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예레미야 16:1-21
요절: 예레미야 16:21
예레미야 16장은 결혼과
장례, 잔치의 예를 통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한
심판의 성취를 보여 줍니다. 1-4절은 결혼을 하지 말 것, 5-9절은
장례와 잔치를 치를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예이고, 10-13절은
유다의 변명과 배교에 대한 심판을, 14-21절은 심판 후에
회복될 주님의 복된 약속에 대한 말씀입니다.
1-3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이곳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아들딸들도 두지 말지니 이는 이곳에서 태어난
아들딸들과 이 땅에서 그들을 해산한 어머니들과 그들을
낳은 아버지들에 대하여 [주]가 이같이 말하기 때문이라.](1-3).
하나님은 대언자 예레미야에게 그의 나라, 민족이 곧 멸망할
것처럼 행동하도록 했습니다. 가족 중에 누가 큰 병을
앓거나 사고로 죽음을 당하거나 슬픔을 당해도 결혼을
연기하거나 아예하지 못하는 것처럼 민족의 멸망과 심판을
앞둔 대언자가 결혼을 해서 아들, 딸을 두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이며, 아들 딸은
태의 열매이며, 주님의 복입니다. 그러나 대재앙을 앞둔
상태에서 결혼은 더 큰 슬픔을 당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결혼은 모든 것 가운데 존귀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히13:4).
그러나 대환란을 앞둔 상태에 있거나, 대환란 중에는 혼인과
출산이 더 무거운 짐이 됩니다. [이는,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그때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수태하지 못하는 자와
해산하지 못한 태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할
것임이라.](눅23:29). 주님은 대환란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 날들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마24:19)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나 호세아는 결혼을
해서 그들의 아이 이름을 가지고 말씀하셨지만 예레미야는
아예 결혼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임박한 재앙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말로써만 아니라
자신들의 삶의 방식, 생활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재앙을 선포하는 예레미야가
집을 짓고, 결혼을 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면 그가
전하는 급박한 재앙에 대해서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삶이 정결해야 하고, 마치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살지 않을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말씀과 다가올 심판에 대한 메시지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4절입니다. [곧 그들이
쓰라린 죽음을 당하리니 그들을 위해 슬퍼하는 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라. 그들은 묻히지도 못하고 지면에서 배설물같이
되며 칼과 기근에 진멸되고 그들의 사체(死體)는 하늘의
날짐승과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되리라.](4). 이제 얼마 후에
예루살렘은 황폐화됩니다. 사람들은 쓰라린 죽음을 당하며,
아무도 그들을 위해 슬퍼하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모두 다
같이 당하는 슬픔이며, 살아 남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먼 곳으로 포로로 사로잡혀 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레미야는 결혼하지 않고, 죽은 자를 애도하지 않고,
쾌락을 삼가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남에게 전해 주고, 확신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서 자신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 보여 주어야 합니다. 본문의 4절 말씀은
예레미야가 거의 수십번 전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죽는다.
