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예레미야 21:1-14

요절: 예레미야 21:8


21장은 유대 왕조의 멸망을 향해
급격하게 달려가는 역사적 시점입니다. 시드기야는 유대
왕조의 마지막 왕입니다. 유다의 마지막 세 왕은 모두
바빌론 느부갓네살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여호야김
시대에 느부갓네살의 침공을 받아 1차 포로들이
잡혀갔습니다(606B.C). 여호야김 왕은 3년 후에
느부갓네살에게 반란을 일으켰지만 주님께서는 갈대아의
이웃 나라들인 시리아, 모아, 암몬 족속들을 통해 유대를
파괴하도록 보내셨습니다(왕상 24:1-4). 이 전쟁은 5년 동안
계속되었고 여호야김 왕은 치욕스런 죽음을 맞이했습니다(렘22:17-19).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이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주 앞에서 악을
행하고, 바빌론의 손에서 벗어나려다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 가고 말았습니다(왕하24:12-16). 이것이 2차 포로들로서
거의 대부분이 잡혀간 시기였습니다(598 B.C). 그는 왕이
되어서 조상들이 행한 것과 같이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으므로 3개월밖에 치리하지 못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B.C. 598년에 예루살렘을 2차 침공해서 여호야긴을
폐위시키고, 왕자들, 고관들, 장군들을 비롯해서 10,000명의
포로들을 바빌론을 데려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1,000명의
장인들, 대장장이들도 모두 데려갔으므로 예루살렘에는
가장 가난한 극빈자들만 남게 되었다(왕하24:8-16). 이때를
흔히 포로의 수와 성격으로 인해 “포로기간”이라고
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의 숙부인 맛디야를 왕으로
삼고 그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쳐 주었습니다(왕하24:17). 그는
11년을 통치했습니다. 시드기야는 주의 눈에 악한 일을
행하고 치리 9년째 바빌론 왕을 대적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다시 예루살렘을 포위했으며, 2년 후(B.C.587)에
예루살렘의 성전과 도시를 파괴했습니다. 이때부터 ‘유대
국가’는 공식적으로 지상에서 없어졌습니다(왕하 24:17-20,
25:1-21). 예레미야가 예언한대로 예루살렘 거민들은 모두
흩어졌으며, 그 도시는 70년간 폐허로 남게 되었습니다(렘25:11).
느부갓네살은 B.C. 606년에 왕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이방인들의
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최초로 전세계 제국을 제패한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지금 예레미야 21장의 본문은
시드기야의 통치 말년 때입니다. 시드기야는 대언자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고 여전히 악을 행함으로써 유다의
종말을 고한 왕입니다. 전임 왕들로부터 아무런 영적 역사적
교훈을 배우지 못한 왕은 주님 앞에서 더욱 악을
행하였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주]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시드기야 왕이 멜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그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바빌론 왕 느부갓레살이 우리를 치려고
전쟁을 일으키니 원하건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주]께
물으라. [주]께서 자신의 모든 놀라운 일들에 따라 우리를
다루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 올라가리라
, 하니라.
](1-2).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가 배반하자마자 바로 군대를 몰고
왔습니다. 이때가 시드기야 통치 제 9년 8월 11일이었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시드기야의 통치 제구년 시월
곧 그 달 십일에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자기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을 치고 사방으로 요새들을 쌓으매 예루살렘이
시드기야 왕 제 십일년까지 포위되더니
](왕하25:1). 지금
시드기야는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바빌론 왕을 이길 수
없음을 알고 바스홀과 스바냐를 보내어서 예레미야에게
주님께 이 일에 대해서 물어 보도록 했습니다. 악한
왕일지라도 자신이 곤경과 위험에 처하면 한 때 자신이
경멸하고 반대했던 사람들을 찾아 상담하기를 원하고
기도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징벌과 심판, 저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회개 없이
자신을 찾는 자들을 은혜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신앙을 가진
자들,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이 악을 행할 때 주님은
그들에게 시련을 보내시며, 징계를 보내십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통해 주님이 놀라운 일을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했고, 그런 대답을 듣기를 열망했습니다. [원하건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주]께 물으라. [주]께서 자신의 모든 놀라운
일들에 따라 우리를 다루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 올라가리라,
하니라.
](2).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는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내었습니다. 밖은
