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예레미야 애가 1:1
요절: 예레미야 애가 3:22-23
오늘은 예레미야 애가를 공부하기 전에 먼저 ‘눈물’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눈물없이 눈물의 애가를 공부하는 일이 너무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대언자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대언자)로 불립니다. 특히 그가 쓴 예레미야 애가는 장송시라 불릴만큼 흐르는 눈물이 많습니다. 패망한 예루살렘을 향해 우는 그의 눈물의 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눈물을 흘리시며, 우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여러 차례 눈물을 흘리셨음을 기록합니다. 그 중에 한번은 예루살렘을 향해 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사 그 도시를 보시고 슬피 우시며](눅19:41). 주님은 말씀을 전했지만 회개하지 않는 도시를 보시고 슬피 우셨습니다. 말씀을 증거했지만 전혀 회개하지 않고 멸망을 목격했던 예레미야의 심정과 동일한 눈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보고 감탄했지만, 주님은 그것을 보고 우셨습니다. 이는 성도들이 언제 눈물을 흘려야 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죄로 인해 영원한 불로 멸망당할 이 세상을 향해 여러분은 슬피 울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믿지 않는 타락한 도시, 이웃, 친구, 친지들을 향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슬피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인간의 몸에서 나는 중요한 세 가지 액체는 피, 땀, 눈물입니다. 이 셋은 모두 죄의 결과로 인해 우리가 겪고 있는 것입니다. 피는 육체의 생명을, 땀은 육체의 수고를 나타내는 반면 눈물은 사람의 감정, 마음을 나타냅니다. 눈물을 흘려 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울음으로 이 세상을 시작합니다. 생의 시작부터 흘린 눈물은 이 생을 마감하고 저 하늘의 하나님 앞에서도 두 번이나 더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눈물이 없는 사람이나 눈물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언제 우셨습니까? 요한복음 11:35, [예수님께서 우시더라.](Jesus wept).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는 마리아의 눈물과 거기에 있는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주님은 영으로 신음하시고, 괴로워하시며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셨으며, 생명이시며, 부활이신 하나님 앞에서, 죄로 인해 죽음을 맞는 인간들의 비극에 깊이 괴로워 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죽어 가는 혼들의 미래를 보면서, 슬피 울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는 메마른 눈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잃어버린 혼들에 대해 연민도 동정도 없이, 슬피 울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통곡하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언제 우셨습니까? 히브리서 5:7,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육체로 거하는 동안에 자기를 죽음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분에게 강렬한 부르짖음(strong crying-울부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또 친히 두려워 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어 주셨느니라.](히5:7). 주님이 흘리신 눈물은 우리의 눈에 있는 눈물을 닦아주기 위한 눈물이셨습니다. 주님을 영접한 성도들은 이전에 흘리던 죄와 허물, 죽음의 두려움, 허무로 인한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인생에 대한 걱정과 염려, 불안으로 인한 눈물이 없어집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린 강렬한 울부짖음과 눈물은 죄의 독소를 제거하는 그런 눈물이셨습니다. 눈물의 기도는 언제나 강렬한 효력이 있습니다. 주님이 강렬한 울부짖음과 눈물로 기도했다면 이는 성도들이 의심 없이 따라야 할 기도의 본이며, 자세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눈물을 흘려 보셨습니까? 강렬한 울부짖음과 눈물로 기도를 드려 보셨습니까? 죄로 인해 넘어지고, 세상으로 미끄러져 가는 자신을 위해 울어 보셨습니까? 십자가를 묵상하며 눈물을 흘려 보셨습니까? 교회를 위해 울부짖는 기도를 올려 보셨습니까? 잃어버린 혼들을 위해, 울어 보셨습니까? 이 땅에서 눈물이 메마른 사람일수록 저 하늘에서 더 많은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눈물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습니다.
