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예레미야 24:1-10
요절: 예레미야 24:7
23장이 주의 엄중한 경고의
반복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대언자 예레미야는 비극적인
대언을 하면서 힘이 빠지고, 지쳤습니다. 백성들은 아무도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영감받은
주의 말씀이라도 자신의 혈육이 완전히 망한다는 사실을
대언 하는 일이 기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늘 24장
말씀은 듣는 이 누구에게나 용기와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격변의 세대에 하나님이 미리 말씀하신 대언들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3절은 두 개의 무화과나무 광주리를
통해 보여 준 환상입니다. 한 광주리에는 잘 읽은 좋은
무화과나무가 있었고, 다른 광주리에는 너무 나빠서 먹을 수
없는 무화과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무화과를 통해서 유다
백성들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4-7절은 좋은 무화과
광주리에 대한 해석이며, 8-10절은 나쁜 무화과나무 광주리에
대한 주님의 해석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환상과 비유들을
친히 해석해 주심으로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풀지 않아도
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 말씀을 믿으면 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바빌론
왕 느부갓레살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유다의 통치자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사로잡아 바빌론으로 데려간 뒤에 주께서 내게 이것을
보이셨느니라. 보라, 주의 성전 앞에 무화과 두 광주리가
놓였는데](1). 이미 앞에서 여러 차례 살펴본 것과 같이
유다의 마지막 왕들은 모두 배교로 끝을 맺음으로 그들의
운명은 외세에 좌우되었습니다. 성군(聖君)이라 불리던
요시야 왕이 죽고 그의 넷째 아들 여호아하스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지만 3개월만에 이집트로 붙잡혀 가고
말았습니다. 왕위는 그의 형 엘리야김(여호야김으로 개명)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여호야김은 느부갓네살에게 반란을
일으켰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치욕스런 죽음을 맞았습니다.
왕위는 아들 여호야긴으로 넘어갔습니다. 여호야긴은
다양한 이름이 있었는데 여고니야, 고니야, 여고냐란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여호야긴 시대에 바빌론의 2차 침공이
있어서 이 때 많은 수의 포로들이 잡혀갔습니다(598 B.C).
왕자들, 고관들, 장군들을 비롯해서 10,000명의 포로들을
바빌론을 데려갔을 뿐만 아니라 1,000명의 장인들,
대장장이들도 모두 데려갔으므로 예루살렘에는 가장 가난한
극빈자들만 남게 되었습니다(왕하24:8-16). 이때를 흔히
포로의 수와 성격으로 인해 “포로기간”이라고 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의 숙부인 맛디야를 왕으로 삼고 그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쳐 주었습니다(왕하24:17). 시드기야는
유다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습니다.
2차 포로 기간에 잡혀간
유다의 통치자들 가운데는 에스겔(겔1:12)도 있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이미 먼저 붙들려 갔습니다.
목공들과 철공들을 붙들어간 이유는 제국의 도시와 성벽을
건설하려는 느부갓네살의 원대한 계획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후에 바빌론의 공중 정원을 비롯하여, 수로 건설,
도시의 성벽 건설 등을 하게 됩니다.
지금 본문이 말하는
배경이 바로 2차 침공이 끝나고 마지막 왕 맛디야(시드기야)
통치 시대에 본 예레미야의 환상입니다. 유다에는 귀족,
고관, 기술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극빈자들만 남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대언자 예레미야가
이미 일찍부터 계속해서 이렇게 되리라고 전파했던
말씀입니다. 동족들이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가고, 이제
극빈자들만 남게 된 예루살렘을 보면서 예레미야는 절망에
빠진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주님은 주의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무화과는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한 세
나무는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올리브 나무입니다.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의 영적 특권을 상징합니다.
올리브나무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특권을 상징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특권을 상징합니다. 특히
무화과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과 연관된 예언의
시계 역할을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무화과 같이
심히 좋은 무화과들이 있고 다른 광주리에는 너무 나빠서
먹을 수 없는 심히 나쁜 무화과들이 있더라.](2). 하나님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대비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처음 익은
무화과나무는 첫 소출로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희생물입니다. 하나님은 땅의 첫 열매의 처음 난 것을
성전에 가져오게 하셨습니다. [너는 네 땅의 첫 열매의
처음 것을 가져다가 [주] 네 하나님의 집에 드릴지니라. ...](출23:19).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은 심히 좋은 것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 드려질 때 좋은 무화과나무의 열매와
같습니다.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은 심히 좋은
무화과들입니다. 이들은 단 것을 내고, 아름다운 열매를
냅니다.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어찌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올라서리요? 하니라.](삿9:11). 처음 익은 과일은 가장
탐스럽고, 복된 것입니다. 농부는 자기 밭에서 처음 열리는
과실들을 눈여겨보고 기뻐합니다. [화로다, 나여! 이는
내가 사람들이 여름 과일을 거둔 후와 포도수확기에 포도를
거둔 후같이 되어 먹을 포도송이가 없기 때문이라. 내
혼이 처음 익은 과일을 사모하였나니](미7:1).