그들의 시체는 묻히지 못한다. 배설물같이 된다. 칼과
기근에 진멸되고, 사체는 날짐승과 땅의 짐승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7:33,8:2,14:2, 15:2). 이 말은 앞으로도 반복적으로
전할 말씀이며, 설교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당대의
유대인들이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저주와 악담을 퍼붓는 광신자로 매도했듯이
오늘날 지옥에 대한 설교와 전도자들은 모두 그런 취급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결코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집니다. 지옥에 간 사람들 중에 지옥이 존재한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예레미야와 같이 이 세상을 향해 전할 동일한 말씀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지옥과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성경은
지옥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는 곳(마8:12), 울부지는 곳(마13:42),
이를 가는 곳(마13:50), 어둠(마25:30), 불꽃(눅16:24), 타오르는
불(사33:14), 고통의 장소(눅16:23)입니다. 지옥의 불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은 왜 이런 곳에 오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그 기회를 스스로 무시하고 배척했는가?에 대한 후회일
것입니다. 지옥은 불타는 용광로입니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위로해 주지 않으며,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자주 반복적으로 지옥에 대해서 설교하셨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저 하늘에 대한 말씀보다 최소한 3배 이상 지옥에
대해서 더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결코 가서는
안될 곳이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곡하는 집에 들어가지 말라. 가서
그들을 위하여 슬퍼하지도 말며 탄식하지도 말지니 이는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 곧 인자(仁慈)와 긍휼을
제거하였음이라. [주]가 말하노라.](5). 여기서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인간적으로도 차마 못할 짓을 시키는 듯이
보입니다. ‘애곡하는 집에 들어가지 말라’ 이 말씀은
예의를 중시하는 동양 문화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잔치 집에는 못 가더라도 상가 집에는 가야 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예레미야는 가서 그들을 위해 슬퍼하거나
탄식하지도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레미야의 이런 무례한 행동, 무례한 언사는 모두 철저히
계산되고, 목적된 언행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만 주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가르쳐 주신 것은 이런 행동을 통해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전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예레미야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께서 평강, 곧
인자(仁慈)와 긍휼을 제거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의 무례해
보이는 행동과 말은 도리어 복이 될 것입니다.
에스겔 역시 예레미야와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보라, 내가 한 번
쳐서 네 눈이 바라는 것을 네게서 빼앗으리니 너는
애곡하거나 울지 말고 눈물도 흘리지 말며 울부짖는 것을
자제하고 그 죽은 자를 위하여 애곡하지도 말며 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네 발에 신을 신으며 네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들의 빵을 먹지 말라, 하시매](겔24:16-17). [그런즉
너희는 내가 행한 것같이 행하여 너희 입술을 가리지도 말고
사람들의 빵도 먹지 말며 너희 수건을 머리 위에 두르고
너희 신을 발에 신고 애곡하지도 말며 울지도 말며 오직
너희 불법들로 인하여 쇠약해지며 서로 바라보고 애곡하라](겔24:22-23).
구약의 대언자들은 자신들의 말뿐만 아니라 독특한 삶의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표적과 웃음과 놀람거리가 되곤
하였는데 이유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런 행동과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이 세상 사람들과는
완전히 달라야 하며, 우리의 말과 행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결혼할 때는 믿지
않는 조건 좋은 사람보다 오직 믿는다는 이유하나로 신자를
택할 때 주위의 불신자들은 놀라고,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성도가 장례를 치를 때 곡을 하는대신 기쁨으로 치를 때
믿지 않는 자들은 크게 당황합니다. 성도가 환란 가운데서
기뻐하고, 슬픔을 당하나 낙심하지 않고, 소망을 인하여
모든 오래 참음으로 인내할 때 불신자들은 참으로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성도들이 삶을 통해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6-7절입니다. [큰 자나
작은 자나 다 이 땅에서 죽으리니 그들이 묻히지 못할
것이며 그들을 위해 슬퍼하는 자도 없고 그들을 위해 자기
몸을 베거나 자기 몸을 미는 자도 없으리라. 또 그 죽은
자들로 말미암아 애곡하는 자들을 위해 자기 몸을 찢어
그들을 위로하는 자도 없으며 그들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위해 위로의 잔을 주어 그들에게 마시게 할 자도 없으리라.](6-7).