어떤 눈물은 피보다 더 진한 것도 있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의 타락은 성도들의 눈에서 눈물이 메마른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은 “tea spoon 한 개 정도의 눈물로 100 갤런(456리터)의 물의 부식을 방지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눈물에는 단지 누선(淚腺)에서 나오는 분비물이 아닙니다. 한 방울의 눈물 속에는 아주 적은 양의 염분과 단백질, 당류 외에도 살균 작용을 하는 리소자임(lysozyme)이란 효소가 들어 있습니다. 눈물은 눈의 건강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평소 눈물은 눈동자를 보호하는 윤활유 역할을 하며, 세균이 침입할 경우에는 살균 작용을 합니다. 화학자들에게 눈물은 염화나트륨과 칼슘을 비롯한 약간의 다른 화학 원소들에 불과하고, 생리학자들에게는 분비물에 불과하며, 철학자들에게는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것에 불과한지 몰라도, 저와 여러분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눈물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이며, 마음 속 깊은 샘에서 길어 올린 영혼의 증류액이며, 고난과 시련의 체로 여과한 감정의 침전물입니다.
◎ 히스기야의 눈물- 생명을 연장하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눈물을 보시며,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열왕기하 20:3 [오 주여, 간청하오니 내가 진실함과 완전한 마음으로 주 앞에서 걸었으며 또 주의 눈앞에서 선한 것을 행하였음을 이제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였더라(wept sore)], 히스기야의 통곡하는 기도는 즉시 하나님께 응답되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대장 히스기야에게 말하기를, 주 곧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셋째 날에 주의 전에 올라가겠고](왕하20:5). 주님은 히스기야가 하는 기도 소리를 다 들으셨고, 그가 흘리는 눈물을 다 보셨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백성을 위한 것도 아니었으며, 조국을 위한 것도, 주의 영광을 위한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단지 자신을 위한 기도였으며, 생명을 연장해 달라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기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의 통곡하는 간구에 자애(慈愛)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가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심하게 통곡”하였기 때문입니다. 강해 보이는 남자도 여자의 눈물에 약하듯이, 주님은 성도들의 진실한 눈물 앞에 약한 분이십니다. 눈물을 흘릴 때 주님은 그 눈물을 닦아주시고, 거기서 구해 주십니다. 눈물이 없는 성도는 주님의 닦아주심과 구해 주심의 은혜를 결코 체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께서 내 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시116:8).
◎ 민족을 위한 기도- 에스더, 느헤미야, 예레미야
히스기야와 달리 에스더는 죽기를 각오하고(Es4:16), 왕 앞에 나아가 민족을 위해 눈물로 간구했습니다. 에스더 8:3, [에스더가 다시 왕 앞에서 말하며 왕의 발아래 엎드려서 아각 사람 하만이 유대인들을 치려고 꾸민 계략과 해악을 제거해 주기를 눈물로 간청하니] 유대 민족이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 에스더는 목숨을 걸고 왕 앞에 간구했습니다. 그는 눈물로 간청했습니다. 진정한 민족주의자는 민족의 문제와 위기를 들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조국을 사랑하십니까? 동족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조국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십시오. 조국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성서 조선’을 창간한 김교신 목사는 창간사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성서요, 하나는 조선이라. 내가 먼저 세움을 입고 조선 또한 성서 위에 반드시 세우기를 바라며...” 조국을 위해 이런 기도를 드리는 성도가 많은 나라가 강한 나라요, 부강한 나라입니다. 대언자 예레미야는 동족을 위해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던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2:11, [내 눈이 눈물로 약해지며 내 애가 타고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내 백성의 딸이 멸망하여 아이들과 젖먹이들이 도시의 거리들에서 기절하기 때문이로다.](애2:11). 동족이 당하는 심판은 곧 자신의 슬픔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의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철저히 분리되어 있지만 그들이 당하는 슬픔과 고통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죄로 인해 고통받고, 심판 받는 조국의 현실을 돌아보며 눈물로 기도해야 하며,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조국 대한민국을 바라보며,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멀리 이곳에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오 시온의 딸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같이 흘릴지어다. 스스로 안식하지도 말며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애2:18).
