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예레미야 18:1-23
요절: 예레미야 18:6
주님은 자신을 여러
가지로 계시하시는데 그 중 하나가 토기장이입니다. 18:1-20:18까지는
토기에 대한 비유로 주님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토기장이는
흙으로 그릇을 만들고, 작품을 빚는다는 점에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종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 집에서 설교를 들으라고 하십니다.
거기서 주님은 예레미야가 본 것을 가지고 말씀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처한
환경, 우리가 보고 듣고 배운 삶의 현장에서 말씀을 주시고,
가르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성전에서만 임하지 않습니다.
광야에서도 임하고, 밭을 갈던 들에서도 임하고,
타작마당에서도 임하며, 토기장이 집에서도 임합니다.
오늘은 [토기장이 집에서 주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64:8에, [오 [주]여,
그러나 이제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우리의 토기장이시오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64:8). 우리는 금
그릇이나 은그릇이 아니라 토기(土器)입니다. 이는 우리가
흙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 외에 그다지 가치가 높은 그릇이
아니란 것입니다. 토기는 쉽게 구할 수 있으며, 그다지
비싸지 않는 그릇입니다. 토기는 매우 약한 그릇이어서 쉽게
부서집니다. 토기는 깨어지면 다시 고쳐 쓰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토기의 비유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 심판주
하나님을 계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매우 연약한
존재란 사실을 기억하고 주님을 믿고 의지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하나님의
특별한 보석으로 택함 받았습니다. 보석은 강하고 단단하며,
귀한 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보석대신 계속 질항아리같이
여겨졌습니다. [정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하여 토기장이의 손으로 만든 질항아리같이
여겨지게 되었는가!](애4:2). 그리스도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매우 귀한 보석들이며, 산 돌(living
stone)입니다. 우리 몸은 질그릇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한 질그릇이 아니라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졌나니 이것은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며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후4:7). 그래서
저마다 거룩히 구별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그릇을 소유할 줄
알아야 합니다(살전4:4, 딤후2:20-21참조).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1-4절은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거기서 주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시청각 교육을 시키시고, 실물을 통해
생생하게 주신 말씀을 마음속에 각인 시켜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삶의 경험은 듣고, 읽고, 배운 말씀을 더욱
살아있게 만드는 법입니다. 3-4절입니다.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갔더니, 보라, 그가 물레 위에서 물건을
만드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훼손되매 그가 다시 그것으로 다른 그릇을 만들되 자기
보기에 좋은 대로 만들더라.](3,4). 예레미야가 주의
말씀대로 토기장이 집에 도착해서 그가 본 것은 마침
진흙으로 만든 토기가 훼손되는 장면이었습니다.
토기장이는 다시 흙으로 다른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이 때
예레미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주님은 호세아에게 [내가 또한 대언자들을
통하여 말하였고 대언자들의 사역을 통하여 환상들을 많이
보여 주었으며 비유를 사용하였노라.](호12:10)고 하셨는데,
이는 비유를 통해 말씀을 쉽고, 생생하게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그 장면을 볼
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5-6절, [그때에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주]가 말하노라. 오 이스라엘의
집아, 이 토기장이가 행한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보라, 오 이스라엘의 집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5-6).
주님이 토기장이 비유를 통해 가르치신 첫 번째 진리는 ‘너희는
내 손에 있느니라’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손밖에
있지 않습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다 움직이고
통제되는 것처럼 사람은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 권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토기장이가
흙을 마음대로 주무르듯이 주님은 이스라엘을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손 안에 있다는 것은 주권, 권세,
능력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라가 하갈에 대해
말할 때 아브라함은 ‘당신의 하녀는 당신의 손 안에 있으니
원하는 대로 그녀에게 행하라’(창16:6)고 했습니다. 손아래
있다는 말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손 안에 있다는 진리를 깊이 배워야 합니다. 신명기
33:3, [참으로 그분께서 이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그분의
모든 성도가 그분의 손 안에 있으며 그들이 주의 발 밑에
앉아 각 사람이 주의 말씀들을 받는도다.](신33:3)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진리를 잊어 버릴 때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무관한 것처럼 살았습니다.