이는 심판의 비참함을 드러내는 말씀인 동시에 유다의 죄를
폭로하는 말씀입니다. 땅에서 죽는 것과 묻히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 자기 몸을 베거나
자기 몸을 미는 자가 없으리라”는 말씀은 이들의 죄악이
그들의 일상 생활이요, 문화요, 관습으로 굳어진 것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모세를 통해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 살을 베지 말며 너희 몸에 아무 표도 새기지 말라. 나는
주니라.](레19:28)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위 이교도의 풍속대로 사람이 죽으면 가까운
친족들이나 죽은 자와 친밀했던 사람들이 자해(自害)를
했습니다. 신명기 14:1에,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자녀이니 죽은 자들을 위하여 너희 몸을 베지 말며 네 눈
사이에 털을 밀지 말라.](신14:1)고 엄히 명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의 명령은 온데간데 없고, 이교도의 풍속대로
장사를 지냈습니다. 결혼과 장례식을 보면 그 나라의 문화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결혼식과 장례식은 한 시대의
문화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전통 혼례라는 것이
사라진 것은 서양 문화가 들어오고, 그것이 주류를 차지한
후였습니다. 장례 문화는 더 변하지 않습니다. 서양 문화가
주류를 이루어도 몇백년간 내려온 방식을 고수합니다.
그런데 유다의 장례 문화가 변했습니다. 이는 단숨에 일어난
상황이 아니라 수백년에 걸쳐 이교도의 문화가 유다의 주류
문화가 되었음을 입증해 주는 예입니다.
8-9절입니다. [너는 또한
잔칫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앉아서 먹거나 마시지 말라.
이는 만군의 [주]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기를,
보라, 내가 네 시대에 네 눈이 보는 데서 환희의 소리와
기쁨의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를 이곳에서
그치게 하리라, 하기 때문이니라.](8-9). 이번에는 잔치
집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잔칫집에 들어가서
어울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지금 상황이 잔치를 벌릴
때가 아니라 오히려 금식을 선포해야 할 때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들이 누리는 환희의 소리와 기쁨의
소리를 그치게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심판의 말씀을 아무리
증거해도 돌아서지 않습니다. 노아의 날들에 주님은
에녹에서부터 노아의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말씀을 전했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들 외에는 모두 멸망했습니다. “롯의 날들”에는
어떠했습니까? [마찬가지로 롯의 날들에 이루어진 것과도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건축하되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바로 그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내려 그들을 다 멸하였느니라.](눅17:28-29). 그들은
멸망당하는 그날까지 먹고 마시고 즐겼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잔치집에 가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그들의
재앙이 임박했음을 경고해 주신 것입니다.
10절은 예레미야의 이런
말과 행동으로 인해 백성들이 그에게 질문하는 내용입니다.
[네가 이 백성에게 이 모든 말을 알려 줄 때에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주]께서 우리를 치시려고 이 모든 큰
재앙을 선포하셨느냐? 우리의 불법이 무엇이냐? 우리가 [주]
우리 하나님께 범한 우리의 죄가 무엇이냐? 하거든](10).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받을 벌에 대해서는 억울하게 생각합니다. 감옥에 가면
죄인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죄인은 없고 억울한
사람, 누명쓴 사람만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지옥에 가도
죄인들이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지옥에 있는 죄인들은 죄를
회개하는 대신 이를 갈며 울부짖기만 할 뿐입니다. 왜 이를
갑니까? 억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자신의 죄를 알고, 인정하고, 자백하고,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알지 못하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죄인들의 마음 상태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 가운데 하나는 “어찌하여”란
말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어찌하여’를
연발합니다. '어찌하여'란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평하는
자들의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를 회개하는
대신 하나님이 부당히 대우했다며 자신들을 정당화합니다.
10절을 읽어보면 유다는
자신의 죄를 전혀 알지 못하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는
너무 오랫동안 죄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죄가 관습이 되고,
문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상 숭배는 더 이상 그들의
양심을 찌르는 죄가 아니라 그들의 생활이었습니다. (ex:
제사, 사주 보는 것 따위).