느헤미야는 수산궁의 고위 공직자로 근무했습니다. 당시 왕의 잔을 맡은 자였기 때문에 권력 서열상 손가락 안에 드는 그런 지위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늘 동족들이 돌아간 예루살렘에 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들려오는 흉한 소식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위에 맞는 행정력, 정치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울었습니다. [내가 이 말들을 듣고 앉아서 울고 여러 날 동안 애곡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르되, 오 주 하늘의 하나님 곧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명령을 지키는 자들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내가 간청하나이다](느1:4-5). 그는 무엇보다 먼저 기도해야 함을 알았고, 눈물로 기도했을 때 예루살렘 성벽 재건 뿐만 아니라 ‘성별’이란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우리는 언제 눈물을 흘립니까? 일반적으로 슬플 때, 기쁠 때 눈물을 흘립니다. 동일한 사건을 보고, 들어도 한 쪽은 슬퍼서 울고, 또 한 쪽은 기뻐서 웁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믿음이 없는 불신자일지라도 고통 가운데 있는 자식을 위해 예수님 앞에 눈물의 간구를 드리는 부성애(父性愛)에 대한 기사가 나옵니다. 마가복음 9:24, [그 아이의 아버지가 곧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주여 믿나이다. 나의 믿음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막9:24). 비록 믿음이 없을지라도, 자식을 살리기 위한 열정과 사랑으로 인해 눈물로 부르짖는 아버지를 볼 때,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돕고,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눈물은 어떤 어머니의 눈물보다 더 진한 감동과 강한 호소력이 있습니다.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울었던 야곱의 눈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위로 받기를 거부했습니다. [그의 모든 아들딸들이 일어나 그를 위로하되 그가 위로 받기를 거절하고 이르되, 내가 애곡하며 무덤에 내려가 내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이같이 그를 위하여 울더라.](창37:35). 겉으로 울지 못한다 할지라도 아버지는 속으로 웁니다.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의 눈물은 승리의 기쁨에 들떠 있던 백성들을 슬픔 가운데 빠지게 하였습니다(삼하18:33). 남자는 결코 울어서는 안된다는 유교 문화에 젖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지만 성경대로라면 아버지들은 자식을 위해 늘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 회개의 눈물
눈물은 물리적인 기능 외에도 영혼을 정화시키는 효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인은 누구라도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회개는 말씀의 빛을 통해 자신의 죄인 됨을 바라보고 주님께 대한 올바른 반응입니다. 회개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의 전인격적인 반응이어야 합니다. 나의 지성은 나의 죄인 됨을 알고, 그에 따라 나의 의지는 돌이켰지만 나의 감성은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 회개는 온전히 합당한 회개의 열매를 거두기 어려울 것입니다. 누가복음 7:37-38, [보라, 그 도시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더니 그녀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서 음식 앞에 앉아 계신 것을 보고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분 뒤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분의 발 곁에 서서 눈물로 그분의 발을 씻기 시작하여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분의 발에 입을 맞추며 향유를 부으니](눅7:37-8). 마음이 비통하지 않고, 슬픔이 없고, 눈물이 없는 회개는, “다시 회개를 필요로 하는 회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3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닭이 울 때 어떻게 회개했는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6:75, [이에 베드로가, 수탉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밖에 나가 몹시 슬프게 우니라.] <예화- 꾸중을 듣고 울 줄 아는 아이, 잘못을 지적했을 때 울 줄 아는 학생, 울 줄 아는 죄수는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울 줄 모르는 사람은 결코 회복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4:72, [수탉이 곧 두 번째로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수탉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이것을 생각하며 슬프게 우니라.] 누가복음 22:61,2, [주께서 돌이키사 베드로를 바라보시니 베드로가 그분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수탉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밖에 나가 몹시 슬프게 우니라.] 베드르의 눈물은 진실한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먼저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거기에 반응해서 그 말씀을 생각하며, 몹시 슬프게 울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에 앞서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에 따른 여러분의 반응을 이 시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연민에 젖어든 눈물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우는 눈물이 바로 진실한 회개인 것입니다. 죄인이 흘리는 회개의 눈물은 약함의 표시가 아닙니다. 회개의 눈물은 마음을 씻게 하는 비누와 같은 것입니다. 눈물은 수천 마디의 말보다 더 설득력이 있으며,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깊은 뉘우침, 말할 수 없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눈물을 흘렸다고 그것이 모두 진실한 회개를 했다는 보증은 될 수 없지만, 진실한 회개에는 항상 눈물이 동반되는 법입니다.
