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예레미야 애가 1:1
요절: 예레미야 애가 3:22-23
예레미야 애가는 5장, 154절, 3,411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예레미야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직후 쓰여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애가는 말 그대로 노래이기 때문에 운율이 정확하며 시편 119편처럼 각 행의 머리 글자를 모으면 말이 되는 두(頭) 문자 배열로 씌어져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의 절수를 보면 22절 아니면 22절의 배수로 되어 있습니다(22,22,66,22,22). 이는 히브리어 철자가 22자이기 때문에 각 행의 시작이 히브리어 알파벳 숫자의 연속으로 배열했기 때문입니다. 3장은 66절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매 3절마다 히브리어 알파벳이 배열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율법, 대언서(선지서), 시편(writings)으로 나누었는데 예레미야 애가는 예레미야 다음이 아니라 솔로몬의 아가, 룻기, 전도서, 에스더, 예레미야 애가로 구성된 시편의 두루마리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애가란 말은 슬픈 노래란 뜻 외에 장례식 때 부르는 장송곡, 장송시란 의미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예루살렘이 멸망하자 그 슬픔을 노래한 일종의 장송시입니다.
우리는 이 애가를 통해 대언자 예레미야의 가슴에 맺힌 슬픔과 눈물을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주제는 예레미야 개인의 슬픔을 노래하기 이전에 예레미야를 통해 보이신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주의 백성이 죽을 때 주님은 고통을 당하시며, 그들이 고통을 당할 때 주님 역시 고통을 당하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출3:7). 예레미야 애가의 핵심 요절은 3:22-23입니다. [[주]의 긍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하였나니 그 까닭은 그분의 불쌍히 여기심이 끝이 없기 때문이로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신실하심이 크시도다.](애3:22~23). 유다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예레미야가 통곡을 하며 노래한 곳은 예루살렘 북쪽 골고다로 불리는 언덕이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바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치 않는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며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곳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증언한대로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있게 될 영광을 미리 증거해 주실 때에 /그것들이/ 무엇을 혹은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 탐구하였느니라.](벧전1:11)라는 말씀대로 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미 이런 사실을 말씀을 통해 미리 알고 있었고, 자신이 흘릴 눈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이것을 듣지 아니하면 내 혼이 너희 교만으로 인하여 은밀한 곳에서 울 것이며 [주]의 양떼가 포로로 끌려감으로 인하여 내 눈이 심히 통곡하고 눈물을 쏟으리라.](렘13:17). 이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울었던 통곡의 눈물과 동일한 것입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모든 것이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대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병아리를 자기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들을 함께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버림받아 황폐하게 되리라.](마23:36~38).
◎ 첫 번째 눈물 - 징계의 슬픔
죄인들은 죄로 인해 울고, 징계의 슬픔으로 인해 울고, 심판의 고통으로 웁니다. 1:2을 보십시오. [그녀가 밤에 심히 울매 그녀의 눈물이 뺨에 흐르는도다. 그녀의 사랑하는 자 가운데 그녀를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 그녀의 친구들도 다 그녀를 배반하고 그녀의 원수가 되었도다.](애1:2). 이런 상황은 누구라도 울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후회의 눈물입니다. 그들이 울었던 눈물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1:1-6은 예루살렘이 한 때 여러 민족 가운데 큰 자요, 여러 지방의 공주로 불릴 만큼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였음을 말해 줍니다(1:1). 큰 자란 권세와 부, 공주란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그런 예루살렘이 갑자기 멸망했습니다. 한 때는 존경받는 민족이요,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또 전에는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강한 왕들이 있어서 강 건너의 모든 지역을 다스리매 /사람들이/ 세금과 조공과 관세를 그들에게 바쳤도다.](스4:20). 그러나 지금은 수치스런 도시가 되었습니다. 기쁨은 슬픔으로 변했고, 승리는 패배로 변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에 많은 것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1:2에 보면 “그녀의 사랑하는 자들”, “그녀의 친구들”이 나옵니다. 사랑의 대상은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정욕이며, 우상 숭배입니다. 주님은 구약의 모든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은 신명기 6: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 명령이니라.](막12:30).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대신 사랑하는 자들이 많고, 친구들이 많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멸망의 지름길입니다.