11-12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이들의 항변에 간단하고 명료하게 답변하셨습니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주]께서 이르시되, 그 까닭은 너희
조상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걸으며 그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경배하며 나를 버리고 내 법을 지키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너희가 너희 조상들보다 더 악하게
행하였으니 이는, 보라, 너희 각 사람이 자기의 악한
마음이 상상하는 대로 걸으며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기 때문이라.](11-12). 주님은 심판을 집행하시기
전에 명백하고 충분한 응답을 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욕망을 추구함에 조상들보다 더 고집스럽게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주의 법을 버리고 우상을
따라갔으면, 그것을 파괴하고 다시 주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우상 숭배를 점점 발전시켰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덩그러니 솔로몬의 성전만 있을 뿐 주님을
섬기는 예배와 믿음은 없었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현재 유다
백성들의 죄로 지목하는 더 악한 행위는 ‘각 사람이 자기의
악한 마음이 상상하는 대로 걸으며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상상’에 대해서 늘
엄중한 경고를 주셨습니다. 처음 심판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상상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사악함이 땅에서 커지고 또 그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5).
주님은 사람의 마음에서 상상하는 것이 선한 것이 없고,
선과 악을 배우기 전부터 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마음에서 상상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이라... ](창8:21). 이는 교육학자들이나
환경결정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은 백지 상태도
아니며, 환경에 따라 품성이 결정나는 것이 아님을 입증해
줍니다. 예레미야는 유난히 마음의 상상에 대해서 많이
증거합니다. 이는 이것이 그들이 심판받는 결정적인
이유였기 때문입니다(렘7:24, 11:8, 13:10, 16:12, 18:12, 23:17).
마음의 상상력을 제어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내
마음 속에 말씀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상상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거슬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고후10:5)라고 말했습니다.
악한 현 세대를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오직 한 가지는
기록된 주의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의 상상하는 것, 아는 것,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에 무엇을 주셨습니까?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느니라.](고후1:22). 그래서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고, 성령으로 악한 생각들, 상상들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 속에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셨느니라.](갈4:6). 이는 기도로써
악한 생각과 상상을 능히 사로잡을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여러분의 기도 생활은 여러분의 마음 속에 내면 생활을
통제합니다. 주님의 화평이 우리 마음 속에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화평을 남겨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화평이 너희 마음 속에서 /너희를/ 다스리게 하라. 너희도
이 화평에 이르도록 한 몸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니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주님이 주신 평안이 있다면
여러분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평강이 곧 힘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너희 마음
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골3:16). 말씀이 마음 속에
풍성히 거하면 여러분은 악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스인들이 현 세대를 거슬러 사는
방법입니다. 신문, T.V, 뉴스, 영화, 잡지, 각종 전단지들,
책들은 온갖 악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현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우리가 마음의 상상을 사로잡는
방법은 하나님이 주신 성령, 기도, 화평, 그리스도의 말씀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오시고, 천년
왕국이 시작되면 다시는 자기들의 악한 마음의 상상대로
걷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주]의
왕좌라 부를 것이요, 모든 민족들이 거기로 모이되 [주]의
이름을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모이며 다시는 자기들의 악한
마음에서 상상하는 대로 걷지 아니할 것이며](렘3:17). 그
때에는 주님이 마음 속에 주의 법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8:10, 10:16을 보십시오. [그 날들 이후에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내가 내 법들을
그들의 생각 속에 두고 그들의 마음 속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한 백성이 될 것이라. {주}가
말하노라.](히8:10), [그 날들 이후에 내가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내 법들을 그들의
마음 속에 두고 그들의 생각 속에 그것들을 기록하리라,
하신 뒤에](히10:16). 아직 이 말씀은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13절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죄악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 심판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어 너희가 알지 못하는 땅 곧 너희와 너희 조상들이
알지 못하는 땅에 이르게 하리라. 너희가 거기서 밤낮으로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요, 내가 거기서 너희에게 은총을
베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13). 그토록 열심히
우상을 숭배했던 결과 주님은 그들에게 우상의 본 고장인
바벨론으로 인도하사 지치도록 우상을 섬길 수 있는 특권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
생각하는대로 인도하십니다(렘6:19).
