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예레미야 23:1-27

요절: 예레미야 23:5


23장은 목양자, 대언자,
제사장에 대한 경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2절은 거짓
목양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3-8절은 하나님이 세우실 참
목자에 대한 약속입니다. 9-32절은 거짓 목자들의 행태와
그들이 받을 벌에 대한 말씀입니다. 33-40절은 하나님의
대언자들을 조롱하고 우습게 아는 백성들에 대한 경고와
그들이 받을 벌에 대한 말씀입니다.


1-2절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화 있을진저, 내 초장의 양들을 멸하고
흩어지게 하는 목양자들이여!
그러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내 백성을 먹이는 목양자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가 내 양떼를 흩으며 그들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으니
, 보라, 내가 너희의 악한
행위에 대하여 너희를 징벌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1-2).
주님은 먼저 양들을 멸하고 흩어지게 한 목양자들에게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유다를 내 초장이라고 하셨고,
백성들을 내 양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목자들은
양들을 멸하고, 흩어지게 하고, 몰아내고, 돌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런 목자를 일컬어 목자가 아니라
삯군이라고 하셨습니다. [삯군은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 것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도망하나니 이리가 양들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그가
도망하는 것은 삯군인 까닭에 양들을 돌보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요10:12-13).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으면 양들의 목양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양자는 하나님의 초장,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고, 그들을
돌보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양들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너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쳐서 대언하고 또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목자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화 있을진저,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이여! 목자들이 마땅히 양떼를 먹여야
하지 아니하냐?
](겔34:2). 그들은 양떼를 먹이는 대신
자기를 먹였고, 이익만 추구했습니다. 양들을 멸하고 버리는
목자를 우상 목자라고 합니다. [
있을진저, 그 양떼를 버리는 우상 목자여! 칼이 그의 팔과
오른쪽 눈에 임하리니 그의 팔이 완전히 마르고 그의 오른쪽
눈이 완전히 어둡게 되리라, 하시니라
.](슥11:17). 우상
목자는 목자가 아니라 삯군이기 때문에 이리가 오면 양들을
돌보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익을 탐하는 삯군이요, 우상
목자이기 때문에 탐욕이 심하며, 자기 이익만 추구합니다.
이사야는 말하기를, [참으로 그들은 탐욕이 심하여 만족할
줄 모르는 개들이요, 깨닫지 못하는 목자들이라. 그들이 다
자기 길만 바라보고 저마다 자기 구역에서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사56:11)라고 이들의 죄악을 선포했습니다. 마치
교회를 사업(business)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우상
목자요, 삯군입니다.


주님은 양들을 먹이라고
하셨고,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목자의 임무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주님은 목자로서 제자들에게 목자의 심정,
목자의 자질을 갖추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둘씩 보내시면서, [오직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
.](마10:6) 말씀하셨는데, 이는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오도록 보내셨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목자없는 양 같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지치고 널리
흩어졌음이라
.](마9:36).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을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들이 떠날 필요가 없나니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 하시매
](마14:16). 말씀을 가르치고,
영적 양식을 공급하는 것이 목자의 임무입니다.


양들에게 목자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없습니다. 목자 없는 양보다 더 불쌍한
존재도 없습니다. 주님은 양들에게 푸른 초장보다, 쉴만한
물가보다 더 필요한 것이 양들을 먹이고 돌볼 목자들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목양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양들을
먹이고 돌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목양자는 양들을 돌보고,
먹여야 합니다. 참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합니다. 이런 목자를 선한 목자라고 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주거니와
](요10:11). 이것이 진정한 목자의 모델이요,
바른 목자의 역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다윗은 목자였습니다. 그는 양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어린양을 움켜 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그것을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서 내게
대항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삼상17:34~35).
다윗은 사자나 곰이 양떼를 움켜 가면 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양을 건졌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목자는 푸른 초원에서
풀피리나 불면서 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이나 늘어져 자다
저녁 때면 일어나 피리 불며 집으로 오는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직업이 아닙니다. 초장에는 사자, 곰, 이리, 뱀들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었고, 도둑들이 들끓었습니다. 목자
야곱은 자신의 20년 목동 생활의 한(恨)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짐승에게 물려 찢긴 것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내가 손실을 담당하였으며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께서 내 손에서 그것을
요구하셨나이다. 내가 이와 같았으니 곧 낮에는 갈증이
밤에는 서리가 나를 쇠약하게 하고 내 눈에서 잠이
떠났나이다.
](창31:39~40). 짐승과 도둑으로 인해 손실을
보면 목자였던 야곱은 대신 그것을 담당했고, 낮에는 뜨거운
태양으로 인한 갈증이 밤에는 서리로 인해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목자의 삶이었습니다.


