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예레미야 19:1-15
요절: 예레미야 19:7
18장에 이어 19장 역시
토기장이 비유의 연속입니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 집에서 질그릇 병 하나를 사게 하셔서 그것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토기장이 집에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 깊은 곳에 새긴 후에 그 받은
말씀을 이제 백성들에게 전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받은 바
말씀이 있으면 증거의 직무를 맡게 됩니다. 오늘 전하는
말씀은 이미 앞에서도 여러 번 전했던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같은 진리에 대해 반복적으로
말씀을 주시고, 그 증거를 확고히 하신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28:10, 13을 보십시오.
[이는 반드시 훈계 위에 훈계가 있어야 하며 훈계 위에
훈계가 있어야 하고 줄 위에 줄이 있어야 하며 줄 위에 줄이
있어야 하되 여기에도 조금 저기에도 조금 있어야 할
것임이요,](사28:10). 주님은 반복하십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방법은 말씀을 말씀으로 비교하여 차이점을 알고,
공통점을 찾고, 반복하면 됩니다. [[주]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하여/ 훈계 위에 훈계가 되며 훈계 위에 훈계가 되고 줄
위에 줄이 되며 줄 위에 줄이 되고 여기에도 조금 저기에도
조금 있게 하사 그들로 하여금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올무에 걸려 붙잡히게 하셨느니라.](사28:13).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그들의 죄악에 대해 경고하셨고, 다가올
심판에 대해 반복적으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가면서 어떤 말씀은 엄청나게 반복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그만큼 우리에게 많이 말씀하신
것이며, 중요한 말씀인 것입니다.
주님을 대언자들을
보내시고, 말씀을 보내셨는데 이는 새로운 말씀이 아니라
이미 앞서 말씀하신 것들을 다시 들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한 두 번 전하시고 말을 듣지 않으면 곧 바로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심판이 집행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보내셨습니다. [[주]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자신의 거하는 곳을 불쌍히 여기사 자신의
사자(使者)들을 통하여 백성에게 /말씀을/ 보내고
늦기 전에 일어나 보내셨으나](대하36:15),
[[주]께서 너희에게 자신의 모든 종 대언자들을 일찍부터
일어나 보내시고 보내셨으나 너희가
주의하여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렘25:4). 우리는 이 시간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진리의 말씀을 귀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토기장이 집에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신 후에 이제 백성들의 원로들과
백성들에게 그 말씀을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1-3절입니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질그릇 병 하나를 사고
백성의 원로들과 제사장들의 원로들 중에서 /몇 사람을/
취하여 동문(東門)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들을 거기서 선포하여 이르되,
오 유다의 왕들과 예루살렘 거주민들아, 너희는 [주]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주]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곳에 재앙을 가져오리니
그것을 듣는 자가 누구든지 그의 귀가 울리리라.](1-3).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질그릇 하나를 사서
백성의 원로들, 제사장의들의 원로들을 모아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주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때로 설교
장소는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산에서도 설교하셨고,
바다를 등지고 배에서도 설교하셨으며, 길거리에서도,
성전에서도 설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습니다. [이 복음으로 인하여 내가 행악자처럼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당하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느니라.](딤후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말씀을 전하는 장소로 성문 위나 성전과 같은 일반 장소를
두고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와 같은 장소를 지적해 주신 것은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이곳에서 말씀을 전하게 하신 이유는 이들의 죄악을 보여
주고, 이들이 행한 죄악을 깨닫게 하고, 그에 상응하는
주님의 심판을 선포하기 위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누가 나를 따로 만나자고 하면
어떤 기분이 듭니까? 양심에 거리낌이 없고, 의롭다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두려울 것입니다. 경찰은
피의자들을 범죄 현장으로 데려갑니다. 용의자들을 사고
현장으로 데려 갑니다. 지금 주님이 유다의 제사장들과
통치자들을 범죄 현장, 그들의 사고 현장으로 데려 가셔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질그릇 병 하나를 사 들고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설교하게 하셨습니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는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상에 있는 예루살렘 남쪽의 깊은
계곡입니다. 2절에 주님은 동문 어귀 곁이라고 했는데
이곳을 ‘도벳’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바알과 몰렉 등의
이방 신에게 인신공양(人身供養)이 이루어지던 곳이어서
주님은 이곳을 '살육의 골짜기'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명칭은 헬라어로 '지옥'이라는 의미의 '게헨나'로
번역되었으며, 쓰레기 소각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왕하23:10;
대하28:3; 33:6; 렘7:31, 32; 19:2, 6; 32:35; 수15:8; 18:16). 이곳에
사람들을 부른 이유는 이들이 행한 범죄대로 이곳에서
그들이 죽을 것임을 말해 주신 것입니다. 이곳은 살육
골짜기로 변할 것입니다(6).