◎ 눈물로 씨를 뿌리다.
딱딱한 죄인들의 마음에 말씀의 씨를 뿌린 후 그냥 돌아 서 버리면 그 말씀은 언제나 그대로 있거나, 새가 와서 먹어 버립니다. 말씀의 씨를 뿌린 농부는 눈물의 이슬과 비를 뿌려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수분이 없으면 자라지 못합니다. 주님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수분이 부족하므로 곧 시들어 버렸고](눅8: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126:5,6절을 보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들은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귀중한 씨를 가지고 울며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뻐하며 자기의 곡식 단들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5,6). 씨앗이 발아하는데 3가지 필수 요소가 있습니다. 온도, 물, 공기입니다. 말씀의 씨앗 역시 따스한 가슴과 눈물과 세상의 염려와 재리(財利)로 숨이 막히지 않아야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를 하는데, 말씀의 씨앗을 부지런히 뿌리는데 비해서 열매가 없어 낙심되십니까? 그렇다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뿌린 씨앗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도록 혼들을 위해 눈물을 쏟아 부어 보십시오. 반드시 ‘기뻐하며 자기의 곡식 단들을 가지고 돌아 올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점에서 어떻게 주를 섬기며, 어떻게 전도하며, 어떻게 사역하는가를 보여준 성도들의 기준이요, 모범이었습니다. 두 구절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0:19-21, [곧 온전히 겸손한 마음과 많은 눈물로 주를 섬기며 또 숨어서 나를 덮치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시험을 받으면서도 주를 섬기고 너희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숨기지 아니하고 보여 주며 공중 앞에 서나 각 집에서나 너희를 가르치고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증거 하였노라.](행20:19-21). 바울의 사역은 눈물의 사역이었습니다. 20:31, [그러므로 깨어 있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31). 복음전파 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가르쳐 양육하는 것 또한 눈물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쓴 13권의 서신서 역시 눈물로 기록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2:4, [내가 마음이 몹시 괴롭고 아파서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근심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에게 더욱 넘치게 사랑을 베푸는 것을 너희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함이라.] 눈물로 썼습니다. 눈물로 쓴 글을 읽을 때, 우리의 눈에 역시 눈물이 흘러야 정상입니다. 성경을 읽는데 아무런 감동이 없고, 아무런 찔림이 없고, 아무런 기쁨이 없다면 아직 성경을 읽을 줄 모르는 것입니다. 메마른 눈으로 읽는 성경 독자는 성경의 저자와 만남이 없는 글자 읽기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성경의 글자 속에 들어 있는 생명과 영을 접하는 독서가라면 흐르는 눈물 없이 성경을 읽을 수 없을 것입니다. 눈물로 주를 섬기고, 눈물로 복음을 증거하고, 눈물로 성도를 훈계하고, 눈물로 편지를 쓰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빌립보서 3:18a, [(이는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이기 때문이라....](빌3:18a). 이곳 미국 교포 사회는 흔하고 흔한 직업이 목사요, 신학생입니다. 교회들은 모두 사교 클럽이 되었고, 장사하는 집이 되었습니다. 모두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저와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정죄하고 저주하고, 판단하고 말아야 합니까? 우리는 그들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이며, 바울이 보여 준 본입니다.
