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예레미야 22:1-30
요절: 예레미야 22:16
22장은 유다의 마지막 왕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전임 왕들로부터 시작하여 유다
역사의 마지막을 장식한 왕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윗 왕조 또는 다윗의 집으로 불리는 유다의 왕들은 아버지
다윗의 왕위(王位)는 계승했지만 그의 신앙은 계승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울 왕조를
멸하시고, 다윗 왕조를 세우셨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왕의 왕국이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 [주]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주]께서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에게 명령하사 자신의
백성의 대장을 삼으셨도다, 하고](삼상13:14). [폐하시고,
다윗을 일으켜 세우사 그들의 왕이 되게 하시고 또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내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그가 내 뜻을 다
성취하리라, 하시고](행13:22). 이런 다윗과는 달리 그의
후손들은 육신적 혈통 외에 아무 것도 다윗의 것을 물려받지
않았습니다. 특히 본문의 예레미야가 경고하는 왕들은 모두
하나님의 마음에 벗어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는 것보다 다윗의 신앙을 이어 받는 것이 훨씬
귀하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유다 왕의 집으로 내려가 거기서 이 말을
전하여 이르기를, 오 다윗의 왕좌에 앉은 유다 왕이여,
너와 네 신하들과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주]의
말씀을 들을지어다.](1-2).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유다
왕의 집, 즉 왕궁으로 가서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다윗의 왕좌에 앉은 유다 왕에게 꼭 전해 줄 말씀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지상의 어떤 민족, 어느 시대의
왕조에도 그렇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지상의 모든 왕좌 가운데 단 한 왕좌에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의 왕좌”입니다.
다윗의 왕좌는 주님이 세우신 왕좌였으며, 이 자리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앉으실 자리이며, 영원토록 통치하실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이미 일찍 대언하기를 [그의 정권과 화평이
번창하여 끝이 없으며 /그가/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군림(君臨)하여 그 왕국을 정비(整備)하고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공의와 정의로 그것을 굳게 세우시리라. 만군의
[주]의 열심(熱心)이 이것을 이루리라.](사9:7)고 메시야
왕국이 곧 다윗의 왕국의 연장선임을 선포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수태 고지를 하면서 [그가 크게 되고 가장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에게 주시리니](눅1:32)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는 다윗의 왕좌를 받으실 왕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다윗의 왕좌는 역사속의 많은 왕조들
가운데 정권을 잡은 어떤 왕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앉으실 왕좌입니다. 이
왕좌에 앉은 왕은 마땅히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굳게
세워야 합니다. 다윗의 왕좌에 앉은 유다 왕은 다윗의
언약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행한대로 해야
합니다.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왕과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그 점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의와 의를 집행하고 노략 당한 자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며 나그네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에게 부당하게 행하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말고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3). 공의(judgement·재판)를
집행하라는 것은 재판을 바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관이십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재판을
굽게 한다면 법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며, 법을 주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재판에 대해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주셨습니다.
1. 여론 재판을 피하라. [너는 군중을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소송에서 재판을 뒤집으려고 다수를
따라 기우는 말을 하지 말라.](출23:2).
2. 가난한 자라고 해서 재판을 뒤집지
말라. [너는 가난한 자의 소송에서 그에 대한 재판을
뒤집지 말지니라.](출23:6).
3. 재판을 공정하게 하라.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고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강력한 자라고 예우하지 말고 오직 의롭게 네 이웃을
재판할지니라.](레19:15).
4. 뇌물을 받지 말라.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고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이는 뇌물이 지혜로운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기 때문이니라.](신16:19).