바빌론 군사들로 포위되어 있습니다.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처한 그가 한 일은 예레미야를 통해 주께 묻고, 주의
은혜와 도우심을 얻었으면 하는 바램뿐이었습니다. 사실
그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회개하는 일이요, 마음을 낮추어
겸손해야 했습니다. 그가 이전에 예레미야에게 어떻게
했는지 보십시오. [[주] 자기 하나님의 눈앞에서 악한 것을
행하고 대언자 예레미야가 [주]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전하여도 그 앞에서 자기를 낮추지 아니하였으며
느부갓네살 왕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게
하였으나 그가 느부갓네살을 배반하고 목을 뻣뻣하게 하며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
](대하36:12~13). 그는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나오는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낮추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거절하였고
내 손을 내밀었으나 중시하는 자가 없었으며
](잠1:24).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주님 역시 그들의 기도를 거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이 나를 부를 터이나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그들이 아침 일찍 나를 찾을 터이나
그래도 그들이 나를 발견하지 못하리니
](잠1:28). 주님의
명령, 주님의 약속, 주님의 권고를 듣는 것을 거절한 채
주님께 나의 요구를 들어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시드기야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한
채 주님이 기적을 베풀어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무시하고,
핍박하던 왕이었지만 일이 급박하게 되자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내었습니다. 평화를 외치던 거짓 대언자들이
아무리 많아도 막상 평화 대신 전쟁이 터지자 그가 물을 수
있었던 사람은 예레미야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때로
불신자들은 위기에 처하면 참된 신자를 찾아옵니다. 우리가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우리의 원수들은 평소에는
우리를 박해하지만 그들이 위험에 처할 때 우리를 찾아 와
기도를 부탁하기 마련입니다. 심지어 파라오도 급할 때면
모세와 아론을 찾아 주께 기도하기를 구했습니다. [그런즉
이제 원하건대 내 죄를 이번에 한 번만 /더/ 용서하고 [주]
너희 하나님께 간구하여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
하므로
](출10:17/ 출8:8, 9:28 참조). 불신에 빠졌던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급하면 모세에게 달려와서 주께 간구하여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이 모세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와 당신을 대적하여 말하고 범죄
하였사오니 [주]께 기도하여
이 뱀들이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하매 이에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니
](민21:7).
이런 예는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을 알려
주었지만 거부하고 왕을 구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위기가 닥쳤을 때 그들은 사무엘에게 달려왔습니다. [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주]
당신의 하나님께 기도하여 우리로 하여금 죽지 않게 하소서.
이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이 악을
더하였음이니이다, 하니라.
](삼상12:19). 산당에서 우상을
하나님이라고 섬기며 제단을 분향을 하던 여로보암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대언자를 잡으라고 했다가 자신이
위험에 처하자 어떻게 했습니까? [이에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응하여 이르되, 이제 [주] 곧 네 하나님의
얼굴에게 /은혜를/ 간구하고 나를 위해 기도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하라
,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주]께 간청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게 되어 전과 같이 되니라.
](왕상13:6).
이것이 사람입니다. 시드기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히스기야의 예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전에
아시리아 왕이 유대를 포위했다가 하룻밤만에 십팔만 오 천
명이 전멸함으로 유대를 건지신 일이 있습니다. [그 밤에 [주]의
천사가 나아가 아시리아 사람들의 진영에서 십팔만 오 천
명을 치매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니, 보라, 그들이 다
죽어 송장이 되었더라.
](사37:36). 하나님이 히스기야 왕 때
기도함으로 이사야를 통해 말씀을 주시고, 앗시리아의
대군을 물리치신 것처럼 동일하게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을
주시고, 바빌론 군대를 물리쳐 주시도록 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히스기야처럼 행동하지 않고 히스기야와 동일한
결과를 얻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는 히스기야처럼 기도하지
않았고, 겸손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주님을 신뢰하지도 않았으면서도 동일한 열매를 얻고자
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임이라
.](갈6:7).