전도서 기자가 깊이
연구한 끝에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내가 내 마음 속으로 깊이 생각하며 이 모든 것을
밝히 보이고자 하였으니 곧 의로운 자와 지혜로운 자와
그들이 행한 일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이라. ...](전9:1a).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주권
신앙이며, 바른 믿음입니다. 시편 95:4에 [땅의 깊은 곳들이
그분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능력도 그분의 것이로다.](시95:4)라고
말합니다. 잠언 21:1에는 [왕의 마음이 [주]의 손 안에
있음이 마치 강물과 같으니 그분께서 친히 원하시는
곳으로 그것을 돌리시느니라.](잠21:1)고 했습니다. 흙이
토기장이 손 안에 있는 것같이 모든 것이 주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 때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란 사실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왕조의 흥망 성쇠, 민족의 운명은 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돌리시는 대로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능력으로
사라를 빼앗길 위기에 있었던 아브라함을 아비멜렉으로부터
보호했습니다(창20:3-4). 주님은 이런 능력으로 야곱을 외삼촌
라반으로부터 보호하셨습니다. [너를 해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서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조심하여 야곱에게 선이든 악이든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창31:29). 주님은 한 개인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분노, 결심까지도 다 바꾸실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토기장이 집에서 배운 첫 번째 진리는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입니다.
예레미야가 두 번째 배운
진리는 토기장이가 자기 마음대로 만들 수 있듯이 주님은
무엇이든지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역사의 주관자란
사실입니다. 주님은 역사의 방관자가 아니십니다. 욥기 12:23에
[민족들을 흥하게도 하시고 다시 망하게도 하시며
민족들을 크게도 하시고 다시 작게도 하시며](욥12:23)라고
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이
진리를 배우는데 7년이나 왕위에 쫓겨나 광인의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왕국을 세웠다고 말했지만
전혀 아니었습니다.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빌론은
내가 내 권능의 힘으로 건설하여 왕국의 집으로 삼고 내
위엄의 영광으로 삼은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아직 이 말이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한 음성이 내려와 이르시되,
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이 왕국이 네게서
떠났느니라. 사람들이 너를 사람들에게서 몰아내리니 네
거처가 들의 짐승들과 함께 있을 것이며 그들이 너로 하여금
소처럼 풀을 먹게 하리니 일곱 때가 네 위로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들의 왕국에서
다스리시며 자기 뜻대로 그 왕국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리라, 하더니](단4:30-32). 세계의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세계는 넓고 역사는 유구하고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에게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은 한 방울 물, 작은 먼지와 같습니다. [보라,
민족들은 물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그들은 저울의 작은
먼지와 같이 여겨지느니라. 보라, 그분께서는 매우 작은
것을 드시듯 섬들을 드시나니](사40:15).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이런 하나님의 역사관, 세계관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국제 정세나 세상의 정권
등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연말이 되면 20세기를
움직인 사람들, 지난 100년에 세계를 움직인 위인들이라며
인물을 뽑지만 정작 그런 인물들은 하나님의 손에 잡힌
흙먼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7-10절을 보십시오. [내가
어떤 민족과 어떤 왕국을 뽑고 무너뜨리며 멸하리라 말할
때에 만일 내가 /멸하리라/ 선포한 그 민족이 자기들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들에게 행하려고 생각했던 그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또 내가 어떤 민족과 어떤
왕국을 세우고 심으리라 말할 때에 만일 그 /민족/이 내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내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들을 유익하게 하리라 한 그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7-10).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영적
진리를 배웁니다. 주님은 민족과 왕국을 멸하실 수도 있고,
세우고 심을 수도 있으신 데, 주님의 뜻은 기계적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의인이라도
회개하지 않을 때 거두어질 수 있고, 반대로 죄인이라도
회개할 때 뜻을 돌이키십니다. 주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뜻을 정하시면 무소처럼 앞만
달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돌이킬 수 있는
분이십니다. [만일 그들이 귀를 기울이고 각 사람이
자기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면 내가 그들의 악한 행위로
인하여 그들에게 내리려고 작정한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리라, 하라.](렘26:3).