죄는 슬픔을 가져오고, 패배를 불러오고 친구 되신 하나님을 원수로 돌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싸우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을 대적해서 싸우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약4:4)고 말했습니다. 많은 연인들, 많은 친구들이 아닌 하나님 한 분을 친구로 삼고, 하나님 한 분을 사랑의 대상으로 두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이 고통과 불행을 당하던 날에 곧 그녀의 백성이 원수의 손에 넘어가고 그녀를 돕는 자가 없으며 대적들도 그녀를 보고 그녀의 안식일들을 조롱하던 때에 자기가 옛날에 누리던 모든 즐거운 일을 기억하였도다.](애1:7). 뒤늦은 후회였습니다. 언제나 이스라엘을 도우시던 하나님의 손길은 더 이상 돕는 자가 아니라 대적하는 손이요, 심판의 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부와 명예와 기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간증을 잃어 버렸습니다. 모든 이방인들이 그들을 조롱했고, 비웃었습니다. 누가 그들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출애굽을 주도하셨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겠습니까?(렘2:15-16참조). 이는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맛을 잃은 소금을 던져 버리십니다.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주님은 그들을 징계하십니다.
◎ 두 번째 눈물- 공의로운 심판의 집행
1:16을 보십시오. [이 일들로 인하여 내가 우나니 내 눈에서 곧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도다. 내 혼을 구제(救濟)할 위로자가 내게서 멀리 계시는도다. 원수가 이겼으므로 내 자녀들이 황폐하게 되었도다.](애1:16).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리며 더욱 울었던 것은 이 눈물을 닦아줄 위로자가 멀리 계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에는 1장에만 위로하는 자의 없음에 대해서 6번이나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1:2,9,16,13,17,21, 2:13, 3:54).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분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긍휼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고후1:3). 성령은 위로자입니다(요14:16,26,15:26,16:7). 성경은 위로의 말씀입니다(살전4:18).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형제들입니다. 그런데 위로자가 없고, 멀리 계시다는 것은 슬픔을 이길 힘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죄와 불순종입니다. 그리고 위로자가 없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릴 때 곁에서 그 눈물을 닦아줄 위로자가 있다면 족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상처입은 혼들이 유난히 많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좀처럼 위로자 성령으로부터 위로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형제들이 형제들에게 서로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각자 유능한 바울이 되고 싶어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바나바입니다. [키프러스 지방 출신의 요세라 하는 레위 사람이 있어 사도들이 그를 바나바라 하더니 (이것을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라.)](행4:36).
1:18-22절을 보십시오.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말씀대로입니다. [[주]는 의로우시니 이는 내가 그분의 명령을 거역하였음이로다. 모든 백성이여, 청하건대 /너희는/ 듣고 나의 슬픔을 보라.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포로가 되어 갔도다.](애1:18).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슬픔의 씨앗이고, 눈물의 근원입니다. 대부분의 눈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데서 기인합니다. 이스라엘은 백성들은 자신들의 왕이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들 중에 한명을 왕으로 세워서 다스림받기를 원했습니다. 그 때 사무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만일 [주]를 두려워하여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고 [주]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려면 너희와 또 너희를 통치하는 왕이 [주] 너희 하나님을 계속해서 따라야 할지니라.](삼상12:14). 그러나 이 말씀은 철저히 무시되었습니다. 왕들은 계속해서 주님을 거부했고, 백성들은 주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포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전혀 부당하지도 편파적이지도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고백했듯이 “[주]는 의로우시니...”입니다. 예레미야는 동족이 당하는 모든 슬픔을 자신에게로 전가해서 ‘나의 슬픔, 나의 죄’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 세 번째 눈물 - 심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내 눈이 눈물로 약해지며 내 애가 타고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내 백성의 딸이 멸망하여 아이들과 젖먹이들이 도시의 거리들에서 기절하기 때문이로다.](애2:11).
심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2:1에 주께서 친히 분노하사...2:2,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를 삼키시고, 3절에서 “그분께서...” 4절 역시 “그분께서” 5,6,7,8절 모두 주어는 주님이십니다. 야곱이 불타고, 멸망당한 것은 분명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에게 당한 것이지만 성경은 계속해서 그 일을 주께서 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심판은 그 종류가 무엇이든지 다 주께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 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길이 복된 길이요, 그렇지 않을 때 갑작스런 패망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화려했던 솔로몬의 성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마치 오늘날 ‘폭파 공법’으로 무너뜨린 것처럼 사라졌습니다(8-9). [그녀의 성문들이 땅 속으로 가라앉는도다. 또 그분께서 그녀의 빗장들을 파괴하시고 부수시므로 그녀의 왕과 그녀의 통치자들이 이방인들 가운데 있으며 다시는 율법도 없고 그녀의 대언자들도 [주]께로부터 환상을 받지 못하는도다.](애2:9). 눈에 보이는 성벽과 성전이 파괴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통치자들과 대언자들이 모두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으므로 더 이상 율법도 환상도 없다는 점이 더 문제입니다. 성경이 없는 세상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는 태양이 없는 지구를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암흑입니다. 율법이 없고, 주께로부터 환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주님과 교제가 단절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가장 참혹한 심판이며, 우리가 울어야 할 진정한 이유입니다.
