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예레미야 15:1-21
요절: 예레미야 15:16
예레미야 15장은
예레미야의 중보가 거절됨으로 슬픔에 잠긴 대언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 민족을
위해 복을 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렘14:11). 유다의
운명은 결정났습니다. 이제 무엇으로도 그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확고한 결심을 들어보십시오. [그때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서 있다 할지라도
내 생각은 이 백성을 향하여 기울 수 없나니 그들을 내
눈앞에서 쫓아내고 떠나게 할지어다.](1). 모세는 구약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모세의 기도를 통해 수없이 많은 위기를 넘겼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은 광야의 이스라엘이 처한 심판의 위기를
모세가 어떻게 이겨내었는지 보여 줍니다. [[주]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보라,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이제 나를 홀로 내버려 두라. 내가
그들에게 맹렬히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부터 큰
민족을 만들리라, 하시니 모세가 [주] 자신의 하나님께
간청하여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주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맹렬히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집트 사람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그가 재앙을 내리려고 그들을 인도하여 내어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였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진노에서 돌이키사 마음을 바꾸시고 주의
백성에게 이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들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
자신을 두고 그들에게 맹세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번성하게 하고 내가 말한바 이 모든
땅을 너희 씨에게 주어 그들로 하여금 영원토록 그것을
상속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이에 [주]께서 마음을
바꾸시고 자신의 백성에게 내리려 했던 그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출32:9~14). 하나님은 모세의 처절한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마음을 바꾸시고, 백성에게 내리려
했던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유다의
상황이 당시의 상황보다 더 사악하다는 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또 누구입니까? 그는 기도 하나로
이스라엘의 위기를 극복한 기도의 사람입니다. 백성들이
범죄했을지라도 사무엘의 기도를 통해 그들은 블레셋을
물리치고,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삼상7:12).
모세와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서 이 백성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한다고 해도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돌이켜 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은 성도들의 중보를 결코 외면하시지 않는
분이시지만 결코 주님의 뜻을 돌이킬 수 없는 한 가지
죄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심판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은 분명히 지옥이며, 이는 누구의
기도로도 변개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카톨릭이 주장하는 것처럼 마리아의 중보로도,
많은 성인들의 공덕으로도 그것은 결단코 불가능합니다.
죄인을 향한 사랑은 바로 복음 전파입니다. 회개하는
성도에게 주님은 저주를 거두십니다.
2절입니다. [만일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며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2). 백성들이 물어도
예레미야는 어떤 희망의 메시지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와 심판밖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래 일을 물어 본다면 ‘죽음, 칼, 기근,
포로’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죄에는 결코 소망이 없습니다.
죄는 깊은 절망과 슬픔, 아픔, 비참함을 가져다줍니다.
오늘날 종교 사기꾼들은 죄인들에게 결코 엄중한 주의
심판과 재앙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심판이 피해
가는 것은 아닙니다. 3절을 보십시오. [[주]가 말하노라.
내가 그들에게 네 가지를 정해 주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키고 멸하는 하늘의 날짐승과 땅의 짐승이라.](3).
주님이 네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은 철저한 심판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2절에서도 4가지를 언급하셨고, 3절에서도 4가지를
언급하셨는데 성경에서 4는 세상에 있는 전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죽이는 칼은 언제나 전쟁을 통한 심판을 말합니다.
찢는 개는 이방 민족들의 침략을 말합니다. 하늘의 날짐승은
주로 독수리나 까마귀를 말하는데 죽은 사체를 탐하는
동물들입니다.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체가 땅위에
가득하지만 그들을 묻어 줄 자들이 없기 때문에 독수리가
먹습니다. 소나 양과 같은 가축들은 대부분 죽거나 노획물로
잡혀 가 버리고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의 짐승이란 개,
이리, 표범과 같은 야생 짐승입니다. 먹을 것이 없었다가
죽은 사람으로 배를 채웁니다. [네 사체(死體)가 공중의
모든 날짐승과 땅의 짐승들의 먹을 것이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 줄 자가 없을 것이며](신28:26)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4가지를 정해 주셨고, 네 가지를
보내셨습니다. 에스겔 14:21에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내가 나의 네 가지 혹독한 심판 곧
칼과 기근과 해로운 짐승과 역병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사람과 짐승을 거기서 끊으리니 /그 고통이/ 얼마나 더
심하겠느냐?](겔14:21). 여기서 해로운 짐승이란 황충,
메두기떼와 같이 들의 수확물을 다 해치는 그런
짐승들입니다. 이들에게 내릴 심판은 결코 철회되지 않을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와 그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일로
인하여 내가 그들을 땅의 모든 왕국으로 옮겨다니게 하리라.](4).