3-4절은 주님께서 양들을
먹일 목자를 세우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내가 내 양떼들을
몰아낸 모든 나라에서 그들의 남은 자를 모아 그들의
양우리로 다시 데려오리니 그들이 다산하고 번창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먹일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부족하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3-4). 주님은 온 세상에 흩어진 자신의
양떼들을 다시 양우리로 모으실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바빌론 귀환을 통해 이 일을 이루셨고,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통해 이루셨습니다. 아직 전 세계의 각국에는
유대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다시
팔레스타인 땅으로 모일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모으실
것을 약속하셨고, 이들 위에 목자들을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또 내 마음에 맞는 목양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明哲)로 너희를
먹이리라.
](렘3:15). 양들은 유난히 겁이 많은 동물입니다.
방어 수단이 없는데다 뚜렷한 공격수단도 없고, 도망갈 빠른
발도 없고, 자신을 숨길만한 능력도 없습니다. 양들은
자신들을 먹이고 돌보아 줄 목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스룹바벨, 느헤미야, 에스라 같은 사람들은 훌륭한
목양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있을 때 그들은 아무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놀라지도 않았으며, 부족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훌륭한 목자가
세움받는다면 양들은 아무 것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자기 혼자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는 종교가
아닙니다. 양들은 반드시 목자가 필요하고, 목자로부터
배우고, 보살핌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교만해서 목자를 거부하는 양들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양이란 사실을 잊어버리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자신과 모든 양떼에게 주의를
기울이라. 성령님께서 너희를 그들의 감독자로 삼으사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먹이게
하셨나니
](행20:28). 주님은 목자를 감독자로 세우시고,
교회를 먹이게 하셨습니다. 먹이고 감독하는 일이 목자의
역할이라면 양들의 역할은 목자의 감독을 받고, 양식을 얻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기꺼운 마음으로 하며 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군림하지 말고 오직 양떼에게 본이 되라.
](벧전5:2-3).


5-6절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요
, 한 왕이 통치하고
형통하여 땅에서 공의와 정의를 집행할 것이며 그의 날들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안전히 거할 것이요, 그의
이름 곧 그를 일컬을 이름은 이것이니 곧 [주 우리의 의]라.
](5-6).
성경에는 주님을 일컬어 ‘가지’라고 말씀하시는데, 4번에
걸쳐 나옵니다. 이는 주님을 4가지 방면으로 묘사한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역할과 성품에 따른
분류입니다. 주님은 다윗의 뿌리이기도 하시고, 후손이기도
하십니다(계22:16). 다윗의 뿔에서 싹이 나고, 한 의로운
가지가 일어납니다. [내가 거기서 다윗의 뿔이 싹을
내게 하리라
. 내가 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위하여
등불을 예비하였도다. 내가 그의 원수들에게는 수치로 옷
입힐 것이로되 그의 왕관은 그 위에서 번창하게 하리라,
하셨도다
](시132:17-18). 다윗의 가지로서 예수님은
왕이시며, 구원자이시며, 이스라엘의 의이십니다.


첫째
주의 가지입니다
. [그 날에 주의 가지
아름답고 영화롭게 될 것이요, 땅의 열매는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들을 위하여 심히 좋고 아름답게 될 것이며
](사4:2).
주의 가지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분이란
뜻입니다. 임마누엘(사7:14)과 같은 뜻입니다. 주님은 경건의
신비로서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둘째,
주님은 다윗의 가지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막대기가 나며 그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자랄 것이요
](사11:1),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요
, 한 왕이
통치하고 형통하여 땅에서 공의와 정의를 집행할 것이며
](렘23:5).
[그 날들과 그때에 내가 다윗을 위하여 한 의의 가지가
자라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의와 의를 집행하리라
](렘33:15).
이는 메시야 탄생이 다윗의 가계를 통해 이루어짐을 선포한
말씀입니다(롬1:3). 주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다윗의
보좌에 앉으실 왕이 되실 것임을 선포한 말씀입니다.