하나님이 왕을 세우시고, 권위를 주신
것은 이런 목적 때문입니다. 공의와 의를 집행하라!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주신 이유이며, 우리가 순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왕들은 노략 당한 자를 학대자의 손에서 건져야
합니다. 이것이 공의요, 정의입니다. 나그네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에게 부당하게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사회
복지이며, 인권 신장이며, 민주 사회입니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약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오한 뜻을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매우 평범하고 상식적인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일을 시키면 품삯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거짓 증거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가난한 자들과 아버지 없는 자들을
보호하고, 고난 당하는 자들과 궁핍한 자들에게 정의를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시82:3). 나그네를 괴롭히지
말고(레19:33), 선을 행하기를 배우고, 공의를 추구하고,
학대받는 자들을 구제하고, 고아들과 과부들을 변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사1:17). 대부분의 하나님의 뜻은
상식이 통하는 것들이며, 우리의 양심에 새겨져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또 찾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매우 일상적인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지 않고, 평범한
상식적인 일들을 거슬러 행동함으로 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특출난 일, 독특한 일, 특별한 일이 아니라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기를 원하십니다(딤후3:17).
모든 선한 일이란 지극히 평범하고 상식적인 것들입니다.
왕으로서, 제사장으로서, 장로들로서 그들이 [가난한
자들과 아버지 없는 자들을 보호하고 고난 당하는 자들과
궁핍한 자들에게 정의를 베풀며](시82:3)란 말씀을
수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4절입니다. [너희가 참으로 이
일을 행하면 다윗의 왕좌에 앉을 왕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의 문들로 들어오리니 곧 왕과 그의 신하들과
그의 백성이 그리하리라.](4). 다윗 왕조가 멸망하지 않는
길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왕조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지 사람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유다의 왕들이 매우 평범한 기본적인 정책만 일관성 있게
수행했더라도 그들은 결코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회는
뇌물과 부패로 가득 찼고, 고리대금업, 인신매매, 양민들을
종으로 삼는 일이 도처에서 발생했지만 그때마다 악한
왕들은 귀족들의 편을 들었고, 제사장들은 그들의 뇌물을
헌금으로 받고 거짓말로 대언 했으며, 장로들은 뻔히 보이는
재판을 굽게 해 버렸습니다. 위로부터 아래로 썩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무죄한 피를 흘린다는 것은 그만큼 억울한
죽음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5그러나
너희가 이 말들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폐하게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 6[주]께서
유다 왕의 집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네가 내게
길르앗이 되며 레바논의 머리가 될지라도 내가 반드시 너로
하여금 광야와 사람이 거하지 아니하는 도시가 되게 하리라.
7내가 너를 쳐서 멸할 자들을 예비하리니 그들이
저마다 자기 무기를 가지고 네 최상품 백향목을 베어 불에
던지리라.](5-7). 주님은 이 말씀을 자신을 두고 맹세로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6:13에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을 때에 자신보다 더 큰 이를 두고
맹세할 수 없으므로 자신을 두고 맹세하여](히6:13)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저주를 맹세하셨다면 이 보다 더 큰
맹세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무섭고도
두려운 일입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앞에 선택을 하도록
두 가지를 두십니다.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 선과 악을
두십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는가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주님은 다윗의 왕좌를 영원히 지속시키느냐?
멸망케 하느냐? 의 문제를 유대 왕들에게 선택하게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무리 주의 성전이 있는 도시라
해도 유다의 집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때 하나님은 이
땅을 황폐케 하시며, 광야와 사람이 거하지 않는 도시로
만들어 버리실 것임을 계속해서 경고하십니다. 7절에 ‘너를
쳐서 멸할 자들’이란 이집트와 바빌론을 말합니다.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는 요시야를 죽였고, 아들
여호아하스를 포로로 잡아가 죽였습니다. 그 이후의 왕들은
모두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의 지배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을 자신의 심판을 집행하는 도끼로 정하셨습니다.
[너는 나의 싸우는 도끼요, 전쟁의 무기니 이는 내가
너를 들어 민족들을 산산조각 내고 너를 들어 왕국들을 멸할
것임이라.](렘51:20).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느부갓네살은 싸우는 도끼요, 전쟁무기였습니다. 후에
바빌론이 멸망했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온 땅의 쇠망치가 쪼개어지고 부러졌는가! 어찌하여
바빌론이 민족들 가운데서 황폐한 곳이 되었는가!](렘50:23).