예레미야의 설교에 초청을
받은 회중은 일반 백성들이 아니라 정계와 교계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백성의 원로들과 제사장의 원로들이
초청을 받았던 것입니다(1). 이는 본래 이들이 백성들에게
말씀을 증거해야 할 위치에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신실한 증인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택하여 증거하게 하였노라, 하시기에](사8:2).
당시 유력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예레미야의 말에 따라
힌놈의 골짜기로 온다면 그들 가운데는 예레미야를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대언자로 여기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들에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됩니다. 이제 듣는 자들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만군의 주 하나님께서 단지 겁을 주고 협박만 하고
마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면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땅의 모든 가족 중에서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런즉 내가 너희의 모든 불법으로 인하여
너희를 벌하리라, 하셨느니라.](암3:2). 오랫동안
주님의 심판이 집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에 대해
경고해도 이들은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까지 오게 된 것은 현장감을 살려서
이들의 영적 각성을 유발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전해지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귀가 울릴 것입니다. 귀가
울린다는 것은 엘리의 집이 파멸될 때(삼상3:11), 예루살렘의
파멸에 대해서 주님이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무릎이 떨린다.
간담이 서늘하다. 귀가 울린다와 같은 말은 모두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 잡힐 때 쓰는 표현입니다. 주님은
므낫세가 극심하게 범죄할 때 심판을 선포하셨는데, 듣는
이들의 두 귀가 울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니, 보라, 내가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에 이 같은 재앙을 내리리니 누가 그것을
듣든지 그의 두 귀가 울리리라.](왕하21:12). 오늘날
성도들은 어디에서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무슨 말씀을
들어야 깨달음을 얻고, 깊은 회심을 경험하게 되겠습니까?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교회로 불러모으십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요, 터전입니다(딤전3:15).
4-6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곳을 멀리하였으며 이곳에서
자기들과 자기 조상들과 유다의 왕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고 무죄한 자들의 피로 이곳을 채웠음이요,
또 그들이 바알의 산당들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불로
태워 바알에게 번제 헌물로 바쳤음이니 이것은 내가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한 바가 아니니라. 그러므로,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하지 아니하고 살육 골짜기라 하리라.
[주]가 말하노라.](4-6). 하나님은 이들이 행한 죄에 대해서
쉽고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둘째, 이곳을 버렸습니다. 셋째,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고 무죄한 자들의 피로 이곳을 채웠습니다. 넷째,
바알의 산당을 건축했습니다. 다섯째, 자기 아들들을 불로
태워 바알에게 번제 헌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버리면
나머지는 모두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버리면 교회를 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마음에 신앙이 사라지면, 눈은 성경에서 멀어지고 몸은
교회에서 멀어집니다. 하나님을 버리면 성전을 멀리하게
되고,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을
잡아죽이거나 박해를 가합니다. 1-2-3의 현상은 같이
다닙니다. 우리 주위에 교회를 강하게 비판하고 욕하고,
목회자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인 것처럼 말하지만 대부분은 하나님을 버린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자들은 교회를 멸시합니다.