3-7절은 시드기야의 원하는 답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시드기야가 기대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답변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찾아온 왕의
사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3이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시드기야에게 이같이
말할지니라. 4[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성벽 밖에서 너희를 에워싼 바빌론 왕과
및 갈대아 사람들과 싸우는 데 쓰는 너희 손의 무기들을
내가 뒤로 돌릴 것이요, 또 그들을 이 도시 한가운데로
모아들이리라. 5내가 친히 편 손과 강한 팔로 곧
분노와 격노와 큰 진노로 너희와 싸울 것이며 6
내가 사람이나 짐승이나 이 도시에 거하는 것들을 다 치리니
그들이 심한 역병으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7[주]가
말하노라. 그 뒤에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과
백성과 및 역병과 칼과 기근을 피하여 이 도시에 남은
자들을 바빌론 왕 느부갓레살의 손과 그들의 원수들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넘겨주리니 그가 칼날로
그들을 치되 그들을 아끼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3-7).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바빌론을 향해 든 무기가 바로 자신들을 찌르는
무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편에 서서 바빌론 군대와 싸우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백성들인 유대와 싸우십니다. 시드기야는 바빌론의
군대 뿐 아니라 하나님과 상대하여 싸워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바빌론 군대는 칼로 하나님은 심한
역병으로 치십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그나마
살아 남은 자들은 주님께서 친히 원수들의 손에
넘겨주심으로 포로로 삼아 버리십니다. 주님은 유다의
완전한 패망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5내가 친히 편 손과 강한
팔로 곧 분노와 격노와 큰 진노로 너희와 싸울 것이며 6
내가 사람이나 짐승이나 이 도시에 거하는 것들을 다 치리니
그들이 심한 역병으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5-6). 이는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이스라엘의 편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던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대적하여 친히
싸우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민족적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들을
위해 싸우셨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병거를 몰고 추격할
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조용히 있을지니라, 하니라.
](출14:14).
그들이 가나안을 앞에 두었을 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주] 너희 하나님 그분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임이라, 하였노라.
](신3:22).
주님은 여호수아를 통해 외적들을 항구적으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는데, 그 중심에는 주님이 함께 하시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천 명을 뒤쫓으리니 이는 [주] 너희 하나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약속하신 것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수23:10). 그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시겠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하게
되셨습니까?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드기야는 주님의 말씀대로
원수들 앞에서 두 눈이 뽑히고, 놋 족쇄로 결박을 당하여
바빌론으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28:20).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첫째,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친구가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
.](약4:4).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할 때,
세상과 일치할 때, 세상과 동화될 때, 세상과 친구 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화해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원수로 돌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시드기야처럼 되고
맙니다. 둘째, 하나님이 정하신 권세에
불복종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권력에 거역하는
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거역하는 것이니 거역하는
자들은 스스로 정죄를 받으리라
](롬13:2)/resist. 하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권력에 대적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로 보시며, 정죄하십니다. 셋째,
교만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대적하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더 많은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
,
하시느니라.
](약4:6)/resisteth. [젊은 사람들아,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 자신을 낮추어 장로에게 순복하고 참으로 다
서로 복종하며 겸손으로 옷 입으라. 이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니라.
](벧전5:5)/resisteth. 넷째,
우리가 주의 질투를 불러일으킬 때 주님은 우리를
대적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우상을 섬길 때
질투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주}의
질투를 일으키겠느냐? 우리가 그분보다 강하냐?
](고전10:22).
하나님은 마음 가운데 한 분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사랑할 때 질투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네 가지의 경우에는
우리를 위해 싸우시지 않고 우리를 대적하여 싸우십니다.
특히 우리가 교만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대적하십니다.