역대 유다 왕들이 대부분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지만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정도가 심했습니다. 그는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사악한 왕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십이세에
왕위에 올라 무려 오십오 년 동안 통치하면서 나라를
말아먹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므낫세가 유다와 예루살렘 거주민들로 하여금
잘못하게 하고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이교도들보다 더 악하게 행하도록 하였더라. [주]께서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이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아니하니라.](대하33:9-10). 므낫세의 죄는
온 백성으로 죄를 짓게 하고, 가나안 정복 때 죄로 멸망당한
이교도들보다 더 악하게 행하게 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의인들을 많이 죽임으로써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므낫세가
[주]의 눈앞에서 악한 것을 행하여 유다로 하여금 범죄하게
한 그 죄 외에도 또 무죄한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왕하21:16). 그래서
그는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오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가 누구냐? 너를 위하여
탄식할 자가 누구냐? 돌이켜서 네가 어떻게 행하는지 물을
자가 누구냐?](5).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 울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탄식할 자도 없습니다. 오직 한 명 예레미야만
울었습니다. 세상 인심은 죄인을 향해 울지 않으며,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매를 든 아버지의 가슴은 매를
맞는 아들의 종아리보다 더 깊이 멍드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하시지만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탄식하십니다. 이사야 49:5, [여인이 어찌 자기의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겠느냐? 참으로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사49:15). 주님은 유다를 심판하시고, 먼
나라로 보내셨지만 그 땅에서 불쌍히 여김을 받게
하셨습니다. [또 그들로 하여금 그들을 포로로 끌어간
모든 자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시106:46).
그래서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난 후에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을 통해 주님이
죄인들을 향해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는 종을 향해서 불쌍히 여겨 탕감해 주셨고(마18:33),
소경을 향해 불쌍히 여기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시력을
받게 하셨고(마20:34), 나병 환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손을
내밀어 그 몸에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할지어다”(막1:41)하셨습니다.
무덤 사이에 거하는 마귀들린 청년을 고쳐 주시며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너를 위해 큰 일들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지들에게 고하라, 하시니](막5:19)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들으러 온 백성들을 보시고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으므로 불쌍히 여기사 많은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시더라.](막6:34)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설교가 끝나신 후에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막8:2)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 실려 나올 때 그것을 보신 주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께서 그 여인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7:13). 주님의 지상 생애
사역은 백성들, 죄인들, 병자들을 향한 깊은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는 연민으로 가득 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점점
몰인정, 무자비, 사랑이 식어지고 있습니다. 가족의
불행이라면 모를까 오랫동안 울지 않습니다. 그래서 쉽게
이혼하고, 자식의 양육권을 포기하고, 부모를 모시는 것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친구나 친지들의 웬만큼 불행한 소식도
내 가슴에 오래 남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가 범죄를 행한
범법자라고 한다면 오히려 욕을 하며,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오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가 누구냐?
너를 위하여 탄식할 자가 누구냐? 돌이켜서 네가 어떻게
행하는지 물을 자가 누구냐?](5). 이는 역설법으로 주님 한
분만이 너희들을 불쌍히 여기며, 탄식한다는 의미입니다.
나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 주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은
한 분 하나님 뿐이십니다.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된다해도 한 분 하나님은 나를 기억하십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형제들을
동정하고,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끝으로
너희는 다 한 마음이 되어 서로를 동정하며 형제로서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예의바르게 행하라.](벧전3:8).