하나님을 버린 빈자리는 그냥 비어 있지 않습니다. 마음이
청소되면 더 악한 마귀들이 들어오는 것과 마찬가지로(마12:45,눅11:26),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의 빈 자리는 언제나 우상 숭배로 가득
차게 마련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한 것도, 말씀한 것도,
생각한 것도 아닌 일이라면 타락한 마음의 상상에서 나온
것일 뿐입니다(5). 마음의 악한 상상대로 행동하는 것은
마음과 생각 속에 하나님을 버린 결과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결과입니다. 말씀의 조명을 받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기 마음의
상상대로, 자기 고집대로, 멋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대신 바알 산당을 건축해서 우상을 숭배하고,
분향했으며, 의를 행하는 대신 무죄한 피를 흘렸습니다.
무죄한 피란 순교자들의
피를 말합니다. 이는 거짓 대언자들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대언자들, 제사장들을 잡아죽인 것을 말합니다. 바알 숭배를
했던 왕들은 예외없이 모두 종교 박해자였습니다. 므낫세를
비롯한 악한 왕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므낫세가 [주]의 눈앞에서 악한 것을 행하여
유다로 하여금 범죄하게 한 그 죄 외에도 또 무죄한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왕하21:16). 그래서 주님은 이 일을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것은 그가
흘린 무죄한 피로 인함이었으니 이는 그가 무죄한 피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주께서 이 일을 용서하려
하지 아니하시니라.](왕하24:4).
무죄한 피란 희생물로
드려진 아이들의 피를 말합니다. [무죄한 피 곧 자기
아들딸들의 피를 흘려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희생물을
드려서 그 땅을 피로 오염시켰도다.](시106:38). 본래
왕이나 제사장들은 이런 자들을 잡아서 이스라엘 땅에서
제거하는 것이 임무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들을 혼내
주거나 벌하지 않았습니다. 공공연히 백주 대낮에 아이를
잡아 희생물로 드리는 일이 자행되었지만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도, 경고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상속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게 할지니
이와 같이 하면 그 피가 네게 돌아가지 아니하리라.](신19:10).
만약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하는 자들은 마땅히 사형에 처하게
하였습니다(신19:13, 21:9). 말씀을 버린 결과는 끝없는
타락이요, 마귀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 뿐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면,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것이며, 재앙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너희는
분명히 알지니 너희가 나를 죽이면 분명히 너희가 무죄한
피를 너희와 이 도시와 그 거주민들에게 돌리는 것이니
이는 진실로 [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사 이 모든 말씀을
너희 귀에 말하게 하셨음이니라, 하니라.](렘26:15).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들의 죄악을 용서해 주실
것을 구했고, 스데반 자신을 죽임으로 무죄한 피를 흘리는
그들의 죄악을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 주시기를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죄악으로 기울고, 타락한 사람들은
마치 피 맛을 본 짐승들처럼 계속해서 피를 흘리기를
좋아합니다. 죄는 말씀으로 대적하지 않으면, 성령으로
죽이지 않으면 사람의 기질이 되고, 성품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네 눈과 네 마음은 오직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것과
학대와 폭력만을 바라며 그것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렘22:17).
백성들의 원로들,
제사장의 원로들은 힌놈의 골짜기에서 전하는 예레미야의
말이 무슨 말인지, 자기들이 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범죄 현장이었습니다. 힌놈의
골짜기는 우상들에게 아이들을 불로 태우는 희생 제단이
있었고, 그 곳에는 많은 아이들이 뼈가 묻혔습니다.
인신공양은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요, 살인자(요8:44)인
마귀에게 사로잡힌 인간들의 종교 의식입니다. 인신공양은
가나안 족속들에게는 옛부터 내려오던 종교 의식이었습니다(왕하16:3).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 일에 대해 엄히 명령을 주셨습니다.
[너는 결코 네 씨 가운데 하나라도 몰렉을 위하여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지 말고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주]니라.](레18:21). 그러나 당시 유대에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있는 도벳에다 바알과 몰렉을 위한
산당을 만들어 인신 공양을 위한 제사를 드렸습니다(7:31,
32:25). 이 얼마나 황당한 노릇입니까? 진리를 버린 자들의
영적 상태는 인간을 가장 멸시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종교
행위로 전락하고 맙니다.
주님은 이들의 범죄의
현장에서 이들이 행한 죄에 대한 심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힌놈의 골짜기, 도벳이란 지명 대신 ‘살육의 골짜기’란
이름으로 지명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끔찍한
그런 이름입니다.