몇몇 정신없는 신자들은 자신이 주님
외의 것에 정신이 팔려 있으면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를 외치고, 툭하면 ‘사랑의 하나님’을
읊조리지만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요일4:16)가
아니라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시니라’(히12:29)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8-10절은 시드기야 왕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8절입니다. [너는
또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8).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보라, 내가 이 날 생명과
복과 또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신30:15). 하나님은
언제나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생명과 복,
사망과 화를 앞에 두시고 우리로 하여금 선택하게 하십니다.
흔히 구원 예정론, 운명 예정론자들은 인간의 의지와 선택을
무시하고 오직 섭리와 은총만 외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의지와 선택을 존중하시며, 우리의 자유 의지에 따라
복과 화, 생명과 사망을 나누십니다. 생명과 복은 어떻게
옵니까? [이것은 곧 내가 이 날 네게 명령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모든 길로 걸으며 그분의 명령과
법규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살고
번성(蕃盛)할 것이요, 또 [주] 네 하나님께서 네가 가서
소유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니라.
](신30:16). 생명을
얻는 길은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모든 길로 걷고, 명령과
법규와 법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망과 화는 우상을
숭배할 때 옵니다.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내가 이 날 너희에게 선언하나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요, 너희가 요르단 /강/을 건너가 소유할 땅에서 너희
날들이 길지 못하리라
.](신30:17-18). 선택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몫이듯이, 선택은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모두 악을 버리고 선(善)을 택할 줄 알기를
원하십니다. 살기 위해서는 생명을 택해야 합니다. 잘 살기
위해서는 복을 택해야 합니다. [내가 이 날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로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또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나니 그러므로 너와 네 씨가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며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며 또 그분을 굳게 붙들라
. 이는 그분이 네
생명이시요, 또 네 날들을 길게 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니
이로써 네가 [주]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거하리라.
](신30:19-20).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한 가지만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한 가지만 두셨다면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에덴의 동산에서부터 지금까지 항상
우리 앞에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를 두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깐 하나님의 명령과
인간의 의무란 측면에서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에덴의
한 중앙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 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창2:17)였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명령을 알았습니다. 문제는 알고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책임이 따랐습니다. 노아에게 주님은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노아는 그 명령대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사람들은 방주 안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짓는 120년 동안 의를 전파했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방주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한 책임은 물에 빠져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주님은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바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인간의 책임은 그대로 순종하고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순종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다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살아 남으려면
주홍실 끈을 묶어 내려야 했습니다(수2:18). 광야에서 뱀에
물린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뱀을 쳐다 보아야 했습니다(민21:8).
주님은 보라고 명령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명령입니다. 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불과
유황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기 전 롯은 피해야 했습니다.
피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 역시 죽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창19:17). 주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며, 그
명령을 준행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주님이 주신 모든
명령은 너무나 단순하고 쉽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먹지 않는
것이 어렵습니까? 가장 쉬운 일입니다. 노아가 만들어 놓은
방주에 들어오는 일이 어렵습니까? 그냥 들어가면 될
일입니다.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일이 어렵습니까?
주홍색 실을 메다는 것이 어렵습니까? 모세가 만든 놋뱀을
쳐다 보는 일이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까? 소알 성으로 빨리
도망가는 일에 어떤 장애가 있었습니까? 그냥 달려가면 될
일입니다. 오늘날 주님은 무엇이라고 명령하십니까? 복음을
믿으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상의 선입니다. 믿으라. 이것이
어렵고 힘든 일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모진 고초와
수치를 당하는 일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저와
여러분은 이미 완성된 그분의 사역을 마음으로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28,29을 보십시오. [28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들을
하리이까? 하매
](요6:28).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6:29.). 세상 사람들이
해야 할 크고도 중요한 첫 번째 일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려고 하기에 앞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먼저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들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기에 앞서 무엇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 앞에 놓인
선과 악 중에 한 가지를 택해야 합니다. 복과 저주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며,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중 한 가지를
택해야 합니다. 바르게 택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공부도 하고 인생 경험도 쌓고, 충고도 듣습니다. 바른
선택의 지혜를 성경은 명철이라고 부릅니다. 선(善)을
택하기 위해서는 악을 거절해야 합니다. 의(義)를 택하기
위해서는 불의를 미워해야 합니다. 성령의 일을 택하기
위해서는 육신의 일을 죽여야 합니다. 진리를 택하기
위해서는 죄를 혐오해야 합니다. 올바른 선택을 위해서
우리는 꾸준히 말씀을 먹고 성령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가
버터와 꿀을 먹음으로
악을 거절하며 선을 택할 줄 알게
되리니
](사7:15).