셋째,
내 종 가지입니다.
종으로서 주님은 겸손과 복종을
통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십니다(사52:13-15,
53:1-12, 빌2:5-8). [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이제 들을지니 이는 그들이 기이(奇異)히
여김을 받는 자들이기 때문이니라. 보라, 내가 내 종 곧
가지를 내리라
.](슥3:8).


넷째,
그 이름이 가지인 사람입니다.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이르시되,
그 이름이 가지인 이 사람을 보라. 그가 자기 처소에서부터
자라나 주의 성전을 건축하리니 곧 그가 주의 성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으며 자기 왕좌에 앉아 다스릴 것이요,
또 그가 자기 왕좌에 앉아 제사장이 되리니 이 둘 사이에
화평의 논의가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슥6:12-13). 사람의
아들로서 오실 메시야요, 마지막 아담, 둘째 사람으로서의
특징을 나타냅니다(고전15:45-47). 첫 번째 아담이 잃어버린
왕권을 다시 회복하고, 왕과 제사장으로서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을 모두 다 차지하시는 주님을 묘사합니다.
마태복음은 다윗의 가지, 마가복음은 내 종 가지,
누가복음은 ‘그 이름이 가지인 사람’, 요한복음은 ‘주의
가지’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 보이시고,
우리의 의로 삼으실 것입니다. ‘주 우리의 의’란 것은


7-8절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다시는 그들이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께서
살아 계신다,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집 씨를 북쪽 나라와 그 쫓겨난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끄신 [주]께서 살아 계신다, 하리니 그들이 자기
땅에 거하리라, 하시니라.
](7-8). 이 말씀은 예레미야 16:14절에서
이미 한 번 하신 말씀인데, 포로 생활에서 돌이켜 주실
주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유다는 출애굽의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한번
이집트에서와 같은 종살이를 바빌론에서 하게 되는데,
여기서의 탈출은 출애굽기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들은
고레스 왕에 의해 귀환 명령이 떨어져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미리 말씀하신 약속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을 건축하고 성벽을
건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 고백은 [이스라엘의 집
씨를 북쪽 나라와 그 쫓겨난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끄신 [주]께서 살아 계신다
]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역사는 변하고, 사람들은 간데없고,
도시는 부수어지고, 민족은 흥했다가 망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살아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13:8).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이 위에서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분께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느니라.
](약1:17). 사회는
복잡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처지와 여건은 다양하고,
수시로 변할 수 있지만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보호하심은
언제나 동일하시며,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9절부터는 거짓
대언자들의 행태가 다양하게 나옵니다. 신정 국가였던
유대에 가장 중요한 직책은 대언자, 목양자, 제사장입니다.
이들의 부패와 타락은 곧 신정 국가의 몰락이요, 멸망입니다.
목양자들은 양들을 돌보고 먹이는 일을 내팽개쳐
버렸습니다. 대언자들은 한술 더 떴습니다.


예레미야는 대언자들로
인하여 속에서 마음이 상하고 뼈가 떨렸습니다. 이들을 향해
주님이 선포하신 재앙에 대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대언자들로
인하여 내 속에서 내 마음이 상하고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술 취한 자 같고 포도주에 사로잡힌 자같이 되었으니
그 까닭은 [주]와 그분의 거룩하신 말씀들 때문이라
.](9).
심판에 대한 말씀은 누가 들어도 뼈가 떨리고 마음이 상하며,
정신은 혼비백산하게 마련입니다. 선포되는 심판과 재앙에
대한 말씀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옥의 불심판에 대해서 들어도
마음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마음이 이미 죽어 있어서
반응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마음이 상하고
뼈가 떨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지적하신 죄
때문입니다.


첫째,
땅에는 간음, 거짓 맹세가 횡행했습니다.
[
까닭은 이 땅에 간음하는 자가 가득하고 맹세하는 일로
인하여 이 땅이 애곡하며 광야의 아름다운 곳들이 마르고
그들의 행로가 악하며 그들의 권세가 바르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10). 사람들이 행하는 죄악으로 인해 땅이
애곡했고, 광야의 아름다운 곳들이 메말랐습니다. 이는
가뭄의 재앙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죄로 인해 비를 내려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죄는 하늘의 문을
닫습니다. 간음과 거짓 맹세는 십계명에 들어 있는
율법입니다.