7-9절입니다. [내가
이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을 무효가 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원수들 앞에서 칼에 쓰러지게 하며 또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쓰러지게 하고 그들의 사체(死體)를
하늘의 날짐승과 땅의 짐승들에게 먹이로 주며 또 이 도시를
황폐하게 만들고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곳의 모든
역병으로 인하여 거기를 지나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을
것이며 또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아들딸들의 살을 먹게 하리니
그들의 원수들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들이 그들을
포위하고 궁핍하게 할 때에 그들이 각각 자기 친구의 살을
먹으리라.](7-9). 하나님은 백성들의 원로들, 제사장의
원로들 앞에서 내가 이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counsel)을
무효가 되게 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유다는 무슨
작전을 세우고, 전략을 수립하고, 전쟁을 계획할지라도
하나도 성공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다 허무하게 무너지고,
패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사람의 계획,
생각, 작전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법입니다. 마음의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일의
성취는 주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벌하시기로 작정한
악인들의 계획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전을 짜고 장기적인
전략을 수립하며,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고,
계획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을 때 우리는 어디서부터 계획이
잘못되었는가? 정보가 잘못되었는가? 실패의 원인을
생각하고 분석하게 됩니다. 하지만 항상 생각해 보아야 할
가장 큰 고려 사항은 나의 계획, 우리의 생각, 작전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지, 아니면 우리의 계획과 생각 위에
주님의 저주가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복
주시지 않는 어떤 일의 계획도 성공할 수 없고, 형통할 수
없습니다.
· 마음이 교만하면 무슨
계획을 세워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교만한 자는
다 [주]께 가증한 자니 그가 손에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잠16:5).
· 사악한 자의 연합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사악한 자는 손에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잠11:21a).
· 가난한 자를 조롱하고,
재앙들을 즐거워하는 자는 무슨 계획을 세워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만드신 이를 모욕하는 자요, 재앙들을 즐거워하는 자는 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잠17:5).
· 거짓 증인이 되거나
거짓말하는 자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잠19:5).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하는 자는
망하리라.](잠19:9). 이런 것들은 주님이 도저히 복을
내리실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완벽한 계획을 세웠다 해도
주님이 무효가 되게 해 버리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일들을 [주]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생각하는 것들이 굳게 세워지리라.](잠16:3).
사람의 명철을 신뢰하지 말고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잠3:5). 주님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주]시니라.](잠16:9),
[사람이 가는 것은 [주]께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
길을 깨달을 수 있으리요?](잠20:24).
이들이 이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 모여서 무슨 의논과 대책 회의를 해 보아야 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회개하고 주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7-9절의 말씀은 유다 역사에 몇 차례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 내릴 저주 가운데 이 조항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너희가 너희 아들들의 살을 먹을
것이요, 너희 딸들의 살을 먹을 것이며](레26:29). 주님은
‘죄형 법정주의’로 미리 말씀하신 대로 재앙과 복을
내리십니다. 율법을 알면 율법의 저주가 집행되는 무서움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상징적으로, 형식적으로,
윤리적 가이드 라인으로 정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법치주의 국가에서 집행하는 법보다 더 엄격하고 무섭게
집행됩니다. 신명기 28:53-57, [네 원수들이 너를 에워싸고
곤경에 빠뜨려 괴롭게 하므로 네가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네 아들딸 곧 네 몸의 열매의 살을 먹을 것이니라. 너희
가운데 유순하고 연약한 남자라도 자기 형제와 자기 품의
아내와 남아 있는 자기 자녀들에게 눈을 악하게 뜨고 자기가
먹는 자기 자녀들의 살을 그들 중 누구에게도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원수들이 네 모든 성문에서 너를
에워싸고 곤경에 빠뜨려 괴롭게 하므로 그에게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기 때문이며 또 너희 가운데 유순하고 연약한
부녀 곧 유순하고 연약하여 자기 발바닥을 땅에 대려 하지
아니하던 자라도 자기 품의 남편과 자기 아들딸에게 눈을
악하게 뜨고 자기 다리 사이에서 나온 어린것과 자기가 낳게
될 자식을 바라보리니 이는 네 원수들이 네 성문에서 너를
에워싸고 곤경에 빠뜨려 괴롭게 하므로 그녀가 모든 것이
부족하여 은밀히 그들을 먹을 것이기 때문이니라.](신28:53-57).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되고,업신 여겨졌습니다. 유난히
타락하고 범죄한 인간들일수록 인간 본성의 선함을
믿습니다. 아무리 극단적인 상황이 와도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인들은 저마다 자신의 선함을
외칩니다(잠20:6).