바빌론은 온 땅의 쇠망치였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기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도구로 포악한 이방
군주를 사용하셨듯이, 불신과 불순종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징계하시기 위해 세상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8-9절입니다. [또 많은 민족들이 이
도시를 지나가며 저마다 자기 이웃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주]께서 이 큰 도시에게 이같이 행하셨는가? 하리니 그때에
그들이 대답하되, 그 까닭은 그들이 [주] 자기들의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겼기
때문이라, 하리라.](8-9). 오랫동안 다윗의 도시로 알려진
예루살렘의 처참한 종말을 본 많은 민족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어찌하여 [주]께서 이 큰 도시에게 이같이
행하셨는가?”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나라들을
정복해서 세운 이 도시가 아무도 살 수 없는 도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방 민족들은 유다가 하나님의 도움을 이 곳에
나라를 세운 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다의
멸망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그들이
[주] 자기들의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겼기 때문이라,” 이방인들은 종교에는
무지해 보이고,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해 보여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주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가 왜 망하는지 세상 사람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교회가 하나님은 안 섬기고, 성경대로 안
살고 멋대로 살다가 망했다고 말합니다. 왜 교회가 문
닫았느냐?고 물어 보십시오. 사람들은 이유를 정확히 압니다.
"저 교회는 매일 자기들끼리 싸우고, 못된 짓은 다
하다가 결국 망했다"고 말합니다. 저는 교회도 안 다니는
사람들이 자기 동네에 있던 교회가 왜 망했는지를 줄줄
설명하는 불신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너희가 길 가는
자들에게 묻지 아니하였느냐? 너희가 그들의 증거를 알지
못하느냐?](욥21:29).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버리고 포기하기 전에 결코 우리를 버리시거나 단념하시지
않습니다.
10-12절은 살룸에 대한 말씀입니다.
살룸은 여호아하스를 말합니다. 그는 유다의 제17대 왕으로
23세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아버지 요시야 왕과 어머니 립나
예레미야의 딸 하무달 사이에서 낳은 넷째 아들로서 요시야
왕이 죽자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아버지
요시야와는 달리 매우 악한 왕이었습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
[여호아하스가 자기 조상들이 행한 모든 것에 따라 [주]의
눈앞에서 악한 것을 행하였더니](왕하23:32)라고 매우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지 3개월만에
이집트 왕 파라오 느고에 의해 립나로 사로잡혀 가고,
왕위는 그의 형 엘리아김(여호야김)에게로 넘겨졌습니다.
여호아하스는 립나에서 다시 이집트로 추방당한 뒤, 그
곳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살룸'으로도(왕하23:30-35; 대상3:15;
렘22:10-12; 대하36:1-4)불렸는데,-[요시야의 아들들은 맏아들
요하난과 둘째 여호야김과 셋째 시드기야와 넷째 살룸이요,](대상3:15)-
그의 생은 매우 비참했습니다. 그러나 뒤를 여호야김은
역사로부터, 전임자로부터, 대언자로부터 배우는 것이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에게 주의 말씀을 증거
했고, 다가올 재앙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그 뒤를 이은
여호야긴, 시드기야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시대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대언자 예레미야의 말씀을 통해 우리
역시 동일한 경고와 교훈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여기서 경건한 왕이었던 요시야의 아들 살룸(여호아하스)과
그의 형 여호야김의 연속된 실패를 볼 수 있습니다.
[10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고 그를 위하여 탄식하지도 말며 오직 떠나간 자를
위하여 몹시 슬피 울지니 이는 그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며
자기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라. 11이는 [주]께서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곧 자기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통치하다가 이곳에서 나간 살룸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가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겠고
12사람들이 포로로 끌고 간 곳에서 죽으리니 그가
다시는 이 땅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기 때문이니라.](10-12).