둘째,
대언자와 제사장이 모두 신성을 더럽혔습니다.
[
대언자와 제사장이 다 신성을 더럽히기 때문이니 참으로
내가 내 집에서 그들의 사악함을 보았노라. [주]가 말하노라.
](11).
당시의 대언자와 제사장들이 얼마나 주님을 모독했던지
성전에 우상 숭배의 제단을 세워 두었고, 성전에서 태양신을
향해 절하고, 경배했으며(겔8:16), 가증하고 악한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대언자들은 경솔하고 속이는
자들이요, 그녀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침해(侵害)한
자들이로다
.](습3:4). 그들은 신성모독을 자행했습니다. ‘참으로
내가 내 집에서 그들의 사악함을 보았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성전에서 행한 그들의 죄악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분노하셨는데, 이들은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아예 이방 신전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백성을 율법으로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율법을 무효화 시켜
버렸습니다. 영적 지도자의 타락은 멸망을 앞당기는
도화선과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그들의
길이 어둠 속에 있는 미끄러운 길같이 되고 그들이 쫓겨나
거기서 쓰러지리니 이는 그들을 징벌하는 해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릴 것임이라. [주]가 말하노라.
](12).
주님이 심판하시는 방법은 “그들의 길을 어둠 속에 있는
미끄러운 길”같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는
조그마한 돌부리도 사람을 넘어지게 하고, 부딪히게 합니다.
어둠 속에서는 방향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걸어도
앞으로 갔는지 뒤로 갔는지, 제 자리를 맴 돌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예측 불가능합니다. 어둠 속에서는 모든 것이 다 검기
때문에 희고 검고의 차이를 알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좋고 나쁜 것, 옳고 그른 것,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차이를 알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는 짧은 시간도 길게
느껴집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렇다면 어둠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미끄러운 길같이 되었다는 것은 넘어지고
비틀거리게 하는 길을 말합니다. 일어서도 넘어지고
붙들어도 자빠지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눈이 내려서 길이
얼어붙어서 조심조심 걸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바닥에
물이 흘러서 미끄러져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보다 더
미끄러운 길이라면 걷지도 못하고 기어야 합니다. 미끄러운
길이란 나의 발이 나의 의지에 따라 걷지 못하고, 나의 몸을
지탱해 주지 못하는 길입니다. 인생의 행로에서 도무지 나의
뜻대로 되는 일이 없고, 무슨 일을 자빠지기만 할 때 우리는
내가 미끄러지는 길에 들어 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잔꾀도 필요치 않습니다. 저는 20대를
접어들면서 중요한 순간마다 몇 번 미끄러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받은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저는 내가
걷는 길이 잘못되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성경대로 살지 않고, 성경 없이 살았던
제 자신을 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주를 버리고, 죄악을 행할 때 어둠 속에 두시고 길을
미끄럽게 하신다는 사실을 안 것은 훨씬 후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의 길들 안에서 내가 다니는
것을 지켜주사 내 걸음이 미끄러지지 아니하게 하소서.
](시17:5).


셋째,
사마리아의 대언자들은 바알을 의지하여 대언했습니다.

[내가 사마리아의 대언자들에게서 어리석은 것을
보았나니 그들이 바알을 의지하여 대언하고 내 백성
이스라엘로 하여금 잘못하게 하였으며
](13). 사마리아는
북왕국의 수도이며, 북왕국 이스라엘을 일컫는 말입니다.
사마리아에는 엘리야, 미가, 엘리사, 아모스와 같은 걸출한
대언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우상 숭배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대언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남은 대언자들은 바알을 의지해서 대언했습니다. 거짓
대언자들이 왕국의 주류(主流)를 차지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내용은 물론이고, 종교의 형식조차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넷째,
예루살렘의 대언자들은 간음을 행하고 거짓 속에서
걸었습니다.
[또 내가 예루살렘의
대언자들에게서도 무서운 일을 보았나니 그들이 간음을
행하고 거짓 속에서 걸으며 또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손을
강하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사악함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게 한즉 그들이 다 내게는 소돔 같으며 그 거주민들은
고모라 같으니라.
](14). 예루살렘은 사마리아에 비해 좀 더
나은 형편인 줄 알았는데 그들 역시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정욕에 빠졌습니다. 자신들이 악을
행했던지라 백성들의 잘못을 잡아 주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힘과 위로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악을
근절하는 대신 악을 합법화시켜 주고, 하나님은 그런 것을
징벌하시는 분은 아니다는 식으로 그들의 불법에 대한
이론적, 신학적 근거를 마련해 주곤 했습니다. 부자들이
악을 행하면 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권력자들이 죄를
지으면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단지 헌금을
많이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제 유대
사회는 어느 이방 사회보다 더 부패했고, 소돔과 고모라에
버금가는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주]께서 대언자들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쑥을
먹이고 쓸개 물을 마시게 하리니
이는 신성을 더럽히는
일이 예루살렘의 대언자들로부터 나와 온 땅으로
들어갔음이라, 하시니라.
](15). 쑥과 쓸개 물은 혹독한
시련을 말합니다. 눈물 젖은 빵 정도가 아니라 입에도 쓰고,
속에도 쓴 그런 물을 먹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성을 높여야 할 대언자들이 신성을 더럽히는 일에 앞장
선데 대한 재앙입니다.