9절입니다. [이 도시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역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
사람들에게 나아가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의 생명이
그에게 탈취물이 되리라
, 할지니라.
](9). 하나님은 재앙,
저주를 선포하시면서 동시에 백성들이 살 길을 열어
주셨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갈대아 사람들에게 나가서
투항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예레미야를 백성들에게
매국노요, 민족의 배신자로 만드는 대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이 살 길입니다. 때로 “항복하느니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다 죽는다”는 말이 용기인 것 같지만 하나님은
항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적인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은
다릅니다. 바빌론은 용기를 내어 싸워야 할 상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의 도구로 보내신 자들이기 때문에 항복하는
길이 징계를 받아 들이는 길입니다.


10절입니다. [이는 내가 복이 아니라
화를 내리려고 이 도시를 향해 내 얼굴을 들었음이라. [주]가
말하노라. 이곳이 바빌론 왕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가 이곳을
불로 태우리라.
](10). 주님은 화를 내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얼굴을 드셨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얼굴을 드셨습니다. 그들이 행한 일을 벌 주시기 위해,
화를 내리시기 위해 얼굴을 드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는
{주}의 눈은 의로운 자들 위에 거하며 그분의 귀는 그들의
기도에 열려 있으되 {주}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대적하기 때문이니라.
](벧전3:12). 주님을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악(재앙·evil)을 내리시기 위해 얼굴을 드십니다.


우리 주님은 언제 얼굴을 드시는가?
주님은 이미 모세를 통해서 미리 말씀해 주셨는데, 이는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란 기본적인 형법의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불같은 율법(신33:2)이 그들에게
있었지만 그들은 철저히 이 율법을 무시함으로 공의로우신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얼굴을 드셨던 것입니다.


· 피를 먹을 때. 하나님은 피를 먹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집 사람이나 너희 가운데
거하는 타국인 중에 누구든지 어떤 피를 먹으면 내가 내
얼굴을 들고 피를 먹는 그 혼을 대적하여 그를 자기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렘17:10).


· 자녀를 몰렉에게 바칠 때. [나도
내 얼굴을 들고 그 사람을 대적하여 그를 자기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자기 씨 중에서 /하나라도/ 몰렉에게
주어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이름을 욕되게 하였음이라.
](레20:3).
주님은 자식을 우상들에게 인신 공양으로 바칠 때 그들을
향해 얼굴을 드시고, 대적하십니다.


· 이웃이 행하는 이런 악을 보고도
용납하거나 따라할 때. [그가 자기 씨 중에서 /하나라도/
몰렉에게 줄 때에 그 땅의 백성이 그 사람을 눈감아 주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내 얼굴을 들어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대적하고
또 그와 그를 따라 음행의 길로
가며 몰렉과 행음(行淫)하는 모든 자를 그들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
.](레20:4~5).


· 부리는 영, 마술사들을 따라 갈 때. [부리는
영을 지닌 자나 마술사를 따라 음행의 길로 가는 자에게는
내가 내 얼굴을 들고 그 혼을 대적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
.](레20:6).


