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예레미야 17:11-27
요절: 예레미야 17:13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예루살렘과 유다의 파멸에 관한 심판을 전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재앙을 복으로 바꾸는 방법], [기적적인 회생법]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20-22절, 24-26절이 바로
‘재앙이 선포된 예루살렘이 화평을 얻고, 승리를 얻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오늘날 믿음이
파산한 성도들에게 한줄기 서광이 임하는 복음이요, 인생의
항로에 뱃길을 돌려주는 돛대입니다. 이는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심판이 집행되는 그 순간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은혜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인들을
향해 오래 참으시는 우리 주님의 성품은 예레미야를 통해
장마다 반복되고 있습니다.
11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갖는 경제관, 바른 물질관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재물을
모으되 바르게 모으지 아니한 자는 자고새가 알들을 품되
부화시키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의 날들의 중간에 그것이
떠나겠고 끝에는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11). 성도들에게
돈 문제만큼 삶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곳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돈만 있으면 그보다 더 편리한 것도 없는 까닭입니다.
재물을 모으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능력이요,
복입니다. [오직 너는 주 네 하나님을 기억하라. 이는
그분께서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니....](신8:18)라고
말하며, 잠언 10:22에 [주의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나니
그분께서는 이것에 슬픔을 더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재물, 모든 소득이 다 주님으로부터
온 복은 아니며, 주님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정당한 소득이
아니면 그 소득은 죄일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안식일도 무시하고 일을 했습니다.
안식년도 무시하고 땅을 갈았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재물을
모으되 바르게 모으지 아니한 자’의 첫 번째
대상은 주님의 말씀보다 돈 버는 일을 앞세워서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교회에 나갈 시간이
없고, 일을 하느라 바빠서 주님의 왕국의 그분의 의를 구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나는 사기 치지도
않았고, 부정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열심히 땀을 흘려서
벌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들이 ‘나의 법을
어기면서 돈을 벌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레위기 25:4, [칠
년째 되는 해에는 그 땅에 안식하는 안식이 있게 할지니
이것은 [주]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네 밭에 씨를 뿌리거나
네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레25:4). 그러나 이들은 너무나
열심히 돈을 버느라 땅을 쉬게 하지 않았습니다. 무려 490년
동안 그들은 단 한 해도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가셔서 그 땅이 쉬지
못한 안식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러면 너희가 너희
원수들의 땅에 거하는 동안에 그 땅이 황폐하여 안식을
누리리라. 바로 그때에 땅이 안식하며 안식을 누리리니
너희가 그 땅에 거하며 안식할 때에 그 땅은 안식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그 땅이 그 황폐한 동안에 안식하리라.](레26:34-35).
이들이 안식일도, 안식년도 무시하고 땅에서 얻은 소출은
자신들의 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빼앗겼고, 그들은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 가 버렸습니다. [이로써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주]의 말씀이 성취되어 마침내 그
땅이 자기의 안식을 누렸으니 이는 그 땅이 황폐한 동안
안식을 지키고 칠십 년을 마쳤음이더라.](대하36:21).
오늘날도 유대인들처럼 주님이 주신 원칙과 법을 어기면서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된 성도들은 재물을 바르게 모으지
않는 성도들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재물을
모으되 바르게 모으지 아니한 자’의 두 번째
유형은 의(義)가 없는 소득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말이 있습니다. 돈에는 눈이 없다는
말도 있는데, 그것을 눈 먼 돈이라고 합니다. 이런 돈은
아무리 벌어도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일확천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령 얻게 되었다 하더라도 득보다는 실이
많습니다. 재물에도 의(義)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적게 가지고도 의가 있는 것이 많은 소득을
가지고도 의가 없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6:8). 헛되이
얻은 재물은 설령 많이 모았다고 해도 반드시 줄어들 것이며,
없어지고 맙니다. [헛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 들 것이나
수고하여 모으는 자는 재물을 늘리리라.](잠13:11). 자신의
수고한 대가 이상을 추구하는 것 역시 헛되이 얻은
재물입니다.
성경은 공정하게 재물을
모으라고 가르칩니다(신25:13-15). [너는 가방에 다른 저울
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다른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너는 완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지니라. 그리하면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네 날들이 길게 되리니](신25:13-15). 불공정
행위로 재산을 모으는 것은 의가 없는 소득이며, 헛되이
모은 재물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재물을 모으되 바르게 모으지
아니한 자’에 해당합니다.