◎ 네 번째 눈물- 말씀대로 이루어지다.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오 시온의 딸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같이 흘릴지어다. 스스로 안식하지도 말며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애2:18).
약 40년 동안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서 설교했습니다. 다가올 심판을 선포했고, 생생하게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실한 하나님의 말씀대신 인기 영합주의에 물든 거짓 대언자들의 설교를 더 좋아했습니다. [네 대언자들이 너를 위해 헛되고 어리석은 것들을 보았으므로 네 불법을 들추어내고 네 포로 된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너를 위해 거짓된 경고와 추방당할 구실만 보았도다.](애2:14). 거짓 대언자들은 백성들의 불법을 들추어 내지 못했고, 포로된 것을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행한 거짓된 경고는 민족의 멸망을 앞당겼습니다. 이는 대언자들만의 책임은 아닙니다. 백성들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대언자들은 거짓되이 대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방법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하니 그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5:31). 이는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선생들을 쌓아 두고 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들을 따를 것임이라.](딤후4:3~4). 성도들이 말씀대신 세상과 사람들을 따를 때 잠시는 즐겁지만 후에는 눈물이 쏟아집니다. 시류에 맞추고, 사람들의 입맛에 맞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설교는 사람들의 은밀한 죄와 불법을 들추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 경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부추기고, 용기를 줍니다. 거짓 대언자들이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보십시오. [그 우두머리들은 대가를 바라고 재판하며 그 제사장들은 품삯을 바라고 가르치며 그 대언자들은 돈을 바라고 점을 치면서도 [주]를 의지하여 말하기를, [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아니하냐? 어떤 재앙도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믹3:11). 말은 청산유수(靑山流水)입니다. 사람들은 덕담(德談)이면 아무 것이나 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진리와 비진리, 옳고 그름보다는 지금 나에게 유익이 되는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심각한 영적인 병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한대로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말씀하신대로 이루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미 계획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자신의 말씀을 이루셨도다. 그분께서 무너뜨리시되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셨고 네 원수로 하여금 너로 인해 기뻐하게 하셨으며 네 대적들의 뿔을 세우셨도다.](애2:17). 오늘날 이 시대는 꼭 멸망을 앞둔 예레미야의 시대와 같습니다. 거짓 대언자들이 많았듯이, 거짓 목사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레미야 3장입니다. 1-18절은 주의 진노를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예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위한 것입니다. 백성들을 위해 사역하고, 말씀을 전파했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에게 배척을 받고,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건을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배척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22-41절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찬양입니다. 예레미야는 고난 가운데서 소망을 발견했습니다. 징게와 심판은 겸손하게 했고(20), 고난 자체는 소망을 끊었지만 그것을 통해 주의 긍휼을 기억했을 때 소망이 있었습니다(21). 이스라엘이 진멸되지 않는 것은 주의 긍휼 때문입니다. [[주]의 긍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하였나니 그 까닭은 그분의 불쌍히 여기심이 끝이 없기 때문이로다.](22). 이스라엘이 불타는 고난가운데서도 결코 소멸되지 않는 것은 주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주님의 연민은 끝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하시지만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탄식하십니다. 이사야 49:5, [여인이 어찌 자기의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겠느냐? 참으로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사49:15). 주님은 유다를 심판하시고, 먼 나라로 보내셨지만 그 땅에서 불쌍히 여김을 받게 하셨습니다. [또 그들로 하여금 그들을 포로로 끌어간 모든 자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시106:46). 그래서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난 후에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을 통해 주님이 죄인들을 향해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는 종을 향해서 불쌍히 여겨 탕감해 주셨고(마18:33), 소경을 향해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시력을 받게 하셨고(마20:34), 나병 환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손을 내밀어 그 몸에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할지어다”(막1:41)하셨습니다. 무덤 사이에 거하는 마귀들린 청년을 고쳐 주시며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너를 위해 큰 일들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지들에게 고하라, 하시니](막5:19)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들으러 온 백성들을 보시고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으므로 불쌍히 여기사 많은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시더라.](막6:34)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설교가 끝나신 후에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막8:2)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 실려 나올 때 그것을 보신 주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께서 그 여인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7:13). 주님의 지상 생애 사역은 백성들, 죄인들, 병자들을 향한 깊은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는 연민으로 가득 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소멸되지 않는 것은 주님의 긍휼 때문이요, 이 긍휼은 영원히 변치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주]요, 변치 아니하는 자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너희 야곱의 아들들이 소멸되지 아니하였느니라.](말3:6). 주님의 긍휼과 주님의 변치 않으시는 성품으로 인해 우리는 언제나 안전합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신실하심이 크시도다.](23). 주의 긍휼은 새벽마다 새롭습니다. 어쩌다 한번이 아니라 “아침마다”-매일 아침- 새롭습니다. 매일이란 말은 지속성인데 이것을 성경은 신실함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아침마다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어찌하여 아침마다 그를 찾아보시고 순간마다 연단하시나이까?](욥7:18). 하나님이 방문했을 때 성도가 자고 있으면 주님은 자신의 은혜를 주실 수 없을 것입니다.