죄인일수록, 악하고
타락한 사람일수록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신성, 인간의
내적 본성의 선함을 주장합니다. 죄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지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며,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열왕기하 6:26-30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이 성벽 위로 지나갈 때에 한 여인이 그에게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도우소서, 하니 왕이 이르되, 주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창고 마당에서 나는
것으로 하랴? 아니면 포도즙 틀에서 나는 것으로 하랴? 하고
또 이르되, 너를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니 그녀가
이르되, 이 여인이 내게 말하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 그를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우리가 내
아들을 삶아 먹었나이다. 다음 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놓으라. 우리가 그를 먹으리라, 하나 그녀가 자기 아들을
숨겼나이다, 하니라. 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그가 성벽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보라,
왕이 그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왕하6:26-30).
사마리아에 기근이 들고 시리아가 쳐들어왔을 때 인간은
자신의 배가 신이 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4:10을 보십시오. [내 백성의 딸이 멸망할
때에 인정 많은 여인들의 손이 자기 자식들을 삶아 음식으로
삼았도다.](애4:10).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거두어지고,
복이 임하지 않으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으며, 이
세상은 지옥의 모습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재앙을
피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을 대적할 계획은
없으며, 하나님의 뜻을 무효로 할 수 있는 모사는 없습니다.
[어떤 지혜나 명철이나 계략으로도 [주]를 대적하지
못하느니라.](잠21:30). 하나님보다 강한 용사도 없으며,
하나님을 이길 신(神)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연합하여 서로
돕고 협력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닙니다. 지금 세계는
통합을 외치고 있습니다. 모든 부분에서 국제 협력이
강화되고, 심지어 종교까지 통합 운동이 급속한 물살을 타며
대세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주를
대적해서 이길 수는 없습니다. [오 백성아, 너희가 서로
연합할지라도 산산조각이 나리라. 먼 나라들에서 온 자들아,
너희가 다 허리를 동여맬지라도 산산조각이 나리라. 너희가
허리를 동여맬지라도 산산조각이 나리라.](사8:9).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방법은 매우 단순합니다. 겸손히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가 만일 주께로 다시 돌아오면
너희 형제들과 너희 자녀들이 그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간
자들 앞에서 불쌍히 여김을 받아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임이라. 주 너희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시므로 너희가
그분께 돌아오면 자신의 얼굴을 돌이켜 너희를 떠나게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였더라.](대하30:9). 하나님은
누구든지 회개할 때 그 사람을 향한 계획을 돌이키십니다.