재물을 모으되 바르게
모으지 않는 또 하나의 예는 거짓말, 사기, 과대 광고 등으로
재물을 얻는 것입니다. 주식이나 채권, 부동산으로 돈을
벌려고 하다보면 얼마나 많은 악성루머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요즘 연일 신문에 보도되는 것이 거짓말로 인한
피해입니다. 합작 개발, 기술 이전, 신제품 개발....등으로
주식 가격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죽음을
앞당기는 무서운 죄입니다. [거짓말하는 혀로 보물을 얻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자들이 이리저리 내던지는 헛된
것이니라.](잠21:6).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르게
재물을 모으지 않을 때 그 재물을 스스로 날아가게 해
버리시던가 다른 사람이 그것을 취해 버리게 하십니다.
재물을 모으되 바르게
모으지 아니한 자는 부화시키지 못한 알과 같습니다. 자기가
번 돈이라고 해서 모두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모든 사람은 헛된 모습 속에서 걷나니 참으로 그들은 헛되이
소동하나이다. 그가 재물을 쌓으나 누가 그것을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39:6). 어떤 사람은 벌기만 하고 한 번
써보지도 못한 채 죽습니다. 번 후에 쓰려고 하지 말고,
벌면서 써야 합니다. [이는 지혜로운 자들도 죽고
어리석은 자와 짐승 같은 자도 그와 같이 멸망하여 자기
재물을 남에게 남겨 두는 것을 그가 보기 때문이로다.](시49:10)고
했습니다. 죄인들이 재물을 많이 모아도 그것은 모두
의인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자손의
자손에게 상속을 남기거니와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잠13:22).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중심적인
바른 경제관, 물질관을 소유해야 합니다.
12-14절은 예레미야의 4번째
고백입니다. [영화로우며 높은 왕좌는 처음부터 우리의
성소가 있는 곳이라. 오 [주]여,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여,
주를 버리는 자들은 다 부끄러움을 당하며 나를 떠나는
자들은 땅에 기록되리니 이는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주]를
버렸음이니이다. 오 [주]여, 주는 나의 찬양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고침을 받으리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받으리이다.](12-14).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하늘의 예루살렘을 예표하는
곳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보좌가 있는 곳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천년 왕국의 수도 역시 이곳 예루살렘에
세워지기 때문입니다(렘3:13).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소망이십니다. 이 말은 성경에서 총 3번 나오는데, 예레미야
14:8, 17:13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한 번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함으로써 예레미야가 말한 주(LORD)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까닭에 내가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결박되었음이라.](행28:20). 주님은 이스라엘의 소망이며
동시에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소망(골1:23),
영광의 소망(골1:27), 구원의 소망(살전5:8), 좋은 소망(살후2:16),
우리의 소망(딤전1:1), 영원한 생명의 소망(딛1:2,3:7), 복된
소망(딛2:13), 앞에 놓인 소망(히6:18), 산 소망(벧전1:3)이라고
불립니다. 소망의 실체는 주님 자신이십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누구나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허무함을 느낍니다. 히브리서 6:19에 이르기를, [우리에게
있는 이 소망은 혼의 닻과 같아서 확실하고 굳건하여 휘장
안에 있는 곳으로 들어가나니](히6:19)라고 하는데,
소망이 없으면 주님이 거하시는 지성소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믿음은 소망하는 것들의 실체인 관계로 믿음과
소망은 분리되거나 단절될 수 없습니다. 믿음을 버린 자,
믿음에서 떠난 자는 소망을 잃어 버린 자들이며, 주를 버린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전에
여호수아 앞에서 [...우리가 [주]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결코 하지 아니하리니](수24:16)고
맹세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 만약 [주]를 버리면
그들은 멸망당할 것이란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역사는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주]를 버린 역사입니다(삿2:13,10:6,
삼상12:10, 대하24:10, 사1:4,사1:28, 사65:11). 지금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은 성경을 버리는 역사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예배도 드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림으로써 배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주]를 버리는 자들은 다
부끄러움을 당하리니”란 말씀은 이스라엘의 탁월한 도덕성,
영적 우월성, 선민의식, 민족적 자부심 등이 모두 산산조각
나 버린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주변 이방 민족을 개로
여길만큼 월등한 영적, 종교적, 도덕적 우월성이 있었지만
주를 버린 결과 그런 개들에게 재산과 가족들을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가는 견딜 수 없는 수치와 모욕을 당했습니다.