◎ 주님은 아침마다 긍휼을 보이시고, 새벽에 만족하게 하십니다. [오 새벽에 주의 긍휼로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가 평생토록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시90:14). 주님은 매일 아침 만나를 내려 주시듯이 아침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공급하십니다. 주님은 아침에 만나를 거두게 하셨는데, 해가 뜨면 녹아 버렸습니다(출16:21). 우리는 아침에 성경을 읽음으로 영적 양식을 취해야 합니다. 아침에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낮에 일터에서 성경을 읽을 수 없습니다.
◎ 대제사장 아론은 아침마다 향을 태워야 했습니다. 성경에서 향은 기도를 예표합니다.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태우되 등잔들을 정비(整備)하면서 그 위에 향을 태울 것이며](출30:7). 우리는 새벽에 기도해야 합니다. 새벽에 조용히 주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 사람은 결코 대낮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성경을 읽고, 아침에 기도함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위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주님을 섬겼습니다.
◎ 아침은 헌신의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은 성전에 봉헌 헌물을 아침에 드리게 했습니다. [제단 위에 있는 불은 그 안에서 계속해서 타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또 번제 헌물을 그 위에 가지런히 놓고 화평 헌물의 기름을 그 위에서 태울 것이며](레6:12). 우리의 헌신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이를수록 좋습니다. 헌신의 능력은 새벽에 주업니다. 주님은 아침마다 성전 문을 열고,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집 사방에 머물렀으니 이는 그들이 책무를 맡아 아침마다 그 집의 문을 여는 일을 하였음이더라.](대상9:27). 주를 섬기는 것은 매일 아침이어야 합니다.
◎ 아침은 만남의 은혜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새벽에 부활한 주님을 만났습니다. 여자들이 늦잠 자고, 자기 할 일 다하고 동굴로 갔다면 그들은 결코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침은 주님과의 만남의 은혜가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주]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니 주는 아침마다 그들의 팔이 되시오며 고난의 때에 또한 우리의 구원이 되시옵소서.](사33:2). 이것이 바로 새벽 기도의 효과입니다.
◎ 아침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습니다. 아침은 주의 신실하심, 긍휼을 새롭게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생에 단 한번, 단 몇 차례만 주의 은혜를 맛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매일 맛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주의 긍휼, 불쌍히 여기심이 아침마다 새롭다고 합니다. 이는 새벽에 주를 만난 대언자의 증언입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신실하심이 크시도다.](애3:23). 주님은 아침마다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 /도시의/ 한가운데 거하시는 [주]는 의로우사 불법을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자신의 공의를 빛으로 내어오시며 쇠하지 아니하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습3:5). 의롭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아침에 주님이 공의를 빛으로 내어 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바른 판단력은 새벽에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새벽보다 정신이 맑은 때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침에 성도들을 깨우치십니다. [{주} [하나님]께서 학식 있는 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하여금 피곤한 자에게 때에 맞는 말을 할 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일깨우시되 나의 귀를 일깨우사 학식 있는 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는도다.](사50:4). 우리는 모두 새벽을 깨우고, 새벽에 기도하고, 찬양하고, 헌신하고, 헌물을 드리고, 모임으로 발길을 옮겨야 합니다. 영적 지식은 새벽에 가장 많이 주어집니다. 영적 깨달음은 새벽에 기도하고 성경 읽을 때 많이 주어집니다.
주님은 이른 새벽에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도시/ 한가운데 계시매 그 /도시/가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요, 하나님께서 그 /도시/를 도우시되 이른 새벽에 도우시리로다.](시46:5).