14-15절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그런즉,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다시는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께서
살아 계신다,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을 북쪽 땅과 그 쫓겨난 모든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께서
살아 계신다, 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바
그들의 땅으로 다시 인도하여 들이리라.](14-15). 이제
출애굽의 하나님은 잊혀지고, 바빌론 귀환의 하나님이
기억날 것입니다.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한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는 결국 이들의 배교로 다시 세상의 모형인
바빌론으로 끌려감으로써 끝장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주님은 이들을 다시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바빌론
귀환을 주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쫓아낸 땅으로 다시 인도하여 들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심판을 받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란 사실을 아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의 소망이 없는 것이 가장 비참한
일입니다. 지옥의 가장 큰 고통은 불타는 고통보다 소망이
없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소망을 남겨
두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한 절망적인 병자가 나옵니다.
장장 38년이란 긴 세월을 누워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 있었는데, 베데스다란 연못에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휘저으면 거기에 먼저 들어가서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 말이
사실일 것이라고 믿고 거기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소망을 가지고 누워 있었지만 그
소망이 실현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절망 상태에 있었습니다.
주님이 찾아오셔서 ‘네가 온전하게 되고자 하느냐?’(요5:6)고
물으시자, [그 허약한 사람이 그분께 대답하되,
선생님이여, 물을 휘저을 때에 나를 연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5:7). 거기에는 수많은 병자가 있고, 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서 천하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그 병자에게는 빛좋은
개살구였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생각을 하면 소망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아무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 군중 속의
고독을 씹는 병자를 찾아 가셨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벌주시지만 결코 소망을 빼앗아 가지 않으십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많은 어부를 데려다가
그들을 낚게 할 것이요, 그 뒤에 /사람을/ 보내어 많은
사냥꾼을 데려다가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바위틈에서
그들을 사냥하게 하리니](16). 유다는 그물에 걸린
고기이며, 사냥꾼의 사냥감처럼 되었습니다. 죄와 불법은
아무리 강한 것도 약하게 만들며, 튼튼한 것도 썩어지게
만듭니다. 이웃 부족들에게 조공을 받던 좋은 시절은
지나가고 이제 그물에 걸린 고기요, 바위틈의 토끼마냥 잡힌
그런 신세가 된 것은 죄의 결과였습니다.
죄는 그 용맹하고 강하던
삼손을 풀뜯는 소처럼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죄는 담대하여
두려움을 모르던 사울에게 큰 수치와 모욕을 주었고, 약하고
약한 사람으로 변모시켰습니다. 죄는 목숨을 버리겠다던
베드로를 여종이 두려워 거짓말과 배신의 멍에를 쓰게
만들었습니다. 죄는 로마 제국을 가루처럼 붕괴시켰습니다.
죄는 한 개인, 가정, 국가를 허약하게 합니다. 녹이 쇠를
갉아먹듯이 죄는 모든 것을 갉아먹습니다. 죄는 예외를 두지
않는 탐정입니다. [만일 너희가 그와 같이 하지 아니하면,
보라, 너희가 [주]께 범죄하였으니 너희 죄가 너희를
찾아낼 줄을 분명히 알지니라.](민32:23). 죄는 자신이
일한 대가를 받아내고야 맙니다.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17절입니다. [이는 내
눈이 그들의 모든 길 위에 있으므로 그들이 내 얼굴로부터
숨지 못하며 그들의 불법이 내 눈에서 숨겨지지 못하기
때문이라.](17). 주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도 주님의 눈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무소부재하시며, 전지전능하십니다. 시편139:1-16절은 주님의
무소부재, 전지전능하심을 가장 잘 표현한 시편입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리이까? 내가 주의 눈앞을 떠나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오며 지옥에 내 침상을 펼지라도, 보소서, 주께서 거기
계시나이다.](시139:7-8). 저는 모든 성도들이 주의 눈을
의식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in the sight of God"란
의식만 있어도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것이며, 죄를
두려워하고 피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보시는
분이란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는 그분께서 자신의
눈을 사람의 길들 위에 두시고 사람이 가는 것을 다 보시기
때문이니](욥34:21), [이는 사람의 길들이 [주]의
눈앞에 있기 때문이니 그분께서 그의 모든 걸음을 곰곰이
살피시느니라.](잠5:21). 저의 지나 온 일생을 다 살피신
하나님 앞에 무엇을 숨기고, 감추겠습니까? 모든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내려 놓으십시오. 그 때 주님은 우리의
회개를 기쁘게 받으시며 죄사함의 기쁨,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무엇 때문에 사람의 길들을
살피십니까? 그것은 심판자로서 판결하기 위해서, 그대로
보응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경기장에서 심판이 얼마나
부지런히 선수들을 쫓아다니며 부지런히 그들의 동작을
살피는지 보십시오. 반칙을 할 때 휘슬이 울리고, 벌칙이
주어지듯이 주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십니다. [/주는/
계략이 크시며 일에 능하시니 이는 각 사람에게 그의 길들과
그의 행위들의 열매에 따라 보답해 주시기 위하여 주의 눈이
사람들의 아들들의 모든 길 위에 열려 있기 때문이니이다.](렘32:19).