실제 이런 예는 많이
있습니다. 아합은 갖은 악행으로 심판의 저주를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일시적이지만 회개했을 때
그에 대한 심판은 유예되었습니다. [아합이 내 앞에서
겸손히 행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손히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의 시대에는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의 시대에 이르러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왕상21:29). 만약 그가 완전한 회개를 했다면
재앙은 도리어 복이 되었을 것입니다. 르호보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범죄로 가게 하는 배교의
철로를 깐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행한 죄악에 대해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두려워하고 겸손히
행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르호보암이
스스로 겸손히 행하매 [주]께서 진노를 돌이키사 그를 다
멸하지 아니하셨으며 또 유다의 형편도 좋아지니라.](대하12:12).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정하신 심판과 저주를
유예하고 도리어 복으로 바꾸는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겸손히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런 가장 대표적인 예는
요나서에 나오는 니느웨에 관한 심판의 선포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 도시의 죄악이 심히 크므로 40일 후에
심판을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욘3:3-4). 그러나
요나의 선포를 들은 니느웨 거주민들은 왕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금식하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욘3:4-9).
그때 주님은 자신의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한 일 곧 그들이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킨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3:10). 우리가
돌이키면 하나님도 돌이키십니다.
다시 본문을 보십시오. 8절은
주님이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셨고, 10절은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에 대해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다윗은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자신의 풍성한 긍휼에
따라 뜻을 돌이키시며](시106:45). [이는 [주]께서 자신의
백성을 판단하시며 자신의 종들에 대하여 친히 뜻을
돌이키시기 때문이니이다.](시135:14). 뜻을 돌이키신다는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소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뜻을 돌이키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죽는 그 순간까지 회개의
기회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누구라도 주님의 재앙과 저주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토기장이
집에서 배운 세 번째 진리는 토기장이는 다른 토기 그릇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로 질그릇이 훼손되면
그는 다른 그릇을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그릇을 자신의 용도대로 다양하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고자 하셨으나 그렇게 되지 못하면
주님은 그 그릇을 통해 자신의 공의를 집행하심으로 진노의
그릇으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온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 긍휼, 보호하심, 선하심을
나타내는 그릇으로 택하셨지만 그들이 거부했을 때 주님의
무서움, 진노, 공의를 드러내는 그릇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주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만드셨나니 참으로 사악한 자도
악한 날을 위하여 만드셨느니라.](잠16:4). 하나님은
우리를 진흙으로 지으셨습니다. 욥기 33:6에, [보라, 내가
그대의 소원대로 하나님을 대신하노니 나도 진흙에서
빚어진 자로다.](욥33:6). 그리고 현재도 우리는 여전히
진흙이며 주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사54:8). 그런 이유로
토기장이가 진흙에 대해 갖는 능력과 권세만큼 주님은
우리에게 동일한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롬9:21).
예레미야가 토기장이
집에서 배운 네 번째 진리는 진흙은 토기장이에게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토기가 토기장이에게
불평하거나 항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숨길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화 있을진저, 자기 계획을 주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이여! 그들의 일들은 어둠 속에 있은즉
그들이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나니 참으로 너희가 일들을 뒤집는 것이 토기장이의
진흙과 같도다. 지어진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또
빚어진 물건이 어찌 자기를 빚은 자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가 지각이 없다, 하겠느냐?](사29:15-16). 토기와
토기장이를 비교할 수 있습니까? 이는 비교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화 있을진저, 자기를 만드신 이와 다투는
자여! 질그릇 조각은 땅의 질그릇 조각들과 다툴지니 진흙이
자기를 빚는 자에게, 네가 무엇을 만드느냐? 말할 수 있으며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사45:9).
대언자 예레미야가 능숙한 도공의 손을 보면서, 그 손에서
빚어지고 부서지는 토기를 보면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저 흙과 같구나!”란
깨달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토기장이 되신 주님을
깊이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주민들에게 가서
이르기를,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칠 재앙을 만들고 너희를 칠 계략을 세우나니 이제 너희는
각각 자기의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 길과 행위를 선하게
하라, 하셨다, 하라.](11). “가서 말하라” 이것은
전도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첫 계명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가서 말해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계획을 미리 말씀해
주시고, 또 피할 길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심판의 경보 사이렌을 울렸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백성들에게 전해주고, 회개를 촉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부르시고 초청하십니다. 주님은
여전히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그들이 말하기를, 이제 소망이 없으니 오직 우리는 우리
계획대로 행하며 저마다 자기의 악한 마음이 상상하는 것을
행하리라, 하였도다.](12).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이 소망을 주셨음에도 그들은
소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자기 계획만이 있을 뿐입니다.