16-17절입니다. 그들은 거짓
대언을 했습니다. [만군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대언하는 대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그들은 너희를 헛되게 만드는 자들이니 그들이 말한 환상은
자기 마음에서 나온 것이요, [주]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여전히 이르기를,
[주]께서 말씀하시되, 너희가 평안하리라, 하셨다, 하며 또
자기 마음에서 상상하는 대로 걷는 모든 자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느니라
.](16-17).
거짓 대언자란 주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대언자가
아니라 자기 마음의 상상 속에서 나오는 대로 전하는
대언자입니다. 거짓 대언자는 사람들의 죄를 책망하는 대신
죄를 옹호합니다. 거짓 대언자는 회개와 죄, 심판에 대한
설교보다 평안, 번영, 복에 대해 설교합니다. 거짓
대언자들은 양의 옷을 입고 나옵니다(마7:15). 거짓
대언자들은 속입니다(마24:11). 거짓 대언자들은 표적이나
이적을 보여 주어 택하신 자들까지도 속이려 합니다(마24:24).
거짓 대언자들은 사람들의 칭찬을 듣습니다(눅6:26). 거짓
대언자들은 이단 교리를 끌어 들여 주를 부인합니다(벧후2:1).


오늘날 강단 역시 거짓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 대신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설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없기
때문에 생각나는대로 말하거나 남의 책에서 베껴 버립니다.
그들의 설교는 철저히 사람 중심이며, 인기에 영합합니다.
주님은 이런 설교에는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누가 [주]의
뜻 가운데 서서 그의 말을 깨닫고 들었느냐? 누가 그의 말을
주목하고 들었느냐?
](18). 아무도 없습니다. 주의 말씀을
깨닫고, 주목해서 듣는다면 거짓 대언자들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서
꾸며낸 이야기들을 따릅니다. [이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선생들을 쌓아 두고 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들을 따를 것임이라.
](딤후4:3~4). 이 세대는
오래 전부터 이런 사람들로 가득 찬 교회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말장이가 되어 갔고, 강단은
쇼를 위한 무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덕담(德談)을
하는 설교자를 쫓고 있습니다. 약간의 비평이나 비판도
견디지를 못하고, 책망과 훈계를 할 때면 얼굴을 붉히고
대적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영적
자화상입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보라,
[주]의 회오리바람 곧 혹독한 회오리바람이 격노 중에
나아갔으니 사악한 자의 머리 위에 혹독하게 임하리라. [주]의
분노는 주가 자기 마음의 생각들을 집행하여 이루기까지는
돌아서지 아니하리니 마지막 날들에 너희가 이것을
철저히 깊이 생각하리라
.](19-20). 회오리바람은 주의
심판을 집행하는 바람입니다. 회오리바람은 재림을
나타내는 문구이기도 합니다. 회오리바람이 한번 지나가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고 모두 폐허가 되고 맙니다.