18절입니다. [내가
우선 그들의 불법과 그들의 죄를 두 배로 갚으리니 이는
그들이 내 땅을 더럽히며 자기들의 역겹고 가증한 것들의
사체(死體)들로 내 상속을 가득 채웠음이라.](18). 이는
주님이 매우 많은 양의 형벌을 감해 주신 것입니다. 엄격한
판결대로라면 레위기 26:18,21,28에 있는대로 일곱 배의 벌,
일곱 배의 재앙, 일곱 배의 징계가 임해야합니다. 주를
모욕했을 때도 주님을 일곱 배로 갚으시고(시79:12),
도둑질하다 들키면 일곱 배를 갚아야 합니다(잠6:31). 일곱은
완전수로써 완전하게, 완벽하게 처리한다는 뜻입니다.
두배의 배상이나 형벌은
정상 참작이 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현장범은
일곱 배입니다. 그러나 훔친 물건이 처분되지 않고 그대로
있어서 주인이 그 물건을 찾을 수 있으면 두 배로 갚습니다(출22:4).
하나님은 욥의 시련이 끝났을 때 이전보다 두 배로
주셨습니다(욥42:10). 하나님은 일단 그들을 두배로 벌을
주심으로써 그들의 반응을 살피시고자 하십니다. 이는 형벌
자체에 목적이 아니라 형벌을 통해 그들을 돌이키는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통해
주님께서 가볍게 몇 차례 경고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약간의 손해와 손실, 질병, 사고 등으로 인해 정신이 들게
하십니다. 이 때 돌이키면 우리는 화를 면하고, 주님과 깊은
관계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불평과 반역으로
나갈 때 두 배가 아니라 일곱 배의 완벽한 징계를 받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이들에게 벌을 주시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런즉,
보라, 내가 이번에 그들에게 알게 하리니 곧 내가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게 하리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 이름은 [주]인 줄 알리라.](21). 선포대는 말씀을 통해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아는 것은 가장 큰 복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말씀에 귀기울기를 거절함으로써 재앙과 심판을 통해
주님을 알게 됩니다.
19-20절은 예레미야의
기도요, 신앙 고백입니다. [오 [주]여, 나의 힘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고통의 날에 나의 피난처시여, 이방인들이 땅
끝에서부터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분명히 우리 조상들이
상속받은 것은 거짓된 것과 헛된 것과 유익이 없는
것뿐이니이다. 사람이 어찌 신이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하리이다.](19-20). 20절은 장차 먼 장래에 있을
이방인들의 고백입니다.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심판은 이스라엘에게는 우상 숭배로부터 돌이키는 회심의
역사를,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대환란 역시 동일한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완벽합니다. 신명기 32:4, [그분은
반석이시요 그분의 일은 완전하니 이는 그분의 길이 다
공의롭기 때문이라. 그분은 진실하고 불법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의로우시고 진실하시도다.](신32:4). 때로
하나님의 심판이 부당해 보이고, 불공평해 보여도 주님은 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