그것들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오히려 칼과 기근과 역병으로 그들을 진멸하리라, 하시니라.](12).
주님은 회개없는 종교 행위를 받지 않으십니다. 오늘날 금식
기도원이 그렇게 많고, 40일 금식 기도를 수행한 사람들이
넘치고 있지만 그들의 기도가 모두 응답받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가 끝난 후에 내려오다 죽은 사람도
수두룩합니다. 건강을 잃어 버린 예도 허다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회개없는 기도요, 순결하지 않는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13절은 다시 예레미야의
기도입니다. [이에 내가 이르되, 아 /슬프나이다/. {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대언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고 기근을 겪지 아니하리라. 내가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리라, 하나이다, 하였더니](13).
기도하지 말라, 반드시 심판을 집행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예레미야는 걱정이 태산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대언자들은 주님의 말씀과 정반대로 대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2절과 13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과 대언자들의 말은 너무나 다릅니다. 이들은 거짓
대언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대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대언자가 아니라 백성들이 원하는
바를 전해 주는 대언자들입니다. 그들은 주의 심판이 목전에
왔는데도, 평화를 외쳤습니다. 오늘날 이곳 교회는 거짓
대언자들이 넘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세상 지식이나 예화를 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 이야기를
주로 하고 간간히 성경 말씀을 끼워 넣는 그런 부류의
설교가 주류를 이룹니다. 흔히 성경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못 알아듣는다!, 실용적이고 피부에 와 닿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설교학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말씀은 간 데
없고 마치 신입 사원 연수장에 온 것처럼 성공적인 사회
생활을 위한 강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나마 좀 나은 곳은
성경인지 삼강 오륜과 같은 도덕경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설교를 합니다. 좀 더 나은 목사란 사람들은 세상 철학자나
유명 인사들의 어록을 읽어 주고, 시사 잡지나 책에서 읽은
내용을 읊어 댑니다. 신자와 불신자들이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설교를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마음, 열린 귀를
가진 자들에게는 어떤 성경 본문도 어렵지 않습니다.
14-16절은 주님이 그들의
정체를 정확히 밝혀 주셨습니다.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대언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대언하는도다.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말하지도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너희에게 거짓 환상과 점술과 허무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수를 대언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는데도 내 이름으로 대언하여 이르기를, 이
땅에 칼과 기근이 없으리라, 하는 그 대언자들에 대하여 [주]가
이같이 말하노니, 그 대언자들은 칼과 기근으로 진멸될
것이요, 그들의 대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인하여
예루살렘 거리들에 던져지고 그들을 묻을 자가 없으리니 곧
그들과 그들의 아내들과 그들의 아들들과 그들의 딸들이
그렇게 되리라. 이는 내가 그들의 사악함을 그들 위에 쏟아
부을 것임이니라.](14-16). 하나님은 그들이 거짓
대언자들이기 때문에 거짓 환상, 점술, 허무한 것, 자기
마음의 속임수를 대언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칼과
기근으로 진멸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사악함을 그들
위에 쏟아 부으시겠다고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17-18절은 심판의 말씀을
전하는 대언자 예레미야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내 백성의 처녀 딸이 큰 파멸과 심한
타격으로 찢어졌음이라. 내가 들에 나간즉, 보라, 칼에 죽은
자로다! 내가 도시에 들어간즉, 보라, 기근으로 병든 자로다!
참으로 대언자나 제사장이나 다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땅으로 다니는도다.](17). 이는 마치 대환란의 전조를 보는
듯합니다. 실제로 역사서로서의 예레미야는 예언서로의
기능을 합니다. 죄악으로 인한 심판은 그것을 미리 보는
대언자의 눈물을 흘리게 했는데, 이는 우리가 불신자들이
받을 지옥 형벌에 대해서 흘려야 할 지금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눈물이 없는 성도는 참된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성도거나 감정이 메마른
죽은 인간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들에는 칼에 죽은
자가 널려 있고, 도시에는 기근으로 병든 자로 덮여 있고,
대언자나 제사장은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땅에 다니고
있습니다. 얼마나 황망한 일입니까?
19-22절은 다시 예레미야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주께서 유다를 완전히 버리셨나이까?
주의 혼이 시온을 심히 싫어하셨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랐으나 좋은 것이 없고 치료하시는 때를 바랐으나 고난을
보나이다! 오 [주]여, 우리의 사악함과 우리 조상들의 불법을
우리가 인정하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몹시 싫어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왕좌를 욕되게 하지 마옵소서. 우리와 맺은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깨뜨리지 마옵소서.](19-21).
예레미야는 기도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기도했습니다. 동족은 결코 남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교회의 불행과
죄악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결코 동족의
어려움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죄를
인정하고, 시인하면서도 주님께 언약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주의 영광의
왕좌를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구할
수 없을 때, 주님을 위하여 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자신을 볼 때 용서해 줄만한 무엇이 없다고 판단하실지라도
주님께서 맺으신 새 언약(New Testament)을 보실 때 얼마든지
용서해 주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보실 때 심판해서
마땅하지만 주님이 흘린 십자가의 피를 보실 때 얼마든지
긍휼을 베푸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다시는 우리들의 죄악을 문제 삼지 않으시기로
하셨다는 영원히 바뀔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 언약의 증거요,
보증의 대속물입니다. 하나님이 문제 삼으시는 단 한 가지는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범한 죄악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무한 정의[infinite
Justice]를 외치시지만, 그 피를 믿은 성도들에게는 무한 자비[infinite
mercy]를 선포하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가뭄의 심판을
치료하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헛된 것 중에 능히 비를 내리게 할 것이 있나이까? 하늘들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오 [주] 우리 하나님이여,
그리하실 이는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런즉 우리가 주를
바라오리니 이는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하니라.](렘14:22). 이 세상의 어떤 신도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지 못합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인공비를 만들어서
내린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하라 사막이나
고비 사막에 비를 내리라고 해 보십시오.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그들은 구름이 있는 곳에서 약간 수작을 부릴
뿐입니다. 현재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지구의 사막화 현상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주님께서 비를 주시는 분이심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늦은 비가 내리는 때에 [주]께
비를 구하라. 그리하면 [주]께서 빛나는 구름들을 일으키사
사람들에게 소낙비를 주시고 또 모든 사람들에게 들의 풀을
주시리니](슥10:1).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