유대 사람들은 요시야 왕이 죽자 그의 아들들 가운데 넷째를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왕으로 세운 살룸은
아버지 요시야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레미야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악을 행했습니다. 요시야가 죽었을 때
예레미야는 크게 슬퍼하고 울었습니다. 모든 백성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를 위하여
애곡하였으며 또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다 애가(哀跏)로
요시야에 대해 노래하고 그 애가들을 이스라엘에서 규례로
삼으니 이 날까지 이르렀더라. 보라, 그것들이 애가에
기록되어 있느니라.](대하35:25). 주님은 죽은 자(요시야 왕)를
위해 울지 말고 떠나간 자(살룸)를 위해 슬피 울라고
하셨습니다. 요시야는 아들들의 패역함을 보지 않고, 유다의
멸망을 보지 않고 죽음을 맞았습니다. 세상이 흉악할 때는
죽은 성도가 부러움을 사는 법입니다. 주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몸을 돌이켜
그들을 향해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눅23:28). 우리는
회개치 않는 채 살아가는 자녀들이 맞게 될 환란과 지옥
형벌에 대해서 울어야 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살다 죽은
성도들을 위해 애곡할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살룸(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오른지 3개월만에 포로로 잡혀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거기서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언자 에스겔은
여호아하스에 대해서 이렇게 애가를 지었습니다. [자기
새끼들 가운데 하나를 키우매 그것이 젊은 사자가 되어
먹이 잡는 것을 배워 사람들을 삼키니 민족들도 그에
대하여 듣고 그를 구덩이에서 사로잡아 쇠사슬로 묶어
이집트 땅으로 데려가매 이제 그 암사자가 기다리다가
자기의 소망을 잃은 줄 알고는 자기 새끼들 가운데 다른
하나를 취하여 젊은 사자로 만드니](겔19:3-5).
여호아하스는 젊은 사자였습니다. 그는 먹이 잡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로잡혀서 이집트로 끌려가
버렸습니다. 개인의 자질이 우수하다고 해도 죄는 모든
개인의 능력을 못쓰게 만들어 버립니다.
13-19절은 살룸(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여호야김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호야김은
여호아하스의 형이며, 요시야 왕의 둘째 아들입니다. 그는
매우 어려운 시기에 왕이 되었습니다. 국제 정세는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앗시리아가 몰락하고, 바빌론은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왕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주
앞에서 악을 행했습니다. 13-14절은 당시 사회가 얼마나
부패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불의로 자기 집을 지으며 부당하게 자기 방들을 짓는 자
곧 품삯도 주지 아니하고 자기 이웃을 고용하며 그에게 일의
대가를 주지 아니하는 자여!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넓은 집과 큰 방들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들을 만들며 그것을 백향목으로 입히고 주홍색으로
칠하는도다.](13-14). 백성들은 일을 해도 돈을 받지
못하지만 어디 가서 호소할 때도 없습니다. 남의 것을
훔치는 도둑질도 나쁘지만 일을 시켜 놓고 삯을 주지 않는
것은 더 큰 도둑질입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저주를
선포했습니다. 율법은 분명히 말합니다. [너는 네 이웃을
속여 빼앗지 말고 강탈하지 말며 고용한 사람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라.](레19:13), [네 옆에
거하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노예처럼 부리지 말고](레25:39). 이렇게 집을 짓고,
왕궁을 짓고, 도시를 건설하는 것을 일컬어 주님은 [화
있을진저,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법으로 도시를 세우는
자여!](합2:12)라고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이 경고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지금 더욱 우리 가슴 속에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업주들은 일한 대가를 지불하고,
일꾼들은 눈가림으로 일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입니다. 백성들이 일을 해도 삯을 받지
못하는데도 왕은 먼저 자기를 위하여 넓은 집과 큰 방들을
짓고, 창문들을 만들고, 실내 인테리어를 꾸미느라 정신을
쏟고 있습니다. 정신나간 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왕궁의 돈은 백성들이 일한 대가로 받은 세금이 아니라
부자들, 귀족들, 장로들이 백성들로부터 갈취한 검은 돈,
뇌물, 비자금, 정치 자금과 같은 불의한 돈이었습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듯이, 가진 자들은 더욱 학정을
일삼았습니다. [보라, 너희 밭에서 곡식을 거둔 품꾼들의
품삯 곧 너희가 사기(詐欺) 쳐서 감추어 둔 품삯이 소리를
지르며 곡식을 거둔 자들의 울부짖음이 만군의 {주}의 귀에
들리느니라.](약5:4). 품꾼들이 하늘로 부르짖는 그 삯으로
왕궁을 증축하고 방을 꾸밀 때 멸망은 결코 졸지 않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죄악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 자신을 백향목 안에 넣어
봉한다고 통치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고 마시며
공의와 정의를 행하더니 그때에 형통하지 아니하였느냐?