실제로 세속 사가들조차도 서양사의 양대 기둥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민족이
보아도 유다는 탁월하면서도 특이하고 남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를 버린 결과 그런 모든 것들은
수치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남을 무시하던 부자가 도리어
구걸을 하는 꼴이나 박사 학위가 몇 개라고 하면서
무식하다고 욕하던 사람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경우 보다
훨씬 더 부끄러운 장면입니다. 사람들은 언제 부끄러움을
당합니까? 자신의 자랑거리, 자부심, 교만, 우쭐대던 것이
박살났을 때입니다. 그러나 이런 수치는 이 세상에서의
잠시일 뿐입니다. 정말 지워지지 않는 부끄러움은 복음을
믿지 않아서 당하는 수치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들을
부끄러워하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 중에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하시니라.](막8:38).
어떻게 하면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까? 주를 신뢰하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시25:2,3,20, 시31:1). 시편 기자는 계속해서 ‘내가
주를 신뢰하오니 나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고’라고 합니다. 주께 기도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오 [주]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시31:17a).
말씀의 조명을 받으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분을 바라보고 빛을 받게 되었으며 그들의 얼굴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였도다.](시34:5). 마음과 행동이
의로운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악한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들에도
만족하리로다.](시37:19). 주를 바라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오 {주}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옵소서. 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들이
나로 인하여 당황하지 않게 하옵소서.](시69:6). 말씀을
묵상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으로 하여금 주의 법규들 안에서 건전하게 하사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시119:80). 열매가 많은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자기 화살통에
이것이 가득한 자는 행복하도다.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며 성문에서 원수들을 마주 대하여 말하리로다.](시127:5).
성경은 말합니다. [또
성경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롬10:11,롬9:33). 우리는 말보다
행실이 앞서야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고후9:4). 우리는
건전한 언어 생활, 믿음과 행실이 일치할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말씀에 불순종할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만일 누가 이 서신으로
전하는 우리의 말에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주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라.](살후3:14).
사도 바울은 [비난할 수 없는 건전한 말을 하라. 이것은
반대편에 속한 자로 하여금 너희에 대하여 나쁘게 말할 것이
없으므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딛2:8)고
권면했습니다. 우리는 선한 양심을 가짐으로써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방하는 자들을 도리어 부끄럽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것은 너희를
가리켜 악을 행하는 자라 비방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한 행실을 거짓되이 비난하는 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16). 우리는 주님
안에 꾸준히 거함으로써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어린
자녀들아, 이제 그분 안에 거하라. 이것은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로 하여금 확신을 얻고 그분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요일2:28).
우리는 모두 주님을 만나고 그 앞에서 우리가 행한대로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이 가장 제대로 된 삶을 산 사람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십시오. [영화로우며
높은 왕좌는 처음부터 우리의 성소가 있는 곳이라. 오 [주]여,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여, 주를 버리는 자들은 다 부끄러움을
당하며 나를 떠나는 자들은 땅에 기록되리니 이는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주]를 버렸음이니이다. 오 [주]여,
주는 나의 찬양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고침을 받으리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받으리이다.](12-14). 주님을 떠나는 자들은 땅에
기록된다고 하십니다. 이는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기록하시는 분이십니다. 지난 시간에는 유다의
죄를 철필과 금강석 촉으로 기록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렘17:1).
주님은 모든 것을 낱낱이 역사에 기록하시는데,
전지전능하신 분이신지라 역사를 미리 기록하시기도
하십니다. 성경의 예언은 미리 기록된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실체가 아직 불완전할 때에도 주의 눈이
보셨으며 계속해서 형성되는 나의 모든 지체들이 주의
책에 기록되었사오니 곧 그 지체들 중에 아직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니이다.](시139:16). 주님은 말씀을
마음 판에 기록하시는 분이시며(롬2:15,히8:10, 히10:16), 우리의
모든 것을 책에다 기록하십니다.