반면 하나님 앞에 드려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아무 쓸모 없는 무화과처럼 쓸모 없는
인간이 되고 맙니다 썩은 무화과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부패성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먹을 수 없는
무화과만큼이나 쓸모 없는 것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썩은 무화과를 통해 농부가 어떤
기쁨도 즐거움도 누릴 수 없듯이, 범죄한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기쁨도 즐거움도 누리지 못합니다. “너무
나빠서 먹을 수 없는 심히 나쁜 무화과들”이란 맛을 잃은
소금과 같습니다. [너희는 땅의 소금이나 소금이 만일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리요? 그 뒤에는 아무
쓸모 없고 다만 버려져서 사람들의 발 밑에 밟힐 뿐이니라.](마5:13).
하나님의 성전 앞에 놓인
두 바구니의 무화과처럼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두 부류입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 받아 들여질만한
광주리처럼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아벨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떻게
처음 익은 무화과같이 심히 좋은 무화과들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드려진 존재들이요, 하나님 앞에 영적
희생물들을 드려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벧전2:5).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것들을 드려서는 안됩니다. 처음
익은 좋은 무화과들처럼 드려야지, 나쁜 무화과들을
드려서는 안됩니다.
첫째,
하나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어떤
헌물이나 헌금이나 희생물을 드리기에 앞에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헌금을 드리기에 앞서 여러분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5을 보십시오. [그들은
우리가 바라던 대로 하였을 뿐 아니라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8:5).
고린도 교인들은 헌금에 앞서 먼저 자신들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롬12:1-2).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둘째,
복음 전파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곧 나로
하여금 이방인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되어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하게 하사 이방인들을 바치는 일이
성령님을 통해 거룩히 구별되어 /주께서/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15:16). 목사나 선교사들만 하나님의
사역자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그리스도의
사역자(minister)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로서 복음
사역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사람이 됩니다.
셋째,
형제를 돕는 것입니다. 물질로 선교 사역을
지원하는 일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이요, 심히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오직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보낸 것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것은 달콤한 향기요, 받으실
만한 희생물이요, 하나님을 심히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4:18).
넷째,
기도 사역은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받으실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권면하노니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중보(仲保) 기도와 감사를 드리되
왕들과 권위를 가진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것은
우리가 모든 경건함과 정직함 가운데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자 함이라. 이것이 하나님 곧 우리 구원자의
눈앞에서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딤전2:1-3).
누구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중보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경건함과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눈 앞에서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입니다.
다섯째,
효도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입니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하여금 먼저
집에서 효성을 보여 자기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며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딤전5:4).
여섯째,
잘 행하고도 그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참는 일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입니다. [너희가 너희
잘못으로 인하여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영광이 있으리요?
그러나 너희가 잘 행하고도 그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벧전2:20).
3절입니다. [그때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기에 내가 이르되, 무화과들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들은
심히 좋고 그 나쁜 것들은 너무 나빠서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나쁘니이다, 하니라.](3). 주님은 자신이 보여준 환상들을
예레미야에게 물으셨습니다. 예레미야는 본 대로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무슨 뜻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무엇을 보느냐?고 믈으셨습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크게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는 문자 그대로 읽는 것을 지나서
해석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읽는 그대로를 믿으면
됩니다. 주님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해서 우리에게 의미를
가르쳐 주십니다. 요셉은 말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그 꿈들을 고하소서, 하니](창40:8). 다니엘 역시
해석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단2:45,4:24).
예레미야는 자신이 본 것을 말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본 것, 읽는 그대로를 말해야 합니다.