그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의 사정을 바르게 재판하더니
그때에 형통하였도다.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냐? [주]가
말하노라.](15-16). 하나님은 여호야김의 어리석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왕의 권위란 화려하고 넓은 왕궁, 훌륭한
대전의 실내 장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데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때로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화려한 왕궁을 건축하는 어리석은
왕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아버지
요시야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요시야가 성공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공의와 정의를 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의 사정을 바르게 재판했을 때 나라는
형통했고, 번성했습니다. 통치자의 권위는 주님의 뜻을
행하는데서 옵니다. 주님은 여호야김이 아버지 요시야 왕의
본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르게 행할 때 그것이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각자 자신의 처지와 환경에서
바르게 행하는 것이 형통하는 길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것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때 주님이 주시는 형통함을 누리며, 그런
순간마다 하나님을 체험하고, 더욱 알아 나가게 됩니다. [오
땅이여, 네 왕이 귀족들의 아들이며 네 통치자들이 술
취하고자 함이 아니라 힘을 얻고자 하여 정한 때에 먹으면
네게 복이 있으리로다!](전10:17). 집을 짓는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힘을 얻고자 하여 먹는다면 복입니다. 그러나
쾌락을 즐기고, 마시고 취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잊어
버린다면 문제입니다. [두렵건대 그들이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고난받는 자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의
재판이라도 굽게 할까 하노라.](잠31:5). 여호야김은
훌륭한 아버지 아래서 자랐지만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17-19절은 권고를 듣지 않는 여호야김의
말로입니다. [그러나 네 눈과 네 마음은 오직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것과 학대와 폭력만을 바라며 그것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아 /슬프다/. 내 형제여! 아 /슬프다/. 자매여!
하고 애통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아 /슬프다/.
주군이여! 아 /슬프다/. 그의 영광이여! 하고 애통하지도
아니하리라. 그가 예루살렘의 성문들 너머로 끌려가
던져지고 나귀가 묻히는 것같이 묻히리라.](17-19).
여호야김은 지금 한탕 해 먹지 않으면 다시는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처럼 정신없이 부정축재와 죄악을
일삼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하나님도 백성도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이란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가 얼마나 압제와 학대, 폭력을 일삼았던지 그가 죽어도
누구하나 슬프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잘
죽었다. 이제야 죽었구나! 하며 축제 분위기가 될
정도였습니다. 그는 죽어서도 시체가 묻히지 못했습니다.
그는 바빌론의 침공에 맞서 5년간이나 버텼지만 죽어서 성문
밖으로 나귀처럼 던져졌습니다.
20-30절까지는 여고냐 즉 여호야긴에 대한 대언입니다.
여호야긴은 아버지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3개월만에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대신 그는 매우 오래
살았고 바빌론에서 마지막 말년을 편하게 보내다
죽었습니다. [유다 왕 여호야긴이 포로로 잡혀간 지
삼십칠년째 되는 해 곧 바빌론 왕 에빌므로닥의 통치
제일년이 되는 해 십이월 곧 그 달 이십오일에 그가 유다 왕
여호야긴의 머리를 들게 하며 그를 감옥에서 나오게 하고](렘52:31).
3개월의 왕 37년의 옥살이가 그의 인생이었습니다.
[/너는/ 레바논에 올라가서 외치고
바산에서 네 목소리를 높이며 통행로에서 외칠지니 이는 네
사랑하는 자가 다 멸망하였음이라. 네가 형통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너는 이르기를,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내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한 것 곧 그것이
어려서부터 네 습관이라. /그런즉/ 바람이 네 목양자들을 다
먹어 버리고 네 사랑하는 자들은 포로가 되리니 그때에 네가
네 모든 사악함으로 인하여 반드시 부끄러움을 당하고
당황하리라.](20-22).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레바논에
올라가서 외치고, 바산에서 목소리를 높여서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거리 설교입니다. 대언자들은 아무
데서나 가리지 않고 말씀을 증거했는데, 특히 길거리에서
전하는 일은 그들의 주된 임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주님은
여러 차례 자신의 종들을 통해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며 듣기를 거절했습니다. 형통할 때에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듣지 않으면 재앙의 날에 주님은
우리의 기도와 울부짖음을 듣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너무나
반역적이어서 말 안 듣는 것이 어려서부터 습관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여기서 ‘어려서부터’란 말은 1차적으로
민족의 초기 형성 단계부터, 즉 광야의 출애굽 때부터란
말입니다. [너는 광야에서 주 네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이집트 땅을
떠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주를 거역하였으되](신9:7).