13-1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이제 너희는 누가 이러한
일들을 들었는지 이교도들 가운데서 물어 보라. 이스라엘의
처녀가 심히 무서운 일을 행하였도다. 사람이 들의 바위에서
나오는 레바논의 눈을 버리고 떠나겠느냐? 다른 곳에서
나와서 흐르는 찬물을 버리겠느냐? 내 백성이 나를
잊어버렸으므로 헛된 것에게 분향하였으며 이러한 것들이
그들로 하여금 옛 길을 떠나 그들의 길에서 걸려 넘어지게
하고 길들 곧 닦지 아니한 길로 다니게 하였느니라.](13-15).
주님은 그들의 어리석음, 완고함, 고침받기를 싫어하는
마음을 극히 미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너무나
이성이 없고, 분별력이 없게 생각나는대로 행동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도 계시도 아무 조명도 없는
이교도들에게 가서 물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처녀가
심히 무서운 일을 행하였도다.](13). 심히 무서운 일을
했다는 것은 첫째, 생수의 근원을 버린
것입니다. 이교도들은 레바논의 눈, 흐르는 찬물도
버리지 않습니다. 광야를 여행하는 사람들, 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들의 바위에서 나오는 레바논의 눈은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흐르는 찬물은 깨끗하며, 마시기에 적합니다.
누가 이것을 버리겠습니까? 그러나 유다는 어리석게도
생수의 근원을 버렸습니다. 이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들도 하지 않을 짓입니다. 이런 예는 참으로 세계 어느
민족에게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입니다(렘2:13). 둘째,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헛된 것에 분향했는데 이는
자기 민족 종교, 신앙을 버린 것입니다. 이것도 주위
어느 민족도 결코 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들은 헛된
우상일지라도 끝까지 그 종교를 지키지 결코 자기 신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하나님을 버린 민족이 있으니
바로 유다와 이스라엘입니다(렘2:11). 셋째,
옛 길을 떠난 것입니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길들 가운데 서서 보며 옛 행로들 곧 선한 길이 어디
있는지 물어 보고 그 길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들을 위한 안식을 얻으리라, 하였으나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그 길로 걷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며](렘6:16). 어느
민족도 자기 조상들의 전통을 함부로 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아도 지키려고 하며, 계승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유다와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부터 시작된 아름다운 믿음의 전통들을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모두 버렸습니다. 성경도 버리고, 안식일도
버렸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걸었던 길은 버리고, 거칠고
아무도 가지 않는 길로 가겠다고 합니다. 주님은
이교도들에게 그런 예가 있는지 물어 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이런 일들을 무서운 일, 끔찍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수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이교도들도 좀처럼 하지 않는 그런 일을
이스라엘은 자연스럽게 했습니다. 이로인해 하나님은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십니다.
16-17절입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의 땅이 황폐하고 영원한 비웃음거리가
되었나니 그러므로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자기
머리를 흔들리라. 내가 그들을 그 원수 앞에서 흩어
버리기를 동풍으로 하듯 하며 그들의 재난의 날에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16-17).
이교도들도 하지 않는 무서운 일을 한 결과 그들은
이교도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땅은 황폐하게
되고,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흩어져서 민족적 구심점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모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다시
모일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주님께서 그 날에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얼굴을 숨기심으로 아무도 찾지 못하게 해
버리십니다. [그분께서 고요함을 주시거늘 누가 감히
소란하게 하겠느냐? 그분께서 자신의 얼굴을 숨기시거늘
누가 감히 그분을 뵈올 수 있겠느냐? 한 민족에게
그리하시든지 한 사람에게만 그리하시든지 상관이 없나니](욥34:29).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렸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대로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들은 급하면 주님께 다시 등을 돌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나무줄기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하고 돌에게, 너는 나를 낳았다,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자기 등을 내게로 돌리면서도 자기 얼굴은
내게로 돌리지 아니하다가 스스로 환난을 당할 때에는
이르기를,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할 것임이라.](렘2:27).
하나님은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등을 돌린
자들을 향해 심판석에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노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마7:23).