6절을 보십시오. [[주]가
말하노라. 네가 나를 버리고 뒤로 물러갔으므로 내가 너를
치려고 내 손을 내밀어 너를 멸하리니 내가 돌이키는
일에도 지쳤느니라.](6). 하나님은 지금까지 수 백번은
넘게 뜻을 돌이켰습니다. 유다는 먹고 배부르자 주님을 차
버렸습니다. [그러나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기름지고 비대하고 기름으로 덮이매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소홀히 여겼도다.](신32:15).
그들은 다른 신들을 따라 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주께
반역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주님도 지쳤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주님은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지치시지 않는 분이라고 말씀하시지만 두
가지 일에는 지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속해서 범죄하고
반역하는 이스라엘을 돌이키는 일에 지치셨고, 이스라엘의
위선에 지치셨습니다. [내 혼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명절들을 미워하나니 그것들이 내게는 괴로움이니라.
그것들을 감당하기에 내가 지쳤느니라.](사1:14).
주님은 성도들에게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는 방법, 짜증나고 불쾌한 일이 수두룩한 이
시대에 상쾌함(refresh)을 덧입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 쉬는 것은 우리의 몸과 기분을
상쾌하게 하기 위해 만드신 주님의 배려입니다.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라.
그리하면 네 소와 나귀가 안식할 것이며 네 여종의 아들과
나그네가 원기를 회복하리라.](출23:12). 안식일은 우리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있을 영원한 표적이니 이는 [주]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하게
되었음이니라, 하라.](출31:17). 신약 성도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대신 주의 첫날을 정해 주님께 예배합니다.
이는 우리가 유대인이 아니며, 율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쉼의 원리는 같습니다. 좋은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합니다. 특히 영적인 음악, 찬양은
성도들의 마음을 새롭게 해 줍니다. 다윗은 하프로 악령들린
사울을 상쾌하게 해 주었습니다.(삼상16:23). 신실한 사자는
주인을 상쾌하게 합니다. [신실한 사자(使者)는 그를 보낸
자들에게 마치 추수 때에 내린 차가운 눈 같으니 이는 그가
자기 주인들의 혼을 시원하게 하기 때문이니라.](잠25:13).
저와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의 대사들입니다. 우리가
신실한 대사로서 임무를 수행할 때 주님의 마음은 상쾌함을
입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상쾌함을 얻는 길입니다.
[그분께서 이 백성에게 이르시되, 이것이 안식이니
너희가 피곤한 자로 하여금 이 안식으로 안식하게 하라.
이것이 상쾌함이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고자 하지
아니하므로](사28:12). 지치고 낙심될 때 주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큰 힘은 없습니다. 집회 시간에 놀러 가는 것은
몸의 피곤함을 풀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이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것은 몸의 피곤함을 이기는
영의 상쾌함을 줍니다.
회개하는 일은 마음에
상쾌함을 줍니다. [그런즉 너희는 회개하고 회심하라.
그리하면 새롭게 하는 때가 {주}의 눈앞으로부터 이를 때에
너희 죄들이 말소(抹消)될 것이요,](행3:19). 주님은
회개하는 심령에게 상쾌함을 주십니다. 죄를 안고 있는 것은
더운 여름 날에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무거운 짐입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내가 잠잠할 때에 하루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나이다. 이는 밤낮으로 주의 손이
나를 무겁게 누르므로 내 진액이 여름 가뭄에 마른 것같이
되었음이니이다. 셀라.](시32:3-4)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회개할 때 우리는 새롭게 됩니다.
성도들의 교제는 영을
시원하게 합니다. 악한 사귐은 선한 행실을 부패시키지만,
성도의 영적 교제는 우리에게 새 힘을 줍니다. 바울 사도는
서로간에 새 힘을 얻기를 구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새 힘을 얻게 하시기를 구하라.](롬15:32). 바울은
스데바나를 비롯한 몇몇 형제들로 인해 자신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이 시원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또 나와 너희의
영을 시원하게 하였음이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러한
사람들을 인정하라.](고전16:18). 우리는 서로 간에 영을
시원하게 하고, 새 힘을 얻게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형제는 만나기만 해도 마음이 기쁘고,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어떤 형제는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형제와 형제들은 서로 위로를 주고 받고,
기쁨을 주고 받음으로 영이 활력을 받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너희의 위로를 통하여 위로를 받았고 참으로 디도의
기쁨으로 인하여 우리가 넘치도록 더욱 기뻐하였으니 이는 그의
영이 너희 모두로 인하여 활력을 얻었음이라.](고후7:13).