모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그들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가 죽기 직전에 남긴 걱정스런 한 마디는
이렇습니다. [이는 너의 반역하는 것과 뻣뻣한 목을 내가
알기 때문이니, 보라, 이 날 내가 살아서 너희와 함께 있어도
너희가 지금까지 주께 거역하였거늘 하물며 내가 죽은
뒤에는 얼마나 더하랴?](신31:27).
주님은 “네가 내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한 것 곧 그것이 어려서부터 네 습관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회개의 필요성, 거듭남의 필요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반역적입니다. 불복종,
불순종, 반역이 용기인 줄 알고, 행동하는 양심인 줄
착각하는 사람도 있고, 부추기는 자들도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참으로 네가 듣지도 못하였고 참으로 알지도
못하였으며 참으로 네 귀가 그때부터 열리지도
아니하였나니 이는 네가 크게 반역하여 모태에서부터
범죄자라 불린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사48:8). 이것이
우리의 본 모습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모든
사람들의 거스리는 성품, 반역적인 기질들을 너무 잘
아십니다. 이들은 모두 다윗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속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주님은 우리의
성향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범죄를 너희에게서 떨쳐 버리고 너희를
위하여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을 만들지어다. 오
이스라엘의 집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겔18:31)고
하셨습니다.
형통할 때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나는 듣지 않으리라”는 것은 죽어도 곱게
죽지 못하고 부끄럽게 죽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유다는
비참하고, 수치스럽게 죽었습니다. 주님은 궁극적으로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친히 하실 일은 주의 법을 그들
마음 속에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그 날들 이후에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 /중심/부에 두고 그들의 마음 속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31:33).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마음, 새 영을 부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한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그들의 육신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같이 /연한/ 마음을 주어](겔11:19). 새 영, 새 마음이
없이는 새로운 성품과 새 삶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
육신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너희에게 살같이 /연한/
마음을 줄 것이며](겔36:26).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을 받았고, 말씀을 내 안에 둠으로써 깨끗함을 입습니다.
23-27절은 고니야(여호야긴)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호야긴은 여호야김의 아들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오 백향목 안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레바논
거주민아, 산고를 겪는 여인의 진통 같은 고통이 네게 임할
때에 네가 얼마나 공손한 자가 되려느냐?](23). 레바논은
이스라엘 북쪽에 지중해와 평행을 이루며 뻗어 있는 산맥
지대인데, 많은 종류의 동식물의 원산지였으며, 특히
백향목으로 유명합니다(삿9:15; 왕상5:6). 하나님은 이들이
갑작스런 고통이 임할 때에 얼마나 겸손해지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야 합니다.
때로 성도들이 ‘주님, 저를 겸손하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데, 이는 주님 나를 쳐 주시옵소서! 란 기도와
마찬가지입니다. 레바논은 어느 지역보다 경제적으로
부요했고, 지역 자체가 요새를 형성하고 있어서
외적으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생각되었던 곳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에게 갑작스런 재앙이 임하게 하심으로
겸손하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하나님이 한번 손을 보시면
돌밭에서도 주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들의 재판관들이
돌이 많은 곳에 엎드려졌을 때에도 내 말이 달므로 그들이
내 말을 들으리로다.](시141:6).
24-27절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비록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가 내 오른손의 인장(印章) 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빼내어 네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과 네가
두려워하는 얼굴을 가진 자들의 손 곧 바빌론 왕
느부갓레살의 손과 갈대아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리라. 또
내가 너와 너를 낳은 네 어머니를 너희가 태어나지 아니한
다른 나라로 쫓아내리니 거기서 너희가 죽으려니와 그들이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그 땅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24-27).