18-23절은 예레미야의
기도입니다. 예레미야는 박해자들의 행동, 예언적 저주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계략을 꾸며 예레미야를 치자. 이는 율법이 제사장에게서,
계략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말씀이 대언자에게서 사라지지
아니할 것임이라.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말자, 하였나이다. 오 [주]여, 내게
주의를 기울이시며 나와 다투는 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그들이 내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사오니
어찌 선으로 악을 갚으리이까? 내가 주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선한 것을 말하고 주의 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그러므로 그들의 자녀들을 기근에
내어 주시며 칼의 힘으로 그들의 피를 쏟으시고 그들의
아내들은 자기 자녀들을 잃고 과부가 되며 그들의 남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그들의 젊은이들은 전투에서 칼에 죽게
하소서. 주께서 군대를 데려와 갑자기 그들 위에 임하게
하실 때에 그들의 집에서 울부짖음이 들리게 하옵소서. 이는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구덩이를 팠으며 내 발을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음이니이다. [주]여, 그러할지라도 나를 쳐서
죽이려 하는 그들의 계략을 주께서 다 아시오니 그들의
불법을 용서하지 마옵시며 그들의 죄를 주의 눈앞에서
지우지 마옵시고 다만 그들을 주 앞에서 넘어지게 하시되
주의 분노하시는 때에 이같이 그들에게 행하시옵소서,
하니라.](18-23). 예레미야의 대적들은 예레미야를 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았으며, 함께 행동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① 계략을 꾸며
예레미야를 치자. ② 우리가 혀로 그를 치자. ③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말자. 이 사건은 후에 대제사장,
장로들, 바리새인들이 주축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습을 예표적으로 보여 줍니다. 원수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대적할 때 가장 주목하는 것이 누구인지를
보십시오.
그들의 목표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제사장, 대언자, 지혜로운 자로 유대
사회에 알려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8절은 이들의
다급함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율법이 제사장에게서,
계략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말씀이 대언자에게서 사라지지
아니할 것임이라.](18). 자신들이 제사장, 지혜자, 대언자
역할을 잘 하고 있는데, 예레미야로 인해 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종교 장사를 잘 하고 있는데, 정말
하나님의 종이 나타나 버리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이단으로 몰거나 아예 유대에서 활동을 못하게
해 버리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입을 열어 “오라...”하면서
주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차단하는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법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공평으로 나와 함께 걸었고 많은 사람을 돌이켜
불법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말2:6)라는 말씀대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대언자였습니다.
당시에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잘못하게 했고, 속였으며(렘14:14), 예레미야의
대언을 들을 때면 놀라며 기이히 여겼으며(4:9), 지혜로운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였고(렘8:9-10), 대언자들은 술이
취했습니다(13:13). 이런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함께 끌어
모여 예레미야를 없애자, 죽이자, 매장하자 그런
의논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혀로 그를 치자는
말은 음해, 비난, 유언비어 유포, 거짓말 등 모든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계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런 비난이 두려워 진리를 선포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도리어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으며 멸망이 닥칠 때에도 무서워하지 아니하리라.](욥5:21)
하며 담대히 복음을 선포하고 다가올 지옥의 심판에 대해서
증거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예레미야의 말이
옳든 그르든, 사실이든 아니든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의 의결 사항을 보십시오.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말자, 하였나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예레미야의 말로 치부하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를
잠잠하게 한다고 해서 닥칠 위험이 사라지거나 임할 재앙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파수꾼이 없으면 전쟁이
없어지는 줄 아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박해를 받는 예레미야의
태도를 보십시오. 그는 즉시 기도에 몰두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자신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무시하기로 결정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말(기도)에
주의를 기울이시며, 귀를 기울이십니다(19). 이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참된 위로와 힘을 어디서 얻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예레미야는 선을 악으로 갚는 무리들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주의
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했다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받는 저주를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혹시 주께서 내 고통을 보시리니 이 날 그의
저주로 인해 내게 선으로 갚아 주시리라, 하니라](삼하16:12).
대적들은 예레미야의 피를 원했지만 예레미야는 그들을
위해 선한 것을 말하고, 주의 진노를 돌이키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예레미야의 행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피에
주린 자는 곧바른 자를 미워하되 의인은 그의 혼을 얻고자
하느니라.](잠29:10)란 말씀입니다.
21-23절은 예레미야가 분에
못 이긴 저주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심판해 주시기를 구한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갚는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의 분노하시는 때에
주의 분노로 심판을 해 주시도록 구하는 것은 매우 합당한
기도이며, 법의 심판에 모든 것을 맡기는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미워하고 욕하는 자들은
기꺼이 하루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마18:22).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지옥의 형벌로 다스려 주시도록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되기를 바랍니다. 그
때까지 부지런히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그들을
위해 선한 말을 하고, 주의 진노를 그들에게 돌이키려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