4-7절입니다. 주님은
예레미야가 본 것을 해석해 주셨습니다. 좋은 무화과들에
대한 해석입니다. [주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주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복을 주려고 이곳에서 갈대아 사람들의 땅으로 보낸
자들 곧 유다에서 포로로 끌려간 자들을 이 좋은
무화과들같이 인정하리니 이는 내가 내 눈을 그들에게
고정하여 복을 주고 그들을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그들을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그들을 심고 뽑지 아니할 것임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 나를 아는 마음과 내가 주인 줄 아는
마음을 주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는 그들이 자기의 온 마음으로 내게
돌아올 것임이라.](4-7). 포로로 사로 잡혀 간 자들이 좋은
무화과들입니다. 포로로 사로 잡현 간 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다시 데려 오시겠다고 하십니다. 올 때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아는 마음을 주시고, 그들이
온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오게 하십니다. 이것이 포로된
자들이 가진 유일한 소망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잡혀 간 자들이 저주를
받은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들이 남아 있는 자들에 비해
훨씬 복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때로 우리 앞에 놓인
사건들, 비극들이 행, 불행을 결정하는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저주라 생각하는 것들이 후에 훨씬 복(福)이
되는 경우는 허다합니다.
둘째, 초기에 받는 고난이
우리에게 더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빨리 받으면
받을수록 더 좋습니다. 1차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2차
포로들보다 낫고, 2차에 포로로 잡혀 간 자들이 마지막에
포로로 잡혀 간 자들보다 낫습니다. 어릴 때 맞는 것이 커서
맞는 것보다 낫습니다. 이는 징계의 효과가 그만큼 더 크기
때문입니다. 매도 빨리 맞을수록 좋다는 말이 있듯이 징계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그가 홀로 앉아서 잠잠함은 그분께서 그것을
그에게 지게 하셨기 때문이라.](애3:27-28).
셋째, 포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금은 용광로에서 단련되고, 은은
도가니에서 단련되듯이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고난
가운데 두심으로 정련하십니다. 시련은 결코 무서운
재앙만은 아닙니다. 시련은 후에 의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욥은 고백하기를,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분께서
아시나니 그분께서 나를 단련하신 뒤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고 했습니다.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 죄에 대한 심판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따듯한
사랑과 은혜가 쉼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한 가지
성품은 결코 다른 성품을 침해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사랑을 져버리지 않습니다.
넷째, 비록 치욕스럽고
힘든 포로 생활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그들의
유익을 위해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들은 포로 생활을 통해
고난을 받고 유일신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다시는 우상을
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길을
잃었사오나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란
말씀대로 포로기를 마친 후에 그들은 주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그들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할 때에도 그들을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바빌론에 있을 때에도 그들에게 눈을
고정시키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나홀로 있는 것같고,
버림받은 것 같을 때에 하나님의 눈길이 우리 위에 머물러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여섯째, 주님은 구출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들을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순결하게 합니다.
일곱째, 하나님은
그들에게 나를 아는 머리가 아니라 나를 아는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나를 아는
마음과 내가 주인 줄 아는 마음을 주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는 그들이
자기의 온 마음으로 내게 돌아올 것임이라.](7). 성경은
늘 마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징계를 주시는 가장 큰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마음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망하고 맙니다. 많은 사람들이
머리로는 주님을 안다고 하지만 마음으로 주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망합니다.
8-10절입니다. 주님은 나쁜
무화과들에 대해 해석해 주셨습니다. [또 주께서 분명히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의
통치자들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 곧 이 땅에 남아 있는
자들과 이집트 땅에 거하는 자들을 너무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그 나쁜 무화과들같이 내어 주되 땅의 모든 왕국으로
옮겨지도록 넘겨주어 그들을 상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몰아낼 모든 곳에서 치욕거리와 속담거리가 되게 하고
조롱과 저주가 되게 할 것이며 내가 칼과 기근과 역병을
그들 가운데 보내리니 마침내 그들이 내가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었던 땅에서 진멸되리라, 하리라, 하시니라.](8-10).
남아 있는 자들은 동료, 친척들이 잡혀가는 것을 보면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쁜 무화과들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완악했는지 에스겔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때가 가깝지
아니하니 우리가 집들을 짓자. 이 도시는 가마솥이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 하느니라.](겔11:3). 이들은 막가는
인생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스스로 살길을 찾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집트로 이민을 갔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망명길에 올랐던 사람들은 그
나라에서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을 반겨
주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치욕거리와 속담거리가 되었고, 조롱과 저주가 되었습니다.
걸핏하면 재산을 몰수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고국으로 찾아 들어도 평안이 없었습니다. 시드기야 11년에
완전히 멸망당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4장은 단지
시드기야 당시의 예언일 뿐만 아니라 야곱의 대환란의
전조를 역사적 사건으로 미리 보여준 말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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