땅에 기록된 자들은 땅이
소멸될 때 그들의 기록 역시 소멸됩니다. 땅에 기록했다는
것은 땅에서 곧 지워지고 소멸되듯이 그들이 이 땅에서
멸망하고 죽을 것이라는 재앙을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우리의 이름은 ‘어린 양의 생명 책’에 기록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흥분에 들떠서
자신들이 행한 일에 대해 보고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들이 너희에게 굴복하는 이 일로 기뻐하지 말고 오직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10:20).
땅에 기록된 이름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모두 하늘에 기록된 자들입니다. [총회 곧 하늘에
기록된 처음 난 자들의 교회와 모든 것의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과](히12:23). 예수를
믿는 자들은 이미 하늘의 생명 책에 그 이름이 있습니다. [또한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도 간절히 권하노니 복음
안에서 나와 함께 수고하고 또 클레멘트와 나의 다른 동료
일꾼들과 함께 수고한 저 여자들을 도우라. 그들의 이름이
생명 책에 있느니라.](빌4:3). 만약 생명 책에
기록되지 못했다면 그의 이름이 아무리 유명한 역사서나
위인 전기전집, 명사록 등에 기록되어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20세기를 빛낸 인물에 기록되든, 역사를 움직인
이름에 기록되든 소용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생명 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20:15).
이들이 하늘에 기록되지
못한 이유는 ‘생수의 근원이신 [주]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생수의 근원을 한자어로 수원(水原)이라고 합니다. 강은
강의 발원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서울을 가로질러 흐르는
한강의 발원지는 ‘오대산 우통수’란 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물의 원천을 지으신 분이며, 물의 발원지이십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물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보좌에
앉으시면 예루살렘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흘러 강을
만듭니다(슥14:8, 계22:1). 목마른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타는 목마름과 갈증을 느껴 본 사람은
커피나 홍차나 다른 음료수도 찾지 않습니다. 그들은 물을
찾습니다. 그들에게 물은 생명입니다. 이전에 주님은 유다가
행한 두 가지 악을 이렇게 지적하셨습니다. [이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음이니 곧 그들이 생수의 샘인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물 저장고들을 판 것인데
그것들은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저장고니라.](렘2:13).
생수(living water)는 인간 생존의 필수 요건이며, 생명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몸은 70% 이상이 물입니다. 도시를
건설하든, 집을 짓든 땅을 확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물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물만 끌어들일 수 있다면 사막도
도시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물이 없으면 그 땅은 광야요, 황무지요, 사막에 지나지
않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물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들은 샘의 개수가 경제력의 척도일 정도로
샘이 중요했습니다. 샘을 막아 버리거나 빼앗기면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이 생수의 샘을 버렸다는 것은
그들이 미쳤다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들의 초목에게 물이 필요하듯이, 또 우리 몸이 물을 필요로
하듯이 우리의 영혼은 ‘영혼의 샘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분이시며(계14:7),
친히 생수의 샘이 되시며, 우리 안에 생수의 강을
주셨습니다. 믿기만 하면 물을 구하러 다닐 필요가 없고,
저장고를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한 것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요7:38).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우물이 되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하리라.](요4:14). 주님이 주시는 물은 모든 갈증을 해결해
주는 물이며, 넘치도록 풍성한 물입니다. 이는 생활, 삶의
문제가 아닙니다. 생명의 문제입니다. 주의 생명이 넘치면
삶은 저절로 변화됩니다.
생수는 생명을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물은 생명을 냅니다. 물이 있는 곳에는
풀이 나고, 나무가 자라며, 그리로 생명체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듭니다. 생수는 정화 능력이 있습니다. 물은 더러운
것들을 씻어서 깨끗하게 만듭니다. 생수는 약효를 내기도
합니다. 생수는 흥분제, 진정제, 강장제, 이뇨제, 발한제,
토제, 하제, 신진 대사 촉진제, 희석제, 해열제, 최면제로서
효용이 있습니다. 생수는 소음을 제거하기도 합니다. 소음
속의 물소리는 소음 정화 효과를 가져 소음을 부드럽게 하는
효용이 있습니다. 생수의 효용에 대해서 논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주님을 버린 것은 사막에서 하나 뿐이 오아시스를
버린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주]여, 주는 나의 찬양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고침을 받으리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받으리이다.](14).
예레미야는 지금 범죄한 유다의 형제, 자매들로 인해 극도로
마음이 상해 있습니다. 위로와 힘이 필요하며, 치료가
필요했습니다. 유다는 매일 심판을 전해야 하는 고통 가운데
지쳐 있었습니다. 영혼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고,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고쳐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상한 마음과 영을
고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혼을 고치십니다.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시41:4).