바울도 자주 낙담하고 지쳤지만 그 때마다 형제들로 인해 새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상쾌하게, 형제들을
시원하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오네시보로는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자주 유쾌하게
했습니다.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기
원하노니 이는 그가 자주 나를 유쾌하게 하고 나의
쇠사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여](딤후1:16). 우리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형제들이 얼마나 다른 형제들에게 힘을
주었는지 잘 볼 수 있습니다. 빌레몬도 이 점에서는 조금도
뒤쳐지지 않았습니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인하여 상쾌하게 되었으므로 우리도 네 사랑 안에서 큰
기쁨과 안위를 얻었노라.](몬1:7), [참으로 형제여, 나로
하여금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주 안에서 상쾌하게 하라.](몬1:20).
우리는 아무도 주님께서
우리의 완악하고 회개하지 않는 마음, 불신과 불순종,
반역으로 인해 주님을 지치게 해서는 안됩니다.
7절입니다. [그들이 자기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한즉 내가 그들을 그 땅의 성문들에서
키로 까부르고 그들의 자녀들을 빼앗아 내 백성을 멸하리라.](7).
심판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돌이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범죄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멸망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범죄로
인함이라기 보다는 죄악에 대한 회개하지 않는 것
때문입니다. 주님이 ‘키를 까부르고’라고 말씀하셨는데,
키는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자란
분들은 어머니들이 키를 까부르는 모습을 자주 보셨을
것입니다. 키를 몇번 까부르면 키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인해
알곡과 쭉정이가 완벽히 구분됩니다. 이스라엘을 키에 담아
주님이 까부르시면 그들은 모두 날려가는 쭉정이처럼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3:12에서 침례인 요한은 주님이 키를
까부는 분이시는 심판주로 묘사합니다. [곧 손에 키를
들고 자신의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케 하사 자신의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되 껍데기는 꺼지지 아니하는 불로
태우시리라.](마3:12).
8-9절은 심판이 임한 땅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과부들이 내 앞에서 바다 모래보다
더 늘어났나니 내가 대낮에 노략하는 자를 그들에게로
데려다가 젊은이들의 어머니를 치게 하되 그로 하여금
갑자기 그 /도시/ 위에 임하게 하며 두려움이 도시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일곱을 낳은 여인이 쇠약하여 숨을 거두었으며
아직 낮이건만 그녀의 해가 떨어지므로 그녀가
부끄러워하고 당황하였도다. 또 그들의 남은 자는 내가
그들의 원수들 앞에서 칼에 넘겨주리라. [주]가 말하노라.](8-9).
남자들이 죽어 나가기 때문에 과부가 급격하게 늘어납니다.
산모들은 전쟁의 공포로 인해 순산하지 못하고 사산하거나
죽습니다.
10절입니다. [내
어머니여, 내게 화가 있나이다! 어머니께서 나를 낳되 온
땅을 대적하여 싸우는 자요 다투는 자로 낳았나이다. 내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 주지 아니하였고 사람들에게서
이자를 주고 빌리지도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다 나를
저주하나이다.](10). 예레미야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암울한 때에 태어나 가장
비극적인 일들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심판을 선포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11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의 남은 자들은 잘되리니 진실로 내가
/네/ 원수로 하여금 재앙의 때와 고통의 때에 너를 잘
대우하게 하리라.](11). 환란의 때에 하나님의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심판과 끊어짐 가운데도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모두 주님을
배척했을 때, 엘리야와 남은 자 7000명을 예로 들며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 이 시간에도 은혜의 택하심에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11:5)고 말했습니다. 11절은
역사적으로는 바빌론의 침공 때, 예언적으로는 대환란 때
남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본문의 정확한 의미는 원수들이
예레미야를 잘 대해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레미야는 느부갓네살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예레미야는
가장 많은 박해를 받은 대언자였지만 정작 원수들에게는
호의를 받았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이었습니다. [이때에 바빌론 왕 느부갓레살이
호위대장 느부사라단에게 예레미야에 대하여 명을 주며
이르되, 그를 데려다가 잘 보살피고 조금도 해하지 말며
그가 네게 말하는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였으므로](렘39:11-12).