21-22절입니다. [내가 이
대언자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대언하였도다.
그러나 그들이 내 뜻 가운데 서서 내 백성으로 하여금 내
말들을 듣게 하였더라면 저들의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저들을 돌아서게 하였으리라.
](21-22). 주님은 이
대언자들을 보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대언자들이
수두룩한 것은 ‘자칭 대언자’, ‘사람들이 세운 대언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대언자 학교를 세워 대언자를 양성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소명도 없이 단지
배운게 신학이요, 성적이 모자라 신학교를 가다 보니 직업상
목사가 된 것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대언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대언하는도다.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말하지도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너희에게 거짓 환상과 점술과 허무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수를 대언하는도다
.](렘14:14).


주님께 보냄을 받지 않는
사람이 대언하고 설교를 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첫째, 온갖 인간적인
방법으로 영적인 것을 대체하는 것입니다.
교회 프로그램,
행사로 말씀을 대체합니다.


둘째, 철학과 교육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합니다.
이들은 강단에 서면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감동적인 이야기, 명사들의
이야기, 예화, 세상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훨씬 더
많이 합니다.


셋째, 육신의 행위가
성령의 열매를 대신합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신적 행동을
성령의 열매로 둔갑시킵니다. 가식과 위선이라 할지라도
결과만 좋으면 모두 간증거리가 됩니다. 그런 것은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연약한 나를 통해 이루신 놀라운 일이 간증인대, 똑똑하고
재주 많은 내가 가만히 계시는 하나님을 위해서 피, 땀 흘린
이야기를 간증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감동을 받고 박수를
보내는 회중들이 많습니다.


넷째, 거짓을 참으로
속입니다.
거짓 은사를 참으로 둔갑시키는 재주로 이들은
목회를 합니다. 가장 자주 속이는 은사는 방언, 예언, 축사,
신유와 같은 거짓 은사들을 성령의 은사들이라고 속이는
것입니다. 이상한 괴성을 지르며 그것을 천사의 방언이니
성령이 주신 방언이라고 속입니다. 이상한 말을 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예언이라고 속입니다. 축사, 신유는 거짓
대언자, 거짓 목사들의 단골 메뉴입니다.


다섯째, 이익을
경건이라고 말합니다.
이익 창출이 성공이고, 성공이 곧
하나님이 복주신 결과라고 말합니다. 고로 성공한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이요, 경건한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이 복을
주신 것이기에 성공한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라는 이상한
논리를 전개합니다.


여섯째, 성경과는
하등의 상관없는 설교를 합니다.
이들은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성경이 전부가 아니며, 성경을 알면 교만해지기
쉬우며,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신학자들이나 목사들만 하면
되는 일인 것처럼 말합니다. 이들은 믿음보다 행위를 성령의
열매보다는 성령의 은사를 말씀보다는 체험을 훨씬 더
강조하며, 기독교를 가인의 종교로 만들어 버립니다. 돈으로
믿음을 대신하고, 땀으로 성령을 대신하려는 이런 자들은
복음을 변질시켜 버립니다. 하나님이 말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말한 것처럼 가르칩니다. 졸지에 교회는 선교 대신
김치를 담고, 설교대신 밥을 하고, 전도지 대신 고기를
구워서 지하도나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 나섭니다.
이것이 어느덧 올바른 교회가 해야 할 일인 것처럼 표준이
됨으로써 이렇게 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도 아닌 것처럼
인식되고 말았습니다.


22절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주님은 거짓 대언자, 직업 목회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제대로 가르치고, 제대로 말씀을 전했더라면 백성들의
잘못을 돌이킬 수 있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 뜻 가운데 서서 내 백성으로 하여금 내 말들을 듣게
하였더라면
저들의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저들을
돌아서게 하였으리라.
](22).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시지만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중요하게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하나님의 소명이
없었더라도 그들이 성경을 가지고, 성경대로 설교하고
가르쳤다면 백성들을 돌아서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메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목사의 십자가 설교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선교사로 결단한 예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대언자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말씀을 전하는 것은 매우
희귀한 경우에 속합니다.