주님은 우리의 몸을 고치십니다. [오 [주]여, 내가
연약하오니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오 [주]여, 나의 뼈들이
괴로워하오니 나를 고치소서.](시6:2). 주님은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을 다 고치실 수 있습니다. [이르시되, 네가 [주] 네
하나님의 음성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고 내 눈앞에서 옳은
것을 행하며 내 명령들을 귀담아 들으며 내 모든 법규를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내린 이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치유하는 [주]이기
때문이라, 하시니라.](출15:26). 오늘날 교회에서
유행하는 지독한 미혹은 ‘신유 은사, 신유 집회’란
것입니다. 이들은 몸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며,
주님의 능력이라고 믿는 듯 합니다. 물론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언제라도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몸을 고치는 것보다 생각을 고치고, 마음을 고치는데
훨씬 더 많은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성경 읽기 싫어하는 것,
기도하기 싫어하는 것, 교회 가기 싫어하는 것도 다 고침
받아야 할 영적인 병입니다. 생각이 삐딱하고 매사에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영에 사로잡혀 있다면 역시 고침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죄에 계속
넘어지면 ‘나를 고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신유
집회는 이런 병을 고치는 집회가 되어야 합니다. 원망, 다툼,
불평과 같은 갖가지 육신적인 죄들이 마음 가운데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말씀의
능력으로 고침받기를 간절히 구하는 그런 집회가 되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로써 주의 길을 땅 위에
알리시며 주의 구원하시는 치유(治癒)의 힘을 모든
민족들에게 알리소서.](시67:2). 우리는 병든 교회를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나의 문제를 주님 앞에 쏟아 놓고 치유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죄로 인해 저주받은 이 땅을 고쳐
주시도록(대하7:14) 기도해야 합니다. 일부 몰지각한
은사주의자들처럼 자신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다가 병든
성도의 몸을 다 고칠 것처럼 떠드는 것은 잘못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영과 마음을 고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몸의 질병은 천년 왕국이 되면 누가 기도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치료의 광선을 발휘하셔서 모두 다 고침을 받을
것입니다. [또 [주]께서 자신의 백성의 터진 곳을 싸매시고
그들의 맞은 곳을 치유(治癒)하시는 날에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나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사30:26),
[보라, 내가 이곳에 건강과 치유를 가져오며 그들을
치유하고 평안과 진리의 풍성함을 그들에게 드러내며](렘33:6).
예루살렘에 생수의 강이 흐르고 생명 나무들이 실과를 맺을
때 그 잎사귀들은 모든 민족들을 치유하는 잎사귀가 됩니다(계22:2).
15절입니다. [보소서,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주]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지금
임하게 하라, 하나이다.](15). 이 말은 ‘네 말이 사실이면
지금 당장 그렇게 되게 해 보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은
불신자들이 성도들을 괴롭히는 단골 메뉴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지금 세상에 마귀가 어디 있고, 지옥이 어디 있다고
그런 말을 하는가?란 식입니다. 오히려 이들은 성도들을
조롱하면 ‘주님이 어디 계시느냐? 천국이 어디에 있느냐?
지옥이 어디 있느냐?, 휴거가 어디 있느냐?’ 죽어서 하늘
나라 간다면서 왜 안죽느냐? 는 등으로 놀려대거나, 지금
당장 주님이 살아 계시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외칩니다.
기독교인들은 말만 그렇게 하지 실제로 그런게 어디 있느냐?는
식입니다. 유대인들 역시 예레미야를 향해, "주께서는
말씀으로만 위협하시지, 별 것도 아니지 않으냐! 어디
위협한 대로 되게 해보시지!"라는 식입니다. 이사야 5:19에
[그들은 이르기를, 그분께서 서둘러 자신이 행하시는 일을
속히 이루사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계획이 가까이 임하게 하사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사5:19)란 말씀과 같습니다.
16-18절은 예레미야의 개인
기도로써 자신에 대한 기도입니다. [나로 말하건대 나는
서둘러서 목양자 /직분을/ 그만두지 아니하고 주를
따랐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치 아니하였사오니 /이것은/
주께서 아시는 바니이다.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바로 주
앞에 있었나이다.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주는
재앙의 날에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은
당황하게 하시되 나는 당황하게 하지 마옵소서. 그들은
놀라게 하시되 나는 놀라게 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임하게 하사 두 배의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16-18).