오전 11시 예배에도 제 때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신 상태가 틀려먹었다고 단언할 수 있으며, 은혜를 받을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24절입니다. [내 혼이 이르기를, [주]는 나의 몫이오니 그러므로 내가 주께 소망을 두리로다, 하는도다.](24). 지상에서 우리가 가진 몫은 파산, 전쟁, 화재 등으로 다 없어질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조국을 잃었고, 동족을 잃었지만 그는 여전히 한 가지 몫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이었습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대로 [내 육체와 내 마음이 쇠약하오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힘이시요, 내 영원한 몫이니이다.](시73:25)한 그대로입니다. 주는 나의 몫이란 말은 주님으로 족하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언제든지 나의 모든 손실을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모든 고난으로부터 건져내실 수 있습니다. 주는 나의 몫이란 것은 내가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할 때 안식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다른 모든 것이 나에게 실망을 주었을지 몰라도 주는 나에게 위로와 힘을 주며, 소망을 줍니다. 눈물의 애가에서 위로와 소망을 얻는 것은 주님이 나의 몫이란 사실을 기억하고 믿기 때문입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는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과 자신을 찾는 혼에게 선하시도다. 사람이 [주]의 구원을 소망하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25-26). 기다림은 소망입니다. 종은 어두워지기를 기다리고, 품꾼은 자기 품삯을 기다립니다. 사자는 먹이감을 기다립니다. 군인은 전역할 날을 기다리고, 학생은 졸업할 날을 기다립니다. 소망이 있고, 확신이 있으면 기다립니다. 심지어 강도떼는 지나가는 사람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기다림은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도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며, 성도들이 자신을 기다릴 때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기다리시리니 이것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그분께서 높임을 받으시리니 이것은 너희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 이는 [주]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 그분을 기다리는 자들은 다 복이 있도다.](사30:18).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며,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립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기다리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내 말을 들으며 날마다 내 성문에서 지켜보고 내 문설주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잠8:34).
기다림은 인내입니다. 기다림의 소망, 즉 인내없이 이룰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인내는 천성(天性)이 아닙니다. 인내는 환난을 통해서 형성됩니다(롬5:3). 성경은 분명히 [환난은 인내를...](롬5:3)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이룹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이루는 줄 너희가 알기 때문이라.](약1:3).
인내는 들은 말씀을 열매 맺게 합니다. 말씀을 들었을 때 우리는 인내로 열매를 맺습니다(눅8:15). 주님은 너희 인내로 너희 혼을 소유하라고 하셨습니다(눅21:19). 인내는 체험을 낳습니다(롬5:4). 사도 바울은 권면하기를,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인내로 기다릴지니라.](롬8:25). 믿음은 곧 보지 못하는 것들을 기다리는 인내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내를 줍니다(롬15:4). 주님은 인내의 하나님이십니다(롬15:5).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은 인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인내하며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3:5). 인내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 위해 필요합니다. [이는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뒤에 그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하여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라.](히10:36). 믿음의 경주는 인내로 하는 것입니다(히12:1). 인내를 통해 완전하게 됩니다. [오직 인내를 완전히 이루라.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완전하고 완벽하여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 무릇 인내없이 되는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매사에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란 주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내란 믿음이 주는 소망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하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받을 때까지 오랫동안 인내하느니라. 너희도 인내하고 마음을 굳건히 하라. {주}의 오심이 가까우니라.](약5:7-8).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결코 실망이 없습니다.
27절입니다.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27). 우리말에도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청년들이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 중에는 다니엘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젊었을 때 먼 이방 나라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덕분에 동족들의 많은 죄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일찍 경고를 받았습니다. 먼 나라에 있었지만 신앙이 새로워지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고생한 사람들의 말년은 아름답습니다. 반면 젊을 때 방탕한 사람들의 말년은 비참합니다. 젊을 때 고난은 인격을 성숙하게 합니다. 마음 가운데 있는 각종 불순물을 제거해 줍니다. 고난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되고,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되면 겸손하게 됩니다. 주님이 주신 멍에는 가볍습니다. [그가 홀로 앉아서 잠잠함은 그분께서 그것을 그에게 지게 하셨기 때문이라.](28). 주님께서 지게 하신 것을 질 때 우리는 방종과 방탕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정금은 불을 두려워하지 않듯이 신앙은 결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십자가를 지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좀 더 일찍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32-33절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비록 괴롭게 하실지라도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불쌍히 여기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고의로 사람들의 자녀들을 괴롭게 하거나 슬프게 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라.](32-33). 징계와 슬픔은 당시에는 괴롭게 보여도 후에는 다 열매로 맺히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은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고의로 괴롭게 하거나 슬프게 하지 않습니다.
◎ 징계의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자신이 받아들이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시기 때문이라, 하셨으니](히12:6).
◎ 징계의 목적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진실로 그들은 잠시 자기들이 기뻐하는 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그분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하시나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히12:10).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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