23-24절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분이신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나는 가까운 데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내가 보지
못하도록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는 자가 누구냐? [주]가
말하노라. 내가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지 아니하느냐?
](23-24).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거리에 상관이 없으신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 분이며, 보지 못하시는 것이
없으신 분이며, 만유 안에 계시며, 만유를 충만케 하시는
분이십니다(엡1:23).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행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다 보실 수 있고, 들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아는
만큼, 믿음이 깊어지며, 그 믿음만큼 성장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 지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며, 진리의
지식이며, 우리가 배워야 할 진정한 신학(神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주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 지를
배워야 합니다. 성령은 성경을 통해 이것을 가르쳐 주시며,
계시와 조명을 통해 배운 지식만이 참 지식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백성들은 포로로 사로잡혔고(호4:6),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백성들은 망했습니다(사5:4). 어느
민족이나 개인이든 하나님을 아는 정도 이상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을
사람들이 지어낸 존재이거나 있어도 사람들의 일에 간섭을
하지 않는 분이거나 아무 것도 모르는 우상의 한 부류로
생각합니다.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고 아버지 없는 자를
죽이면서도 말하기를, 주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그것을 중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백성 중의 짐승
같은 자들아, 너희는 깨달으라.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운 자가 되려느냐? 귀를 심으신 분께서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빚으신 분께서 보지 아니하시랴?
](시94:6-9).
이런 자들은 죄를 지어도 죄의식이 없고, 죄책감을 모릅니다.
범죄를 용기인 줄로 압니다. 반면 다윗과 같은 사람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깊이 알았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주님에 대해 생생한 인식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오며 지옥에 내 침상을 펼지라도, 보소서, 주께서 거기
계시나이다.
](시139:8). 우리는 날마다 주님을 좀 더 알아야
하며, 그 경이로움에 매료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알수록
경건과 거룩함은 그만큼 자라납니다.


25-27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거짓 대언자들의 말을 다 들으셨습니다. [내가 그
대언자들이 말하는 바를 들었거니와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들을 대언하며 이르기를, 내가 꿈을 꾸었다. 내가 꿈을
꾸었다, 하는도다. 이 일이 거짓들을 대언하는 대언자들의
마음 속에 어느 때까지 있겠느냐? 참으로 그들은 자기
마음의 속임수를 말하는 대언자들이로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바알로 인하여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같이 저마다
자기 이웃들에게 자기 꿈들을 말하여 내 백성으로 하여금 내
이름을 잊게 하려고 생각하는 자들이로다.
](25-27). 거짓
대언자들은 자기가 꾼 꿈을 중요한 계시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꾼 꿈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꿈은 계시의 보조
수단이지 주된 수단이 아닙니다. 꿈은 하나님의 계시일 수도
있지만 망상일 수도 있습니다. 꿈은 일이 많으면 생깁니다. [
꿈은 일이 많아 생기고
어리석은 자의 목소리는 말이
많아 알려지기 때문이니라.
](전5:3).


하나님이 꿈을 주시는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시험하시기 위함입니다.
[너는 그 대언자나 그
꿈꾸는 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이는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가 너희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시기
때문이니라.
](신13:3). 주님은 꿈꾸는 자의 말과 성경의
말씀을 통해 어느 것에 귀를 기울이는지 시험하십니다.


둘째,
꿈을 주시는 이유는 그들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없는 경우에 꿈을 통해
말씀하시며, 사람들을 스스로 계획한 것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교만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참으로 거듭 말씀하시되 사람이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로다. 사람이 깊은 잠에 빠져
꿈을 꾸거나 밤의 환상 가운데 있거나 잠자리에서 선잠을 잘
때에 그분께서 사람들의 귀를 여시고 그들을 위한 교훈에 인(印)을
치시니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계획한 것에서
물러나게 하려 하심이며 또 교만을 숨겨 사람이 /교만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욥33:14~17). 아브라함,
요셉, 솔로몬, 다니엘, 기드온 등 많은 사람들이 꿈을 통해
계시를 받았는데,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의 보조
수단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요셉은 꿈을 통해 마리아에 대한
자신의 계획한 것에서 물러나 그녀를 아내로 데려왔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신 꿈의 목적입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막았습니다.
비두니아로 가려고 애를 써도 안되었습니다. 바울은 밤에
환상을 통해 마케도니아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말을 듣고
선교 방향을 틀었습니다. 꿈은 스스로 계획한 것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만하게 하려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무엇이나 우리에게 좋은 것이지만 때로는 우리를
시험하고, 우리를 막고, 우리를 교만하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임도 있음을 알고 감사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Archived(완료) > 구약 개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레미야(27)  (0) 2005.10.07
예레미야(26)  (0) 2005.10.05
예레미야(24)  (0) 2005.10.01
예레미야(23)  (0) 2005.09.30
예레미야(22)  (0) 2005.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