예) 전설적인 설교자 죠지 휫필드는 설교단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제가 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는 줄 압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위해 울지 않으니, 제가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파괴되어 가고 있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데 어찌 제가 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작 울어야 할 사람들은 희희낙락하고, 복음의 원수 노릇을 하면서도 즐거워하는데, 성경대로 믿는 저와 여러분이 어찌 울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점점 더 급격하게 배교의 물결에 휩싸여 가는 교회와 교역자(성직자)들을 볼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존엄성이 무시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순수한 신앙 양심을 가진 신자를 찾아 볼 수 없는 이 현실에서 우리는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울어야 합니다.
◎ 눈물을 흘린 예들
성경에 울었다는 말이 처음 나오는 것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몸종 하갈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쫓겨났을 때입니다. 물이 없어 아이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 울었습니다. 이것은 모정(母情)의 눈물입니다.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서 울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화살이 미치는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 가서 그를 마주보며 앉았으니 이는 그녀가 이르기를,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였음이더라. 그녀가 그를 마주보며 앉아서 목소리를 높여 우니](창21:16). 구원받지도 못한 자식이 멋대로 살다 죽는다면 더 통곡할 일이며, 주님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성경을 외면한 채 살다 죽는다면 더 슬픈 일입니다. 우리는 하갈처럼 자녀의 육신적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 가운데 있다면 울어야 합니다.
야곱은 요셉을 위하여 울었습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늙은 나이에 얻은 요셉이 자신의 심부름을 갔다가 짐승에게 찢겨 죽은 줄 알고 슬피 울었습니다. 요셉이 누구입니까? 창세기 30:25에 따르면,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본토 내 고향으로 가게 하시되](창30:25). 요셉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습니다. 그가 났을 때 야곱은 본토로 돌아갈 결심을 했고, 주님은 야곱을 약속대로 본토 고향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야곱은 울었습니다. [그의 모든 아들딸들이 일어나 그를 위로하되 그가 위로 받기를 거절하고 이르되, 내가 애곡하며 무덤에 내려가 내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이 같이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창37:35).
이와는 반대로 자식을 얻지 못한 한나는 아들을 얻기 위해 울었습니다. 그녀가 흘린 통곡의 기도는 아들 사무엘을 낳게 했습니다. [한나가 혼이 괴로운 가운데 주께 기도하고 심히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주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사내아이를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토록 그를 주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삼상1:10-11). 한나는 자신의 신세를 남편이나 첩이나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쏟아 놓았습니다. 문제를 하나님 앞에 풀어놓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사람입니다.
자녀를 위해 운 대표적인 사람 가운데 하나는 범죄한 자식의 죽음을 슬피 통곡한 다윗입니다. 죽어 마땅한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에게 반역한 압살롬을 위해 울었습니다. 다윗에게는 많은 처와 첩이 있었습니다. 자녀 역시 매우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인물이 잘난 자식은 압살롬이었습니다. 압살롬은 가장 문제 많은 자식이었습니다. 압살롬은 배다른 동생 암논을 죽였고(여동생 다말의 일로), 아버지 다윗을 향해 군대를 일으켜 반역을 했고, 백성들 앞에서 아버지의 첩들에게 들어갔습니다. 다윗의 부하 장군이어던 요압은 다윗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가 죽자 [이에 왕이 크게 격동하여 문 너머에 있는 방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이같이 말하기를, 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18:33). 압살롬은 다윗에게 어떤 역적보다 큰 죄인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잃어버린 자식이었습니다. 압살롬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전히 그를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죄인들을 향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압살롬은 아버지의 영광, 지위, 모든 것을 찬탈하려는 찬탈자였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지위를 찬탈하려는 찬탈자였습니다. 