예레미야는 주님을 따르는 목양자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두렵게 하지 마시고 당황하게 하지 마시고, 놀라게
하지 마시기를 구했습니다. 우리는 평안과 기쁨, 지각을
초월하는 주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지켜 주시기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19-26절은 [재앙을 복으로
바꾸는 방법], [기적적인 회생법]에 대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22절, 24-26절이 바로 ‘재앙이 선포된
예루살렘이 화평을 얻고, 승리를 얻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주님은 기도하는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19절 이하가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9-20절은 성문에 서서 유다의 모든 사람들
위로는 왕에서부터 아래로는 거주민들에게 주의 말씀을
들으라고 외칩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일을 해서 돈을 버느라
안식일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21-22절입니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주의하여 안식일에 짐을
나르거나 예루살렘의 문들로 들여오지 말고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어 옮기지도 말며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한 대로 너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21-22). 안식일에 관한 법은 십계명 중 네 번째
계명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20:8).
유다는 먼저 안식일 준수를 다시 엄격하게 준수함으로써
신앙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주님은 우상 숭배의 죄와 더불어 안식일을 범한
죄를 지적하신 것은 이들이 안식일 준수를 통해 영적 회복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은 인간들을 위해
제정하신 것이지만 “[주] 네 하나님의 안식일”이라고
불립니다(출20:10). 안식일은 아무 일도 해서는 안되며,
주님께 복되게 하여 거룩하게 하신 날이며(출20:11),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전인 광야에서 만나를
거두면서부터 훈련을 받았던 계명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주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영원한 표적이며,
이를 통해 이스라엘이 주님을 알게 되는 까닭입니다.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로 내
안식일을 지킬지니라. 그 까닭은 이것이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있을 표적이기 때문이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가 너희를 거룩히 구별하는 [주]인 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출31:13).
이것이 안식일의 목적입니다. 안식일을 범하면 반드시
죽이게 했는데, 이는 안식일이 주님의 영원한 언약이었기
때문입니다(출31:16).
2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고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였으며
자기 목을 곧게 하여 듣지도 아니하고 교훈을 받지도
아니하였느니라.](23).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일을 안하면 손해가
얼마인데? 라는 생각이 그들에게 깔려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물질을 동시에 숭배할 수 없습니다(눅16:13).
24절은 다시 한번 안식일
준수에 대한 촉구이며 25-26절은 그에 따른 복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부지런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며
안식일에 이 도시의 문들을 통해 짐을 들여오지 아니하고
오직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여 그 날에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면 다윗의 왕좌에 앉은 왕들과 통치자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도시의 문들로 들어오되 그들과 그들의
통치자들과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주민들이 그리할
것이요, 이 도시는 영원히 있을 것이며 또 사람들이 유다의
도시들과 예루살렘 주위의 장소들과 베냐민 땅과 평야와
산지와 남쪽으로부터 와서 번제(燔祭) 헌물과 희생물과 음식
헌물과 향을 [주]의 집으로 가져오고 또 찬양의 희생물을
가져오리라.](24). 재앙과 심판이 정해진 유다와
예루살렘이 회복되는 방법이 바로 안식일 준수라는 지극히
평범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서 비롯됩니다.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재앙을 복으로 바꾸는
방법으로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한 가지
작은 일에서부터 신실하게 주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키고
바로 잡아간다면 나머지 모든 영적 질서들이 바로 잡히게
되며, 영적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선포하셨지만 그들이 만약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도시는 멸망대신 영원히 거하며, 왕조는
단절되지 않을 것이며, 성전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 완전히
회복될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27절은 주님이 제시하신
방법에 순종으로 반응하지 않고 여전히 불순종과 무시할 때
주님이 그들에게 행하실 재앙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여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지 아니하며 안식일에 짐을 나르고 예루살렘
문들로 들여오면 내가 그 문들에 불을 놓으리니 그 불이
예루살렘의 궁궐들을 삼키고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하시니라.](27). 이제 선택은 하나님이 아니라
유다의 백성들에게로 넘어 왔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선을
택하든지 악을 택하든지 간에 그 선택한 대로 보응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알고, 그런 분별력을 갖도록 말씀으로 감각들을
단련하고,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