고니야란 이름은 여고니야란 이름을 줄인 것인데, 낮춤말
또는 경멸조로 부를 때 쓰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단계를 볼 수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십니다(24). 하나님은 다윗이 보좌에 앉은 왕들을
주님의 오른 손의 인장 반지처럼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나
고니야와 같이 불순종하는 왕들은 그것을 빼어 버리십니다.
하나님의 인장 반지였던 고니야가 빠진 대신 그 자리는
스룹바벨이 들어갑니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오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주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를 인장(印章)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학2:23).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보배를 몸에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특별한 보배라고 부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귀한 진주들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이 그런 존재란
사실을 안다면 더욱 깨어 있어야 하며, 빛을 발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생명 책에서 지워버리지
않으시지만 우리에게 맡긴 사역들은 얼마든지 옮겨 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회개하지 않는 교회의 촛대를 옮기시는
분이십니다.
둘째, 바빌론 왕이 그를 잡습니다(25).
우리의 산성이시오, 방패이신 주님의 보호의 손길이
걷어지면 그는 원수의 포로가 됩니다. 평소에 안전한 망대
가운데 거하던 사람들은 망대의 고마움을 모른 채 삽니다.
우리가 지금 평안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이 우리를 두르고 있기 때문이란 사실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손길을 거두실 뿐 아니라
그 생명을 넘겨주십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 내에서도 있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내에서 회개하지 않고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없는 근친 상간과 같은 음행을 일삼는 형제들을
사탄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그 육체를 멸하게 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영이 {주} 예수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전5:5).
[그 중에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 준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모독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딤전1:20).
셋째, 그와 가족들이 모두 다른 나라로
붙들려가 돌아오지 못합니다. 이 땅에서 잘 살기 위해
왕궁을 고쳤던 아버지 여호야김은 죽어서 성문밖에
던져져서 무덤도 하나 만들지 못했습니다. 여호야긴 자신은
3개월만에 먼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삼촌(숙부)이요,
아버지의 선왕(先王)이던 여호아하스는 이집트로 잡혀가
거기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알지만 언제 어디서 죽을지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만
죽은 후에 어디로 갈지는 알아야 합니다. 어디서 죽더라도,
언제 죽더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면 저 하늘에 갑니다.
이런 이유로 고니야처럼 이 땅에 모든 것을 묻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할 때 이런
슬픔을 당하지 않습니다.
28-30절입니다. [이 사람 고니야는
멸시받으며 부서진 우상이냐? 그는 아무 기쁨도 없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들 곧 그와 그의 씨가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는 땅으로 쫓겨났느냐? 오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주]의 말을 들을지어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 생전에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할지니 이는 그의 씨 가운데
형통하여 다윗의 왕좌에 앉아 유다 안에서 다스릴 자가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렘22:1~30). 심판의
마지막 단계는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욕을
합니다. 모든 불신자들이 당할 심판의 마지막 단계는 주님이
그를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믿지 않는 자들이
수치를 당할 것이며, 주님 역시 그들을 부끄러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왕위에 있을 때는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았을지 몰라도 그가 포로로 잡혀가자 사람들은
그를 향해 ‘멸시받으며 부서진 우상’, ‘아무 기쁨도 없는
그릇’이라고 불렀습니다. ‘기쁨도 없는 그릇’이란 마음
가운데 아무 기쁨도 담을 수 없는 사람, 어떤 기쁨도 그 안에
담겨 있지 않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망국의 한(恨), 죄에
대한 형벌과 심판으로 인해 포로가 된 그가 무슨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다윗의 왕조는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70년 포로기 이후에 유대로 귀환한
백성들은 다윗의 후손을 찾아내어서 왕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흘러 다윗의 후손이었던 요셉은
나사렛에서 목수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고니야의 씨가 아니며, 요셉의 씨도 아닙니다.
주님은 마리아를 통해 나셨으며,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함을
통해 다윗의 보좌를 합법적으로 이어 받으셨습니다. 그의 씨
가운데 형통하여 다윗의 왕좌에 앉아 다스릴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다윗의 왕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한가
배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