이 시대의 모든 죄인들은 압살롬과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 그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광을 돌리는 찬탈자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런 예는 모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향해 대적했던 누이 미리암을 향해 울었습니다. 미리암은 영적 시기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방 여자(이디오피아 여인)와 결혼한 문제로 비방을 했습니다. 모세는 그 문제로 하나님 앞에 엎드렸고, 주님은 미리암에게 문둥병을 들게 하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죽어 가는 누이를 위하여 치료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모세가 주께 부르짖어 이르되, 오 하나님이여, 간청하건대 이제 그녀를 고쳐 주옵소서, 하니라](민12:13). 이는 우리 주님을 대적하는 육신의 유대인 형제들을 향해 눈물로 기도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자신을 배신하고, 시기하고, 거짓 증거를 바탕으로 부당한 판결을 내려 십자가에 처형한 유대인들을 향해 십자가에 높이 달리셔서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더라.](눅23:34)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양들을 향한 목자들의 사랑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동료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위해 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릴 때 사무엘은 온 밤을 주께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이는 그가 나를 따르는 것에서 돌이켜 내 명령을 수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이에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주께 부르짖으니라](삼상15:11). 하나님의 버림받은 자들, 하나님의 원수된 자들을 향해 우는 것이 영적 제사장들이 해야할 임무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거절함으로, backsliding함으로써 복음의 진리에서 멀어져 세상과 연합한 형제들을 향해 울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누가 잘못했을 때 비방하기에 앞서 울어야 합니다. 비참하고 가련한 영혼은 사울 자신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이 죽는 날 까지 그를 보려고 다시 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위하여 애곡하였더라](삼상15:35a). 우리는 형제들을 온유한 영으로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 그들의 회심을 위해서, 영적 회복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크게 회개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주를 위해 흘린 눈물이 적으면 적을수록 저 하늘에서 흘릴 눈물은 많아질 것입니다. 후회와 회한의 눈물이 저 하늘에서 하염없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 땅에서 흘린 모든 눈물을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눈물을 저 하늘에서 흘릴지도 모릅니다. 요한계시록 7:17, [이는 왕좌 한가운데 계시는 어린 양께서 그들을 먹이시며 생명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임이라, 하더라.](계7:17).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성도들이 흘린 눈물을 닦아주시는 장면입니다. 성도들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지 못했던 죄, 자신이 한 육신의 행위들, 열매 없는 어둠의 일들, 받을 수 있는 보상들을 잃어버린 안타까움, 은혜로 구원받은 이후의 나태한 삶에 대한 후회로 쉼없는 눈물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지상에서 눈물로써 주를 섬기고, 눈물로써 씨를 뿌려 보지 않았고, 눈물로 기도해 보지 않았고, 눈물로 살아 보지 않았기에 흘리게 될 회한의 눈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땅에서 눈물을 흘리시겠습니까? 저 하늘에서 눈물을 흘리시겠습니까? 죽음은 결코 망각의 강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십자가의 은혜와 주님의 사랑은 육신이 죽은 이후에 저 하늘에 까지 성도들에게 생생히 기억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든 행위 역시 생생하게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 천년 왕국의 1000년 동안은 성도들의 눈에 눈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년이 끝날 무렵 다시 한번 더 눈물을 쏟아 놓게 됩니다. 이 눈물이 성도들이 흘릴 마지막 눈물이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4,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음이라.](계21:4). 죽은 자들이 모두 일어나 심판을 받아, 영원한 불 못으로 던져지는 것을 지켜보는 성도들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질 것입니다. 복음으로 구원할 수 있었던 많은 사람들, 특히 내가 눈물로 복음의 귀한 씨를 뿌릴 수 있었던 사람들, 눈물로 기도해 줄 수 있었던 사람들, 눈물로 섬겨야 했던 사람들에게 눈물을 아낌으로써, 몇 백배 몇 천배 더 많은 통곡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 이 시간 우리 마음 가운데 은혜를 주셔서 이 땅에서 눈물로 주를 섬기기를 결단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 같이 기도하는 시간이 있기를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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