· 주의 법규를 멸시할 때, [그러나
너희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고 내 법규를 멸시하며 너희 혼이 내 법도를
몹시 싫어하여 내 모든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고 내 언약을
깨뜨릴진대 나 또한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두려움과 폐병과 열병을 내려 눈을 침침하게 하고
마음의 고통을 일으킬 것이요, 너희가 헛되이 씨를 뿌리리니
이는 너희 원수들이 그것을 먹을 것이기 때문이며 내가 내
얼굴을 들어 너희를 대적하리니 너희가 너희 원수들 앞에서
죽임을 당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이 너희를 통치할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레26:14~17).


11-14절은 유다 왕의 집에 관한
말씀입니다. [또한 유다 왕의 집에 대하여는 이르되,
너희는 [주]의 말씀을 들으라
.](11). 유다 왕의 집은 본래
다윗의 언약에 따라 영원한 왕조가 될 수 있었던 그런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 왕 재위 11년에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왕좌에
오르기까지 다윗의 집에는 더 이상 왕위에 앉을 자가 없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그런즉 이제 주께서 종의 집에 복
주시기를 기뻐하사 이 집이 주 앞에 영원토록 있게 하옵소서.
오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 일을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복으로 종의 집이 영원토록 복을 받게 하옵소서
, 하니라.
](삼하7:29)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받은 복은 다윗의 육신의
자녀들이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606 B.C에 완전히 왕조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는 다윗 왕조의 몰락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므로 [주]가 유다 왕 여호야김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다윗의 왕좌에 앉을 자가 그에게
없겠고 그의 시체는 버림을 당하여 낮에는 열기를, 밤에는
서리를 맞으리라.
](렘36:30).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 생전에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할지니 이는 그의 씨 가운데
형통하여 다윗의 왕좌에 앉아 유다 안에서 다스릴 자가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렘22:30).


12절은 멸망 가운데 한 줄기 빛과 같은
말씀입니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에 심판을 집행하며 학대하는
자의 손에서 노략 당한 자를 건지라
.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행위가 악하므로 나의 격노가 불같이 나가서 태우리니
능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12). 주님은 적이
포위하고 있는 이 순간이라도 심판을 집행하고 노략당한
자를 건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오, 다윗의 집이여]라고
부르신 것은 다윗의 언약을 기억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행한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통치하며 자기의 온 백성에게
공의와 정의를 행하더라.
](삼하8:15). 다윗은 솔로몬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의
법도를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義)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그가 주의 백성을 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재판하리니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화평을 가져다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그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재판하고 궁핍한 자의 자녀를 구원하며 학대하는 자를
산산조각 내리로다
.](시72:1~4). 이것은 바로 다윗이 자기
아들들, 왕이 될 후대들을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역대
왕들 가운데 이렇게 행한 왕은 예외없이 복을 누렸고, 적을
물리쳤으며, 나라는 강성했습니다. 시드기야는 지금 바빌론
군대를 상대하기에 앞서 바른 재판을 하고, 학대받는
백성들을 건져 내주는 것이 자신의 생명을 위한 길입니다.
정치하는 권력자가 백성들의 편에 서지 않고, 학대자가
되거나 학대자들의 편에 설 때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가장
악용하는 것이며,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너는 아침에
심판을 집행하며”라고 한 것은 심판을 집행하는 일은
늦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까지를
밤이라고 하고, 아침 6시부터 낮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아침에 만나를 내려 주셨고,
성도들은 아침에 나가서 양식을 구해야 했습니다. 주님은
아침에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를 도우십니다. [오 [주]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니 주는
아침마다 그들의 팔이 되시오며
고난의 때에 또한 우리의
구원이 되시옵소서.
](사33:2).