이는 동족에게는 버림과 배척을 받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영접되는 주님의 모습을 예표합니다.
12-14절은 유다가 결코
바빌론의 침략을 막을 수 없으며, 모든 재물이 약탈된다는
것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이것은 잠시 후면 문자
그대로 성취됩니다. 14절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간다는
것입니다. [쇠가 북쪽의 쇠와 철을 부수겠느냐? 네 모든
죄로 인하여 내가 네 온 지경(地境) 내에 있는 네 재물과
보물을 값없이 노략물로 내어 주리라. 또 너로 하여금 네
원수들과 함께 네가 알지 못하는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이는 나의 분노의 불이 붙어 너희를 태울 것임이니라,
하셨느니라.](12-14). 그들은 낯선 땅, 알지 못하던 땅에서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15-18절은 예레미야의
기도입니다. 이는 민족을 향한 중보 기도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개인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오 [주]여, 주께서 아시오니 나를 기억하고
돌아보사 나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복수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시는 중에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주를 위하여 내가
책망 당하는 줄 아시옵소서.](15).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받는 심판이 자신 위에 임하지 않게 기도한 것입니다. 이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여러 차례 살해 위협에 놓이긴
했지만 그는 죽지 않았고, 바빌론으로 끌려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바빌론 왕에게 호의를 입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오 [주]
만군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말씀들을 발견하고 먹으매
주의 말씀이 내게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사오니
이는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기 때문이니이다.](16).
예레미야는 자신이 어떻게 주님을 섬기고 영적 생활을
영위했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신앙 고백입니다. 그는 주의
말씀들을 발견하고 먹었습니다. 주의 말씀은 생명의 빵이고,
물이며, 꿀이요, 우유요, 고기이며, 사과이기 때문입니다. 욥
역시 예레미야와 같이 [내가 그분의 입술의 명령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내게 필요한 음식보다 그분의 입의
말씀들을 더 귀히 여겼도다.](욥23:12)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이 육신의 음식을 필요로 하듯이, 우리의 속
사람은 영적인 음식인 말씀을 필요로 합니다. 에스겔 대언자
역시 주의 말씀을 먹었습니다. [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네가 발견한 것을 먹으라.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의 집에게 말하라, 하시기에](겔3:1).
사도 요한 역시 주의 말씀을 먹었습니다. [내가 그
천사에게 나아가 이르되, 그 작은 책을 내게 주소서, 한즉
그가 내게 이르되, 이것을 가져다가 먹으라. 이것이 네
배는 쓰게 할 것이나 네 입에서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계10:9).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먹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속 사람은 매일 그것을 먹음으로 영적
건강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님이 맨 먼저 가르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주리게 하시고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성도들은 육신의 빵을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고, 그것을 위해 울부짖습니다. 주님은
돌을 빵으로 만들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많이
만드신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은 사람이 사는 것은 주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말미암는 다는 점입니다. 이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레미야는 말씀을
먹었는데,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다윗의 고백과 일치합니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영원한
유산으로 삼았사오니 그 까닭은 그것들이 내 마음의
기쁨이기 때문이니이다.](시119:111). 다윗은 말씀이 마음의
기쁨이었고, 말씀을 드는 기쁨이 넘쳤습니다. [많은
노략물을 얻은 사람같이 나는 주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나이다.](시119:162). 말씀을 통해 기쁨을 얻어 본
사람은 결코 소설, 잡지, 주간지, 신문, T.V, 영화, 인터넷,
오락, 잡담 등에서 기쁨을 얻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한 분은
‘시’(詩)를 매우 좋아해서 서점에 가면 시집(詩集)을 자주
샀습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시(詩)를 읽는 것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특히 한시(漢詩), 고시조(古時調) 등은
많이도 외우셨습니다. 시(詩)에 맛을 들인 후에는 다른
것들에 관심이 뚝 끊어졌습니다. 반대로 영화에 맛을 들인
사람은 주중에 몇 번씩 영화관에 가거나 비디오 테잎을 빌려
보는데 젊은 나이에 문자 그대로 10,000편의 영화를 본 친구도
있습니다. 저는 성도들이 이와같이 성경에 맛을 들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경의 맛을 들인 사람은 언제나 성경을
끼고, 그것을 봅니다. 어디 가더라도 성경을 먼저 챙기고,
시간이 나면 성경을 먼저 펼칩니다. 아직 이 맛을 깊이 보지
못한 분들은 주님께 이 맛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17절입니다. [내가
조롱하는 자들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그것을/
기뻐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으로 인하여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격노로 나를 채우셨음이니이다.](17).