10-12절입니다. [그런즉
너는 너와 함께 가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그 병을 깨뜨리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깨뜨리면 다시 온전하게 할 수
없음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도시를 무너뜨리리니 사람들이
묻을 자리가 없을 때까지 그들을 도벳에 묻으리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이곳과 이곳 거주민들에게 이같이 행하여 이
도시를 도벳 같게 하리라.](10-12).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사
온 질그릇 병을 사람들 앞에서 깨뜨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깨어진 질그릇이 바로 유다와 예루살렘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토기장이 손에 있던 진흙은 언제든지
다른 그릇으로 다시 만들 수 있지만 이미 만들어진 그릇은
깨어지면 다시 온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질그릇 병이
예레미야의 손에서 쉽게 깨지듯이 유다는 하나님의 손에서
쉽게 깨질 수 있습니다. 질그릇 병이 긁히거나 흠집이 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깨뜨려 진 것은 유다의 완전한 멸망을
말합니다. 유다는 자신들이 놋그릇이나 되는 줄로 생각할지
몰라도 그들은 질그릇에 불과한 것입니다. ‘도벳’이란
곳은 힌놈의 골짜기 안에 있는 지명입니다. 주님은 도벳에
대해 두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첫째는 유대인들의 최후의
무덤 자리입니다. 땅위에 묻을 곳이 없게 됨으로써 골짜기에
다 묻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전쟁의 살육이 보여 주는
참혹함입니다. 처리 곤란한 시체들을 골짜기에 던져서 합장(合葬)해
버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루살렘을
도벳처럼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도벳에서 우상에게
바친 희생물이 가득했으므로, 이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심판하셔서 하나님의 심판의 희생 제물로 삼아 버리실
것입니다. 요시야 왕은 이곳을 사람의 뼈들로 가득 채우게
해서 이곳에서 다시는 인신 제물을 드리지 못하게 했습니다(왕하23:14).
그런데 예루살렘이 마치 도벳과 같이 죽은 시체들로 가득
차고, 뼈들이 널리게 됨으로써 누구나 혐오할만한 장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과 찬양이 되어야 할
도시가 졸지에 거름무더기, 쓰레기 장소처럼 되었습니다.
13-15절입니다. [예루살렘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이 도벳의 장소같이 더럽혀지리니
이는 그들이 모든 지붕 위에서 하늘의 모든 천체(天體)에게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음료 헌물을 부었음이니라, 하라,
하시니 이에 예레미야가 [주]께서 자기를 보내사 대언하게
하신 도벳에서 돌아와 [주]의 집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주]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도시를 향하여 선포한 모든
재앙을 이 도시와 그 모든 마을에 내리리니 이는 그들이 내
말들을 듣지 아니하려고 자기 목을 굳게 하였음이라,
하였더라.](13-15). 예레미야는 도벳에서 말씀을 전한 후에
다시 주의 전의 뜰에 서서 모든 백성들에게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도벳에서 전한 말씀을 그대로 백성들에게
전했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주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아무도 입을 열어 다가올 심판에 대해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예레미야 혼자만이 전할 뿐입니다.
예루살렘의 집들, 왕들의
집들이 도벳의 장소같이 더럽혀 지는 이유는 그들의 집이
우상 숭배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가옥 구조는
지붕이 평면이었기 때문에 그곳은 모임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기도의 장소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지붕에서
기도하다가 주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행10:9). 경건한
사람들에게 지붕은 기도의 장소였지만 타락한 유대
거주민들에게 지붕은 천체를 숭배하는 우상 숭배의
장소였습니다. [지붕에서 하늘의 무리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또 주께 경배하며 주를 두고 맹세하면서 동시에
말감을 두고 맹세하는 자들과](습1:5). 유대의 악한 왕들은
거기에서 제단을 쌓기도 했습니다. [유다의 왕들이 아하스의
다락방 꼭대기에 세운 제단들과 므낫세가 주의 집 두
뜰에 세운 제단들을 왕이 다 헐고 거기서 그것들을 부수어
그 가루를 기드론 시내에 쏟아 버리고](왕하23:12). 지붕
위에서 벌어진 각종 우상 숭배의 죄악은 그 집에 주님의
심판을 불러 들였고, 왕들의 집들은 도벳처럼 더럽게
만들었습니다. 성도의 가정은 교회와 마찬가지로 경건한
예배의 처소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를 제사장으로 아내와
자녀들을 하나님의 양무리로 양육하는 영적 환경이
조성되지 않고, 영적 유해 환경이 된다면 그 가정은 주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가정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가족
간에 영적 유대 관계를 강화하는 영적 삶의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지붕 위에서 각 가정이 행한대로 심판을
하십니다. 우리는 기도의 골방과 성경을 읽는 골방이
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백성들은 아무도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결국 말씀하신 모든 재앙이 그들 위에 임하고 말았습니다.
목을 굳게 하는 자들은 주님께서 구원할 방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을 굳게 하는
자는 갑자기 멸망을 당하되 구할 길이 없으리라.](잠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