주님은 아침에 성도들을 깨우치십니다.
[{주} [하나님]께서 학식 있는 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하여금 피곤한 자에게 때에 맞는 말을 할 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일깨우시되
나의 귀를 일깨우사 학식 있는 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는도다
.](사50:4). 그래서 우리는 매일 아침
주의 신실함을 맛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신실하심이 크시도다.
](애3:23). 오늘날 올빼미 족이 많고,
새벽 문화가 아닌 저녁, 심야 문화가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새벽을 깨우는 새벽 문화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새벽에 공의를 내어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 /도시의/ 한가운데 거하시는 [주]는
의로우사 불법을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자신의
공의를 빛으로 내어오시며
쇠하지 아니하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습3:5). 왕이 아침 일찍
일어나 심판을 하고, 학대받는 자들의 손에서 백성을
건져내는 일은 주님이 원하시는 금식이며, 주님의 뜻을
행하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 새벽을 깨워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오 골짜기와 평야의 바위에 사는 거주민아,
보라,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말하기를,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로 들어오리요? 하거니와
가 너희 행위의 열매대로 너희를 벌하고 수풀에 불을
놓으리니 그 불이 그 주변의 모든 것을 삼키리라
. [주]가
말하노라
.](13-14). 13절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거짓 대언자들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은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확신으로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행위의 열매대로 너희를 벌하고 수풀에
불을 놓으리니 그 불이 그 주변의 모든 것을 삼키리라.
](14).
성도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대로 갚아 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란 엄중한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주는/
계략이 크시며 일에 능하시니 이는 각 사람에게 그의
길들과 그의 행위들의 열매에 따라 보답해 주시기 위하여

주의 눈이 사람들의 아들들의 모든 길 위에 열려 있기
때문이니이다.
](렘32:19). 주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다
그 행위대로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거나 그들이
강성하게 되는 것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였고, 생각의
열매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하는 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친히 보시는 대로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아 주셨도다.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는 주께서 주의
긍휼을 보이시고 곧바른 자에게는 주의 곧바르심을
보이시며 순수한 자에게는 주의 순수하심을 보이시고
거역하는 자에게는 주의 적대(敵對)하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고난받는 백성은 구원하시나 교만한 눈빛은
낮추시리이다.
](시18:24-27).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에 따라
주님의 손길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경건하고 의롭고, 곧바르고, 순수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자에게는 주의
순수하심을 보이시고 거역하는 자에게는 주의 쓴맛을
보이시리니
](삼하22:2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을 믿음으로 순수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순수한 사람은 자신의 죄와 자신의 죄인됨을 그대로
인정하고 주님의 판결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주님이
제시하는 해결책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가장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죄도 인정하지 않고, 죄인됨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해결책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고 각 사람의 길과 각 사람의 행위의 열매대로 각
사람에게 베푸느니라.
](렘17:10). 주님은 우리의 행위의
열매를 보시지만 먼저 속 중심과 생각을 보십시다. 모든
행위의 열매는 생각의 열매입니다. [오 땅아, 들으라. 보라,
이 백성이 내 말들과 내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거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위에 재앙을 가져오리니 /이것은/
곧 그들의 생각의 열매니라.
](렘6:19). 우리는 건전한
생각의 영을 받아서 마음을 지키고, 주님을 깊이 생각하고,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종이 됨으로써 좋은 열매, 의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성령을 대적합니다. 사악한 자들의 생각은 주께
가증한 것입니다. [사악한 자의 생각들은 [주]께 가증한
것이나 순수한 자의 말들은 즐거운 것이니라.
](잠15:26).
그들의 생각은 불법의 생각입니다. [그들의 발은 악을
향해 달려가며 그들은 무죄한 피를 흘리는 데 빠르고 그들의
생각은 불법의 생각이니라. 황폐와 파멸이 그들의 길에
있으며
.](사59:7). 그래서 우리는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엡4:23).


우리는 모두 열매맺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열매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육신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고, 의의 열매,
화평의 열매를 맺고, 혼을 이겨오는 구령의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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