죄인들이 세상의 주류가 되고, 불경건한 세상에서 의인들이
연합을 거부하고, 비동조, 비일치, 비타협의 노선을 걷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다윗 역시 그렇게 살았습니다. 시편 1편은
자신이 어떻게 3비(非) 원칙-비동조, 비일치, 비타협-에
입각해서 살았으며, 복된 사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시편입니다. [내가 허망한 사람들과 함께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시치미 떼는 자들과 함께 다니지도
아니하리이다.](시26:4). 성도는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린
삶이 아니라 나그네요, 순례자로서, 외국인으로서
살아갑니다. 외롭게 사는 것은 당연합니다. [내가 자지도
아니하니 지붕 위의 외로운 한 마리 참새 같으니이다.](시102:7).
교회라는 하나님의 집이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도저히
살아나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예레미야는 ‘주의 손으로
인하여 홀로 앉았사오니’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과 1:1의
단독자 신앙을 가지고 살았음을 말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나의 고통이 영원토록 계속되며 나의 상처가 고칠 수 없게
되어 고침 받기를 거부하나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전적으로 거짓말쟁이와 마르는 물같이 되고자 하시나이까?](18).
예레미야는 아직 자신이 위험 가운데서 완전히 안전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상황은 점점 어려워만
갔기 때문이며, 살해 위협은 커져만 갔기 때문입니다. 11절에서
주님은 지키신다는 약속을 주셨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믿음과 환경이 따로 놀 때
마음이 평안하다가도 초조해지고,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고
불평합니다.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돌아갈 때 주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예레미야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 순간 믿음을 잃어버린 듯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19-21절은 불신의 물음에
대한 주님의 응답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만일 네가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인도하리니
네가 내 앞에 서리라. 만일 네가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하여 내면 너는 내 입같이 되리라. 그들은 네게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 돌아가지 말지니라. 내가
너로 하여금 이 백성에게 대하여 견고한 놋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싸울지라도 너를 이기지 못하리라. 이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하고 너를 건질 것임이라.
[주]가 말하노라. 또 내가 너를 사악한 자의 손에서 구원하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속(救贖)하리라.](19~21). 주님은
예레미야의 불신을 일거에 해소해 주시는 확실한 약속의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이 백성 가운데 아무도 예레미야를
해칠 수 없도록 견고한 놋성벽이 되게 하시며, 이기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함께 하시며,
구원하고 건지시며, 사악한 자와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속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신실한
하나님이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응답입니까? 하나님은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떠나지
않으십니다. 모든 성도들이 인생의 항해에서 풍파를 만나고,
물이 넘치고, 죽게된 것 같을 때 주님이 함께 하시며,
구원하고, 건지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약속의 말씀이 있다고 해서 바람과 파도가 없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바람과 파도 속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다급하게 주님을 흔들어
깨웠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마8:26)고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환란과 핍박이
있습니다. 동시에 그 가운데 우리를 붙드시고, 지탱하시고,
힘주시는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